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은 채 남들 하는 대로, 관습에 따라 지시받은 대로, 조직논리에 따라 성실하게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류 역사에 가득한 악의 실제였다. 흑인과 같은 화장실을 이용하면 병균에 감염된다고 진심으로 믿은 미국 남부의 숙녀들, 유대인을 가스실에 보내는 일이 맡은 바 행정절차일 뿐이라고 믿은 독일 공무원들, 미국 한 주보다도 작은 나라에서 호남 사람들은 다 뭐가 어떻고 저떻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킬킬대며 지껄이는 사람들, 여자의 ‘노‘는 ‘예스‘니까 남자가 좀 터프하게 밀어붙여야 된다고 믿는 남자들, 누군가에게는 좋은 부모고, 자식이고, 친구였을 평범한 사람들이 누군가에게는 악마였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지가 곧 악인 것이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라는 이경규의 말 들으며 웃을 수 없는 이유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타인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 무지는 공포와 혐오를 낳는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모든 언어가 소음으로만 들리고 그들의 존재 자체가 위협으로 느껴진다. 소음과 위협, 공포에 둘러싸여서 사는 것은 불행하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나면 의외로 타협하고 수용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나에게도 평화를 준다. 동시에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준다. 미디어의 발달로 그 어느 시대보다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의 목소리가 쏟아져나오는 지금은 더더욱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귀를 닫아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당장 크게 아쉬울 것이 없는 처지의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세상에 나 빼고는 다 정신 나간 사람들만 있는 것 같다.
정치, 젠더, 환경, 교육.…..… 거의 모든 이슈마다 양쪽 극단에서 가장 큰 소리들이 쏟아져나온다. 목소리가 크고 공격적인 이들이다. 중간에 있는 이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공격적이고, 유연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이고, 시끄럽지? 하지만 그 소음 속에는 귀기울여 들어야 할 진짜신호들이 있다. 그건 대부분 힘들어 죽겠어‘아파...... ‘억울해 ‘라는 비명이다.
성폭력을 겪은 이들이 어떻게 온건하고 예의바르게 성차별과 혐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알바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젊은이가 어떻게 최저임금 인상이 거시경제에 미칠 영향까지 걱정할 수 있을까.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노인이 어떻게 안보에 대해 지나칠 만큼 예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성난 눈으로 부모를 노려보는 아이가 진짜 하고 싶어하는 말을, 감기는 고통스럽지만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신호다. 열이 펄펄 끓는 것도 우리 몸이 열심히 병과 싸우고 있음을 알려준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죽어가는 것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여러갈등은 실은 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진통이다. 국론 분열이 사회를 살리기도 한다. 중간자들이 제 역할을 다한다면,
줄다리기는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아니라 중간에 맨 손수건이 약간 움직이는 것으로 승패가 결정된다. 중간에 있는 이들이 제자리에서 튼튼하게 버텨주지 않고 시늉만 하고 있으면 줄은 한쪽으로 확 끌려가고 만다. 중간자들은 성실한 독자여야 한다. 들어야 할 진짜 목소리를 듣고, 작은 한걸음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내디뎌야 한다.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이를 악물고 외쳐대는 욕설 때문에 이들을 비웃어서도 안 된다. 결국 가장 먼저 넘어져 뒹굴고 흙투성이가 될것은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중립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면, 그건 나의 현명함 때문이아니라 나의 안온한 기득권 때문임을. p192~195
