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호프 자런 지음, 김은령 옮김 / 김영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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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걸에서 반한 호프자런을 만날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의 중요성을 자주 깨우치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70억명중의 한명일 뿐인 나하나부터 바뀌어야 지구가 조금이라도 더 건강해질 수 있겠다. 지금도 가난하다 생각하지만 누리는 풍요는 확실히 다르다. 조금 더 많이 불편해져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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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내 나이 서른다섯에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나는 항상 앞으로의 15년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살아왔다. 하지만 때론 상황들이 우리보다 강할 때가 있다.
 이제 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전쟁일기』를 펼치기 전 먼저 내 소개를 하겠다.
내 이름은 올가 그레벤니크이다.
나는 누구인가?
엄마이자 아내, 딸, 화가, 그리고 작가이다. 또한 나는 내의지와 상관없이 삶이 완전히 무너진 사람이다.
나에게는 두 아이가 있다. 아홉 살 아들 표도르와 네 살 딸 베라
그 외 우리 가족은 화가인 남편 세르게이. 엄마, 그리고 개와 고양이다.
전쟁 전 우리 삶은 마치 작은정원과 같았다. 그 정원에서 자라는 모든 꽃들은 각자의 자리가 있었고, 꽃 피우는 정확한 계절이 있었다. 사랑으로 가득했던 우리 정원은 날이 가면 갈수록 풍성하게 자랐다. 아이들은 음악, 미술, 무용 등예술을 배웠으며, 남편과 나는 차례대로 아이들을 학원에 데려다주며 뒷받침을 했다.

나는 어린이들을 위한 책 일러스트를 그려왔다. 내가 작업한 그림들은 다양한 색상과 행복으로 가득했다. 내가 작가로서 쓴 동화들 또한 성공적으로 출판되었다. 책의 주인공은여우 가족이었다 말썽꾸러기 아기 여우, 작고 귀여운 누나여우, 아빠 여우와 엄마 여우. 나는 여우 가족의 음악 수업과자전거 산책, 시나몬롤을 함께 먹는 아침식사에 대한 글을쓰고 그림을 그렸다.
출판사는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다음 이야기는『전쟁일기』가 되어버렸다…… 너무 느닷없는 장르 변화이지않은가?

전쟁 전날 밤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아이들이 잠든 후 남편과 나는 오랜만에 둘이서 오붓하게 대화할 시간을 가졌다.
남편은 수제 햄버거를 만들고 차를 끊어주었다. 늦은 저녁을먹으며 우리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새로 구입한 아파트수리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상상과 함께 아이들이 즐겁게 학원 생활을 해나가는 것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우리에게는천 개의 계획들과 꿈이 있었다. 그렇게 우린 배부르고 행복한 채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 5시,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처음에는 폭죽 소리인 줄 알았는데, 사방에서 폭격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완전히 파악하지도 못한 채나는 미친듯이 서류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들 페자가 잠에서 깨어났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있는지 아이에게 설명해주어야만 했다...... 그다음 딸 베라가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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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일기를 적는 이유는 "전쟁 그만!"이라고 외치기 위해서다.

전쟁에는 승리자가 없다. 오로지 피, 파산, 그리고 우리 한사람 한사람 마음속의 커다란 구멍만 남는다.

나는 먼 길을 왔고, 그 길에서 오로지 선하고 나를 도우려는 사람들만 만났다.

나는 사람을 민족 소속으로 나누지 않는다

민족이 아닌 행동이 사람을 정의하기 때문이다.

많은 러시아인들도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이제 정확히 알고 있다. 전쟁이 있고, 사람들은 따로 존재한다는걸.

전쟁은 사람을 신경 쓰지 않는다.

전쟁은 나를 완전히 뒤흔들어놓았다.

지금 나는 국적과 민족을 불문하고 나를 도와주는 이들을 만난다.

이 사람들에게는 '힘'이 있다.

전쟁은 끝날 것이고, 힘센 사람들은 살아남을 것이다.

2022년 4월

올가 그레벤니크

 

 

 

  ​오늘은 열무김치를 마침내 담그는 날이다. 무슨 책을 택할까 하다가 올가 그레벤니크의 글, 그림의 [전쟁 일기]를 챙겼다. 새벽에 지나간 비로 대기는 맑고 청량했다. 버스 안에서 작가의 말을 읽다가 덮고 말았다. 부제가 '우크라이나의 눈물'이다. 전쟁이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에 사는 그림책 작가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올가 그레벤니크가 폭격을 피해 지하실로 대피하면서부터 시작한 연필로 그리고 쓴 일기다.

 

덧붙일 말이 필요 없다. 

전쟁에 반대한다.

어떤 이유로든, 무슨 명목이로든 결코 전쟁은 안. 된. 다.

나는 바로 아이들의 팔에 이름, 생년월일과 연락처를 적어-왜 적는 거야?
베라가 물었다.
-우리, 지금 놀이를 하는 거야.
- 무슨 놀이?
- ‘전쟁‘이란 놀이.
날이 밝자 우리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이미 이웃들이 앉아있었다. 깜빡거리는 어두운 전등, 숨을 탁하게 만드는 다리밑 모래, 그리고 낮은 천장. 나는 두려움과 근심을 어떻게라도 떨치기 위해 그림 그릴 노트와 연필을 집에서 챙겨왔다.
그림 그리는 행위는 항상 ‘감정‘과의 싸움에 도움을 주었다. 그렇지만 내 다이어리가 전쟁일기』가 되리라곤 생각지못했다. 나는 며칠 후 이 악몽이 끝날 거라고 믿었다.
바깥에서 전투기들이 우리집을 폭격할 때 그림은 나만의내면세계를 향한 유일한 통로가 되어주었다. 내 모든 두려움을 - P8

을 종이에 쏟아부었다. 잠시나마 조금 괜찮아졌다. 내 일기장은 나에게 지하실에 내려갈 유일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새로운 스케치를 그리기 위해 그곳에 내려갔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는 세상 속에서 나는 전쟁에 맞서살아남기 위해 창작하는 행위를 계속해서 이어왔다. 글과 그림은 내가 온 힘을 다해 붙잡는 지푸라기였다.

