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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까 그게 무슨 말이야? 뭘 해보고 싶다고?
먹점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눈점이 연이어 물었다. 왜? 왜 그걸 해보고 싶은데? 우리 사이에 그게 필요해? 먹점은 자기가 한말을 더듬더듬 변명했고 눈점은 자신의 입술로 그 단어를 발음하고 싶지 않아 그것을 지칭할 다른 말을 떠올렸다.
- 책갈피라고 하자. 앞으로 그거 말할 땐 책갈피라고 해.
멋진 별칭이었다. 도서관과 어울리는 단어이자 나 모모를 아름답게 꾸며주는 비밀 언어. 세상의 수많은 책갈피를 떠올려보라.
가벼운 금속이나 나뭇결을 살린 목재로 만들어진 각양각색의 책갈피, 위대한 건축물이나 꽃이 그려진 디자인. 여행지의 기념품으로 사랑받고 소중한 마음을 담아 선물하기에 좋은 반영구적인소품, 종이와 종이 사이에 끼워져 읽은 부분과 읽어야 할 부분을가름해주는 지성인의 상징. 얇고 단단하며 심미적이고 유용한 사물, 책갈피-나 모모는 그런 존재였다. - P58

사람이 너무 놀라면 아무 반응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눈점은 그때 깨달았다. 잠시 멈춰 있던 버스는 뒤에 선 버스들의 경적에 그대로 정류장을 떠났다. 눈점은 타고 내리는 사람들로 번잡한 길가에 멍한 얼굴로 주저앉아있었다. 저 버스를 기억해야 한다는 조바심과 함께 이러다 학교수업에 늦으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 문에 끼였던 어깨를 문지르며 눈점은 학교로 가 아이들을 가르쳤다. 수업이 끝나고 정류장에 갔을 때 눈점은 버스를 탈 수 없었다. 수없이 오가는 버스와 버스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자신도 그중 한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다른세계로 튕겨 나와 되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눈점은 그날 하루일해서 번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내고 택시를 탔다. - P63

이대로 가만있으면 안 된다고, 그 기사를 찾아 항의해야 한다.
고 생각한 건 어느 택시 안에서였다. 목뒤로 두툼한 살이 접힌 택시 기사가 눈점이 타자마자 육두문자를 쓰며 바로 전에 태운 여자 손님을 욕했다.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이 소리가 정말 현실의 소리인가? 눈점은 귀가 멍해지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택시 문을 세게 닫았다는 이유로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저렇게 욕하는데, 왜나는 나를 이 고통에 빠뜨린 그 버스 기사에게 항의도 못하는 걸까. 분노와 자책감이 뒤엉켰다. 사고를 당한 자신이 침묵하고 가만히 있는 사이 또다른 피해자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도들었다. 이제라도 그 사고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고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러나 그사이 먹점은 생각이 바뀌어 있었다. 먹점은 기사를 처벌하는 것보다 눈점의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 P64

점으로 이름을 지어서 그런가 점점 점이 되어가는 것 같아.
눈점은 먹점을 껴안으며 자신이 힘을 내야 하는 이유를 되새겼다. 망망대해에 빠진 조난자처럼 막막하고 절망스러웠지만 먹점을 부표처럼 끌어안으며 버텨야 한다고 자신을 일으켜세웠다. 그런 눈점을 보며 먹점은 한 달 정도 쉬면서 건강을 회복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눈점은 좀더 견뎌보겠다고 했지만 결국 일을 그만두었다. 집에 머물면서 눈점은 잠들어 있는 시간이 더 늘어갔다. 깨어 있을 때도 손 하나 까닥할 수 없는 무기력증이 눈점을 짓눌렀다. 먹는 약의 양이 많아져 어느 날은 입안 가득 넣은 알약에목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환풍기가 돌아가는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살아오며 겪었던 온갖 폭력이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폭력을 견디며 살아가는 걸까. 어떻게 그 끔찍한모멸감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걸까. 왜 나는 남들처럼 무뎌지고 담담해지지 않는 걸까. 눈점은 남보다 더 넘어지고 아파하는자신이 미웠다.  - P65

