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 애치먼 Andre Achimain


1951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어를 쓰는 유대인 부모 밑에서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아랍어 등 다양한 언어를 접하며 성장했다. 1965년, 반유대주의를 비롯한 정치적 문제로 이집트를 떠났고 로마를 거쳐 뉴욕에 정착했다.
1995년 이집트에서의 어린 시절과 고국에서 추방된 후의 성찰을 담은 회고록 (아웃 오브 이집트)를 발표, 화이팅어워드논픽션 부문을 수상하며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비교적 늦은나이에 작가가 된 것에 대해 애치먼은 긴 잠복기를 가졌을뿐이라며, 자신에게 글쓰기는 직업이 아니라 사명이라 밝히기도 했다. 2007년 발표한 첫 소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람다 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물론 영화로도 만들어져 널리사랑받았다. 여덟 밤Eight White Nights 파인드 미 등의장편소설과 연작소설집 수수께끼 변주곡, 논픽션 (폴스 페이퍼 False Papers) 알리바이) 등을 출간하며 전방위적인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한편, 뉴욕시립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마르셀 프루스트 과목을 맡아 강의하고 있다.
(하버드 스퀘어는 방황하는 하버드 대학원생과 거친 택시운전사의 이야기로, 애치먼의 자전적 소설이라 평가받기도한다. 실제로 하버드에서 약 7년간 학업에 정진하던 애치먼은 전문적인 연구가 오히려 문학에 대한 개인적인 사랑을 짓누른다고 느끼고 학교를 떠나 증권사에 입사했다가 되돌아와 비교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작가 스스로 ˝하버드에서의 나날은 증오와 사랑의 시간˝이라고 밝혔듯, 자기애와 자기혐오가 뒤섞인 청춘의 기록이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활화산처럼 분노를 표출하고 인류 전체에 대해 과장된비난이나 쏟아냈을 뿐 그는 조금도 성장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성장했다고 생각하거나 성장한 척했다. 우리가 그에게 가할 수 있는 최악의 폭력은 그에게서 열일곱 살 소년을발견하는 것이었다. 그의 삶이 멈춰버린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그 이후로는 실수와 헛소리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을 뿐이었다.
- P87

하지만 차이점도 분명히 있었다. 그는 실험에서 대조고..
이었고 나는 실험군이었다. 그에겐 가짜 약이, 내게는 진가약이 주어졌다. 나는 신약의 효과를 경험한 반면 그는 왜약이 효과가 없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둘 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내겐 버티고 설 땅이 있었고 그는 언제나 방랑자였다. 내게는 영주권이, 그에게는 운전면허증이 있었다.
그는 날마다 벼랑 끝에 서 있었지만 나는 벼랑 밑을 내려다봐야 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게는 그 심연을 가릴 담장이나 생울타리가 항상 있었던 반면 그에게는 그런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 한편 또 다른 차이도 있었다. 그는 그 벼랑에서 물러서서 살아나올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벼랑과 나 사이에 그를 세워놓았다. 그는 내 가림막, 내 스승, 내 목소리였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추구했던 삶이 그의 삶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P96

문득 내가 칼라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라지는 아랍인 사이에서는 베르베르인이었고, 프랑스인 사이에서는 아랍인이었으며,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여겼다. 마찬가지로 나는 아랍인 사이에서는 유대인이었고, 낯선 이들 사이에서는 이집트인이었으며, 지금은 와스프사이에서 철저한 외계인, 라크로스팀이나 폴로팀에 지원하는 멍청한 잡역부였다.
나는 대서양 이편에 있는 모든 것을 증오했다.
그러고 보니 대서양 저편에 있는 것도 증오했다.
나는 미국과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증오했고, 지금 이 순간은 프랑스를 증오했다.  - P133

그때야 비로소 나는 부모님이 이집트에서 사시던 마지막해에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해하게 되었다. 추방되지 않기를간절히 바라면서, 추방되기를 기다리며 사는 것, 재산이 몰수되기를 기다리고, 끔찍한 소식을 가진 누군가가 초인종을 누르기를 기다리고,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기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기 - P163