우리는 지하실에서 여덟 밤을 보냈다. 조용할 때는 아파트에 올라가서 집안일을 했지만, 폭격 소리가 들리면 곧장 아이들을 대피시킬 준비를 하고 지하실로 뛰쳐내려갔다.
그 기간 우리 아파트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창문에는 종이테이프를 X자로 붙였다. 이내 모든 유리창과 유리문을 떼어내 구석방 바닥에 쌓아두었다. 복도에는 비상 상황에 대비해 챙겨둔 백팩과 캐리어를 두었다.

전쟁 9일째 되는 날, 도시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결심했다기보다는 내 손가락이 나도 모르게 택시기사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더라.
택시를 잡는 건 정말 어려웠다. 도시에 휘발유가 더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절대로 떠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 P9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택시 구하세요? 저 바로 근처입니다. 10분 후에 나오세요.

엄마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아침식사를 먹이면서 우셨다. 같이 가자고 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의 외삼촌을 남겨두고 갈 수 없어 결국 함께하지 못했다.

나는 아이들을 위해 도망쳤다.

급하게 포옹하고 헤어졌다. 눈물 가득한 엄마의 얼굴을 평생토록 기억할 것이다……빨리 움직여야만 했다. 우린 강아지와 백팩 하나만 든 채 택시로 향했다.

내가 맞이한 첫 이별이었다.
20분 후 우리 가족 네 사람은 기차역 플랫폼에 도착해 첫기차에 뛰어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리보프(르비우)로 가는 기차였다. - P10

리보프에 도착해서는 내 블로그를 통해 나를 아는(실제로만난 적은 없던 분들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안전하게 느껴져 두려움에 벌떡벌떡 깨지않고 잠을 잤다.
리보프에서 우리 가족 넷이서 함께 보낼 수 있도록 주어진시간은 단 하루. 그후 난 아이들을 데리고 바르샤바로 떠나야만 했다. 아이들을 위해 그런 결정을 내렸다. 우크라이나에내려진 계엄령으로 인해 남편은 나라를 떠날 수 없었다.

두번째 이별이었다.

전쟁 9일 만에 그들은 나를 집, 엄마,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해방‘ 시켜주었다. 나에게 남은 건 아이들 강아지, 등뒤의 백팩 하나와 그림 그릴 수 있는 재능뿐이었다.
내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빨려들지 않기 위해뚜껑으로 막아놓았을 뿐이다. - P11

바르샤바의 머큐어 Mercure 호텔은 점차 여자들과 아이로 가득찼다. 호텔 로비에 아이들 놀이방이 만들어졌다. 아마 호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아이들이 떠들고 웃는 소리와 곳곳에 어질러진 장난감들.
아침마다 제공되는 맛있는 조식, 새하얀 침구, 아름답고깨끗한 도시, 커다란 동물원, 빠르고 정확한 대중교통. 잠시주어진, 절대로 익숙해져서는 안 되는 동화였다.

미래는 막막했고, 마음은 너무나 지쳐 있었고 근심 가득했다. 잠시 쉬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불가리아에 임시숙소를 제안받았다. 내 그림 블로그를 사랑해주던 팔로어들이 초대해주었다.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인 채 또 한번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여러모로 낯선 도시에서 여자 혼자서 두 아이와 살아남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 P12

강아지와 함께 이동하기 위한 모든 서류를 어렵게 마련한이후 우리는 비행기표를 구입하고 3월 16일 불가리아 소피아에 도착했다.

지금 나는 불가리아의 소도시에서 지내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굉장히 친절하고 우리를 따뜻하게 반겨준다. 가능한 대로 살림을 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매일 강아지와 산책하며 봄을 맞이한다.

그렇지만 매일 밤 난 꿈에서 남편과 내 고향도시를 본다.
잠에서 깨어나면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다. 핸드폰을 들어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어떻게 지내?"

남편은 하리코프(하르키우)에 돌아갔다.
도시는 계속해서 폭격당하고 있지만 더이상 지하실에 내려가지 않는다.
남편 또한 마음속 구멍을 어떻게든 메꾸기 위해 적십자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구호품을 모아 도시에 남은 사람들에게 - P13

도움을 주고 있다.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하리코프(하르키우) 근교 도시에서 지내신다. 아직까지는 조용하지만 언제든 ‘해방군‘이 들이닥칠 수 있다.

그들 생각에 울면서 기도한다. 마치 내 두 손이 절단되었는데 절단된 손의 통증을 계속 그대로 느끼는 것과 같다.

내가 이 일기를 적는 이유는 "전쟁 그만!"이라고 외치기위해서다.
전쟁에는 승리자가 없다. 오로지 피, 파산, 그리고 우리 한사람 한사람 마음속의 커다란 구멍만 남는다.
나는 먼 길을 왔고, 그 길에서 오로지 선하고 나를 도우려는 사람들만 만났다.

나는 사람을 민족 소속으로 나누지 않는다. - P14

2022년 2월 24일
#1인칭지하시점

새벽 5시 30분, 폭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뭐라도 하기 위해 짐을 싼다.
그림들을 웹하드에 업로드한다.
작업중이던 새 책의 운명이 걱정된다.

아이들과 우리의 배낭을 쌌다.
아침을 먹었다 먹어야만 하니깐.
메밀죽은 아무맛도 나지 않는다.

내 그림들을 파일에 넣었다. - P20

지하의 아이들

내 아이들은 지하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미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집에서는 투정이 많아진다.
무서우니까 그런다.

