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그 사람이소파에 앉아 시리얼을 먹다가 불현듯 어떤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그것에 대해 흥분해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이를테면 사람들이 이메일 마지막에 겨우 키보드 네 번 더 누르는 수고를 안 하려고 머리글자 하나만으로 서명하는 것이 얼마나 자기를 짜증나게하는지 모른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모습.
혼돈이 그 사람을 집어삼킬 것이다.
혼돈은 부러져 떨어진 나뭇가지나 질주하는 자동차, 총알 하나를 거느리고 밖에서 치고 들어가 그를 으스러뜨릴 수도 있고, 아니면 반란을 일으키는 그 사람의 몸속 세포들과 함께 안에서 박차고 나와 그를 해체해버릴 수도 있다. 혼돈은 당신의 화초를 썩어물러지게 하고, 당신의 개를 죽이고, 당신의 자전거를 녹슬게 할것이다. 당신의 가장 소중한 기억을 부식시키고, 가장 좋아하는 도시를 무너뜨리고, 당신이 간신히 쌓아올린 모든 성스러운 장소를폐허로 만들 것이다.
혼돈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이라는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일어나는가‘ 하는 시기의 문제다. 이 세계에서 확실한 단 하 - P15

나이며,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주인이다. 과학자인 나의 아버지는일찍이 내게 ‘열역학 제2법칙‘은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엔트로피는 증가하기만 할 뿐,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줄어드는 일은 없다고 말이다.
똑똑한 인간은 이 진리를 받아들인다.
똑똑한 인간은 이 진리에 맞서 싸우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1906년 어느 봄날, 팔자수염을 기른 어느 키 큰 미국인이 감히 우리의 주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의 이름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David Starr Jordan. 여러 방면에서 혼돈과 싸우는 것은 그의 본업이기도 했다. 그는 거대한 "생명의 나무""의 형태를 밝혀냄으로써 지구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일을 하는 과학자, 더 정확히 말하면 분류학자였다. 그리고 생명의나무가 완성되면 모든 동식물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밝혀질거라고 했다. 그의 전문 분야는 어류로, 그는 새로운 종을 찾아 전지구를 항해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울러 그 새로운 종들이 자연에숨겨진 청사진에 관해 더 많은 걸 알려주는 실마리가 되어주기를바랐다. - P16

조던은 수년, 수십 년에 걸쳐 지치지 않고 일했고, 그 결과 당대 인류에게 알려진 어류 중 5분의 1이 모두 그와 그의 동료들이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새로운 종들을 수천 종 낚아 올렸고, 각각의 종마다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그 이름을 반짝이는 주석 꼬리표에 펀치로 새기고, 에탄올이 담긴 유리단지에 표본과 함께 이름표 - P16

를 넣었다. 그렇게 자신이 발견한 어류 표본들을 높이 더 높이 쌓아갔다. 1906년 어느 봄날 아침, 난데없이 닥친 지진으로 그가 수집한 반짝이는 표본들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 전까지는.
수백 개의 유리단지가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고, 그의 어류 표본들이 깨진 유리와 넘어진 선반들에 의해 절단되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최악의 피해를 입은 건 이름들이었다. 조심스럽게 유리단지에 넣어둔 주석 이름표들이 온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창세기가 거꾸로 펼쳐진 끔찍한 지진 속에서, 그가꼼꼼하게 이름 붙인 물고기 수천 마리가 다시 수북이 쌓인 미지의존재들로 되돌아갔다.
- P17

