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가장 옴짝달싹할 수 없는 논거는 자연 자체에서 온 것일 터다. 데이비드가 자연에서 진리를 찾으라는 자신의 충고를 따랐다면, 그 역시 그 논거를 보았을 것이다. 눈부시게 깃털을 푸덕거리고 꽥꽥거리고 콸콸 쏟아지는 반대 증거의 무더기 말이다. 동물은 인간이 스스로 우월하다고 가정하는 거의 모든 기준에서 인간보다 더 우수할 수 있다. 까마귀는 우리보다 기억력이 좋고, 침팬지는 우리보다 패턴 인식 능력이 뛰어나며, 개미는 부상당한 동료를 구출하고, 주혈흡충은 우리보다 일부일처제 비율이 더 높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을 실제로 검토해볼 때, 인간을 꼭대기에 두는 단 하나의 계층구조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상당히 무리해서 곡예를 해야 한다. 우리는 가장 큰 뇌를 갖고 있지도 않고 기억력이 가장 좋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가장 빠르지도, 가장 힘이 세지도, 번식력이 가장 좋지도 않다. 같은 배우자와 평생을 함께하고, 도구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심지어 우리는지구에 가장 새롭게 나타난 생물도 아니다. p205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그 생각을 교실 밖으로도 가져가기 시작하여, 중요한 정치인들이 모인 큰 모임에 연사로 나서며 "공화국은 인간의 수확이 좋은 동안에만] 유지될 것"이라고 경고했다.20그는 1898년에 우생학을 지지하는 첫 논문을 발표하고, 이어서<인간의 수확The Human Harvest》, 《국가의 피The Blood of the Nation》, 《당신의 가계도Your Family Tree》 등 유전자 풀pool의 정화를 옹호하는 책들을 연달아 냈다. 이런 글들에서 데이비드는 자신이 지구상에서제거해버리고 싶은 종류의 사람들빈민들과 술꾼들, "백치들"과
"천치들", "바보들", 도덕적 타락자들을 모두 모아, 적격자와 반대되는 "부적합자"라는 한 범주에 몰아넣었다. 부적합자! 단박에귀를 사로잡으며 매우 암시적이고 너무나 깔끔한 단어.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살 자격이 있는가에 관한 그의 의견에 과학의 망토를둘러줄 수 있는 단어였다. 부적합자! 그냥 한 남자의 판단이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현실 자체. - P183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당신의 유전자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라"가 될 것이다.52 상황이 바뀌면 그 상황에 어떤 특징이 더 유용하게 적용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다윈은 간섭하지 말라고 특별히 강력하게 경고한다. 그가 보기에 위험한 것은 인간의눈에서 비롯된 오류 가능성,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이다. "적합성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서는 불쾌하게"54 보일 수있는 특징들이 사실 좀 전체나 생태계에는 이로울 수도 있고, 혹은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 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린에게 경쟁자에 대한 우위를 갖춰준 것은 그 거추장스러운 목이었고, 바다표범이 심한 추위에도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움직이지 못할 만큼 무거워 보이는 체지방 덕분이었으며, 대다수가 생각도 할 수 없는 발명과 발견, 혁명을 이루게 한 열쇠는 확산적 사고를 하는 뇌일 것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외부 형질에만 영향을미칠 수 있지만, (…) 자연은 외양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 - P188

 이것이 바로 다윈이 예언했던 그런 상황이다. 그가지구의 수많은 생명들의 순위를 정하지 말라고 그토록 뚜렷이 경고한 이유는 "어느 무리가 승리하게 될지 인간은 결코 예측할 수없기 때문이다.인간의 지력으로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생태의 복잡성에대한 이러한 조심스러움과 겸손함, 공경하는 마음은 사실 대단히오래된 것이다. 이는 때로 "민들레 원칙"58이라고도 불리는 철학적개념이다. 민들레는 어떤 상황에서는 추려내야 할 잡초로 여겨지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경작해야 하는 가치 있는 약초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생학자들은 이런 단순한 상대성의 원칙을 고려하지 못한것이다. 유전자 풀에서 "필수불가결한 다양성을 제거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들은 사실상 지배자 인종을 구축할 최선의 기회를망쳐버리고 있었던 셈이다. - P189

다섯 달 뒤 캐리 벅은 린치버그 수용소에 있는 땅딸막한 벽돌건물 이층으로 끌려갔다. 천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수술하는 의사에게 더 밝은 빛을 비춰주는 그런 방이었다.80 캐리는 수술대에눕혀졌고, 치골 바로 위의 살이 메스로 열렸다. 의사는 탐침으로나팔관의 위치를 찾아 재빠르게 양쪽 나팔관을 잡아맸다. 그런 다음 잘린 끝부분이 풀리지 않도록 석탄산으로 봉했다. 81수술 후 깨어난 캐리는 새로운 현실을 맞이했다. 이제 다시는그녀만의 독특한 눈과 그녀의 고유한 특징들을 물려받은 아이가이 지구 위를 걸어 다닐 일은 없을 것이라는 현실이었다.
캐리의 소송은 미국 전역에서 "공공복지"82의 이름으로 6만건 이상의 불임화가 합법적으로, 그리고 당사자의 의지를 거슬러실시될 길을 닦아놓았다. 그 "부적합자들 중 다수는 잊혔지만, 연구자들은 그들이 찾아낸 이야기들이 다시 어둠 속에 묻히지 않도록 분투했다 - P194

스턴은 한 연구팀과 함께 수년간 그 기록들을 분석했고, "부적합자"란 말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그범주 안에서 살아갔는지에 관한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스턴의글에서 알 수 있듯 부적합하다고 여겨진 사람들은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판단된 젊은 여자들, 멕시코와 이탈리아, 일본 이민자의 아들과 딸들・・・ 그리고 성적인 전형에서 벗어난 남녀들"이었다.85 다른 연구들은 과도하게 치우친 비율로 많은 유색인 여성들이 불임화의 표적이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미국 정부는 1970년대 초에아메리카 원주민 여성 2500명 이상을 강제로 불임화했음을 인정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우생학위원회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수백 명의 흑인 여성들을 찾아내 불임화했다. 그리고 당혹스럽게도 1933년과 1968년 사이 푸에르토리코 출신 여성 중 약 3분의1 이 미국 정부에 의해 불임화되었다." - P195

그동안 강제 불임화는 전국에서 "조용한 방식으로 계속 시행되고 있다. 그중 다수가 (저소득층 병원이나 마약중독 클리닉, 교도소,
장애인 수용시설 등에서) 기록을 남기지 않고 행해져 밝혀내기가 어렵지만, 큰 사건들은 지금도 몇 년에 한 번씩 세상에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캘리포니아주 교도소에서는150명에 가까운 여성에게 동의도 얻지 않고 때로는 본인들도 모르게 불법적으로 불임화 수술을 자행했다. 그리고 2017년 여름에는 테네시주의 샘 베닝필드라는 판사가 잡범들에게 불임화를받는 대가로 수감 형량을 줄여주겠다고 제안한 것이 드러났다."
바로 이것이다. 과거와 다르지 않은 사고방식, 골턴의 어리석음, 가난과 고통과 범죄가 혈통의 문제이며 칼로 잘라 사회에서 제거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 이 나라에서 우생학 이데올로기는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는 우생학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는 나라다.
워싱턴의 내셔널몰을 따라 걷다가 21번가에 도착해서 북쪽을바라보면 그가 보인다. 미국 과학의 사원인 국립과학아카데미로들어가는 길목에 청동으로 새겨진 프랜시스 골턴이 있다.93 스탠퍼드대학의 주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제일 먼저 마주치는 조각상 중 하나가 루이 아가시다. 흑인은 인간보다 낮은 종이라고 믿었 - P196

던 루이 아가시가 여전히 코린트식 기둥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등 뒤에는 전면 전체에 아치가 나란히 늘어서 있고, 점토 기와를 올린 거대한 사암 건물이 있다. 그 건물에는 사회의 가장 취약한 집단을 "몰살시킬 것을 촉구하며 전국을 누볐던 남자를 기리는 이름이 붙어 있다. 바로 "조던 홀Jordan Hall"이다. - P197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죽는 날까지 열광적인 우생학자로 남았다. 마지막 순간의 깨달음이나 회한을 보여주는 증거는 전혀 없다. 자기 노력의 결과로 칼질을 당하고 흉터와 수치만 남은 수천명에 대해서도, 자기 권력을 놓지 않으려 투쟁하는 와중에 짓밟힌사람들 제인 스탠퍼드, 그에게 명예가 훼손된 의사들, 그가 해고한 스파이, 그에게 성도착자 소리를 들은 사서에 대해서도.
오싹했다. 그 잔인성과 무자비함이. 그 추락의 무지막지한 깊이와 그 파괴적 광란의 크기가 토할 것 같았다. 내가 모델로 삼으려 했던 자는 결국 이런 악당이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생각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이성도 무시하고 도덕도무시하고, 자기 방식이 지닌 오류를 직시하라고 호소하는 수천 명의 아우성-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요도 무시해버린남자. - P201

그것은 지독히도 방향감각을 앗아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혼돈이었을 것이다.
그것은-내가 어려서부터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써왔던 바로 그 세계관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개미들과 별들과 함께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느낌.
소용돌이치는 혼돈의 내부에서 바라본, 차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눈부시고 가차 없고 뚜렷한 진실. 너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진실을흘낏 엿본 바로 그 느낌일 것이다.
그 사다리가 데이비드에게 준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의 해독제. 하나의 거점. 중요성이라는 사랑스럽고 따스한 느낌.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나는 그가 자연의 질서라는 비전을 그토록 단단하게 붙잡고 늘어졌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덕과 이성과 진실에 맞서면서까지 그가 그렇게 맹렬하게 그 비전을 수호한 이유를. 바로 그 때문에 그를 경멸했음에도 어느 차원에서는 나 역시 그가 갈망한 것과 똑같은 것을 갈망했다. - P207

별이 몇 개 떠 있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분홍색 쓰레기더미로 만들어버린 하늘 저 너머에서 분명 눈을 깜빡거리고있을 것이다. 나는 탈출하려고 그토록 애써온 지구로 다시 돌아왔다.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사명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강하든, 얼마나 열심히 뉘우치든 어떤 피난처도 약속도 주지 않는 황량한 지구로.
나는 살면서 내 인생의 많은 좋은 것들을 망쳐버렸다. 그리고이제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 한다. 그 곱슬머리 남자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나를 아름답고 새로운 경험으로 인도해주지 않을 것이다. 혼돈을 이길 방법은없고, 결국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보장해주는 안내자도, 지름길도, 마법의 주문 따위도 없다.
자, 이렇게 희망을 놓아버린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할까? - P208

애나는 열아홉 살 때 그 수용소에서 자신의 의지에 반해 불임화를 당했다. 1967년의 일이다. 그러나 그 벽돌벽 안에 처음 들어간 것은 그보다 12 년 전인 겨우 일곱 살 때였다. 애나와 남자 형제들이 그들의 집 뒤에 있는 우리 안에서 발가벗고 방치된 채 놀고 있는 것을 이웃 사람들이 목격했다. 주에 소속된 복지사들이 그들을 데려가려고 찾아왔다. 아이들이 가기 싫어한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애나는 엄마를 사랑했다. 엄마의 긴 머리와 멜빵바지를, 추운 밤이면 엄마의 침대 속으로 파고드는 애나를 받아주던 엄마를. 그러나 이웃들의 우려와 부모의 가난, 애나의 낮은 지능검사점수만으로 이 일곱 살 소녀를 "부적합자"로, 인류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기에 충분했다. - P214

애나는 웃음과 온기가 가득한 활기찬 가정을 꾸리길원했다. 애나는 자기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애나를 잡아 가둔 사람들 역시 어느 정도는 분명 그 사실을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수용소에서 애나가 하던 일이 수용된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애나는 아이들을 목욕시키고 노래를 불러주고 파자마를 갈아 입혀주고 흔들어서 재워주었다. 나라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는 적합하지만, 자신의 아이를 돌보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일까.
여러 해 동안 애나는 누군가ㅡ부모나 대통령이나 어디선가선을 위해 투쟁하는 누군가가 와서 자신을 해방시켜주기를 소망하며 불임화를 거부했다. 자신의 정체성에서 지키고 싶은 한 부분, 바로 어머니라는 정체성을 자신을 억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내어주기를 거부했다. 자신을 계속 살아가게 해주는 단 하나의 희망의 근원을 넘겨주기를 거부한 것이다. - P216

부적합, 그것은 판단이 아니라 그냥 엄연한 하나의 사실이다.
그러다 1967년, 찌는 듯이 무더운 8월의 어느 날, 애나가 열아홉 살이 된 지 두어 달이 지났을 때 간호사가 애나에게 검진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간호사는 애나를 검사실로 데려가 얼굴에 마스크를 씌운 뒤 방을 나갔다. 그 순간 애나는 벽이 파도치듯 일렁이다 흐릿해지는 걸 보았다. 애나는 자신이 안락사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거라고 애나가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깨어났죠."
깨어나기는 했다. 깨어나 붕대가 감긴 배를, 도둑질을 감추려고 대충 꿰맨 스물다섯 개의 바늘땀을 발견했다.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이제 곧 자유롭게 떠날수 있을 거라는 말만 했다. - P217

그날 그 집에서 나와 차를 몰고 가면서 나는 이런 사람들이 생명을 이어갈 가치가 없다고, 사회에 위험이 된다고 했던 우생학자들의 믿음에 대해 곱씹어보았다. 그 생각을 하니 분노가 치솟았다.
나는 애나의 배에 불거진 흉터에 대해 생각했다. 자기 몸을 내려다볼 때 대법원이 인정한 무가치함의 스탬프가 보이는 건 어떤느낌일지 궁금했다. 보랏빛 리본 같은 그 흉터가 사실은 하나의 선물로 의도된 것임을, 아마도 그들이 원한 방식이었을, 그 자리에서바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생을 끝까지 살도록 허용해주는 국가의 자비였음을 아는 건 어떤 느낌일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내 언니를 보았다면, 아마 언니도 부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현금출납기 앞에서 허둥대는 사람이니까. 또한 그는 나 역시 부적합하다고 판단했을것이다. 나의 슬픔은 그에게 불쾌감을 주었을 것이고, 도덕적실패의 표시로 여겨졌을 테니까. 숨에서 유황을 내뿜는 인생의 낭비자. - P221