딸베라는 묻는다 :
- 우리 언제 지하에 내려가? - P36

피난열차

열차는 이 세상의 모든 눈물로 가득하다.
여자들과 아이들.
기차가 멈출 때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더 많아졌다.
여자들은 저마다 방금 전까지 남편과 함께 있었고, 이제 혼자가 되었다.
아이들은 울고 있다.
엄마는 눈물을 삼키며 아이를 달랜다.
아빠가 다음 기차로 따라올 거라고.
못올텐데……
아이들은 모두 자기 장난감을 소중하게 감싸안는다.
집으로 전화를 걸어본다.
집에 남은 가족들에 대한 걱정과 눈물 섞인 말들.
정말 많은 눈물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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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챙긴 시집은 아침달에서 나온 김소연 시인의 'i에게'다.

   아침달 시집에서는 심심찮게 그믐달을 만날 수 있어서 어디쯤에 달이 있나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각주라고 할까? 표식이 필요할 때 그믐달이 떠있다) 역시 'i에게'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시인의 말

 한 사람이 불면의 밤마다
 살아서 갈 수 있는 한쪽 끝을 향해
 피로를 모르며 걸어갈 때에

 한 사람은 이불을 껴안고 모로 누워 원없이
 한없이 숙면을 취했다.

 이 두 가지 일을 한 사람의 몸으로 동시에
 했던 시간이었다.

 2018년 칠월 김소연


다른 이야기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너는 매일매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어떤 용기를 내어 서로 손을 잡았는지 손을 꼭 잡고 혹한의 공원에 앉아 밤을 지냈는지. 나는 다소곳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우리가 우리를 우리를 되뇌고 되뇌며 그때의 표정이되어서. 나는 언제고 듣고 또 들었다. 곰을 무서워하면서도 곰인형을 안고 좋아했듯이. 그 얘기가 좋았다. 그 얘기를 하는 그 표정이 좋았다. 그 얘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좋았다. 그날의 이야기에 그날이 감금되는 게 좋았다. 그날을 여기에 데려다 놓느라 오늘이 한없이 보류되고 내일이 한없이 도래하지 않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그리하여 우리로부터 점점 더멀어지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떠나가는 게 좋았다. 귀여운 병아리들이 무서운 닭이 되어 제멋대로 마당을 뛰어다니다 도살되는 것처럼. 그날의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마다 우리가 없어져버리는 게 좋았다.
먹다 남은 케이크처럼 바글대는 불개미처럼. 그날의 이야기가처음 만났던 날을 깨끗하게 먹어치우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날이 아직도 혹한의 공원에 앉아 떨고 있을 것이 좋았다. 우리가그곳에서 손을 꼭 잡은 채로 영원히 살아갈 것이 좋았다. - P10

경배

나쁜 짓을 이제는 하지 않아
나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지

좋아하는 친구가 베란다에서 키운 부추를 주어서
나란히 누운 부추를 찬물에 씻지
좋아하는 친구가 보내준 무쇠 프라이팬에 부추전을 부치지
젓가락을 들고 전을 먹는 동안에

나쁜 음악을 이제는 듣지 않아
나쁜 생각들을 완성하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지
부추를 먹는 동안엔 부추를 경배할 뿐

저편 유리창으로 젓가락을 내려놓는
너의 모습이 보였는데
왜 그렇게 맨날 억울한 얼굴이니

병이 멈추었니
비명이 사라졌니

나의 병으로 너의 병을 만들던 짓을 더 해주길 바라니
예의를 다해 평범해지는 일을 너는 경배하게 된 거니 - P12

참 독하다 참 무섭다 하면서
너를 번역해줄 일이 이제는 없겠다

모든 게 끔찍한데
가장 끔찍한 게 너라는 사실 때문에
너는 누워 잠을 자버리지
다음 생애에 깨어날 수 있도록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모든 것에 익숙해져버렸지
익숙해져버린 나를 적응하지 못한 채 절절매지
젓가락을 들어 올려
전을 다 먹을 뿐

만약 이 세상이 대답이었던 것이라면
그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더 강하고 더 짙은 이 부추였을까
병이 멈추어버린 병은 어떻게 아픈 척을 해야할까

부추를 받고 귀여운 인형을 친구에게 건넸지무쇠 프라이팬을 받고 예쁜 그림책을 친구에게 건넸지 - P13

귀엽고 예쁘게
여리고 선량하게

혼자 있을 때마다 나쁜 것들만 떠올리는데
나쁜 짓은 더 이상하지 않아
가지런한 부추들
파릇한 부추들 - P14

i에게

밥만 먹어도 내가 참 모질다고 느껴진다 너는 어떠니.

지난겨울 죽은 나무를 버린 적이 있었다. 마른 뿌리를 흙에파묻고서 나무의 본분대로 세워두었는데, 지난겨울 그렇게 버려지면 좋았을 내가 남몰래 조금씩 미쳐갔다. 남몰래 조금만 미쳐보았다. 머리카락이 타오르는 걸 거울 속으로 지켜보았고 타오르는 소리를 조용히 음미했다. 마음에 들었다. 실컷 울 수도실컷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은 화사한 얼굴이 되었다. 끝까지 울어보았고 끝까지 웃어보았다. 너무 좋았다. 양지에 앉아 있었을때 웅크린 어느 젊은이에게 왜 너는 울지도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젊은이의 눈매에 이미 눈물이 맺혀 있더라. 그건분명 돌멩이였다. 우는 돌을 본 거야. 그는 외쳤어. 미칠 것 같다고! 외치는 돌을 본 거야. 그는 더 웅크렸고 웅크림으로 통째로집을 만들고 있었어. 그 속에 들어가 세세년년 살고 싶다면서.

