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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의 방법
               박은정

  평생 인형의 얼굴을 파먹으며
  배고픔을 달래는 아이
  네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내 이빨은 단단해졌다
  말을 해도 말이 하고 싶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살을 꼬집으며
  되물어보던 허기처럼
  형광등은 깜빡이고
  인형은 얼굴도 없이 던져졌다

  오늘 이 자리,
  용기가 있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겠지만
  모두들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앉아
  손뼉을 치며 웃는다

      시집[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중에서

      말을 잘하는 사람 중에 속된 표현을 써서 ‘이빨 깐다‘고도 하는데 이 시 속의 단단해진 ‘이빨‘이 그 ‘이빨‘일까 하면서 읽었다. 쓰는 이가 행간에 무엇을 담아두었든 읽는 이의 몫으로 돌아오는 시가 좋다. 어수선하고 참담한 심경으로 폭격을 맞은 키예프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이빨˝을 까는 세계 정상들의 입을 바라다본다. 어수선하고 참담하기는 마찬가지인 선별검사소에서 PCR 검사를 할 때도 어떤 여자분은 방역요원을 향해 소리를 질렀고, 나이 지긋한 어르신은 내 뒤에서 앞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이동을 하시며 누군가와 마주치기만 하면 당신의 상황을 하소연하기 바빴다.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을까 봐 온갖 ˝이빨˝들이 난무한다. ˝육이오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닌˝ 이 코시국 상황 타령도 전쟁에 무방비로 노출된 우크라이나를 생각하면 부끄러운 밤이다.
     ˝오늘 이 자리,/ 용기가 있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겠지만/ 모두들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앉아/ 손뼉을 치며 웃는다˝ 쓰게 그저 웃는다. 그것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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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이 우수,
  나무들 조용조용 부산하다.
  먼 물소리로
  몸을 부풀린다.
  문 밖에 봄이다.


우수
안도현

그리운 게
없어서
노루귀꽃은 앞니가
시려

바라는 게
없어서
나는 귓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내소사 뒷산에
핑계도 없이
와서

이마에 손을 얹는
먼 물소리

시집<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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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매 할머니의 시
           김승희

  저기 파출소가 있네
  잘 외워둬야지
  나를 분실할까 두려워
  외출할 땐 주민등록증을 손에 꼭 쥐고
  내 신체의 일부에 아이들 외국 전화번호를 새겨둬야 하는데
  팔에 새겨둘까 다리에 새겨둘까
  가슴에 새겨둘까
  유방 위부터 쇄골 있는 곳까지 거기 가운데가 좋겠어?
  아니면 둥글넓적한 복부 한가운데

  잊어야 좋은 것들
  잊으면 안 되는 것들 사이사이로
  백발에 맨발로 거리를 배회하다가
  착한 경찰관 아저씨의 안내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집
  할머니, 집에 아무도 없어요? 자제분들 안 계세요?

  그러면 바지를 내리고
  복부 한가운데 새겨둔 아이들 이름과 전화번호를 보여줘야 해?
  신이 말했잖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그러므로 나의 배에다 이름과 전화번호를 새겨놔야 해?
  아 그건 좀 아무래도......
  그러면 가슴 한복판, 양쪽 유방 위 쇄골의 영역에다 새겨서
  옷을 올리고 보여줘야 해? 하하, 그래도 그게 좀 낫겠다

  인생은 다 재미있어,
  똥오줌 그게 문젠데
  너무 제정신으로 똑 부러지게 인생을 살 필요는 없어
  초월을 못하잖아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중에서