볼륨을 아주 작게 해서 듣기를 좋아했다. 그 테너 색소폰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모든 나한 감정들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그 서정적인 선율에 맞춰여자와 합을 맞대고 춤추던 무더운 여름밤이 떠오른다고, 그음악은 자신에게도 사랑이 찾아올 거라는 걸 민지 않기로 결심한 후에도 사랑을 원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는 메모리얼거리와 스토로우 거리를 달리면서 그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 했고, 비컨 힐과 백 베이와 에스플러네이드 공원을 따라 늘어선 반짝이는 작은 불빛들을 보며 거리를 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밤에 운전을 하면 미국인이 된 기분이야. 마치 누아르영화에서 페도라를 비스듬히 눌러 쓰고 차를 몰면서 담배를피우는 악당이 된 것 같아." 한번은 승객이 음악을 바꿔달라고 요구했지만, 칼라지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승객이다시 요구하자 칼라지는 록스베리 한복판에서 급브레이크를밟았고, 그 백인 신사에게 내리라고 말했다.
- P167

유대인에 대해서는 험한 말을 한 번도 한 적 없는 칼라지였지만, 아랍 음악을 듣는 아랍인 택시운전사에겐 팁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유대인 승객에게는 그의 할머니와 당시에 아기였을 그의 아버지가 가스실로 직행하지 않아서 유감이라고, 만일 그랬다면 자신이 기꺼이 오븐에 불을 켰을 거라고 말했다.
그는 어디를 공략하면 상처를 줄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나의 어디를 공략하면 내가 상처를 받을지도 정확히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곳을 절대로 건드리지 않았다.
- P168

그는 세상을 모욕하기 위해, 사물을 보고 부르는 다른 방법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모든 것이 불로써세례를 받아 모든 위선과 신앙심을 깨끗이 씻어내야 자신의세계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주변의 모든 것에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모습으로, 혹은 그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으로 세상을 재창조하는 그만의방식이었다. 이 춥고 척박하고 대용품이 넘쳐나며 천박한 도시를 몇 단계 끌어내려, 친절하고 친밀하고 잘 도우며 더 밝은 곳으로 바꾸는 그만의 방식이기도 했다. 이렇게 바뀐 도시는 그에게 비밀 통로를 열고 웃으면서 그를 따를 것이다.  - P172

은 여기니까. "라고 말해주기를그는 카페 알제에서 만난 모든 사람을 자신의 비좁고 일 시적인 세계에 꽉꽉 밀어 넣었지만, 단 한 사람에게는 공기가잘 통하는 제일 좋은 방을 주었다.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는 피를 나눈 형제이자 공범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끝내 알지 못했다. 그가 다양한 삶의 방법을 내게보여주기 위해 다른 세상의 문을 더 열어젖히고 케임브리지에서 나를 끌어내려 하면 할수록, 나는 하버드가 내미는 작은특전과 잠정적인 약속을 더 절박하게 붙들고 늘어졌다는 사실을,
- P173

멀어져가는 그의 택시를 바라보면서, 우리를 친하게 만든 요인은 상상 속 프랑스와의 로맨스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그냥 가림막, 착각이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어디서도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극단적인 무능력이었다. 우리는 평범하게 사랑하고 평범한 집에서 살며 평범한 일을 하고 평범한 텔레비전을 보고 평범한 식사를 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심지어우린 평범한 친구를 갖거나 유지할 수도 없었다.
- P199

케임브리지로 돌아오는 길에 칼라지는 모파상은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스탕달도 좋았고, 발자크는 천재라고 했다.
"근데 그 사드라는 친구는 역겨워. 그의 책은 돌려줄 테니까 - P226

가 그런 책을 빌려줬다는 건 잊어버리자고."
나는 삶의 경험이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그토록 쉽게 충격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진짜로 불쾌해하고 있었다. 개망나니같이 사는 줄 알았는데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 P227

나는 먼저 식당을 나와 연구실로 돌아가서 몇 시간이고그곳에 처박혀 있었다. 미국인은 정말로 그토록 신비한 통찰력으로 타인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전까진 그런 의문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미국인이 인간의 본성을 더군다나 한 개인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않았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면 내가 왜 지금 이런 의문을 품고 있겠는가? 어쨌든 아까 그 여학생의 통찰력과, 그통찰력을 말로 풀어내는 솔직함과 침착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 P2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편한 편의점 (벚꽃 에디션) 불편한 편의점 1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군가가 쉽게 누리는 편의는 누군가의 불편과 노동으로 가능해진다. 골목마다 24시를 밝히는 편의점이 이제는 누군가의 일터로 보인다. 직원을 귀하게 대하는 사장은 많지 않아도 손님이나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최저임금의 직원들은 많다. 나와 내 주변에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인의 말

어떤 그림 속의 도마뱀은
그림에서 나와 다시 그림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내 시가 시에서 나와
시로 돌아갈 수 있을까마는
그렇게 된다면
나온 곳으로는 돌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2014년 봄
이규리