요즘도 너는 너하고 서먹하게 지내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아직도 매일매일 일어나니. 아무에게도 악의를 드러내지 않은하루에 축복을 보내니. 누구에게도 선의를 표하지 않은 하루에경의를 보내니. 모르는 사건의 증인이 되어달라는 의뢰를 받은듯한 기분으로 지금도 살고 있니. 아직도, 아직도 무서웠던 것을무서워하니. - P34

너는 어떠니. 도무지 시적인 데가 없다고 좌절을 하며 아직도 스타벅스에서 시를 쓰니. 너무 좋은 것은 너무 좋으니까 안된다며 여전히 피하고 지내니. 딸기를 먹으며 그 많은 딸기 씨가씹힐 때마다 고슴도치 새끼를 삼키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여전히 괴로워하니. 식물이 만드는 기척도 시끄럽다며 여전히 복도에서 화분을 기르고 있니. 쉬운 고백들을 참으려고 여전히 꿈속에서조차 이를 갈고 있니. 너는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마음에 든다고 말했었다. 나도 그때 여기가 마음에 들었다. 어딘지 몰라서가 아니라 어디로든 가야만 한다고 네가 말하지 않았던 게 마음에 들었다. 지난겨울 내가 내다버린 나무에서 연둣빛 잎이 나고연분홍 꽃이 피고 있는데 마음에 들 수밖에. 지난겨울 내가 만난젊은이가, 아니 돌멩이가, 지금 나랑 같이 살고 있다. 나도 그 옆에서 돌멩이가 되었다. 우는 돌멩이 옆에 웃는 돌멩이이거나 외치는 돌멩이 옆에 미친 돌멩이 같은. 그는 어떨 땐 울면서 외치면서 노래를 한다! 나는 눈을 감고 허밍을 넣지.

가끔 그럴 때가 있다. - P35

노는 동안

십일월에 오월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은 죄를 겨우 알 것 같은 나날이었지만
내 죄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나날이기도 했다

앤서니 퀸이 나오는 옛날 영화를 보았다
그 여자, 착한데…… 나쁘지?
응.
그래서 좋아.

심술궂은 비바람이
다 떨어뜨려서 밟으며 걸어갔다
샛노란 나뭇잎들을

잎은 뚫는 성질을 가졌다.
봄에 대한 잎의 입장은 그런 식으로 증명되었고
마룻바닥은 무릎을 받아주는 성질을 가졌다 기도에 대한
걸레질의 입장을 이런 식으로 증명하고 싶다

십일월에도 오월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나를 내가 지나치고 있었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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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쓰는 일은 괴물이 되려는 시간을 주저앉혀 가만가만 달래는 일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렇기에 ‘괴물‘이라는 단어의 문을 열면 연둣빛 새싹 하나가 빼꼼 고개를 내미는 것일 테다.

 

 

 

유월 육일

   현충일인 오늘, 비가 내린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버린 영혼들을 위해 버석버석한 가슴들을 위해 단비가 내린다. 애초의 계획이었다면 오늘 오후에 시작했을 열무 뽑기는 비 예보로 어제 아침에 뽑았고 열무들이 비를 맞을까 봐 쳐 놓은 비닐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열무를 다듬는다. 산 밑이라 서늘한 탓인지 열무는 싱싱했고 살이 통통 올라서 김칫거리로 최상급이다. 빗소리는 아침 버스에서 읽는 안희연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시를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한다.

  전망

  검은 개가 혀를 빼물고 죽어 있는 골목에서 한 사람이 길을 잃는다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에서 악마를 볼 때 나무의 척추가 부러진다

  빗소리는 세 사람을 옥상으로 데려가 죽음이 보낸 초대장을 읽어준다

  그리고

  나는 저 문장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씨앗 하나를 심었을 뿐인데

  벌어진 일들

  사람들은 내가 괴물을 길렀다고 했다

  이 모든 게 나의 손끝에서 시작된 일이었다고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없다면

  제발 자신을 죽여달라며 각목을 내미는 노인도 있었다

  아이들은 몰래 담장을 넘어와 화단의 모든 싹을 짓밟고 달아났다

  어떤 눈빛이었을까

  네 사람이 절름발이 개를 사정없이 걷어찰 때 다섯 사람의 집이 태풍에 날아가고

  여섯 사람이 불속에 갇힐 때 창고 문을 걸어 잠그며 들려오는 웃음소리

  그 씨앗은 나의 마음속에 있다

  얼굴을 보여준 적 없는 거울 앞에서

  심장에 악의가 스미는 속도를 측정하는 일

  씨앗에서 괴물까지의 거리를 오가며

  나를 망가뜨리려는 여름과 싸우고 있다

   내 안에도 '악의'가 자라고 있다고 가끔 생각한다. '확' 그냥~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하는 걸로 위로 삼기에는 민망한 욱한 어떤 충동들을 가지고 있다고. 어떤 '씨앗'은 '악의'로 자라고 어떤 '씨앗'은 '열무'로 자란다. 이왕이면 싱싱하고 풋풋한 열무로 자라자고 '전망'해본다.


 

시간의 손바닥 위에서


"다녀갔어."

그렇게 시작되는 책을 읽고 있었다 누가 언제것도 없이 덩그러니

다녀갔다는 말은 흰 종이 위에 물방울처럼 놓여있었고 건드리면 톡 터질 것처럼 흔들렸다

손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문밖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일기예보를 통해 날씨를 예견하듯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미래가 궁금하지 않다며 문을 닫았다 탁자위엔 읽다 만 책이 놓여 있고 내가 믿을 것은 차라리 이쪽이라고 여겼다 - P12

책을 믿는다니, 나는 피식 웃으며 독서를 이어갔다 "수잔은 십 년도 더 된 아침 햇살을 떠올리며 잠시 울었다." 나는 십 년도 더 된 햇살의 촉감을 상상하느라 손끝이 창백해지는 줄도 모르고

잠시란 얼마나 긴 시간일까 생각하느라 방 안에서 시계가 사라진 줄도 몰랐다

서둘러 다음 장을 펼쳐보았다 "침묵은 부리 잘린새처럼 사방에서 회오리쳤다." 부리 잘린 새를 상상하는 건 손목이 시큰거리는 일이었고 벽에는 전에 없던 붉은 얼룩이 생겨 있다

어쩌면 나는 문장과 문장 사이를 잇는 사람은 아 - P13

닐까 생각했고 참 이상한 하루라고 생각했지만 "큰비가 내렸다"라는 문장을 만났을 땐 이미 발이 물속에 잠긴 뒤였다

"건너왔어."

