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고 맑은 저녁이다.
푸르게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정월 대보름이 지난지 이틀째인데 달이, 쟁반같이 둥근달이 슬쩍 떠올랐다.
나는 왜 매번 보름달만 보면 혼불의 춘복이가 피가 터져라 외치는 ˝달 봤다아˝가 떠오를까?
그만큼 강렬했던, 그만큼 간절한 춘복이의 욕망이 달처럼 환해 설까?
하여 다시금 혼불 5권을 스륵스륵 펼쳐본다.
달이, 많다.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달들의 문장을 구경한다. 덕분에 언제나 나를 홀리는 초저녁 초승달을 보면 이제는 강실이가 소환될 것 같다.

어쩜 문장들을 저렇게 쓸 수 있을까? 철심을 눌러 쓴 듯한 최명희선생님의 글 앞에서 새벽 하늘에 비수같이 떠 있는 그믐달을 만난다.

달이야 어느 땐들 유정(有情) 하지 않을까.
초저녁 동산 위에 가느소롬 곱게 뜬 각시 눈썹같이 이제 막 생겨나기 시작하는 초승달이나, 무심코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그렇게 흰 살이 차 오른 반달, 그리고 참으로 온전하고 둥글어서 오직 우러러 바라보며 한동안을 그대로 서 있게 하는 보름달이며, 그 달이 한쪽부터 서운하게 이지러져 드디어는 하현(下)에 이르다가, 이제는 사윌 대로 사위어 빛을 다 깎여 버린 마지막 푸른 손톱이, 끝내 잠 못 이룬 채, 아직도 캄캄한 사경(四)의 새벽 하늘에 비수같이 떠 있는 그믐달.
우주 만물 삼라만상이 모두 한 빛으로 어둠에 잠기는 밤, 야청의 하늘에 홀로 뜬 달의 그 모양은, 때로 꿈 같고, 때로 넘치도록 충만하고,
때로는 또 처연한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여, 누구라도 달이 있는 밤에는그 달을 올려다보게 하지만,
정작으로 좋은 것은, 달의 모양이 아니라 달빛일 것이다.
- P38

해동(東)의 밭머리에 자운영 돋으면서, 건듯 스치는 바람결에도 부드러운 흙냄새가 섞여 있어, 흙이 열리는 향훈을 느낄 수가 있는 밤.
물오른 나무들이 젖은 숨을 뿜어 내어 촉촉한 대기 속 어디선가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가 연연하게 들릴 것만 같은데,
연분홍 살구꽃 수줍게 만개한 봄밤이나, 진분홍색 도발하는 복사꽃이 홀리듯이 피어나는 봄밤에 뜬 달은 잦아들게 애달프다. 부연 안개와 같은 기운이 구름도 아니면서 둥근 달의 낯을 가리워 감싸고 번지는 조요한 달빛은, 차라리 맑게 드러난 명월보다 묘취가 있다.
안타까운 연두빛을 머금어 포료한 그 달빛은 먼 산 봉우리를 아득히잠기게 하고, 살 속으로 습기같이 스며들어 피를 자욱하게 하니,
- P39

멍석에 둘러앉아 웃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차 오르는 달빛이 귓전에부서질 때, 괄괄괄, 촤르르르흐, 서 소리는 개울물 소리인가, 달빛 소리인가, 아니면 구슬을 파랗게 쏟는 소리인가.
이 달빛이 형광으로 찍힌 것 같던 박꽃들이 이울어 둥그렇게 달덩이로 떠오를 무렵이면, 밤 사이 뜰에는 찬 이슬이 내리고, 하늘은 물 속으로 가라앉아 가을이 깊어진다.
- P40

겨울은 사물이 살을 버리고 뼈로 돌아가는 계절이다.
그래서 제 형상을 갖지 않은 물마저도, 흐르고 흐르던 그 살을 허옇게 뒤집어 뼈다귀 드러내며 얼어붙는다.
그뿐인가, 바람 또한 결의 뼈를 날카롭게 세워 회초리로 허공을 가르며 후려치니,
날새의 자취도 그치고, 사람도 다니지 않으며, 짐승 또한 굴 속으로 들어가 몸을 사리는 혹독한 추위 속에, 사위를 둘러보아 그 무슨이나 온기 한 점 얻을 길 없는 삼동(三冬).
헐벗은 잿빛으로 앙상한 골격을 뻗치고 있는 낙목한천겨울 달은 얼음처럼 떠오른다.
그래서 그 이름을 빙륜이라 하는가.
얼음보다 차고 맑은 둥근 달은, 얼음가루가 안개같이 서린 손으로 삭막한 세상의 밤을 쓸어 내리며 푸르게 푸르게 옥물 들인다. 물든 밤은 그대로 다시 투명하게 얼어, 대낮같이 환한 달이 뜬 밤이면, 웬일인지 달 없는 밤보다 더 춥게 느껴지곤 한다.
아마 빛으로 속이 꿰뚫리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 P42


그 흰 눈도 없는 극한(極寒)의 밤에, 들여다보기 무서우리 만큼 깊고검푸른 거울이, 티 하나 없이 말갛게 씻기워 상공에 걸린 겨울 밤 하늘, 그 가슴 한복판에 얼음으로 깎은 흰 달이 부시도록 시리게 박혀 있는 빙월(水月)이야말로, 달의 정(精)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강실이는 그 냉염한 달을 오래 오래 우러르며, 버선의 발등에 묻은 달빛이 속으로 얼어들어도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모른다.
다만 그네는 몇 번인가 고개를 돌려 희부연 댓돌 위에 뎅그마니 놓인 검은 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었다.
그 신은 얼핏 보면 달빛의 얼룩인가 싶기도 하였다.
- P43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어두운 하늘이 트이면서, 황금 눈길이신 달의 정수리가 능선 위로 가느다랗게 비치었다.
"달 봤다아."
춘복이는 거멍굴 동산의 꼭대기 바위 날망에 올라, 두 다리를 장승마냥 뻗치고 선 채로 두 팔을 공중으로 번쩍 치켜 올리며 부르짖었다.
그 소리는 사나운 산짐승이 달을 보고 잡아먹을 듯이 응그리며운 용틀임으로 으르렁거리는 것같이 들렸다. 아니면 시퍼렇게 이들도록 오래 참고 참아 온 울음을 한 목에 터뜨리는 소리 같기도 하였다.
"달 봤다아아."
비명에 가까운 춘복이의 고함 소리가 동산을 뒤흔들며 공중에 울때, 함께 올라온 거멍굴 사람들은 달을 향해 넙죽이 큰절을 올렸다.
소원을 비는 것이다.
- P176