 왜냐하면 당연히, 우리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우주의 냉엄한 진실이다. 우리는 작은 티끌들, 깜빡거리듯 생겨났다가사라지는, 우주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들이다. 정말 이상한일이지만, 이 진실을 무시하는 것은 정확히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똑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터무니없는믿음 때문에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폭력을 저질러도 괜찮다고생각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 그럴 순 없다. 명민하고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호흡, 모든 걸음마다 우리의 사소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와 다르게 말하는 것은 죄를 짓고, 거짓을 말하고, 기만과 광기로, 그보다 더 나쁜 것으로 자신을 이끌고 가는 일이다.
아, 그것은 엉킨 실타래였다.
제 꼬리를 먹는 우로보로스.
복수를 하겠다고 나무로 기어 올라갔지만 높이 뜬 독수리라는 진실에 얻어맞아 나가떨어진 파란 꼬리의 스킹크.
나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심정이었다. - P221

"어떻게 계속 살아가시는 거예요?"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내가 평생에 걸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물어왔던 질문이다. 그것은 내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인생에관해 조사하며 여러 해를 보낸 이유였으며,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던졌던 바로 그 질문이며, 내가 그 곱슬머리 남자를, 차가운 지구에서 웃음을 이끌어내는 그의 매혹적인 방식을 그토록 놓지 않으려 버텨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 경쾌함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가까이하고 싶었던 자질이며, 나의 내면에서도 만들어내고 싶었던실체이며, 아무리 멀리 아무리 넓게 찾아보아도 나로서는 도저히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비법이었다.
애나도 답을 알지 못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나는 애나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려고 화초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P223

바로 이런 점들이 내가 우생학자들에 대해 그토록 격노하는이유다. 그들은 이런 그물망의 가능성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들은 애나와 메리 같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고, 자신들이 받은 빛을 더욱 환하게 반사할 수 있는 이 실질적인 방식들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메리는 애나가 없었다면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 이런것. 이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죽는 것과 사는 것의차이. 그게 아무 가치가 없다고?
바로 그때 그 깨달음이 내 머리를 때렸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깨달음, 애나가 중요하다는, 메리가 중요하다는 말. 혹은 이책을 읽는 당신(넘어지지 않게 꼭 붙잡으시라)이 중요하다는 말.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자연을 더욱 정확하게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것이 민들레 법칙이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 P226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에게는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해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놓치는 일이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아는 것이다.  - P227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변명도, 죄도 아니다. 그것은 다윈의 신념이었다! 반대로,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만 하고 그 주장만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거짓이다. 그건 너무 음울하고 너무 경직되어 있고 너무 근시안적이다. 가장 심한 비난의 말로 표현하자면, 비과학적이다.
나는 운전대를 살짝 두드렸다. 운전대에 닿는 내 손가락이 한층 더 가볍게 느껴졌고, 그 손가락이 조종하고 있는 인생에 대한더 큰 통제력이 느껴졌다. - P228

휴, 한숨이 나온다.
그의 이야기는 결국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자기 죄에 대한 벌을 받지 않고,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런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우주적 정의의 감각 같은 건 그 까칠하고 무의미한 조직 속 어디에도 새겨져 있지 않을 만큼 야멸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바닥 모를 혼란한 세계는 소매 속에 또 하나의 속임수를 감춰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에게 가장 소중한 그것을 훔쳐갈 마지막 하나 남은 방법을 이 세계가 마침내 그의 물고기 컬렉션을 단박에 허물어뜨린 그 은근하고 음흉한 방식을, 그것은 번개도 아니고 홍수도 부패도 아니며, 큰 입을 벌려 그 모든 걸 집어삼킨 거대한 싱크홀도 아니다. 아니, 자연의 방법은 훨씬 더 잔인했다. 자연은 그가 자기 손으로 직접 그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 - P235

별들을 포기하는 일이 성직자에게는 다른 효과를 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방랑자에게도, 제빵사에게도, 촛대 만드는 사람에게도그러니까 물고기의 경우도 그럴 것이다.
캐럴 계속 윤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평생 존경해왔던 과학자 공동체에 대한 일종의 격분이 생겼다고 했다. 인간의 직관을빼앗아감으로써 일반 대중이 인간의 애정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환경에 더더욱 무관심해지도록 만들 거라는 걱정이었다. 물고기의 죽음을 그토록 아름답게 설명한 책을 썼음에도, 윤의 한 부분은단순한 언어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다.
앞에서 얘기했던 "횡설수설하는 분기학자" 릭 윈터바텀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목적을 얻었다. 그는 하나의 대의를 가지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덮고 있는 두꺼운 모포를 걷어내려는 열의에 불타올라, 이 칠판 저 칠판 위에서 이 물고기 저물고기를 처형했다. 그는 자신의 뇌를 재배선하고 있다고, 자신이진실에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고 느꼈고, 다른 사람들도 그문틈을 엿보도록 돕고 싶은 열의를 느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그는 열의가 식고 시무룩해졌다.  - P249

나의 아버지는 "어류"라는 단어를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단어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정확하지 않다는건 이해하지만 유용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세계를 경험하는 제한된 방식에 자신을 가두게 되는 것이 걱정되지 않느냐고 내가 묻자, 아버지는 불만스럽게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나는 그게 뭐든, 아직 내가 해방되지 않은 것으로부터 해방되기에는 너무 늙었어."
큰언니는 물고기를 놓아버리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언니는 어류라는 범주 전체를 바로 손에서 놓아버렸다. 왜 언니한테는 그게 그렇게 쉬운 거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그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인간은 원래 곧잘 틀리잖아" 언니는 평생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늘 반복적으로 오해해왔다고 말했다. 의사들에게서는 오진을 받고, 급우들과 이웃들, 부모, 나에게서는 오해를 받았다고 말이다.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
정말로 이 물음은 모든 사람마다 다 다르다. - P252

내가 물고기를 포기하면 얻게 되는 게 뭔지 나는 아직 몰랐다.
다만 시카고를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은 알았다. 더 이상 나의연옥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헤더의 아파트에, 곱슬머리 남자가 언젠가는 내게 돌아올 거라는 헤더의 믿음이 따뜻하게덥혀주던 그 2층짜리 둥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무리 편안하게느껴지더라도, 나는 내 인생을 계속 살아가야 했고, 혼돈 속으로다시 들어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봐야 했다. - P255

그 커튼들 너머, 우리가 자연 위에 그려놓은 선들 너머를간절히 보고 싶었다. 다윈이 거기 있을 것이라 약속했던 땅, 분기학자들이 볼 수 있었던 땅, 어류는 존재하지 않으며 자연은 우리가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경계가 없고 더 풍요로운, 아무런 기준선도 그어지지 않은 그곳을.
"다른 세계는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 안에 있다." W. B. 예이츠의 것으로 알려진 이 인용문을 나는 여러 해 동안 벽에 붙여두었다. 그 다른 세계가 바로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였다. 나는 과학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위스키를 마시면서 그 세계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 세계는 아무 데도 없었다.
그 세계를 보려면 아무래도 스노클이 필요할 터였다. 내가 마침내 그 너머의 세계를 보게 되려면, 플라스틱 스노클을 내 코에세게 갖다 대야 할 터였다.
한번 설명해보겠다. - P257

깨끗한 물 때문이었을까.
뭐였든.
하지만 그 물고기들이란.
물고기들은 내가 그때까지 본 무엇과도 달랐다.
노란 앵무새들과 검은 천사들과 아콰마린색 달의 조각들. 상당한 크기의 자주색 물고기 하나는 내가 강아지처럼 자기를 졸졸따라다니게 해줬다. 나는 벅찬 감동을 느꼈지만, 감동의 소리를 낼수 없었다. 그 감동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물 위로 올라가야했다. 나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거기 그들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수없이 글로만 읽었던 존재들. 아직 내가 이름도 모르는 존재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피부 아래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나와 훨씬 더 비슷한 내장기관이 있다는 것, 나와 똑같은 이온이흐르고 있는 뇌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류가 아니라는 것. 은빛 존재들 한 떼가 나를 향해 몰려오더니 잘하면 잡을수도 있는 기차처럼 내 아래쪽에서 빠른 속도로 몰려다녔다. 나는그 은빛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들은 갈라지며 나를 자기들 안으로받아주었다. 수백 마리의 은빛 영혼들이 나를 감쌌다.
나는 공기를 들이마시러 올라갔다. - P261

이제는 침대 위 에메랄드색 눈의 아내 곁에 누워 있을 때 총이 떠오르면-그렇다. 그건 여전히 떠오르고, 아마도 언제나 떠오를 것이다-나는 총이 주는 것들을 헤아려본다. 그것이 가져다줄수 있는 해방, 그날의 스트레스와 내가 망쳐버린 것들에 대한 해결책, 수치의 종말에 관해.
그러다가 물고기에 관해 생각한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빛 물고기 한 마리가 내 머릿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모습을 그려본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계에 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또 뭐가 있을까? 우리가 자연 위에그은 선들 너머에 또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어떤 범주들이 무너질 참일까? 구름도 생명이 있는 존재일 수 있을까? 누가알겠는가. 해왕성에서는 다이아몬드가 비로 내린다는데? 그건 정말이다. 바로 몇 년 전에 과학자들이 그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가세상을 더 오래 검토할수록 세상은 더 이상한 곳으로 밝혀질 것이다.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 안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잡초 안에 약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얕잡아봤던사람 속에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 P263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 P263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 폭풍우는 짜증스럽기만 한 일일까? 어쩌면 그것은 거리를혼자 차지할 수 있는 기회, 온몸을 빗물에 적셔볼 기회, 다시 시작할 기회일 수도 있다. 이 파티는 당신이 예상하는 것만큼 따분할까? 어쩌면 그 파티에서는 담배를 입에 물고 댄스플로어 뒷문 옆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친구가 있을지도 모르고, 그 친구는 앞으로수년간 당신과 함께 웃고 당신의 수치심을 소속감으로 바꿔줄지도 모른다. - P264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해골 열쇠를 하나 얻었다. 이세계의 규칙들이라는 격자를 부수고 더 거침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물고기 모양의 해골 열쇠. 이 세계 안에 있는 또 다른 세계.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고 하늘에서 다이아몬드 비가 내리며 모든 민들레가 가능성으로 진동하고 있는, 저 창밖, 격자가 없는 곳.
그 열쇠를 돌리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단어들을 늘 신중하게 다루는 것이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무엇을 잘못 알고 있을까? 과학자의 딸인 나로서는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긴 했지만, 내가 물고기를 포기할 때 나는 과학자체에도 오류가 있음을 깨닫는다. 과학은 늘 내가 생각해왔던 것처럼 진실을 비춰주는 횃불이 아니라, 도중에 파괴도 많이 일으킬수 있는 무딘 도구라는 것을 깨닫는다. - P267

삽화에 관한 몇 마디


이 책에 실린 삽화는 19세기에 처음 생긴, 판에 직접 새기는스크래치보드 기법으로 만든 것이다. 점토로 된 흰 하드보드를 검은 먹물로 코팅하고, 무엇이든 긁어낼 수 있는 도구로 검은 부분을긁어내어 그림을 새기는 방법이다. 이 책 삽화에서 판화가는 바늘을 기본 도구로 사용했다.

변화에 관한 몇 마디


이 책이 출간되고 여섯 달 뒤, 스탠퍼드대학과 인디애나대학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름이 붙은 건물의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두 학교 모두 학생들과 임직원, 교직원, 졸업생들이 편지와 기사, 온·오프라인 시위로 항의한 결과 내려진 결정이다.

감사의 말

무엇보다 먼저, 이 책은 지적인 부분에서 대모 역할을 해준 캐럴 계숙 윤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논의한 과학적 주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생긴 분이라면, 직관과 진실의 충돌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자세히 들려주는 윤의 책 <자연에 이름 붙이기Naming Nature》를 향해 걷지 말고 뛰어가보시기를 권합니다. 내가 처음 분기학이라는 토끼굴에 빠졌을 때, 그 주제에 관해 기꺼이이야기를 들려준 윤을 만난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고, 윤은 늘 너무나도 관대하고 자애로운 안내자가 되어주었습니다. - P272

니다.
추천할 책이 두 권 있습니다. 하나는 페니키스 섬의 소년원에서 교사로 일한 시간을 담은 대니얼 롭의 회고록 《그 물을 건너다Crossing the Water》입니다. 그의 글은 페니키스 섬처럼 황량하면서도 벅차고, 때로는 연약하고 때로는 강경합니다. 격리와 고된 노동의 가치에 대해, 장소가 사람의 영혼을 바꿀 수 있는가에 관해 그가 제기한 의문들이 계속 나의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또 한 권은제니퍼 마이클 헥트의 《살아야 할 이유stay: A History of Suicide and thePhilosophies Against It》(열린책들, 2014)로, 자살에 반대하는 훌륭한 비종교적 주장들을 펼쳐놓았습니다. 두 책 모두 매우 아름다운 독서경험을 안겨주었고, 나는 이 선물 같은 책들을 언제까지나 소중히여길 것입니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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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어떤 말을 속삭였을까? 자기가 평생 해온 작업의 파편들을 쓸어 담을 때,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물고기들을 던져버릴 때, 이튿날 밤 작은아들 에릭을 침대에 뉘일 때, (영원히 끝나지 않을, 엄청난 양의) 번개와 세균과 지각변동이 잠복한 채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을 때, 자신에게 계속 박차를 가하기 위해, 그 모든 일의 허망함에 짓눌려 으스러지지않기 위해 그는 정확히 어떤 말을 자신에게 들려주었을까?
나는 점점 더 필사적으로 알고 싶어졌다. 곱슬머리 남자가 나를 떠난 지 3년이 되었고, 세계는 계속 침묵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나는 어느 결혼식장에서 그를 만났다. 우리는 포옹을 했고그의 계피 향기가 소나기처럼 내게 훅 끼쳐왔다. 그게 다였지만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언젠가는 모든 게 다 복구될 거라는, 우리의 사랑은 나의 배신에도 떨어져 있는 몇 년, 이제 더 이상 서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지낸 몇 년 세월에도 버틸 만큼 충분히 강할 거라는 희망을 말이다.  - P118

