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가장 옴짝달싹할 수 없는 논거는 자연 자체에서 온 것일 터다. 데이비드가 자연에서 진리를 찾으라는 자신의 충고를 따랐다면, 그 역시 그 논거를 보았을 것이다. 눈부시게 깃털을 푸덕거리고 꽥꽥거리고 콸콸 쏟아지는 반대 증거의 무더기 말이다. 동물은 인간이 스스로 우월하다고 가정하는 거의 모든 기준에서 인간보다 더 우수할 수 있다. 까마귀는 우리보다 기억력이 좋고, 침팬지는 우리보다 패턴 인식 능력이 뛰어나며, 개미는 부상당한 동료를 구출하고, 주혈흡충은 우리보다 일부일처제 비율이 더 높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을 실제로 검토해볼 때, 인간을 꼭대기에 두는 단 하나의 계층구조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상당히 무리해서 곡예를 해야 한다. 우리는 가장 큰 뇌를 갖고 있지도 않고 기억력이 가장 좋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가장 빠르지도, 가장 힘이 세지도, 번식력이 가장 좋지도 않다. 같은 배우자와 평생을 함께하고, 도구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심지어 우리는지구에 가장 새롭게 나타난 생물도 아니다. p205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그 생각을 교실 밖으로도 가져가기 시작하여, 중요한 정치인들이 모인 큰 모임에 연사로 나서며 "공화국은 인간의 수확이 좋은 동안에만] 유지될 것"이라고 경고했다.20그는 1898년에 우생학을 지지하는 첫 논문을 발표하고, 이어서<인간의 수확The Human Harvest》, 《국가의 피The Blood of the Nation》, 《당신의 가계도Your Family Tree》 등 유전자 풀pool의 정화를 옹호하는 책들을 연달아 냈다. 이런 글들에서 데이비드는 자신이 지구상에서제거해버리고 싶은 종류의 사람들빈민들과 술꾼들, "백치들"과
"천치들", "바보들", 도덕적 타락자들을 모두 모아, 적격자와 반대되는 "부적합자"라는 한 범주에 몰아넣었다. 부적합자! 단박에귀를 사로잡으며 매우 암시적이고 너무나 깔끔한 단어.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살 자격이 있는가에 관한 그의 의견에 과학의 망토를둘러줄 수 있는 단어였다. 부적합자! 그냥 한 남자의 판단이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현실 자체. - P183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당신의 유전자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라"가 될 것이다.52 상황이 바뀌면 그 상황에 어떤 특징이 더 유용하게 적용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다윈은 간섭하지 말라고 특별히 강력하게 경고한다. 그가 보기에 위험한 것은 인간의눈에서 비롯된 오류 가능성,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이다. "적합성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서는 불쾌하게"54 보일 수있는 특징들이 사실 좀 전체나 생태계에는 이로울 수도 있고, 혹은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 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린에게 경쟁자에 대한 우위를 갖춰준 것은 그 거추장스러운 목이었고, 바다표범이 심한 추위에도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움직이지 못할 만큼 무거워 보이는 체지방 덕분이었으며, 대다수가 생각도 할 수 없는 발명과 발견, 혁명을 이루게 한 열쇠는 확산적 사고를 하는 뇌일 것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외부 형질에만 영향을미칠 수 있지만, (…) 자연은 외양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 - P188

 이것이 바로 다윈이 예언했던 그런 상황이다. 그가지구의 수많은 생명들의 순위를 정하지 말라고 그토록 뚜렷이 경고한 이유는 "어느 무리가 승리하게 될지 인간은 결코 예측할 수없기 때문이다.인간의 지력으로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생태의 복잡성에대한 이러한 조심스러움과 겸손함, 공경하는 마음은 사실 대단히오래된 것이다. 이는 때로 "민들레 원칙"58이라고도 불리는 철학적개념이다. 민들레는 어떤 상황에서는 추려내야 할 잡초로 여겨지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경작해야 하는 가치 있는 약초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생학자들은 이런 단순한 상대성의 원칙을 고려하지 못한것이다. 유전자 풀에서 "필수불가결한 다양성을 제거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들은 사실상 지배자 인종을 구축할 최선의 기회를망쳐버리고 있었던 셈이다. - P189