춘복이는 마음에 먹은 일이 있어, 힘이 되기만 한다면 풀뿌리, 바윗를 지나가는 바람한테라도 절절히 빌고 싶은 심정이었으며, 꾀를 빌릴수만 있다면 사람은 그만두고 들짐승, 날짐승한테라도 엎드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며칠 전부터 옴짝도 하지 않고 제 오막살이 농막에 웅크린 채, 그는오직 한 사람 강실이를 생각하며 궁리에 궁리를 기웠다가 뜯어냈다 뒤척이던 끝에 오늘, 달맞이에 일의 성패를 건 미친 사람처럼 단걸음에 내달아, 누구보다 먼저 동산 위의 날망에 올라선 심정이야.
그리고 드디어는 이렇게 달을 보고 만 것이다.
달을 차지하고 만 것이다.
춘복이는 숨이 막혀 지레 가슴이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작은아씨를 내 사람 되게 해 주시요."
- P177


그것은 거대한 달이었다. 온전하게 둥그런 얼굴로, 검은 파도처럼 첩첩한 산 능선을 발 아래 치맛자락같이 거느리면서 떠오른 보름달은 놀랍게 크고 너무나 가까웠다. 무엇만이나 하다고 해야 할까. 춘복이는그렇게 큰 달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일이 없었다. 얼른 보면 커다란 방죽만 한 것 같지만 누우런 황금빛 용암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빛의 물살을 끝없이 뒤채는 이 달에는 어림없는 말이었다.
 보통 때 무심코 올려다보면 둥그렇게 눈 안에 들어오던 그 조그만 달이, 지금은 그의 두 팔을 벌린 아름으로는 당치도 않게 거대하여, 그것은 떠오른다기보다는 흥건하게 무거워서 금방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달은 그의 머리 위에 뜬 것이 아니었다.
싯누렇다 못하여 화광을 받은 것처럼 붉은 주홍빛을 머금고 있는 그달은 바로 춘복이의 눈앞에 바짝 들이밀려와 있었다. 마치 놀라 바라보는 춘복이를 그대로 덮쳐 한 입에 삼켜 버릴 듯한 기세로.
가슴패기 맞닿게.
그는 숨이 질려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채 얼른 다물지를 못하였다.
달은 거대한 빛의 아가리였다.
그 아가리의 빛이 장마진 붉덕물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회오리 돌았다. 한번 빠지면 못 나오는 늪이 용틀임으로 뒤집히는 아가리.
- P183


인간의 갈피에 고인 시름과 눈물을 서럽게 위로해 주기는커녕,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고 빨아들여 빛으로 덮쳐 버릴 것 같은 그 붉누런 빛의 밀물을, 칼로 도려낸 듯 차갑게 뚜렷한 원으로 삼엄하게 가두는 달의 서슬에, 몇 낱 별빛마저 무색하게 지워져 버린 겨울 밤 하늘은 이 시린 궁청빛으로 깊어 더욱 시퍼렇다.
그 앞에 홀로 마주선 춘복이는 한 점 티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달빛에 휩쓸리면 그 심연의 수렁 속으로 말려 들어가 다시는헤어나오지 못할, 아니면 그 물살에 떠밀려 곤두박질치며 떠내려 갈.
달은 무서운 기세로 점점 가까이 부딪칠 것처럼 다가왔다.
그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견고한 빛의 바위덩이 암벽 같기도 하였다.
아아, 차라리 저 달에 부딪쳐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죽고 싶다.
춘복이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달을 향하여 가슴을 내밀고 온몸으로 버티고 마주쳤다.
달은 아까보다 숨막히게 더 가까웠다.
가까이 온 달은 다시 누렇게 뒤집히어 붉덕물을 일으키면서, 거문거뭇 멍든 골짜기로 춘복이를 빨아들여 삼키려 하였다.
내가 너를 삼키리라.
- P184

춘복이는 입을 크게 벌리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달의, 싯누렇게 뒤집히며 붉덕물을 일으키는 소용돌이 달빛을 깊이깊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목으로 빨려들어오는 달빛은 가슴을 깎으며 아프게 비집고 내려가 다시 폐장을 가득 채웠다.
이윽고 가슴이 벌어져 쪼개질 것 같은 통증에 그는 잠시 숨을 멈추었지만, 그곳에 뼈다귀처럼 걸린 달빛을 아랫배로 밀어내리고, 다시 무서운 기세로 흡월을 하였다. 머리꼭지 정수리에서 어깨뼈와 가슴팍, 그리고 단전과 손가락 발가락 끝까지 터질 만큼 차 오르도록 달빛을 들이켜는춘복이의 몸은 둥그렇게 부풀어 올랐다.
내가 너를 삼키리라.
그는 드디어 달빛에 딸려 오는 달이 덩어리째 삼켜질 때까지 그렇게사나운 짐승처럼 서서 흡월을 할 작정인 것 같았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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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2장 <제 2의 성>스캔들 편까지 읽었다. 1993년판 을유문화사 <제 2의 성>을 가지고 있다. 마구마구 읽고 싶은 욕구가 배를 부글부글하게 만든다. 이제 그 책을 읽을 때가 도래한 것인가, 흡~!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어느 부분에 마음을 쓰고 일궈나가야 하는가? 바로 우리의 행동이다. 보부아르의 대답은 이렇다.
행동해야 하느냐고? 행동만이 나의 것, 오직 나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을 통해서 나는 지금의 내가 된다. 오직 나만이 나와 타자를묶는 끈을 더 이롭게 혹은 더 나쁘게 창조하거나 유지할 수 있다.
나와 타자의 관계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새로이 창조해야하는 것. 죽을 때까지 풍성하게 가꾸든가 무시하고 남용하든가 하는것이다. 30)보부아르는 십년 넘게 사르트르와 자유 개념을 토론했고 어릴 적하느님을 사랑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자기가 믿는 철학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 P256

하지만 헌신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려는 태도는 문제가 있다. 일단 헌신의 대상이 자기가 요구하지도 않았던 것을 받아들이는데 나의 행복이 달려 있다면 그 대상은 짜증이 날지도 모른다. 또한헌신을 통해서 타자의 자유를 그의 의지에 반하는 방향으로 제한한다면 타자를 위한 헌신이 되레 억압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너무 많은이가 타인에게 헌신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기에 보부아르는 궁금했다. 억압자가 되지 않으면서 헌신한다는 것이 가능한가??)이제 투명하리만치 분명해졌다. 사르트르가 제안한 것과는 다른,
자유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자유에 제한이 없다는 그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었다. 우리의 선택은 타자들의 선택에 제한당하고 우리 역시 그들의 선택을 제한한다. 그러므로 자유롭고자 애쓰는 것으로는충분치 않다. 위선 없이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자라면 누구나 다른사람의 자유도 소중히 여기고 자유를 윤리적으로 행사하는 방향으로33)행동해야만 했다.
보부아르는 독자들이 자기 책을 읽고서 그들의 행동이 그들의 삶속 타자들의 세계를 형성하고 행동의 조건까지 생성한다는 시각을얻기를 바랐다. 보부아르는 이전의 정치적 무관심을 강하게 부정하는중이었다. 하지만 이 태도가 얼마나 그녀가 마주한 상황에서 비롯된것인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순간과 사생활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무게를 지녔는지는 분명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 P257