그러나 헤더가 남자친구와 시내로 외출한 밤, 도시의 자주색불빛이 참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면 나는 그 모든 것의 현실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내 인생에 생긴 공백을, 내가품은 희망의 빛이 나를 더 따뜻이 데워줄수록 점점 더 넓어지고 차가워지기만 하는 그 공백을 말이다.
그래서였다. 나는 절박했다. 단순하게 말하자. 데이비드 스타조던의 책에서, 망해버린 사명을 계속 밀고 나아가는 일을 정당화하는 그 정확한 문장을 찾아내는 것이 내게는 절박했다. - P120

데이비드가 마술적 사고 탓으로 돌린 것들 중 몇 가지만꼽자면 고통, 병, 무지, 전쟁 등을 들 수 있다. 1924년에 《사이언스》에 발표한 <과학과 사이어소피>라는 글에서 그는 16세기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었다는 이유로 화형당한천문학자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를 영웅으로 칭송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화형을 당하기 전 브루노는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무지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학문이다. 아무런 노동이나 수고 없이도 습득할 수 있으며, 정신에 우울함이 스며들지 못하게 해주니 말이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이 인용문을 독자들에게, 만약 그들이 행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을 차단해버린 적이 있다면 그들 역시 브루노를 살해한 자들과다르지 않다고 경고하고 비난하는 데 사용했다. - P125

그는 갈수록 더욱더 내 아버지와 비슷한 소리를 했다. 인간이살아가는 방법은 매번 숨쉴 때마다 자신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거기서 자기만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어디를 들여다봐도 보이는 건 그것뿐이었다. 오만에 대한 마술적사고에 대한 엄중한 경고. 예를 들어 진화론에 대한 강의 요강에서도, 우주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다룬 섹션 하나를 통째로 끼워 넣은 걸 볼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라고 그는 썼다. "자연에 참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자연의법칙은 바꿀 수 없으며 그 법칙을 거스르는 자는 공기로 된 방망이를 휘두르는 셈이다."" 나는 이런 언급들에 함께했을 열정적이고 통렬한 비난을, 공중으로 높이 치켜든 그의 주먹을 그저 상상만해볼 따름이다. 우주 앞에서 너무나 무력한 그 주먹을. - P125

심지어 절제에 관한 에세이에서도 그것을 찾을 수 있다. 그는왜 그토록 약에 반대했을까? 그건 약이 사람을 실제보다 더 강력하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혹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약이
"신경계가 거짓말을 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알코올은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로는 몸이 차가울 때도 따뜻하게 느끼도록 하고, 아무 근거 없이 기분 좋아지게 하며, 인격 수양의 핵심을 차지하는 제한과 자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느끼게 한다." 달리 말하면, 자신에 대한 낙관적인 관점은 자기 발전에 대한 저주라는 것이다. 자신을 정체시키고 자기 발달을 저해하고 도덕적으로 미숙하게 만드는 길이자 멍청이가 되는 지름길이다.
- P126

이런 게 정말 그의 세계관이라면, 그가 그렇게 자기 과신을 경계하는 사람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집요함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모든 게 사라지고 부서지고 희망이라곤 없는 최악의 날에조차 어떻게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밖으로 나가게 한 것일까?
마침내 나는 가장 유의미한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손에 넣었다.
그것은 절망의 철학》이라는 제목의 작고 검은 책이다. 그 책에서데이비드는 과학적 세계관이 골치 아픈 점은 삶의 의미를 찾고자할 때 그 세계관이 보여주는 것은 허망함뿐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우리가 붙인 불은 숯을 남기고 죽는다. 우리가 지은 성들은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다. 강은 바닥을 드러내고 사막의 모래만 남긴다. (…) 어느 쪽으로 눈을 돌리든 생명의 과정을 묘사하려면 기운빠지게 하는 은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 P126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당신이 밟고 선 그 땅뙈기가이 세상에서, 아니 그 어느 세상에서도 당신에게 가장 달콤한 기쁨을 주는 땅이 아니라면 당신에게는 희망이 없다"라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을 인용한 뒤, 분발을 요구하는 ‘카르페 디엠‘의 구호를 외치며 독자들을 배웅한다. "그 어디에도 바로 여기, 지금, 오늘만큼 하늘이 파랗고 풀밭이 푸르고 햇빛이 밝고 그늘이 반갑게 맞이해주는 곳은 없다."16그러면 나쁜 나날을 보내고 있으면 어떻게 하라는 걸까? 데이비드는 나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동정심을 거의느끼지 않는다. 《절망의 철학>의 최종 결론은 절망이 선택이라는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절망이 청소년기에 자연스럽게 거쳐 가는단계라고 생각하기는 해도 그런 감정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멸한다. 그는 그런 사람들은 "축 늘어진 정신의 유행을 따르고, 문학 속 슬픈 왕들‘을 흉내 내는 게으른 모방자들이며, 그들이 지옥불 숨결을 내뿜는다고 비난한다.  - P127

 그가 말하기를, 그 모든 것의 허망함을 곱씹는 데 시간을허비하는 것이 몹쓸 짓인 이유는, 진화가 선물한 그 소중한 전기를, 너무나 많은 경이로운 감각들을 느끼고 너무나 많은 과학적 수수께끼를 푸는 데 써야 할 그 신성한 이온들을 실존적 탐구라는 하수구로 흘려보냄으로써 글자 그대로 "몸이 아직 살아 있는데도 죽은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19나는 익숙한 수치심이 나를 덮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버지가 엄청 차가운 호수에 풍덩 뛰어들었다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만면에 띠고 큰 숨을 내쉬며 수면으로 치솟는 모습을 볼 때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이었다. 나는 왜 아버지처럼 저렇게 살 수 없는걸까?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게 뭘까? 그 답을 찾으려는 필사적인 마음에 나는 계속 책을 읽으며, 위생과 유머, 외교, 평화주의에 관한그의 비판문과 시, 강의 노트, 알코올과 립스틱과 전쟁에 관한 논쟁을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오후 나는 발견했다. 공포에 대한 해독제, 희망에 대한 처방을 말이다. - P128

그것은 그가 ‘진화의 철학‘이라 이름 붙인 강의 요강의 제일 밑에 묻혀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그날 하루의 강의를 내가 풀고자했던 그 난제, 바로 과학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바쳤다.
"이러한 인생관은 염세주의로 이어지는가?"20 강의가 끝나갈 무렵그는 학생들에게 일종의 마술 같은 주문을 걸었다. 혼돈이 주는 냉기를 떨쳐버리는 한 가지 방법을 말이다. 특별한 활자체로 된 여덟개의 단어.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나는 경악했다. 이거였다. 내 아버지가 즐겨 쓰는 바로 그 비법. - P128

법. 오늘날까지도 아버지 책상 위 액자 속에 담겨 있는 바로 그 단어들. 다윈이 외친 투쟁의 권유. 내 아버지와는 다르게 반항적이고, 희망과 신념이 가득한 사람으로-보였던 데이비드지만, 결국그에게도 내게 알려줄 새로운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늘들어왔던 말을 또다시 상기시키는 것밖에는.
장엄함은 존재해 네가 그걸 보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 - P129

어느 날 밤 나는 로저스 공원에 있는 어느 바에서 친구 스탠지를 만났다. 우리는 흑맥주를 주문하고 일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는 라디오에서 시를 가지고 방송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우리는 관념과 단어의 분열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자신이 쓴 단어들이 다른 사람 앞에서 제대로 된 효과를 내지 못하고 철퍼덕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생각들을 머릿속에 품고 있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를 그리고 자기를 이해해주는것처럼 보이는 소수의 사람들이 지닌 위험한 힘에 대해서도. 나는스탠지에게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그 지진과 바늘에 대한 나의 집착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건 왜 그러는지에 관한 집착이야"라고 나는 말했다. "한 사람을 계속 나아가도록 몰아대는건 뭘까?"
그때 그 친구가 한 말은 "흠"이 다여서 나는 맥이 좀 빠졌지만,
다음 날 오후 이메일을 통해 좀 더 긴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 P130

나는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경이로운개념이었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비현실적인 목표를 향해 밀고 나아가는 것이 미친 짓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해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 개념은 단지 내가 그것을 거역한다면 나를 부숴버리겠다고만 약속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 잘 들어맞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파괴되지 않는 것은 바보들이 겪는 고통처럼 보였다. 바보들,
낭만주의자들, 슬픈 왕들을 사랑하는 흉내쟁이들, 내면의 열정이라는 연료가 너무 강력하게 피어올라 현실감각이 안개처럼 흐려진 사람들. 그런데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그런 사람이던가? 절대아니다. 그가 평생 전념해온 일은 그런 열정 때문에 눈앞을 가리는안개를 닦아서 없애는 것이었으니까. - P131

이 얼마나 경이롭고 분발을 요구하는 투쟁의 권유인가.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위로이자, 어깨를 움켜쥐는 손길인가. 그런데 작은 문제가 하나 있다. 그가 쓴 단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신도그 문제를 발견할 것이다. 그 진주알을 만든 최초의 작은 모래알하나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이 말은 그가 자기 자신에게 결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바로 그런 종류의 거짓말이다. 사악함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그가 경고했던 그런 종류의 거짓말. 자기 경력을 바쳐 맞서 싸워왔던그런 종류의 거짓말이자, 그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가치가 있다고 말했던 그런 종류의 거짓말이다. 자연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않으니까! 그조차도 절망에 완전히 집어삼켜지지 않으려면 그 거짓말이 진실이기를 믿어야만 했던 것이다. - P133

데이비드가 연구실 바닥에서 유리 파편을 쓸어 담고 있을 때,
부서진 자기 인생의 조각들을 다시 이어 붙이려는 노력을 끌어내고 있을 때 그가 자신에게 속삭인 건 거짓말이었다.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그동안 그가 주장해온 모든 것을 생각해볼 때, 이 거짓말을 알게 된 것 자체가 내게는 충격이었다. 그러나 데이비드가 결국에는자신의 컬렉션에서 아주 많은 부분을 살려냈다는 사실, 한 세기가넘게 지난 오늘날까지도 수천 개의 표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고, 아주 다양한 기준으로 볼 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인생이 결국 비범할 정도로 성공적인 인생두 아내, 학장직, 상, 개를타고 다니는 원숭이와 라틴어를 말하는 앵무새, 분류학을 사랑하는 자식들이 가득한 에덴동산까지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니,
자기기만이라는 게 과연 그렇게 나쁜 일인가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어쩌면 데이비드와 나의 아버지는 자기기만에 대해 그렇게 도덕주의적 잣대를 들이대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피해야하는 죄라고 비난할 필요까지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 P137

마치 모든 게 다 들어 있는 메리 포핀스의 마법 가방처럼 긍정적 착각이 가져다주는 온갖 좋은(마음 깊이 느껴지는 잘 살고 있다는느낌, 일과 인간관계에서 더 많은 성공, 심지어 더 좋은 신체 건강까지8) 이야기들을 찾아 읽는 동안, 어쩌면 내가 개미보다 나을 게 없으니겸손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느라 아버지가 나를 쓸데없이 헤매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진화가 우리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은 "우리는 실제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으로 산다는 건 가혹한 운명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우리는 세상이 기본적으로 냉담한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은 보장되지 않고,
수십만 명을 상대로 경쟁해야 하며, 자연 앞에서 무방비 상태이고,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이 결국에는 파괴될 것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은 거짓말 하나가 그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낼 수도 있고, 인생의 시련 속에서 계속 - P141

그렇다면 어떤 인지적 결함이 그릿을 획득하는 데 도움이 될까? 바로 긍정적 착각이다. 다른 연구들도 마찬가지로 긍정적 착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좌절을 겪은 뒤에 낙담할 가능성이 적다는것을 보여주었다.16 그릿이란 여러 특성들이 섞인 칵테일 같은 것이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이것이다. 좌절을 겪은 뒤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능력,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능력, 또는 더크워스의 표현을 빌리면 실패와 역경, 정체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노력과 흥미를 유지하는 것" 말이다. - P143

바우마이스터와 부시먼은 높은 자존감이 모두 나쁜 건 아니라는 점도 재빨리 덧붙였다. 그들은 높은 자존감도 아주 좋은 것일수 있다며, 활짝 편 손바닥을 높이 들어 보이면서 해명해야 하는상황을 자주 겪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주 편안하게 받아들이며, 비판을 받아도 자기 가치가 위협받는다고 느끼지 않으므로 높은 자존감은 당사자를 기이할 정도로 평화롭게(그들의 표현으로는 "이례적으로 비공격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고 했다.
그들은 자존감이 높기는 하지만 자존감에 대한 위협을 쉽게 느끼는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위험한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 P150

바우마이스터와 부시먼은 이렇게 썼다. "쉽게 말해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신을 우월한 존재라고 보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한 사람들이다. (・・・) 거창한 자기상을 확인받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비판당하는 것을 몹시 괴로워하며 자기를 비판한 사람을 사납게 공격하는 것으로 보인다. 738나는 스탠퍼드에서 보았던 그 오싹한 물고기, 데이비드 스타조던이 직접 자신의 이름을 붙인 유일한 바닷물고기를 다시 떠올렸다. 서로 반대쪽에 위치한 두 면이 돌돌 말리듯 어디서 만나는지도 모르게 하나로 합쳐지는 뫼비우스 띠 모양의 그 가시 박힌 용말이다. "모서리가 없는 조던" 그가 선택한 이 물고기에 어떤 메시지가 숨어 있는 걸까? 그의 매력 아래 도사린 어두운 면에 대한 인정일까?
루서 스피어는 이렇게 썼다. "조던의 재능 중 특히 양날을 지닌 재능은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설득하고, 그런다음 무한해 보이는 에너지로 목표를 추구하는 능력이다. (…) 그는 자신의 관용과 관대함을 자랑스러워했다. (…) 하지만 조던은파리 한 마리를 잡는 데 대포알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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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자신의 선지자로 모시던 루이 아가시의 제자답게 데이비드는 자신이 관찰하는 생물에게서 도덕적 교훈을 찾으려 했다. 아가시의 흐릿한 "퇴화" 개념에 다윈의 진화론을 함께 버무린 것을가지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미끌미끌한 먹장어를 나태함
"이나 기생충 같은 "나쁜 버릇이 한 종을 퇴보 또는 타락시키거나,
"더 나쁜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증거로 보았다." 한 과학 논문에서 그는 한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주머니 모양의 몸으로 여과섭식을 하는 멍게가 한때는 더 고등한 물고기였지만 "게으름", "무활동과 의존성"이 더해진 결과 현재와 같은 형태로 "강등된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그러한 쇠퇴를 초래하는 정확한 메커니즘은알지 못했지만, 데이비드에게 멍게는 명백한 경고이자 게으름에대한 교훈담이고, 말그대로 멍청하기 짝이 없는 주머니였다. - P74

