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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쓰는 일은 괴물이 되려는 시간을 주저앉혀 가만가만 달래는 일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렇기에 ‘괴물‘이라는 단어의 문을 열면 연둣빛 새싹 하나가 빼꼼 고개를 내미는 것일 테다.

 

 

 

유월 육일

   현충일인 오늘, 비가 내린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버린 영혼들을 위해 버석버석한 가슴들을 위해 단비가 내린다. 애초의 계획이었다면 오늘 오후에 시작했을 열무 뽑기는 비 예보로 어제 아침에 뽑았고 열무들이 비를 맞을까 봐 쳐 놓은 비닐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열무를 다듬는다. 산 밑이라 서늘한 탓인지 열무는 싱싱했고 살이 통통 올라서 김칫거리로 최상급이다. 빗소리는 아침 버스에서 읽는 안희연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시를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한다.

  전망

  검은 개가 혀를 빼물고 죽어 있는 골목에서 한 사람이 길을 잃는다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에서 악마를 볼 때 나무의 척추가 부러진다

  빗소리는 세 사람을 옥상으로 데려가 죽음이 보낸 초대장을 읽어준다

  그리고

  나는 저 문장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씨앗 하나를 심었을 뿐인데

  벌어진 일들

  사람들은 내가 괴물을 길렀다고 했다

  이 모든 게 나의 손끝에서 시작된 일이었다고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없다면

  제발 자신을 죽여달라며 각목을 내미는 노인도 있었다

  아이들은 몰래 담장을 넘어와 화단의 모든 싹을 짓밟고 달아났다

  어떤 눈빛이었을까

  네 사람이 절름발이 개를 사정없이 걷어찰 때 다섯 사람의 집이 태풍에 날아가고

  여섯 사람이 불속에 갇힐 때 창고 문을 걸어 잠그며 들려오는 웃음소리

  그 씨앗은 나의 마음속에 있다

  얼굴을 보여준 적 없는 거울 앞에서

  심장에 악의가 스미는 속도를 측정하는 일

  씨앗에서 괴물까지의 거리를 오가며

  나를 망가뜨리려는 여름과 싸우고 있다

   내 안에도 '악의'가 자라고 있다고 가끔 생각한다. '확' 그냥~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하는 걸로 위로 삼기에는 민망한 욱한 어떤 충동들을 가지고 있다고. 어떤 '씨앗'은 '악의'로 자라고 어떤 '씨앗'은 '열무'로 자란다. 이왕이면 싱싱하고 풋풋한 열무로 자라자고 '전망'해본다.


 

시간의 손바닥 위에서


"다녀갔어."

그렇게 시작되는 책을 읽고 있었다 누가 언제것도 없이 덩그러니

다녀갔다는 말은 흰 종이 위에 물방울처럼 놓여있었고 건드리면 톡 터질 것처럼 흔들렸다

손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문밖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일기예보를 통해 날씨를 예견하듯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미래가 궁금하지 않다며 문을 닫았다 탁자위엔 읽다 만 책이 놓여 있고 내가 믿을 것은 차라리 이쪽이라고 여겼다 - P12

책을 믿는다니, 나는 피식 웃으며 독서를 이어갔다 "수잔은 십 년도 더 된 아침 햇살을 떠올리며 잠시 울었다." 나는 십 년도 더 된 햇살의 촉감을 상상하느라 손끝이 창백해지는 줄도 모르고

잠시란 얼마나 긴 시간일까 생각하느라 방 안에서 시계가 사라진 줄도 몰랐다

서둘러 다음 장을 펼쳐보았다 "침묵은 부리 잘린새처럼 사방에서 회오리쳤다." 부리 잘린 새를 상상하는 건 손목이 시큰거리는 일이었고 벽에는 전에 없던 붉은 얼룩이 생겨 있다

어쩌면 나는 문장과 문장 사이를 잇는 사람은 아 - P13

닐까 생각했고 참 이상한 하루라고 생각했지만 "큰비가 내렸다"라는 문장을 만났을 땐 이미 발이 물속에 잠긴 뒤였다

"건너왔어."

그렇게 끝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트를 탄 사람들이 지나간다 손전등을 들고 천천히 사방을 살피며 이곳엔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 P14

12월

겨울은 빈혈의 시간

피주머니를 가득 매단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것만 생각나

입김 한 번에 허물어지는 사람들이
이곳엔 너무너무 많다

너무라고 말하지 않고
너무너무라고 말하는 것
그래도 겨울은 눈 하나 끔뻑하지 않겠지

그래서 당신은 무엇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강도를 높여가는 겨울의 질문 앞에서
나는 나날이 창백해진다 - P16

이렇게 텅 빈 마음으로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기도가 기도를 밟고 오르는 세상에서
헐렁헐렁 산책하는 일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축축한 영혼을 나라고 부르는 일

다행히 겨울은 불을 피우기 좋은 계절이다
나에겐 태울 것이 아주 많고

재가 될 때까지 들여다볼 것이 있어서 좋다

"잘하고 못하는 게 어디 있어, 그냥사는 거지."
불 앞에서 다 식은 진심을 꿀꺽 삼킬 때 - P17

피는 반짝이는 것이다
혼자 왔다 혼자 떠나는 슬픔이 있어 오늘은 거룩한 밤이 된다
피주머니를 가득 매단 크리스마스트리가 그것을 말해준다 - P18

발만 남은 사람이 찾아왔다

해 질 무렵이었다

오늘도 이렇게 끝이구나
여긴 너무나 깊어 아무도 찾아올 수 없겠구나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발만 남은 사람이 찾아왔다
우리는 수심을 알아보기 위해
누군가 떨어뜨린 돌이라 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기울어지는 하늘을 보았다

마지막 나무가 뿌리 뽑혀
달의 뒤편으로 끌려가는 것을 - P24

없는 얼굴로 본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지만
밤을 배운 적 없어도 우리는 이미 밤을 알고 있었다

그의 발은 차츰차츰 썩어갔다
우리는 돌의 심장부 잠 속에서도 깨어 있어야 해요
쓰다듬으면 부서져 내렸다
이건 시간이라는 거예요 손을 넣어 흙장난을 해보세요

질문을
쌓았다 허물며

발을 두고 멀어져 가는 그를 보았다 - P25

주저앉으면서 가고 있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가라앉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믿음이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장면을 수시로 목격하였고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은 해결할 수 없는 것으두어야 해요
이따금 그의 말들은 바람에 실려 돌아왔다 - P26

모놀로그

길목마다 사나운 검은 개가 매여 있다. 이곳엔
나를 받아들여주지 않는 길들이 너무 많아서. 나는자꾸 서성이는 사람이 된다.

한 걸음이 한 글자가 되도록 하루가 한 문장이되도록, 내가 걸어온 시간이 어딘가로 전송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바닷가 마을에 사는 파란 눈의 아이가 떠오른다.
그 아이가 읽고 있는 책이 나의 삶이었으면 좋겠다.