생일

그해 봄은 참혹이라고 씌어 있었다.
온 힘을 다해 제 생을 툭, 툭, 떨구던 거북이 주름진 항문을 천천히 오므릴 때
하나의 사랑이 끝났다.
사랑은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모르겠다.
그냥 헐겁게 끝이 났을 뿐이다
자랑도 수고도 아니라는 듯
천천히 닫아거는 눈꺼풀

결과물이 툭 떨어지는 순간,

모래를 뒤집어썼다.
- P12

특별한 일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그렇다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어느 때, 어느 곳이나
꼬리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 있겠지만
꼬리를 잡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와중에도 어딘가 아래쪽에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이 있어
아침을 만나는 거라고 봐요
- P13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
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
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
아,
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죄송해요
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인 것을요
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인데

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

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
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 - P66

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 P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머지는 지금 얘기하는 것은 고사하고, 생각하거나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하버드 시절의 기억은 마음 한구석에 꼭꼭 잘 숨긴 상태였다. 잊었다기보다는 언젠가 그 기억을 되살릴 만한 힘과 여유가 있을 때 다시 꺼내 보려고 꽁꽁 얼려놓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지금 내가 꺼내고 싶은 것은 그 이후의 사랑, 그 오랜 세월내가 품어온 사랑, 너무나 그립지만 돌아가 다시 살고 싶다.
는 생각은 단 일 분도 들지 않는 그 시절로 기어코 나를 잡아끄는 마법과도 같은 그 이후의 사랑이었다. 아마도 그 사랑이나로 하여금 아들과 함께 캠퍼스 투어의 대장정을 시작하게만든 것 같다. 나는 내 방패이자 보호막이자 대리인인 아들을데리고 케임브리지에 다시 와보고 싶었다.
- P18

이 작은 지하 카페에 있던 모든 것이 내가 떠나왔고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중동의 어느 곳을 연상시켰고, 나는 내가떠나온 곳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적어도 아직은 아니었다. 하버드나 미국, 혹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 심지어 언젠가 낳을 아이를 위해서도, 내가 떠나온 곳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케임브리지에있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았고, 그들 중 한 명이 아니었으며, 시스템에 들어 있지 않았고, 들어 있었던 적도 없었다. 이곳은 내 집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내 집이 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이 사람들은 내 동포가 아니었고, 앞으로도 내 동포가되진 않을 것이었다. 여기는 내 삶의 터전이 아니었고, 내 고향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나 자신이 아니었고, 내가 될 수없었다. 1977년 여름의 케임브리지가 그랬다.
- P23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티파자 포스터를 보면 언제부터 잊고 있었는지도 모를 바다와 해변의의식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카페 알제의 모든 것이 나를 알렉산드리아로, 칼라지를 튀니스로, 알제리인 모우모우를 오란으로 데려갔다. 우리가 매일 카페 알제에 들르는 건 아마도우리가 북아프리카에 두고 온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우리는 삶이 길을 잘못 든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가려고 애를 썼고, 그것은 마치 골절과 뼈에 간 금, 탈구가 치유되고 뼈가 완전히 붙을 때까지 부목을 대고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 우리는 오전의 태양을 피해 카페 알제로 들어와 강한 커피 향과 세제 냄새를 맡으면서, 자기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길을 찾았다.
- P63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었지만 그는 하버드 광장에서 목소리가 가장 컸다. 나는 속 좁고 조심스럽고 소심한 반면 그는 무모하고 잔인하며 작은 불씨에도 곧 터질 화약고 같았다. 그는 자기 마음을 솔직히 말했지만 내 마음은 수장고에 있었다.
그는 항상 정면에 대고 말했지만 나는 상대방이 돌아설 때까지 기다렸다가 구시렁거렸다. 그는 그 무엇도 지지하지 않았고 일절 타협하지 않았으며 모두를 가차 없이 비판했다. 나는모두를 포용했지만 단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을 솔직하게 표현했지만 내 사랑은 마음속 깊은 곳에 묻혀 있었다. 그는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 케임브리지에 사는 거의 모든 주민과 말을 튼 반면, 나는 하버드 대학원에서 사 년째 공부했지만 그해 여름에는 거의 모든 날을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은 채 보냈다. 그는 기분이 상하거나 지루할 땐 발끈해서 안절부절못하다가 폭발했지만 나는 그야말로평정심의 화신이었다. 그는 모든 일에 대해 확고한 자기 의견을 갖고 있었지만 나는 타협이란 이름과 평정심이란 별명을갖고 있었다. 그가 무슨 일을 시작하면 아무도 그를 막을 수없었지만 나는 누가 조금만 얼굴을 붉혀도 아무것도 못 했다.
- P72

