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요즘 말로 순삭~! 여러 이유를 각설하고 가독성이 있다는 건 작가의 능력이다. 그것도 출중한.
편의점이라고는 여행지에서 끼니가 마땅찮을때 컵라면먹으러 몇 번 가본게 전부여서 어눌하고 굼뜬 내 쇼핑을, 눈치빠르고 배려심 두둑한 독고씨 덕에 쉽게 할 수 있었다. 내 주변에도 저렇게 매력적인 독고씨가 있을 텐데. 편견 없이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전화를 끊고 염 여사는 주방으로 향했다. 심장이 기름 튀는 불판에 올려진 것처럼 아팠다. 통중이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슴 전체를 압박해왔다. 그녀는 냉장고를 열고 캔맥주를 따서 벌컥벌컥들이켰다. 가슴의 불을, 심장의 고통을 끄기라도 할 기세로 마시다.
보니 사레가 들려 캑캑거려야 했다. 술 취한 아들의 흰소리를 잊기위해 술을 마시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했다.
어떡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깔끔한 판단력과 결단력으로 지금까지 인생을 무난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식의 문제는 늘 그녀를 고장 난 저울로 만들었다. 편의점을 정리해 아들놈의 사업인지 사기인지를 돕는다고치자, 잃는다고 치고, 그럼 무엇이 이어질까? 그건 아마 남은 유일한 재산인 이 방 두 개 빌라겠지. 청파동 언덕에서 20년째 빛바랜채 서 있는 구옥 빌라의 3충, 염 여사의 마지막 터전까지 빨리고 나서야 아들은 실패를 멈출지도 모르겠다.
인정하기 싫지만 아들은 못난이에 준사기꾼이다. 며느리 역시그걸 알게 되었는지 결혼 후 2년이 되어갈 즈음 부랴부랴 이혼했고, 그때는 며느리의 야멸찬 결정에 분노했지만… 결국 잘못은대부분 아들에게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혼 후 3년간아들은 남은 재산마저 다 털어먹고 초라한 꼴이 되었다. 이럴 때 유일하게 도울 수 있는 엄마인 나는, 나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 P27

버스를 타고 홀로 돌아오는 길에 염 여사는 편의점 직원들을 떠올렸다. 지지리도 말 안 듣는 아들놈과 오지게도 잘난 딸년보다 요즘은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가족 같고 편하다. 이렇게 말하면 딸은또 직원들을 가족같이 대하면 악덕 업주니 옳지 않다느니 따지겠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랴. 직원들에게 날 가족같이 생각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직원들을 가족같이 여겨 무리한 업무를 부탁하는 것도 아니다. 염 여사는 지금 가까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편의점 직원들이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오전에 편의점을 책임지는 오 여사는 동네에서 20년을 알아온친구이자 같은 교회 성도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녀는 염 여사를 친언니처럼 따르고 지난 시간 함께 고락을 나누지 않았던가. 오후의시현은 딸 같기도 하고 조카 같기도 한 게 늘 챙겨주고 싶게 만든다.  - P31

한동안 독고 씨는 자신의 수염을 쓸어대며 입술을 조물딱거렸다. 갑작스러운 제안이긴 하지만 거절당하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독고 씨에게 손으로 수염 그만 만지작대고 어서 말하라고 독촉하고 싶은 마음이 끓어올랐다.
그때 결심한 듯 독고 씨가 염 여사를 응시했다.
"그럼..… 한 병 더요....….. 한 병만 먹고 끊는 건 좀….. 억울해서..."
- P50

1년간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라면 알바생에게 가장 중요한 사장이 괜찮은 분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역사 교사로 정년 퇴임했다는 사장님은 시현에게 어른이란 바로 이런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분이다. 요즘 편의점은 주휴수당을 주지않으려고 주 5일 근무하는 알바를 두지 않는다. 이틀씩 사흘씩 끊어 고용하기에 한곳에서 진득하게 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곳은알바 모두가 주 5일 근무다. 또한 사장님은 시현과 같은 알바생에게 시켜야 할 일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구분했고, 솔선수범했으며, 무엇보다 직원들을 귀하게 대했다.
‘사장이 직원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직원도 손님 귀하게 여기지않는다."
요식업으로 일가를 이룬 부모님 아래서 자란 시현이 귀가 따갑게 들은 말이다. 가게도 결국 사람 장사다. 손님을 귀하게 대하지않는 가게와 직원을 귀하게 대하지 않는 사장은 같은 결과를 얻게된다. 망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파동 이 편의점은 적어도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돈을 벌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 P53

