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은빛 무늬든
하늘의 수놓은 융단이
밤과 낮과 어스름의
푸르고 침침하고 
검은 유단이 내게 있다면
그대의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나 가난하여 오직 꿈만을 가졌기에
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았으니
사뿐히 걸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W. B. 예이츠, 하늘의 융단 p41



판사 문유석이 아닌, 책 덕후의 성공한 독서 이야기다. 딱 내 스타일로 유쾌하고 쉽게 풀어 놓으면서 사법 현실의 여러 문제들도 건드린다. ‘내로남불‘이 아닌 성찰이 돋보이는. 책의 많은 부분, 공감이었다.


미래는 결국 우리가 공유하는 이야기다. 자기실현적인 예언이다. 다수가 공유하는 이야기는 힘이 세다. 그것이 곧 법이되고, 도덕이 되고, 가치가 된다. 빅데이터를 이용한 인공지능발전도 인간들의 무수한 행동과 사고방식을 패턴화해 모방하는 데서 출발한다. 미래를 바꾸는 방법은 현재의 사회부터 바꾸는 것이다. 미래의 사회가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쓸모가 없어진 인간을 어떻게 대우할지 궁금하면 지금 이 사회가 탑골공원에 앉아 있는 노인과 편의점 알바 청년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면 된다. 미래의 눈부신 과학 발전이 낳을 부가 어떤 방식으로 분배될지 궁금하면 지금 사회의 분배 구조를 보면 된다. 더 먼 미래에 인공지능 또는 그와 결합한 신인류가평범한 인간들을 어떻게 취급할지 궁금하면 지금 사회가 소수자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보면 된다. 미래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다. 지금, 여기서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는지에 따라.
- P229

상당 구간에서 앉아 갈 수 있게 되자 매일 책을 들고 다니며 읽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전철은 도서관이 되었고, 통근길은 견뎌야 하는 고통이 아니라 끝나가는 것이 아쉬운 즐거움이 되었다.
사람 심리라는 것이 참 묘하다. 한가한 휴일에 집에서 뒹굴거릴 때는 등허리는 소파와, 손은 리모컨과 합체하는 폐인이되는 주제에, 통근길 전철에서는 세상 다시없는 독서광으로변신한다. 주변이 시끄러울수록 더더욱 책에 몰입하게 된다.
통근길 전철은 책이 유일한 도피 수단이던 소년기로 잠시 데려다주는 타임머신이었다.
하루 세 시간에 가까운 독서 시간이 강제로 확보되자 참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언급한 책들중 대부분이 전철에 앉아 흔들거리며 읽은 것들이다. 그 외에도 엘리자베스 워런 미 상원의원의 자서전 『싸울 기회, 경제학계 두 거목의 일대기 『케인스 하이에크, 심지어 900이넘는 벽돌책 『빈 서판까지 전철에 앉아 읽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 P249

통근길 전철에서 책 읽기는 독서 시간 확보 외에도 장점이있었다. 각인 효과‘다. 오리 새끼가 갓 태어나서 사람을 보면엄마인 줄 알고 따라다니는 각인 효과처럼, 출근할 때 지하철에서 단 십 분이라도 책 읽기를 하면 뇌의 모드 설정이 그쪽으로 이루어지는지 자연스럽게 계속하게 되더라. 출근 때 책을 보면 퇴근 때도 보게 되고, 이어서 밤에도 뒤가 궁금해서라도 보게 되고, 반면 출근 때 페북질을 시작하면 ..
이때의 좋은 기억 때문에 읽든 못 읽든 책을 들고 출근길에나서려고 한다. 하루의 시작을 책과 함께한다는 것은 충실한하루를 여는 좋은 방법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객차 안을 둘러보아도 책을 들고 있는 이는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모든 이들이 똑같이 고개를 숙이고 뭔가 엄청난 보물이라도 들어 있는 양 일제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풍경은 사실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좀 무서운 모습이다. 사이비종교 의식 같기도하고, 외계인이 전파로 사람들을 세뇌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 P250

습관이 행복해야 행복하다는 말이 좋았던 이유는 폭넓게생각을 확장해갈 수 있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시민들이 행복한 습관을 누릴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해야한다. 한강시민공원에서 걷고, 자전거를 타고, 연을 날리고,
낚시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라. 공원과 도서관은 행복 공장이자 행복 고속도로다. 교육도 중요하다. 책을읽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고, 요리를 하고, 다양한 운동을 즐기고, 어린 시절부터 각자의 행복한 습관을 찾을 수 있도록 경험을 제공하는 교육이 영재교육 이상으로 중요하다.
개인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다. 남들의 기준이 아니라 솔직한 자신의 기준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들을 찾아야 한다.
- P253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야기하는 교수님을 보며 든 두 가지 생각. ‘아, 아름답다‘ 그리고, 아, 그런데 쓸데없다. 깨달음의순간이었다. 인문학의 아름다움은 이 무용함에 있는 것이아닐까. 꼭 어디 써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궁금하니까 그걸 밝히기 위해 평생을 바칠 수도 있는 거다. 물론 구법승 생환율을 토대로 당시의 풍토, 지리, 정세에 관한 연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꼭 그런 용도로 연구를 시작하신 것같진 않았기에 든 생각이다. 실용성의 강박 없이 순수한 지적호기심만으로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학문의 기본 아닐까. 그 결과물이 활용되는 것은 우연한 부산물일 뿐이고, 수학자들은 그 자체로는 어디에 쓸 일 없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기 위해 350여 년간 몰두했다. 그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많은 수학 이론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 P258