방금 전까지 불가사리였고 고래였던 구름은 말한다. 그건 불가능한 믿음이라고. 나는 어떤 결말을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구름은 벌써 저만치 흘러가있고 - P80

검은 개를 피해서 걸어보기로 한다. 안녕,낯선사람을 지나 극빈관을 지나 식탁의목적을 지나 놀랄만두하군을 지나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목동이라는 이름의 고깃집이라는 사실. 사랑하는 것을 죽여야만 지탱되는 마음이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어쩐지 이 길은 나를속이는 쪽 같고

길목에는 사나운 검은 개가 매여 있다. 딛고 갈수밖에 없는 것이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신에게 편지를 쓰는 기분이 된다. 부디 저를 들여보내주세요. 개가 신이 아닐 이유는 없으나.
81 - P81

검은 개라고 생각하면 검은 개일뿐이다. 내가만든 공포가 컹컹 짖는 것을 본다. 개가 신이 아닌이유를 찾을 때까지. - P82

변속장치

그날의 벤치는 남몰래 발목을 바꿔치기했다젖은 옷을 말리려다가 실물의 반을 잃었다

요즘
나는 자주 나를 놓친다

막다른 골목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리는 개들과
도미노처럼 우르르 쓰러지는 가로수

그러나 개들은 언제나 목줄에 묶여 있고
가로수들은 규격을 벗어나 존재한 적이 없다

삶 쪽으로만 향하는 발과 죽음 쪽으로만 향하는 발
내가 잃어버린 것이 어느 쪽일까
저울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다 - P88

그것이 균형이라면

반신, 아직 돌아오지 못한 나를 위해
언제까지나 시간을 지체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사실에 관한 독법이 있다면
어떤 시간이든 반드시 썩는다는 것

절반에 대한 믿음만으로 식탁에 앉는다
우리는 사라지면서 있다 - P89

빚진 마음의 문장
-성남 은행동

그곳엔 두고 온 것이 많다. 무엇을 두고 왔냐고 물으면 글쎄,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가 훼손되었다고 느낄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가게 되는장소가 있다. 때로는 말을 타고 들판을 한없이 달리는 심정으로, 때로는 잠수정을 타고 심해 깊숙이 가라앉는 심정으로 다다르게 되는 곳. - P93

시간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내가 여전히 꼬옥 쥐고 있는 손, 할머니 없이는 나의 어떤 이야기도 시작될 수 없다. ‘할머니‘라는 단어의 문을 열면, 성남은행 주공아파트 베란다 가까이 앉아 먼 데 시선을두고 있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인다. 5대5 가르마를 타서 정갈하게 쪽 찐 머리, 분신 같은 반짇고리와 녹슨 가위, 늘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자세.
거동이 불편해도 절대로 남에게 벗은 몸을 보이려하지 않는 깔끔한 성미까지. 하루의 절반 이상을 창밖 보는 일로 보내던 할머니. 집에 도둑이 들어 엄마의 패물을 다 가져가도록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할머니, 오려진 사람 같던 할머니 자식을 앞세워 보내고 눈과 귀가 완전히 멀어버린 할머니, 면벽하는 할머니. 그렇게 백수를 사시고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한 날 몸 밖으로 팔랑팔랑 걸어 나가는 할머니 - P95

나는 유년이라는 단어 하나가 거느린 세계가 이토록 거대하다는 사실에 매번 놀란다. 한 단어가 거느린 숱한 고리와 고리와 고리, 그 끝을 계속해서따라가다 보면 갈고리에 걸린 채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나 자신을 반드시 마주하게 된다. 비단 유년이라는 단어뿐일까. 한 단어의 문을 연다는 것은 지금껏 발 들여놓은 적 없는 세계로 건너가는 일,  - P97

‘여름‘이라는 단어 속에는 얼마나 많은 적의가 감춰져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풀과 나무들이 저토록맹렬하게 자라날 수는 없다.

딛다‘라는 단어 속에는 얼마나 아픈 엎드림의 자세가 있는가. 한 인간을 담장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등을 밟고 가라고 끄덕이는 눈빛이 있었을 것이다. 담장 안이 불타고 있다면 더더욱.

‘밤‘이라는 단어는 땅속에 묻어둔 구슬 같다. 손을 더럽히지 않으면 꺼낼 수 없다. 손을 더럽히더라도 꺼낼 수 없다. 그건 구슬이 아니라 밤의 눈동자.
밤이라는 짐승의 눈. - P98

조금씩 뒤로 뒤로 걸어가 지구가 잘 보이는 곳에 의자를 내려놓고 앉아 있으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한 인간 존재가 먼지보다작은 것임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태초의 시간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시간은 참으로 까다로운 성미를가졌다. 시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일으킬 수도 허물어뜨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시간은 언제 괴물이 되고, 어떻게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는가.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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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더니 거북이는 대뜸 질문이잘못됐다고 하면서, 그 대신 <어디서 오는 길인지> 물어야 한다는 거야. 거북이가 느릿느릿 걸어가는데도,
달팽이의 눈에는 들판에 자란 풀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어. 계속 길을 가던 중, 거북이는 뜬금없이 자신이 인간의 망각으로부터 오는 길이라고했어.
「망각이 뭐죠? 그리고 전 인간들이 뭔지도 몰라요.」달팽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어. - P38

거북이가 말했어. 그러자 달팽이는 우선달팽이들이 왜 그렇게 느린지 알고 싶었고, 또 자기만의 이름을 갖고 싶다고 말했단다. 하늘에서 떨어지는물은 비, 가시가 난 나무의 열매는 블랙베리, 그리고벌집에서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것은 꿀, 이렇게 다들이름이 있는데, 자기는 왜 이름이 없느냐는 거였지. 그리고 다른 달팽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영 못마땅해할 뿐 아니라 자기를 들판에서 쫓아내겠다고해서, 자기의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는 절대로 들판에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는 말까지 덧붙였어.
그사이 거북이는 달팽이에게 해줄 말을 찾고 있었단다. 오랜 생각 끝에 그는 인간들과 함께 살면서 배운 것을 알려 주기로 했어. 가령 <그렇게 빨리 하려고서두를 필요가 있을까?>라든지  - P40

거북이와 달팽이는 해가 중천에 뜬 무렵에야 가장나이 많은 달팽이가 이 세상의 끝이라고 하던 들판 가장자리에 도착했단다. 그곳은 대패로 밀어 놓은 듯 매끈했을 뿐만 아니라, 미처 떠나지 못한 어둠의 조각이바닥에 달라붙은 것처럼 검게 빛나고 있었지. 그리고주변에 있는 풀과 야생화를 모두 뒤덮으면서 넓게 펼쳐져 있었어.
검은색의 띠 모양으로 길게 이어진 곳 맞은편으로인간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단다. 그들 중 몇몇은 땀을뻘뻘 흘리면서 달팽이의 눈에 돌같이 보이는 것을 차곡차곡 쌓고 있었지. 그 광경을 보고 놀란 달팽이는 인간들이 온종일 벌집을 짓는 꿀벌만큼이나 부지런하다 - P43