그런데 이 콧수염을 기른 과학자는 평생의 노고가 자기 발치에서 내장을 쏟아내는 파괴의 잔해 한가운데서 이상한 짓을 했다.
그는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그 지진이 전하는 명백한 메시지, 즉 혼돈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질서를 세우려는 모든 시도는결국 실패할 운명이라는 메시지에 그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소매를 걷어붙이고 허둥지둥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세상의 하고많은 무기 중에서 바늘 하나를 찾아 들었다.
그는 엄지와 검지로 바늘을 잡고는 바늘귀에 실 한 올을 꿰더니 그 파괴의 잔해에서 그나마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물고기 하나를 겨냥했다. 그러고는 한 번의 유연한 동작으로 바늘을 물고기의목살에 찔러 넣어 이름표를 꿰매 붙였다. 폐허에서 구해낼 수 있는모든 물고기에 이 작은 동작을 반복했다. - P17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혼돈에 반격한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당시 나는 20대 초반으로, 이제 막 과학 기자로 발돋움하던 참이었다. 이 얘길 듣자마자 나는 그가 바보라고 생각했다. 바늘은분명 지진에 맞서서는 효과가 있겠지만, 화재나 홍수, 녹, 그 밖에그가 고려하지 못한 수천 가지 파괴 방식에 대해서는 어쩐단 말인가? 그가 바늘로 이뤄낸 혁신은 너무 허술하고 너무 근시안적이며, 자신을 지배하는 힘에 대한 어마어마한 무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내게 오만에 대한 교훈으로, 어류 수집계의 이카로스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게 찾아온 혼돈에 뒤흔들리고,
내 손으로 직접 내 인생을 난파시킨 뒤 그 잔해를 다시 이어 붙여보려 시도하고 있을 때, 문득 나는 이 분류학자가 궁금해졌다. 어쩌면 그는 무언가를, 끈질김에 관한 것이든, 목적에 관한 것이든,
계속 나아가는 방법에 관한 것이든 내가 알아야 할 뭔가를 찾아낸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가당치 않게 커다란 믿음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 P18

도착한 배송 꾸러미는 따뜻하고 뭔가 마법에 걸린 물건 같은느낌이었다. 마치 그 안에 보물지도라도 담겨 있는 것처럼. 스테이크 나이프로 포장 테이프를 자르니, 금박으로 새겨진 글씨가 희미한 빛을 내는 올리브색 책 두권이 나왔다. 나는 큰 주전자 가득 커피를 만들어 1권을 무릎에 올리고 소파에 앉았다. 이로써 혼돈에항복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파헤칠모든 채비가 끝났다. - P20

데이비드 조던은 뉴욕주 북부의 한 사과과수원에서, 1851년한 해 중 가장 어두운 시간에 태어났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별에그토록 몰두하게 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신의 소년기에관해 이렇게 썼다. "가을 저녁 옥수수 껍질을 벗기던 중 천체의 이름과 의미에 관해 호기심이 생겼다"1하지만 그는 반짝거리는 별들을 마냥 즐길 수만은 없었다. 별들이 혼란스럽게 흩어져 있는 밤하늘은 그에게 질서를 부여하고알아내야 할 대상처럼 느껴졌다. 여덟 살쯤 됐을 때 조던은 천문도가 있는 지도책을 손에 넣었고, 그 페이지에서 본 것과 머리 위에보이는 것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밤이면 밤마다 그는 집에서 몰래빠져나가 하늘에 있는 모든 별들의 이름을 익히려 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르면, 밤하늘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데는 5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에 대한 상으로 그는 자신의 가운데 이름(미들네임)으로 ‘스타Star‘를 골랐고, 남은 평생 자랑스럽게 그 이름을달고 다녔다.
- P23

이유가 무엇이든 훌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데이비드의 구겨진 지도를 주먹 가득 움켜쥔 채 훌다는 아들에게 시간을 쓸 "더
"중요한 일을 찾아보라고 말했다." 착한 소년답게 데이비드는 어머니의 말을 들었다. 지도 만들기를 그만둔 것이다. 하지만 진짜소년답게 데이비드는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다. 진정한 의미에서는 말이다.
자신의 죄를 지구 탓으로 돌리려는 건지 데이비드는 이렇게썼다. "우리 시골집 주변에는 다양한 들꽃이 아주 많았다."12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이따금 풀밭에서 벨벳처럼 부드러운 파란 꽃잎이 동그란 공처럼 모여 핀 꽃과, 실크처럼 부드러운 주황색 별모양 꽃들을 꺾어 집으로 가져갔다. 어떤 꽃은 냄새만맡아보고 바닥에 던져버렸지만, 때때로 어떤 꽃은 손가락 사이에계속 남아 있다가 데이비드의 침실까지 따라 들어오곤 했고, 그런다음 침대 위에 놓인 채 꽃잎의 신비로운 배열 방식으로 데이비드를 자극했다. 그는 그 꽃을, 그 꽃의 이름과 생명의 나무에서 차지하는 정확한 위치를 알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려 애썼다. 그리고 꽤잘 억눌렀다. 사춘기가 닥치기 전까지는. - P26