대학 갈 때 써먹을 욕심에 논술학원 보내서 초등학생에게어려운 책을 읽히고 있는 학부모들께 죄송하지만, 눈을 감고생각해보면 입시 때문에 마지못해 본 책은 한 줄도 기억나지않는다. 수업시간에 몰래 보던 소설책, 자율학습 땡땡이치고,
보러 간 에로 영화는 방금 본 듯 생생하다. 글쓰기를 좋아하여 책까지 내게 된 건 그 때문일 거다. 쓸데없이 노는 시간의축적이 뒤늦게 화학 작용을 일으키곤 하는 것이다.
현재 쓸모 있어 보이는 몇 가지에만 올인하는 강박증이야말로 진정 쓸데없는 짓이다. 세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것들이필요하고 미래에 무엇이 어떻게 쓸모 있을지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무엇이든 그게 진짜로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을 당할 도리가 없다.
- P259

나에게 책이란

운동신경 제로의 꼬마에게 방구석에서
허풍선이 남작과 가르강튀아를 따라
대모험을 떠나게 해주던 날개.
부잣집 도련님 친구의 천장까지 가득찬 서가 앞에서
남의 인생을 빼앗고 싶은 리플리의 심정을 느끼게 하던 동경
세로글씨의 누렇게 바랜 책장을 넘기며,
제갈량, 양산박 호걸, 오다 노부나가, 사이토 도산을만나러 가게 해주던 타임머신
맹수의 포효에 몸을 떨며 비니키우스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작은 새 같은 리기아를 보며 조숙하게 찾아온 사춘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중 나는 어느 쪽 인간일까
고민하게 하던 중2병앓이.
대학 문에 들어선 후 접한, 암호 같은 줄임말로 불리던
- P260

모피어스의 빨간악들,
하지만 어느 이즘보다 먹고사니즘이 중하기에
억지로 머리에 쑤셔 넣어야 하던 지식의 파편들.
밥벌이는 하면서도 변하는 세상의 가속도를 감히 따라잡아보려
번지르르한 실용적 지식만 찾아 헤맨 어리석음의 증거들.
뒤늦게 아무 써먹을 데 없어도 가슴을 설레게 하던
옛 기억을 떠올려 재회하는 고전이라는 이름의 첫사랑들
하지만 속절없이 아는 형님> <왕좌의 게임) 다시보기와
카톡방, 페북에 넘쳐나는 석 줄짜리 언어들에뒷전으로 밀리곤 하는 퇴기.

언제나 사랑했고,
언제나 쉽게 버렸던 친구.

널 읽고 싶어,
마지막 장까지.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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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은 채 남들 하는 대로, 관습에 따라 지시받은 대로, 조직논리에 따라 성실하게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류 역사에 가득한 악의 실제였다. 흑인과 같은 화장실을 이용하면 병균에 감염된다고 진심으로 믿은 미국 남부의 숙녀들, 유대인을 가스실에 보내는 일이 맡은 바 행정절차일 뿐이라고 믿은 독일 공무원들, 미국 한 주보다도 작은 나라에서 호남 사람들은 다 뭐가 어떻고 저떻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킬킬대며 지껄이는 사람들, 여자의 ‘노‘는 ‘예스‘니까 남자가 좀 터프하게 밀어붙여야 된다고 믿는 남자들, 누군가에게는 좋은 부모고, 자식이고, 친구였을 평범한 사람들이 누군가에게는 악마였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지가 곧 악인 것이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라는 이경규의 말 들으며 웃을 수 없는 이유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타인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 무지는 공포와 혐오를 낳는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모든 언어가 소음으로만 들리고 그들의 존재 자체가 위협으로 느껴진다. 소음과 위협, 공포에 둘러싸여서 사는 것은 불행하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나면 의외로 타협하고 수용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나에게도 평화를 준다. 동시에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준다. 미디어의 발달로 그 어느 시대보다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의 목소리가 쏟아져나오는 지금은 더더욱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귀를 닫아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당장 크게 아쉬울 것이 없는 처지의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세상에 나 빼고는 다 정신 나간 사람들만 있는 것 같다.
정치, 젠더, 환경, 교육.…..… 거의 모든 이슈마다 양쪽 극단에서 가장 큰 소리들이 쏟아져나온다. 목소리가 크고 공격적인 이들이다. 중간에 있는 이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공격적이고, 유연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이고, 시끄럽지? 하지만 그 소음 속에는 귀기울여 들어야 할 진짜신호들이 있다. 그건 대부분 힘들어 죽겠어‘아파...... ‘억울해 ‘라는 비명이다.
성폭력을 겪은 이들이 어떻게 온건하고 예의바르게 성차별과 혐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알바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젊은이가 어떻게 최저임금 인상이 거시경제에 미칠 영향까지 걱정할 수 있을까.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노인이 어떻게 안보에 대해 지나칠 만큼 예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성난 눈으로 부모를 노려보는 아이가 진짜 하고 싶어하는 말을, 감기는 고통스럽지만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신호다. 열이 펄펄 끓는 것도 우리 몸이 열심히 병과 싸우고 있음을 알려준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죽어가는 것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여러갈등은 실은 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진통이다. 국론 분열이 사회를 살리기도 한다. 중간자들이 제 역할을 다한다면,
줄다리기는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아니라 중간에 맨 손수건이 약간 움직이는 것으로 승패가 결정된다. 중간에 있는 이들이 제자리에서 튼튼하게 버텨주지 않고 시늉만 하고 있으면 줄은 한쪽으로 확 끌려가고 만다. 중간자들은 성실한 독자여야 한다. 들어야 할 진짜 목소리를 듣고, 작은 한걸음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내디뎌야 한다.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이를 악물고 외쳐대는 욕설 때문에 이들을 비웃어서도 안 된다. 결국 가장 먼저 넘어져 뒹굴고 흙투성이가 될것은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중립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면, 그건 나의 현명함 때문이아니라 나의 안온한 기득권 때문임을. p192~195