우리 둘 다 돈이 없었지만 내가 그보다 훨씬 더 가난했이 있다. 그 기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가난했던과기를 숨기지 않았다. 나는 자의식보다 부끄러움을 더 많이.
대 깊이 느꼈다. 수치심은 언제나 내 목숨과 내 영혼을 쉽게배앗고, 내 마음 깊숙이 파고들어 나를 헌 양말 뒤집듯 뒤집어서 내가 결국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보여줄 수 있었다. 스스로에게 더 보여줄 것이 없고 나 자신을 더 참아줄 수도 없으며, 다른 모든 사람을 경멸함으로써 못난 내 모습을 만회하려 하는 지경까지 나를 끌고갈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안다는걸 자랑스러워 했지만 나는 그 작은 카페를 나오면 그와 함께있는 모습이 남들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택시운전사였고 나는 아이비리그 학생이었다. 그는 아랍인이었고 나는유대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린 즉시 역할을 바꿔서 살아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의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등 떠밀려 시작한 방랑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행성에 속해 있었지만 나는 이행성에 속해 있다는 확신이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세상을 사랑했고 사람들을 이해했다.  - P73

나는 그를 부러워했다. 그에게서 배우고 싶었다. 그는 진정한 남자였다. 나는………. 나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그는 목소리였고, 내 과거와의 잃어버린 연결고리였으며, 내가 다른길을 택했다면 나의 롤모델이 되었을 사람이었다. 그는 야성적이었지만 나는 길들여지고 억눌려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나를 강력한 용액에 담가서 내가 학교에서 배운 모든 습관과미국에 양보한 모든 것을 내 피부에서 벗겨낸다면 내가 아니라 그가 발견될 것이다. 내가 처음 카페 알제에서 용기를 내그의 테이블로 걸어가 침묵을 깼을 때 그가 내게 불쑥 다가온것처럼, 별안간 푸른 지중해가 펼쳐질 것이다.
다른 나라, 다른 도시, 다른 시대에 있었다면 나는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을 것이고, 그가 내게 말을 걸었을 것이다.
- P74

케임브리지에서 <스타워즈>를보지 않았고 보기를 거부했으며 그해 여름 갑자기 불어닥친스타워즈 열풍을 경멸하고 개탄한 사람은 나와 칼라지밖에없었다. 오비완 케노비와 다스 베이더와 루크 스카이워커가세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유명한 등장인물이라도 되는 듯이, 그리고 R2-D2와 C-3PO가 그들을 따라다니는 어릿광대나 아부하는 신하라도 되는 듯이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칼라지에게는 그 모든 것이 특대형 대용품의 상징일 뿐이었다.
처음에 내가 칼라지에게 끌린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심술궂은 육감이나 생존본능,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기 전까지 상대방의 숨통을 죄는 고약한 성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많은 사람을 떨어져나가게 한 짐짓 거친 척하는 그의 태도도 아니었다. 내게는 그 태도가 너무나 익숙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건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엄마를 욕하면 그 다른 아이도 질세라 상대방 아이의 엄마 욕을 하고,  - P75

그는 나의 대리인이었을 것이다. 내가 미국에서잃어버린 원시적인 모습의 나. 나의 그림자, 나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다락방에 숨어 사는 미친 형제, 나의 하이드 씨,
나의 아주 아주 거친 초고, 가면을 벗고 속박의 쇠사슬에서도 벗어난, 완성되지 않은 나, 속박받지 않는 나, 누더기를걸친 나, 격분한 나, 책을 들고 있지 않은, 세련된 매너가 없는, 영주권이 없는 나, 칼라슈니코프를 들고 있는 나.
내가 그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한 이유는 그가 날마다.
카페 알제에서 떠들어대는 이야기를 믿거나 존중해서가 아니었고, 옛날 잡동사니를 뒤지는 듯한 그의 음색과 어조에서 내가 됐어야 했던, 그러나 운명을 거스르고 되지 않은 어떤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날마다 늘어놓는 미국 비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그가 통렬히 비판하는 대상이 실은 미국이 아니었고, 그의 목소리가 막강한 서구 세계를 막아내려고 애쓰는 중동의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내가 들은 것은 나이 든 인간의 거칠고 쌕쌕거리며 겁먹은 목소리, 인류애처럼 보이고 그것을 표방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아닌, 새로운 흐름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모었다.  - P76

