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무덤 앞에서 많은 생각을 할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나는 부모님 무덤 앞에 잠시 멈춰서서 시간을 보냅니다. ‘저 왔어요‘라고 말하듯이. 1년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내가 그동안 무엇을 했고, 어떤글을 썼고, 무엇을 쓰고 싶은지 알려드리듯이. 그러고는 오른편의 당신 무덤에 가서 매번 묘비를 쳐다보고,비문을 읽곤 합니다. - P11
어머니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되살릴 자신은 없어요. 다만 오늘까지 매년 한 해 한 해가 지나도 사라지지않으며, 열기를 잃고 침묵하는 불꽃처럼 내 유년 시절을 단숨에 집어삼킨 이야기의 내용과 문장들만 떠올따름이지요 그때 나는 어머니 이야기를 들으면서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인 채 계속춤을 추며 두 사람 옆을 맴돌았어요. [이곳의 언어는 경계가 불분명한 중간지대를 찢어놓고, 나를 덥석 물어 들러붙었다가 사라져버려요.] - P16
‘착하다. 노르망디에서 이 말은 아이와 개에게 주로사용하는데, 순하고 상냥하며 ‘친근감이 있다는 걸 뜻하기도 합니다. 어른들 품에 안기기보다 그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을 더 좋아하면서 어른들과거리를 두는 나는 착한 아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어요. 그러나 나는 내가 부모님에게는 착한 아이라고확신했어요. 심지어 다른 아이들보다 더 착하다고 말이지요. - P22
부모님과나 사이에 이제는 당신이 있어요. 보이지 않지만 사랑스러운 당신이 나는 당신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멀찌감치 밀려났습니다. 당신이 영원한 빛에 둘러싸여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동안 난 그늘로 떠밀려갔지요. 무남독녀라 누구와도 비교당하지 않고 살던 내가 비교의 대상이 된 거예요. 현실은 서로 배척하는 단어들이 만들어냅니다. 더/덜, 또는/그리고, 전/후,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삶이나 죽음 같은 단어들에의해. - P23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이 단어들의 값을 치르게 했어요. 어머니에 대항하여 혹은 그녀를 위해 글을 썼고, 자랑스러우면서도 모멸감을 느끼기도 하는 노동자로서의 어머니 입장에서 글을 썼으니까요. - P23
유년 시절을 거쳐 온 그 어떤 것도 이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때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기억은 나지않지만 슬픔이란 감정은 아니었어요. 아마, ‘속았다‘는느낌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 단어는 훨씬 더 나중에 보부아르의 책을 읽고 난 후에 떠오른 것인데, 내게는 비현실적이면서도 비중 없는 단어로 느껴졌고, 아이였던 내 존재에 더해지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어요. 적절한 단어를 오랫동안 찾아 헤맨 후, 의심의 여지 없이, 내게 가장 잘 맞는다고 여겨진 단어는 ‘잘 속는‘이었답니다. 치욕적이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나는 잘 속는 아이였어요. - P24
당신이 성모마리아와 참 좋은 예수님을 보러 갈 거라고 말했다는 걸 알고, 당신을 원망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내가 부적격자라는 걸 보여주었던 그 말이 내입술을 넘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하나님을 보고 싶어 했던 적도 없었으니까요. 그 후 어른이 되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를 정도로 원망했던 대상은 당신에게 부질없는 말을 믿게 했던 어머니였습니다. 이제 더는 화를 내지 않아요. 모든 위로와 기도, 노래는 죽음 앞에서 흔들리는 순간에 가치를 발휘한다는 생각을 인정하지요. 그리고 당신이 행복하게 떠났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좋습니다. - P25