다섯 달 뒤 캐리 벅은 린치버그 수용소에 있는 땅딸막한 벽돌건물 이층으로 끌려갔다. 천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수술하는 의사에게 더 밝은 빛을 비춰주는 그런 방이었다.80 캐리는 수술대에눕혀졌고, 치골 바로 위의 살이 메스로 열렸다. 의사는 탐침으로나팔관의 위치를 찾아 재빠르게 양쪽 나팔관을 잡아맸다. 그런 다음 잘린 끝부분이 풀리지 않도록 석탄산으로 봉했다. 81수술 후 깨어난 캐리는 새로운 현실을 맞이했다. 이제 다시는그녀만의 독특한 눈과 그녀의 고유한 특징들을 물려받은 아이가이 지구 위를 걸어 다닐 일은 없을 것이라는 현실이었다.
캐리의 소송은 미국 전역에서 "공공복지"82의 이름으로 6만건 이상의 불임화가 합법적으로, 그리고 당사자의 의지를 거슬러실시될 길을 닦아놓았다. 그 "부적합자들 중 다수는 잊혔지만, 연구자들은 그들이 찾아낸 이야기들이 다시 어둠 속에 묻히지 않도록 분투했다 - P194

스턴은 한 연구팀과 함께 수년간 그 기록들을 분석했고, "부적합자"란 말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그범주 안에서 살아갔는지에 관한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스턴의글에서 알 수 있듯 부적합하다고 여겨진 사람들은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판단된 젊은 여자들, 멕시코와 이탈리아, 일본 이민자의 아들과 딸들・・・ 그리고 성적인 전형에서 벗어난 남녀들"이었다.85 다른 연구들은 과도하게 치우친 비율로 많은 유색인 여성들이 불임화의 표적이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미국 정부는 1970년대 초에아메리카 원주민 여성 2500명 이상을 강제로 불임화했음을 인정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우생학위원회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수백 명의 흑인 여성들을 찾아내 불임화했다. 그리고 당혹스럽게도 1933년과 1968년 사이 푸에르토리코 출신 여성 중 약 3분의1 이 미국 정부에 의해 불임화되었다." - P195

그동안 강제 불임화는 전국에서 "조용한 방식으로 계속 시행되고 있다. 그중 다수가 (저소득층 병원이나 마약중독 클리닉, 교도소,
장애인 수용시설 등에서) 기록을 남기지 않고 행해져 밝혀내기가 어렵지만, 큰 사건들은 지금도 몇 년에 한 번씩 세상에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캘리포니아주 교도소에서는150명에 가까운 여성에게 동의도 얻지 않고 때로는 본인들도 모르게 불법적으로 불임화 수술을 자행했다. 그리고 2017년 여름에는 테네시주의 샘 베닝필드라는 판사가 잡범들에게 불임화를받는 대가로 수감 형량을 줄여주겠다고 제안한 것이 드러났다."
바로 이것이다. 과거와 다르지 않은 사고방식, 골턴의 어리석음, 가난과 고통과 범죄가 혈통의 문제이며 칼로 잘라 사회에서 제거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 이 나라에서 우생학 이데올로기는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는 우생학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는 나라다.
워싱턴의 내셔널몰을 따라 걷다가 21번가에 도착해서 북쪽을바라보면 그가 보인다. 미국 과학의 사원인 국립과학아카데미로들어가는 길목에 청동으로 새겨진 프랜시스 골턴이 있다.93 스탠퍼드대학의 주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제일 먼저 마주치는 조각상 중 하나가 루이 아가시다. 흑인은 인간보다 낮은 종이라고 믿었 - P196