그게 바로 그가 브뤼똥", 즉 천도복숭아를 싫어한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천도복숭아처럼 달콤해지고있었다. 친절함과 진심은 없이 달달한 말만 하고, 조작되고,
꿰매지고, 제왕절개 수술을 받았지만, 단 한 번도 진짜로 태어나지 못한 천도복숭아. 머리는 자두 모양, 엉덩이는 복숭아 모양, 고환은 초콜릿 과자 모양. 과일 왕국에 사는 실제 친적은 단 하나도 없는 천도복숭아, 그들의 모든 것이 접붙여진거였다.
"우리처럼 말이죠?" 어느 날 카페 알제에서 칼라지가 카터 대통령에 대해 웃는 꼴은 물론이고 얼굴 자체가 천도복숭아처럼 달달하고 가식적이라며 비난하는 말을 듣고서 내가그에게 물었다. 나도 카터 대통령의 얼굴이 천도복숭아 같다는 점에 동의했다. 하지만 우리라고 뭐 다른가? 우리도 그와다르지 않았다. 세 개의 대륙에서 살아본 우리야말로 진정으로 접붙여진 천도복숭아가 아닌가?
- P77

어땠든 처음부터 우리의 우정을 공고히 해준 것은 프랑스와 프랑스어에 대한 사랑, 아니 프랑스라는 이데아에 대한사랑이었다. 사실 우리에게 진짜 프랑스는 더 이상 쓸모가 없었고, 마찬가지로 우리도 프랑스에게 쓸모가 없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죄책감이 깃든 비밀로 간직했다. 이 사랑을 버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믿지도 않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성스럽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우리가 북아프리카 식민지령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물려받은 이제는 초라해지고 빛이 바랜 가보처럼 우리의삶을 맴돌고 있었다. 우리가 사랑한 것은 프랑스도, 프랑스의설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프랑스는 우리가 삶에서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했던 단단한 무언가에 붙인 별명이었다. 우리가 꼭 붙들어야 했던 가장 단단한 것이 과거였고, 그 과거가프랑스어로 쓰였을 뿐이었다.
- P79

내가 그를 도운 것은 실제로 그의 이민국 인터뷰 준비를 몇 시간 도와준 적이 있었다 - 단순히 별 생각 없이 한 일이거나 요청을 거절할 좋은 핑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잠깐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다시 읽는 일이 절대로없을 그 모든 책을 읽는 것 말고도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는나 자신을 보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다. 그는 굉장히 고마워했고, 살면서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해 조금이라도 도와주는 사람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지 안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말 말라고, 별일 아니라고 답했다. 그는 내 말이 틀렸다면서, 자신이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 모르는 것이 좋은 친구의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 점을 두고 논쟁을 벌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내 몸짓은 너무 쉽게, 어떤 위험이나 의무, 양심의가책, 망설임, 극복해야 할 어려움 없이 나왔다.  - P83