조슈아를 만난 뒤 데이비드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무미건조하고 못생긴 꽃들-민들레 (타락사람오피시날레Taraxacum officinale)나 미나리아재비(라눙쿨루스 아크리스Ranunculus acris) 같은-이 자연의 청사진에 대한 더 좋은 실마리를담고 있다고 확신했다. "작은 것들은 아름답지는 않아도, 단 한 종류의 큰 꽃 백 송이보다 내게는 더 큰 의미가 있다. 미적 관심과 구별되는 과학적 관심을 보여주는 특별한 증거는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에게 마음을 쓰는 일이다."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
여기서 데이비드가 자신에 관한 뭔가를 드러내려고 했던 것일까? 회고록에는 이런 측면을 많이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에게인간 세상은 야박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 P28

루퍼스가 죽은 이후 데이비드의 일기장은 색채들로 폭발하기시작했다. 들꽃, 고사리, 아이비, 나무딸기 등 이 세계에서 뜯어올 수 있는 자연의 모든 파편을 꼼꼼하게 스케치하려 했던 것 같다. 그림의 기교는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그 그림들은 문질러 번진 연필 얼룩, 잉크 자국, 지우개 자국, 지나치게 열심히 그리려다흘린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그 미숙함 속에는 그의 집착과 필사적인 마음, 자신도 모르는 것들의 형상을 붙잡아두기 위해근육의 온 힘을 동원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각각의 그림 밑에는 마침내 학명이 하나씩 적혀 있었다.  - P30

데이비드는 마침내 그 이름들을, 라틴어로 된 승리의 선언이자 통달의 선언을 큰 소리로 발음하게 되었을 때의 감각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이름들은 내 입술에 얹힌 꿀과 같았다" 2심리학자들은 이처럼 괴로운 시기에 수집이 줄 수 있는 달콤한 위안에 관해 연구해왔다. 수십 년간 강박적인 수집가들과 상담해온 심리학자 워너 뮌스터버거Werner Muensterberger는 《수집: 다루기 어려운 열정 Collecting: An Unruly Passion》에서 수집 습관이 모종의
"박탈 혹은 상실 혹은 취약성이 발생한 후 급격히 심각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새롭게 하나를 수집할 때마다 수집가에게는 폭발적인 도취감을 주는 "무한한 힘의 환상"이 흘러넘친다고 말했다."
그라나다대학에서 수년간 수집가들을 연구한 프란시스카 로페스-토레시야스Francisca López-Torrecillas는 스트레스나 불안을 겪는 사람들이 수집에 의지해 고통을 달랜다며 비슷한 현상을 지적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무력함을 느낄 때는 강박적인 수집이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28 뮌스터버거가 지적하듯, 유일한 위험은 여느 강박과 마찬가지로 수집 습관이 "신나는 일에서 "파멸적인 일로 바뀌는 어떤 지점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 P31

페니키스 섬은 매사추세츠 해안에서 22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다. 길이는 1.5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고, 내리쬐는 태양으로부터 보호해줄 나무도 거의 없는‘ 이 섬은 사슬처럼 이어지는 여러 섬 중에서도 "땅꼬마"라 불려온, "슬프고 외로운 작은 바위섬",
"지옥의 전초기지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벌거숭이 해안은 늘 급진적 희망이 찾아드는 장소였다. 1900년대 초에는 자신이 환자들의 치료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은 한 의사가 이끄는 나환자촌이었다.
1950년대에는 급감하는 제비갈매기 개체군의 운명을 뒤집겠다는희망을 품은 동물연구가들이 새들의 피난처로 바꿔놓았고, 1970년대에는 비행 청소년 혹은 불량 청소년 혹은 문제아(명칭은 시기에 따라 달라졌다)들을 모아 교육하는 학교가 되었다. 어느 해병대출신 뱃사람이 격리와 육체노동, 축산, 배 건조, 공동체 생활, 학교공부가 "다수의 잠재적 살인자들을 자동차 도둑으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학교를 세운 것이다. - P35