그러다 따스한 아침 햇살이 얇은 껍질 속으로 스며들면서 달팽이는 잠에서 깨어났어. 그는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목을 뺀 다음 눈이 달린 더듬이로 사방을 둘러보았지. 그런데 놀랍게도 옆에서 자고 있던거북이가 온데간데없는 거야.
옆으로 누운 풀잎들을 눈으로 좇다 보니 거북이가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지. 남매나무가 있는 곳과 반대 방향이었어.
고마워요, <기억>님. 당신에 대한 추억을 마음속에영원히 간직할게요.」 달팽이는 친구들이 있는 곳을 향해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어. - P49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질 무렵, 달팽이는 길을 가던 도중에 만난 딱정벌레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 주었어. 그러자 딱정벌레들도 달팽이의 느린 움직임에고마움을 표했지. 만약에 달팽이가 도마뱀이나 메뚜기처럼 빨랐다면 그 장면을 보지도 못했을뿐더러, 자기들에게 알려 주지도 못했을 테니까 말이야.
말을 마치자마자 딱정벌레들은 서둘러 굴에서 빠져나와 공 모양의 식량을 굴리며 멀어져 갔어.
이제 어엿한 이름도 갖게 되었고, 달팽이들이 왜 그렇게 느린지도 알아냈으니, 반항아는 바라던 목적을다 이룬 셈이었지. 그런데 이제 너무 지쳐서 한 발짝도움직일 수가 없었어. 그래서 달팽이는 친구들에게 가기 전에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단다. 위험이 닥쳐오는 걸전혀 모르고 있는 달팽이들은 그 순간에도 관습대로납매나무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함께 밥을 먹고 있었지. 몸을 움츠려 껍질 속으로 들어가려던 달팽이는 들판의 밤 동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 - P55

어엿한 이름도 갖게 되었고, 달팽이들이 왜 그렇게느린지에 대해 점차 많은 걸 깨닫게 된 반항아는, 이제다시 잠을 자려고 준비를 했단다. 그런데 눈을 감기만하면 수많은 물음들이 연이어 떠오르는 바람에 쉬이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친구들이 행여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으면 어쩌지?
납매나무 아래 모여 있는 달팽이들이 내 말을 정신 나간 소리로 받아들이면 어쩐다지? 전에 내가 달팽이들이 왜 그렇게 느린지 알고 싶고, 이름을 갖고 싶다고했을 때처럼 말이야. 그 반대로 그들이 내 말을 믿고,
우리의 보금자리, 《민들레 나라》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우린 어디로 가야 되는 거지?> - P57

달팽이들은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풀밭을헤치면서 가고 있었어. 하지만 다들 침울한 표정이었지 마음이 너무 무거웠던 탓인지,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껍질이 천근만근 무겁게만 느껴지는 거야. 다들 서글프고 불안했지만,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않았지. 꽤나 오래 걸었는지 이젠 뒤를 돌아봐도 정든납매나무가 보이지 않았어. 그런데 그때 어떤 달팽이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자세히 살펴보니, 지금 자기들이 들판 끄트머리 쪽, 그러니까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가고 있더라는 거야.
- P67

「어르신들의 말씀이 맞아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새로운 민들레 나라를 찾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요.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여기서얼마나 더 가야 되는지도 모르니까요. 더구나 가는 도중에 우리가 어떤 위험에 부딪힐지, 그리고 여기 있는모든 분들이 다 같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찾는 새로운 민들레 나라는 앞에 있지, 뒤에 있지는 않다는 점이에요.
어떤 일이 있어도 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저와 함께 가든지, 아니면 우리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든지 알아서 결정하세요.」말을 마친 반항아는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앞으로 나아갔단다. 얼마 지난 뒤, 뒤를 돌아봤더니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지. 모든 달팽이들이 뒤를따라오고 있었던거야. 하지만 반항아는 뒤를 따라오는 많은 달팽이들을 보고서도 뿌듯하거나 행복하지않았어.  - P71

길 저쪽으로부터 뭔가가 커다란 눈에서 강렬한 빛을 뿜어내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던 거야. 그 순간눈이 부셔 앞을 볼 수가 없었지만 무시무시한 짐승이그들 곁을 쏜살같이 지나갔어. 그런데 그 직후 주변을살펴보니 달팽이들 여럿이 보이지 않는 거야.
모두들 공포에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어. 반항아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있을 수도 없었지. 그래서 그 무시무시한 괴물이 또오기 전에 어서 움직이라고 달팽이들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단다.
다들 반항아의 지시에 따르긴 했지만 겁에 질린 터라 평소처럼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어. 그냥 남아 있을걸. 공연히 따라 나서서 사서 고생을 하는구먼.」 달팽이들은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투덜거렸지. 힘겹게길을 건넌 그들은 냉기가 도는 둥그런 동굴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곳에는 가는 물줄기가 쫄쫄 흐르고 있었어.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큰 위기를 넘기고나자 그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기 시작했지 - P79

생전 처음 하늘 높이 올라간 달팽이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신기한 장면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지. 제일먼저 빙긋 웃으며 환한 얼굴을 드러내는 해님이 보였어. 그리고 용기를 내서 눈이 달린 더듬이를 껍질 밖으로 빼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지. 하지만 저 아래로 보이는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참혹했단다. 그들을 내쫓은 시꺼먼 길이 들판의 대부분을 뒤덮어 버리고 만 거야. 그들이 살던 아름다운 보금자리가 인간들 때문에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거지.
수리부엉이는 한참 동안 하늘 위를 날아다녔어. 처음 하늘을 나는 달팽이들에게는 굉장히 긴 시간처럼느껴졌지. 하여간 땅과 나무들, 그리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개울이 그들의 눈앞을 빠르게 지나가는데, 현기증이 다 날 지경이었어. 그도 그럴 것이 들판에서 가장느림보인 달팽이들로서는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광경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을 테니까 말이야.  - P81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숲속으로 들어간 달팽이들은 온갖 종류의 낙엽으로 뒤덮인 땅을 지나가고 있었어. 꿀과 같은 빛깔을 띠고 있는 낙엽들이 있는가 하면, 거무튀튀한 색깔의 낙엽들도 있었지. 그리고 원래의 모습을 온전하게 간직한 낙엽도 있었지만,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부서져 버린 낙엽도있었어. 희한하게도 풀은 보이지 않더군. 다만 잘린나무의 굵은 밑동 주변으로 관목들과 키 작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걸 봐서는 예전에 이 자리에서 과일들이 많이 열렸던 모양이야. 월귤나무였을지도 모르지.
달팽이들은 그 열매를 먹었을 때 입안에 감돌던 맛이기억 속에 떠오르자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단다.
- P83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더듬이를 비빈 다음, 번식을 위한 준비를 하지. 짝짓기를 할 때 먼저 한달팽이가 다른 달팽이의 몸속에 아주 작은 양의 정자를 넣어 주고 나면, 곧바로 그 달팽이가 첫 번째 달팽이 몸속에 정자를 넣어 준단다. 그래서 두 달팽이가모두 수정란을 갖게 되는 셈이지. 그러고 나면 흙 속에 구멍을 파서, 둥근 집을 만들고 그 안에 알을 낳는거야. 굳이 땅속 깊이 구멍을 파는 이유는 부화를 위해서 적절한 습도와 그늘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포식자들로부터 알을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반항아는 그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적으로알아차렸지. 우선 짝짓기를 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와먹을 것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어.
나무와 초록색 이끼들이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그의 눈앞으로 지나갔어. 갈수록 몸이 무거워지는데, 수리부엉이가 말한 그 빈터는 아직 까마득하게만 보이는 거야.
그들은 숲에 짙은 어둠이 깔릴 때까지 계속 걸어갔어. 그토록 짙은 어둠을 본 적이 없던 달팽이들은 눈이 달린 더듬이를 길게 빼고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별빛조차 보이지 않았단다. - P85