먹점 역시 일이 버거웠다. 급여는 그대로인데 업무량은 나날이 늘어갔고 허리 디스크와 만성 위장 장애를 달고 살았다. 눈점과 함께 밥을 먹을 때만 속에서 편안하게 음식물을 받아들이는것 같았다. 따듯한 밥알과 잘 익은 채소가 아르헨티나산 새우나베트남산 오징어와 함께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면 아, 이런 게 사는 거구나, 이 밥을 위해, 이 식탁을 위해, 더 참고 견딜 수 있겠구나 싶었다. 배부르고 맛있어서가 아니었다. 눈이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눈점과 함께 먹는 게 좋았다.  - P67

나 역시 내가 책을 읽게될줄 몰랐다.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을보고서야 자신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나르키소스 같달까. 기나긴번데기의 시간을 지나 화려한 무늬의 날개가 돋아난 나비와 같달까. 나는 버려진 책들을 본 순간 숨겨진 내 재능을 깨달았다. 책갈피, 내 오래된 이름이 찾아와 몸과 의식을 일깨웠다.
낮이고 밤이고 나는 읽었다. 두 여자의 미니멀 라이프 덕분에나는 새로 태어날 수 있었다. 버려진다는 조바심과 생의 위기 속에서 나는 책을 읽고 사색에 빠져들었다. 플라톤을 읽은 날은 동굴에 비친 그림자의 실재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꾸었다. 니체를 읽은 날은 망치를 든 여자들에게 쫓기는 악몽을 꾸었다. 그들의 책에는 모두 내가 상징처럼 숨겨져 있었다. 나는 인류 지성사에 깃든 나의 위대함을 확인하며 두 여자가 내린 쓸모없다는 판단이얼마나 반인륜적이고 반지성적인지 깨달았다. 쓸모없음이야말로인류가 지켜가야 할 빛나는 보석이었다. - P81

테오필 고티에란 자가 쓴 글을 읽으며 나는 전율했다. 가장 어렵고 가장 지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에 눈물 흘렸다. 그들의 글 옆에는 누군가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무쓸모의 쓸모.
그 문구가 번개처럼 내 심장에 와 박혔다. 무쓸모의 쓸모. 나는말장난을 해보았다. 단어를 곱씹으며 내 이름을 지어보았다. 무쓸모의 쓸모, 무모? 무쓸모의 쓸모, 모모! 모모가 된 나는 ‘쏠쏠‘이란단어를 오래 머금었다. 무쓸모의 쓸모 쓸쓸한 존재, 그것이 나로구나. 시인지 노래인지 알 수 없는 운문이 절로 흘러나왔다. - P82

누군가를 웃게 하는 건 그보다 더 오래 걸리지요. 하지만 어떤존재는 특별한 의도 없이 그저 존재만으로 다른 이를 웃게 합니다. 있다는 것만으로도, (혹여 그 있음이 사라진다 해도) 웃음이나는 존재. 눈점에게 먹점이 먹점에게 눈점이 그러합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두 사람이 별명이 아닌 자기의 이름으로 세상에 불리기 원할 때 그 사랑의 언어를 편안하게 소리 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의 귀가 사랑의 소리를 더 따라가길 원합니다. 때론 소음에 지워진 듯 보여도 사랑의 소리는 틀림없이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웃음의 빛으로 떠오른다는 걸 저는 압니다.
제가 아는 것을 쓸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읽는 마음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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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은 초파리를 좋아했다. 초파리의 날개와 눈을 특히 좋아했다. 투명하고 얇은 날개는 성당에서 보았던 스테인드글라스를닮았다. 정교하게 짜인 무늬 사이사이로 무지갯빛이 감돌았다.
새빨간 눈은 석류의 단면을 닮았다. 붉고 영롱한 수천 개의 알갱이들이 빼곡하게 모여 하나의 동그라미를 이루었다. 마취된 초파리는 생명이 유지된 채 멈추어 있었다. 초파리의 눈을 보고 있자면 눈을 이루는 무수한 동그라미들이 일제히 원영의 눈동자를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초파리와 교감을 하는 것 같았다. - P9