찰리와 함께 해안을 훑으며 다니는 동안 데이비드는 노련한낚시꾼들이 먹이를 잡는 방법을 연구했다. 샌디에이고에서 촘촘한 그물로 엄청난 양의 다양한 생물을 훑어 올리는 중국인 어부들, 샌타바버라에서 바위에 올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속으로탐지창을 찔러 넣는 포르투갈 어부들, 그리고 너무 부럽게도 정탁하게 물속으로 돌진하는 갈매기와 펠리컨까지. 그는 자기가 채택할 수 있는 방법은 채택하고, 채택할 수 없는 것은 훔쳤다. 중국수산시장을 찾아 아직 과학에 알려지지 않은 생물들을 쓸어왔고, 새와 상어의 배를 갈라 자신의 손에 잡히지 않은 생물들을 찾아냈다. 데이비드와 찰리는 이 출장에서만 80가지가 넘는 새로운류 종에 이름을 붙였다. 생명의 나무에서 80개의 새로운 가지가 베일을 벗었다.  - P74

그러던 7월의 어느 늦은 밤, 우주가 손목 관절을 우두둑 꺾으며 공기 중에 숨어 있던 이온들의 작은 주머니들을 터뜨리고, 벼락으로 전신선을 때려 데이비드의 연구실 아래층 사무실로 불꽃을날렸다. 1883년의 일이었다. 천천히 종이 몇 장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이어서 더 많은 종이들에 붙었고, 그다음에는 벽들에도 붙었다. 그러다 마침내 불길이 혀를 날름거리며 데이비드의 소중한 유리단지들이 쌓여 있는 선반으로 다가갔다. 에탄올은 부패시키려는 우주의 시도를 저지하는 능력도 탁월했지만, 불과도 친한 사이였다. 그 유리단지들은 작은 폭탄들처럼 폭발했다. 물고기들은 증발했다. 동정되지 않은 생물들은 재가 되었고, 아마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표본이 하나도 남김없이 소실되었다. - P77

그게 다가 아니었다. 여러 해에 걸쳐서 데이비드는 비밀스러운 문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생명의 나무에서 전에는 한 번도 본적 없는 가지들을 밝혀내는 일종의 보물지도였다. 통찰과 진화적관계를 천명하는 정신없이 복잡한 선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샹들리에 모양의 지도. 이것이 완전히 불타 없어졌다. 피해의 규모를평가하는 일을 맡은 기자는 비탄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기자는《블루밍턴 텔레폰Bloomington Telephone》지에 "한 시간 동안 타오른 불길이 그가 평생 해온 일을 거의 다 수포로 돌려놓았다"라고 썼다. 17하지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이런 재해를 겪고도 멈추기를거부했다. 자신이 잃은 것들을 되찾기 위해 재를 털고 곧바로 다시 - P77

벼락 사고와 수전의 죽음 두 가지 일에서 재빨리 회복한 것에대해 데이비드는 살면서 언제부턴가 "낙천성의 방패"를 갖추게 된것 같다는 말로 설명했다.25 그는 자신의 키가 낙천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도 추측했다. 완전히 자랐을 때 그의 키는 188센티미터로, 26 미국 남성 평균 키가 167.6센티미터였던 당시로서는엄청나게 큰 키였다. 무엇 때문에 생긴 낙천성이든 간에, 데이비드의 친구들도 그의 낙천성의 방패에 대해, 일에 차질이 생겨도 전혀동요하지 않는 성질에 대해 언급하곤 했다. 한 동료는 아무리 안좋은 날에도 언제나 "노래를 흥얼거리며 회랑을 거니는" 데이비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27
"나는 이미 지나간 불운에 대해서는 절대 근심하지 않는다"라고 데이비드는 설명한다. 그의 어조에서 어깨를 으쓱하는 느낌이 배어난다.
시간이 지나면서 허리띠에 과학적 발견의 표시를 수백 개나새겨 넣은 이 쾌활하고 혈기 왕성한 거구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관한 이야기가 캘리포니아의 한 부유한 부부의 귀에 들어갔다.  - P79

그는 폭넓은 대상들을 향해 이 주제에 관해 강연을 하고다녔다. 예를 들어 남북전쟁 당시 링컨 행정부가 조언을 구했을 때는, 만약 흑인을 해방시키더라도 백인과는 결코 평화롭게 살 수 없을 것이므로 백인들과 분리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또한 말도 안 되는 척도들과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등급을 거론하며, 흑인들이 생물학적으로 문명에 "부적합"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건그들의 잘못은 아니며, 그냥 본성상 너무 "아이들 같고", "관능적이며", "놀기를 좋아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성스러운 생명의 사다리에서 너무 낮은 칸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 중 어느 것도 데이비드의 마음에는 걸리지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과학관 입구에 아가시의 조각상을올리는 일에 환호했다. 그는 아가시가 다윈을 거부한 것을 용서했으며, 그 이유는 "아가시가]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 사고하는 법을가르쳐주었기 때문이라고 정당화했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정신이 ‘어떤 인간들은 생물학적으로 열등하다는 생각에 오염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형 루퍼스를 따라 공공연히 자신을 노예제 폐지론자로 밝혀왔고,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자신에게는 그런 생각이 영향을 미칠 수 없을 거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 P83

그러나 이런 비판과 모욕, 그의 목줄을 홱 잡아당겨 고통을 주는 악력이 있는 한편, 언제나 그것을 견디게 해주는 물고기가 주는위안도 있었다. 데이비드는 드넓은 물의 세계가 무한한 위안을, 그어떤 술이나 약보다 훨씬 더 나은 위안을 준다고 확신했다. 이 우주에서 아직은 미지의 한 조각에 불과한 새로운 물고기를 한 마리한 마리 잡아나가고, 새로운 이름을 하나씩 붙일 때마다 믿을 수없는 도취적인 감정이 몰려왔다. 혀에 닿는 그 달콤한 꿀, 전능함에 대한 환상, 그 사랑스러운 질서의 감각. 이름이란 얼마나 좋은위안인가. - P89

철학에는 어떤 것들이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상이 있다. 이 사상은 정의, 향수, 무한, 사랑, 죄 같은추상적인 개념들이 천상의 에테르적 차원에 머물면서 인간이 발견해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가 그것들의 이름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본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개념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실재가 된다. 우리는 전쟁, 휴전, 파산, 사랑, 순수, 죄책감을 선언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 이렇듯 아이디어를 상상의 영역에서 세상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운송 수단인 이름 자체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사상에따르면, 이름이 존재하기 전까지 개념들은 대체로 불활성 상태에있다고 한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눈을 굴리며 수학을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으면 숫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오? 파이를 품고 있지 않은 원이 있다면 어디 한번 내게 보여주시오." - P93

그가 의자를 예로 든 의도도 같은 맥락에 속한다. 겸손을유지하라는 것, 우리가 믿는 것들, 우리 삶 속 가장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늘 신중해야 한다는 걸 되새겨보게 해주는 사례인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그 생각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의 말귀를 알아들었다. 대체로는 이해한 것 같다. 그의 연구실-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를—에서 그와 함께 앉아 있을 때는 그 생각이 아주 중요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캠퍼스로 걸어 나와 내 앞에서 아름답게 나부끼는 오렌지나무잎들을 보자 그 관념들이 바람에 날려 증발되는 것 같았다. 당연히의자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무들도. 나뭇잎들도. 그리고 사랑도!
이 세계에는 실재인 것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아도 실재인 것들이 어떤 분류학자가 어떤 물고기 위로 걸어가다가 그 물고기를 집어 들고 "물고기"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물고기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이름이 있든 없든 물고기는 여전히 물고기인데….
맞지? 맞겠지?
- P95

그리고 모든 성스러운 유물이 그러하듯 이 완모식 표본들도Idas longinus안전한 장소에, 그러니까 전 세계의 박물관이나 학술기관들에 보관된다. 예를 들어 뤼세이데스 이다스 롱기누스 Lycaeides to나비는 하버드대학 비교동물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작은 모자이크 펜던트처럼 생긴, 지금은 멸종한 불가사리 종인 마로카스테르 코로나투스Marocaster coronatus의 최초 표본은 프랑스 툴루즈박
"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런 완모식 표본들은 흔히 뒤쪽의 은밀한방에 따로 보관하는데, 당신이 경의를 표하면서 정말로 정중하게요청한다면 때때로 그것들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안내되어 숨죽인채 그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유리단지에 담긴 기원 자체를 만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완모식 표본에 관해서는 아주 중요한 규칙이 하나 있다. 만약완모식 표본이 소실되어도 새로운 표본을 그 성스러운 유리단지에 대체해서 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안 될 말이다. 그러한 상실에대해서는 경의를 표하고 애도하고 상실되었다는 표시를 남긴다.
이제 이 종의 계통은 영원히 순수성이 훼손된 채, 그 종을 만든 최초의 존재가 없는 상태로 남겨져야 한다.  - P96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데이비드가 물고기를 더 많이 수집할수록 우주가 더 난폭하게 반격하는 것 같았다는 점이다. 그가 혼돈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우주가 빼앗아간 것은 그의 아내 수전과 아기 소라뿐이 아니었다. 우주가 빼앗아간 존재 중에는 그의 친한 친구 허버트 코플랜드도 있었다. 북미의 새로운 담수어를 찾는 걸 함께하자고 그가 불렀던, 그 수염 기른 고기잡이 친구 말이다. 허버트는 어느 날 인디애나의 화이트 강에서 물고기를 수집하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배 밖으로 떨어져 동사했다.2 데이비드는 이렇게 썼다. "그리하여 나의 가장 친밀한 옛 친구가, 내가 교류했던 이들 가운데 가장 총명한 정신을 지닌 이들 중 하나가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허버트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비드가 가장 총애하는 제자 중 한 명인 찰스 메케이가 알래스카에서 새로운 물고기를 찾던 중 실종됐다. 뒤이어 그의 제자 찰스H. 볼먼이 조지아주 남부의 오커퍼노키okefenokee 습지에서 물고기를 수집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급사했다. - P100

어느 날 데이비드가 일본에서 물고기를 수집하고 있을 때 아홉살 바버라는 성홍열에 걸려 몸져누웠다. 데이비드는 서둘러 바버라 곁으로 돌아갔지만 샌프란시스코 부두에 도착했을 때 이미늦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데이비드는 이 일을 "우리가 겪은가장 잔인한 개인적 재앙"이라고 말했다. "아내에게나 나에게나가장 파괴적인 충격으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밝은 빛이 꺼져버린일이었다. 20년이 지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어제 겪은 일처럼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그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줄 수 있는것, 미약하지만 목적의식을 느끼게 하고 기분을 돌리게 할 수 있는유일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그의 물고기들이었다. 그는 다시 물로, 바다로 나갔다. 더, 더 많은 물고기를 찾아서.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무력함을 느낄 때는 강박적인 수집이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 P102

미지의 생물에게 자신의 깃발을 꽂기 위해 그는 주석 이름표에 그 성스러운 이름을 펀치로 새기고, 그 이름표를 유리단지 속표본 곁에 담그고 뚜껑을 닫았다. 우주의 또 한 귀퉁이가 포획된것이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마치 전리품처럼 높이, 더 높이 쌓아가며 전시했다. 그가 질서 속으로 끌어다놓은 혼돈의 양이거의 건물 두 층 높이로 올라갈 때까지. - P106

과연 여기에 어떤 단어들이 어울릴까?
당신 삶의 30년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무엇이든 당신이 매일 하는 일, 무엇이든 당신이소중히 여기는 일, 그것이 아무 의미 없다고 암시하는 모든 신호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중요한 것이기를 희망하면서 당신이 매일같이 의지를 모아 시도하는 모든 일들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 일에서 당신이 이뤄낸 모든 진척이 당신의 발치에서 뭉개지고 내장이튀어나온 채 널브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고 상상해보라.
여기는 바로 그런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들이 올 자리다.
모든 곳에 물고기들이 있었다. 바닥 위 모든 곳에 유리 파편이흩뿌려져 있었다. 가자미들은 떨어진 돌에 깔려 더 납작하게 뭉개졌다. 장어들은 무너진 선반에 깔려 절단되었다. 복어는 유리 파편에 찔려 살이 터져나왔다. 에탄올과 시체 냄새가 코를 쏘아댔다.
- P111

내가 이 연극의 감독이라면 무대 디자이너에게 조금 살살 하라고 말할 것 같다. 하지만 받아들이자. 이것이 우주가 우리에게준 것이다. 혼돈이 지배한다는 것, 나에게는 이보다 더 분명한 메시지는 없어 보였다.
나라면 이 지점에서 포기했을 것이다. 신성이 훼손되고, 꿈이박살 났으며, 수십 년 동안 끈기 있게 해온 일이 헛수고로 돌아갔다면, 나라면 지하실로 내려가 패배를 인정했을 것이다. - P113

데이비드는 어떻게 했을까? 우리의 신중한 과학자, 다른 무엇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원하는 그는 무엇을 했을까? 그는 그 지진의 명백한 메시지라 여겨지는 것에 귀를 기울였을까?
엔트로피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며, 그 어떤 인간도 결코 엔트로피를 멈출 수 없다는 메시지에?
아니다. 바로 이때 이 불운한 작자, 이 경이로운 작자는 바늘을꺼내 우리 지배자의 목구멍을 향해 찔러 넣었다.
그런데 대체 그 아이디어는 어디서 온 걸까? 이름을 살갗에곧바로 꿰매겠다는 아이디어 말이다. 데이비드의 내면 깊숙한 곳어디선가 솟아난 것일까? 소년 시절 해진 천을 꿰매 깔개를 만들던 기억 속에 있던 바늘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 것일까? 다른누군가가 제안한 것일까? 동료? 학생? 아내?
나도 모른다. 아쉽게도 이 바느질 기법의 탄생 비화를 나는 찾아내지 못했다. 표본에 곧바로 이름표를 꿰매는 것을 최초로 생각 - P113