실존주의는 어떤 윤리학도 암시하지 않습니다. 나는 실존주의에서윤리학을 끄집어내려고 했지요. 그 윤리학을 《피로스와 키네아스》라는 에세이에서 자세히 썼고, 소설과 희곡으로도, 다시 말해 훨씬 구체적인 동시에 모호한 형식으로도 내가 찾은 답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37) 그런데 보부아르는 왜 이 중대한 철학적 공헌을 회고록에서누락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이해하려면 보부아르가 대외적으로는사뭇 다른 자기가 되기로 선택한 과정을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 P259

백지를 마주하고 하니 있다. 친구이자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그녀를 보고 사나워 보인다고했다. 보부아르는 글을 쓰고 싶은데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자코메티는 "아무거나 써봐요."라고 했다. 보부아르는 자전 문학의 새 지평을 연 미셀 레리스의 소설 《성년)을 좋아했기 때문데 자기이야기도 그렇게 한번 써보고 싶었다. 발상이 차차 얼개를 갖추었다.
메모를 좀 하고 사르트르와 얘기를 나눴다. 보부아르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내가 여성이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보부아르의 회고록에서 사르트르와 나눈 대화는 일종의 계시처럼묘사된다. 상황의 힘에서 보부아르는 처음에는 자기가 여성이라는사실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열등감을 느낀 적도 없고, 보이주장으로는 "아무도 감히 나에게 ‘네가 여자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지야.‘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의 여성성은 어떤 식으로든 귀찮았던 집이없다."라고 했다.7)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좀 더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다. 그녀가 남자아이처럼 양육받고 자란 건 아니었다. 그래서보부아르는 그 문제를 파고들었고 그제야 비로소 세상이 얼마나 남성적인지 깨달았다. 자신의 유년기를 형성한 수많은 신화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다르게 형성했다.  - P284

마거릿 사이먼,
그는 보부아르가 그 전에 여성성을 사유해보지 않았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했다고 지적한다. 일기, 편지, 자전적 작품과 허구적 작품리 러 대목에서 반증을 찾을 수 있다. 생각이 깊고 주도면밀한 보부아르가 그 일화를 의도적으로 거짓되게 썼을 거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십 대의 보부아르는 철학의 개척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고, 진로 선택을 두고 부모 앞에서 침묵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바람을 이루려면 여성에게 전통적으로 주어지는 역할중 어떤 것과는 소원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십 대의 보부아르는 잔 메르시에 선생님에게 철학적 이성과 감정적인 면이 어떻게공존할 수 있을지 물었다. 메르시에는 감정도 온전한 생을 이루는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1927년 7월에 보부아르는 "여성으로 남고 싶지만 두뇌는 더 남성적이면 좋겠고 감성은 더 여성적이면 좋겠다고 썼다.
그로부터 십여 년 후 서른두 살이 되어 가는 보부아르는 전쟁 중에이런 글을 썼다. "내가 완연한 성인 여성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 여성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 사르트르에게도 자기가 정말로 관심을 두는 자신의 일면에 대해 썼다. 바로 자신의 "여성성", "나는 어편 면에서 여성스럽고 어떤 면에서 그렇지 않은가, 라는 문제였다.  - P285

수 세기 동안 오로지 남성들만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어 왔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은 남성에게 속해 있다. 그 세상에는 여성의 자리도있지만 결코 여성에게 편한 자리는 아니다. 남성은 자연스럽게 자기가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영지를 탐색한다. 그는 알고자 하는 호가심으로세상을 연구하고, 자신의 사유로 그 세상을 지배하려 애쓰고, 예술을 다개로 삼아 그 세상을 새롭게 창조했노라 주장하기까지 한다. 아무것도그를 저지하거나 제한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여성의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 P296

여성의 상황은 최근 들어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투표권을 얻었을뿐 아니라 프랑스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실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교육과 기회에 다가갈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그 결과 여성은 점점 자신에 대한 내적 앎을 심화하기 원했고 "철학으로 눈을돌렸다. 1) 하지만 보부아르는 넘어서야 할 것이 아직도 많다고 생각했다. 여성성이 겸손과 너무 자주 동일시되는 탓에 여성들은 과감성이 부족하고 과감한 행동의 결과를 두려워한다. 보부아르는 여자들도 어릴 때는 꽤 자율적이지만 사랑과 행복을 위해 자율을 희생하라는 식의 말을 너무 많이 들으면서 자란다고 썼다. - P297

 반면에 남성은 남성성을 지키기 위해 성공을 희생하거나 마음 편히 살기 위해 성취를 포기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여성들만 이 모순에 시달렸다. 인격의 온전한 실현을 일부 포기하든가, 남성을 유혹하는 힘을 일부 포기하는가 들 중 하나라야 했다. "21) 하지만 성공이든 유혹이는 왜 그렇게 일부를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보부아르는 미국에 있는 동안 여성을 주제로 하는 책을 위해서 기억해 두고 싶은 것들이 생겼다. 다른 문화권에서 외국인의 시각을 취하다 보니 남성과 여성은 관계를 맺는 기준 자체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보부아르는 미국 여행기 에서 실제로 미국 여성이 프랑스 여성보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데 놀랐다고 썼다. 미국에 직접 가보기 전에는 "미국 여성"을 "자유로운 여성"의 동의어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미혼 여성은 충격적일 정도로 미국에서 존중받지 못했다. 처음에는 "미국 여성의 옷차림이 거의 성적이라고 할 만큼 여성성을 노골적으로 강조하는 데 놀랐다. - P301