놓고 바라보보다 아름다웠다. 살아 있었으니까.
원영은 붓을 들었다. 초파리가 다치지 않도록 붓 끝으로 살살건드렸다. 눈이 하얗거나 하트 모양으로 찌그러진 초파리들을 재물대 왼쪽으로 치웠다. 유전자 변형이 일어난 것들이었다. 눈이동그랗고 붉은 빛깔이 또렷한 것, 털과 무늬의 간격이 균질하며영양 상태가 좋은 초파리를 한 마리씩 골라냈다. 새로운 시험관에 담았다. 수백 마리의 초파리 중에서 가장 건강한 열다섯 마리를 골라 번식시키는 것이 원영의 업무였다. 원영의 선택을 받은초파리들은 시험관에서 일주일을 더 살 것이다. 나머지는 냉동실에 보관되다가 폐기처분될 것이다. - P10

집에 있어도 되지 않느냐 했다. 딸에게 개인 교습을 시켜줄 수는없었지만, 학원에 보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학원에 보낼 형편이 안 되었던 시절에도 원영은 비슷한 말을 들었다. 학원비 및 품버느니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편이 낫지 않나는 식이었다. 원영은 자기 일을 갖고 싶었다. 집을 갖고 싶다거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여느 사람처럼 그랬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삼십삼 년 동안 그랬다. 텔레마케팅 사무실은 창문이 없긴 했지만 무제한으로믹스 커피를 제공하는 탕비실이 있었고 천장에는 시스템 에어컨이 있었다. 칸막이가 설치된 책상이 직원 모두에게 제공되었다.
가져본 적 없는 자신만의 책상이었다. 첫 출근 전날 원영은 문구점을 찾아갔다.  - P11

초파리는 사람과 닮은 점이 많았다. DNA가 절반 이상 같았다.
질병에 관여하는 유전자는 칠십 퍼센트 이상 일치했다. 인간이앓는 질병을 초파리도 비슷하게 앓는 경우가 많았다. 한 질병을않고 있는 초파리들의 염기 서열을 분석하면 그 질병에 관여하는유전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약물에 대해서도 사람과 비슷한 영향을 받고 비슷한 행동 패턴을 보였다. 초파리의 눈이나 장기, 배아 등에 약물을 주입하여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 P15

실험동에서 초파리를 훔쳐왔던 그날부터 원영의 머리카락은뭉텅뭉텅 빠졌다. 일주일 만에 정수리부터 두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눈썹과 속눈썹도 사라졌다. 원영은 통풍이 잘되는 두건과모자를 구입했고, 가발을 맞췄다. 눈썹은 그려넣으면 넣을수록티가 났다. 실험동 동료들은 원영에게 자꾸 괜찮으냐 물었다. 버스나 길에서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는 것 같다고 원영은 말했다.
잠깐 쉬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했고, 언제든실험동으로 돌아오라는 대답을 들었다. - P22

갱년기 때문에 음식을 못 삼킬 수는 없었다. 원영의 몸은 십일년 동안 꾸준히 약해진 것 같았고, 이제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정도였다. 산재다. 지유는 의심이 들었다. 초파리 실험실에서부터 원영이 잘못된 것이다.
"이게 생숙탕이야. 이렇게 섞어 마시면 몸 안에 좋은 기류가 생긴대. 설사도 낫고, 소화도 잘된대. 꼭 뜨거운 물에 찬물을 부어야해. 반대로 하면 안 돼."
지유와 원영은 식탁에 마주앉아 생숙탕을 마셨다. 원영은 욕실로 갔다. 천일염을 잇몸에 문지르고 머금고 있다가 뱉어냈다. 그다음에는 야로 오일을 입안에 한 방울 떨어뜨렸다. 그다음에는테니스공으로 발바닥을 마사지했다. 

그 이야기야말로 인터넷 기사에서 많이 본 것 같다고 지유는답했다. 원영은 다른 이야기도 들려줬다. 텔레마케팅 사무실에서헤드셋 너머로 종일 욕설을 듣는 여자 이야기. 평생 자기 책상을가져보지 못해서 아프기 시작한 여자 이야기. 식기세척기를 구입하면 어떻겠냐고 물으면서도 책상이 필요하지 않으냐고는 한 번도 묻지 않는 가족 이야기. 밀가루가 체질에 맞지 않아 늘 위무력증에 시달렸지만 남편이 국수를 좋아해서 삼십 년 동안 국수를먹은 여자 이야기. 체할 때마다 그러게 왜 국수를 먹느냐고 다그치던 딸 이야기. 그러면서도 일요일 저녁이면 와, 국수다, 라며 손뼉을 치던 딸 이야기・・・・・・ 원영은 조금씩 이야기를 바꾸어가며 말했다. 거의 소설이 되어갔다. 원영은 너무 사소해서 오히려 무시했던 일화들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었다.  - P29