던 루이 아가시가 여전히 코린트식 기둥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등 뒤에는 전면 전체에 아치가 나란히 늘어서 있고, 점토 기와를 올린 거대한 사암 건물이 있다. 그 건물에는 사회의 가장 취약한 집단을 "몰살시킬 것을 촉구하며 전국을 누볐던 남자를 기리는 이름이 붙어 있다. 바로 "조던 홀Jordan Hall"이다. - P197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죽는 날까지 열광적인 우생학자로 남았다. 마지막 순간의 깨달음이나 회한을 보여주는 증거는 전혀 없다. 자기 노력의 결과로 칼질을 당하고 흉터와 수치만 남은 수천명에 대해서도, 자기 권력을 놓지 않으려 투쟁하는 와중에 짓밟힌사람들 제인 스탠퍼드, 그에게 명예가 훼손된 의사들, 그가 해고한 스파이, 그에게 성도착자 소리를 들은 사서에 대해서도.
오싹했다. 그 잔인성과 무자비함이. 그 추락의 무지막지한 깊이와 그 파괴적 광란의 크기가 토할 것 같았다. 내가 모델로 삼으려 했던 자는 결국 이런 악당이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생각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이성도 무시하고 도덕도무시하고, 자기 방식이 지닌 오류를 직시하라고 호소하는 수천 명의 아우성-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요도 무시해버린남자. - P201

그것은 지독히도 방향감각을 앗아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혼돈이었을 것이다.
그것은-내가 어려서부터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써왔던 바로 그 세계관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개미들과 별들과 함께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느낌.
소용돌이치는 혼돈의 내부에서 바라본, 차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눈부시고 가차 없고 뚜렷한 진실. 너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진실을흘낏 엿본 바로 그 느낌일 것이다.
그 사다리가 데이비드에게 준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의 해독제. 하나의 거점. 중요성이라는 사랑스럽고 따스한 느낌.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나는 그가 자연의 질서라는 비전을 그토록 단단하게 붙잡고 늘어졌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덕과 이성과 진실에 맞서면서까지 그가 그렇게 맹렬하게 그 비전을 수호한 이유를. 바로 그 때문에 그를 경멸했음에도 어느 차원에서는 나 역시 그가 갈망한 것과 똑같은 것을 갈망했다. - P207

별이 몇 개 떠 있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분홍색 쓰레기더미로 만들어버린 하늘 저 너머에서 분명 눈을 깜빡거리고있을 것이다. 나는 탈출하려고 그토록 애써온 지구로 다시 돌아왔다.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사명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강하든, 얼마나 열심히 뉘우치든 어떤 피난처도 약속도 주지 않는 황량한 지구로.
나는 살면서 내 인생의 많은 좋은 것들을 망쳐버렸다. 그리고이제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 한다. 그 곱슬머리 남자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나를 아름답고 새로운 경험으로 인도해주지 않을 것이다. 혼돈을 이길 방법은없고, 결국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보장해주는 안내자도, 지름길도, 마법의 주문 따위도 없다.
자, 이렇게 희망을 놓아버린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할까? - P208

애나는 열아홉 살 때 그 수용소에서 자신의 의지에 반해 불임화를 당했다. 1967년의 일이다. 그러나 그 벽돌벽 안에 처음 들어간 것은 그보다 12 년 전인 겨우 일곱 살 때였다. 애나와 남자 형제들이 그들의 집 뒤에 있는 우리 안에서 발가벗고 방치된 채 놀고 있는 것을 이웃 사람들이 목격했다. 주에 소속된 복지사들이 그들을 데려가려고 찾아왔다. 아이들이 가기 싫어한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애나는 엄마를 사랑했다. 엄마의 긴 머리와 멜빵바지를, 추운 밤이면 엄마의 침대 속으로 파고드는 애나를 받아주던 엄마를. 그러나 이웃들의 우려와 부모의 가난, 애나의 낮은 지능검사점수만으로 이 일곱 살 소녀를 "부적합자"로, 인류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기에 충분했다. - P214