《애매성의 윤리를 위하여》는 1948년에 영어로 출간되었다. 당시《피로스와 키네아스는 영어 번역본이 없었고 제2의 성》은 집필 단계였다. 그래서 이 저작이 어떻게 보부아르의 초기 철학을 발전시키고 이후 철학의 토대가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보부아르는 상황‘ 개념과 타인들이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방식을 여전히 사유하는 중이었다. 애매성의 윤리를 위하여는 윤리적으로 자유로워지려면 우리와 타자들의 유대를 받아들이는 데 자유를 사용해야 한다.
고 말한다. 보부아르는 이를 타자의 자유에 대한 호소" 혹은 "부름"
이라 불렀다. 모든 인간은 자기 인생이 그저 ‘하나의 인생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므로 진실하게 보이기를 바라고 중요한 의미가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 "정당화 되고 싶고, 삶에 의미가 있다고 느끼고 싶다. 그러나 타자의 자유의 부름을 듣지 않고 자기 자유의 부름만 듣는 태도는 유아론,  - P311

생의 한창때에서 보부아르는 1930년대 초에는 ‘페미니즘과 성전쟁‘이 자기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고 썼다. 그랬던 사람이 어쩌다 이른바 ‘페미니즘 성시‘를 쓰게 됐을까??
제2의 성을 출간할 때 보부아르는 마흔한 살이었다. 어려서부터어머니가 아버지와 불평등한 관계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았다. 하느님 앞에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고서부터는 사람들이 자신을 여자아이처럼 대하지 않기를 바랐다. 서점 직원에게 성추행을 당한 날부터는 모르는 남자들과 함께 있는 게 불편리다. 친구 자자는 지참금, 재산, 사랑의 가치를 비교하는 실랑이 속에서 눈을 감았다. 보부아르는 불법 낙태 시술 후 감염으로 고생하거나입원하는 친구들도 많이 보았다. 다른 여성들과 대화를 나눠보던 자기 동의 기능이나 쾌락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보부아르는 외국을 많이 다녀본 덕분에 관습이 공통적이라는 이유만으로 필연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 P320

제2의 성>의 첫 줄에서 보부아르는 ‘여성‘을 주제로 삼아 글을 쓸때의 망설임과 성가심을 숨기지 않는다. "여성에 대한 책을 쓰기 전에오랫동안 망설였다. 그렇지만 지난 세기에 "어리석은 잡소리"가 너무 많이 책으로 나왔다. 여성성의 상실을 슬퍼하면서 여성은 "여성이어야 하고, 여성으로 남아야 하고, 여성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그런 책들, 그래서 더는 옆에 서서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 P321

보부아르와 같은 세대인 디자이너 
샤넬은 바지를 입은 신여성으로서 중성적이면서도, 화려한 패권을 신보였다. 직업이 있는 여성의 수가 이렇게 많았던 적은 없었다. 예성은이제 막 투표권도 획득했다. 일부는 국가고시에서 남성보다 우수한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런데도 여성은 아직 자기 명의로 은행 계좌를만들 수 없었다. 1965년에 ‘나폴레옹 법전‘이 개정된 후에야 그런 일이 가능해진다. 1940년대 말에 ‘페미니즘‘은 당시에는 이 단어가여성 참정권 운동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는데 -- 미국과 프랑스두곳 모두에서 한계를 넘어섰다. 여성 침정권이 드디어 실현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이제 무엇을 바랄 것인가?
보부아르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인간이 타인의 신체적 특징에 기초한 계급, 심지어 노예 계급까지도 만들어내는 습관이 있음을 알았다.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성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보부아르는 남성이 여성을 ‘타자‘로 규정하고 자기들과 다른 계급 위상을 - 제2의 성을 - 부여했다고 주장했다.
- P322


모든 인간은 유일무이한 ‘상황‘에 놓여 있다. 남성과 여성이 처한구체적 상황은 평등하지 않다. 왜 그럴까? 누구나 알다시피 인간은두 범주로 나뉘어 있고 신체, 얼굴, 의복, 관심, 직업의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여성 생식기만 있으면 ‘여성‘으로 간주하기에 충분할까?
어떤 여성은 여성 생식기가 있지만 여성스럽지 않다"고 비난받는다.
소설가 조르주 상드 (Genge Sand)가 관습적인 여성성을 무시했을 때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제3의 성" 운운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보부아르는 묻는다. 신체적 여성성이 여성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면 여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여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보부아르는 여성은 남성이 아닌것이라고 답했다. 프로타고라스는 "인류는 만물의 척도" 라고 했다.
이때 ‘인류‘를 판단하는 기준은 남성이다. 역사를 통틀어 여성이 ‘인류‘의 문제와 무관한 시각을 지닌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남성이얼마나 많았던가. 심지어 1940년대에도 보부아르는 단지 여성이라는이유로 자기 견해가 묵살당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 P323


1949년 11월에 출간된 《제2의 성 두 번째 권에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문장이 들어 있다. 모든여성은 완결된 책이 아니라 일종의 ‘되기 이기 때문에 보부아르는 여성들의 생생한 경험을 기술함으로써 그들이 삶의 여정에서 내내 타자가 되고 마는 방식을 일부 보여주고 싶었다. 자기 자신도 아직은펼쳐진 책이요, ‘보부아르가 되는 중‘이었다. 보부아르는 자신의 것한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자기 앞의 장애물 중 어떤 것은 다른여성들의 ‘되기‘에도 고질적인 위협임을 알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보부아르는 아직도 알프레드 푸예의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는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되는 것" 이라는 생각에서 영감을 얻는 철학자였다. 이제 보부아르는 여성이 남성과 구별되거나 남성에게 복종하면서 사는 이유는 생물학, 심리학, 경제학에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문명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명‘은 시몬 드 보부아르와 함께 (좋은방향으로) 열심히 일했다. - P330

전쟁으로 인구가 감소한 프랑스는 국민이 필요했다. 보부아르는자신의 성별과 국가를 배신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건후 프랑스 산없은 경기 부양이 간절했고 그러자면 출산율 증가와 여성 노동력 증가가 모두 필요했다. 보부아르의 언어는 장소에 따라서 충격적으로 여겨졌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이제 와 《제2의 성》을 읽어보면정치적 상황이나 ‘엄마‘라는 노예가 되었다고 느껴본 적 없는 여성들의 경험 때문에 잘못 받아들여진 대목들이 있다. 보부아르는 임신부를 기생의 숙주, 종(種)에 매인 노예로 지칭했다. (쇼펜하우어도 동일한 표현을 썼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는 이렇게까지 격렬한 비난을 받지않았다.) 보부아르는 임신을 여성이 신체적 자율의 상실과 함께 개인적으로 "안으로부터 경험한다는 점, 엄마가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는 여성의 불안감에 관심을 두었다. 보부아르는 여성이 생식 기능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주목하는 이는 별로없었지만) 자신이 모성을 송두리째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말했다. 임신, 출산, 육아 같은 전형적인 여성만의 구체적 경험조차도여성의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경험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 P331