"솔아야, 너무 열심히 쓰지 마."
원영은 말했다. 그 말이 나는 못내 서운했다. 내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열심히 하려는 사람에게 왜 자꾸 그런말을 하느냐고, 나는 불만을 섞어 볼멘소리를 했다.
"너무 열심히 하면 무서워져"
공부든, 글쓰기는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 너무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고원영은 말했다. 내가 모르는, 원영은 잘 아는 이들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열심히 쓰지 마.
이 소설을 쓸 때 가장 많이 떠올린 말이다. 원영이 내게 누누이말해왔던 것처럼 원영도 잘 먹기를 잘 자기를 행복하기를. 오직그것만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을 외면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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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은 초파리를 좋아했다. 초파리의 날개와 눈을 특히 좋아했다. 투명하고 얇은 날개는 성당에서 보았던 스테인드글라스를닮았다. 정교하게 짜인 무늬 사이사이로 무지갯빛이 감돌았다.
새빨간 눈은 석류의 단면을 닮았다. 붉고 영롱한 수천 개의 알갱이들이 빼곡하게 모여 하나의 동그라미를 이루었다. 마취된 초파리는 생명이 유지된 채 멈추어 있었다. 초파리의 눈을 보고 있자면 눈을 이루는 무수한 동그라미들이 일제히 원영의 눈동자를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초파리와 교감을 하는 것 같았다. - P9

원영은 붓을 들었다. 초파리가 다치지 않도록 붓 끝으로 살살건드렸다. 눈이 하얗거나 하트 모양으로 찌그러진 초파리들을 재물대 왼쪽으로 치웠다. 유전자 변형이 일어난 것들이었다. 눈이동그랗고 붉은 빛깔이 또렷한 것, 털과 무늬의 간격이 균질하며영양 상태가 좋은 초파리를 한 마리씩 골라냈다. 새로운 시험관에 담았다. 수백 마리의 초파리 중에서 가장 건강한 열다섯 마리를 골라 번식시키는 것이 원영의 업무였다. 원영의 선택을 받은초파리들은 시험관에서 일주일을 더 살 것이다. 나머지는 냉동실에 보관되다가 폐기처분될 것이다. - P10

이 안 되었던 시절에도 원영은 비슷한 말을 들었다. 학원비 몇 푼버느니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편이 낫지 않냐는 식이었다. 원영은 자기 일을 갖고 싶었다. 집을 갖고 싶다거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여느 사람처럼 그랬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삼십삼 년 동안 그랬다. 텔레마케팅 사무실은 창문이 없긴 했지만 무제한으로믹스 커피를 제공하는 탕비실이 있었고 천장에는 시스템 에어컨이 있었다. 칸막이가 설치된 책상이 직원 모두에게 제공되었다.
가져본 적 없는 자신만의 책상이었다. 첫 출근 전날 원영은 문구점을 찾아갔다. 딸의 책상에서 본 볼펜과 필통, 사무용 방석과 무릎 담요, 텀블러와 손뜨개 코스터 따위를 구입했다. 가족사진이들어 있는 작은 액자도 가방에 챙겼다. 사무실 책상을 꾸미기 위해서였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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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당신
신유진