애나는 웃음과 온기가 가득한 활기찬 가정을 꾸리길원했다. 애나는 자기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애나를 잡아 가둔 사람들 역시 어느 정도는 분명 그 사실을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수용소에서 애나가 하던 일이 수용된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애나는 아이들을 목욕시키고 노래를 불러주고 파자마를 갈아 입혀주고 흔들어서 재워주었다. 나라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는 적합하지만, 자신의 아이를 돌보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일까.
여러 해 동안 애나는 누군가ㅡ부모나 대통령이나 어디선가선을 위해 투쟁하는 누군가가 와서 자신을 해방시켜주기를 소망하며 불임화를 거부했다. 자신의 정체성에서 지키고 싶은 한 부분, 바로 어머니라는 정체성을 자신을 억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내어주기를 거부했다. 자신을 계속 살아가게 해주는 단 하나의 희망의 근원을 넘겨주기를 거부한 것이다. - P216

부적합, 그것은 판단이 아니라 그냥 엄연한 하나의 사실이다.
그러다 1967년, 찌는 듯이 무더운 8월의 어느 날, 애나가 열아홉 살이 된 지 두어 달이 지났을 때 간호사가 애나에게 검진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간호사는 애나를 검사실로 데려가 얼굴에 마스크를 씌운 뒤 방을 나갔다. 그 순간 애나는 벽이 파도치듯 일렁이다 흐릿해지는 걸 보았다. 애나는 자신이 안락사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거라고 애나가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깨어났죠."
깨어나기는 했다. 깨어나 붕대가 감긴 배를, 도둑질을 감추려고 대충 꿰맨 스물다섯 개의 바늘땀을 발견했다.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이제 곧 자유롭게 떠날수 있을 거라는 말만 했다. - P217

그날 그 집에서 나와 차를 몰고 가면서 나는 이런 사람들이 생명을 이어갈 가치가 없다고, 사회에 위험이 된다고 했던 우생학자들의 믿음에 대해 곱씹어보았다. 그 생각을 하니 분노가 치솟았다.
나는 애나의 배에 불거진 흉터에 대해 생각했다. 자기 몸을 내려다볼 때 대법원이 인정한 무가치함의 스탬프가 보이는 건 어떤느낌일지 궁금했다. 보랏빛 리본 같은 그 흉터가 사실은 하나의 선물로 의도된 것임을, 아마도 그들이 원한 방식이었을, 그 자리에서바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생을 끝까지 살도록 허용해주는 국가의 자비였음을 아는 건 어떤 느낌일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내 언니를 보았다면, 아마 언니도 부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현금출납기 앞에서 허둥대는 사람이니까. 또한 그는 나 역시 부적합하다고 판단했을것이다. 나의 슬픔은 그에게 불쾌감을 주었을 것이고, 도덕적실패의 표시로 여겨졌을 테니까. 숨에서 유황을 내뿜는 인생의 낭비자. - P221

 왜냐하면 당연히, 우리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우주의 냉엄한 진실이다. 우리는 작은 티끌들, 깜빡거리듯 생겨났다가사라지는, 우주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들이다. 정말 이상한일이지만, 이 진실을 무시하는 것은 정확히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똑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터무니없는믿음 때문에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폭력을 저질러도 괜찮다고생각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 그럴 순 없다. 명민하고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호흡, 모든 걸음마다 우리의 사소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와 다르게 말하는 것은 죄를 짓고, 거짓을 말하고, 기만과 광기로, 그보다 더 나쁜 것으로 자신을 이끌고 가는 일이다.
아, 그것은 엉킨 실타래였다.
제 꼬리를 먹는 우로보로스.
복수를 하겠다고 나무로 기어 올라갔지만 높이 뜬 독수리라는 진실에 얻어맞아 나가떨어진 파란 꼬리의 스킹크.
나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심정이었다. - P221

"어떻게 계속 살아가시는 거예요?"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내가 평생에 걸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물어왔던 질문이다. 그것은 내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인생에관해 조사하며 여러 해를 보낸 이유였으며,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던졌던 바로 그 질문이며, 내가 그 곱슬머리 남자를, 차가운 지구에서 웃음을 이끌어내는 그의 매혹적인 방식을 그토록 놓지 않으려 버텨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 경쾌함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가까이하고 싶었던 자질이며, 나의 내면에서도 만들어내고 싶었던실체이며, 아무리 멀리 아무리 넓게 찾아보아도 나로서는 도저히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비법이었다.
애나도 답을 알지 못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나는 애나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려고 화초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P223