사천번의그 답답한 마음이 그런 혁신을 불러온 것일까?
나는 모른다. 그러니 나로서는 데이비드가 최초로 바늘을 꽂던 순간을 상상해볼수밖에 없다. 마침내 그가 물고기 하나를 알아본다. 멸치와 비슷하게 생긴 녀석인데, 내 눈에는 아무 개울에나사는 아무 물고기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는 다이아몬드를 감정하는 보석 감정사처럼 그 작은 생물을 한 손에 들고 있다. 다른 손에는 찌를 준비가 되어 있는 바늘이 들려 있다. 데이비드가 알아본것은 무엇일까? 등을 따라 희미하게 나 있는 호랑이 같은 줄무늬였을까? 눈알을 에워싼 은색 테두리? 마치 배에 투명한 나비 한 마리가 앉은 것 같은 한 쌍의 작은 배지느러미? 그의 그물에서 탈출하려고 격렬하게 퍼덕거리며 물을 헤치던 그 셀로판지 같은 날개들을 기억해낸 것일까? 맹그로브 뿌리 사이를 날듯이 헤치고 다니고, 파도가 새겨진 모래 위에서, 그 따뜻한 아콰마린색 물에서 퍼덕이던 그 날개를? 그 물이… 어디더라… 아… 그래, 파나마! 맞아,
그거야. 그는 확신했다. 그가 들고 있던 건 파나마 망둥이의 유일한 완모식 표본이었던 것이다! 에베르만니아 파나멘시스Evermanniapanamensis!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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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그 사람이소파에 앉아 시리얼을 먹다가 불현듯 어떤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그것에 대해 흥분해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이를테면 사람들이 이메일 마지막에 겨우 키보드 네 번 더 누르는 수고를 안 하려고 머리글자 하나만으로 서명하는 것이 얼마나 자기를 짜증나게하는지 모른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모습.
혼돈이 그 사람을 집어삼킬 것이다.
혼돈은 부러져 떨어진 나뭇가지나 질주하는 자동차, 총알 하나를 거느리고 밖에서 치고 들어가 그를 으스러뜨릴 수도 있고, 아니면 반란을 일으키는 그 사람의 몸속 세포들과 함께 안에서 박차고 나와 그를 해체해버릴 수도 있다. 혼돈은 당신의 화초를 썩어물러지게 하고, 당신의 개를 죽이고, 당신의 자전거를 녹슬게 할것이다. 당신의 가장 소중한 기억을 부식시키고, 가장 좋아하는 도시를 무너뜨리고, 당신이 간신히 쌓아올린 모든 성스러운 장소를폐허로 만들 것이다.
혼돈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이라는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일어나는가‘ 하는 시기의 문제다. 이 세계에서 확실한 단 하 - P15

나이며,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주인이다. 과학자인 나의 아버지는일찍이 내게 ‘열역학 제2법칙‘은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엔트로피는 증가하기만 할 뿐,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줄어드는 일은 없다고 말이다.
똑똑한 인간은 이 진리를 받아들인다.
똑똑한 인간은 이 진리에 맞서 싸우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1906년 어느 봄날, 팔자수염을 기른 어느 키 큰 미국인이 감히 우리의 주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의 이름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David Starr Jordan. 여러 방면에서 혼돈과 싸우는 것은 그의 본업이기도 했다. 그는 거대한 "생명의 나무""의 형태를 밝혀냄으로써 지구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일을 하는 과학자, 더 정확히 말하면 분류학자였다. 그리고 생명의나무가 완성되면 모든 동식물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밝혀질거라고 했다. 그의 전문 분야는 어류로, 그는 새로운 종을 찾아 전지구를 항해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울러 그 새로운 종들이 자연에숨겨진 청사진에 관해 더 많은 걸 알려주는 실마리가 되어주기를바랐다. - P16

조던은 수년, 수십 년에 걸쳐 지치지 않고 일했고, 그 결과 당대 인류에게 알려진 어류 중 5분의 1이 모두 그와 그의 동료들이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새로운 종들을 수천 종 낚아 올렸고, 각각의 종마다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그 이름을 반짝이는 주석 꼬리표에 펀치로 새기고, 에탄올이 담긴 유리단지에 표본과 함께 이름표 - P16

를 넣었다. 그렇게 자신이 발견한 어류 표본들을 높이 더 높이 쌓아갔다. 1906년 어느 봄날 아침, 난데없이 닥친 지진으로 그가 수집한 반짝이는 표본들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 전까지는.
수백 개의 유리단지가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고, 그의 어류 표본들이 깨진 유리와 넘어진 선반들에 의해 절단되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최악의 피해를 입은 건 이름들이었다. 조심스럽게 유리단지에 넣어둔 주석 이름표들이 온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창세기가 거꾸로 펼쳐진 끔찍한 지진 속에서, 그가꼼꼼하게 이름 붙인 물고기 수천 마리가 다시 수북이 쌓인 미지의존재들로 되돌아갔다.
- P17

그런데 이 콧수염을 기른 과학자는 평생의 노고가 자기 발치에서 내장을 쏟아내는 파괴의 잔해 한가운데서 이상한 짓을 했다.
그는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그 지진이 전하는 명백한 메시지, 즉 혼돈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질서를 세우려는 모든 시도는결국 실패할 운명이라는 메시지에 그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소매를 걷어붙이고 허둥지둥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세상의 하고많은 무기 중에서 바늘 하나를 찾아 들었다.
그는 엄지와 검지로 바늘을 잡고는 바늘귀에 실 한 올을 꿰더니 그 파괴의 잔해에서 그나마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물고기 하나를 겨냥했다. 그러고는 한 번의 유연한 동작으로 바늘을 물고기의목살에 찔러 넣어 이름표를 꿰매 붙였다. 폐허에서 구해낼 수 있는모든 물고기에 이 작은 동작을 반복했다. - P17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혼돈에 반격한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당시 나는 20대 초반으로, 이제 막 과학 기자로 발돋움하던 참이었다. 이 얘길 듣자마자 나는 그가 바보라고 생각했다. 바늘은분명 지진에 맞서서는 효과가 있겠지만, 화재나 홍수, 녹, 그 밖에그가 고려하지 못한 수천 가지 파괴 방식에 대해서는 어쩐단 말인가? 그가 바늘로 이뤄낸 혁신은 너무 허술하고 너무 근시안적이며, 자신을 지배하는 힘에 대한 어마어마한 무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내게 오만에 대한 교훈으로, 어류 수집계의 이카로스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게 찾아온 혼돈에 뒤흔들리고,
내 손으로 직접 내 인생을 난파시킨 뒤 그 잔해를 다시 이어 붙여보려 시도하고 있을 때, 문득 나는 이 분류학자가 궁금해졌다. 어쩌면 그는 무언가를, 끈질김에 관한 것이든, 목적에 관한 것이든,
계속 나아가는 방법에 관한 것이든 내가 알아야 할 뭔가를 찾아낸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가당치 않게 커다란 믿음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 P18

도착한 배송 꾸러미는 따뜻하고 뭔가 마법에 걸린 물건 같은느낌이었다. 마치 그 안에 보물지도라도 담겨 있는 것처럼. 스테이크 나이프로 포장 테이프를 자르니, 금박으로 새겨진 글씨가 희미한 빛을 내는 올리브색 책 두권이 나왔다. 나는 큰 주전자 가득 커피를 만들어 1권을 무릎에 올리고 소파에 앉았다. 이로써 혼돈에항복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파헤칠모든 채비가 끝났다. - P20

데이비드 조던은 뉴욕주 북부의 한 사과과수원에서, 1851년한 해 중 가장 어두운 시간에 태어났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별에그토록 몰두하게 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신의 소년기에관해 이렇게 썼다. "가을 저녁 옥수수 껍질을 벗기던 중 천체의 이름과 의미에 관해 호기심이 생겼다"1하지만 그는 반짝거리는 별들을 마냥 즐길 수만은 없었다. 별들이 혼란스럽게 흩어져 있는 밤하늘은 그에게 질서를 부여하고알아내야 할 대상처럼 느껴졌다. 여덟 살쯤 됐을 때 조던은 천문도가 있는 지도책을 손에 넣었고, 그 페이지에서 본 것과 머리 위에보이는 것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밤이면 밤마다 그는 집에서 몰래빠져나가 하늘에 있는 모든 별들의 이름을 익히려 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르면, 밤하늘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데는 5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에 대한 상으로 그는 자신의 가운데 이름(미들네임)으로 ‘스타Star‘를 골랐고, 남은 평생 자랑스럽게 그 이름을달고 다녔다.
- P23

이유가 무엇이든 훌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데이비드의 구겨진 지도를 주먹 가득 움켜쥔 채 훌다는 아들에게 시간을 쓸 "더
"중요한 일을 찾아보라고 말했다." 착한 소년답게 데이비드는 어머니의 말을 들었다. 지도 만들기를 그만둔 것이다. 하지만 진짜소년답게 데이비드는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다. 진정한 의미에서는 말이다.
자신의 죄를 지구 탓으로 돌리려는 건지 데이비드는 이렇게썼다. "우리 시골집 주변에는 다양한 들꽃이 아주 많았다."12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이따금 풀밭에서 벨벳처럼 부드러운 파란 꽃잎이 동그란 공처럼 모여 핀 꽃과, 실크처럼 부드러운 주황색 별모양 꽃들을 꺾어 집으로 가져갔다. 어떤 꽃은 냄새만맡아보고 바닥에 던져버렸지만, 때때로 어떤 꽃은 손가락 사이에계속 남아 있다가 데이비드의 침실까지 따라 들어오곤 했고, 그런다음 침대 위에 놓인 채 꽃잎의 신비로운 배열 방식으로 데이비드를 자극했다. 그는 그 꽃을, 그 꽃의 이름과 생명의 나무에서 차지하는 정확한 위치를 알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려 애썼다. 그리고 꽤잘 억눌렀다. 사춘기가 닥치기 전까지는. - P26

조슈아를 만난 뒤 데이비드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무미건조하고 못생긴 꽃들-민들레 (타락사람오피시날레Taraxacum officinale)나 미나리아재비(라눙쿨루스 아크리스Ranunculus acris) 같은-이 자연의 청사진에 대한 더 좋은 실마리를담고 있다고 확신했다. "작은 것들은 아름답지는 않아도, 단 한 종류의 큰 꽃 백 송이보다 내게는 더 큰 의미가 있다. 미적 관심과 구별되는 과학적 관심을 보여주는 특별한 증거는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에게 마음을 쓰는 일이다."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
여기서 데이비드가 자신에 관한 뭔가를 드러내려고 했던 것일까? 회고록에는 이런 측면을 많이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에게인간 세상은 야박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 P28

루퍼스가 죽은 이후 데이비드의 일기장은 색채들로 폭발하기시작했다. 들꽃, 고사리, 아이비, 나무딸기 등 이 세계에서 뜯어올 수 있는 자연의 모든 파편을 꼼꼼하게 스케치하려 했던 것 같다. 그림의 기교는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그 그림들은 문질러 번진 연필 얼룩, 잉크 자국, 지우개 자국, 지나치게 열심히 그리려다흘린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그 미숙함 속에는 그의 집착과 필사적인 마음, 자신도 모르는 것들의 형상을 붙잡아두기 위해근육의 온 힘을 동원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각각의 그림 밑에는 마침내 학명이 하나씩 적혀 있었다.  - P30

데이비드는 마침내 그 이름들을, 라틴어로 된 승리의 선언이자 통달의 선언을 큰 소리로 발음하게 되었을 때의 감각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이름들은 내 입술에 얹힌 꿀과 같았다" 2심리학자들은 이처럼 괴로운 시기에 수집이 줄 수 있는 달콤한 위안에 관해 연구해왔다. 수십 년간 강박적인 수집가들과 상담해온 심리학자 워너 뮌스터버거Werner Muensterberger는 《수집: 다루기 어려운 열정 Collecting: An Unruly Passion》에서 수집 습관이 모종의
"박탈 혹은 상실 혹은 취약성이 발생한 후 급격히 심각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새롭게 하나를 수집할 때마다 수집가에게는 폭발적인 도취감을 주는 "무한한 힘의 환상"이 흘러넘친다고 말했다."
그라나다대학에서 수년간 수집가들을 연구한 프란시스카 로페스-토레시야스Francisca López-Torrecillas는 스트레스나 불안을 겪는 사람들이 수집에 의지해 고통을 달랜다며 비슷한 현상을 지적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무력함을 느낄 때는 강박적인 수집이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28 뮌스터버거가 지적하듯, 유일한 위험은 여느 강박과 마찬가지로 수집 습관이 "신나는 일에서 "파멸적인 일로 바뀌는 어떤 지점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 P31

페니키스 섬은 매사추세츠 해안에서 22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다. 길이는 1.5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고, 내리쬐는 태양으로부터 보호해줄 나무도 거의 없는‘ 이 섬은 사슬처럼 이어지는 여러 섬 중에서도 "땅꼬마"라 불려온, "슬프고 외로운 작은 바위섬",
"지옥의 전초기지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벌거숭이 해안은 늘 급진적 희망이 찾아드는 장소였다. 1900년대 초에는 자신이 환자들의 치료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은 한 의사가 이끄는 나환자촌이었다.
1950년대에는 급감하는 제비갈매기 개체군의 운명을 뒤집겠다는희망을 품은 동물연구가들이 새들의 피난처로 바꿔놓았고, 1970년대에는 비행 청소년 혹은 불량 청소년 혹은 문제아(명칭은 시기에 따라 달라졌다)들을 모아 교육하는 학교가 되었다. 어느 해병대출신 뱃사람이 격리와 육체노동, 축산, 배 건조, 공동체 생활, 학교공부가 "다수의 잠재적 살인자들을 자동차 도둑으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학교를 세운 것이다. - P35