그 과정에서 이미 세상은 많이 망가져버렸지만 그래도 일상은 또 시작된다. 이 낙관주의와 유머, 연민이야말로 오랫동안 살아남는 ‘이야기의 힘‘이 아닐까 싶다. 어린시절 읽던 그 많은 고전 명작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도여기에 있다.
그에 비하면 요즘의 소설들은 이야기의 힘‘ 자체보다는 다른 요소들에만 힘을 기울이는 것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때로는 작가가 독자를 이야기로 끌어들이려 하기보다 한사코밀어내려 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생경한 관념어와 뚝뚝 끊어지는 구조, 현란하기만 하고 피로감이 이는 미문 집착, 작가내면 독백의 과잉, 모호한 결말, 그리고 말미에는 평론가의 격찬, ‘일기는 일기장에 쓰세요……‘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작품들이 있다.
- P118

그러다가 오랜만에 투박하지만 오래된 이야기의 맛을 느끼게 해준 소설이 위화의 인생』이다. 몇 페이지 읽자마자 작가의 능수능란한 이야기 솜씨와 능청맞은 문제에 정신을 빼앗겼다. 루쉰이 아큐정전 스타일로 펄 벅의 『대지를 다시 쓰면 이런 작품이 되지 않을까? 『대지』를 연상시키는 중국 현대사 격변기 민초의 이야기인데, 비극적인 이야기도 능청스러운 유머로, 능치며 시장통 이야기꾼의 옛날이야기같이 흘러간다. 소설 읽는 재미에 중독되었던 나의 소년 시절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인생은 잡다한 분칠 없이 『일리아드 오디세이』 『아라비안나이트, 『수호지』 등 소설의 원형에 가까운 이야기꾼의 구라(고급지게 말하면 구비문학) 같다. 복잡한 지하철에서 읽어도 금세 이야기에 몰입된다. 위화는 정말 세계 최고의 이야기꾼 중 하나인 듯싶다. 복잡한 구성 하나 없이 시골 노인의 느긋한 구라가 구비구비 이어지고, 또 그것이 꽤나 전형적이고익숙한 이야기인데, 독자를 완전히 몰입시켜 가지고 논다. 처음엔 시큰둥하게 읽기 시작했다가 27 페이지쯤(푸구이의 난봉꾼 도련님 시절 뚱뚱한 기생과 놀아나는 장면, 해학적인 판소리를연상시킨다)부터 이미 두 손 들고 영접 모드에 돌입했다.
- P119

번번이 나오는 인물들에 정이 가게 만들고 턴턴이 죄 없는그들에게 너무나 가혹한 운명을 선사한다. 이건 뭐 왕좌의게임, 쓰는 조지 R. R. 마틴 영감 못지않다. 나중에는 해도 취도 너무해서 작위적이라는 느낌까지 든다. 그러나 또 한편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이라는 미친 바람이 몰아치던 시기 중국의 민초들이 격어야 했던 금찍한 고난을 퍼올려보면 현실이 더하면 더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날것으로는 도대체 읽기도 힘들었을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웃음과 눈물로 읽게 만든 힘 역시 낙관주의와 유머, 연민이다.
위화의 세 권짜리 소설 형제는 인생 과는 결이 다르다.
유머와 풍자는 있지만 그 이상은 없는 것 같아 여운은 덜하다. 그래도 정말 재미는 있다. 정말 더럽고 웃기고, 야하고 눈물 나고, 갈 데까지 가고도 더 가는 과잉의 끝이었다. 천명관의 고래를 행튀기 기계에 넣어 튀겨내면 형제 같은 괴물이 나올 듯하다.  - P120