몇 년을 둘러쌌던 희미하게 웅성거리던 말들 속에서당신의 부재로 나를 에두르며 자연스레 내 주위를 떠돌았던 게 분명해요. 가게에서, 혹은 전란 중이라 팔물건과 손님이 없어 매일 오후마다 나를 데리고 간 공공정원 벤치에 앉아 다른 여자들과 시간을 보내던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내 의식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어요. 이미지도 단어도 없이 그저 존재했을 뿐이지요. - P28
이외에 아직 말하지 않은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내 생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건, 다섯 살 때 죽다 살아난 이야기예요. 그건 또 다른 이야기인데, 주인공은 오로지 나였어요. 어린아이였던 내게서 당신이불쑥 튀어나왔던 그 여름의 일요일을 나는 지금도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있는데도 감출생각 않고 아버지보다 훨씬 더 자주, - 유년 시절을 기록하는 건 여자들이지요 - 희열마저 느끼며 그 일을 수도 없이 이야기했어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라도할 것 없이 크게 놀라며 경탄을 금치 못하곤 했으니까요 - P32
폭격을 맞는 것보다는 덜했겠지만 그 당시 엄청난고통을 겪었다는 것을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그래도수없이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 순간의 이미지는 일찍부터 머릿속에 붙잡아두었어요. 햇빛이 가득하던 공공정원을 다시 봅니다. 나무판이 뽑힌 벤치 위로 기어오르며 놀다가 다친 내가 부모님께 달려가요. 부모님은풀밭 위에 누워 있고, 나는 왼쪽 무릎 아래에 빨갛게인 작은 상처를 보여주어요. 그들은 "괜찮아. 별거 아니니까 가서 놀아"라고 말하지요. - P34
현실은 유년기에 형성된 믿음에 크게 영향을 주지않습니다. 1950년에 나를 살게 했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살 수 있게 한 것은 현실과 함께한 기적이었을 거예요. 사망 선고를 받았던 내가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첫 번째 이야기가 당신의 죽음과 나의 부끄러움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두 이야기는 어떻게 연결되며, 어떤 진실이 작동하여만들어진 걸까요. 나는 모순처럼 보이는 이 미스터리를 풀어야만 했어요. 착한 소녀이자 어린 성녀였던 당신은 구원받지 못했고, 악마였던 나는 살아남았으니까요. 아니, 살아 있다는 것 그 이상의 기적이 내게 일어났던 거죠. 그렇게 당신은 여섯 살의 나이로 죽어야만 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오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알 수 없는 신의 섭리 안에서 살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자부심과 죄책감. 아마 죄책감보다는 자부심 쪽이 더 큰 것 같아요. 하지만 무엇을 위해 선택된 걸까요. 스무 살 때, 폭식증과 무월경의 지옥까지 내려간 - P38
후, 답을 얻었습니다. 그건 글을 쓰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지요부모님 집의 내 방에 클로델의 문장을 붙여놓았어요. 사탄과의 계약처럼 라이터로 가장자리를 태운 커다란 종이에 정성스레 옮겨 적은 문장을요.
그렇다. 나는 믿는다.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세상에온 것은 아니라는 걸. 그리고 내 안에는 세상이 묵과할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나는 당신이 죽었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죽은 것은 내가 글을 쓰도록 하기 위함이에요.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 P39
그들은 피난과 점령과 폭격을 겪었고, 당신의 죽음을 겪었어요. 아이를 잃은 부모인 겁니다. 당신이 거기 있어요. 보이지 않지만, 그들 사이에.