보부아르는 모성을 떠받드는 사회의 자기 기만을 고발했을 뿐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자신이 천착했던 주제, 즉 사랑과 헌신의 유리..
돌아갔다. 제2의 성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남성과 여성에게 기다른 의미로 통하고 이 차이에서 남녀 간의 불화가 빚어지는 경우가많다고 주장했다.
남성은 사랑에서 "주권이 있는 주체로 존재해 왔다. 남성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성도 삶 전체를 이루는 부분 중 하나로서, 자기가 분에서 추구하는 다른 것들과 나란히 두었다. 반면에 여성에게는 사람이 삶 자체처럼 제시되었다. 사랑의 이상은 여성들에게 자기 회생적인 삶, 더 심하게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자기를 완전히 망각할 것을 은근히 권했다. 남성은 장차 세상에서 활동하리라는 기대를 받고성장한다. 사랑도 하되, 다른 영역에서도 야망을 품고 왕성하게 활동을 펼치리라는 기대 말이다. 여성은 가치 있는 남자에게 사랑받아야자기 가치도 올라간다는 가르침 속에서 성장한다.
- P332

보부아르에게 사랑의 지배적 패러다임의 문제는 상호성의 결여‘에있는 것으로 보였다. 남성은 여성이 사랑에 헌신하기를 기대하면서자기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사랑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위험하다. 보부아르는 전적으로 남성의 잘못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여성도 상호적이지 않은 연애에 가담함으로써 억압 구조의 지속에 한몫을 한다. 그러나 사회가 여성이 자신을 압박하는 데 동의하도록 유도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는 탓에, 여성이 그 구조를 거부하기란 실로어려운 일이다.
제2의 성은 다분히 이성애 중심 언어로 논의를 펼치지만 보부아르는 여성과의 관계에서도 상호성을 둘러싼 갈등을 경험한 바 있다.
1940년에 비앙카 비넨펠트는 보부아르의 삶에서 더 중심적인 역할을원한다고 털어놓고 서로 얘기를 나눈 후 이런 편지를 썼다.
당신은 자기를 내어주지 않고 취하기만 해요..
내가 당신 인생이라는 말은 ‘거짓‘이죠. 당신의 인생은 모자이크니까.
- P333

그래도 나한테는 당신이 인생이에요. 내 전부가 당신 거예요.

보부아르는 진정한 사랑은 상호적 관계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관계가 좀 더 널리 퍼지기를 바랐다. "여성에게 사랑이 약점이아니라 강점이 될 수 있는 날, 자기 자신을 피하기보다는 되레 발견하게 되는 날, 자기를 체념하지 않고 되레 내세울 수 있는 날, 그때 비로소 사랑은 여성에게나 남성에게나 치명적 위험이 아니라 삶의 원천이 될 것이다. "2) 여성도 당당한 주체로서 연인과 자기 자신을 다 같이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상호적이지 않은 사랑의 신화가 여성을 부차적 위상에 붙잡아놓고 구원을 약속하면서 생지옥을 떠안기기 때문이다.
《제2의 성은 보부아르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의문을 낳는다. 얼마나 많은 자전적 요소를 보부아르의 철학으로 읽어낼수 있을까? 그리고 자전적 글쓰기 중 어느 것과 맞닿아 있을까?  - P334


토릴 모이는 시몬 드 보부아르: 지적 여성의 형성 에서 "시몬 드보부아르는 1949년 말에 진정한 시몬 드 보부아르가 되었다. 인간적으로나 직업적으로 그녀는 ‘만들어졌다."고 썼다. 6) 1949년 이후 보부아르가 했던 작업은 "회고적이고" "자서전 외에는 거의 쓴 것이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작가로서 보부아르는 아직 문학상 수상작 "레망다랭》과 다른 소설 두 권을 쓰기 전이었다. 자서전은 아직 한 권도쓰지 않았고 노년에 대한 책, 프랑스 법을 대폭 바꾸게 될 글들도 아직 쓰지 않았다. 《제2의 성》도 페미니즘 제2물결을 일으키는 역할을하기 전이었다. 페미니스트 운동가로서 이력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개인적인 삶 역시 상호 관계의 가능성을 여전히 붙들고 있었다.
보부아르는 아직도 되어야 할 것이 많았다.
-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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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생각에서 여전히 감탄할 만한 요소를 많이 찾았지만 그의 생각 전부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둘이 유스턴 역에 앉아 있을때 사르트르는 런던이 세계에 대한 자신의 전반적인 이해에 얼마나 잘 맞아 들어가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보부아르는 결핏하면 일반화하는 그의 습관에 짜증이 났고 그 가설이 허술하다고 생각
했다. 전에도 논쟁을 한 적이 있어서 새삼스러운 얘기도 아니었지만 보부아르는 말이 현실을 평가할 수는 없으며, 현실은 모호하고 불확실할지언정 있는 그대로 부딪처야 하는 거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사르트르는 세계를 관찰하고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대꾸했다. 그는 세계를 언어로 정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보부아르는 그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런던을 고작 12일 여행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사르트르는 경험을 살아내는 대신 글로 쓰려했고, 그 점이 보부아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에 대한 지금여기의 현실에 대한 충실성에 거슬렸다.  - P168

개인적으로 보부아르는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학생 시절일기에서 이미 고민했던, 자기를 얼마만큼 내어주고 얼마만큼 지켜야 하는가라고 보았다. "독립에 대한 갈망"과 "너무나 맹렬하게 타인에게 끌려가는 감정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보부아르는 수업 시간에 "여자들이 세상에 아이를 낳고 기르라고만 있는 게 아니다." 같은 주장을 펴거나 학부모들이 문제 삼을만한 책을 학생들에게 빌려주었다. 일부 학부모가 공식적으로 항의를 제기했지만 다행히 장학사가 보부아르의 편을 들어주었다.
- P171

다음 프로젝트를 생각해도 좋을 만큼 소설 작업은 막바지에 와 있었다. 보부아르는 "온전한 삶에 대한 소설을 쓰고싶었다. 자기 작업 외에 사르트르의 원고 검토 작업도 병행하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자유 개념으로 글을 쓰면서 원고가 진전되는 대로조금씩 보내 왔다. 보부아르는 원고를 베르그송과 칸트 철학에 비교해 가며 칭찬했지만 논증 전체를 보지 않고는 제대로 비판할 수 없다.
고 했다. 그리고 그 단계에서 반문하자면 자기는 이렇게 묻고 싶다고썼다. 일단 자유를 인식했다면 그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보부아르는 베르그송, 푸예, 라뇨, 그 외 철학자들을 탐독하던 십대 시절부터 자유의 철학에 관심을 두었다. 교수자격시험의 주요 주제였기 때문에 사르트르와도 토론을 많이 했다. 자유를 추상적 개념으로 생각하고 사르트르처럼 모든 자유가 평등하다고 주장해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살아낼 수 있는 철학을 원했다. 게다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자유가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중에 말했듯이) "상황이 각기 다르기에 자유 또한그러하다. " - P221