그렇게 끝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트를 탄 사람들이 지나간다 손전등을 들고 천천히 사방을 살피며 이곳엔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 P14

12월

겨울은 빈혈의 시간

피주머니를 가득 매단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것만 생각나

입김 한 번에 허물어지는 사람들이
이곳엔 너무너무 많다

너무라고 말하지 않고
너무너무라고 말하는 것
그래도 겨울은 눈 하나 끔뻑하지 않겠지

그래서 당신은 무엇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강도를 높여가는 겨울의 질문 앞에서
나는 나날이 창백해진다 - P16

이렇게 텅 빈 마음으로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기도가 기도를 밟고 오르는 세상에서
헐렁헐렁 산책하는 일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축축한 영혼을 나라고 부르는 일

다행히 겨울은 불을 피우기 좋은 계절이다
나에겐 태울 것이 아주 많고

재가 될 때까지 들여다볼 것이 있어서 좋다

"잘하고 못하는 게 어디 있어, 그냥사는 거지."
불 앞에서 다 식은 진심을 꿀꺽 삼킬 때 - P17

피는 반짝이는 것이다
혼자 왔다 혼자 떠나는 슬픔이 있어 오늘은 거룩한 밤이 된다
피주머니를 가득 매단 크리스마스트리가 그것을 말해준다 - P18

발만 남은 사람이 찾아왔다

해 질 무렵이었다

오늘도 이렇게 끝이구나
여긴 너무나 깊어 아무도 찾아올 수 없겠구나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발만 남은 사람이 찾아왔다
우리는 수심을 알아보기 위해
누군가 떨어뜨린 돌이라 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기울어지는 하늘을 보았다

마지막 나무가 뿌리 뽑혀
달의 뒤편으로 끌려가는 것을 - P24

없는 얼굴로 본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지만
밤을 배운 적 없어도 우리는 이미 밤을 알고 있었다

그의 발은 차츰차츰 썩어갔다
우리는 돌의 심장부 잠 속에서도 깨어 있어야 해요
쓰다듬으면 부서져 내렸다
이건 시간이라는 거예요 손을 넣어 흙장난을 해보세요

질문을
쌓았다 허물며

발을 두고 멀어져 가는 그를 보았다 - P25

주저앉으면서 가고 있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가라앉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믿음이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장면을 수시로 목격하였고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은 해결할 수 없는 것으두어야 해요
이따금 그의 말들은 바람에 실려 돌아왔다 - P26

모놀로그

길목마다 사나운 검은 개가 매여 있다. 이곳엔
나를 받아들여주지 않는 길들이 너무 많아서. 나는자꾸 서성이는 사람이 된다.

한 걸음이 한 글자가 되도록 하루가 한 문장이되도록, 내가 걸어온 시간이 어딘가로 전송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바닷가 마을에 사는 파란 눈의 아이가 떠오른다.
그 아이가 읽고 있는 책이 나의 삶이었으면 좋겠다.

방금 전까지 불가사리였고 고래였던 구름은 말한다. 그건 불가능한 믿음이라고. 나는 어떤 결말을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구름은 벌써 저만치 흘러가있고 - P80

검은 개를 피해서 걸어보기로 한다. 안녕,낯선사람을 지나 극빈관을 지나 식탁의목적을 지나 놀랄만두하군을 지나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목동이라는 이름의 고깃집이라는 사실. 사랑하는 것을 죽여야만 지탱되는 마음이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어쩐지 이 길은 나를속이는 쪽 같고

길목에는 사나운 검은 개가 매여 있다. 딛고 갈수밖에 없는 것이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신에게 편지를 쓰는 기분이 된다. 부디 저를 들여보내주세요. 개가 신이 아닐 이유는 없으나.
81 - P81

검은 개라고 생각하면 검은 개일뿐이다. 내가만든 공포가 컹컹 짖는 것을 본다. 개가 신이 아닌이유를 찾을 때까지. - P82

변속장치

그날의 벤치는 남몰래 발목을 바꿔치기했다젖은 옷을 말리려다가 실물의 반을 잃었다

요즘
나는 자주 나를 놓친다

막다른 골목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리는 개들과
도미노처럼 우르르 쓰러지는 가로수

그러나 개들은 언제나 목줄에 묶여 있고
가로수들은 규격을 벗어나 존재한 적이 없다

삶 쪽으로만 향하는 발과 죽음 쪽으로만 향하는 발
내가 잃어버린 것이 어느 쪽일까
저울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다 - P88

그것이 균형이라면

반신, 아직 돌아오지 못한 나를 위해
언제까지나 시간을 지체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사실에 관한 독법이 있다면
어떤 시간이든 반드시 썩는다는 것

절반에 대한 믿음만으로 식탁에 앉는다
우리는 사라지면서 있다 - P89

빚진 마음의 문장
-성남 은행동

그곳엔 두고 온 것이 많다. 무엇을 두고 왔냐고 물으면 글쎄,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가 훼손되었다고 느낄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가게 되는장소가 있다. 때로는 말을 타고 들판을 한없이 달리는 심정으로, 때로는 잠수정을 타고 심해 깊숙이 가라앉는 심정으로 다다르게 되는 곳. - P93