그 과정에서 이미 세상은 많이 망가져버렸지만 그래도 일상은 또 시작된다. 이 낙관주의와 유머, 연민이야말로 오랫동안 살아남는 ‘이야기의 힘‘이 아닐까 싶다. 어린시절 읽던 그 많은 고전 명작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도여기에 있다. 그에 비하면 요즘의 소설들은 이야기의 힘‘ 자체보다는 다른 요소들에만 힘을 기울이는 것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때로는 작가가 독자를 이야기로 끌어들이려 하기보다 한사코밀어내려 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생경한 관념어와 뚝뚝 끊어지는 구조, 현란하기만 하고 피로감이 이는 미문 집착, 작가내면 독백의 과잉, 모호한 결말, 그리고 말미에는 평론가의 격찬, ‘일기는 일기장에 쓰세요……‘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작품들이 있다. - P118
그러다가 오랜만에 투박하지만 오래된 이야기의 맛을 느끼게 해준 소설이 위화의 인생』이다. 몇 페이지 읽자마자 작가의 능수능란한 이야기 솜씨와 능청맞은 문제에 정신을 빼앗겼다. 루쉰이 아큐정전 스타일로 펄 벅의 『대지를 다시 쓰면 이런 작품이 되지 않을까? 『대지』를 연상시키는 중국 현대사 격변기 민초의 이야기인데, 비극적인 이야기도 능청스러운 유머로, 능치며 시장통 이야기꾼의 옛날이야기같이 흘러간다. 소설 읽는 재미에 중독되었던 나의 소년 시절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인생은 잡다한 분칠 없이 『일리아드 오디세이』 『아라비안나이트, 『수호지』 등 소설의 원형에 가까운 이야기꾼의 구라(고급지게 말하면 구비문학) 같다. 복잡한 지하철에서 읽어도 금세 이야기에 몰입된다. 위화는 정말 세계 최고의 이야기꾼 중 하나인 듯싶다. 복잡한 구성 하나 없이 시골 노인의 느긋한 구라가 구비구비 이어지고, 또 그것이 꽤나 전형적이고익숙한 이야기인데, 독자를 완전히 몰입시켜 가지고 논다. 처음엔 시큰둥하게 읽기 시작했다가 27 페이지쯤(푸구이의 난봉꾼 도련님 시절 뚱뚱한 기생과 놀아나는 장면, 해학적인 판소리를연상시킨다)부터 이미 두 손 들고 영접 모드에 돌입했다. - P119
번번이 나오는 인물들에 정이 가게 만들고 턴턴이 죄 없는그들에게 너무나 가혹한 운명을 선사한다. 이건 뭐 왕좌의게임, 쓰는 조지 R. R. 마틴 영감 못지않다. 나중에는 해도 취도 너무해서 작위적이라는 느낌까지 든다. 그러나 또 한편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이라는 미친 바람이 몰아치던 시기 중국의 민초들이 격어야 했던 금찍한 고난을 퍼올려보면 현실이 더하면 더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날것으로는 도대체 읽기도 힘들었을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웃음과 눈물로 읽게 만든 힘 역시 낙관주의와 유머, 연민이다. 위화의 세 권짜리 소설 형제는 인생 과는 결이 다르다. 유머와 풍자는 있지만 그 이상은 없는 것 같아 여운은 덜하다. 그래도 정말 재미는 있다. 정말 더럽고 웃기고, 야하고 눈물 나고, 갈 데까지 가고도 더 가는 과잉의 끝이었다. 천명관의 고래를 행튀기 기계에 넣어 튀겨내면 형제 같은 괴물이 나올 듯하다. - P120
소설이란 게 원래 장터에서 구라군들이 입에 침 튀기며 온갖 개빵과 음담패설을 늘어놓던 것에서 출발한 것 아닌가. 오히려 요즘 한국소설이 너무 깔끔단정하게, 문학상 심사위원 취향에 맞게, 축소 지향적으로만가는 건 아닌지. 물론 우리 소설 중에도 천명관의 『고래』, 긴언수의 설계자들』, 김영하의 『검은 꽃』 등 기가 막힌 이야기군의 솜씨를 보여주는 작품도 많지만, 늘 아쉽다. 이 기막히게재미있는 이야기를 더 느릿느릿 장대하게 죽 써주면 안 되나싶어서, 길면 안 읽어서 그러나? 아, 원래 재밌는 소설은 기본이 세 권에서 한 열 권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 P121
누구에게나 결핍은 있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누리는 타인의 존재를 편하게 받아들일 만큼 수양이 된 사람은 많지 않다. 꼭 누구를 착취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부를 만끽하는 모습만 꼴 보기 싫은 게 아니다. 정당하게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자신의 성취를 누리는 당연한 자유가 누군가에게는 의도적인 과시로 비쳐 증오를 낳을 수도 있다. 그건 부조리하다고 생각했지만, 인간 세상은 원래 부조리하다. 논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 모든 것은 결국 연결되어있다. 나 홀로 관계로부터 단절되어 세상과 영향을 주고받지않고 사는 건 불가능하다. 관계의 촘촘한 거미줄 속에서 나는원하든 원치 않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받으며, 또는 도움을 주거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옛날 어느 선사는 산길을 걸을 때 꼭 지팡이로 땅을 쿵 내리치며 걸었다고 한다. 작은 동물들이나 벌레들이 미리 피하여 혹시나 자기에게 밟히는 해를 입지 않도록, 하지만 그가내리치는 지팡이, 걷는 발걸음 하나마다 땅속의 무수히 많은미물들이 밟혀 죽었을 것이고, 그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미생 - P127