그가 그랬고, 내가 그랬다. 사방에 실수들이 있었고 각각의 실수는 작고 은밀한 방식으로 곪아 터지고 있었다. 실수와 헛소리, 헛소리는 우리만의 저항이었다. 상처가 덧나지 않게 하려고 알코올을 들이붓듯이 그는 ‘헛소리‘와 ‘개소리‘를 외쳐댔다. 처음 한 대를 맞을 때 ‘헛소리‘를 외쳤고, 마지막에도
‘헛소리‘를 외쳤다. 더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남들 앞에서 기죽지 않기 위해 헛소리‘를 외쳤다. 또한 우리자신을 향해서도 ‘헛소리‘를 외쳤다. 욕지거리는 우리의 자존감을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였고, 존엄성이라는 흔들리는 매립지에 세워진 마지막 정거장이었다. 그다음에는 울었다.
- P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요즘 말로 순삭~! 여러 이유를 각설하고 가독성이 있다는 건 작가의 능력이다. 그것도 출중한.
편의점이라고는 여행지에서 끼니가 마땅찮을때 컵라면먹으러 몇 번 가본게 전부여서 어눌하고 굼뜬 내 쇼핑을, 눈치빠르고 배려심 두둑한 독고씨 덕에 쉽게 할 수 있었다. 내 주변에도 저렇게 매력적인 독고씨가 있을 텐데. 편견 없이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전화를 끊고 염 여사는 주방으로 향했다. 심장이 기름 튀는 불판에 올려진 것처럼 아팠다. 통중이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슴 전체를 압박해왔다. 그녀는 냉장고를 열고 캔맥주를 따서 벌컥벌컥들이켰다. 가슴의 불을, 심장의 고통을 끄기라도 할 기세로 마시다.
보니 사레가 들려 캑캑거려야 했다. 술 취한 아들의 흰소리를 잊기위해 술을 마시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했다.
어떡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깔끔한 판단력과 결단력으로 지금까지 인생을 무난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식의 문제는 늘 그녀를 고장 난 저울로 만들었다. 편의점을 정리해 아들놈의 사업인지 사기인지를 돕는다고치자, 잃는다고 치고, 그럼 무엇이 이어질까? 그건 아마 남은 유일한 재산인 이 방 두 개 빌라겠지. 청파동 언덕에서 20년째 빛바랜채 서 있는 구옥 빌라의 3충, 염 여사의 마지막 터전까지 빨리고 나서야 아들은 실패를 멈출지도 모르겠다.
인정하기 싫지만 아들은 못난이에 준사기꾼이다. 며느리 역시그걸 알게 되었는지 결혼 후 2년이 되어갈 즈음 부랴부랴 이혼했고, 그때는 며느리의 야멸찬 결정에 분노했지만… 결국 잘못은대부분 아들에게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혼 후 3년간아들은 남은 재산마저 다 털어먹고 초라한 꼴이 되었다. 이럴 때 유일하게 도울 수 있는 엄마인 나는, 나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 P27

버스를 타고 홀로 돌아오는 길에 염 여사는 편의점 직원들을 떠올렸다. 지지리도 말 안 듣는 아들놈과 오지게도 잘난 딸년보다 요즘은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가족 같고 편하다. 이렇게 말하면 딸은또 직원들을 가족같이 대하면 악덕 업주니 옳지 않다느니 따지겠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랴. 직원들에게 날 가족같이 생각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직원들을 가족같이 여겨 무리한 업무를 부탁하는 것도 아니다. 염 여사는 지금 가까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편의점 직원들이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오전에 편의점을 책임지는 오 여사는 동네에서 20년을 알아온친구이자 같은 교회 성도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녀는 염 여사를 친언니처럼 따르고 지난 시간 함께 고락을 나누지 않았던가. 오후의시현은 딸 같기도 하고 조카 같기도 한 게 늘 챙겨주고 싶게 만든다.  - P31

한동안 독고 씨는 자신의 수염을 쓸어대며 입술을 조물딱거렸다. 갑작스러운 제안이긴 하지만 거절당하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독고 씨에게 손으로 수염 그만 만지작대고 어서 말하라고 독촉하고 싶은 마음이 끓어올랐다.
그때 결심한 듯 독고 씨가 염 여사를 응시했다.
"그럼..… 한 병 더요....….. 한 병만 먹고 끊는 건 좀….. 억울해서..."
- P50

1년간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라면 알바생에게 가장 중요한 사장이 괜찮은 분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역사 교사로 정년 퇴임했다는 사장님은 시현에게 어른이란 바로 이런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분이다. 요즘 편의점은 주휴수당을 주지않으려고 주 5일 근무하는 알바를 두지 않는다. 이틀씩 사흘씩 끊어 고용하기에 한곳에서 진득하게 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곳은알바 모두가 주 5일 근무다. 또한 사장님은 시현과 같은 알바생에게 시켜야 할 일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구분했고, 솔선수범했으며, 무엇보다 직원들을 귀하게 대했다.
‘사장이 직원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직원도 손님 귀하게 여기지않는다."
요식업으로 일가를 이룬 부모님 아래서 자란 시현이 귀가 따갑게 들은 말이다. 가게도 결국 사람 장사다. 손님을 귀하게 대하지않는 가게와 직원을 귀하게 대하지 않는 사장은 같은 결과를 얻게된다. 망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파동 이 편의점은 적어도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돈을 벌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 P53

독고 씨가 그렇게 말하며 히죽 웃었다. 시현은 안도했다. 그녀는이제 독고 씨가 많이 먹어 떨어진 카누 블랙을 알아서 채워주고 있었다. 그를 통해 누군가를 돕는 일이 보람 있다는 걸 체험했고, 자기에게 그럴 능력이 숨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어제도 유튜브 영상을 찍으며 독고 씨를 생각했다. 그에게 가르쳐주듯 차분히,
천천히, 말하고 움직였다. 어쩌면 노숙자 같은 사람들을 도울 방법.
은 그렇게 좀 더 느리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니 아무런 사회와의 끈도 없다고 느끼던 자발적 아싸인 자신이 무언가 연결점을 찾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녀 역시 독고 씨에게 도움을 받은 셈이었다.
- P80