시간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내가 여전히 꼬옥 쥐고 있는 손, 할머니 없이는 나의 어떤 이야기도 시작될 수 없다. ‘할머니‘라는 단어의 문을 열면, 성남은행 주공아파트 베란다 가까이 앉아 먼 데 시선을두고 있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인다. 5대5 가르마를 타서 정갈하게 쪽 찐 머리, 분신 같은 반짇고리와 녹슨 가위, 늘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자세.
거동이 불편해도 절대로 남에게 벗은 몸을 보이려하지 않는 깔끔한 성미까지. 하루의 절반 이상을 창밖 보는 일로 보내던 할머니. 집에 도둑이 들어 엄마의 패물을 다 가져가도록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할머니, 오려진 사람 같던 할머니 자식을 앞세워 보내고 눈과 귀가 완전히 멀어버린 할머니, 면벽하는 할머니. 그렇게 백수를 사시고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한 날 몸 밖으로 팔랑팔랑 걸어 나가는 할머니 - P95

나는 유년이라는 단어 하나가 거느린 세계가 이토록 거대하다는 사실에 매번 놀란다. 한 단어가 거느린 숱한 고리와 고리와 고리, 그 끝을 계속해서따라가다 보면 갈고리에 걸린 채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나 자신을 반드시 마주하게 된다. 비단 유년이라는 단어뿐일까. 한 단어의 문을 연다는 것은 지금껏 발 들여놓은 적 없는 세계로 건너가는 일,  - P97

‘여름‘이라는 단어 속에는 얼마나 많은 적의가 감춰져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풀과 나무들이 저토록맹렬하게 자라날 수는 없다.

딛다‘라는 단어 속에는 얼마나 아픈 엎드림의 자세가 있는가. 한 인간을 담장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등을 밟고 가라고 끄덕이는 눈빛이 있었을 것이다. 담장 안이 불타고 있다면 더더욱.

‘밤‘이라는 단어는 땅속에 묻어둔 구슬 같다. 손을 더럽히지 않으면 꺼낼 수 없다. 손을 더럽히더라도 꺼낼 수 없다. 그건 구슬이 아니라 밤의 눈동자.
밤이라는 짐승의 눈. - P98

조금씩 뒤로 뒤로 걸어가 지구가 잘 보이는 곳에 의자를 내려놓고 앉아 있으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한 인간 존재가 먼지보다작은 것임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태초의 시간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시간은 참으로 까다로운 성미를가졌다. 시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일으킬 수도 허물어뜨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시간은 언제 괴물이 되고, 어떻게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는가.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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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더니 거북이는 대뜸 질문이잘못됐다고 하면서, 그 대신 <어디서 오는 길인지> 물어야 한다는 거야. 거북이가 느릿느릿 걸어가는데도,
달팽이의 눈에는 들판에 자란 풀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어. 계속 길을 가던 중, 거북이는 뜬금없이 자신이 인간의 망각으로부터 오는 길이라고했어.
「망각이 뭐죠? 그리고 전 인간들이 뭔지도 몰라요.」달팽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어. - P38

거북이가 말했어. 그러자 달팽이는 우선달팽이들이 왜 그렇게 느린지 알고 싶었고, 또 자기만의 이름을 갖고 싶다고 말했단다. 하늘에서 떨어지는물은 비, 가시가 난 나무의 열매는 블랙베리, 그리고벌집에서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것은 꿀, 이렇게 다들이름이 있는데, 자기는 왜 이름이 없느냐는 거였지. 그리고 다른 달팽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영 못마땅해할 뿐 아니라 자기를 들판에서 쫓아내겠다고해서, 자기의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는 절대로 들판에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는 말까지 덧붙였어.
그사이 거북이는 달팽이에게 해줄 말을 찾고 있었단다. 오랜 생각 끝에 그는 인간들과 함께 살면서 배운 것을 알려 주기로 했어. 가령 <그렇게 빨리 하려고서두를 필요가 있을까?>라든지  - P40

거북이와 달팽이는 해가 중천에 뜬 무렵에야 가장나이 많은 달팽이가 이 세상의 끝이라고 하던 들판 가장자리에 도착했단다. 그곳은 대패로 밀어 놓은 듯 매끈했을 뿐만 아니라, 미처 떠나지 못한 어둠의 조각이바닥에 달라붙은 것처럼 검게 빛나고 있었지. 그리고주변에 있는 풀과 야생화를 모두 뒤덮으면서 넓게 펼쳐져 있었어.
검은색의 띠 모양으로 길게 이어진 곳 맞은편으로인간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단다. 그들 중 몇몇은 땀을뻘뻘 흘리면서 달팽이의 눈에 돌같이 보이는 것을 차곡차곡 쌓고 있었지. 그 광경을 보고 놀란 달팽이는 인간들이 온종일 벌집을 짓는 꿀벌만큼이나 부지런하다 - P43

그러다 따스한 아침 햇살이 얇은 껍질 속으로 스며들면서 달팽이는 잠에서 깨어났어. 그는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목을 뺀 다음 눈이 달린 더듬이로 사방을 둘러보았지. 그런데 놀랍게도 옆에서 자고 있던거북이가 온데간데없는 거야.
옆으로 누운 풀잎들을 눈으로 좇다 보니 거북이가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지. 남매나무가 있는 곳과 반대 방향이었어.
고마워요, <기억>님. 당신에 대한 추억을 마음속에영원히 간직할게요.」 달팽이는 친구들이 있는 곳을 향해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어. - P49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질 무렵, 달팽이는 길을 가던 도중에 만난 딱정벌레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 주었어. 그러자 딱정벌레들도 달팽이의 느린 움직임에고마움을 표했지. 만약에 달팽이가 도마뱀이나 메뚜기처럼 빨랐다면 그 장면을 보지도 못했을뿐더러, 자기들에게 알려 주지도 못했을 테니까 말이야.
말을 마치자마자 딱정벌레들은 서둘러 굴에서 빠져나와 공 모양의 식량을 굴리며 멀어져 갔어.
이제 어엿한 이름도 갖게 되었고, 달팽이들이 왜 그렇게 느린지도 알아냈으니, 반항아는 바라던 목적을다 이룬 셈이었지. 그런데 이제 너무 지쳐서 한 발짝도움직일 수가 없었어. 그래서 달팽이는 친구들에게 가기 전에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단다. 위험이 닥쳐오는 걸전혀 모르고 있는 달팽이들은 그 순간에도 관습대로납매나무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함께 밥을 먹고 있었지. 몸을 움츠려 껍질 속으로 들어가려던 달팽이는 들판의 밤 동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 - P55

