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어떤 그림 속의 도마뱀은
그림에서 나와 다시 그림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내 시가 시에서 나와
시로 돌아갈 수 있을까마는
그렇게 된다면
나온 곳으로는 돌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2014년 봄
이규리

생일
그해 봄은 참혹이라고 씌어 있었다. 온 힘을 다해 제 생을 툭, 툭, 떨구던 거북이 주름진 항문을 천천히 오므릴 때 하나의 사랑이 끝났다. 사랑은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모르겠다. 그냥 헐겁게 끝이 났을 뿐이다 자랑도 수고도 아니라는 듯 천천히 닫아거는 눈꺼풀
결과물이 툭 떨어지는 순간,
모래를 뒤집어썼다. - P12
특별한 일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그렇다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어느 때, 어느 곳이나 꼬리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 있겠지만 꼬리를 잡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와중에도 어딘가 아래쪽에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이 있어 아침을 만나는 거라고 봐요 - P13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 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 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 아, 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죄송해요 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인 것을요 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인데
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
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 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 - P66
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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