살아남으려면 한시라도 빨리 수리부엉이가 말한 빈터로 가는수밖에 없었어.
달팽이들은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반항아의뒤를 따라갔단다. 하지만 너무 굶주리고 지친 나머지어떤 달팽이들은 마지막 의욕마저 잃고 말았지. 그렇게 계속 가느니 차라리 껍질 속으로 기어 들어가 꿈과희망을 모두 버리고 영원히 잠들고 싶었던 거야.
「저기서 민들레 나라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린 반드시 민들레 나라로 가게 될 겁니다. 반항아는마지막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어.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갈 것이라는 강렬한 의지가 그의 말 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단다. - P88

달팽이들은 마침내 꿈에 그리던 숲의 빈터에 도착했단다. 하지만 추위가 그들을 앞질러 와 있었던 탓에, 풀에는 이미 서리가 뽀얗게 앉아 있었지.
반항아는 그들이 나뭇잎 아래에서 며칠 밤을 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어.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정든 납매나무에서 함께 떠난 달팽이들 중 절반도 남지 않았다는 거야. 결국 젊은 달팽이들만 끝까지 그를 따라온셈이지. 그런데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더듬이를 길게빼고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그들의 눈에 보이는 거라곤 서리로 덮인 벌판뿐이었어. - P89

우로 인해 쓰러진 것 같았어. 달팽이들은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그곳을 향해 다가갔단다. 가는 동안,
반항아는 수시로 고개를 돌려 그들이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했지. 달팽이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끈적끈적한 액체가 허연 얼룩처럼 남아 있었어. 그건 그만큼 힘이 든다는 증거였지.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니 그 나무둥치는 달팽이들이 지내기에 안성맞춤이었어. 우선 그 아래로 들어가기도 힘들지 않은 데다, 그들이 사는 데 필요한 온기와그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주변으로 아직 서리를 맞지 않은 풀 몇 포기가 자라고 있었거든. 물론 달팽이들의 입맛에 딱 맞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영양가가 높은풀이었지. 그들은 배가 불러 더 이상 먹지 못할 때까지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풀을 씹어 먹었단다.
달팽이들은 새 보금자리에서 첫 밤을 보냈어. 납매나무 아래에서 편히 살던 때가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단다. 지칠 대로 지친 탓에 달팽이들은 그곳에서계속 살지, 아니면 더 나은 집을 찾아 떠날지 더 이상생각할 여력이 없었어. 반항아는 오래간만에 푹 자고싶은 생각밖에 없었지. 그래서 천천히 껍질 속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그는 달팽이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허 - P90

연 점액들이 서리 위에서 반짝거리면서 길처럼 쑥이어진 모습을 바라보았어. 그리고 생각했어. <이것은고통의 흔적이지만, 동시에 희망의 자취이기도 해그는 당장 달팽이들을 불러 그들이 남긴 자국을 보도록 했단다.
그사이 쉴 새 없이 눈과 서리가 내리고, 추위가 몰아닥쳤지만 달팽이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겨우내깊은 잠에 빠져 있었어. 그렇게 자는 동안에는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숨을 쉬기 위해, 그리고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심장이 뛰게 하거나,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자라기 위해 굳이 힘을 쓸 필요가없었지.
시간이 흘러 달팽이들은 마침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났단다. 그들이 껍질 밖으로 천천히 몸을 내밀었을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바로 반항아였어. 그는 눈이 달린 더듬이로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지. 높이 자라난 풀들이 그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고, 활짝 핀 야생화들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어. 그 정도면 달팽이들이 한동안 먹고도 남을 것 같았지. 그런데 그의 시선은 한참 전에 달팽이들이 지나가면서 남긴 허연 자국을 향하고 있었단다. - P92

「저기 좀 보세요.」 반항아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어.
놀랍게도 길처럼 이어진 허연 자국을 따라 숲의 제일 앞에 늘어선 나무들에 이르기까지 민들레 이파리가 무수히 돋아나 있었단다.
「결국 해내고 말았구나! 우리를 무사히 민들레 나라로 데려왔으니 말이야.」 어떤 달팽이가 감격에 겨워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어.
「아니에요.」 반항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지. 여러분을 이곳으로 데려온 건 제가 아니에요. 전에 이름을갖고 싶다고 무작정 납매나무를 떠난 적이 있잖아요.
들판을 돌아다니면서 전 정말로 많은 걸 깨우칠 수 있었답니다. 특히 느림의 중요성을 말이죠. 그리고 아주힘든 경험이긴 했지만 이번에도 아주 소중한 사실을하나 깨닫게 됐어요. 민들레 나라는 저 먼 곳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간절한 마음속에 있었다는 걸 말이에요. 말을 마친 반항아는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풀을먹기 위해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들판으로 향했단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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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 관해서......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의 일이다. 우리 가족 모두가정원에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데, 손자 다니엘이 달팽이 한 마리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녀석이 나를 돌아보더니,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달팽이는 왜 이렇게 느리게 움직이는 거예요?」뜻밖의 질문에 당황한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한동안 우물쭈물했다. 일단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고대답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언제일지는 몰라도 꼭 대급해 주겠다고 말이다.

달팽이들이 왜 그렇게 느린지 알고 싶어 하던 달팽이는 여느 달팽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없었어. 그런데 그 달팽이는 그 문제 때문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게 아니었단다. 다른 문제라면 몰라도 이름이 없다는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야. 나이 많은 달팽이들은 녀석이 왜 그렇게 이름을 갖고 싶어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물어보면 그 달팽이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납매나무는 그렇게 납매나무라고 부르잖아요. 가령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몸을 숨길 때, 우린 납매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한다고 하죠. 그리고 맛있는 민들레도 그렇게 민들레라고 부르잖아요.  - P15

수리부엉이를 만난 후, 달팽이들이 왜 그렇게 느린건지 알고 싶어 하던 달팽이는 또다시 느릿느릿, 아주느릿느릿하게 납매나무가 있는 쪽으로 가고 있었어.
그러던 중, 그들의 말로 <관습>이라고 하던 것에 몰두하고 있는 달팽이들을 만나게 됐단다.
그 일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어. 어느 날, 갖가지 색깔의나뭇잎들이 바람에 날려 들판으로 떨어졌다는 거야.
모양새가 반듯하고, 가장자리도 매끈한 게, 그들이 여태껏 본 나무나 풀의 이파리들과는 전혀 달랐어. 그나뭇잎들은 한동안 바람을 타고 떠다니면서 춤을 추듯 하늘하늘 나부끼다가, 결국엔 물기에 젖어 축축한 - P23

단지 느린 이유를 알고 싶었고, 이름을 갖고 싶었을뿐인데, 할아버지 달팽이가 윽박지르자 달팽이는 그만 풀이 죽고 말았어. 더군다나 주변에 있던 달팽이들중 자기편을 들어 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야. 심지어 몇몇 달팽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어. 할아버지 말이 맞고말고. 저 자식만 사라지면 우리도 좀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 말이야.」바로 그 순간, 달팽이는 목을 길게 빼더니, 눈이 달린 더듬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주변에 있던 달팽이들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어. 그러곤 작디작은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말을 했단다. - P28