소설이란 게 원래 장터에서 구라군들이 입에 침 튀기며 온갖 개빵과 음담패설을 늘어놓던 것에서 출발한 것 아닌가. 오히려 요즘 한국소설이 너무 깔끔단정하게, 문학상 심사위원 취향에 맞게, 축소 지향적으로만가는 건 아닌지. 물론 우리 소설 중에도 천명관의 『고래』, 긴언수의 설계자들』, 김영하의 『검은 꽃』 등 기가 막힌 이야기군의 솜씨를 보여주는 작품도 많지만, 늘 아쉽다. 이 기막히게재미있는 이야기를 더 느릿느릿 장대하게 죽 써주면 안 되나싶어서, 길면 안 읽어서 그러나? 아, 원래 재밌는 소설은 기본이 세 권에서 한 열 권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 P121

누구에게나 결핍은 있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누리는 타인의 존재를 편하게 받아들일 만큼 수양이 된 사람은 많지 않다. 꼭 누구를 착취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부를 만끽하는 모습만 꼴 보기 싫은 게 아니다. 정당하게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자신의 성취를 누리는 당연한 자유가 누군가에게는 의도적인 과시로 비쳐 증오를 낳을 수도 있다.
그건 부조리하다고 생각했지만, 인간 세상은 원래 부조리하다. 논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 모든 것은 결국 연결되어있다. 나 홀로 관계로부터 단절되어 세상과 영향을 주고받지않고 사는 건 불가능하다. 관계의 촘촘한 거미줄 속에서 나는원하든 원치 않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받으며,
또는 도움을 주거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옛날 어느 선사는 산길을 걸을 때 꼭 지팡이로 땅을 쿵 내리치며 걸었다고 한다. 작은 동물들이나 벌레들이 미리 피하여 혹시나 자기에게 밟히는 해를 입지 않도록, 하지만 그가내리치는 지팡이, 걷는 발걸음 하나마다 땅속의 무수히 많은미물들이 밟혀 죽었을 것이고, 그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미생 - P127

물들이 입안으로 따라 들어갔을 것이다. 생명은 늘 다른 생명을 해치며 살아간다. 개인의 선의, 악의와 상관없이 말이다.
그렇다면 객관적으로 나의 잘못이 아닌데도 나로 인해 고통받는 타인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보다 강한 자가내 자유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상황이라면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런데 나보다 약자인 사람, 나보다 절박한 처지인 사람이 그렇게 나온다면? 그건 논리의 문제는 아니었다. 선택의 문제였다. 내 평소 사고방식대로라면 도서관에서 그 선배에게 유감이지만 이건 내 공부 방식일 뿐이라고 말하고 내 자리로 돌아갔어야 한다. 후배를 그런 식으로 불러낸 그 선배야말로 찌질한 짓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에는 그 선배의 표정이 너무나 절박해 보였다. 아무런 심적 여유도 없이 찌들 대로 찌들어 있었다. 내게는 여기가 아니어도 선택의 여지가 얼마든지 있었다. 내 선택은 잘못된 건 아니구나, 생각이 들었다. 기특한 생각이긴 한데, 지금 돌이켜보면 역시 『인간의 조건을 너무나 열심히 읽다보니 휴머니스트 주인공에 과하게몰입했던 것 같기도 하다.
- P128

이 소설은 하루키 소설 중에서 유일무이한 이질적인 소설이다. 리얼리즘과 거리가 먼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커리어 초반에 작심하고 ‘나도 리얼리즘 이야기를 쓸 수 있어!‘ 하는 결심으로 써본 작품이기도 하고, 모든 작가가 평생 한 번씩은쓰게 되는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전적인 요소가 있는 이야기를 리얼하게 쓴다는 건 위험한 일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대체로 찌질하고 인생이란 누가반사판을 대주지 않기에 영화처럼 반짝반짝 빛나지 않는다.
범속하고 남루하고 지리할 때가 대부분이다. 자기 인생을 소설로 쓰면 대하소설 몇 개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혼자 생각일 뿐이다. 가끔 글에 자기 치부까지도 적나라하게 고백할수록 뭔가 대단한 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남이 길에서 똥 싸는 걸 진지하게 봐줄 의무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건 그냥 노출증이다.  - P136

결국 자전적인 이야기라 하더라도 편집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상실의 시대도 물론 엄청나게 자기중심적으로 편집하고 부풀리고 반사판을 잔뜩 대서 미화한 이야기일 거다.
내가 하루키 대학 시절 친구가 아니어서 단언까지는 못하겠지만, 대체로 현실에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첫사랑 소녀가 푸른 초원을 같이 걷다가 자위 행위를 도와주겠다고 제안하는일도, 캠퍼스에서 마주친 통통 튀는 매력의 여대생이 포르노영화관에 데려가달라고 조르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성기가 엄청 단단하게 발기했다. 엄청난 양을 사정했다는 그야말로 TMI(굳이 알고 싶지 않은 과한 정보)에 해당하는 묘사가 반복되는 걸 보면 작가가 이 부분에 관한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건 아닐까 의심하게 되기도 한다. - P137