보부아르는 이미 1930년대에 사르트르의 주장이 틀렸다고 확신했다. 사르트르는 상황이 어떻든 인간은 다양한 반응 양식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보았다. 보부아르는 이렇게 반문한다. "하렘에 갇혀 사는 여성에게 어떤 유의 초월이 가능할까?")자유로운 것(원칙적으로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과 실제로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은 다르다. 보부아르는이러한 철학적 비판을 피로스와 키네아스 와 애매성의 윤리를 위하여〉라는 두 편의 에세이로 남긴다. 하지만 그 전에 초대받은 여자때문에 사생활에 튄 불똥을 처리해야 했다.
어머니는 딸의 첫 소설이 나오기 전까지는 사생활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래도 보부아르가 "착한 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초대받은 여자》 출간 이후 "세상의 소문이 어머니의 환상을 무참히 부수었다." 프랑수아즈는 그 책에 충격을 받았지만 딸이 유명 작가가 됐기때문에 한편으로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제 보부아르가 가장이었으므로 그녀의 성공은 가족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다.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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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이 학교가 얼마나 탁월한 선택이었는지 시실 갈 몰랐다.
단지 가톨리 신자들에게 평판이 좋다는 이유로 생트마리를 골랐다.
하지만 이 학교에서 시몬은 프랑스에서 그 누구보다 많은 학뒤를 소지한 교사 마들렌 다니엘루(Marcleleine Danielou)를 만났다. 마들렌은교육이 해방의 열쇠라고 믿었다. 남편이자 국회의원이었던 샤를 다니엘루도 생각이 같았다. 딸들이 다 컸고 남편도 집을 자주 비우다 보니 시간이 많았던 프랑수아즈는 독서와 공부에 매달리면서 시몬의 공부를 따라갔다. 머리가 좋았던 프랑수아즈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다니에루 선생의 커리큘럼에 감탄하게 되었다.
시몬은 어머니의 관심이 기쁘면서도 씁쓸했다. 어머니가 친구 같은 모녀 관계를 원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외할머니와 결코 누려보지 못했던 친밀함을 딸에게 바랐다. 하지만 어머니가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기보다는 무리하게 접근을 시도했기에 딸은더 움츠러들고 원망이 생겼다. 엘렌은 언니가 열여덟 살 때도 어머니가 언니 앞으로 오는 편지를 다 뜯어서 읽어보고 적절치 않다고 판단되는 편지는 버렸다고 말한다. 그러잖아도 깨알 같던 시몬의 손글씨는 마치 어머니의 염탐하는 눈을 피하려는 듯 점점 더 작아졌다.
- P77

확실히 나는 개인주의적이다. 하지만 개인주의적이면 타인을 사심 없이 사람하고 헌신할 수 없는 걸까? 나의 어떤 부분은 내어주는 것이 마땅하지만 또 다른 부분은 내가 지키고 고양해야 하는 것 같다. 후자의부분은 그 자체로 타당하고 타인의 가치를 보증한다.)시몬은 열여덟 살에 "공허하기만 한 철학 토론에 염증을 느끼고머리로 아는 것과 실생활에서 느끼는 것의 격차를 이미 고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학이 이 격차를 메워준다고 생각했다. 나는 삶을 재발견하는 작가가 좋다.  - P81

"처음부터 남자들은 나의 적이 아니라 동료였다. 나는 그들을 시기하기는커녕 내 위치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이미 일종의 특권이라고 느꼈다. "12) 보부아르는 나중에가서 자신이 토큰 여성 이었다고 인정했지만 이 토크니즘이 문제라고 인식한 것은 어디까지나 나중 일이다. 학생 시절에는 남학생들이보부아르를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 편한 친구로 지내기도 쉬웠다. 그 이유는 프랑스 교육 시스템이 남녀를 똑같이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학생들은 정원 외 인원‘으로 선발되었고 똑같은 일자리를 두고 남자들과 경쟁할 일이 없었다. (여성은 교사가 되더라도 여학교에만 갈 수 있었다. 프랑스 공교육은 여자아이들에게 열려 있었지만 남자 교사에게 여자아이들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였다.) - P98

토크 여성(Toker Woman) 남성 지배적인 조직에서 성차별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소수로 고용한 여성, 혹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공한 몇 안 되는 여성을 가리키는다.

토크(Tokenitem) 미국 사회학자 로자베스 켄터(Rosabeth Kanter)가 제시한 개념,
성, 인종, 종교, 민족 등 사회적 소수 집단에 대한 차별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소수 집단 내 상징적 인물을 조직에 포함시키거나 평등하게 처우하는 관행을 가리권다.
- P98


자자는 1929년 11월 25일에 죽었다. 그 후 보부아르는 이 일의 진실을 알게 되기까지 거의 30년을 기다려야 했다. 보부아르는 절망을느끼며 슬픔으로 추락했다. 자자와 나눴던 대화, 메를로퐁티의 편지가 말도 안 되게 느껴졌고 분노하다 못해 경악했다. 그 둘은 자기네들의 고통을 ‘영적으로 승화하고 진짜 원흉을 응징하기보다는 자기네들의 덕을 갈고 닦으려고 했다. 적절하게 산다는 것은 끔찍하게부당했다. 그들은 잘못이 없었다. 세상이 잘못했다. 그리고 하느님은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P110

보부아르는 삶이 다시 즐거워졌다. 친구가 많이 생기기도 했지만특히 마회, 메를로퐁티, 자자와 지자의 사망은 다섯 달 후에나 일어날 일이었다. - 함께할 수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살기를원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비록 자자는 그 모습을 "도덕 관념 없는 숙녀라고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재미가 있었다. 엘렌이 사르트르를 만나러 나간 날, 보부아르는 행복에 취해일기에 이렇게 썼다. "내 안에 비축된 풍요로운 것들이 반드시 흔적을 남길 거라는 확신, 내가 하는 말을 사람들이 귀 기울여 듣게 될 거라는 확신, 나의 삶이 다른 많은 이들이 목을 축이는 우물이 될 거라는 묘한 확신이 든다. 소명에 대한 확신이다.  - P115