당시는 사람들이 ‘군대 열병‘ 같은 알 수 없는 병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방법이 전혀 없는 바로 그런 시절이었고, 아직박테리아가 그 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이었다. 아가시는 사람들이 당대의 믿음들에 만족한다면 계속해서 발전이 가로막히고 좌절되고 병든 상태로 남을 거라고 걱정했다. 그건 안 될일이었다. 거기서 벗어날 방법, 계몽으로 나아갈 방법은 이 세계의털가죽과 꽃잎과 조약돌들을 계속해서 더 세밀하게, 더 오랫동안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아가시는 그러한 병폐를 바로잡을 수 있는 안전한 성역을, 요컨대 자연에서 젊은 박물학자들을 모아놓고 직접 관찰의 기술을가르칠 수 있는 일종의 여름 캠프를 꿈꿨다. 그리하여 1873년에어떤 부유한 토지 소유자가 그러한 대의를 위해 페니키스 섬을 기부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아가시는 냉큼 그 기회를 붙잡았다. - P37

몇 달 뒤인 1873년 7월 8일,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퍼드의 한 항구에 발을 딛고, 생애 처음으로 대양을 바라보았다.13 그의 나이 22세 때의 일이다.
서서히, 점점 더 많은 수의 남자들과 여자들로 뒤섞인 젊은 박물학자 무리가 부두 위에 있는 그의 곁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바다는 잔잔했고 하늘은 찬란한 푸른빛이었다.
수평선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섬으로 그들을 실어다줄 예인선이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배에서 널판자를 내리자 젊은 박물학자 50명이 그 위를 걸어 배에 올랐다. 배가 파도 사이로 넘실거리며 나아가는 동안 캠프를 향해 가는 그 젊은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세월 속에 묻혀버렸다.  - P39

 "물고기들은 뭐가 뭔지 당황스러울 정도로 다양하게 낚여 올라왔다." 그는 그날 갑판 위에서 파닥거리던 물고기들의 이름은 단 하나도 기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그에게 물고기들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이자, 남은 평생맞춰야 할 퍼즐로 그를 손짓해 부르는, 반짝이는 비늘로 된 실마리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49

어쩌면 케이프코드는 실존적 변화를 일으키기에 아주 비옥한땅인지도 모르겠다. 혹시 모래가 많은 케이프코드 만의 토양에 형이상학적 변화의 촉매가 되는 어떤 금속들이 함유되어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내가 아는 것은, 나 역시 그곳에 갔을 때 세계관 전체가 재배열되는 느낌을 받았다는 사실뿐이다. 그 일은 내가 일곱살 때쯤 일어났고,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 순간은 내가 데이비드스타 조던에게 집착하게 될 길을 닦아놓은 순간, 후에 내 인생이파탄 나고 있을 때 그가 나를 구원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만든 순간이기도 했다. - P53

그런 다음 아버지는 내 머리를 톡톡 토닥여주었다.
그때 내 얼굴이 어떻게 보였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잿빛이었을까? 그건 마치 이 세상을 덮고 있던, 깃털을 넣어 만든 커다란이불을 빼앗긴 느낌이었다.
‘혼돈‘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라고 아버지는 내게 알려주었다. 혼돈이라는 막무가내인 힘의 거대한 소용돌이, 그것이야말로 우연히 우리를 만든 것이자 언제라도 우리를 파괴할 힘이라고말이다. "혼돈은 우리의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 우리의 꿈, 우리의 의도, 우리의 가장 고결한 행동도. 절대 잊지 마라." 데크 아래솔잎들이 쌓인 땅을 가리키며 아버지가 말했다. "너한테는 네가 아무리 특별하게 느껴지더라도 너는 한 마리 개미와 전혀 다를 게 없다는 걸 좀 더 클 수는 있겠지만 더 중요하지는 않아." 당신 머릿속에 존재하는 위계의 지도를 들여다보느라 아버지는 여기서 잠시말을 멈췄다. "과연 네가 토양 속에서 환기를 시킬 수 있을까? 목재를 갉아 먹어 분해의 속도를 높이는 일은?" - P55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네가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런 면에서 지구에게넌 개미 한 마리보다 덜 중요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지" 그런 다음아버지는 요점을 더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나는 이게 포옹하자는 신호일지 모른다고, 아버지가 "농담이야, 넌중요해!"라고 말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좋아. 이제 이게.… 전체 시간의 길이라고 생각해보자." 아버지는 자기 가슴 앞에 펼쳐진 눈에 보이지 않는 광대한 시간의 선을 손으로 더듬었다. "여기서 인간이 존재한 기간은 - P55

요만큼이야!" ‘요만큼‘이라는 말을 할 때 아버지는 연극적인 동작으로 꼬집듯이 손가락들을 모았다. "게다가 우리는 아마 곧 사라지게 될 거야. 그러니까 만약 지구 저 멀리서 떨어져서 본다면…" 여기서 아버지는 혀를 차서 끽끽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 우리는정말 아무것도 아닌 거지. 거기엔 행성들이 있고, 그 너머엔 더 많은 태양계가 있어...."
아버지가 정확히 저 단어들을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거의 20년 뒤 천문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이 "우리는 점 위의점 위의 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을 때 나는 아버지의 단언과똑같은 말을 들었다고 느꼈다. - P56

일곱 살의 내게 그날 폐부에서 회오리치던 차가운 느낌을 말로 옮길 수 있는 언어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건 뭐 하러 해?
학교엔 왜 가? 뭐 하러 종이에 풀로 마카로니를 붙이는 건데?" 어쨌든 유년기 동안 나는 그 답을 알아내기 위해 조용히 아버지의 행동을 관찰했다.
아버지는 활기 넘치는 사람이다. 수전증이 있는 생화학자로,
모든 생명에, 심장박동과 번개에, 심지어 생각 자체에도 동력을 공급하는, 전기를 나르는 입자인 이온을 연구한다. 아버지는 안전띠도 매지 않고, 발신인 주소도 쓰지 않고, 수영이 금지된 곳에서 수영을 한다. 하루는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이제 소매와는 끝이라고선언했다. 소매 때문에 시험관을 넘어뜨린 일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곧바로 가위를 들고 옷장으로 달려갔고, 이후 몇 년 동안 ‘학계의 해적‘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옷차림으로 출근했다. - P56

상대방의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봐주는 사람들에 목말라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넌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은 아버지의 모든 걸음, 베어 무는모든 것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아버지는 수년 동안 오토바이를 몰고, 엄청난 양의 맥주를 마시고,
물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 때마다 큰 배로 풍덩 수면을 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게걸스러운 자신의 쾌락주의에 한계를 설정하는 자기만의 도덕률을 세우고 또 지키고자 자신에게 단 하나의 거짓말만을 허용했다. 그 도덕률은 "다른 사람들도중요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라"는 것이었다. - P57

만약 당신이 분류학자라면 이게 얼마나 심란한 생각일지 상상해보라.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대상이 알고 보니 퍼즐 조각도 실마리도 아닌 무작위성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들은 신성한 텍스트의 페이지도, 성스러운 암호를 이루는 상징도,
신성한 사다리의 가름대도 아니었다. 움직이고 있는 혼돈의 모습을 담은 스냅사진에 불과했다.  - P67

 자연을 더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다윈이 관찰한 대로 종들 사이의 영역은 불확실한 회색 지대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었고, 내키지 않았지만 그 자신도 회색지대를 알아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이렇게 썼다. "나는 아이에게 꼬리를 붙들려 카펫 위로 ‘끌려가는 고양이처럼 우아하게 진화론자들의 진영으로 넘어갔다!"
아, 이 문장 때문에 내가 그를 얼마나 흠모하게 되었던가. 이문장을 본 나는 두 팔로 그를 안고 볼에 입을 맞춰주고 싶었다. 정신을 아득하게 하는 진화의 진실을 받아들이고 계속 전진할 길을찾은 그가 참 용감하다고, 아주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물론 이는 그를 계속 나의 안내자로 삼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또한 바늘을 칼처럼 휘두르는 그가 뻔뻔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성의 자리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또한 부인이 반드시 굴욕으로 이어지는 길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어쩌면, 혹시 어쩌면,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언젠가희미한 빛을 발하는 삶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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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는 2003년 2월 18일, 지하철 화재사고로 시작되었다. 불이 난시각은 오전 아홉시 오십삼분, 한 시간 동안 열두 량의 객차가 불타고백구십이 명이 사망했다.
2003년 3월 12일, 세계보건기구는 비정형 폐렴 경계조치를 내리고같은 달 17일, 이 병을 사스(SARS)라 명명했다.
2003년 3월 20일, 미·영 연합군이 이라크 공격을 개시했다.
2003년 3월 22일, 세계보건기구는 중국 일부와 홍콩, 베트남을 위험지역으로 지정했다.
2003년 3월 25일, 중국 간쑤성 허시회랑을 타고 거대한 모래폭풍이 일었다.
2003년 4월 1일, 홍콩 배우 리가 투신자살했다.
2003년 4월 2일, 한국 국회에서 이라크 파병 동의안이 가결되었다.
2003년 5월 8일, 전 세계 사스 감염자가 칠천여 명 사망자가 오백명을 넘어섰다.
2003년 5월 14일, 서희부대 제1진 2제대 오백 명이 대한항공 전세기를 타고 이라크로 출국했다.
2003년 6월 2일, 아시아 여덟 개 사찰에서 리의 천도재가 열렸다.
2003년 6월 13일, 이라크 나시리아에서 97km/h의 모래폭풍이 일었다.
2003년 6월 13일, 나시리아 알바라디병원 보수 공사를 나갔던 서희부대 제1진 2제대 야공중대원 열두 명과 그들의 경계 임무를 맡았던 특전사 세 명이 주둔지로 돌아오지 않았다. p84 ----[너무 아름다운 꿈]


2013년 4월 1일, 나는 황토고원으로 갔다.
고원의 허공 위에 꽃이 피었다고 했다.
꽃이 공중에 피다니, 그것은 비유입니까. 물었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 짐을 꾸린 것은 꽃을 따기 위해 열기구를 띄운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황토고원은 서쪽에 있었다. 나는 편서풍을 거슬러서 갔다.

----[너무 아름다운 꿈] - P83

황하 하구에서 한참을 거슬러올라 해발 천육백 미터의 황토고원에자리잡은 곳. 대륙 서쪽의 란저우는 전염병으로 술렁이는 베이징이나서울과는 다르게 노란 미세먼지막 속에서 따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의외로 공항에서의 검역도 철저하지 않았다. 21세기 전염체는 비행기바이러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이번 전염병은 지역성이 강했다. 발병지역은 황사 피해지역과 일치했다. 중국 동부와 한국의 발병자가 많았고 그다음이 일본, 북아메리카 서부 순이었다. 이상한 것은,
중국 서북부와 내몽고 등 황사 발원지역에서는 오히려 발병자가 적다는 것이었다. 모래에 익숙한 지역에서 항체가 형성된 것이 아니냐는얘기가 있었지만 어느 단계에서 유전자변이를 일으켜 어느 단계에서변종 바이러스가 되었는지 사람들은 맥을 잡지 못했다. 발병자 분포도가 지역성을 띤다고 해도 접촉 전염인 결막염과 호흡기 전염인 폐렴이 주 증상이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무역풍을 탄 사하라 더스트가 도달하는 아프리카 대륙 서해안에는 큰 도시가 없었지만 편서풍을 탄 아시아 더스트가 도달하는 아시아 대륙 연안에는 인구 천만이 밀집한 대도시가 여럿이었다. 때문에 세계보건기구는 판데믹 선언을 고려중이었고, 사람들은 2013년에 출현한 신종 바이러스를 ‘아시아 더스트 바이러스‘라고 불렀다. - P91

허시회랑은 란저우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둔황까지 이어지는 긴 길이었다. 한국 발음으로는 하서회랑. 하서는 황하 서쪽을, 회랑回廊은긴 복도형 구조를 뜻했다. 북쪽의 고비사막과 남쪽의 치롄산맥에 막혀 자연스럽게 좁고 긴 지형이 형성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하서회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사막과 산맥 사이를 빠져나가는 길고 구불구불한 생물이 떠올랐다. 낮에는 태양빛을 흡수하고 어스름이 되면검붉게 변하면서 조금씩 서쪽으로 기어가는 생물, 해가 지거나 폭풍이 일면 그 통로엔 어둠이 들어찰 것이다. 끝없이 이어진 흙벽과 칠흑같은 통로, 리라면 그런 곳을 찾았을 것이다.
- P94

모두가 사막색 군복을 입고 있어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공식적인행사가 끝나자 가족들과 점심을 먹는 시간이었다. 다들 야산 공원 여기저기에 둘러앉아 마련해온 음식을 펼쳤다. 돗자리에 앉은 동생은다른 것은 안 먹고 계속 참외만 먹었다. 한 달 동안 상무대에서 생존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사막에서 길을 잃었을 때 살아남는 법, 동티모르 파병 사고 사례와 총기 사고에 대한 교육, 그리고 전염병 예방 수칙, 서희부대의 주둔지는 이라크 나시리아였다. 한 제대의 파병기간은 육 개월, 그들은 2003년 10월에는 만 달러와 함께 돌아오게 되어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나자 동생은 내 휴대폰을 빌려 한두 군데 전화를 했다. 둘러보니 사막색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짙푸른 나무 밑에 쪼그려앉아서 다들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나는 삼 년이 지나고칠 년이 지난 뒤에도 계속 그 풍경을 생각했다. 그날 매산리 나무 그늘 밑에서 참외를 먹고 전화를 하던 수많은 군인들 중에 모래폭풍과함께 사라져버린 열다섯 명은 누구누구였을까. 십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열다섯 명은 그날 어디어디쯤에서 사열대를 향해 서 있었을까. - P99

‘뜨거워, 아빠‘ 불이 난 지하철에 갇힌 사람들한테는 휴대폰이 있었다. 그들의 몸은 밖으로 나올 수 없었지만 그들의 마지막 말은 밖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좁고 긴 지하통로에 갇힌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한 말은 숨이 막힌다는 말과 뜨겁다는 말이었다. 어머니한테 아이둘을 맡기고 볼일을 보러 가던 여자는 마지막 문자를 어머니한테 보냈다. ‘어머니, 애들 좀 잘 봐주세요. 지하철에 불이 났는데 아무래도죽지 싶어요.‘ 불이 난 시간은 오전 아홉시 오십삼분, 갇힌 사람들한테서 가장 많은 전화가 걸려온 건 열시 삼십분에서 사십분 사이였다.
열시 오십구분 사십삼초 이후로는 더는 어떠한 전화도 밖으로 걸려오지 않았다. - P100