하루키는기사단장이 대체 무엇인지를 표현할 때 혼, 영령, 스피릿 등등 다른 말은 마땅치 않았는데 ‘이데아‘라는 말의 어감이 딱맞아떨어져서 썼을 뿐이라는 것이다. 메타포‘도 마찬가지다.
『양을 쫓는 모험」을 쓸 때에도 쓰다보니 갑자기 ‘앙사나이‘라는 괴상한 인물이 툭 튀어나와서 스스로 충격이었단다. 단적으로 그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쓰기 시작해서 마지막에는자기도 뭘 썼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세상에, 평생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하루키 소설을 읽어온 내게 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 속시원한 말인가. 하루키는 한 발 더 나아가서 머리로 해석할 수있는 건 글로 써봐야 별 의미가 없다. 쓰는 사람도 잘 몰라야그 막연하고 종합적인 이야기를 독자 역시 막연하고 종합적으로 받아들여주기 때문에 각자 나름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머리가 너무 좋은 사람이 쓴 소설은 구조가 빤히 들여다.
보여서 재미없다고 말한다.
- P145

말하자면 그는 정물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가수면 상태에서 끝도 없이 지속되는 꿈을 화폭에 옮기는 것이다. 다만그 꿈을 옮기는 필치는 치열하고 꼼꼼하다. 그는 리얼리즘 문체를 철저하게 구사하며 비非리얼리즘 이야기를 펼치는 게 자신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문체를 사십 년간 가다듬고 또 가다듬는다는 것이다.

내가 왜 이 작가의 글을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는지에 대해 나 자신도 정확히 정리하지 못하고 있던 자신 없는 부분들을 작가 본인이 씩 웃으며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응, 나도 같은 생각이었어, 라고그리고 그건, 책을 읽으며 마주치게 되는 순간들 중 손에꼽을 정도로,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 P146

유시민 작가가 자신을 ‘지식 소매상‘ 이라고 규정하는데, 좋은 표현인 것 같다. 왜 소비자들이 직접 도매상, 심지어 공장까지 가서 자기한테 맞지도 않는 물건을 폐와야 하나? 내 아이 밥상에 맛있는 고기 한 점을 올리기 위해 직접 도축장에서고기를 해체해야 되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원전목록이 아니라 그중 필요한 것들을 알기 쉽게, 하지만 왜곡하지 않으면서 성실하게 설명해주는 지식 소매상들의 목록이다. 소매상일수록 사기꾼도 많기 때문에 잘 골라야 하고, 시장의 자정 능력도 필요하긴 하다. 그렇다고 소매상은 미덥지 않으니 소비자들이 직접 원산지를 찾아가야 한다는 건 무리한이야기다.
- P169

자극적인 기사 몇 줄만 읽고 바로 화르르 불타올라 십자군전쟁에라도 나선 기사가 된 양 개인 신상을 털고 집단 다구리‘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미래가 두려워질 뿐이다. 하긴 십자군전쟁도 대중의열정을 악용한 사기에 가까웠으니 인간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집단지성‘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남용하는 이들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다시 한번 읽어볼 필요가있다. 나치 시대의 성실하고 평범한 독일인들에게 과연 집단지성이 발동했나? 개인이든 집단이든 지성적으로 사고하려노력하지 않으면 야만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의 직접민주주의란 공포일 뿐이다.
이야기가 좀 거창해졌지만, 여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충일감에도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하루종일 터브이를 본 날, 하루종일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 날,
하루종일 책을 읽은 날의 느낌은 다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책의 우선순위를 높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하루의 시작인 출근길에 단 십 분이라도 책을 읽으려 하고, 내 주변 어디든 책을 흩어놓기도 한다.  - P176

글재주 좀 있는 자들이 거짓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걸 읽으라는 얘기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보면 구차한자기 포장들도 있지만, 이건 진짜구나, 싶은 이야기들도 있다. 신기하게도 어떤 거창하고 화려한 이야기보다 그런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시시하고 소박한 이야기더라도말이다. 글이란 뛰어난 문장만으로 얼마든지 써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좋은 글은 결국 삶 속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문장 하나하나가 비슷하게 뛰어나더라도 어떤 글은 공허하고, 어떤 글은 마음을 움직인다.
그렇다고 ‘좋은 글을 쓰려면 우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삶은 글보다 훨씬 크다. 열심히 살든 되는대로 살든 인간은 어떻게든 각자 살아야 한다. 되는대로 살 때 더 좋은 글이 나오기도 한다. 그저 솔직히 자기 얘기를 계속 쓰는 것 정도가 글쓰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그중 어떤 얘기는 좋은 글이 될 것이고 어떤 얘기는 시시한 글이 될 것이다. 그건 쓰는 이가 의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 P184