어엿한 이름도 갖게 되었고, 달팽이들이 왜 그렇게느린지에 대해 점차 많은 걸 깨닫게 된 반항아는, 이제다시 잠을 자려고 준비를 했단다. 그런데 눈을 감기만하면 수많은 물음들이 연이어 떠오르는 바람에 쉬이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친구들이 행여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으면 어쩌지?
납매나무 아래 모여 있는 달팽이들이 내 말을 정신 나간 소리로 받아들이면 어쩐다지? 전에 내가 달팽이들이 왜 그렇게 느린지 알고 싶고, 이름을 갖고 싶다고했을 때처럼 말이야. 그 반대로 그들이 내 말을 믿고,
우리의 보금자리, 《민들레 나라》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우린 어디로 가야 되는 거지?> - P57

달팽이들은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풀밭을헤치면서 가고 있었어. 하지만 다들 침울한 표정이었지 마음이 너무 무거웠던 탓인지,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껍질이 천근만근 무겁게만 느껴지는 거야. 다들 서글프고 불안했지만,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않았지. 꽤나 오래 걸었는지 이젠 뒤를 돌아봐도 정든납매나무가 보이지 않았어. 그런데 그때 어떤 달팽이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자세히 살펴보니, 지금 자기들이 들판 끄트머리 쪽, 그러니까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가고 있더라는 거야.
- P67

「어르신들의 말씀이 맞아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새로운 민들레 나라를 찾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요.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여기서얼마나 더 가야 되는지도 모르니까요. 더구나 가는 도중에 우리가 어떤 위험에 부딪힐지, 그리고 여기 있는모든 분들이 다 같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찾는 새로운 민들레 나라는 앞에 있지, 뒤에 있지는 않다는 점이에요.
어떤 일이 있어도 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저와 함께 가든지, 아니면 우리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든지 알아서 결정하세요.」말을 마친 반항아는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앞으로 나아갔단다. 얼마 지난 뒤, 뒤를 돌아봤더니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지. 모든 달팽이들이 뒤를따라오고 있었던거야. 하지만 반항아는 뒤를 따라오는 많은 달팽이들을 보고서도 뿌듯하거나 행복하지않았어.  - P71

길 저쪽으로부터 뭔가가 커다란 눈에서 강렬한 빛을 뿜어내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던 거야. 그 순간눈이 부셔 앞을 볼 수가 없었지만 무시무시한 짐승이그들 곁을 쏜살같이 지나갔어. 그런데 그 직후 주변을살펴보니 달팽이들 여럿이 보이지 않는 거야.
모두들 공포에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어. 반항아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있을 수도 없었지. 그래서 그 무시무시한 괴물이 또오기 전에 어서 움직이라고 달팽이들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단다.
다들 반항아의 지시에 따르긴 했지만 겁에 질린 터라 평소처럼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어. 그냥 남아 있을걸. 공연히 따라 나서서 사서 고생을 하는구먼.」 달팽이들은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투덜거렸지. 힘겹게길을 건넌 그들은 냉기가 도는 둥그런 동굴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곳에는 가는 물줄기가 쫄쫄 흐르고 있었어.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큰 위기를 넘기고나자 그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기 시작했지 - P79

생전 처음 하늘 높이 올라간 달팽이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신기한 장면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지. 제일먼저 빙긋 웃으며 환한 얼굴을 드러내는 해님이 보였어. 그리고 용기를 내서 눈이 달린 더듬이를 껍질 밖으로 빼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지. 하지만 저 아래로 보이는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참혹했단다. 그들을 내쫓은 시꺼먼 길이 들판의 대부분을 뒤덮어 버리고 만 거야. 그들이 살던 아름다운 보금자리가 인간들 때문에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거지.
수리부엉이는 한참 동안 하늘 위를 날아다녔어. 처음 하늘을 나는 달팽이들에게는 굉장히 긴 시간처럼느껴졌지. 하여간 땅과 나무들, 그리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개울이 그들의 눈앞을 빠르게 지나가는데, 현기증이 다 날 지경이었어. 그도 그럴 것이 들판에서 가장느림보인 달팽이들로서는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광경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을 테니까 말이야.  - P81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숲속으로 들어간 달팽이들은 온갖 종류의 낙엽으로 뒤덮인 땅을 지나가고 있었어. 꿀과 같은 빛깔을 띠고 있는 낙엽들이 있는가 하면, 거무튀튀한 색깔의 낙엽들도 있었지. 그리고 원래의 모습을 온전하게 간직한 낙엽도 있었지만,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부서져 버린 낙엽도있었어. 희한하게도 풀은 보이지 않더군. 다만 잘린나무의 굵은 밑동 주변으로 관목들과 키 작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걸 봐서는 예전에 이 자리에서 과일들이 많이 열렸던 모양이야. 월귤나무였을지도 모르지.
달팽이들은 그 열매를 먹었을 때 입안에 감돌던 맛이기억 속에 떠오르자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단다.
- P83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더듬이를 비빈 다음, 번식을 위한 준비를 하지. 짝짓기를 할 때 먼저 한달팽이가 다른 달팽이의 몸속에 아주 작은 양의 정자를 넣어 주고 나면, 곧바로 그 달팽이가 첫 번째 달팽이 몸속에 정자를 넣어 준단다. 그래서 두 달팽이가모두 수정란을 갖게 되는 셈이지. 그러고 나면 흙 속에 구멍을 파서, 둥근 집을 만들고 그 안에 알을 낳는거야. 굳이 땅속 깊이 구멍을 파는 이유는 부화를 위해서 적절한 습도와 그늘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포식자들로부터 알을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반항아는 그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적으로알아차렸지. 우선 짝짓기를 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와먹을 것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어.
나무와 초록색 이끼들이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그의 눈앞으로 지나갔어. 갈수록 몸이 무거워지는데, 수리부엉이가 말한 그 빈터는 아직 까마득하게만 보이는 거야.
그들은 숲에 짙은 어둠이 깔릴 때까지 계속 걸어갔어. 그토록 짙은 어둠을 본 적이 없던 달팽이들은 눈이 달린 더듬이를 길게 빼고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별빛조차 보이지 않았단다. - P85

