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당신만 괜찮으시다면 파랑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사월의 신선한 아침에 맞이하는 그 푸르름 말입니다. 벨벳의 부드러움과 눈물의 반짝임이담겨있는 푸르름이지요. 당신에게 이 푸르름만이 가득 담긴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편지는 앙베르나 로레르담의 보석 마을에서 다이아몬드를 고이 감쌀 때 쓰는 종이를 떠올리게 할 거예요. 결혼한 신랑의 셔츠럼 새하얀 그 종이에는 투명한 소금 결정, 동화 속 아이의 운명을 결정짓는 하얀 조약돌 갓난아이의 눈물 같은 다이아몬드가 담겨 있지요. - P17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죠. 다만 한 편의 시처럼 반짝이는 빛을 걸쳤을뿐이었습니다. 비로소 당신에게 말하려 했던 것에 가까이 다가섰네요. 오늘 내가 본 사소한 것, 죽음의 모든문을 여는 것, 바로 결코 멈추지 않는 삶 말입니다. 삶은 결코 붙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 기둥 사이를빠져 달아나는 새처럼, 삶은 우리 앞에서 달아납니다.
우리는 이 삶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삶은 그런것을 신경 쓰지 않죠. 오히려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살인자인 우리를 자신의 온화함으로 가득 채워줍니다. - P19

연못은 하늘 아래 꽃을 피우고, 하늘은 연못을 마주하며 곱게 단장하고 있었습니다. 새는 예언하는 듯한날갯짓으로 숲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어요. 잠시 동안나는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이 편지가 당신에게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어리석은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나는 단지 우리가 ‘화창한 날‘, ‘푸른 하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 P19

나는 페이지마다 하늘의 푸르름이 스며든 책만을좋아합니다. 죽음의 어두움을 이미 경험한 푸른 말이에요. 나의 문장이 미소 짓고 있다면, 바로 이러한 어둠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한없이 끌어당기는 우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왔습니다.
많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이 미소를 얻었어요. 당신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금화와 같은 이 하늘의 푸르름을 나는 글을 쓰며 당신에게 돌려드리고 있답니다. 이장엄한 푸름이 절망의 끝을 알려주며 당신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 P21

"마리아예요." 우리가 하는 말에는 더 이상 아무런의미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드러내는 겉모습은 우리를 눈멀게 했고, 우리를 불편하게하던 순수한 영혼의 얼굴을 우리 스스로 씻어내 버렸다. 갓난아기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던 신은 이제 우리에게서 몇 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하지만 집시와 길고양이, 접시꽃은 우리가 더는 알지 못하는 영원한 것에 대해 알고 있다. - P32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달라진다. 우리가 보는 그것이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이름을, 진정한 자신의 이름을 부여한다. 술라주의 그림 앞에서 나는 세탁실 빨랫줄에 널린 검은 침대 시트 앞에 서 있는 어린아이가 된다. 그림들은 그곳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무감각해진 채로 살아 엎드려 있는 거대한 짐승 같다. 하얗게 빛나는 빛이 짐승들의 옆구리를 비춘다. 그들의숨결은 무겁고 더디며 고요함에 젖어있다. 불멸의 검은 풀을 되새김질하는 짐승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다. 홍수보다 훨씬 더 위압적인, 술라주의 그림들이 내뿜는 짙은 정적에 휩싸여 몽펠리에는 사라지고 없었다. - P38

밤과 죽음이 우리 곁에 다가와 끝을 알려주듯 관리인이 다가와 곧 문을 닫을 것이라고 말한다. 호텔로 되돌아가는 길, 몽펠리에의 플라타너스가 하얀 별이 지글거리는 은하수까지 내 머리를 들어 올린다. 누구도반박할 수 없는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마법처럼 하얗게 불탄 자국들. 나는 다시 스위스 시계 같은 호텔 방으로 돌아와 잠에 든다. 매일 밤 그러듯, 내일은 더 아름다운 일이 찾아올 거라 생각하면서. - P40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것은 결코 그 순간이 아니다. 죽음, 사랑, 아름다움, 이
‘모든 것들이 은총과 우연에 의해 불시에 나타날 때, 그것은 결코 그 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 순간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아주 일찍 시작됐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충분하다. 아주 일찍, 그의 삶에 죽음이 찾아왔다는 것을. - P50

나는 내 방식대로 연주합니다. 차갑고도 정열적인방식이죠. 내킨다면 나를 따라오세요. 악보라는 북극으로, 음악이라는 어두운 소나무 밑으로 할 수 있다면나를 따라오세요. 내가 가는 곳으로, 내가 연주하는 곳으로 오직 순백의 음악만이 있는, 아무도 없는 그곳으로 - P50

그러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이찍힌 음반만이 나올 뿐이다. 소나타 도입부처럼 생기있고 건조한 이름, 글렌 아다지오의 깊은 전율처럼 좀 - P53

더 둔한 소리의 성, 굴드. 소리의 북극여우이자 마멋인글렌 굴드, 그는 바흐를 연주한다. 연주하고 또 연주하며 바흐에만 매달린다. 사실 그는 어떤 곡이든 연주할수 있었고 그의 매력, 그가 연주하는 음표들의 끝에서나오는 젊은 왕자의 위엄은 한결같았을 것이다. - P54

