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의 없다.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 너무 가난해 아무도 원치 않는 삶, 신 혹은 사물들을 피난처로 삼는 삶이다. 그곳에는 무(無)가 차고 넘친다. 왁자지껄한 소음과 수많은 문들로 이루어진, 자체의 풍문들로 길을 잃은 삶과는 반대되는삶이다. 그런 삶들을 가지고는 제대로 글을 쓸 수 없다.
  그런 삶에서는 말할 거리가 하나도 없으니까. 우리는오로지 부재 속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고, 결핍 속에서만 제대로 말할 수 있다. 구걸하는 이 여인의 순결한 얼굴을 보려면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겨볼 수밖에 없다.
  저녁 시간 차곡차곡 쌓이는 그 글들을 바라볼밖에. 어린아이의 잠 속에서 불어나는 엄청난 유산이다. p91

날 봐요. 날 좀 봐요. 당신은 생각한다. 말(馬)들도 그렇게 애원하지. 나무들도, 미친 사람들도, 가난한 사람들도 시간을 잠깐 동안의 시간을통과해 가는 모두가 그렇다. 사방에서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사랑받고 인정받는 영광을 애타게 구하는 소리. 사방에 무기력한 망명 생활이, 타인의 시선이라는 진정한 거처에 대한 갈구가 존재한다.  - P64

그러다 어느 날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읽는다. 당신이 살았던 유년의 고장,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당신은 고향 땅을 산업화로 우울한풍광을 띄게 된 프랑스의 이 소도시를 한 번도 떠나본적이 없지만, 아주 짧은 여행조차 겁을 내지만, 당신에게 러시아는 평생토록 유년의 땅, 꿈의 땅이었다. 그 고요한 설경과 양털처럼 희고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어김없이 당신의 유년기와 재회하곤 했었다. 엄청난 허기를 담고 있는 두꺼운 책, 삶을 빼닮은 그 이야기 속에는 무수한 얼굴 아래 무수한 촛불이 흔들리고 있다. 말과 몸짓, 편지. 말(馬)과 화재. 영혼의 숲속에 나지막이번지는 불길. - P75

‘독서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 전혀 혹은 거의 쓸모가 없다. 사랑이 그렇고 놀이가 그런 것처럼. 그건 기도와도 같다. 책은 검은 잉크로 만들어진 묵주여서, 한 단어 한 단어가 손가락 사이에서 알알이 구른다. 그렇다떤 기도란 무얼까. 기도는 침묵이다. 자신에게서 물러나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우리는 제대로 기도하는 법을 모르고 있는지도 우리 입술은 언제나 너무 많은 소음을 담고, 우리 가슴속은 언제나 너무 많은 것들로 넘쳐난다. 성당에서는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다. 촛불을 제외하고는.
초들은 피를 몽땅 쏟아낸다. 자신들의 심지를 남김없이 소모한다.  - P77

파스테르나크의 대작을 읽은 뒤 당신에게 남는 건무얼까. 한 얼굴이다. 사랑하는 여자와 무수한 겨울을떨어져 지내야 하는 한 남자의 얼굴. 어둠 속에 머무는 얼굴, 남자는 숲속 어느 외딴 나무집, 탁자 앞에 앉아 있다. 그는 편지를 쓴다. 끝이 나지 않는 긴긴 편지다. 종잇장들이 검은 잉크로 물든다. 그게 전부다. 이름들과 사건들은 잊힌다. 모든 것이 지워진다. 연못 같은책장 아래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그래도 책을 읽는 동안 당신을 훨씬 흥분은 남는다. 사라지기까지 여운이너무 긴 기분 좋은 무력감이다. 사랑을 나눈 뒤나 산책을 마칠 무렵 빠져드는 그런 상태. 피로감이랄 수도 있지만 특별한 피로감, 휴식이 되는 피로감이다. 책 앞에서, 자연이나 사랑 앞에서, 당신은 스무 살이나 다름없다. 세상도 당신도 막 시작하려고 한다. 당신은 꼼짝하지 않는다. 기차가 하나씩 출발하는 모습을 본다.  - P78

그녀는 밤늦도록 아이를 보살피며 근심의 짐을 내려놓지 않는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모든 이들에게 그렇게 마음을 쓴다. 유년기부터 몸에 밴 방식, 천성보다강한 제2의 천성이다. 온전한 상실인 사랑. 그것이 그녀가 사랑하는 방식이고 그녀가 아는 유일한 사랑이다. 모든 것이 끝나고도 살아남는 사랑, 사랑이 지나고도 살아남는 사랑이다. 아이는 그녀의 에너지를 받으며 자란다. 첫걸음을 떼고 첫마디를 내뱉는다.  - P85

당신은 그녀에게 반하듯 그녀의 문체에 반한다. 둘은 같은 말이다. 흰 종이와 붉은 드레스 밑에서 같은 강물이 흐른다. 그녀는 전설의 거울 앞에 앉듯 언어 앞에앉는다. 어린 시절 그녀는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을 응시했었다. 지극히 평범한 한 줄기 빛에도 마음이 홀리곤 했었다. 그녀가 글쓰기에서 발견하는 것이 그것이다. 독서에서 발견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녀는 많은 책을, 소설을 읽는다. 책은 샘물 같다. 그녀는 그곳에 얼굴을 갖다 대고 식힌다. 독서와 글쓰기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책을 읽는 그녀는 그 책의 저자이다. 하지만작품 수준이 고르지 못한 저자도 있기 마련이어서 그너는 읽던 책에 싫증이 나기도 한다. 힘들고 버거운 꿈속을 헤매는 것 같은 책.  - P87