바로 이런 점들이 내가 우생학자들에 대해 그토록 격노하는이유다. 그들은 이런 그물망의 가능성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들은 애나와 메리 같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고, 자신들이 받은 빛을 더욱 환하게 반사할 수 있는 이 실질적인 방식들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메리는 애나가 없었다면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 이런것. 이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죽는 것과 사는 것의차이. 그게 아무 가치가 없다고?
바로 그때 그 깨달음이 내 머리를 때렸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깨달음, 애나가 중요하다는, 메리가 중요하다는 말. 혹은 이책을 읽는 당신(넘어지지 않게 꼭 붙잡으시라)이 중요하다는 말.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자연을 더욱 정확하게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것이 민들레 법칙이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 P226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에게는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해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놓치는 일이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아는 것이다.  - P227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변명도, 죄도 아니다. 그것은 다윈의 신념이었다! 반대로,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만 하고 그 주장만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거짓이다. 그건 너무 음울하고 너무 경직되어 있고 너무 근시안적이다. 가장 심한 비난의 말로 표현하자면, 비과학적이다.
나는 운전대를 살짝 두드렸다. 운전대에 닿는 내 손가락이 한층 더 가볍게 느껴졌고, 그 손가락이 조종하고 있는 인생에 대한더 큰 통제력이 느껴졌다. - P228

휴, 한숨이 나온다.
그의 이야기는 결국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자기 죄에 대한 벌을 받지 않고,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런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우주적 정의의 감각 같은 건 그 까칠하고 무의미한 조직 속 어디에도 새겨져 있지 않을 만큼 야멸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바닥 모를 혼란한 세계는 소매 속에 또 하나의 속임수를 감춰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에게 가장 소중한 그것을 훔쳐갈 마지막 하나 남은 방법을 이 세계가 마침내 그의 물고기 컬렉션을 단박에 허물어뜨린 그 은근하고 음흉한 방식을, 그것은 번개도 아니고 홍수도 부패도 아니며, 큰 입을 벌려 그 모든 걸 집어삼킨 거대한 싱크홀도 아니다. 아니, 자연의 방법은 훨씬 더 잔인했다. 자연은 그가 자기 손으로 직접 그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 - P235

별들을 포기하는 일이 성직자에게는 다른 효과를 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방랑자에게도, 제빵사에게도, 촛대 만드는 사람에게도그러니까 물고기의 경우도 그럴 것이다.
캐럴 계속 윤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평생 존경해왔던 과학자 공동체에 대한 일종의 격분이 생겼다고 했다. 인간의 직관을빼앗아감으로써 일반 대중이 인간의 애정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환경에 더더욱 무관심해지도록 만들 거라는 걱정이었다. 물고기의 죽음을 그토록 아름답게 설명한 책을 썼음에도, 윤의 한 부분은단순한 언어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다.
앞에서 얘기했던 "횡설수설하는 분기학자" 릭 윈터바텀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목적을 얻었다. 그는 하나의 대의를 가지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덮고 있는 두꺼운 모포를 걷어내려는 열의에 불타올라, 이 칠판 저 칠판 위에서 이 물고기 저물고기를 처형했다. 그는 자신의 뇌를 재배선하고 있다고, 자신이진실에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고 느꼈고, 다른 사람들도 그문틈을 엿보도록 돕고 싶은 열의를 느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그는 열의가 식고 시무룩해졌다.  - P249