"우리는 말을 할 때 바로 그 말속에 머물며, 침묵할때면 바로 그 침묵 속에 머문다. 하지만 음악을 연주할때는 그 자리를 정리하고 벗어나, 말과 침묵의 고역에서 해방된 희미한 선율 속으로 멀어져 간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멀어져 가는 한 젊은 남자처럼, 우리도 멀어져 간다. 목적지를 안다면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악 안에 있다는 건 사랑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연약한 인생의 오솔길에 들어선 것이다. 우리는 A라는점에서 B라는 점으로, 한쪽 빛에서 다른 쪽 빛으로 건너간다.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그사이 어디쯤에 우리가 있다. 불확실함을 견디고 주저함에 미소지으며,
다른 모든 것은 잊은 채로 우리 안의 희미한 생의 움직임에 주의하면서 말이다. - P54

사랑하는 이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 우리는 대리석같이 단단한 주먹으로 가슴을 한 대 맞은 것처럼느낀다. 여러 달 동안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고 충격에뒷걸음질 친다. 더는 세상 안에 머물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본다. 이상한 일이라는 듯이 그나마 덜 부조리한 것은 바로 꽃이다. 꽃은 모든 색들의 외침이다.
가장 작은 데이지꽃조차 자신의 말이 들려지기를 필사적으로 원한다. 꽃은 자신의 색으로 말한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꽃에 중독되었다. 집안 곳곳을 꽃으로 가득 채웠다. 당신의 죽음으로나와 멀어진 세상은 어둠 속 검은 구슬처럼 느리게 돌아갔으나 그곳엔 화려한 꽃의 오만함과 단조로운 허무에 맞서는 노랑, 하양, 빨강, 파랑, 분홍의 외침이 있었다. 수도원의 수녀들은 도자기 병 안에 있는 장미 한다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다. - P69

결국 세상은 자기 자리를 전부 되찾는다. 아니 전부는 아닐 것이다. 당신의 부재 속에서 꽃들이 한 말을 내가 잊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듣게 된 것이다. 삶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또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을 창밖으로 개머루덩굴이 보인다. 색색의 숨결이 풀밭을 가로지른다.
꽃은 영원으로부터 내리는 첫 빗방울이다.

두 눈은 영원에 둘러싸인 채 나는 신비로운 대기를삼킨다. 그리고 나는 쓴다. 이것이 대답 없음에 대한 나의 대답이요, 함께 일어나는 선율이며, 시간의 잎사귀에서 들려오는 날갯짓 소리다. 당신이 더는 이 세상에없기에, 나는 당신에게 미모사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는 없지만 미모사는 당신에 대해 아주 잘 알려준다. 모든 고결한 것은 죽은 자들의 나라를 건너 우리에게 이르는 것이라고 - P70

너는 이 수첩을 열어볼 테고,
그 안에 담긴 것들이하늘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아볼 것이다. 우리 안에 머무는 감동적이고 야생적이며 침범할 수 없는 한밤중의 하늘을 이 푸른 페이지들 위에 담긴 별의 하얀 반짝임도 보게 될 것이다. 소금 결정이나 불꽃에서도 볼 수있는 하얀 반짝임을. 수많은 단어들이 네 두 눈의 아침에, 네 눈 아래로 지나갈 것이다. 이를테면 ‘영혼‘ 같은단어들이 영혼, 햇볕에 보송보송하게 말려 정성스레개어 놓은 빨래. 검은 테두리를 폭풍우와 오로라의 머리글자로 수놓은 연인들의 잠자리를 위한 금빛 침대보 - P75

너와 함께 글을 쓴다. 밤과 낮의 단어들, 사랑의 기다림과 사랑의 단어들, 절망과 희망의 단어들. 나는 너와 함께 이 단어들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본다. 우리만이 알고 있는 이 깨달음 속에서 글을 쓴다.

너에게 쓴다. 이 수첩뿐만이 아니라 내가 쓰는 모든 것 안에 네가 있다. 몽펠리에로 보내는 이 글의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있다. 단지 상황에 따른 것만은 아닌,
당신에 대해 말한다는 내가 처한 그 불가능성 안에 네가 있다. 네가 내 안에 있는 이 밤에, 단어들에서 비롯된 밤과 뒤섞인 네가 있는 빛나는 밤에 나는 글을 쓴다.
너에게 쓴다. - P77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에도 읽을 수 있는책을 쓰고 싶다.

얼마 전 아내를 잃은 한 남자는 더 이상 책을 읽지못한다.
"나는 책에 속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이 말이 이렇게 들린다.
"책이나 세상 그 무엇으로 인해 그녀에게서 단 일초라도 멀어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들이 끝내 허무의 입에 삼켜지고 대리석처럼 단단한 이에 찢어 발겨지는 것을 바라보는 걸 방해 받고 싶지 않아요." - P81

단 한 편의 시라도 주머니에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걸어서 건널 수 있다. 읽고, 쓰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우리를 구원하는 삼위일체다. 시는 불타는 돌들에 둘러싸인 침묵이며 세상은 별들에까지 이르는 차가움이다. 새벽 두 시, 여왕들은 죽고 나는 그들의 외침에 경탄한다. ‘항상 사랑하고, 항상 고통받으며, 항상 죽어가기를. 세상은 이 외침에 깃든 영감을 알지 못한다. 삶의 등불을 켜주는 이는 죽은 자들이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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