그들의 고통으로그들은 당신에게 ‘다음에 크면‘이라고 말했을 거예요. ‘내년에‘, ‘올여름에‘, ‘곧‘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나열하면서, 읽는 걸 배우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혼자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을 테지요. 그러나 어느날 저녁, 미래의 자리에는 공허만이 남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내게도 같은 말을 반복했어요. 나는 여섯살, 일곱 살, 열 살이 되었고, 당신 나이를 금방 넘어섰습니다. - P47
어느 순간, 내가 당신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걸 그들이 알아차린 게 분명해요. 하지만 난 그들이 언제, 어떤 일로 알게 되었는지는 결코 알 수 없을 겁니다-그래도 침묵을 깨기에는 이미 늦어버렸어요. 너무 오래된 비밀이었으니까요. 그들로서는 이제 와서 비밀을털어놓는 게 꽤나 복잡해져 버린 거지요. 나는 그 비밀과 함께 살아왔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이들은 비밀을간직한 채,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 것과 함께 살아가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렇답니다. 침묵은 그들과 나,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비밀이 나를 지켜주었어요. 가족 중에서 죽은 아이들을 숭배해야 하는 부담을 피하게 해주었으니까요. 그건 살아 있는 자들에게 알 수 없는 비참한 마음을 안겨주어요. 내가 분노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 P54
그들은 차례차례 땅에 묻히면서, 1938년 봄에 잃어버린 모든 것, 당신에 대한 살아 있는 기억을 무덤 속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당신의 첫걸음, 즐겁게 놀던 당신모습, 당신의 두려움과 아이들에 대한 당신의 질시, 당신이 학교에 입학하던날. 당신의 죽음은 이 모든 기억을 견딜 수 없는 회한으로 바꾸어놓았지요. 이와는 반대로 그들은 내게 진절머리를 냈어요. 나는 수많은 일화로 채워진 유년기를 보냈지만, 당신의 유년에 비하면 텅 비어 있는 셈이에요. - P58
글을 쓰면 쓸수록마치 꿈을 꾸듯 이끼만 잔뜩 돋은 인적 없는 습지에서걸음을 내딛는 듯하고, 단어들의 틈새를 헤치고 나아가 불분명한 것들로 가득 찬 공간을 넘어가야 할 것만같아요. 내겐 당신을 위한 언어도, 당신에게 말해야 할언어도 없으며, 부정적인 방식을 통해 지속적인 비존재 상태로 있는 당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감정과 정서의 언어 바깥에 있는당신은 비언어입니다. - P61
나는 그들의 고통 속에서 산 것이 아니라, 당신의부재 속에서 살았습니다. - P64
만일 감정에 관한 단어들을 쭉 늘어놓는다 해도, 내유년기와 그 이후의 삶에서도 당신에게 해당하는 내감정의 단어는 하나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은 죽은 사람이기에 증오할 대상이 되지 못하며, 관계가 가깝든 멀든, 다른 사람을 향해 인간의 마음에서 솟아나오는 애정의 대상도 될 수 없지요. 백지 같은 감정. 내가 ‘무덤‘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서 이름 없는 당신의 존재를 의심했을 때, 고작해야 불안함이 더해졌을 뿐인중립의 감정. - P65
당신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갈구했으며, 나의 자부심은 라틴어였고 대수학이었어요! 또한 사랑과 섹스를 상상하며 글을 구상하는 일에 마음을 온통 쏟아부었지요.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픈 생각조차 없고 오로지 미래만 꿈꾸는청소년에게 전쟁 전에 사라진 어린 소녀의 실체 없는이미지가 얼마큼의 무게를 가질 수 있을까요? 행복하거나 - 생리를 시작하고, 사랑에 빠지고, 모파상의 《인생》과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읽는 것 - 불행했던 -1952년의 일요일 - 모든 일에 비해, 혹은 이브로에서 보내는 갑갑하고 지겨운 여름방학처럼 아무 일 없는 나날이나 그래도 곧 다가올 일들 - 차가워진 상쾌한 공기가 예고하는 학교에서 맞을 아침과 사랑 노래, 토요일마다 루앙의 기차에서 내리는 학생들로 왁자지껄한분위기에 비해 당신의 죽음은 내가 고려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어요. - P66