「여러분의 생각이 정 그렇다면, 제가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달팽이들이 왜 느린 건지 알게 되고 제가 이름을 갖게 되는 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거예요.」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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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공원은 이제 이 도시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다. 내 방이 있는 부모의 집보다도 기영의 집보다도 나는 공원이 좋았다. 좋아하는 장소가 생긴다는 것은 마치 인생에경력이 쌓이는 듯한 기분이어서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했다. 나는 공원이 좋았다.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계절을 느끼는 것.
다들 활기차 있는 것, 배드민턴을 치다가 실수를 해도 웬만해서는 웃어넘기는 것,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노부부들을 보는 것. 가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어슬렁거리는 수상쩍어 보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개들, 공원에는 많은 개들이 돌아다녔다. 들개가 아닌 강아지들이벤치에 앉아 있으면 산책을 나온 강아지들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 P153

사람들이 나를 남자로 착각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나는 백칠십오 센티미터의 키에 머리가 짧고 화장도 하지 않는데다 몸매가드러나지 않는 옷을 주로 입었다. 길을 가는데 총각이나 아저씨,
하고 나를 부르며 길을 묻는다든가, 찜질방에서 파란색 옷을 주며 남자 탈의실로 안내를 한다든가 하는 일들이 있었다. 언젠가인도로 여행을 갔을 때 함께 간 친구는 예외 없이 ‘madam‘으로불렸지만 나는 때때로 ‘sir‘로 불렸다. 한참이나 내게 호객행위를하던 릭샤꾼이 포기하고 돌아서며 근데 너 남자야, 여자야? 하고대놓고 묻던 일도 있었다. 그래서 익숙했다. 남자로 오해당하면기분 나쁘지 않으냐고 누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오해당하는 건괜찮았다. 때로는 안전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성가신 건 내가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였다. 어떤 사람은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 사과를 했는데 그것도 좀 웃긴 일이지만 그건 그런대로 점많은 편이랄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동그란 눈을 하고 찬찬히 내얼굴을 뜯어본 뒤 가슴을 뚫어져라 봤고, 어떤 사람은 왜 그러고다니느냐고 물어봤으며, 어떤 사람은 조언을 했다. 머리를 기르라거나 화장을 하거나 좀더 여성스러운 옷을 입어보라거나 말할 때 솔 톤을 내는 것이 좋다는 식이었다. 나를 위로한답시고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도 있었다. 왜들 그런 오해를 하지?  - P155

그 비명은 오래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비명으로 말하려고 했던 스무 살 때였다. 헌책 값을 잘 쳐준다는 책방에 가려고 무거운 짐을 겨우 들고 버스에 탔다. 다행히 자리가 하나 나서 앉았지만 책이 잔뜩 든 가방을 둘 데가 없어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다리가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잠깐 졸았다. 마비된 허벅지가그리고 또 아랫배가 이상하게 꿈틀거리는 것 같은 기분에 잠에서깨서 내 배를 내려다보았을 때 거기에는 손이 하나 있었다. 이게뭐지. 꿈인가. 내가 멍하니 내려다보는 내내 손은 책이 든 가방을가림막 삼아 내 배를 주무르고 있었다. 나는 손을 따라 옆자리로시선을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잠깐 멈칫하더니 태연히 손을 거두어갔다. 이게 뭐지. 이게 뭐야? 씨발놈이 인간처럼 - P165

생겨가지고 미친 새끼가.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내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눈길이 무심히 남자의 손에 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인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혹시 다 보고 있었나. 보면서 아무 제지도 하지 않았나. 나란히 앉아 있어서 남자와 내가 아는 사이일 거라고 여겼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나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친 새끼들이 포르노에 뇌가 절여져서 제대로 된 사리 분별을 못하나? 하지만 나 역시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서서히온몸이, 뇌까지도 마비되는 것 같았다. 나도 내 앞에 선 인간과 똑같은 방관자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남자를 해할 방법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게 정상적인 사고방식인가? 타인을 해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정상적인 걸까. 나는 왜 이런 순간에도 자기검열을 하고 있다. 생각을 멈추고 기사에게 외쳐야 한다.
경찰을 불러주십시오! 이 남자가 저를 성추행했습니다!
잠시만요. 내릴게요.
내가 혼란해하는 사이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는 내가자리를 피할 새도 없이 앞좌석과 내 무릎 사이의 비좁은 틈을 통과하며 팔꿈치로 내 머리를 쳤다.
미안합니다.
남자는 내 얼굴을 돌아보며 웃는 낯으로 사과했다. 그다음의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난다. 나는 끙끙대며 들고 탔던 가방을 번쩍 들어 남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무기로 삼을 만한것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목이 꺾여서 죽어버렸 - P166

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목이 꺾이지도 죽어버리지도 않고 나를 돌아봤다. 남자보다 다른 승객들이 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학생, 왜 그래요? 왜 그랬지. 남자가 나를 향해 웃었기 때문에. 아니 실수로 내 머리를 쳤기 때문에. 아니 남자가 내가 잠든 틈을 타 내 배를 주물렀기 때문에. 물론 그것 때문이다. 남자가 나를 폭행했기 때문에. 나는 그제야 비명을 질렀다. 나는 늘 늦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할 시간이 필요하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지 결정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 모든 과정은 아주 더디게 진행되고 그만큼 반응 속도도 늦다. 나는 때맞춰 지르지 못한 늦은 비명을 질렀다. 비명만큼 압축적으로 많은 의미를담고 있는 언어가 있을 수 있을까. 비명은 나의 언어였다. 그 순간내게 가장 논리적이고 합당한 말이었다. 나는 사력을 다해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돌아보았고 무언가를 직감한 듯 남자가 열린 하차 문으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사람들도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았다. 순식간에추론해냈다. 너무 흔하고 상투적인 일이었으니까. 계속 반복되는일이었으니까.
- P167

나는 기영이 판정관이나 심문관처럼 굴지 말고 그냥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줬으면 했다. 팔짱을 끼고 어디 책잡을 데가 없나 따져보기 전에 일단 경청부터 해줬으면 했다. 실수 하나에 나를 의심하지 말고 우선은 믿어줬으면 했다. 하지만 나조차도내 멍청함에 화가 났다. 너무 화가 나서, 모든 걸 만회하고 싶어서 더 필사적인 사람이 되었다. - P168

예를 들어 사랑을 속삭이는 행위는 남녀 간의 일로 한정되어 있었다. 질투도 부부나 사랑하는 이성 사이에서나 가능했다. 여성 비하적인 표현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런 표현들은우리가 살아온 시대나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떠올려보면 크게 놀지는 않았다. 동성애자의 존재를 지우고 여성의 지위를 깎아내리는 일은 실제 삶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났으니까. 당연하게도,
국어사전은 한국사회를 정직하고 성실하게 반영한 표상이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리고 개에 대한 표현들을 마주칠 때에도 화가 났다. 만약 지구에 대한 정보가 없는 어떤 외계인이 한국인의 생태를 파악하기위해 국어사전을 분석한다면 개에 대해 뭐라고 할까? 인간을 잘따르고 영리하긴 하나 인간에 비하면 아주 열등하고 하찮은 개 발싸개 같은 생물이라 판단할지도 모른다. 물론 비속한 의미를 담을때 쓰이는 ‘개‘가 모두 다 개소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발음이동일한 탓에 개를 떠올리지 않기란 쉽지 않고 개는 자기 것이 아닌 의미를 거듭 뒤집어쓰면서 그것의 진짜 주인으로 오해당한다. - P177