당시는 사람들이 ‘군대 열병‘ 같은 알 수 없는 병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방법이 전혀 없는 바로 그런 시절이었고, 아직박테리아가 그 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이었다. 아가시는 사람들이 당대의 믿음들에 만족한다면 계속해서 발전이 가로막히고 좌절되고 병든 상태로 남을 거라고 걱정했다. 그건 안 될일이었다. 거기서 벗어날 방법, 계몽으로 나아갈 방법은 이 세계의털가죽과 꽃잎과 조약돌들을 계속해서 더 세밀하게, 더 오랫동안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아가시는 그러한 병폐를 바로잡을 수 있는 안전한 성역을, 요컨대 자연에서 젊은 박물학자들을 모아놓고 직접 관찰의 기술을가르칠 수 있는 일종의 여름 캠프를 꿈꿨다. 그리하여 1873년에어떤 부유한 토지 소유자가 그러한 대의를 위해 페니키스 섬을 기부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아가시는 냉큼 그 기회를 붙잡았다. - P37

몇 달 뒤인 1873년 7월 8일,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퍼드의 한 항구에 발을 딛고, 생애 처음으로 대양을 바라보았다.13 그의 나이 22세 때의 일이다.
서서히, 점점 더 많은 수의 남자들과 여자들로 뒤섞인 젊은 박물학자 무리가 부두 위에 있는 그의 곁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바다는 잔잔했고 하늘은 찬란한 푸른빛이었다.
수평선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섬으로 그들을 실어다줄 예인선이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배에서 널판자를 내리자 젊은 박물학자 50명이 그 위를 걸어 배에 올랐다. 배가 파도 사이로 넘실거리며 나아가는 동안 캠프를 향해 가는 그 젊은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세월 속에 묻혀버렸다.  - P39

 "물고기들은 뭐가 뭔지 당황스러울 정도로 다양하게 낚여 올라왔다." 그는 그날 갑판 위에서 파닥거리던 물고기들의 이름은 단 하나도 기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그에게 물고기들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이자, 남은 평생맞춰야 할 퍼즐로 그를 손짓해 부르는, 반짝이는 비늘로 된 실마리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49

어쩌면 케이프코드는 실존적 변화를 일으키기에 아주 비옥한땅인지도 모르겠다. 혹시 모래가 많은 케이프코드 만의 토양에 형이상학적 변화의 촉매가 되는 어떤 금속들이 함유되어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내가 아는 것은, 나 역시 그곳에 갔을 때 세계관 전체가 재배열되는 느낌을 받았다는 사실뿐이다. 그 일은 내가 일곱살 때쯤 일어났고,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 순간은 내가 데이비드스타 조던에게 집착하게 될 길을 닦아놓은 순간, 후에 내 인생이파탄 나고 있을 때 그가 나를 구원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만든 순간이기도 했다. - P53

그런 다음 아버지는 내 머리를 톡톡 토닥여주었다.
그때 내 얼굴이 어떻게 보였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잿빛이었을까? 그건 마치 이 세상을 덮고 있던, 깃털을 넣어 만든 커다란이불을 빼앗긴 느낌이었다.
‘혼돈‘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라고 아버지는 내게 알려주었다. 혼돈이라는 막무가내인 힘의 거대한 소용돌이, 그것이야말로 우연히 우리를 만든 것이자 언제라도 우리를 파괴할 힘이라고말이다. "혼돈은 우리의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 우리의 꿈, 우리의 의도, 우리의 가장 고결한 행동도. 절대 잊지 마라." 데크 아래솔잎들이 쌓인 땅을 가리키며 아버지가 말했다. "너한테는 네가 아무리 특별하게 느껴지더라도 너는 한 마리 개미와 전혀 다를 게 없다는 걸 좀 더 클 수는 있겠지만 더 중요하지는 않아." 당신 머릿속에 존재하는 위계의 지도를 들여다보느라 아버지는 여기서 잠시말을 멈췄다. "과연 네가 토양 속에서 환기를 시킬 수 있을까? 목재를 갉아 먹어 분해의 속도를 높이는 일은?" - P55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네가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런 면에서 지구에게넌 개미 한 마리보다 덜 중요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지" 그런 다음아버지는 요점을 더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나는 이게 포옹하자는 신호일지 모른다고, 아버지가 "농담이야, 넌중요해!"라고 말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좋아. 이제 이게.… 전체 시간의 길이라고 생각해보자." 아버지는 자기 가슴 앞에 펼쳐진 눈에 보이지 않는 광대한 시간의 선을 손으로 더듬었다. "여기서 인간이 존재한 기간은 - P55