어쩌면 허구의 삶을 산 것일지도 모른다는 어린아이의 불안이 지금 우리가 만나는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의 근원일 것이라 짐작해본다. ‘문학은 인생이아니라, 인생의 불투명함을 밝히는 것 혹은 밝혀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 작가의 작품 세계의 시작점 말이다.
생각해 보면 글을 쓰는 일은 어두운 곳에 불을 켜는 일,
그러니까 발견하고 발견되어지는 존재를 향한 일이아니겠는가. 나는 이제 그가 그토록 밝히고자 했던 그어둠이 그의 내면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깊숙한 곳에서 정확한 언어로 나아가는 그의 걸음이 그림자의근원을 향하고 있다는 것도 죽은 자를 깨워 다시 죽게하기 위해, 죽은 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의 말처럼죽은 자의 오래 지속된 삶에 대항해 투쟁하기 위해.
그래서일까, 나는 이 글이 기억의 합이 아닌 분리를목적으로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찢어진 조각을 다시 붙여 온 이전의 작품들과 다르게, 묶여 있던 것을 잘라내기 위한 투쟁 겹쳐진 그림자를 분리하여 한 번 더
‘당신‘이라는 비밀을 밝히는 것, 비록 나의 그림자가 ‘당신‘에게서 탄생한 것이라 할지라도 온전히 ‘나‘이길 꿈꾸는 존재의 욕망이 아닐까
이 편지의 다른 제목을 붙인다면 나는 이렇게 적어보겠다.
‘나‘이기 위해 부르는 ‘당신‘.
<추천사>중에서


사람들은 무덤 앞에서 많은 생각을 할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나는 부모님 무덤 앞에 잠시 멈춰서서 시간을 보냅니다. ‘저 왔어요‘라고 말하듯이. 1년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내가 그동안 무엇을 했고, 어떤글을 썼고, 무엇을 쓰고 싶은지 알려드리듯이. 그러고는 오른편의 당신 무덤에 가서 매번 묘비를 쳐다보고,비문을 읽곤 합니다.  - P11

어머니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되살릴 자신은 없어요. 다만 오늘까지 매년 한 해 한 해가 지나도 사라지지않으며, 열기를 잃고 침묵하는 불꽃처럼 내 유년 시절을 단숨에 집어삼킨 이야기의 내용과 문장들만 떠올따름이지요 그때 나는 어머니 이야기를 들으면서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인 채 계속춤을 추며 두 사람 옆을 맴돌았어요.
[이곳의 언어는 경계가 불분명한 중간지대를 찢어놓고, 나를 덥석 물어 들러붙었다가 사라져버려요.] - P16

‘착하다. 노르망디에서 이 말은 아이와 개에게 주로사용하는데, 순하고 상냥하며 ‘친근감이 있다는 걸 뜻하기도 합니다. 어른들 품에 안기기보다 그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을 더 좋아하면서 어른들과거리를 두는 나는 착한 아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어요. 그러나 나는 내가 부모님에게는 착한 아이라고확신했어요. 심지어 다른 아이들보다 더 착하다고 말이지요. - P22

부모님과나 사이에 이제는 당신이 있어요. 보이지 않지만 사랑스러운 당신이 나는 당신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멀찌감치 밀려났습니다. 당신이 영원한 빛에 둘러싸여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동안 난 그늘로 떠밀려갔지요. 무남독녀라 누구와도 비교당하지 않고 살던 내가 비교의 대상이 된 거예요. 현실은 서로 배척하는 단어들이 만들어냅니다. 더/덜, 또는/그리고, 전/후,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삶이나 죽음 같은 단어들에의해. - P23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이 단어들의 값을 치르게 했어요. 어머니에 대항하여 혹은 그녀를 위해 글을 썼고, 자랑스러우면서도 모멸감을 느끼기도 하는 노동자로서의 어머니 입장에서 글을 썼으니까요. - P23

유년 시절을 거쳐 온 그 어떤 것도 이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때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기억은 나지않지만 슬픔이란 감정은 아니었어요. 아마, ‘속았다‘는느낌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 단어는 훨씬 더 나중에 보부아르의 책을 읽고 난 후에 떠오른 것인데, 내게는 비현실적이면서도 비중 없는 단어로 느껴졌고,
아이였던 내 존재에 더해지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어요. 적절한 단어를 오랫동안 찾아 헤맨 후,
의심의 여지 없이, 내게 가장 잘 맞는다고 여겨진 단어는 ‘잘 속는‘이었답니다. 치욕적이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나는 잘 속는 아이였어요.  - P24

당신이 성모마리아와 참 좋은 예수님을 보러 갈 거라고 말했다는 걸 알고, 당신을 원망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내가 부적격자라는 걸 보여주었던 그 말이 내입술을 넘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하나님을 보고 싶어 했던 적도 없었으니까요. 그 후 어른이 되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를 정도로 원망했던 대상은 당신에게 부질없는 말을 믿게 했던 어머니였습니다. 이제 더는 화를 내지 않아요. 모든 위로와 기도, 노래는 죽음 앞에서 흔들리는 순간에 가치를 발휘한다는 생각을 인정하지요.
그리고 당신이 행복하게 떠났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좋습니다. - P25