대담하게 어떤 일을 도모하자고 제안할 때도 있었다.
때로는 비장하게까지 여겨져서 사정을 잘 모르는 미애조차 숙연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런 모습들이 놀랍고 얼마간 감동적으로 다가올 때가 없지 않았으나 미애의 눈에 점점 더 또렷하게보이는 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들의 열망이었다. 그들에겐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고, 그렇게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 확신을 지켜나갈 여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이 자신을 그 모임에 끼워준 진짜 이유라는 것을미애는 모르지 않았다.
세아는 북극에 사는 곰 아저씨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플라스틱 섬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민이가 방법을알 것 같은데?
- P199

그건 희망의 모습과 비슷했다.
삶에 기대를 품는 것이 번번이 자신을 망친다는 결론에 이른뒤로 미애는 가능한 한 희망을 가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다.
노력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삶은 언제나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쏟아부어야만 했고, 그래서 희망을 부풀리는 능력이 불필요하게 발달한 거라고, 자칫하다간 다시금 눈덩이처럼 커진 희망 아래 깔려 죽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에게 수시로 경고하는 것만은 잊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금 희망이라고 할 만한 게 생겨나고 있었다. 아니,
사는 동안 그런 게 절실하지 않은 때가 한 번도 없었다는 걸 미애는 모르지 않았다. - P201

미애는 어떻게든 문을 열 수 있는 말을 찾고 싶었고, 그럴수록어떤 말로도 굳게 닫힌 저 문을 열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커졌다.
그럼에도 미애는 계속 말했다. 나중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문이 열릴 거라는 기대와 결코 문이 열리지않을 거라는 체념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마음이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고 나서야 미애는 돌아섰다. - P216

나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희망이 있다. 희망을 가져라. 그렇게 말할 때의 확고하고 단호한 표정이 아니라, 주저하고 망설이면서도 어쨌든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다. 희망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 없으면서도 일단 가봐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의변화. 그 변화가 불러오는 찰나의 활력과 활기를 붙잡고 싶었던것 같다.
희망이라는 것은 지금은 없는 어떤 것을 상상하는 힘이고 그것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마침내 어디에 다다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자세에 따라, 잠깐 고개를 돌리면또 달라지고 마는 직진의 방향처럼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논리와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고, 때때로 무모하고 터무니없기까지 한 어떤것. 그러니까 희망은 그저 아주 작은 가능성을 담보한 에너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 P221

진우뿐만 아니라 한인 식당, 한인 슈퍼, 한인 여행사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은 모두 그런 대우를 받으며 일했다. 457 비자를 신청해준다는 명목으로 주에 오십 시간씩 일을 시키면서 주급으로 백불만을 주는 업체도 있었다. 이 년을 무상으로 일해주고 비자를얻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진우의 사장은 악덕 업주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들 했다. 진우 역시 부당한 처우에 불평하기보다는 자신이 비자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쁘게 생각했다.
457 비자로 이 년을 일하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었다. 그러면 많은 것이 달라질 거였다. 급여는 적어도 두 배, 경력을 고려하면 세 배가 될 터였고 법정 유급휴가사 주에 공공 의료와 공교육이 무료였다. 진우는 한국에서는 누릴 수 없는 것들을 약속하며서인을 설득했다.
한국에서 혼인신고만 하고 돌아온 이후에도 문제가 남아 있었다. 457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영어 점수가 필요했는데 주에칠십이 시간씩 일하는 진우로서는 공부할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필요한 점수를 받으려면 일을 그만두고 몇 달간 시험 준비에 전념해야 했는데, 진우의 시급이 서인보다 높았고 홀에서 영어로 서빙을 하는 서인의 영어 실력이 진우에 비해 훨씬 나았으므로, 진우가 일을 하고 서인은 영어 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진우 대신 서인의 이름으로 비자 신청을 하게 되었다. - P236

진우는 서인을 때리고 싶었다. 뺨을 갈기고 그 작은 어깨를 잡아 마구 흔들고 싶었다. 둘 다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몇 주에 걸쳐서 같은 싸움을 계속하는 동안 진우에게 점점 더 명확하게 다가온 것은 서인이 돌아간다면진우의 비자가 취소되어버린다는 사실이었다.
헤드 셰프로 일하면서 457 비자를 얻어낸 것은 진우였지만 서류상에는 서인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진우는 서인의 파트너자격으로 거주를 허락받은 것뿐이었다. 진우가 영어 점수를 받고다시 비자를 신청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한번 비자가 취소되면 그후로는 다시 받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 - P239

진우는 주머니에 있는 오팔 반지를 생각했다. 진우는 서인에게 반지를 내밀며 무릎을 꿇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입장해 서인에게 입을맞춘 적도 없었다. 초음파 사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적도, 서인의 눈을 닮은 아이를 보며 경탄한 적도 없었다. 진우와 서인은 빛나는 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빛나는 순간 진우는 그들이 늘그것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절대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붉은 햇빛이 차 안에 가득 들어찼다. 진우는 온통 붉기만 한 세계를 바라보았다. - P253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당신이 이 소설을 읽으며 슬퍼하기를 바란다. 뒤뜰을 가꾸는 서인의 뒷모습을, 캥거루를 쇠막대로 내리치는 진우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아주기를 바란다. 지나가버린사랑을 온 힘을 다해 움켜쥐고 있는 이들을 안쓰럽게 여겨주기를 바란다. 우리가 사랑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언젠가는 사랑에 다가갈 수도있지 않겠냐고 말해주기를 바란다.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속 쓰겠다. 사랑을 쓰겠다. 손에 잡히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고. - P255

병든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아픈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자주 아픈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시름시름 앓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체력이 좋지 않은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알을잘 낳지 못하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알을 낳지 못하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살이 잘 찌지 않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체구가 작은 닭(쓸모없음/폐기처분), 근육이 너무 많은 닭(쓸모없음/폐기처분). 날고 싶은 닭(쓸모없음/폐기처분). 호기심이 많은 닭(쓸모없음/폐기처분). 고집이 센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질투가 많은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선한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산만한 닭(쓸모없음/폐기처분). 똑똑한 닭(쓸모없음/폐기처분). 그리 똑똑하지 못한 닭(쓸모없음/폐기처분). 화를 잘 내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잘 웃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잘우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소심한 닭(쓸모없음/폐기처분).

