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는 사이 공원은 이제 이 도시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다. 내 방이 있는 부모의 집보다도 기영의 집보다도 나는 공원이 좋았다. 좋아하는 장소가 생긴다는 것은 마치 인생에경력이 쌓이는 듯한 기분이어서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했다. 나는 공원이 좋았다.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계절을 느끼는 것. 다들 활기차 있는 것, 배드민턴을 치다가 실수를 해도 웬만해서는 웃어넘기는 것,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노부부들을 보는 것. 가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어슬렁거리는 수상쩍어 보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개들, 공원에는 많은 개들이 돌아다녔다. 들개가 아닌 강아지들이벤치에 앉아 있으면 산책을 나온 강아지들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 P153
사람들이 나를 남자로 착각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나는 백칠십오 센티미터의 키에 머리가 짧고 화장도 하지 않는데다 몸매가드러나지 않는 옷을 주로 입었다. 길을 가는데 총각이나 아저씨, 하고 나를 부르며 길을 묻는다든가, 찜질방에서 파란색 옷을 주며 남자 탈의실로 안내를 한다든가 하는 일들이 있었다. 언젠가인도로 여행을 갔을 때 함께 간 친구는 예외 없이 ‘madam‘으로불렸지만 나는 때때로 ‘sir‘로 불렸다. 한참이나 내게 호객행위를하던 릭샤꾼이 포기하고 돌아서며 근데 너 남자야, 여자야? 하고대놓고 묻던 일도 있었다. 그래서 익숙했다. 남자로 오해당하면기분 나쁘지 않으냐고 누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오해당하는 건괜찮았다. 때로는 안전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성가신 건 내가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였다. 어떤 사람은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 사과를 했는데 그것도 좀 웃긴 일이지만 그건 그런대로 점많은 편이랄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동그란 눈을 하고 찬찬히 내얼굴을 뜯어본 뒤 가슴을 뚫어져라 봤고, 어떤 사람은 왜 그러고다니느냐고 물어봤으며, 어떤 사람은 조언을 했다. 머리를 기르라거나 화장을 하거나 좀더 여성스러운 옷을 입어보라거나 말할 때 솔 톤을 내는 것이 좋다는 식이었다. 나를 위로한답시고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도 있었다. 왜들 그런 오해를 하지? - P155
그 비명은 오래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비명으로 말하려고 했던 스무 살 때였다. 헌책 값을 잘 쳐준다는 책방에 가려고 무거운 짐을 겨우 들고 버스에 탔다. 다행히 자리가 하나 나서 앉았지만 책이 잔뜩 든 가방을 둘 데가 없어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다리가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잠깐 졸았다. 마비된 허벅지가그리고 또 아랫배가 이상하게 꿈틀거리는 것 같은 기분에 잠에서깨서 내 배를 내려다보았을 때 거기에는 손이 하나 있었다. 이게뭐지. 꿈인가. 내가 멍하니 내려다보는 내내 손은 책이 든 가방을가림막 삼아 내 배를 주무르고 있었다. 나는 손을 따라 옆자리로시선을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잠깐 멈칫하더니 태연히 손을 거두어갔다. 이게 뭐지. 이게 뭐야? 씨발놈이 인간처럼 - P165
생겨가지고 미친 새끼가.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내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눈길이 무심히 남자의 손에 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인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혹시 다 보고 있었나. 보면서 아무 제지도 하지 않았나. 나란히 앉아 있어서 남자와 내가 아는 사이일 거라고 여겼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나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친 새끼들이 포르노에 뇌가 절여져서 제대로 된 사리 분별을 못하나? 하지만 나 역시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서서히온몸이, 뇌까지도 마비되는 것 같았다. 나도 내 앞에 선 인간과 똑같은 방관자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남자를 해할 방법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게 정상적인 사고방식인가? 타인을 해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정상적인 걸까. 나는 왜 이런 순간에도 자기검열을 하고 있다. 생각을 멈추고 기사에게 외쳐야 한다. 경찰을 불러주십시오! 이 남자가 저를 성추행했습니다! 잠시만요. 내릴게요. 내가 혼란해하는 사이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는 내가자리를 피할 새도 없이 앞좌석과 내 무릎 사이의 비좁은 틈을 통과하며 팔꿈치로 내 머리를 쳤다. 미안합니다. 남자는 내 얼굴을 돌아보며 웃는 낯으로 사과했다. 그다음의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난다. 나는 끙끙대며 들고 탔던 가방을 번쩍 들어 남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무기로 삼을 만한것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목이 꺾여서 죽어버렸 - P166