간접경험은 당연히 직접경험만큼의 깊이는 없다.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깊이 이해해본 적이 있다고 감히말할 수 없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은 남들의 삶을읽기라도 함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며 살아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공감이 기존의 세계를 부숴버릴 듯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순간들이 있다. 고등학생 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넘어』라는 책을 읽었던 순간, 1980년 광주에서 이른바 국가가 시민들에게 어떤 일을 행하였는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지금, 여기가 아닌 먼 곳들에 대한 이야기만 읽어왔었다. 먼 옛날에 이미 시민혁명이 이루어졌고,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말이다. 교과서에서도 그게 인류 역사라고 배웠다. 그래서난 그게 ‘상식‘인 줄 알았다. 그 모든 믿음이 한순간에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은,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난 그래서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권한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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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언제나 수다 떨고 싶어지는 주제다. 책과 여행, 이 두가지에 관해서라면 나는 언제 어디서든 숨도 안 쉬고 몇 시간 떠들고 싶어진다. 하지만 슬프게도 내게 들어오는 책 기획안의 대부분은 내 직업과 관련된 엄숙한 책 아니면 이렇게 살라, 저렇게 살라고 충고하는 책들이었다. 나 자신이 즐겨 읽지않는 종류의 책을 써서 남들에게 권하고 싶진 않았다(참고로수많은 기획안 중에서 ‘쾌락독서‘ 이외에 유일하게 마음이 흔들렸던 것은 ‘걸그룹‘에 대해 써달라는 제안이었다). 물론 그동안 썼던 책들은 분명 사회에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의무감, 또는 세금 내는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 채 마음 한구석에 무거움을 안고 썼던 것도 사실이다. 이 책만큼은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내 즐거움을 위해 쓴다. 언제나 내게 책이란 즐거운 놀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심심해서 재미로읽었고, 재미없으면 망설이지 않고 덮어버렸다.  - P10

먼저 얘기해둘 것이 있다. 내 독서 취향은 그리 특별하지않다. 난 항상 그 시기에 누구나 좋아했던 뻔한 책들을 좋아했다. 남들이 아다치 미츠루 만화를 열심히 볼 때 나도 그랬고, 남들이 하루키에 열광할 때 나도 그랬고, 남들이 김용 무협소설에 대해 침 튀기며 얘기할 때 나도 그랬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사람들을 실망시킬 때도 있었다.
첫 책을 내고 북토크를 했을 때의 일이다. 대학 때 즐겨 읽었던 책이 뭐냐고 눈이 초롱초롱한 여학생이 묻길래 『토지』나 『태백산맥』 같은 대하소설들을 즐겨 읽었다고 대답했다.
순간 감추지 못한 실망의 탄식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한번은 ‘작가의 책‘이라는 릴레이 인터뷰에서 어릴 적 가장좋아했던 책을 묻길래 『삼국지와 만화 『유리가면을 얘기했는데 0.5초 정도 정적이 흐르더라. 이런 반응을 접할 때면 괜히 살짝 미안해지기도 한다.  - P11

책에 관한 최초의 강렬한 기억은 책이 가득 꽂힌 친구의 책꽂이다. 초등학교(정확히 말하자면 ‘국민학교‘ 였지만 역시 ‘국민학교‘라는 말은 별로다) 1학년 때였다.
서울역 뒷동네에서 보기 드물게 부유했던 그 친구의 방에는천장에 닿을 듯 방 한쪽 면 전체에 차곡차곡 책이 꽂혀 있었다. 거의 모두가 ‘세계명작전집 위인전기 ‘과학백과사전‘ 같은 전집류였다. 책들은 모두 깨끗했다. 인간 세상이 언제나 그렇듯 행운은 그걸 그리 절실하게 원치 않는 이에게 편중되게주어지곤 한다. 친구는 그다지 책을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친구의 어머니는 ‘책을 좋아하는 어린 아들을 소망했다.
- P19

그런데 항상 예외는 있다. 엉터리 번역에 어린이용으로 읽어도 『녹색의 장원의 신비로운 소녀 리마는 가슴을 설레게만들었고(상대를 신비화하는 연애물은 의외로 아주 어릴 때부터 먹힌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대단했고(사람이 죽어나가는 파란만장한 연애물은 대단해 보이기 마련이다), 뒤마의『몬테크리스토 백작은 흥미진진했다(치정복수극은 언제나 먹힌다). 『소공녀』 『소공자』가 그리 재미있었던 걸 보면 화려한부자들 세상에 대한 동경 및 빈부·계급 격차로 인한 울컥함이라는 양가감정은 어리나 늙으나 비슷하다.
이런 걸 보면 왜 주말 드라마가 다루는 이야기들이 늘 비슷비슷한지 알 수 있고, 동시에 왜 서사가 강한 대중문학, 장르문학이 인기가 높은지도 알 수 있다. 어린이도 좋아하는 이야기 구조라는 건 결국 누구나 좋아하는 이야기 구조라는 말이기도 할 테니까.
- P23

인간 세상이 언제나 그렇듯 내가 절실하게 선망했던 것이라 하여 누구에게나 같은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다. 이중 무엇무엇이 특히 재미있다고 골라서 따로 뽑아놓기까지 해보았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아이들의 손길을 받아본 책은 제인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전부였다 (역시 로맨스물, 그것도 빈부 격차를 배경으로 한 것의 위력이란).
내 독서에 대해서는 철저한 자유주의자인 주제에 애들 독서에 대해서는 그래도 뭔가 ‘제대로 된 책‘을 좀 읽어주었으면 하는 걱정을 하던 나는 아이들이 열심히 읽어대던 『헝거게임 등을 가져다 읽어보면서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 그 유명한 ‘고전 명작들에서 읽었던 것들이 거기에도 어딘가에 다 있었다. 우정, 유머, 용기, 사랑, 희생, 무엇보다 ‘이야기의 힘‘,
- P25