건강한 닭. 알을 잘 낳는 닭. 살이 잘 오른 닭. 남은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 P278

올해도 야생 철새의 분변에서 바이러스가 검출되었다. 그게 변이 바이러스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사실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바이러스는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이한다. 변이하고 또변이한다. 변이하고 또 변이하며, 환경에 잘 적응한다. 살아남기위한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철새도 살아남기 위해 이동한다. 먹잇감을 구하기 위해, 알을 낳기 위해, 추위를 견디기 위해. 국경을 넘어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는 철새들이니, 언제 어디서든 얼마든지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다고 해서 철새들이 모조리 죽는 것도 아니었다. 모조리 감염되는 것도아니었다. 물론, 참새나까치와 같은 텃새들도 마찬가지다. 모조리 감염되는 건, 철새가 아니라 축사의 닭들이었다.  - P279

인간이 나와 인간을 만나 인간에 대해 사유하는 문학 인간이 인간에게 감동받는 문학, 인간에 대한 인간을 위한 인간만의 문학. 오직 인간만을 위한 문학, 인간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문학,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으로서의 문학. 인간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문학. 망각의 문학, 의인화. 닭에게 인격을부여하는 건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나를 붙잡아 쓸 수 없음. 문장을 이어갈 수 없음. 닭에게 인간의 목소리가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닭의 목소리가 부여될 수 있기를 바람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쓰기. - P290

죽음이 너무 많았다. 죽음이 너무 많아서 죽음인가보다 했다.
죽음이 너무 많고, 죽음이 여전히 너무 많아서 여전히 죽음인가보다 했다. 죽어가다가 죽음. 죽음이 너무 많아서 나도 죽나보다 했다. 나도 죽어가다가 언젠가 죽음. 그러나 닭들은 너무 빨리 죽어갔다. 알을 낳지 못해 죽고, 알을 많이 낳아서 죽고, 병들어서 죽고, 병들 수 있기 때문에 죽고, 스트레스 받아서 죽고, 끼여 죽고,
눌려 죽고, 깔려죽고, 먹히기 위해 죽고, 죽고 또 죽고, 빠르게, 빠르게 죽고 빠르게 죽으면, 그다음에는 더 빠르게 죽어야 했다. 너무 빨리 죽어서,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때가 있었다. 내가 아는 죽음보다 사실 더 많은 죽음이 있었다. 더 많은 죽음이 있다. 나는 내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많은 죽음들을 빌려 산다. - P296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모자이크로도 가려지지 않는 비극이 있었다. 음소거로도 지워지지 않는 소리가있었다. 처참하게 죽어가는 닭들의 비명. 죽음 앞에서 고통스럽게우는 사람들. 그러나 내가 목격한 것은 죽어가는 닭들이지 죽어가는 닭의 심정이 아니다. 울고 있는 사람이지 울고 있는 사람의 심정이 아니다. 나는 그들의 입장이 되어 글을 써보려고 노력하지만, 차마 쓸 수 없음. 이미 벌어진 비극에 대해서는 쓸 수 없음. 상상력이 조금이라도 동원되는 순간, 누군가의 고통은 허구가 될 수있다. 슬픔은 가짜가 될 수 있다. 그런 생각들이 나를 붙잡아 아무것도 쓸 수 없음. 소설을 쓰는 데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서 아무것도 쓸 수 없음. 어떤 끄덕거림, 토닥거림. 타자에 대한 공감과 이해는 상상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타자는 내가 상상한 타자이기도 하다. 타자를 함부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나를 붙잡아 아무것도 쓸 수 없음. 그러나 반드시 써야 한다면, 어디에선가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서는 쓸 수 있을지 모른다. 또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일에 대해, 어쩌면 앞으로 벌어질 수도 있는 일에 대해 누구라도겪게 될 수 있지만, 누구라도 겪어서는 안 될 일들에 대해. 새 인간 사태 이후의 모습을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비극은 현실이 아니라 소설이 되어야 한다는 가정하에 반드시 소설적 허구가 되어야 할 일들에 대해서는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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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내가 진심으로 감탄해 마지않은 건 펜스 너머로 펼쳐진 풍경이었다. 비탈을 올라올 때는 그저 암벽처럼 보였던 축대의 뒤편으로 숲이 우거져 있었던 것이다. 조금씩 다른 농도로 이루어진 초록의 다발을 가만히 눈에 담고 있자니 서울 근교의 펜션이나 산장으로 캠핑을 온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왜 이런 풍경을 보지 못한 건지 의아해하는 사이 인주씨가 말했다. - P114

그리고 한동안 제자리에 서서 테라스가 아닌 베란다라는 공간을 둘러봤다. 나무 바닥이 빛을 반사하며 윤이 나는 것처럼 일렁였고 이마에 와닿은 햇볕이 한가을임에도 제법 따스했다.
그렇게 얼마쯤 서 있었을까. 건너편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을느끼며 숨을 한가득 들이마시는데 가벼운 진동 소리가 났다. 눈을 돌리자 인주씨가 휴대폰을 확인하며 피식 웃었고, 이내 뭔가를 증명하려는 것처럼 화면을 내쪽으로 들어 보였다. 카페에서책을 읽고 있는 주호의 사진 위로 하트 이모티콘이 선명했다.
빨리 오네요. 서울 들어오면 전화한다고 했거든요. - P115

그날 주호는 한때 경험했던 배우의 삶에 대해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몸담았던 극단의 역사와 구조, 운영 방식은 물론이고 함께활동했던 선후배들의 성격이나 심리상태, 평균 소득까지 얘기했다. 나는 어쩌다보니 극단의 설립자이자 몇 년 전 성범죄 사실이밝혀져 극단을 공중분해시킨 연출가가 메소드 연기 주창자인 스타니슬랍스키의 신봉자라는 것도 알게 되었는데, 그건 주호가 너무 암울한 얘기만 하고 싶지는 않다며 자신이 습득한 호흡과 발 - P116

성, 걸음걸이, 장면 연기 같은 훈련법에 대해 꽤 자세히 설명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주호가 애써 해주는 말들에 집중하지 못했다. 흘려들은 건 아니었으나 주호가 무슨 말을 더 할 때마다 이렇게 대꾸하고 싶은 마음에 제대로 귀담아들을 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럼 뭐해, 너는 이제 안 한다며. - P117

성 소수자의 사회적 가시화나 시민권 획득, 동성혼 법제화에대한 책을 주로 읽는 모임 안에서 주호는 낯선 존재였다. 젠더 다양성이나 해체를 운운하는 주호를 다들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가슴으로는 아니었고, 그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게 힘겹게 받아들인 정체성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경험이지 다시 혼란해지거나 불안해지는 경험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려온 사람들을 직접 만나야만 느낄 수 있는 위안과 위로, 소속감이 절실했고, 모임은 모든 성별과 정체성을 환영한다는 기조를 내걸기는 했으나 어쨌든 게이 정체성을 핵심 동력으로 삼고있었으니까. - P118

하지만 나는 그런 주호가 마음에 들었다. 모임 안에서 체호프를 좋아하는 유일한 사람이어서 마음이 가는 것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하는 말에 과연 그런가 싶은 뚱한 표정으로 한 번씩 물음표를 던지는 모습은 특별해 보였으니까. 주호는 배열이 조금 다른 회로를 장착하고 있는 듯 자신에게 다가오는 건 그게 사람이든 생각이든 감정이든 일단 멈추게 한 다음 판단을 보류했고, 나는 무릇 예술가란 이래야 하는 게 아닐까, 뭐든 그런가보다 하며당연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이렇게 의심하고 분별해봐야 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그즈음 주호가 학교 사람들과 선보인 몇몇 무대는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내게는 그런 어설프고 난삽한 무대를 감행하는 주호의 객기마저 남달라 보여 우리는 차차따로 만나 연극을 보거나 서점에 가거나 밥을 먹으며 가까워졌다. 무엇보다도 읽은 소설이나 희곡 얘기를 할 때면 역시 대화란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잘 통했고, 함께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 P119