물들이 입안으로 따라 들어갔을 것이다. 생명은 늘 다른 생명을 해치며 살아간다. 개인의 선의, 악의와 상관없이 말이다. 그렇다면 객관적으로 나의 잘못이 아닌데도 나로 인해 고통받는 타인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보다 강한 자가내 자유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상황이라면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런데 나보다 약자인 사람, 나보다 절박한 처지인 사람이 그렇게 나온다면? 그건 논리의 문제는 아니었다. 선택의 문제였다. 내 평소 사고방식대로라면 도서관에서 그 선배에게 유감이지만 이건 내 공부 방식일 뿐이라고 말하고 내 자리로 돌아갔어야 한다. 후배를 그런 식으로 불러낸 그 선배야말로 찌질한 짓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에는 그 선배의 표정이 너무나 절박해 보였다. 아무런 심적 여유도 없이 찌들 대로 찌들어 있었다. 내게는 여기가 아니어도 선택의 여지가 얼마든지 있었다. 내 선택은 잘못된 건 아니구나, 생각이 들었다. 기특한 생각이긴 한데, 지금 돌이켜보면 역시 『인간의 조건을 너무나 열심히 읽다보니 휴머니스트 주인공에 과하게몰입했던 것 같기도 하다. - P128
이 소설은 하루키 소설 중에서 유일무이한 이질적인 소설이다. 리얼리즘과 거리가 먼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커리어 초반에 작심하고 ‘나도 리얼리즘 이야기를 쓸 수 있어!‘ 하는 결심으로 써본 작품이기도 하고, 모든 작가가 평생 한 번씩은쓰게 되는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전적인 요소가 있는 이야기를 리얼하게 쓴다는 건 위험한 일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대체로 찌질하고 인생이란 누가반사판을 대주지 않기에 영화처럼 반짝반짝 빛나지 않는다. 범속하고 남루하고 지리할 때가 대부분이다. 자기 인생을 소설로 쓰면 대하소설 몇 개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혼자 생각일 뿐이다. 가끔 글에 자기 치부까지도 적나라하게 고백할수록 뭔가 대단한 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남이 길에서 똥 싸는 걸 진지하게 봐줄 의무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건 그냥 노출증이다. - P136
결국 자전적인 이야기라 하더라도 편집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상실의 시대도 물론 엄청나게 자기중심적으로 편집하고 부풀리고 반사판을 잔뜩 대서 미화한 이야기일 거다. 내가 하루키 대학 시절 친구가 아니어서 단언까지는 못하겠지만, 대체로 현실에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첫사랑 소녀가 푸른 초원을 같이 걷다가 자위 행위를 도와주겠다고 제안하는일도, 캠퍼스에서 마주친 통통 튀는 매력의 여대생이 포르노영화관에 데려가달라고 조르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성기가 엄청 단단하게 발기했다. 엄청난 양을 사정했다는 그야말로 TMI(굳이 알고 싶지 않은 과한 정보)에 해당하는 묘사가 반복되는 걸 보면 작가가 이 부분에 관한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건 아닐까 의심하게 되기도 한다. - P137
하루키는기사단장이 대체 무엇인지를 표현할 때 혼, 영령, 스피릿 등등 다른 말은 마땅치 않았는데 ‘이데아‘라는 말의 어감이 딱맞아떨어져서 썼을 뿐이라는 것이다. 메타포‘도 마찬가지다. 『양을 쫓는 모험」을 쓸 때에도 쓰다보니 갑자기 ‘앙사나이‘라는 괴상한 인물이 툭 튀어나와서 스스로 충격이었단다. 단적으로 그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쓰기 시작해서 마지막에는자기도 뭘 썼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세상에, 평생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하루키 소설을 읽어온 내게 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 속시원한 말인가. 하루키는 한 발 더 나아가서 머리로 해석할 수있는 건 글로 써봐야 별 의미가 없다. 쓰는 사람도 잘 몰라야그 막연하고 종합적인 이야기를 독자 역시 막연하고 종합적으로 받아들여주기 때문에 각자 나름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머리가 너무 좋은 사람이 쓴 소설은 구조가 빤히 들여다. 보여서 재미없다고 말한다. - P145
말하자면 그는 정물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가수면 상태에서 끝도 없이 지속되는 꿈을 화폭에 옮기는 것이다. 다만그 꿈을 옮기는 필치는 치열하고 꼼꼼하다. 그는 리얼리즘 문체를 철저하게 구사하며 비非리얼리즘 이야기를 펼치는 게 자신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문체를 사십 년간 가다듬고 또 가다듬는다는 것이다.
