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우리가 책을 읽는 건 아니다. 삶이 깨어나는 시기, 두 눈이 처음 사물을 보기 시작하는 시기엔 책을 읽지 않는다. 입으로, 양손으로 삶을 집어삼키지만아직 잉크로 눈을 더럽히지는 않는다. 삶의 시원. 첫 수원(水源), 유년의 개울에서는 책을 읽지 않는다. 책을 읽겠다는 생각도, 어느 책의 페이지나 어느 문장의 문을뒤로하고 쾅 닫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아니, 처음엔 더 단순하다. 어쩌면 더 실성한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무엇과도, 그 무엇에 의해서도 분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우리는 진정한 제약이라고는 없는 첫 대륙에속해 있다. 이 대륙은 바로 당신, 당신 자신이다.  - P11

끊김도 찢김도 없는 온전한 당신이다. 쉽사리 헤아려지는 무한한 공간. 그 안에 책은 없다. 책이들어설 자리, 독서라는 경이로운 애도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 P12

글을 읽는 첫 경험. 책의한 페이지를 해독하고 어렴풋한 형체들을 감지할 수있게 된 첫 경험. 그것은 행복을 넘어서는 정확히 말해기쁨이라고 할 만한 무엇이다. 기쁨과 공포라 할 만한무엇. 기쁨은 어김없이 공포를 수반하고 책들은 언제나 애도를 수반하기 마련이니까.

이렇게 세상의 첫 막이 내리면 다른 무언가가 시작된다. 대개는 따분한 무언가다. 글을 읽게 되면서부터우리는 자신에게 무가치한 희생만을 요구하는 것들을사게 된다. 말하자면 교실에 앉을 자리 하나, 혹은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떠맡는 직책 하나. 그러고 나면 우리는 단념한다.  - P13

그들은 언제나 그 지점에 머무르며 삶이 다해가는 순간까지 책을 읽는다. 고독을 발견했던그러니까 언어의고독과 영혼들의 고독을 발견했던 첫 경험의 언저리에 머문다. 그들은 황홀감에 취해 세상에서 물러나 이고독을 향해 간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고독의 골은 깊어진다. 더 많이 읽을수록 아는 건 점점 더 적어진다.
이 사람들이 작가와 서점 출판사, 인쇄소를 먹여 살린다.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위대한 책이든 나쁜 책이든 신문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읽는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그것들 모두가 양식이 되어준다. 요컨대 한쪽에는 아무것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읽기가 전부인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는 수많은 경계가 있다. 돈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런데 책을 읽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의 경계는 돈의 경계보다 더 폐쇄적이다.  - P15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겐 결핍이 부족하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는 눈에 띄는 벽이자리하지만 이 벽은 유동적이고 군데군데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사이의 벽은 땅속 깊은 곳, 얼굴 밑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책이라면 손도 대지 않는 부자들이 있는가 하면 독서에 송두리째 마음을 빼앗긴 가난한 사람들도 있다.
누가 가난한 사람이고 누가 부자일까. 누가 죽은 사람이고 누가 산 사람일까? 답변이 불가능한 질문이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들은 과묵한 무리를 형성한다.
이 사람들에겐 물건이 말을 대신한다.  - P16

그런데 다른 한 편에는 손이라고는 아예 없는 사람들, 황금도 잉크도 박탈당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글을 쓰는 것이다. 오직 그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요컨대 타자를 지향하는 글이 아니라면 흥미로운 글일 수 없다. 글쓰기는 분열된세상과 끝장을 보기 위한 것이며, 계급체제에 등을 돌림으로써 건드릴 수 없는 것들을 건드리기 위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결코 읽지 않을 한 권의 책을 바로 그들에게 바치기 위해서이다. - P17

영혼 없이도 우리는 너끈히 살아갈 수 있으니, 무슨 큰일이 난 것처럼 법석을 떨 필요도없다. 그건 너무나도 흔한 일이니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이름을 불러도 사물들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부재하지만 세상이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감쪽같이 속여 넘길 수 있다. 짐승들을 제외하고, 나무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모두를 속일 수 있다. 그렇게 모두가 속아 넘어가지만, 그래도 금빛 가을 햇살만은 속지 않는다. 자작나무 껍질과 장미나무 속살을 한없이 부드럽게 감싸 안는 그 빛은 결코 속지 않는다. 우리를 피해 달아나는 그빛을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직접적인 삶에 어떻게 가 닿는다지? 단순한 삶으로 어떻게 돌아갈 수있을까? 프로방스 숲속에 번진 시뻘건 산불처럼 사랑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풀이 다시 자랄 것이다.  - P25

죽음과 잇따른 재생에 관한 이야기. 그녀는 마치 쓰지않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글을 쓴다. 문체에는 관심을두지 않는다. 그 대신 백지 위로 결단코 오지 않을 그것1에 한마디 말에 겁을 집어먹을 그것에 무엇보다 공을들인다. 요컨대 삶에, 발가벗겨진 삶에 가식 없는 단순명료한 삶,  - P27

오랫동안,오랫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사랑의 본성이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이 사실이야말로 사랑이 갖춘 위엄이자, 사랑의 놀라운 특성이다. 소음과 부산함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온갖 발작으로부터도 훌쩍 떨어져,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사랑은, 그리고 사랑의 가볍고 경쾌한 자각이자 더없이 겸허한 형상이며 각성한 얼굴인 시(詩)는 심오한 기다림이고 달콤한 기다림이다. 부드럽고도 오묘하게 반짝이는 희망이다. - P36

위대한 책은 그 책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시작된다. 어떤 책이 위대하다는 건, 그 책에서 점차 드러나보이는 절망의 위대함을 의미한다. 책 위에 무겁게 드러워져 책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한참을 가로막는 그모든 어둠을 의미한다. 책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 책이 있기 전, 글이 써지기도 전에 모든 것이 시작된다.
즉 아버지의 떠도는 그림자가 있고, 번잡한 날들 속에서 첫 시구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라신과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담갈색 밤이 있다. 사방에서 꿈은 짓밟히고, 자신과 지나치게 밀착되어 글쓰기는 불가능해진다. 불만에 찬 왕, 폭력적인 아버지로 인해 갈가리 찢긴유년기에 너무 밀착된 상태로는 글쓰기가 불가능하다. - P47

시작은 절름발이이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우아함이 깃든다. 이 둘 사이에서 정신은 필연적으로 성장하지만 학습의 성과나 지속성은 오락가락한다. 시작과 끝은 동시에 주어진다는 걸 우린 나중에야 알게 된다. 아이의서투름과 신의 경쾌함, 꽃과 열매는 전혀 다르지 않다는 걸 훨씬 뒤에야 알게 된다. 우아함이 우리의 서투름을 몰아내는 게 아니다. 우아함은 서투름을 완성한다.
두 개의 음이 떨리는 순간 음악은 이미 환한 빛을 발하며 그곳에 있다. 미약한 시작 속에 성취되어 있다. 그다음은 단순하다. 잇따르는 습득은 아무것도 아니다. 음악이 자신에게 오도록 내버려 두면 된다. 느린 걸음으로 날마다 조금씩 더 가까이. 황금 말인 음악을 길들이는 것이다. 당신의 손가락으로 그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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