독고 씨가 그렇게 말하며 히죽 웃었다. 시현은 안도했다. 그녀는이제 독고 씨가 많이 먹어 떨어진 카누 블랙을 알아서 채워주고 있었다. 그를 통해 누군가를 돕는 일이 보람 있다는 걸 체험했고, 자기에게 그럴 능력이 숨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어제도 유튜브 영상을 찍으며 독고 씨를 생각했다. 그에게 가르쳐주듯 차분히,
천천히, 말하고 움직였다. 어쩌면 노숙자 같은 사람들을 도울 방법.
은 그렇게 좀 더 느리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니 아무런 사회와의 끈도 없다고 느끼던 자발적 아싸인 자신이 무언가 연결점을 찾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녀 역시 독고 씨에게 도움을 받은 셈이었다.
- P80

‘밥 딜런의 외할머니가 어린 밥 딜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행복은 뭔가 얻으려고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행복이라고, 그리고 네가 만나는 사람이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기때문에 친절해야 한다고."
그녀는 이번에 나선 길에서 인경을 만났을 때 왠지 모르게 밥 딜런 생각이 났다고 말했다. 충분한 대답이 된 까닭에 인경은 자기도밥 딜런의 팬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 P140

김 대표의 전화를 끊자마자 인경은 노트북 한글 프로그램을 열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제목을 적고 두 칸 줄을된 뒤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를 새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쉬지 않고 타이핑을 했다. 어떤 글쓰기는 타이핑에 지나지않는다. 당신이 오랜 시간 궁리하고 고민해왔다면, 그것에 대해 북건드리기만 해도 튀어나올 만큼 생각의 덩어리를 키웠다면, 이제할 일은 타자수가 되어 열심히 자판을 누르는 게 작가의 남은 본분이다. 생각의 속도를 손가락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되면 당신은잘하고 있는 것이다. 인경은 연기하듯 대사를 발음하며 동시에 타이핑을 했다. 그녀의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그녀는 그동안 봉인됐던 필력이 풀린 듯 쉼 없이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저녁에 시작된 작업은 어느덧 자정을 넘겼고, 겨울 밤하늘의어둠이 짙어질수록 그녀의 글도 밀도를 더해갔다.
그 새벽, 동네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진 곳은 독고 씨의 편의점과그녀의 작업실뿐이었다.
- P163

"당신 어머니 요 며칠 계속...… 아프시다고. 그런 어머니 돌보진못할망정....… 날 자르면 편의점 야간 일.... 어떡하려고? 또.....
………엄마 시키려고? 사람이라면 그게… 가능해?"
…텅
무언가가 민식의 몸속 어딘가에 낙하했다. 고통의 추가 내장을 관통해 바닥으로까지 그의 몸을 끌고 가는 게 느껴졌다. 민식은엄마가 아픈 것도, 엄마가 자신에 대해 그런 식으로 남에게 말한다는 것도 몰랐다. 사내가 판결문 읽듯이 숨을 골라가며 진술한 말들이 무거운 추가 되어 민식을 심해의 어두운 곳으로 끌고 들어가는 - P181

그로부터 한 시간 동안 민식은 엄마와 맥주를 마셨다. 냉장고에있던 에일 맥주 네 캔을 모두 마신 것이다. 엄마와 마주 앉아 대작을 한 건 그의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엄마가 술을 마신다는 것도 낯설었고 둘만의 대화가 지속된다는 것도 신기했다. 지난 몇 년간 민식은 엄마에게 늘 무언가를 요구했고, 엄마는 그것이 무엇이든 거부했으며, 대화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지금 민식은 엄마와 적당히 취해 온갖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돌아가신 고집쟁이 아버지에 대한 회상을 하다가 헛웃음을 지었고,
얄미운 누나와 매형 흉보기에 같이 열중했고, 민식도 한때 다녔던엄마의 교회 사람들 근황을 들었고,  - P187

대화를 나눌 가족이 사라졌고 그것이 스스로의 탓임을 깨닫게된 곽은, 그제야 자신의 입을 가리고 있는 마스크가 편하게 느껴졌.
다. 진즉에 봉했어야 했다. 가족들에게 무심코 던졌던 폭력적인 말들이 고스란히 자신의 뒤통수에서 울릴 때마다 자업자득이란 말을되새김질할 수밖에 없었다.
늦겨울 찬 바람에 술이 다 깨는 기분으로 시청과 남대문을 지나 서울역에 다다른 곽의 시야에 노숙자 몇이 들어왔다. 그러자 마치 자동 반사처럼 발걸음이 청파동을 향하기 시작했다. 서울역에서 버스를 타고 원효로로 돌아가려 했으나 가는 길에 청파동에 들르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오늘의 먼 길을 시작한 그곳으로 가 말없는 곰 인형처럼 서 있을 타깃을 만나 무어라도 말하고 싶어졌다.
마스크를 벗고 없는 발언권이라도 발휘하고 싶어졌다. 당신을 따라다니다 이 겨울 이렇게 방황하고 있다고, 당신도 나 같은 이유로방황하고 있냐고, 대체 당신의 정체는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다.
- P215