요만큼이야!" ‘요만큼‘이라는 말을 할 때 아버지는 연극적인 동작으로 꼬집듯이 손가락들을 모았다. "게다가 우리는 아마 곧 사라지게 될 거야. 그러니까 만약 지구 저 멀리서 떨어져서 본다면…" 여기서 아버지는 혀를 차서 끽끽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 우리는정말 아무것도 아닌 거지. 거기엔 행성들이 있고, 그 너머엔 더 많은 태양계가 있어...."
아버지가 정확히 저 단어들을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거의 20년 뒤 천문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이 "우리는 점 위의점 위의 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을 때 나는 아버지의 단언과똑같은 말을 들었다고 느꼈다. - P56

일곱 살의 내게 그날 폐부에서 회오리치던 차가운 느낌을 말로 옮길 수 있는 언어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건 뭐 하러 해?
학교엔 왜 가? 뭐 하러 종이에 풀로 마카로니를 붙이는 건데?" 어쨌든 유년기 동안 나는 그 답을 알아내기 위해 조용히 아버지의 행동을 관찰했다.
아버지는 활기 넘치는 사람이다. 수전증이 있는 생화학자로,
모든 생명에, 심장박동과 번개에, 심지어 생각 자체에도 동력을 공급하는, 전기를 나르는 입자인 이온을 연구한다. 아버지는 안전띠도 매지 않고, 발신인 주소도 쓰지 않고, 수영이 금지된 곳에서 수영을 한다. 하루는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이제 소매와는 끝이라고선언했다. 소매 때문에 시험관을 넘어뜨린 일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곧바로 가위를 들고 옷장으로 달려갔고, 이후 몇 년 동안 ‘학계의 해적‘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옷차림으로 출근했다. - P56

상대방의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봐주는 사람들에 목말라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넌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은 아버지의 모든 걸음, 베어 무는모든 것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아버지는 수년 동안 오토바이를 몰고, 엄청난 양의 맥주를 마시고,
물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 때마다 큰 배로 풍덩 수면을 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게걸스러운 자신의 쾌락주의에 한계를 설정하는 자기만의 도덕률을 세우고 또 지키고자 자신에게 단 하나의 거짓말만을 허용했다. 그 도덕률은 "다른 사람들도중요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라"는 것이었다. - P57

만약 당신이 분류학자라면 이게 얼마나 심란한 생각일지 상상해보라.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대상이 알고 보니 퍼즐 조각도 실마리도 아닌 무작위성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들은 신성한 텍스트의 페이지도, 성스러운 암호를 이루는 상징도,
신성한 사다리의 가름대도 아니었다. 움직이고 있는 혼돈의 모습을 담은 스냅사진에 불과했다.  - P67

 자연을 더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다윈이 관찰한 대로 종들 사이의 영역은 불확실한 회색 지대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었고, 내키지 않았지만 그 자신도 회색지대를 알아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이렇게 썼다. "나는 아이에게 꼬리를 붙들려 카펫 위로 ‘끌려가는 고양이처럼 우아하게 진화론자들의 진영으로 넘어갔다!"
아, 이 문장 때문에 내가 그를 얼마나 흠모하게 되었던가. 이문장을 본 나는 두 팔로 그를 안고 볼에 입을 맞춰주고 싶었다. 정신을 아득하게 하는 진화의 진실을 받아들이고 계속 전진할 길을찾은 그가 참 용감하다고, 아주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물론 이는 그를 계속 나의 안내자로 삼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또한 바늘을 칼처럼 휘두르는 그가 뻔뻔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성의 자리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또한 부인이 반드시 굴욕으로 이어지는 길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어쩌면, 혹시 어쩌면,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언젠가희미한 빛을 발하는 삶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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