몇 년을 둘러쌌던 희미하게 웅성거리던 말들 속에서당신의 부재로 나를 에두르며 자연스레 내 주위를 떠돌았던 게 분명해요. 가게에서, 혹은 전란 중이라 팔물건과 손님이 없어 매일 오후마다 나를 데리고 간 공공정원 벤치에 앉아 다른 여자들과 시간을 보내던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내 의식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어요. 이미지도 단어도 없이 그저 존재했을 뿐이지요. - P28

이외에 아직 말하지 않은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내 생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건, 다섯 살 때 죽다 살아난 이야기예요. 그건 또 다른 이야기인데, 주인공은 오로지 나였어요. 어린아이였던 내게서 당신이불쑥 튀어나왔던 그 여름의 일요일을 나는 지금도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있는데도 감출생각 않고 아버지보다 훨씬 더 자주, - 유년 시절을 기록하는 건 여자들이지요 - 희열마저 느끼며 그 일을 수도 없이 이야기했어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라도할 것 없이 크게 놀라며 경탄을 금치 못하곤 했으니까요 - P32

폭격을 맞는 것보다는 덜했겠지만 그 당시 엄청난고통을 겪었다는 것을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그래도수없이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 순간의 이미지는 일찍부터 머릿속에 붙잡아두었어요. 햇빛이 가득하던 공공정원을 다시 봅니다. 나무판이 뽑힌 벤치 위로 기어오르며 놀다가 다친 내가 부모님께 달려가요. 부모님은풀밭 위에 누워 있고, 나는 왼쪽 무릎 아래에 빨갛게인 작은 상처를 보여주어요. 그들은 "괜찮아. 별거 아니니까 가서 놀아"라고 말하지요. - P34

현실은 유년기에 형성된 믿음에 크게 영향을 주지않습니다. 1950년에 나를 살게 했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살 수 있게 한 것은 현실과 함께한 기적이었을 거예요. 사망 선고를 받았던 내가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첫 번째 이야기가 당신의 죽음과 나의 부끄러움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두 이야기는 어떻게 연결되며, 어떤 진실이 작동하여만들어진 걸까요. 나는 모순처럼 보이는 이 미스터리를 풀어야만 했어요. 착한 소녀이자 어린 성녀였던 당신은 구원받지 못했고, 악마였던 나는 살아남았으니까요. 아니, 살아 있다는 것 그 이상의 기적이 내게 일어났던 거죠.
그렇게 당신은 여섯 살의 나이로 죽어야만 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오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알 수 없는 신의 섭리 안에서 살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자부심과 죄책감. 아마 죄책감보다는 자부심 쪽이 더 큰 것 같아요. 하지만 무엇을 위해 선택된 걸까요. 스무 살 때, 폭식증과 무월경의 지옥까지 내려간 - P38

후, 답을 얻었습니다. 그건 글을 쓰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지요부모님 집의 내 방에 클로델의 문장을 붙여놓았어요. 사탄과의 계약처럼 라이터로 가장자리를 태운 커다란 종이에 정성스레 옮겨 적은 문장을요.

그렇다. 나는 믿는다.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세상에온 것은 아니라는 걸. 그리고 내 안에는 세상이 묵과할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나는 당신이 죽었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죽은 것은 내가 글을 쓰도록 하기 위함이에요.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 P39

그들은 피난과 점령과 폭격을 겪었고, 당신의 죽음을 겪었어요. 아이를 잃은 부모인 겁니다.
당신이 거기 있어요. 보이지 않지만, 그들 사이에.