  픽~ 웃음이 나는 시다. 웃기지만 슬프다. 요즘 말로 웃픈, 시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치매‘라는 단어만 들어도 두려움이 슬금슬금 파고든다. 치매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고,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을 시인도 알고 있다. 한때는 머리를 쓰지 않으면 치매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해서 어른들 사이에 고스톱 치는 게 유행이기도 했다. 고스톱은 점수를 계산해야 하고 상대방이 가진 패를 짐작해야 하고 손을 움직이는 운동이 계속되기 때문에 치매 예방에 좋다는 썰이 떠돌던 시절이었다.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맞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유가 깊은 시인의 치매에 대한 근심은 그저 기우이기만 한 것은 아님 또한 알고 있다. 저렇게 자연스럽고 적나라한 감정 변화와 걱정들이라니 시인의 의식은 명료하다. 혼자 지내기에 더욱 걱정의 종류는 많아질 것이다. 어디다가 연락할 곳을 적어두지, 하루하루 달라지는 기억력은 몸의 어느 부분에 문신처럼 새겨놓아야 할까? 이 현실적인 고민들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노인을 본다. 노인, 쉬운 단어이면서 어려운 단어이기도 하다. 누구도 노인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노인이 되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늙으니까. 영원히 나이들 것 같지 않았지만 지금 내 나이 또한 노인을 향해 성큼 다가가고 있다. 치매도, 노인도, 그 사람이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언제나 하고 있다. 어쩌면 죽음보다 ‘치매‘와 ‘노인‘이 더 심각한 걱정거리다. 그러나 걱정한다고 뭐가 달라지랴~! ˝인생은 다 재미있어˝ 앞서서 걱정하지 말고 오늘을 재미있게 살자고 시인은 결론 내린다. ˝너무 제정신으로 똑 부러지게 인생을 살 필요는 없어˝


  활동을 위한 시간이 있다면 게으름을 피우기 위한 시간도 있다. 카이로스다. 우리 문화는 후자가 아닌 전자만 중요시한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왕성하게 활동한 작가였지만 가끔은 모든 일을 멈추고 쉬기도 했다. 두 사람이 로마에서 보낸 여름들은 무無를 확장하는 시간이었다. 보부아르는 자신의 여러 프로젝트와 끝없는 분투를 잠시 옆에 치워두고 로마에 ˝몸을 담갔다.˝ 비버는 쉬고 있었다.
  ‘수용‘은 보부아르가 자주 쓴 단어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수용과 유사한 무언가를 이뤄냈다. 일흔다섯 번째 생일을 하루 앞둔 날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했다. ˝나이 드는 데에도 장점이 있다.˝ 니체처럼 보부아르도 지난 삶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최대한 많이, 최대한 오랫동안 즐겼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p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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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박소란

바닥에 놓인 가방을 보았다
어쩌다 가방을 보게 된 건지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오 가방일 뿐이니, 말하는 가방을 보았다

여기까지 오는동안 점차 무거워진 가방을

무엇이 든 건지 알 수 없었다
큰일을 앞두고 돌아누운 이의 뒷모습처럼
묵묵한, 자세히 보면 신음도 없이 들썩이는 어깨가 먹먹한

정말 필요한 건 가방 속에 없다오
아무 것도 없다오
눈을 감는 가방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언젠가 가방을 끌어안고 달린 적이 있었다고
숨이, 아니 끈이 끊이질 듯 위태롭던 어느 밤의 가방을

가방이란 으레 그런 것이라오

가방을 되찾을 수 없었다 그 하나의 가방을

어디로 떠날 참인가요?
물어도 대답이 없는 가방을
어느 틈엔가 나타나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한 사람을 보았다

황급히 문을 여는 사람은
어떤 무게로 인해 잠시 휘청거리고, 나는 보았다
가서는 다시 오지 않을 가방을

시집 [있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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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박소란

옷장 속 가장 어두운색을 고른다
무표정한 얼굴로
숨어서, 때때로 완벽히 숨겨진 채로

나는 있다

멈춰 서 있다 사거리 횡단보도 앞
휴대폰을 만지작대며, 만지작대는 척하며 미간을 슬쩍 찌푸렸을 뿐인데
너는 그대로 나를 지나친다
휴대폰을 만지작대며

깜박이는 신호등
그늘을 펼친 가로수 아래 황급히 들어서면
겹겹의 잎으로 싸인 길을 뜻 없이 걷다 보면
또한 뜻 없는 저녁은 오고

무시로 두리번거린다
무엇을 찾듯이 어떤 우연을 바라듯이

불분명한, 나조차 나를 알 수 없는
사람이란 으레 그런 것일까

때가 되면 출근을 하고 구석 자리에 얌전히 앉아 서류철을 매만지면서
어쩌다 가끔은 아니지 이게 아니다 하는 심정이 되어 창 너머 뜨거운 시선을 부려놓기도 하는 것, 그럴 때마다
네게로 곧장 달려갈 듯이, 그럴 때마다
더욱 고요히 뭉뚱그려진 채로

나는 있다

이런 나를 뭐라고 부를까 너는

시집[있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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