‘밥 딜런의 외할머니가 어린 밥 딜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행복은 뭔가 얻으려고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행복이라고, 그리고 네가 만나는 사람이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기때문에 친절해야 한다고."
그녀는 이번에 나선 길에서 인경을 만났을 때 왠지 모르게 밥 딜런 생각이 났다고 말했다. 충분한 대답이 된 까닭에 인경은 자기도밥 딜런의 팬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 P140

김 대표의 전화를 끊자마자 인경은 노트북 한글 프로그램을 열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제목을 적고 두 칸 줄을된 뒤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를 새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쉬지 않고 타이핑을 했다. 어떤 글쓰기는 타이핑에 지나지않는다. 당신이 오랜 시간 궁리하고 고민해왔다면, 그것에 대해 북건드리기만 해도 튀어나올 만큼 생각의 덩어리를 키웠다면, 이제할 일은 타자수가 되어 열심히 자판을 누르는 게 작가의 남은 본분이다. 생각의 속도를 손가락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되면 당신은잘하고 있는 것이다. 인경은 연기하듯 대사를 발음하며 동시에 타이핑을 했다. 그녀의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그녀는 그동안 봉인됐던 필력이 풀린 듯 쉼 없이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저녁에 시작된 작업은 어느덧 자정을 넘겼고, 겨울 밤하늘의어둠이 짙어질수록 그녀의 글도 밀도를 더해갔다.
그 새벽, 동네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진 곳은 독고 씨의 편의점과그녀의 작업실뿐이었다.
- P163

"당신 어머니 요 며칠 계속...… 아프시다고. 그런 어머니 돌보진못할망정....… 날 자르면 편의점 야간 일.... 어떡하려고? 또.....
………엄마 시키려고? 사람이라면 그게… 가능해?"
…텅
무언가가 민식의 몸속 어딘가에 낙하했다. 고통의 추가 내장을 관통해 바닥으로까지 그의 몸을 끌고 가는 게 느껴졌다. 민식은엄마가 아픈 것도, 엄마가 자신에 대해 그런 식으로 남에게 말한다는 것도 몰랐다. 사내가 판결문 읽듯이 숨을 골라가며 진술한 말들이 무거운 추가 되어 민식을 심해의 어두운 곳으로 끌고 들어가는 - P181

그로부터 한 시간 동안 민식은 엄마와 맥주를 마셨다. 냉장고에있던 에일 맥주 네 캔을 모두 마신 것이다. 엄마와 마주 앉아 대작을 한 건 그의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엄마가 술을 마신다는 것도 낯설었고 둘만의 대화가 지속된다는 것도 신기했다. 지난 몇 년간 민식은 엄마에게 늘 무언가를 요구했고, 엄마는 그것이 무엇이든 거부했으며, 대화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지금 민식은 엄마와 적당히 취해 온갖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돌아가신 고집쟁이 아버지에 대한 회상을 하다가 헛웃음을 지었고,
얄미운 누나와 매형 흉보기에 같이 열중했고, 민식도 한때 다녔던엄마의 교회 사람들 근황을 들었고,  - P187

대화를 나눌 가족이 사라졌고 그것이 스스로의 탓임을 깨닫게된 곽은, 그제야 자신의 입을 가리고 있는 마스크가 편하게 느껴졌.
다. 진즉에 봉했어야 했다. 가족들에게 무심코 던졌던 폭력적인 말들이 고스란히 자신의 뒤통수에서 울릴 때마다 자업자득이란 말을되새김질할 수밖에 없었다.
늦겨울 찬 바람에 술이 다 깨는 기분으로 시청과 남대문을 지나 서울역에 다다른 곽의 시야에 노숙자 몇이 들어왔다. 그러자 마치 자동 반사처럼 발걸음이 청파동을 향하기 시작했다. 서울역에서 버스를 타고 원효로로 돌아가려 했으나 가는 길에 청파동에 들르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오늘의 먼 길을 시작한 그곳으로 가 말없는 곰 인형처럼 서 있을 타깃을 만나 무어라도 말하고 싶어졌다.
마스크를 벗고 없는 발언권이라도 발휘하고 싶어졌다. 당신을 따라다니다 이 겨울 이렇게 방황하고 있다고, 당신도 나 같은 이유로방황하고 있냐고, 대체 당신의 정체는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다.
- P215