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목이 꺾이지도 죽어버리지도 않고 나를 돌아봤다. 남자보다 다른 승객들이 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학생, 왜 그래요? 왜 그랬지. 남자가 나를 향해 웃었기 때문에. 아니 실수로 내 머리를 쳤기 때문에. 아니 남자가 내가 잠든 틈을 타 내 배를 주물렀기 때문에. 물론 그것 때문이다. 남자가 나를 폭행했기 때문에. 나는 그제야 비명을 질렀다. 나는 늘 늦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할 시간이 필요하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지 결정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 모든 과정은 아주 더디게 진행되고 그만큼 반응 속도도 늦다. 나는 때맞춰 지르지 못한 늦은 비명을 질렀다. 비명만큼 압축적으로 많은 의미를담고 있는 언어가 있을 수 있을까. 비명은 나의 언어였다. 그 순간내게 가장 논리적이고 합당한 말이었다. 나는 사력을 다해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돌아보았고 무언가를 직감한 듯 남자가 열린 하차 문으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사람들도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았다. 순식간에추론해냈다. 너무 흔하고 상투적인 일이었으니까. 계속 반복되는일이었으니까. - P167
나는 기영이 판정관이나 심문관처럼 굴지 말고 그냥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줬으면 했다. 팔짱을 끼고 어디 책잡을 데가 없나 따져보기 전에 일단 경청부터 해줬으면 했다. 실수 하나에 나를 의심하지 말고 우선은 믿어줬으면 했다. 하지만 나조차도내 멍청함에 화가 났다. 너무 화가 나서, 모든 걸 만회하고 싶어서 더 필사적인 사람이 되었다. - P168
예를 들어 사랑을 속삭이는 행위는 남녀 간의 일로 한정되어 있었다. 질투도 부부나 사랑하는 이성 사이에서나 가능했다. 여성 비하적인 표현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런 표현들은우리가 살아온 시대나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떠올려보면 크게 놀지는 않았다. 동성애자의 존재를 지우고 여성의 지위를 깎아내리는 일은 실제 삶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났으니까. 당연하게도, 국어사전은 한국사회를 정직하고 성실하게 반영한 표상이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리고 개에 대한 표현들을 마주칠 때에도 화가 났다. 만약 지구에 대한 정보가 없는 어떤 외계인이 한국인의 생태를 파악하기위해 국어사전을 분석한다면 개에 대해 뭐라고 할까? 인간을 잘따르고 영리하긴 하나 인간에 비하면 아주 열등하고 하찮은 개 발싸개 같은 생물이라 판단할지도 모른다. 물론 비속한 의미를 담을때 쓰이는 ‘개‘가 모두 다 개소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발음이동일한 탓에 개를 떠올리지 않기란 쉽지 않고 개는 자기 것이 아닌 의미를 거듭 뒤집어쓰면서 그것의 진짜 주인으로 오해당한다. - P177
대담하게 어떤 일을 도모하자고 제안할 때도 있었다. 때로는 비장하게까지 여겨져서 사정을 잘 모르는 미애조차 숙연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런 모습들이 놀랍고 얼마간 감동적으로 다가올 때가 없지 않았으나 미애의 눈에 점점 더 또렷하게보이는 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들의 열망이었다. 그들에겐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고, 그렇게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 확신을 지켜나갈 여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이 자신을 그 모임에 끼워준 진짜 이유라는 것을미애는 모르지 않았다. 세아는 북극에 사는 곰 아저씨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플라스틱 섬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민이가 방법을알 것 같은데? - P199
그건 희망의 모습과 비슷했다. 삶에 기대를 품는 것이 번번이 자신을 망친다는 결론에 이른뒤로 미애는 가능한 한 희망을 가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다. 노력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삶은 언제나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쏟아부어야만 했고, 그래서 희망을 부풀리는 능력이 불필요하게 발달한 거라고, 자칫하다간 다시금 눈덩이처럼 커진 희망 아래 깔려 죽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에게 수시로 경고하는 것만은 잊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금 희망이라고 할 만한 게 생겨나고 있었다. 아니, 사는 동안 그런 게 절실하지 않은 때가 한 번도 없었다는 걸 미애는 모르지 않았다. - P201
미애는 어떻게든 문을 열 수 있는 말을 찾고 싶었고, 그럴수록어떤 말로도 굳게 닫힌 저 문을 열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커졌다. 그럼에도 미애는 계속 말했다. 나중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문이 열릴 거라는 기대와 결코 문이 열리지않을 거라는 체념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마음이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고 나서야 미애는 돌아섰다. - P216
나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희망이 있다. 희망을 가져라. 그렇게 말할 때의 확고하고 단호한 표정이 아니라, 주저하고 망설이면서도 어쨌든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다. 희망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 없으면서도 일단 가봐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의변화. 그 변화가 불러오는 찰나의 활력과 활기를 붙잡고 싶었던것 같다. 희망이라는 것은 지금은 없는 어떤 것을 상상하는 힘이고 그것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마침내 어디에 다다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자세에 따라, 잠깐 고개를 돌리면또 달라지고 마는 직진의 방향처럼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논리와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고, 때때로 무모하고 터무니없기까지 한 어떤것. 그러니까 희망은 그저 아주 작은 가능성을 담보한 에너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 P221