나는 외동딸로서 내가 갖는 이점을 알고 있었어요. 더구나 다른 아이가 죽은 후에 온 아이기에 늘 마음 졸이며 더욱 정성을 쏟게 되는 애정의 대상이었지요. 아버지는 무엇보다 내가 행복하기를 바랐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지요. 그들이 바라는것이 더 많아질수록, 나는 친지들 사이에서 그리고 우리 노동자 마을에서 특권을 지닌 부러움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빵 심부름도 하지 않았고,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손님들에게 ‘나는 손님을 맞지 않아요‘라고 대답하곤 했지요. 당신은 그들의 슬픔이었어요. 그러나 나는 그들의 희망이자 골칫덩이였고, 첫영성체부터 대학입학 자격시험까지 그들의 이벤트였으며 성공이었습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내가 그들의 미래였지요. - P68
내가 피해선 안 되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남자의 자리》를 쓸 때, 현실에 보다 가깝게 쓰려는 마음을 갖지 않았더라면, 지난 세월 동안 당신을 가둬두었던 내 어두운 내면으로부터 당신이 다시 올라올 수있었을까요? 이 편지처럼, 내가 쓴 책들은 마치 출구가보이지 않는 통로에서 자꾸만 겹겹이 드리워지는 천들을 하나씩 들추며 나아가듯,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 속에 가라앉아 있던 당신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일까요? - P70
‘당신‘은 덫입니다. 숨 막히게 하는 무언가를 가진채, 역겨운 슬픔의 냄새를 풍기며 당신에 대한 가상의친밀감을 만들어내요. 나를 비난하려 가까이 다가오죠.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당신 때문이라고 믿게 하며, 당신의 죽음을 우위로 두어 내 존재 전부를 깎아내리려 합니다. - P71
당신의 생명에서 영원을 얻은 내 생의 광활함이 나를 뒤덮습니다. 내 뒤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이 있어요. 보고, 듣고, 배우고, 잊어버리는 것들, 동고동락하는 남자와 여자들, 거리들, 저녁과 아침들. 과잉의 이미지가 넘칠 정도로 내게 쏟아집니다. 아주 멀리 있으나 너무나도 선명한 이미지. 그것들은 처음부터 릴본에 있었어요. 당구대가 있는 카페 홀, 나란히 놓인 대리석 테이블, 식탁에 앉아 있던 폴드렝 씨와 치아가 두세 개뿐인그의 부인, 그리고 다른 손님들의 어렴풋한 실루엣포석이 깔린 작은 안뜰로 난 유리문, 유리문으로 공간을 구분한 식료품 가게와 주방 - P79
계단 위쪽의 식사실, 테이블 위의 반구형 컵과 그안에 꽂아놓은 검은색과 오렌지색 셀로판지 꽃들짧은 털에 끊임없이 몸을 떨고 강에서 잡아온 쥐들을 죽이던 암컷 개, 푸페트거무스름한 데제네테 방적공장 대단지와 철판으로만든 거대한 굴뚝방앗간과 빛바랜 초록 물레바퀴 - P80
며칠 후 투생 휴가가 돌아오면 언제나처럼 산소에갈 생각이에요. 이번에는 당신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을까요?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건네야 할 필요가 있을지, 이 편지를 썼다는 게 부끄러울지 자랑스러울지, 편지를 쓰고 싶었던 욕구가 정말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마 나는 당신의 죽음이 내게 준 삶을, 이번에는 내 차례가 되어 당신에게 돌려주며 가상의 빚을 털어내길원했던 것 같아요. 아니면 당신과 당신의 그림자로부터 떠나기 위해 당신을 되살리고 다시 죽게 한 걸 수도있고요. 당신에게서 벗어나려고. - P89
물론, 이 편지의 수신자는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은읽지 않을 테니까요. 편지를 받을 사람은 다른 사람들, 바로 독자예요. 내가 이 편지를 쓸 때, 당신만큼이나 보이지 않았던 자들이지요.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편지가 우리는상상할 수 없는 신비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당신에게닿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여름의 일요일에, 어쩌면 튀렝의 방에서 파베세가 자살했던 그날에, 나 역시 수신자가 아니었던 이야기를 통해 당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2010년 10월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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