나의 아버지는 "어류"라는 단어를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단어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정확하지 않다는건 이해하지만 유용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세계를 경험하는 제한된 방식에 자신을 가두게 되는 것이 걱정되지 않느냐고 내가 묻자, 아버지는 불만스럽게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나는 그게 뭐든, 아직 내가 해방되지 않은 것으로부터 해방되기에는 너무 늙었어."
큰언니는 물고기를 놓아버리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언니는 어류라는 범주 전체를 바로 손에서 놓아버렸다. 왜 언니한테는 그게 그렇게 쉬운 거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그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인간은 원래 곧잘 틀리잖아" 언니는 평생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늘 반복적으로 오해해왔다고 말했다. 의사들에게서는 오진을 받고, 급우들과 이웃들, 부모, 나에게서는 오해를 받았다고 말이다.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
정말로 이 물음은 모든 사람마다 다 다르다. - P252

내가 물고기를 포기하면 얻게 되는 게 뭔지 나는 아직 몰랐다.
다만 시카고를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은 알았다. 더 이상 나의연옥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헤더의 아파트에, 곱슬머리 남자가 언젠가는 내게 돌아올 거라는 헤더의 믿음이 따뜻하게덥혀주던 그 2층짜리 둥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무리 편안하게느껴지더라도, 나는 내 인생을 계속 살아가야 했고, 혼돈 속으로다시 들어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봐야 했다. - P255

그 커튼들 너머, 우리가 자연 위에 그려놓은 선들 너머를간절히 보고 싶었다. 다윈이 거기 있을 것이라 약속했던 땅, 분기학자들이 볼 수 있었던 땅, 어류는 존재하지 않으며 자연은 우리가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경계가 없고 더 풍요로운, 아무런 기준선도 그어지지 않은 그곳을.
"다른 세계는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 안에 있다." W. B. 예이츠의 것으로 알려진 이 인용문을 나는 여러 해 동안 벽에 붙여두었다. 그 다른 세계가 바로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였다. 나는 과학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위스키를 마시면서 그 세계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 세계는 아무 데도 없었다.
그 세계를 보려면 아무래도 스노클이 필요할 터였다. 내가 마침내 그 너머의 세계를 보게 되려면, 플라스틱 스노클을 내 코에세게 갖다 대야 할 터였다.
한번 설명해보겠다. - P257

깨끗한 물 때문이었을까.
뭐였든.
하지만 그 물고기들이란.
물고기들은 내가 그때까지 본 무엇과도 달랐다.
노란 앵무새들과 검은 천사들과 아콰마린색 달의 조각들. 상당한 크기의 자주색 물고기 하나는 내가 강아지처럼 자기를 졸졸따라다니게 해줬다. 나는 벅찬 감동을 느꼈지만, 감동의 소리를 낼수 없었다. 그 감동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물 위로 올라가야했다. 나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거기 그들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수없이 글로만 읽었던 존재들. 아직 내가 이름도 모르는 존재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피부 아래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나와 훨씬 더 비슷한 내장기관이 있다는 것, 나와 똑같은 이온이흐르고 있는 뇌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류가 아니라는 것. 은빛 존재들 한 떼가 나를 향해 몰려오더니 잘하면 잡을수도 있는 기차처럼 내 아래쪽에서 빠른 속도로 몰려다녔다. 나는그 은빛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들은 갈라지며 나를 자기들 안으로받아주었다. 수백 마리의 은빛 영혼들이 나를 감쌌다.
나는 공기를 들이마시러 올라갔다. - P261