그들의 고통으로그들은 당신에게 ‘다음에 크면‘이라고 말했을 거예요. ‘내년에‘, ‘올여름에‘, ‘곧‘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나열하면서, 읽는 걸 배우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혼자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을 테지요. 그러나 어느날 저녁, 미래의 자리에는 공허만이 남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내게도 같은 말을 반복했어요. 나는 여섯살, 일곱 살, 열 살이 되었고, 당신 나이를 금방 넘어섰습니다. - P47

어느 순간, 내가 당신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걸 그들이 알아차린 게 분명해요. 하지만 난 그들이 언제,
어떤 일로 알게 되었는지는 결코 알 수 없을 겁니다-그래도 침묵을 깨기에는 이미 늦어버렸어요. 너무 오래된 비밀이었으니까요. 그들로서는 이제 와서 비밀을털어놓는 게 꽤나 복잡해져 버린 거지요. 나는 그 비밀과 함께 살아왔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이들은 비밀을간직한 채,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 것과 함께 살아가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렇답니다.
침묵은 그들과 나,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비밀이 나를 지켜주었어요. 가족 중에서 죽은 아이들을 숭배해야 하는 부담을 피하게 해주었으니까요.
그건 살아 있는 자들에게 알 수 없는 비참한 마음을 안겨주어요. 내가 분노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 P54

그들은 차례차례 땅에 묻히면서, 1938년 봄에 잃어버린 모든 것, 당신에 대한 살아 있는 기억을 무덤 속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당신의 첫걸음, 즐겁게 놀던 당신모습, 당신의 두려움과 아이들에 대한 당신의 질시, 당신이 학교에 입학하던날. 당신의 죽음은 이 모든 기억을 견딜 수 없는 회한으로 바꾸어놓았지요. 이와는 반대로 그들은 내게 진절머리를 냈어요. 나는 수많은 일화로 채워진 유년기를 보냈지만, 당신의 유년에 비하면 텅 비어 있는 셈이에요. - P58

글을 쓰면 쓸수록마치 꿈을 꾸듯 이끼만 잔뜩 돋은 인적 없는 습지에서걸음을 내딛는 듯하고, 단어들의 틈새를 헤치고 나아가 불분명한 것들로 가득 찬 공간을 넘어가야 할 것만같아요. 내겐 당신을 위한 언어도, 당신에게 말해야 할언어도 없으며, 부정적인 방식을 통해 지속적인 비존재 상태로 있는 당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감정과 정서의 언어 바깥에 있는당신은 비언어입니다. - P61

나는 그들의 고통 속에서 산 것이 아니라, 당신의부재 속에서 살았습니다. - P64

만일 감정에 관한 단어들을 쭉 늘어놓는다 해도, 내유년기와 그 이후의 삶에서도 당신에게 해당하는 내감정의 단어는 하나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은 죽은 사람이기에 증오할 대상이 되지 못하며, 관계가 가깝든 멀든, 다른 사람을 향해 인간의 마음에서 솟아나오는 애정의 대상도 될 수 없지요. 백지 같은 감정. 내가 ‘무덤‘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서 이름 없는 당신의 존재를 의심했을 때, 고작해야 불안함이 더해졌을 뿐인중립의 감정. - P65

당신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갈구했으며, 나의 자부심은 라틴어였고 대수학이었어요! 또한 사랑과 섹스를 상상하며 글을 구상하는 일에 마음을 온통 쏟아부었지요.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픈 생각조차 없고 오로지 미래만 꿈꾸는청소년에게 전쟁 전에 사라진 어린 소녀의 실체 없는이미지가 얼마큼의 무게를 가질 수 있을까요? 행복하거나 - 생리를 시작하고, 사랑에 빠지고, 모파상의 《인생》과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읽는 것 - 불행했던 -1952년의 일요일 - 모든 일에 비해, 혹은 이브로에서 보내는 갑갑하고 지겨운 여름방학처럼 아무 일 없는 나날이나 그래도 곧 다가올 일들 - 차가워진 상쾌한 공기가 예고하는 학교에서 맞을 아침과 사랑 노래, 토요일마다 루앙의 기차에서 내리는 학생들로 왁자지껄한분위기에 비해 당신의 죽음은 내가 고려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어요. - P66