눈병에 걸린 사람들은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고 했다. 어렸을때 돋보기로 들여다보던 눈 결정체 같기도 하고 햇빛을 머금은 먼지입자 같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것을 꽃 같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붉게 충혈된 눈을 계속해서 비볐다. 가려움증은 실제로는 바이러스가 각막에 안착해 생기는 증상이었지만 사람들은 마치 믿지 못할 광경을 목격했다는 듯이 눈을 비비고 또 비볐다. 처음에는 가려움증과이물감을 호소하다가 눈곱과 눈물을 흘렸고 나중에는 결막에 종창이생기면서 출혈을 일으켰다. 감염자들이 꽃 얘기를 하는 것은 이번 바이러스가 형태학적으로 꽃 모양이어서라는 얘기가 있었지만 감염자들이 정말로 바이러스의 실체를 목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결막염 출혈을 일으킨 환자들은 뒤이어 고열과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다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사망자들의 호흡기 하부인 폐에서도 바이러스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사인은 바이러스성 폐렴 합병증으로 발표되었다. 2013년에 출현한 바이러스는 코나 목 등 사람의 호흡기 상기도에서 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플루엔자바이러스와 달랐고, 결막에서 증식하는 바이러스가 폐에서도 증식한다는 점에서 아폴로눈병을 일으킨 엔테로바이러스와도 달랐다. 백신은 없었다.  - P101

전염병과 황사의 관계에 대해 쥔은 오래 생각해온 듯했다. 내 짐작이 맞다면 쥔은 아시아 더스트 바이러스가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기전, 즉 순수한 조류인플루엔자였을 때 황사 입자와 어떻게 결합했는지를 밝히기 위해 몇 가지 가설을 세워놓았을 것이다. 그 가설이 내 짐작과 다르기를 바라면서 나는 다시 탁상달력을 집어들었다. 2013년 4월달력에 있는 사진은 리가 2000년 홍콩컨벤션센터에서 공연을 할 때의 사진이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리는 여전히 강건한 몸에 소년 같은 얼굴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2000년은 리가 은퇴를 했다가 복귀한 해였다. 삼 년 뒤에 죽었으므로 마지막 재기인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때의 사진은 어딘지 아슬아슬했다. 리의 자살 소식을 듣고서야 아름답던 리가 어디선가 조금씩 나이를 먹어간 걸 깨달았다는 미안함, 그 미안함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이기도 했다.
리는 자주 무너졌다. 일을 할 때는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처럼 완벽했지만 무너질 때는 모든 것을 놓았다. 리는 어떤 배우보다도 황색 언론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그때마다 사생활과 스캔들이부풀려졌다. 리는 은둔과 은퇴를 반복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올 때면리는 늘 최고였고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리에 열광했다. 리를 수식하는 대표어였던 슬프고 몽환적인 눈빛은 리가 무너지고 일어서기를 반 - P104

복할 때마다 철저하게 리의 것이 되는 것 같았다. 안착하지 못하는 결된 영혼, 잡히지 않는 생의 허무를 표현하려는 감독들은 누구나 리를 주인공으로 정하고 시나리오를 썼다. 사람들은 리한테 깊게 배어있는 특유의 분위기를 유년 시절 때문이라고 했다. 리는 유복하게 자랐지만 어머니와 단둘이 있었던 시간이 생애 며칠도 안 될 만큼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가족얘기가 나오자 리는 말했다. ‘어려서는 딱 십 분만이라도 어머니와 마주 앉아서,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나에게 어머니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 그 사실뿐입니다.‘ 리가 연기한 인물들은 그런 리의 삶을 닮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채워지지 않는 커다란 공동空洞 하나씩을 안고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파괴하다가 비눗방울처럼 터져버렸다. - P105

리는 이미 협곡의 절벽 위에 서 있었다. 좁고 긴 통로를 빠져나와절벽 위에 선 것인지, 절벽에서 내려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래폭풍의 전조인지 대기는 탁했다. 누군가 골짜기에 혼자 앉아 우는 것처럼 바람 소리가 점점 휘어졌다. 리는 고대의 조각상처럼 몸에 얇은 대의 하나만을 걸친 채 바람을 맞고 서있었다. 얇은 천이 신체에 흡착돼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리가 강박적으로 가꾸어온 몸이었다. 한 발만 방심해도 그대로 무너질것 같은 아슬아슬한 몸. 스스로에게 혹독하지 않고는 더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마지막 단계에 리가 서 있었다. 몸의 양감과 흡착된 옷이길항을 일으켜 리의 신체는 숨막힐 듯한 긴장감을 뿜었다. 카메라는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그렇게 리를 비추었다. 우리도 전혀 움직이지않고 리를 마주 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절벽 위에 선 리한테서그동안 리를 통과해간 모든 인물들을 보고 있었다. 리는 길 위에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리는 사막 너머를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빙글빙글돌다가 주저앉는 리, 짙은 화장을 한 리, 사랑에 답하지 않는 리, 이글거리는 화염 저편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리, 환호 속에 갇힌 리, 몸부림치듯이 키스하는 리, 오도 가도 못 하는 리, 자신이 파괴한 것을 두눈으로 보아버린 리, 두려움에 떠는 리,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는 리엄마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는 리, 긴 야자수 길을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리, 뒤돌아보지 않는 리. - P112

실제 상황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몇 초 뒤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은 무엇인가가 붙어 있는 거대한 절벽이었다. 절벽에 따개비처럼 드문드문 붙어 있는 것은 검은 목관이었다. 사람 몸 하나 크기의 검은나무관이 선반처럼 절벽에 박혀 있었다. 우리는 숨을 멈추고 리가 남긴 세계를 바라보았다. 절벽을 내리달리던 화면은 이어서 홍콩 컨벤션센터로 넘어갔다. 열기 속에서 리의 노래가 끝나가고 있었다. 긴장 속에서 바람 소리만 듣다가 익숙한 곡이 흘러나오자 좌석 여기저기서울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리는 환한 조명 아래에 서 있었다. 환호속에 둘러싸인 리가 땀에 젖은 채 웃고 있었다. 리는 팬들에게 인사말을 하는 중이었다. 사막 너머를 바라보던 눈빛으로 관중 너머를 바라보던 리가 인사말 끝에 낮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메이멍, 나는 침을 삼켰다. 美인지 인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리가 환호 속에서 마무리짓는 것은 꿈 얘기였다. 우리는 다 같이 리의 마지막 말을들었다.
꿈속에서는 무엇을 해도 진실이 아니야. 그 꿈을 깨야지. 꿈을 깰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뭔지 알아? 바로 뛰어내리는 거야.‘
영화의 제목은 ‘공중화‘였다. - P114

눈에 병이 생기면 허공에서 꽃이 보인다. 그것은 아시아 더스트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의 증상이었다. 쥔과 나는 동시에 숨을 뱉었다. 경전에서는 분명히 비유라고 말하고 있었다. 비유로 그쳐야 할 일이 2013년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비유라고요? 뭐에 대한 비유라는 거죠?"
"어디 봅시다. 이건・・・・・・ 무명에 대한 설명 다음에 오는 구절이네요. 무명에 대한 비유인 거죠."
모니터로 몸을 숙였던 남자가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무명은 고통이 시작되는 첫번째 조건입니다. 모든 고통은 무명 때문에 일어나죠. 허공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명 때문에 보이는 것이죠." - P115

"열기구야."
쥔이 낮게 탄성을 뱉었다. 열기구는 점점 높이 떠오르며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해왔다. 바람을 탄 열기구는 비닐봉지처럼 가뿐하게날아오르고 있었다. 쥔과 나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열기구는 모래구름 속에 숨는가 싶더니 다시 나타나고, 다시 나타났다 숨으면서 바람에 실려 올라갔다. 그때마다 쉼 없이 반짝거렸다.
우리는 넋을 잃은 채로 열기구를 좇아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열기구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 계속 바람을 타면 열기구는 곧 좁고 긴 통로로 들어설 것이다. 그곳은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 회랑, 기약도 없이 긴 길이었다. 부딪쳤다 다시 솟구치며 흙벽을빠져나가면 마침내는 깎아지른 절벽일 것이다. 절벽은 발 없는 주검들을 위한 곳이었다. 한때는 굴곡이 선명했던 존재들에게 자기 몸만큼의 공간이 주어진 곳, 어둠도 폭풍도 태양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곳. 절벽 앞에 펼쳐진 것은 망망대해 같은 끝없는 사막이었다.
우리는 풍선을 놓친 어린아이처럼 발을 구르며 허공을 향해 하염없이 손을 흔들었다. - P119

형제자매들은 모두 떠났다.
동요의 내용대로라면 목요일의 아이는 길 위에 있을 것이고 일요일의 아이는 친구와 있을 것이고 토요일의 아이는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소녀는 햇빛이 원을 그린 소파에 혼자 앉아 떠나간 형제자매들을걱정한다. 얼굴이 예쁜 월요일의 아이가 나쁜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걱정하고 토요일의 아이가 생활비를 버느라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한다. 사랑스러운 금요일의 아이가 마음을 다치는 건 아닌지, 빛이나는 화요일의 아이가 시기를 받는 건 아닌지, 혹 그들이 모두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닌지 소녀가 그들을 걱정하는 건 수요일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수요일의 아이는 근심이 많다.

---- [수요일의 아이] - P123

지금은 사무소의 임시 경리직이지만 소녀는 언젠가는 시설관리공단에 정규직으로 들어가 가로등관리팀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다. 소녀는 얼마 전에 공단에서 가로등원격관리제어시스템을 들여놓은 것도알고 있다. 마을의 가로등을 관리한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열심히 일을 해 가로등관리팀의 팀장이 되면 소녀는 가로등의 조도를 대폭 개선해 밤거리를 좀더 어둡게 만들고 가로등 옆에는 취객을 위한오바이트 통도 만들 생각이다. 한밤이나 새벽 거리에 홀로 서서 속에있는 것을 끌어올리는 건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행위다. 그러려면 가로등이든 가로수든 전봇대는, 뭔가 지탱할 게 필요하다.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명언을 코팅해 붙이듯이 소녀는 가로등마다 문구를 붙일 것이다. 저를 잡고 토하세요.
- P129

며칠 전부터 골목에 다른 공기가 떠돈다. 한 시간에 5. 4회꼴로 일어나는 지진의 진동도 아니고 천둥을 예고하는 양이온도 아니다. 뭔가 엄청난 일의 전조를 품고 있는,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지만 저절로 알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공기다. 불행하게도 소녀는 동네를 떠도는그 공기를 모두 느낄 수 있다.
마을은 가시거리가 이 킬로미터 이하인 무거운 연무가 한 달 이상걷히지 않고 있다. 공기 중엔 미세먼지와 스모그가 가득했고 바람은전혀 불지 않았다. 구청에서는 대기오염도와 그에 따른 행동요령을하루에 두 번 일괄문자로 전송했다. 뉴스에서는 오존중대경보가 내려진 지역과 호흡기 질환 사망자 수를 시간별로 내보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진 지 오래였다. 이런 날 호흡기 환자가 외출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 P132

뛰어가다가 바닥에 거꾸로 세워져 있던 못을 정통으로 밟았다. 못이발바닥 중앙을 뚫고 들어오는 순간 소녀는 코가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소녀는 태어나서 한 번도 코가 시원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순간꿈을 꾸는 거라고 생각했다. 소녀의 몸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번에 뚫리는 느낌. 온 존재가 비틀리며 하늘과 땅의비밀을 알아버린 느낌. 비명과 함께 나동그라지며 착지한 세상은 이미 다른 세상이었다.
못은 콧물이 막고 있던 통로 대신 새로운 통로를 열었다. 그러나 그건 못을 밟고 나서 갑자기 열린 게 아니었다.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것이 못을 계기로 터져나왔다고 보는 것이 정확했다.  - P134

둘은 입을 벌리고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셨다. 하나, 둘,셋. 둘은 동시에 발판을 향해 뛰어내렸다. 소녀는 눈을 감았다. 소녀는 벽과 벽 사이의 좁은 골목을 달리고 있었다. 혈관 같은 골목을 따라 올라가자 콧물은 없고 뇌수만 있는 뇌가 펼쳐졌다. 사람의 가장 순수한 기억이 저장된다는 대뇌 깊은 곳. 그곳은 코가 뚫린 채로 살 수도 있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소녀는 탄성을 질렀다. 착지와 동시에, 혈관에 가득 찬 콧물들이 소녀와 소년의 살을 뚫고 뿜어져나왔다. - P153

장마철이었으니 그날 저녁도 비가 내렸을 것이다.
스물세 살의 임신부는 우산을 받쳐들고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반값으로 정리중인 생선차로 달려가 뱃고등어 한 손을 샀다. 어쩌면 비는 멎고 해가 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시간, 비린 봉지를 들고돌아서던 임신부는 허공에서 반짝하고 사라지는 빛 하나를 목격했다.
광활한 하늘에 시선을 빼앗긴 임신부의 발목으로 또르륵, 물방울 하나가 흘러내렸다. 눈 풀린 생선과 하늘을 뒤덮은 물비린내. 떠나버린생선차와 고요한 담벼락.
내 짐작 속 정황들이다. 그날의 바깥 풍경은 이랬을 것이라고 나는오랫동안 뱃고등어와 비 내리는 골목과 흙탕물이 튄 엄마의 흰 양말을 상상해왔다. 이 속에서 분명한 것은 없다. 