이제는 침대 위 에메랄드색 눈의 아내 곁에 누워 있을 때 총이 떠오르면-그렇다. 그건 여전히 떠오르고, 아마도 언제나 떠오를 것이다-나는 총이 주는 것들을 헤아려본다. 그것이 가져다줄수 있는 해방, 그날의 스트레스와 내가 망쳐버린 것들에 대한 해결책, 수치의 종말에 관해.
그러다가 물고기에 관해 생각한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빛 물고기 한 마리가 내 머릿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모습을 그려본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계에 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또 뭐가 있을까? 우리가 자연 위에그은 선들 너머에 또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어떤 범주들이 무너질 참일까? 구름도 생명이 있는 존재일 수 있을까? 누가알겠는가. 해왕성에서는 다이아몬드가 비로 내린다는데? 그건 정말이다. 바로 몇 년 전에 과학자들이 그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가세상을 더 오래 검토할수록 세상은 더 이상한 곳으로 밝혀질 것이다.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 안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잡초 안에 약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얕잡아봤던사람 속에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 P263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 P263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 폭풍우는 짜증스럽기만 한 일일까? 어쩌면 그것은 거리를혼자 차지할 수 있는 기회, 온몸을 빗물에 적셔볼 기회, 다시 시작할 기회일 수도 있다. 이 파티는 당신이 예상하는 것만큼 따분할까? 어쩌면 그 파티에서는 담배를 입에 물고 댄스플로어 뒷문 옆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친구가 있을지도 모르고, 그 친구는 앞으로수년간 당신과 함께 웃고 당신의 수치심을 소속감으로 바꿔줄지도 모른다. - P264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해골 열쇠를 하나 얻었다. 이세계의 규칙들이라는 격자를 부수고 더 거침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물고기 모양의 해골 열쇠. 이 세계 안에 있는 또 다른 세계.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고 하늘에서 다이아몬드 비가 내리며 모든 민들레가 가능성으로 진동하고 있는, 저 창밖, 격자가 없는 곳.
그 열쇠를 돌리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단어들을 늘 신중하게 다루는 것이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무엇을 잘못 알고 있을까? 과학자의 딸인 나로서는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긴 했지만, 내가 물고기를 포기할 때 나는 과학자체에도 오류가 있음을 깨닫는다. 과학은 늘 내가 생각해왔던 것처럼 진실을 비춰주는 횃불이 아니라, 도중에 파괴도 많이 일으킬수 있는 무딘 도구라는 것을 깨닫는다. - P267

삽화에 관한 몇 마디


이 책에 실린 삽화는 19세기에 처음 생긴, 판에 직접 새기는스크래치보드 기법으로 만든 것이다. 점토로 된 흰 하드보드를 검은 먹물로 코팅하고, 무엇이든 긁어낼 수 있는 도구로 검은 부분을긁어내어 그림을 새기는 방법이다. 이 책 삽화에서 판화가는 바늘을 기본 도구로 사용했다.

변화에 관한 몇 마디


이 책이 출간되고 여섯 달 뒤, 스탠퍼드대학과 인디애나대학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름이 붙은 건물의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두 학교 모두 학생들과 임직원, 교직원, 졸업생들이 편지와 기사, 온·오프라인 시위로 항의한 결과 내려진 결정이다.

감사의 말

무엇보다 먼저, 이 책은 지적인 부분에서 대모 역할을 해준 캐럴 계숙 윤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논의한 과학적 주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생긴 분이라면, 직관과 진실의 충돌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자세히 들려주는 윤의 책 <자연에 이름 붙이기Naming Nature》를 향해 걷지 말고 뛰어가보시기를 권합니다. 내가 처음 분기학이라는 토끼굴에 빠졌을 때, 그 주제에 관해 기꺼이이야기를 들려준 윤을 만난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고, 윤은 늘 너무나도 관대하고 자애로운 안내자가 되어주었습니다. - P272

니다.
추천할 책이 두 권 있습니다. 하나는 페니키스 섬의 소년원에서 교사로 일한 시간을 담은 대니얼 롭의 회고록 《그 물을 건너다Crossing the Water》입니다. 그의 글은 페니키스 섬처럼 황량하면서도 벅차고, 때로는 연약하고 때로는 강경합니다. 격리와 고된 노동의 가치에 대해, 장소가 사람의 영혼을 바꿀 수 있는가에 관해 그가 제기한 의문들이 계속 나의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또 한 권은제니퍼 마이클 헥트의 《살아야 할 이유stay: A History of Suicide and thePhilosophies Against It》(열린책들, 2014)로, 자살에 반대하는 훌륭한 비종교적 주장들을 펼쳐놓았습니다. 두 책 모두 매우 아름다운 독서경험을 안겨주었고, 나는 이 선물 같은 책들을 언제까지나 소중히여길 것입니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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