나는 외동딸로서 내가 갖는 이점을 알고 있었어요.
더구나 다른 아이가 죽은 후에 온 아이기에 늘 마음 졸이며 더욱 정성을 쏟게 되는 애정의 대상이었지요. 아버지는 무엇보다 내가 행복하기를 바랐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지요. 그들이 바라는것이 더 많아질수록, 나는 친지들 사이에서 그리고 우리 노동자 마을에서 특권을 지닌 부러움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빵 심부름도 하지 않았고,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손님들에게 ‘나는 손님을 맞지 않아요‘라고 대답하곤 했지요. 당신은 그들의 슬픔이었어요. 그러나 나는 그들의 희망이자 골칫덩이였고, 첫영성체부터 대학입학 자격시험까지 그들의 이벤트였으며 성공이었습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내가 그들의 미래였지요. - P68

내가 피해선 안 되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남자의 자리》를 쓸 때, 현실에 보다 가깝게 쓰려는 마음을 갖지 않았더라면, 지난 세월 동안 당신을 가둬두었던 내 어두운 내면으로부터 당신이 다시 올라올 수있었을까요? 이 편지처럼, 내가 쓴 책들은 마치 출구가보이지 않는 통로에서 자꾸만 겹겹이 드리워지는 천들을 하나씩 들추며 나아가듯,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 속에 가라앉아 있던 당신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일까요? - P70

‘당신‘은 덫입니다. 숨 막히게 하는 무언가를 가진채, 역겨운 슬픔의 냄새를 풍기며 당신에 대한 가상의친밀감을 만들어내요. 나를 비난하려 가까이 다가오죠.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당신 때문이라고 믿게 하며,
당신의 죽음을 우위로 두어 내 존재 전부를 깎아내리려 합니다. - P71

당신의 생명에서 영원을 얻은 내 생의 광활함이 나를 뒤덮습니다. 내 뒤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이 있어요. 보고, 듣고, 배우고, 잊어버리는 것들, 동고동락하는 남자와 여자들, 거리들, 저녁과 아침들.
과잉의 이미지가 넘칠 정도로 내게 쏟아집니다.
아주 멀리 있으나 너무나도 선명한 이미지. 그것들은 처음부터 릴본에 있었어요.
당구대가 있는 카페 홀, 나란히 놓인 대리석 테이블, 식탁에 앉아 있던 폴드렝 씨와 치아가 두세 개뿐인그의 부인, 그리고 다른 손님들의 어렴풋한 실루엣포석이 깔린 작은 안뜰로 난 유리문, 유리문으로 공간을 구분한 식료품 가게와 주방 - P79

계단 위쪽의 식사실, 테이블 위의 반구형 컵과 그안에 꽂아놓은 검은색과 오렌지색 셀로판지 꽃들짧은 털에 끊임없이 몸을 떨고 강에서 잡아온 쥐들을 죽이던 암컷 개, 푸페트거무스름한 데제네테 방적공장 대단지와 철판으로만든 거대한 굴뚝방앗간과 빛바랜 초록 물레바퀴 - P80

며칠 후 투생 휴가가 돌아오면 언제나처럼 산소에갈 생각이에요. 이번에는 당신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을까요?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건네야 할 필요가 있을지,
이 편지를 썼다는 게 부끄러울지 자랑스러울지, 편지를 쓰고 싶었던 욕구가 정말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마 나는 당신의 죽음이 내게 준 삶을, 이번에는 내 차례가 되어 당신에게 돌려주며 가상의 빚을 털어내길원했던 것 같아요. 아니면 당신과 당신의 그림자로부터 떠나기 위해 당신을 되살리고 다시 죽게 한 걸 수도있고요. 당신에게서 벗어나려고.
- P89

물론, 이 편지의 수신자는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은읽지 않을 테니까요. 편지를 받을 사람은 다른 사람들,
바로 독자예요. 내가 이 편지를 쓸 때, 당신만큼이나 보이지 않았던 자들이지요.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편지가 우리는상상할 수 없는 신비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당신에게닿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여름의 일요일에, 어쩌면 튀렝의 방에서 파베세가 자살했던 그날에,
나 역시 수신자가 아니었던 이야기를 통해 당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2010년 10월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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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하루 (타계 10주기 특별판)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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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폭폭해서 숨 고르기가 필요한 날, 약 처방을 받듯 박완서님을 읽는다. 진통효과는 적확하고 빠르다. 특히 표지부터 환하고 따뜻해지는 <기나긴 하루>는 살아내지 못한 하루들로 가득해서 지금의 폭폭함쯤이야~배짱이 생긴다. 책을 펴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생의 스승이 계셔 살만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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