----[눈을 감고 기다리렴]  - P157

졸음은 눈썹과 눈썹 사이로 왔다. 할머니는 내 이마에 굴이 있기때문이라고 했다. 굴이 있어서 그 안으로 햇빛도 들어오고 잠도 들어오는 거란다. 아침에 신발을 신다가 끄덕끄덕 졸고 있으면 할머니는손으로 내 이마부터 쓸어내리며 잠이야 가라, 어여 나가라, 주문을읊었다.
퇴근길에 청주를 샀다. 할머니 기일이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이마트 장바구니를 든 중년 여자가다가왔다. 상단전이 열리셨군요.  - P158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외로울 때와 몸이 아플 때를 조심하라고. 세상의 모든 사기는 마음의 병과 몸의 병이 만든 틈새로 꿀처럼 스며든다고 했다. 할머니는 첫 월급을 받으면 성형외과에 가서 미간의 자국부터 없애라고 했다. 우리 은영인 이마가 움푹해서 허황된 무리들이늘 탐을 낼지 모른다. 이 자국을 없애야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평범하게 잘 살지. - P171

해가 날 듯하다가 오후부터 잔비가 내렸다. 엄마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절을 시작했다. 지장전 불단에는 딸랑이와 요구르트와 아기덧신이 놓였다.
부모 인연 지중하여 업연 따라 태에 드나 세상 인연 부족하여 빛을보지 못한 영가, 아미타불 법력으로 태안지장 원력으로 법당 열어 부릅니다 마음 다해 부릅니다.
법당 바닥에서 한여름의 습한 냉기가 올라왔다. 천도문이 이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어미 가슴 활짝 열고 지극참회 발원하면 못 이룰 일 무엇일까. 다시 한번 돌아보아 참회발원 하옵소서 아이들아 미안하다 정말정말 미안하다.
엄마는 좌복 위에 엎드려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나는고개를 돌려 뜰에 앉은 동자상을 내다봤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삼도의 강이 있어 빛을 보지 못하고 죽어간 핏덩이들이 모래밭에서 고사리손을 모아 탑을 쌓는다고 했다. 돌 하나를 들고 어미를 생각하고,또 돌 하나를 들어 아비를 생각하며 탑을 쌓는다.  - P184

어쩌면 영이는 지영이나 희영이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애로 자라서나와 같은 시기에 초경을 하고 취직을 하고 사랑을 하면서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놓았던 시간대와는 또다른 해가 지고 노을이 붉은 수많은 저녁을 가졌을 것이다. 영이가 삼도의 강을 건넜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모든 것을 기억해낸 열다섯 살이후로 나는 한순간도 영이와 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교실 사물함에 넣어놓은 체육복 속에도, 수능 보러 가던 날의 필통 속에도,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오다 올려다본 이십대의 숱한 골목 끝에도 항상영이가 있었다. 그것은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영이는 그냥 드리워져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이 영이가 떠도는 구만리장천의 어느 한지점이라면, 광활한 공간에서 파동으로 존재할 영이에게 나는 모든채널을 열어 말할 것이다. 중력이 지배하는 어떤 행성에도 내려앉지말고 가라고. - P186

눈썹과 눈썹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려는 찰나 버스가 길을 돌아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엄마한테 물어야 할 게 하나 있었다. 버스가 앞에 도착해 문이 열리기 전에 물을 수 있을까. 버스 쪽으로 걸어가는엄마의 등 위로 햇빛이 자글거렸다. 빛 때문인지 엄마 등이 신기루처럼 멀어져갔다. 나는 그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엄마는 나 가졌을 때 뭘 제일 먹고 싶었어? 엄마 나 낳을 때 많이아팠어? 엄마 혹시나 가졌을 때・・・・・・ 밤나무골에서 자장가 부른 적있지 않았어?
이마 위로 햇빛이 쏟아지자마자 나는 개망초 꽃더미에 발이 걸려그 자리에 푹 엎어지고 말았다. 푸른 망초 대 사이로 알록달록한 실뱀한 마리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 빛깔이 너무 고와서 나는 엄마 몰래가슴을 쳤다. - P187

협곡의 여름은 찌는 듯했다.
벌레들이 찌르듯이 울었다. 나는 누나를 불렀다. 물가의 돌에 쪼그려앉은 누나의 치마 끝이 계곡물에 조금씩 젖어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누나, 치마가 젖어, 일어나 아니면 누나, 치마가 젖어, 끝을 당겨서 종아리 뒤로 넣어. 나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숲은 수천 종의생물이 들끓는 소리로 꽉 차 있었다. 내 목소리는 금세 묻혀버렸다. 늘어진 이끼들이 발목을 감았다.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것 같은 계곡물소리, 풀 비빈 손으로 누군가 입을 틀어막는 것처럼 습한 냄새가 차올랐다. 숨이 막히고 귀가 따가웠다. 나는 숲에 갇혔다는 걸 깨달았다.
갇힌 걸 안 순간 누나가 일어났다. 치마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누나가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강한 여름볕이 누나의 정수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숲이 모든 작동을 멈췄다. 정적. 다시 여름벌레들이 일제히 끓어올랐을 때 누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전곡숲] - P191

실종자 가족들은 간혹 우리에게 무언가를 묻기도 했지만 우리가 썩어가는 사람들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사체 하나가 던져지면 숲은 노골적으로 신호를 보냈다. 냄새, 한번 맡은 뒤로는 절대 잊을 수 없고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냄새. 풀냄새같은 것. 살냄새 같은 것. 똥냄새 같은 것. 그런 냄새들이 한데 뒤섞여숲냄새라고밖에는 말할 방법이 없는 어떤 향에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냄새를 신호탄으로 숲은 다른 리듬으로 움직였다. 땅 밑에서부터 하늘을 가린 우듬지까지, 숲은 하나의 아가리가 되어 사체를 귀신같이 해치웠다. 숲이 우적거릴 때마다 절벽의 절리들이 관자놀이처럼움직였다. 일 년의 반이 한여름인 숲은 배가 부른 곤충들로 잉잉거렸다. 곤충들은 어디에서나 교미했고 숲의 모든 틈을 비집고 들어가 끈질기게 알을 깠다. - P195

"토막을 내버릴 거야." 담임한테 뺨을 맞고 온 날 누나가 샌드위치패널 벽에 손톱을 짓이기며 말했다. 누나가 그 말을 한 몇 주 뒤에 실제로 숲에서는 토막 사체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숲에 제 발로죽으러 들어가는 사람들 외에 누군가를 죽인 뒤에 숨기러 오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마을에 미세한 동요를 던져주었다. 사라지고 찾는 일 외에 숲에서 다른 것도 할 수 있다는 걸 그전에는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육상부 하계합숙을 마치고 왔을 때 숲은 여름의 정중앙을 통과하고 있었다. 검푸르게 독이 오른 잎사귀들로 숲은 무겁고 습했다. 응달의 나무를 타고 오른 이끼들이 가지 끝까지 발아했다. 누나는 계곡가에 앉아 하릴없이 리코더를 불다 멈추다 했다. 분무기를 뿌린 것처럼숲은 증기로 빽빽했다.  - P198

그들은 이십만 년 전인 중부 홍적세 후기에 있었다.
한 손에는 불을 한 손에는 돌을 들었다. 어깨는 구부정하고 턱은앞으로 튀어나왔다. 낮은 이마에 광대뼈가 도드라졌고 몸에는 짐승가죽을 둘렀다. 몸집은 지금보다 훨씬 작았지만 주먹도끼로 멧돼지의급소를 단숨에 찌를 수 있는 다부진 근육이 있었다. 눈빛은 예리한 생기로 번뜩였다.
덥수룩한 머리는 가발로, 짐승 가죽은 호피무늬섬유로 대체할 수있었다. 어깨는 구부정하게 들어올리고 턱은 내밀고 걸어다니면 되었다. 다만 작은 몸집과 눈빛만은 재현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축제였으므로 야생동물과의 대치나 굶주림으로 날이 선 모습보다는 밝게 웃는편이 좋았다. 구석기축제에 투입될 구석기인의 모습이었다. 전역을하고 돌아오자 마을은 축제 준비로 들썩이고 있었다. - P209

눈을 뜬 것은 빛 때문이었다. 숲의 우듬지층이 조용히 일렁이면서빛무리가 흩어져내렸다. 숲이 반짝이는 것은 바람 때문이었다. 숲 위로 바람이 불어왔다. 후텁지근하면서도 졸린 바람. 나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콧등에 걸려 있다. 선풍기 바람은 누나의 콧등을 지나 나를 향해 불어오는 중이었다. 바람은 마늘 절구와 돌조각을 지났다. 누나가 손질해놓은 간이탁자를 지나고, 매미가 울던 계곡가의 누나, 리코더를 털어서 침을 빼던 누나,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곳과 내가 가질 수 없는 것 들을 훑으면서 바람은 천천히, 너무도 느리게 돌아오고 있었다.
이윽고 바람이 나에게 당도하고 숲이 모든 작동을 멈추었을 때, 나는 퇴적 알갱이들이 골짜기 위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현무암 파편과 잘고 흰 모래 들이, 적갈색 점토 입자들이 협곡을 채우며 꽃씨처럼 날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언제까지고 숲에 누워서 반짝이며 명멸하는 그것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 P220

미숙이가 집을 나가던 날은 아침부터 강에서 습한 바람이 올라왔다. 창문만 열어도 콧속과 겨드랑이가 금세 축축해지는 날이 며칠째이어졌다. 그날 별다른 징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대륙고기압의 영향으로 중부 내륙지방에 안개가 짙게 끼겠다는 예보가 있었고 점심즈음 미숙이가 자두씨를 삼켜 소금물을 타주고 토하도록 도왔을 뿐이었다. 한여름의 안개도 장폐색을 일으킬 수 있는 과일씨도, 위험하지만 살다보면 만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오후가 지나면서 눅눅한 구름이 대기를 눌러왔다. 미숙이가 일 년중 제일 못 견뎌하는 장마 뒤끝의 후텁지근한 날씨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만 되면 미숙이는 생기를 잃고 비루먹은 것처럼 힘들어했다.

----[간밤 강가] - P223

수컷들을 보내고 난 밤, 미숙이는 하늘을 향해 오래 울었다. 발정기가 되면 미숙이의 하울링은 더 잦아졌다. 서늘한 강가에서 땅을 파듯우는 나이든 암캐의 목소리는 감당하기에 쉬운 소리가 아니었다. 좀체 짖는 법이 없는 미숙이지만 한번 울음을 시작하면 그 소리는 사람마음을 후벼놓는 데가 있었다. 그런 밤이면 나도 같이 앓았다. 우우-우우 땅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한 굵고 짙은 울부짖음. 나는 미숙이의 소리를 들으면서 짖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울부짖는다는 말이어떤 것인지 비로소 알았다.
설원을 달리지 못해서 답답한 것일까, 새끼를 가질 수 없어서 저렇게 허허로운 것일까, 이리저리 짐작해보기만 할 뿐 미숙이가 울부짖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사람이고 미숙이는 개였다. 나보다생의 선을 더 달린, 다른 종이고 다른 성인 미숙이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 P235

문에는 아직 상품코드와 용량과 소비전력이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다. 내외부 재질은 고급 엠보싱이라고 했다. 미려하고 잡기 편한손잡이, 편리한 이동바퀴, 신개발 자동닫힘 도어. 지금은 유명 보일러 회사와 합병된 한 중소기업에서 한때는 유력상품으로 생산했던 그것.
화분에 물을 주듯, 때맞춰 환기를 시키듯, 영희는 일주일에 한 번 그안에 냉기를 불어넣는다. 신발과 노트와 뼛가루가 함께 살아 있는 곳,
영희는 아직 그 안에 살고 있다.

----[울고 간다] - P255

그렇지, 병원 문을 밀고 나오면서 영희는 왼쪽 주먹을 말아쥐고 손목을 안쪽으로 구십 도 가까이 꺾는다. 어깨를 구부정하게 말고는 손등뼈로 가슴팍을 세 번 정도 두드린다. 정확히 십이 개월 하고도이 일 전부터 생긴 버릇이다.
병원 아래층의 보습학원에서 몰려나온 아이들이 옆 문구점으로 우르르 들어간다. 영희는 건물 입구에 서서 제자리뛰기를 두 번 정도 한다. 가슴에서 콩 굴러가는 소리가 난다. 두번째 착지를 하고 나자 그소리는 귓바퀴에 와서 멈춘다. 이 또한 일 년 하고도 이 일 전부터 들어온 소리다. - P256

"이거 ‘장‘에다 좀 넣어라."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장‘이라는 단 한 음절, 이용 받침의 울림과동시에 임모씨의 퀭한 동공이 영희의 눈에 멈추었다 거두어졌다. 순간 영희는 쇳덩어리에 깔린 것처럼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냉장의 진동음이 어마어마한 망치가 되어 영희의 뒤통수를치고 있었다. 임모씨가 떠나도 냉장고를 결코 버릴 수 없음을 알아버린 순간이었다. 명령이든 애원이든 냉장고를 버리지 말라는 말을 직접 했으면 그렇게 아찔하진 않을 것이었다. 영희는 진심으로 임모씨가 얄미웠다. 그날 이후로 영희도 임모씨도 냉장고에 관한 한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결국 임모씨는 자신처럼 생겨먹은 사람은 어떻게살아야 하는지, 자신처럼 생겨먹은 영희에게 어떤 기타정보도 남기지않고 죽었다. 영희는 국산 금잔디를 입히는 대신 임모씨의 발가락뼈하나까지 모두 불태웠다. 마트에서 은나노 밀폐용기를 산 것은 화장
‘터에서 돌아온 다음날이었다. 그곳에 임모씨의 유골을 쏟아붓는 동안영희는 천식 환자처럼 기침을 했다. 통 위에는 임모씨가 평소 아끼던자색 보자기를 씌웠다. 영희는 그 통을 냉장고에 넣은 채 냉장고 하나만을 가지고 방을 옮겼다. - P270

며칠 더 골똘히 생각하면 냉장고를 어떻게 할지 결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외출은 못 할 것이다. 열쇠집늙은이가 정말 귀신이 되어 쏘아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면 남자한테 냉장고를 맡겨놓고 정말 먼 데로 가버릴까. 영희는 머리를 형클었다. 이런 일생일대의 결정을 해야 하는 때가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이제는 더 미룰 기한도 없었다. 이대로 한두 시간 지나가면 남자는 서서히 곤란한 표정으로 바뀔 것이다.
남자가 공구를 들고 욕실로 들어간다. 영희는 살금살금 걸어가 냉장고 전원을 연결한다. 820W/H의 소비전력이 갑자기 큰 진동음을몰고 온다. 임모씨도 철수도 진동음과 함께 영원한 시간을 얻는 순간이다. 영희는 왼쪽 주먹을 말아쥐고 손목을 구십 도로 꺾는다. 손등뼈로 냉장고 문을 두드려본 뒤 영희는 냉장고 문을 연다. 그리고 착한이불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접어 그 안으로 구깃구깃 들어간다. 대낮인데도 냉장롱 불빛은 진한 주홍빛이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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