진우뿐만 아니라 한인 식당, 한인 슈퍼, 한인 여행사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은 모두 그런 대우를 받으며 일했다. 457 비자를 신청해준다는 명목으로 주에 오십 시간씩 일을 시키면서 주급으로 백불만을 주는 업체도 있었다. 이 년을 무상으로 일해주고 비자를얻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진우의 사장은 악덕 업주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들 했다. 진우 역시 부당한 처우에 불평하기보다는 자신이 비자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쁘게 생각했다. 457 비자로 이 년을 일하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었다. 그러면 많은 것이 달라질 거였다. 급여는 적어도 두 배, 경력을 고려하면 세 배가 될 터였고 법정 유급휴가사 주에 공공 의료와 공교육이 무료였다. 진우는 한국에서는 누릴 수 없는 것들을 약속하며서인을 설득했다. 한국에서 혼인신고만 하고 돌아온 이후에도 문제가 남아 있었다. 457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영어 점수가 필요했는데 주에칠십이 시간씩 일하는 진우로서는 공부할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필요한 점수를 받으려면 일을 그만두고 몇 달간 시험 준비에 전념해야 했는데, 진우의 시급이 서인보다 높았고 홀에서 영어로 서빙을 하는 서인의 영어 실력이 진우에 비해 훨씬 나았으므로, 진우가 일을 하고 서인은 영어 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진우 대신 서인의 이름으로 비자 신청을 하게 되었다. - P236
진우는 서인을 때리고 싶었다. 뺨을 갈기고 그 작은 어깨를 잡아 마구 흔들고 싶었다. 둘 다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몇 주에 걸쳐서 같은 싸움을 계속하는 동안 진우에게 점점 더 명확하게 다가온 것은 서인이 돌아간다면진우의 비자가 취소되어버린다는 사실이었다. 헤드 셰프로 일하면서 457 비자를 얻어낸 것은 진우였지만 서류상에는 서인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진우는 서인의 파트너자격으로 거주를 허락받은 것뿐이었다. 진우가 영어 점수를 받고다시 비자를 신청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한번 비자가 취소되면 그후로는 다시 받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 - P239
진우는 주머니에 있는 오팔 반지를 생각했다. 진우는 서인에게 반지를 내밀며 무릎을 꿇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입장해 서인에게 입을맞춘 적도 없었다. 초음파 사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적도, 서인의 눈을 닮은 아이를 보며 경탄한 적도 없었다. 진우와 서인은 빛나는 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빛나는 순간 진우는 그들이 늘그것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절대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붉은 햇빛이 차 안에 가득 들어찼다. 진우는 온통 붉기만 한 세계를 바라보았다. - P253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당신이 이 소설을 읽으며 슬퍼하기를 바란다. 뒤뜰을 가꾸는 서인의 뒷모습을, 캥거루를 쇠막대로 내리치는 진우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아주기를 바란다. 지나가버린사랑을 온 힘을 다해 움켜쥐고 있는 이들을 안쓰럽게 여겨주기를 바란다. 우리가 사랑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언젠가는 사랑에 다가갈 수도있지 않겠냐고 말해주기를 바란다.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속 쓰겠다. 사랑을 쓰겠다. 손에 잡히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고. - P255
병든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아픈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자주 아픈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시름시름 앓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체력이 좋지 않은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알을잘 낳지 못하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알을 낳지 못하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살이 잘 찌지 않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체구가 작은 닭(쓸모없음/폐기처분), 근육이 너무 많은 닭(쓸모없음/폐기처분). 날고 싶은 닭(쓸모없음/폐기처분). 호기심이 많은 닭(쓸모없음/폐기처분). 고집이 센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질투가 많은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선한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산만한 닭(쓸모없음/폐기처분). 똑똑한 닭(쓸모없음/폐기처분). 그리 똑똑하지 못한 닭(쓸모없음/폐기처분). 화를 잘 내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잘 웃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잘우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소심한 닭(쓸모없음/폐기처분).