사르트르는 프랑스에서 성공한 남성 작가들의 이름을 얼마든지 댈 수 있었다. 테몸에는 프랑스의 철학적 · 문학적 후손을 기념하며 나라의대문호를 찬미하는 묘비들이 가득했다. 보부아르에게 문학으로 기억되는 여성들의 이름은 별로 없었고 철학자로 기억되는 여성은 더 적었다. 앞서간 여성들은 전통 가치를 거부한 대가를 비싸게 치렀고 때때로 자유를 얻기 위해 행복을 희생했다. 보부아르는 더 나은 것을원했다. 왜 사랑을 희생해야만 자유를 얻는가? 혹은 왜 자유를 희생해서 사랑을 얻는가?
- P122

반면에 천재인 여성은 너무 화려하게 빛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100년에도 프랑스 교육 체계는 교수자격시험에서 남성보다 뛰어난 여성이라는 민감한 문제에 신중을 기했다. 교수자격시험 결과는운동 경기 순위처럼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점수가 가장 높은 사람부터 차례대로 이름이 나오는 식이었다. 그래서 이처럼 공식적이고 영향력 높은 시험에서 여학생보다 하위 점수를 기록한 남학생들은 비록교수 자리를 못 차지할 위험은 없었지만 창피해했다. (교육부는 이 굴욕을 덜어주려고 1891년부터 남학생 순위와 여학생 순위를 따로 발표했다.
그러다가 1924년부터는 다시 남녀 합산 순위제를 도입했다.)보부아르의 경험을 제대로 살펴보려면 그로부터 20년 전 사르트르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사르트르 어머니가 아들을 시댁에 뺏길까 봐황급히 파리를 떠났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아들에 대한 친모의 권리가 사망한 친부의 가족들 권리만도 못했다. 시몬이 공부하던 때만 해도 프랑스 여성들은 투표권이 없었고 자기 명의의 은행 계좌조차 만들 수 없었다. 시몬이 교수자격시험을 치르던 그해, 프랑스에서 대학에 다니는 여성은 전체 대학생의 24퍼센트였다. (그래도이전 세대인 1890년에는 1.7퍼센트로 전국에 288명 수준이었으니 폭발적으로 증가한 편이다.) 하지만 여성은 투표도 못하고 은행 거래도 못하는시대에 게다가 자기가 낳은 자식에 대한 권리도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에 무슨 권리를 일 순위로 누렸겠는가?
- P127

보부아르는 생애 후기에 사르트르의 초연함이 때때로 존경스러웠다고 말한다. 사르트르는 위대한 작가는 감정에 사로잡히기보다 감정을 포착해야 하므로 냉정함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또 어떨 때는 말이 "현실을 포착하기도 전에 죽여버린다."
고 느꼈다. 보부아르는 현실이 죽기를 원치 않았다. 현실 속에서 즐기고 싶었다. 방부 처리해서 후세에 남기기보다는 자기에게 다가오는그윽한 풍미를 맛보고 싶었다. 두 사람은 문학의 중요성에 동의했지만 문학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두고는 생각이 달랐다.
사르트르는 말에는 힘이 있지만 결국 문학은 속임수와 위장이라고보았다. 보부아르는 문학이 그 이상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버지니아울프를 읽으면서 경외감을 느꼈다. 문학과 삶의 간격을 좁히려 했던여성이 바로 거기 있었다. 보부아르는 세상을 알고 싶었고 진정으로세상을 드러내고 싶었다.
보부아르는 두 번째 회고록 《생의 한창때 에서 사르트르가 철학적인 면에서 경솔하고 부정확해 보일 때도 많았다고 썼다. 하지만 자신의 정확하고 치밀한 사유보다 그의 객기가 더 생산적인 사상을 만든다고 보았다.39) 이 경우에서든 다른 여러 경우에서든, 보부아르는 사르트르가 자기에게 없는 장점들을 바탕으로 삼아 자신감을 키웠다.
- P151

이 여행에서는 새로운 장소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전에는 본적없는 불평등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시몬 베유의 가시 돋친 말과 달리, 보부아르도 배고픔이 뭔지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기는 그래도 특권층이라는 사실을 그때까지는 실감하지 못했다. 남부 지방에내려가 만난 사촌은 그들에게 공장을 구경시켜주었다. 작업장은 더럽고 금속 분진이 자욱했다. 보부아르도 마르크스를 읽었고 노동과 가치의 관계에 눈뜨고 있었지만 파리에서 책으로 본 것과 공장 바닥에서 느낀 것은 천지 차이였다. 노동자들이 하루 몇 시간이나 근무하는지 물어보았고 죽도록 단조로운 일을 8시간 3교대제로 한다는 말에눈시울을 붉혔다.  - P158

‘자기 기만‘은 20세기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개념 중 하나가 되었다.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예로 든 웨이터‘는 역할을 연기한다‘는 것이 무엇이지 잘 보여준다. 그런데 왜 보부아르는 이 개념을
‘우리‘가 발견했다고 말하는가? 1930년대에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서로에게 무엇을 이바지했는지 명명백백하게 가리기란 매우 어렵다.
엘렌의 남편 리오넬 드 룰레(Lionel de Roulet)는 두 사람의 관계를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그들은 끊임없는 대화, 모든 것을 공유하는 방식을 통하여 서로를 너무 밀접하게 비춘 나머지 둘을 분리하려야 분리할 수 없게 됐다. "20)이 단계에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정치적 인식에 눈떴다. 비록원숙기의 보부아르는 이때의 그들을 돌아보며 "정신적 자부심이 넘쳤고" "정치적으로는 장님이었다."고 했지만 말이다.1) 오드리와 다른 친구들을 통해 트로츠키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들을 만났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자신들의 혁명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들의투쟁은 철학적이었다. 그들은 이성적이고 육체적인 자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논의했다. 그들은 자유를 이해하기 원했고 사르트르는 신체를 - 신체의 욕구와 습관을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생각했다. 비록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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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니 보부아르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격당한 사람이었다.
보부아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보부아르가 여성성으로부터 일탈한것을 강조하면서 그녀가 여성으로서 ‘실패작‘ 이라고 몰아붙였다. 후은 독창성이 없고 죄다 사르트르에게서 빌려 왔으므로 사상가로서실패했다고들 했다. 또는 자신의 도덕적 이상에서 벗어났으므로 인간으로서 실패했다고들 했다. 그래서 보부아르의 사상은 진지하게 논의되지 못하고 곧바로 묵살되기 일쑤였다.
원칙적으로 남성과 여성 모두 당연히 인신 공격의 오류에 발목을잡힐 수 있다. 상대의 성격이나 동기를 공격함으로써 관심을 당면한주제에서 다른 데로 돌리는 전략 말이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단순히성격 문제나 불순한 동기 때문에 비난받은 게 아니다. 그녀는 자연에역행했다고, ‘여성으로서 실패했다고 비난받았다. 최근의 심리학 연구는 이른바 ‘독자적(agentic)‘ 위치, 다시 말해 능력, 신망, 자기 주장을 포함하는 행위 주체성을 보여주는 지위를 획득한 여성들이 곧잘
"사회적 지배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여성이 전통적으로 남성이 차지하던 고위직을 노리거나 성취함으로써 젠더 위계를 깨뜨리면 거만하다거나 공격적이라는 평판이 나돌고 젠더 위계를유지하기 위해 — 때로는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 그런 여성을 끌어내리거나 깎아내리기 일쑤다. 47) - P31