뭐지? 무엇보다 이곳의 따뜻한 온기가 좋았다. 옆구리를간질이는 온풍기의 열기도, 앞에 마주 앉아 바람을 막아주는 큰 덩치의 사내도, 직원들 생계를 위해 돈 안 되는 가게를 접지 않는다는사장이 있는 편의점도,
- P222

하루 24시간씩 일주일 아니, 언제나 한 가지 생각에만 빠져 있다면? 그 한 가지 생각이 고통으로 점철된 기억이라면? 고통에 흠뻑잠긴 뇌는 점점 무거워지는데 떨쳐버리지 못한 채 그대로 망망대해에 빠지게 된다면, 뇌는 커다란 추가 되어 거대한 심연 속으로 당신을 끌고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당신은 다른 방식으로숨 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야 만다. 코도 입도 아가미도 아닌 것으로 숨을 쉬며 사람이라고 우기지만 사람 아닌 존재로 살 뿐이다.
고통의 기억을 잊으려 허기조차 잊고 술로 뇌를 씻어보려 하지만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기억을 휘발시켜버리고 이제 내가 누구라고조차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다.
- P225

술을 끊고 음식을 많이 먹고 따뜻한 잠을 자게 되자 몸 상태는 한결 나아졌다. 쪽방에서 긴장을 내려놓고 한낮 늘어지게 누워 있으면 그곳이 바로 치료 병동인 듯했고, 야간 알바를 하기 위해 일어날때면 지병마저 달아난 듯 개운했다. 삶과 죽음의 평균대에서 늘 죽음 쪽에 매달려 있었는데 이제 점점 평균대 위로 올라와 살며시 팔을 벌리고 균형을 잡고 있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머릿속에도 피가돌기 시작했다. 동료의 질문에 답하며 생각의 속도가 빨라졌고, 손님을 응대하며 더듬거리던 말투도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사람 구실을 하게 됐고 냉동인간의 뇌처럼 얼어 있던그곳에 열선이 깔리는 게 느껴졌다. 기억과 현실 사이에 놓인 빙벽이 녹아내리고 있었고, 서서히 빙하 속 매머드 같은 덩어리들이 목격되기 시작했다. 내 기억의 시체들, 그것들이 좀비처럼 일어나 나를 덮치고 있었다. 나는 좀비들에게 뜯기면서도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려 애썼고, 그건 그것대로 견딜 만한 일이었다.
- P230

역지사지. 나 역시 궤도에서 이탈하고 나서야 깨우치게 된 단어다. 내 삶은 대체로 일방통행이었다. 내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고, 남의 감정보다는 내 감정이 우선이었으며, 받아들이지않는 자는 내치면 그만이었다. 가족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비로소 얼마 전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소통 불가라고 내게 말한 사람은 딸이었다. 딸의 얼굴이 기억나려 한다. 눈물이 나려는 걸 참는다. 소통 불가에 일방통행인 나를 아내는 받아줬다.  - P237

정 작가가 마스크 위로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자신의 비극을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알찬 기운이 느껴졌다. 그건 꿈을 품고 사는 사람이 가진 힘이 아닐까? 새벽의 편의점에서 우리는 이야기했다. 그녀는 내 과거를 캐내기 위해 자신의 과거도 많이 털어놓았다. 나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절대 지치지않는 그녀의 에너지가 부러웠다. 그래서 물었다. 대체 당신을 지탱하는 힘은 무엇이냐고? 그녀가 말했다. 인생은 원래 문제 해결의연속이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풀어야 할 문제라면, 그나마 괜찮은문제를 고르려고 노력할 따름이고요..
"독고 씨, 기억은 좀 돌아왔나요? 내 작품 속 독고 씨 캐릭터는기억이 돌아왔는데."
- P247

강은 빠지는 곳이 아니라 건너가는 곳임을.
다리는 건너는 곳이지 뛰어내리는 곳이 아님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살기로 했다. 죄스러움을 지니고 있기로 했다. 도울 것을 돕고 나눌 것을 나누고 내 몫의 욕심을 가지지 않겠다. 나만 살리려던 기술로 남을 살리기 위해 애쓸 것이다. 사죄하기 위해 가족을 찾을 것이다. 만나길 원하지 않는다면사죄의 마음을 다지며 돌아설 것이다. 삶이란 어떻게든 의미를 지니고 계속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겨우 살아가야겠다.
기차가 강을 건넜다. 눈물이 멈췄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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