살아남으려면 한시라도 빨리 수리부엉이가 말한 빈터로 가는수밖에 없었어.
달팽이들은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반항아의뒤를 따라갔단다. 하지만 너무 굶주리고 지친 나머지어떤 달팽이들은 마지막 의욕마저 잃고 말았지. 그렇게 계속 가느니 차라리 껍질 속으로 기어 들어가 꿈과희망을 모두 버리고 영원히 잠들고 싶었던 거야.
「저기서 민들레 나라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린 반드시 민들레 나라로 가게 될 겁니다. 반항아는마지막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어.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갈 것이라는 강렬한 의지가 그의 말 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단다. - P88

달팽이들은 마침내 꿈에 그리던 숲의 빈터에 도착했단다. 하지만 추위가 그들을 앞질러 와 있었던 탓에, 풀에는 이미 서리가 뽀얗게 앉아 있었지.
반항아는 그들이 나뭇잎 아래에서 며칠 밤을 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어.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정든 납매나무에서 함께 떠난 달팽이들 중 절반도 남지 않았다는 거야. 결국 젊은 달팽이들만 끝까지 그를 따라온셈이지. 그런데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더듬이를 길게빼고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그들의 눈에 보이는 거라곤 서리로 덮인 벌판뿐이었어. - P89

우로 인해 쓰러진 것 같았어. 달팽이들은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그곳을 향해 다가갔단다. 가는 동안,
반항아는 수시로 고개를 돌려 그들이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했지. 달팽이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끈적끈적한 액체가 허연 얼룩처럼 남아 있었어. 그건 그만큼 힘이 든다는 증거였지.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니 그 나무둥치는 달팽이들이 지내기에 안성맞춤이었어. 우선 그 아래로 들어가기도 힘들지 않은 데다, 그들이 사는 데 필요한 온기와그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주변으로 아직 서리를 맞지 않은 풀 몇 포기가 자라고 있었거든. 물론 달팽이들의 입맛에 딱 맞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영양가가 높은풀이었지. 그들은 배가 불러 더 이상 먹지 못할 때까지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풀을 씹어 먹었단다.
달팽이들은 새 보금자리에서 첫 밤을 보냈어. 납매나무 아래에서 편히 살던 때가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단다. 지칠 대로 지친 탓에 달팽이들은 그곳에서계속 살지, 아니면 더 나은 집을 찾아 떠날지 더 이상생각할 여력이 없었어. 반항아는 오래간만에 푹 자고싶은 생각밖에 없었지. 그래서 천천히 껍질 속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그는 달팽이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허 - P90

연 점액들이 서리 위에서 반짝거리면서 길처럼 쑥이어진 모습을 바라보았어. 그리고 생각했어. <이것은고통의 흔적이지만, 동시에 희망의 자취이기도 해그는 당장 달팽이들을 불러 그들이 남긴 자국을 보도록 했단다.
그사이 쉴 새 없이 눈과 서리가 내리고, 추위가 몰아닥쳤지만 달팽이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겨우내깊은 잠에 빠져 있었어. 그렇게 자는 동안에는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숨을 쉬기 위해, 그리고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심장이 뛰게 하거나,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자라기 위해 굳이 힘을 쓸 필요가없었지.
시간이 흘러 달팽이들은 마침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났단다. 그들이 껍질 밖으로 천천히 몸을 내밀었을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바로 반항아였어. 그는 눈이 달린 더듬이로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지. 높이 자라난 풀들이 그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고, 활짝 핀 야생화들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어. 그 정도면 달팽이들이 한동안 먹고도 남을 것 같았지. 그런데 그의 시선은 한참 전에 달팽이들이 지나가면서 남긴 허연 자국을 향하고 있었단다. - P92

「저기 좀 보세요.」 반항아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어.
놀랍게도 길처럼 이어진 허연 자국을 따라 숲의 제일 앞에 늘어선 나무들에 이르기까지 민들레 이파리가 무수히 돋아나 있었단다.
「결국 해내고 말았구나! 우리를 무사히 민들레 나라로 데려왔으니 말이야.」 어떤 달팽이가 감격에 겨워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어.
「아니에요.」 반항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지. 여러분을 이곳으로 데려온 건 제가 아니에요. 전에 이름을갖고 싶다고 무작정 납매나무를 떠난 적이 있잖아요.
들판을 돌아다니면서 전 정말로 많은 걸 깨우칠 수 있었답니다. 특히 느림의 중요성을 말이죠. 그리고 아주힘든 경험이긴 했지만 이번에도 아주 소중한 사실을하나 깨닫게 됐어요. 민들레 나라는 저 먼 곳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간절한 마음속에 있었다는 걸 말이에요. 말을 마친 반항아는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풀을먹기 위해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들판으로 향했단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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