보부아르의 철학은 학생 시절 일기에서부터 마지막 이론적 저작년) (1970년)에 이르기까지- 자기 되기의 두 측면을 구분한다. 하나는 ‘안에서 보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밖에서 보는 관점‘이다. 보부아르가 안에서 보았던 관점에 다가가려면 생애의 어떤 부분은 순전히 회고록에 의지해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회고록의 내용을 의심할 만한 이유가 없지 않으므로 나는 새로운 자료가 내용의 누락이나 모순을 입증하는 대목은 최대한 강조해서 다루었다.
또한 나는 자기 되기‘에 대한 보부아르의 이해가 나이를 먹으면서변했다는 데 주목했다. 알다시피 자기 자신을 보는 눈도 세월에 따라변한다. 심리학 연구들은 자기 개념이 달라지며 기억도 그에 맞추어선별된다는 것을 이미 여러 차례 보여주었다. 우리는 또한 사람은자기 말을 듣는 상대에 따라서 자기를 제시하는 방식을 여러모로 달리한다는 것도 안다.  - P32

이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거니와, 전기 작가의 연구 대상이 여성일 때는 더 어려워진다. 페미니스트 캐럴린 하일브런(CarolynFIeilbrun)이 지적했듯이 "여성의 진기는 기껏 집필이 되더라도 용인될 만한 논의, 무엇을 삭제해도 되겠는가에 대한 합의라는 제약 안에서 쓰인다. 5 보부아르의 삶은 관습에 저항했다. 타인의 사생활에 대한 고려나 그녀가 쓴 글의 적법성에 대한 고려는 일단 별개의 문제로뇌두더라도, 보부아르가 자신의 삶을 완전히 솔직하게 털어놓았더라면 더 큰 추문이 따랐을 것이고 독자들을 더 멀어지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보부아르는 자신의 철학과 사적인 관계에서 많은 부분을 누락했다. 안에서 본 관점‘을 많이 삭제한 것이다. 그렇게 한 이유는 많았고, 우리는 그 삶의 맥락에서 그 이유가 불거질 때마다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보부아르는 철학자였으므로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갈 질문이 있다. 왜 전기가 보부아르라는 인물의 생애와 작업에서중요한가?
- P33

이 책의 집필은 정말로 겁나는 일이었고 때로는 끔찍했다. 보부아르는 한 인간이었고 나는 가장 혼란스러운 기억이든, 경외감을 자아내는 기먹이든, 불확실한 기억이는 그의 기먹을 왜곡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지료 고증이 잘 되었더라도 한 인생에 대한 자료가 진짜고 인생은 아니다. 나는 내가 저한 상황의 이익에 좌우되며 보부아르가 이미 선별 대상으로 삼았던 자료에 의존한다는 점을 의식하면서선별에 임했다. 보부아르의 인간됨을 모든 면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감과 자기 의혹, 의욕과 절망, 지적 욕구와 육제적 열정을, 나는모든 읽기, 모든 친구, 모든 연인을 다루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보부아르의 철학은 포함했다. 그 철학 없이는 보부아르의 모순이나 공헌을 진실하게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보부아르는 장대한 삶을 살았다. 지구를 누비고 다니며 20세기 문학, 철학, 페미니즘의 아이콘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파블로 피카소,
알베르토 자코메티, 조세핀 베이커, 루이 암스트롱, 마일스 데이비스와도 만났다. 찰리 채플린과 르 코르뷔지에가 그녀를 위해 일부러 뉴욕 파티에 와서 자리를 빛내주었다.  - P37

하지만 철학이 없었다면 시몬 드 보부아르는 결코 시론 드 보부아르‘가 될 수 없었을 테고,
그 점은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 일단 보부아르가 사르트르의 제자였다는 신화가 너무 오래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커플이 의견 차이가 있던 지점, 그들의 지속적인 대화가 보부아르가 그녀 자신이 되는 데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한 부분일 뿐이다. 1963년에 보부아르는 이렇게작가의 삶에서 공개된 면은 그야말로 일차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내 문학 이력과 연관된 모든 것이 내 사생활의 일면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독자에게나 나 자신에게나, 공적 삶이있다는 것이 사적 관점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파악하려고 애써 왔다.  - P38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철학과 사랑을 비판했지만 사르트르는 첫만남 이후 바로 그랬던 것처럼 "사유의 견줄 데 없는 친구"로 그녀에게 남았다. 보부아르의 사유는 동시대인들에게 근본적인 도전이었고으레 묵살당하고 조롱과 멸시를 받았다. 그녀는 자기 정신의 가치와생산성을 인정하고 믿었기 때문에 사유하고 글 쓰는 삶을 선택했다.
보부아르는 열아홉 살에 이미 "내 삶에서 가장 뜻 깊은 부분은 나의생각들이다."라고 일기에 썼다. 그리고 59년 뒤 살면서 이뤄낸 그59)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78세의 보부아르는 여전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정신"이라고 했다.
- P38

버지니아 울프는 "어떤 이야기들은 세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 해야한다."고 썼다. 그러나 보부아르의 이야기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말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우리가 보부아르의 일기와 편지에 나오는설명을 읽고 나면, 또 철학을 향한 사랑, 전례 없는 방식의 사랑을 추구하고픈 욕망에 대한 설명을 읽고 나면 우리 눈에 비치는 보부아르의 삶의 모습은 달라진다.
- P39

그런 탓에 보부아르는 궁핍에서 한참 벗어난 후에도 절약 정신이투철했다. 공책에도 어찌나 깨알 같이 쓰는지 학교 선생님들이 알아보기 힘들다고 뭐라 할 정도였다. 시몬은 돈과 물자를 알뜰하게 쓸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렇게 썼다. "나는 늘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자신까지도 최대치로 써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시몬은 열심히공부하는 동시에 훌륭한 가톨릭 신자의 길을 익혔다. 그 노력이 얼마나 가상했던지 사제는 시몬의 어머니를 붙잡고 "눈부시게 아름다운영혼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시몬은 ‘수난의 천사들 이라**11)112)는 어린이 봉사단에도 들어갔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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