뭐지? 무엇보다 이곳의 따뜻한 온기가 좋았다. 옆구리를간질이는 온풍기의 열기도, 앞에 마주 앉아 바람을 막아주는 큰 덩치의 사내도, 직원들 생계를 위해 돈 안 되는 가게를 접지 않는다는사장이 있는 편의점도,
- P222

하루 24시간씩 일주일 아니, 언제나 한 가지 생각에만 빠져 있다면? 그 한 가지 생각이 고통으로 점철된 기억이라면? 고통에 흠뻑잠긴 뇌는 점점 무거워지는데 떨쳐버리지 못한 채 그대로 망망대해에 빠지게 된다면, 뇌는 커다란 추가 되어 거대한 심연 속으로 당신을 끌고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당신은 다른 방식으로숨 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야 만다. 코도 입도 아가미도 아닌 것으로 숨을 쉬며 사람이라고 우기지만 사람 아닌 존재로 살 뿐이다.
고통의 기억을 잊으려 허기조차 잊고 술로 뇌를 씻어보려 하지만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기억을 휘발시켜버리고 이제 내가 누구라고조차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다.
- P225

술을 끊고 음식을 많이 먹고 따뜻한 잠을 자게 되자 몸 상태는 한결 나아졌다. 쪽방에서 긴장을 내려놓고 한낮 늘어지게 누워 있으면 그곳이 바로 치료 병동인 듯했고, 야간 알바를 하기 위해 일어날때면 지병마저 달아난 듯 개운했다. 삶과 죽음의 평균대에서 늘 죽음 쪽에 매달려 있었는데 이제 점점 평균대 위로 올라와 살며시 팔을 벌리고 균형을 잡고 있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머릿속에도 피가돌기 시작했다. 동료의 질문에 답하며 생각의 속도가 빨라졌고, 손님을 응대하며 더듬거리던 말투도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사람 구실을 하게 됐고 냉동인간의 뇌처럼 얼어 있던그곳에 열선이 깔리는 게 느껴졌다. 기억과 현실 사이에 놓인 빙벽이 녹아내리고 있었고, 서서히 빙하 속 매머드 같은 덩어리들이 목격되기 시작했다. 내 기억의 시체들, 그것들이 좀비처럼 일어나 나를 덮치고 있었다. 나는 좀비들에게 뜯기면서도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려 애썼고, 그건 그것대로 견딜 만한 일이었다.
- P230

역지사지. 나 역시 궤도에서 이탈하고 나서야 깨우치게 된 단어다. 내 삶은 대체로 일방통행이었다. 내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고, 남의 감정보다는 내 감정이 우선이었으며, 받아들이지않는 자는 내치면 그만이었다. 가족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비로소 얼마 전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소통 불가라고 내게 말한 사람은 딸이었다. 딸의 얼굴이 기억나려 한다. 눈물이 나려는 걸 참는다. 소통 불가에 일방통행인 나를 아내는 받아줬다.  - P237

정 작가가 마스크 위로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자신의 비극을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알찬 기운이 느껴졌다. 그건 꿈을 품고 사는 사람이 가진 힘이 아닐까? 새벽의 편의점에서 우리는 이야기했다. 그녀는 내 과거를 캐내기 위해 자신의 과거도 많이 털어놓았다. 나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절대 지치지않는 그녀의 에너지가 부러웠다. 그래서 물었다. 대체 당신을 지탱하는 힘은 무엇이냐고? 그녀가 말했다. 인생은 원래 문제 해결의연속이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풀어야 할 문제라면, 그나마 괜찮은문제를 고르려고 노력할 따름이고요..
"독고 씨, 기억은 좀 돌아왔나요? 내 작품 속 독고 씨 캐릭터는기억이 돌아왔는데."
- P247

강은 빠지는 곳이 아니라 건너가는 곳임을.
다리는 건너는 곳이지 뛰어내리는 곳이 아님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살기로 했다. 죄스러움을 지니고 있기로 했다. 도울 것을 돕고 나눌 것을 나누고 내 몫의 욕심을 가지지 않겠다. 나만 살리려던 기술로 남을 살리기 위해 애쓸 것이다. 사죄하기 위해 가족을 찾을 것이다. 만나길 원하지 않는다면사죄의 마음을 다지며 돌아설 것이다. 삶이란 어떻게든 의미를 지니고 계속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겨우 살아가야겠다.
기차가 강을 건넜다. 눈물이 멈췄다.
- P2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