내가 왜 이 작가의 글을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는지에 대해 나 자신도 정확히 정리하지 못하고 있던 자신 없는 부분들을 작가 본인이 씩 웃으며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응, 나도 같은 생각이었어, 라고그리고 그건, 책을 읽으며 마주치게 되는 순간들 중 손에꼽을 정도로,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 P146
유시민 작가가 자신을 ‘지식 소매상‘ 이라고 규정하는데, 좋은 표현인 것 같다. 왜 소비자들이 직접 도매상, 심지어 공장까지 가서 자기한테 맞지도 않는 물건을 폐와야 하나? 내 아이 밥상에 맛있는 고기 한 점을 올리기 위해 직접 도축장에서고기를 해체해야 되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원전목록이 아니라 그중 필요한 것들을 알기 쉽게, 하지만 왜곡하지 않으면서 성실하게 설명해주는 지식 소매상들의 목록이다. 소매상일수록 사기꾼도 많기 때문에 잘 골라야 하고, 시장의 자정 능력도 필요하긴 하다. 그렇다고 소매상은 미덥지 않으니 소비자들이 직접 원산지를 찾아가야 한다는 건 무리한이야기다. - P169
자극적인 기사 몇 줄만 읽고 바로 화르르 불타올라 십자군전쟁에라도 나선 기사가 된 양 개인 신상을 털고 집단 다구리‘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미래가 두려워질 뿐이다. 하긴 십자군전쟁도 대중의열정을 악용한 사기에 가까웠으니 인간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집단지성‘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남용하는 이들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다시 한번 읽어볼 필요가있다. 나치 시대의 성실하고 평범한 독일인들에게 과연 집단지성이 발동했나? 개인이든 집단이든 지성적으로 사고하려노력하지 않으면 야만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의 직접민주주의란 공포일 뿐이다. 이야기가 좀 거창해졌지만, 여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충일감에도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하루종일 터브이를 본 날, 하루종일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 날, 하루종일 책을 읽은 날의 느낌은 다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책의 우선순위를 높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하루의 시작인 출근길에 단 십 분이라도 책을 읽으려 하고, 내 주변 어디든 책을 흩어놓기도 한다. - P176
글재주 좀 있는 자들이 거짓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걸 읽으라는 얘기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보면 구차한자기 포장들도 있지만, 이건 진짜구나, 싶은 이야기들도 있다. 신기하게도 어떤 거창하고 화려한 이야기보다 그런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시시하고 소박한 이야기더라도말이다. 글이란 뛰어난 문장만으로 얼마든지 써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좋은 글은 결국 삶 속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문장 하나하나가 비슷하게 뛰어나더라도 어떤 글은 공허하고, 어떤 글은 마음을 움직인다. 그렇다고 ‘좋은 글을 쓰려면 우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삶은 글보다 훨씬 크다. 열심히 살든 되는대로 살든 인간은 어떻게든 각자 살아야 한다. 되는대로 살 때 더 좋은 글이 나오기도 한다. 그저 솔직히 자기 얘기를 계속 쓰는 것 정도가 글쓰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그중 어떤 얘기는 좋은 글이 될 것이고 어떤 얘기는 시시한 글이 될 것이다. 그건 쓰는 이가 의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 P184
간접경험은 당연히 직접경험만큼의 깊이는 없다.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깊이 이해해본 적이 있다고 감히말할 수 없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은 남들의 삶을읽기라도 함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며 살아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공감이 기존의 세계를 부숴버릴 듯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순간들이 있다. 고등학생 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넘어』라는 책을 읽었던 순간, 1980년 광주에서 이른바 국가가 시민들에게 어떤 일을 행하였는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지금, 여기가 아닌 먼 곳들에 대한 이야기만 읽어왔었다. 먼 옛날에 이미 시민혁명이 이루어졌고,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말이다. 교과서에서도 그게 인류 역사라고 배웠다. 그래서난 그게 ‘상식‘인 줄 알았다. 그 모든 믿음이 한순간에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은,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난 그래서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권한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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