이 세 장면에 왜 소년 시절의 내가 그리도 매료되었는지 알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지만, 지금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면그저 삶을 바라보는 어떤 한 태도에 본능적으로 매력을 느겼었던 것 같다.
집착하지 않고, 가장 격렬한 순간에도 자신을 객관화할 수있고, 놓아야 할 때에는 홀연히 놓아버릴 수 있는, 삶에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는 그런 태도랄까. 그렇다고 아무런 열망도 감정도 없이 죽어 있는 심장도 아닌데 그 뜨거움을 스스로갈무리할 줄 아는 사람, 상처받기 싫어서 애써 강한 척하는것이 아니라, 원래 삶이란 내 손에 잡히지 않은 채 잠시 스쳐가는 것들로 이루어졌지만 그래도 순간순간 눈부시게 반짝인다는 것을 알기에 너그러워질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주 드물다는 건 어린 시절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동경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어릴 때부터 어떤 결핍도 없이 세상이 모두 나를 위한 커다란 선물 상자 같기만 했던  - P37

내 경우 책 고르기에도 ‘짜샤이 이론‘이 통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 권의 책이 갖고 있는 많은 요소 중에서 나는 유독문체에 좌우되는 편이다. 문장이 내 취향인 글은 내용이 아무리 시시해도 술술 읽게 된다. 반대의 경우 아무리 내용이 훌금해도 결국 견디지 못하고 덮는다. 방금도 책 두 권을 폈다.
가 5분 만에 둘 다 덮었다. 하나는 너무 거창한 관념어가 빽빽하게 들어찬 포르테 범벅의 글, 또하나는 너무나 뻔하고 익숙한 언어의 반복이라 특별함이라곤 한구석도 없는 글.
- P53

전체적인 작품의 주제나 시대적 배경, 역사 등보다 마음에 드는 캐릭터에만 집중해서 소설을 읽는 내 습성은 박경리의 ‘토지를 읽을 때도 계속되었다. 당연히 고양잇과 캐릭터의 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주인공 최서희에 매료되어 읽기 시작했고, 후반부에는 그의 아들들인 환국, 윤국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읽었다. 심지어 후반부에 와서는관심 없는 부분은 휙휙 넘겨버리면시 보고 싶은 부분만 찾아읽기도 했다.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이 대하소설에서 나는일종의 멜로드라마적인 재미가 있는 부분만 집중적으로 읽은것이다. 그래도 분명히 읽을 때는 그 무수하게 많은 인물들의기구한 삶과 비극적인 시대에 저항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감동도 하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나는 건 최씨 일가를 중심으로 한 몇 가지 두루뭉술한 에피소드뿐이다.
이쯤 되니 독서를 주제로 책을 쓰기 시작한 나 자신이 무모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도대체 『책은 도끼다. 같은 책은 어떻게 쓰는 걸까? 어떻게 그렇게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해폭포수 쏟아지듯 감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  - P83

결국 이야기란 각자의 욕망과 감정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접했던 그 수많은 이야기의 주어는 대부분남성에 편중되어 있었다. 여성 작가가 쓴 『제인 에어 빨간머리 앤』 『작은 아씨들이 유독 새롭게 느껴졌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겨우 여성이 주어인 세계를 잠시 엿볼 수 있었다. 아무리 똑똑해도 교사가 되는 것 정도가꿈의 최대치인 세계 말이다.
순정만화의 세계는 반대였다. 무대가 연극이든 발레는 혁명이든 여성이라 하여 주변에만 머무르는 일은 없었다. 여성캐릭터들도 경쟁하고, 좌절하고, 우정을 맺었다. 남자가 주인공이라 하더라도 여성의 감각이 녹아 있었다. 그동안 본 적이없는 다양한 감성의 남성들이 등장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게도 동성애도 자주 등장했다.
- P106

어찌면 나는 동네 만홧가게의 초라한 순정만화 코너에 앉아 나도 모르는 채 세계의 균형을 맞추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란 두 가지 성으로 간단히 분류할 수 있는 단순한존재가 아니다. 개인마다 욕망도 감성도 무지개 색깔의 스펙트럼이 미세하게 변화하듯 다양하다. 나와 반대로 만홧가게안쪽, 공을 던지거나 차고 사람을 때리거나 걷어차는 만화들이 더 취향에 맞는 여학생들도 있었을 것이다.
여학생은 순정만화 코너에, 남학생은 소년만화 코너에 일사불란하게 나뉘어 앉아 가끔 서로를 힐끔거리던 그때의 만홧가게가 떠오른다. 우리는 그곳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
- P107

슬램덩크에는 숱한 명장면과 명대사가 있지만, 그때의 내게 가장 깊이 와닿은 장면은 조금 엉뚱하다. 체격은 좋지만팀 동료만큼 천재적 재능이 없는 센터 변덕규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스스로에게 하는 말, "난 팀의 주역이 아니어도좋다" 였다. 난 이 대사가 이상할 만큼 뭉클했다. 위로가 되는말이었다.
이 대사와 겹쳐지는 말이 또 있다. 〈무한도전) 초기 시리즈인 〈무모한 도전 당시에 유재석이 외쳐대던 "000 씨는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라는 멘트다. 지하철보다 빨리 달리기, 목욕탕 물을 배수구보다 빨리 바가지로 퍼내기 등 말도 안 되는 도전을 멤버들이 차례로 시도해서 미친놈처럼 애를 쓰다가 실패해서 넘어진다. 함께 용을 쓰다가 좌절해 있던유재석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라고외친다. "이번에 도전했던 000 씨는, 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큰 경사라도 났다는 듯 다들 일어나 박수를 치며 - P112