건강한 닭. 알을 잘 낳는 닭. 살이 잘 오른 닭. 남은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 P278
올해도 야생 철새의 분변에서 바이러스가 검출되었다. 그게 변이 바이러스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사실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바이러스는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이한다. 변이하고 또변이한다. 변이하고 또 변이하며, 환경에 잘 적응한다. 살아남기위한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철새도 살아남기 위해 이동한다. 먹잇감을 구하기 위해, 알을 낳기 위해, 추위를 견디기 위해. 국경을 넘어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는 철새들이니, 언제 어디서든 얼마든지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다고 해서 철새들이 모조리 죽는 것도 아니었다. 모조리 감염되는 것도아니었다. 물론, 참새나까치와 같은 텃새들도 마찬가지다. 모조리 감염되는 건, 철새가 아니라 축사의 닭들이었다. - P279
인간이 나와 인간을 만나 인간에 대해 사유하는 문학 인간이 인간에게 감동받는 문학, 인간에 대한 인간을 위한 인간만의 문학. 오직 인간만을 위한 문학, 인간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문학,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으로서의 문학. 인간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문학. 망각의 문학, 의인화. 닭에게 인격을부여하는 건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나를 붙잡아 쓸 수 없음. 문장을 이어갈 수 없음. 닭에게 인간의 목소리가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닭의 목소리가 부여될 수 있기를 바람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쓰기. - P290
죽음이 너무 많았다. 죽음이 너무 많아서 죽음인가보다 했다. 죽음이 너무 많고, 죽음이 여전히 너무 많아서 여전히 죽음인가보다 했다. 죽어가다가 죽음. 죽음이 너무 많아서 나도 죽나보다 했다. 나도 죽어가다가 언젠가 죽음. 그러나 닭들은 너무 빨리 죽어갔다. 알을 낳지 못해 죽고, 알을 많이 낳아서 죽고, 병들어서 죽고, 병들 수 있기 때문에 죽고, 스트레스 받아서 죽고, 끼여 죽고, 눌려 죽고, 깔려죽고, 먹히기 위해 죽고, 죽고 또 죽고, 빠르게, 빠르게 죽고 빠르게 죽으면, 그다음에는 더 빠르게 죽어야 했다. 너무 빨리 죽어서,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때가 있었다. 내가 아는 죽음보다 사실 더 많은 죽음이 있었다. 더 많은 죽음이 있다. 나는 내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많은 죽음들을 빌려 산다. - P296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모자이크로도 가려지지 않는 비극이 있었다. 음소거로도 지워지지 않는 소리가있었다. 처참하게 죽어가는 닭들의 비명. 죽음 앞에서 고통스럽게우는 사람들. 그러나 내가 목격한 것은 죽어가는 닭들이지 죽어가는 닭의 심정이 아니다. 울고 있는 사람이지 울고 있는 사람의 심정이 아니다. 나는 그들의 입장이 되어 글을 써보려고 노력하지만, 차마 쓸 수 없음. 이미 벌어진 비극에 대해서는 쓸 수 없음. 상상력이 조금이라도 동원되는 순간, 누군가의 고통은 허구가 될 수있다. 슬픔은 가짜가 될 수 있다. 그런 생각들이 나를 붙잡아 아무것도 쓸 수 없음. 소설을 쓰는 데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서 아무것도 쓸 수 없음. 어떤 끄덕거림, 토닥거림. 타자에 대한 공감과 이해는 상상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타자는 내가 상상한 타자이기도 하다. 타자를 함부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나를 붙잡아 아무것도 쓸 수 없음. 그러나 반드시 써야 한다면, 어디에선가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서는 쓸 수 있을지 모른다. 또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일에 대해, 어쩌면 앞으로 벌어질 수도 있는 일에 대해 누구라도겪게 될 수 있지만, 누구라도 겪어서는 안 될 일들에 대해. 새 인간 사태 이후의 모습을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비극은 현실이 아니라 소설이 되어야 한다는 가정하에 반드시 소설적 허구가 되어야 할 일들에 대해서는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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