내가 책을 읽는 건 보기 위해서예요. 삶의 반짝이는 고통을, 현실에서보다 더 잘 보기 위해서예요. 위안을 받자고 책을 읽는 게 아닙니다. 난 위로받을 길 없는사람이니까.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책을 읽는 것도 아니에요. 이해해야 할 건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책을 읽는 건 내 삶 속에서 괴로워하는 생명을 보기 위해섭니다. 그저 보려는 겁니다. - P88

수첩에 무언가를 적거나 거울 속에서 무언가를 읽고 있지 않을 때 그녀는 다가오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녀는 그들에게 뜨겁고도 차가운 태도로 대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매혹한다. 그런 무지로매혹한다. 그녀는 누군가의 마음에 드는 것이 귀찮은것 같다. 당신에게도 그녀 자신에게도 지친 만사에 지친 모습이다. 존재하면서도 부재한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유년기를 향해 돌아서 있다. 스무 살 적에는 검고긴 머리의 여자였다. 어깨 위로 강물이 흐르고 유순함을 갑옷처럼 둘렀던 여자였다. 휴면 중인 노트 안에서그녀가 찾는 것이 아마도 그것이다. 예전의 얼굴, 열린이미지이다. 검은 잉크를 쓸어내리는 말들의 빛. 아마도 그것이거나 아니면 다른 것. 혹은 아무것도 없는지도 - P90

신문 읽기는 진지한행위이다. 진지한 모든 일이 그렇듯 삶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성서는 다르다. 성서의 한 문장은무수알코올 한 방울, 천사들의 눈물 한 방울과 같다. 책을 펴고 책장 속 어딘가를 짚으면 손가락 밑에는 물고기나 양 한 마리, 야자수 한 그루가 있다. 책을 읽는 순간 당신은 당신의 삶으로부터 삶 자체로, 단순 현재에서 완료된 현재로 건너간다. - P99

우리는 사랑을 하듯 책을 읽는다. 사랑에 빠지듯 책속으로 들어간다. 희망을 품고, 조바심을 낸다. 단 하나의 몸 안에서 수면을 찾고, 단 하나의 문장 속에서 침묵에 가닿겠다는 그런 욕구의 부추김을 받으며, 그런 욕구의 물리칠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다. 조바심을 내며,
희망을 품는다. 그러다 때로 무슨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이 목소리처럼, 일체의 조바심을 몰아내고 일체의 희망에 딴죽을 거는 무언가다. 그것은 위로하려 하지 않고 마음을 진정시키며, 유혹하지 않고 황홀감을 준다.  - P108

작가는 일체의 명징함을 제 손에 움켜쥔 자이지만,
성인(聖人)은 제 손에 일체의 어둠을 움켜쥔 자이다. 작가는 빛으로 잉크를 만들지만, 성인은 불순함을 가지고 더없이 순정한 무언가를 만든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이 목소리가 성인의 목소리는 아니다. 그건 분명한사실이다. 그렇다고 작가의 목소리라고도 할 수 없다.
목소리는 그 둘 사이에서 방황한다. 땅과 하늘 사이, 책과 천사들 사이에 자리한, 우레 같은 검은 목소리다.  - P109

광인이란, 자신의 광기를 더 이상 주체하지못하고 단번에 이 광기의 물을 쏟아내는 정신이 말짱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파탄이 나고 만다. 언어의 고역이나 우스꽝스러운 노동 등, 오로지 자신을 근거로 삼는 일들을 단념해버린다. 세상 전부를 포기한다. 광인은 무대 뒤로 사라지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이 목소리는 아직 무대 위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 그렇게 목소리는 말을 한다. 당신의 지성과당신의 봄, 당신의 믿음이라는 게 대체 무언지. 당신의원칙, 당신의 보물창고, 당신의 객설이라는 게 무언지.
당신의 건강 이면엔 폐허가 널려 있다는 걸, 당신의 부부생활 이면에 얼마나 끔찍한 증오심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목소리가 말해준다.  - P111

‘우리 안엔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없다. 색깔도 형해도 없는 기다림이 있을 뿐.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아니다. 이 기다림은 공기와 공기가 섞이듯 우리 안에존재한다. 그 무엇과도 닮지 않은 지루함의 절정이라고나 할 수 있는 기다림. 이 기다림이 그곳에 항시 존재했던 건 아니다. 우리가 항시 무(無)였던 것도 그 누구도 아닌 사람이었던 것도 아니다. 유년기의 우리는 전부였고, 신(神)은 우리 영역의 미미한 일부에 불과했었다. 풀밭 속의 풀잎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 P119

우린 기다린다. 기다림이 스스로 굴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잠을 자거나 죽는것이 매한가지일 때까지, 우린 기다린다. 사랑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사막을 배경으로 처음엔 보이지 않고 그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다.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나아가는 모습이 보일 뿐이다. 사랑은자신을 향해 스스로의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 P120

부재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부재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무(無)임을 자각한다. 임박한 죽음 앞에서 몸을 떠는 짐승의 막연한자각이다. - P123

당신이 내 고독의 원인은 아니다. 고독은 당신보다훨씬 앞서 내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당신은 그것을 깨어나게 한 당신은, 그 고독을 가장 닮은 여자일 뿐.

사랑이 끝나는 순간 세 동방박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우수와 침묵과 기쁨 그들이 푸른 대기 속을 천천히나아간다. 어둠의 왕관과 황금 눈물을 가지고서. 유년기에서 걸어 나온 이들이다. 그들은 영혼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천천히 날마다 조금씩 우수와 침묵과 기쁨. 언제나 같은 순서다. 침묵이 한복판에 중심에 있다.

침묵의 희고 작은 드레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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