에이스가 아니었어. 팀의 주역이 아니면 어때? 그냥, 내가 중아하는 걸 하고 있으면 그걸로 족한 기 아니? 누가 비아남기려도 웃을 수 있게 된다. 죄송함다. 제가 원래 에이스가 아니거든요..
내가 감히 이렇게 책도 쓰고, 신문에 소설도 쓰고, 심지어드라마 대본까지 쓰고 할 수 있었던 힘은 저 두 마디에서 나온 것 같다. 나도 내가 김영하도 김연수도 황정은도 김은숙도노희경도 아닌 걸 잘 알지만, 뭐 어때?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나는 나만의 풋내기 슛‘을 즐겁게 던질 거다. 어깨에 힘 빼고,
왼손은 거들 뿐.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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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취해야 할 행동

1, 나의 가치관을 살펴본다.
2, 정보를 모은다.
3, 가치 체계에 합당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
4, 자신의 가치관에 합당하게 개인 투자를 할 수 있을까
5, 내가 속한 기관을 나의 가치 체계에 맞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 각자는 70억 중 한 명일 뿐이다. 내가 가치관을 바꾸는 것만으로 세상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III.
환경 교리문답

1969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인구는 두 배가 되었고
....아동 사망률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며
....평균 기대 수명은 12년 늘어났고
....47 개 도시가 1,000만 명 넘는 인구를 자랑하게 되었고,
....곡물 생산량이 세 배로 증가했고
....제곱미터당 곡물 수확량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으며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경작한 토지 면적이 10퍼센트늘어났고
....육류 생산량이 세 배 늘었고
....연간 도살되는 가축의 수가 돼지는 세 배, 닭은 여섯 - P253

배, 소는 50퍼센트 이상 증가했으며
....해산물 소비는 세 배가 늘었고
....바다로부터 잡아들이는 물고기의 수는 두 배가 되었고
....물고기 양식을 고안해냄으로써 오늘날 먹는 모든 해산물의 절반이 여기에서 나오고 있고
....해초 생산량은 열 배 증가했는데 그 절반은 하이드로콜로이드 식품 첨가제 형태로 먹고 있으며
....정백당 소비량은 세 배 증가했고
....인간이 매일 만들어내는 폐기물은 두 배 이상 늘어났고,
....버려지는 음식 쓰레기가 크게 늘어나 지구상 영양 부족 상태에 놓인 사람들에게 필요한 식량의 양에 맞먹는 상태이고,
....사람들이 매일 사용하는 에너지의 양은 세 배 늘었고
....사람들이 매일 사용하는 전력의 양은 네 배 증가했으며
....지구상 인구 20퍼센트가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전력의절반 이상을 사용하게 되었고
....전기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사는 전 세계 인구가 10억명에 이르며
....비행기 승객은 열 배가 늘어난 데 비해 철도 여행자의전체 이동 거리는 줄어들었고
....자동차로 여행하는 거리는 두 배 이상 늘어났고 지구상에는 10억 대가 넘는 차량이 존재하며
....전 세계 화석연료 사용량은 세 배 정도 늘었고 - P254

....석탄과 원유 사용량은 두 배, 천연가스 사용량은 세 배가 늘었으며
....바이오 연료, 발명으로 전 세계 곡류 생산량의 20퍼센트는 이를 생산하는 데 사용되고....플라스틱 생산량은 열 배 늘어났고
....새로운 플라스틱이 만들어져 매년 화석연료의 10퍼센트를 잡아먹고 있으며
....수력발전으로 만들어지는 전기의 비중은 역대 가장 낮은 수준인 전체 전력의 15퍼센트 미만으로 떨어졌고
....원자력발전으로 만들어지는 전기의 비중은 가장 높은수준인 6퍼센트,
....풍력과 태양력 발전에 의한 전기는 매년 만들어지는전기의 5퍼센트 수준으로 상승했으며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해 매년 1조 톤의 이산화탄소가대기 중으로 방출되고
....지구 표면의 평균 온도는 화씨 1도가량 상승했으며
....평균 해수면이 10센티미터가량 상승했는데, 그 절반정도는 산맥과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내리며 발생한 것이고,
....모든 양서류 및 새와 나비 중의 절반 이상에서, 모든어류와 식물 종의 4분의 1에서 개체 수 감소가 일어나고 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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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창비시선 453
이산하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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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될 나무 한 그루 생각한다. 이 시집에 쓰인 나무도 자랑스러울 이산하시인의‘악의 평범성‘. 목숨값이란 이런 거라고, ‘대충 피는 꽃은 하나도 없다‘고, 나도 그렇다고.‘ 시집은 말한다. 시인이 몸으로 관통한 세월의 깊이가 가득하다.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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