주호는 자신과 인주씨 모두 타인에게 성적 끌림은 느끼지 않으나 로맨틱한 끌림은 느끼는 유로맨틱이라 했고, 자신은 양성 모두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는 논모노로맨틱, 인주씨는 이성에게만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는 모노로맨틱이라고도 했다. 지금 뭐라는 거냐고 되묻고 싶은 내 마음이 표정에 역력했는지 주호가먼저 웃었다.
알아, 복잡하지. 나도 헷갈려.
나는 정체성이라는 게 필요하면 장착했다 싫증나면 벗어버리는 게임 아이템 같은 건가 싶어 헛웃음이 나왔고, 도대체 어떻게성적인 끌림을 느낄 수 없다는 건지, 아니 그럴 수 있대도 그건 정체성이라기보다는 일정 기간의 상태가 아닌지 묻고 싶었다. 만약그런 상태가 지속되는 거라면 병원에 가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고. 하지만 정작 입을 열었을 때 내게서 튀어나온 질문은이거였다. 내가 정말 궁금한 것도, 내게 가장 중요한 것도 사실은이거라고 자인하듯이.
- P122

나는 찬물 세례라도 받은 것처럼 동작을 멈췄다. 나를 스치는인주씨의 눈빛이 자신은 소설가란 족속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는 비난 혹은 자신을 함부로 소재 삼지 말라는 경고로 다가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인주씨가 그렇게 묻기 전까지는 오늘에 대해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므로 그 순간의 내 대답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때 인주씨가 난해한 모양새로 눈썹을 치켜올리더니왜냐고 물었다. 혹시 우리의 만남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거냐고묻기도 하고 자신이 한 얘기가 재미없었던 거냐고 묻기도 하면서장난스레 서운한 척을 했다. 내가 그런 게 아니라며 머뭇거리는사이, 인주씨가 말을 이었다. - P129

나는 인주씨가 하는 말의 진의를 파악해보려다 애매하게 남아있던 웃음기를 지웠다. 내가 다른건 몰라도 소설을 쓰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진지하다는 것을, 무엇을 쓸 수 있고 또 없는지에 대한 나름의 가치판단을 하며 글쓰기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당사자도 아니면서 그 삶에 대해 내가 함부로쓸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말했고, 만에 하나 그게 더 큰 의미를 보장한다고 해도 잘 알지도 못하는 걸 쓰고 싶지는 않다고도 말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나는 커밍아웃과 진배없었던 첫 책 출간 이후로, 그렇게 나 자신을 까발려도 환대받을 수 있다는 경험을 획득한 이후로 더욱더 내게이 정체성에 천착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그건 자기 삶을 내걸어 쓴 게 분명해 보이는 작품에만 마음이 가는 내 편협과도 관련이 있었다.
- P130

내가 주호와 인주씨,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자신을 에이섹슈얼로 정체화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알게 된 건 그날로부터 반년여가 흐른 뒤였다. 그즈음 내 첫 책의편집자인 규철씨가 중쇄 소식을 알리며 혹시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지를 물었다. 메일에는 규철씨가 지난 주말에 책을 다시훑어보며 잡아냈다는 오탈자가 정리되어 있었는데, 출간 전 그렇게 여러 번 들여다봤건만 또 고칠 게 나온다는 게 어쩐지 기묘한것 같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아무래도 이 문장은 재고해보는 게좋겠다는 규철씨의 제안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황급히 책을 펼쳤다. 그리고 297쪽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기어코 커밍아웃을 했으나 그 이후로 날마다 쏟아지는 원색적인 비난과 악성 댓글에 결국 공황장애를 앓게 된 배우 김학수가 어느 날 백오십만 명이 지켜보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피드에남긴 울분의 메시지였다.

차라리 무성애자였으면 좋겠어.
아무 감정도 못 느꼈으면 좋겠고 누구도 사랑할 수 없으면 좋겠어.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책속에 이런 무지와 혐오를 보란듯이 전시해놓고도 까맣게 몰랐는지, 어떻게 이런 걸 써놓고도 출간 직후 주호에게 다정한 인사말 - P133

을 적어 책을 선물했으며, 어떻게 그토록 당당하게 연대와 다양성과 자긍심 같은 말을 끌어다 책을 홍보했는지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싶지만 나는 정말이지 몰랐고, 어쩌면 계속 모를 수도 있었지. - P134

나는 오래전부터 그날에 대해 써보고자 했다. 뭔가를 써야 할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날이 다가와 나를 건드렸을 뿐만 아니라 그날에 대해 쓰지 못하면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로부터 얼마만큼 멀어졌는지 나 자신에게조차 증명할 길이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날에 대해 쓸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내 한계를 확인하고는 지운다.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투박한 나머지 우리를 흐릿하게 뭉개놨다는 판단에 지우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성급한 나머지 우리를 매끄럽게 정리해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지우며, 또어느 날은 내가 쓴 것들이 모두 궁색한 자기변명 같다는 느낌에지운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또 지우다보면 어김없이 어떤 대사를 마주한다. 끝내 지우지 못하는 아니 모조리 지워도 속절없이 다시 쓰게 되는 그 대사를 - P135

그리고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현실의 알리바이를 모두 소거한 허구를 만들어냈다는 기쁨보다는 결국 무엇을 쓰더라도 나를 경유하지 않을 수 없다는 한계를 확인하는 게 더 좋았다.
전혀 의도하지 않아도 내 일상이 어떤 식으로든 소설에 담긴다는게 좋았고, 살아가는 일과 쓰는 일이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게 좋았다.
소설과 삶이 서로에게 무용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 소설과삶이 서로를 외면할 수 없음을 확인하는 것. 요즘 내게 점점 더 중요해지는 건 바로 이런 일들인 것 같다.

소설에서 삶을 말끔하게 분리하는 노력이 아니라 소설과 삶 사이의 복잡한 긴장을 버티는 노력을 하고 싶다. 완전무결해지려는노력이 아니라 그럼에도 천천히, 조심스럽게 연루되어보려는 노력을 하고 싶다. 어차피 어려운 일이라면, 그래도 무릅쓰고 싶다면 그게 더 좋을 것 같다. - P139

‘우리‘의 가능성을 묻는 ‘나‘의 소설이 한계에 부딪히고 마는까닭도 이러한 물음에 있다. ‘나‘의 탐색은 소설의 문법과 싸우는 일이고, 궁극적으로는 소설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사회의 규범과 통념 등의 이데올로기와 싸우는 일이다. 그 싸움에서 ‘나‘는 항상 무력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우리‘는 사유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유와 실천은언제나 ‘나‘의 몫이다. ‘나‘들이 사유하고 실천하는 그때에야 ‘나‘
는 ‘우리‘일 수 있고, ‘나‘보다 거대한 것과 맞설 수 있다. 그것이
‘나‘의 한계이자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나‘의 소설은 어떻게 쓰여야 할까. 고작 대상이 이것 아니면 저것임을 지시할 뿐인 리트머스와 같은 도구로는 충분하지 않다. 보다 섬세한 질문과 응답이필요하다. 소설쓰기에 방법이나 정답이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므로 ‘나‘는 쓰고 지운다. 지금도 ‘나‘의 물음과 탐색은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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