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내가 진심으로 감탄해 마지않은 건 펜스 너머로 펼쳐진 풍경이었다. 비탈을 올라올 때는 그저 암벽처럼 보였던 축대의 뒤편으로 숲이 우거져 있었던 것이다. 조금씩 다른 농도로 이루어진 초록의 다발을 가만히 눈에 담고 있자니 서울 근교의 펜션이나 산장으로 캠핑을 온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왜 이런 풍경을 보지 못한 건지 의아해하는 사이 인주씨가 말했다. - P114

그리고 한동안 제자리에 서서 테라스가 아닌 베란다라는 공간을 둘러봤다. 나무 바닥이 빛을 반사하며 윤이 나는 것처럼 일렁였고 이마에 와닿은 햇볕이 한가을임에도 제법 따스했다.
그렇게 얼마쯤 서 있었을까. 건너편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을느끼며 숨을 한가득 들이마시는데 가벼운 진동 소리가 났다. 눈을 돌리자 인주씨가 휴대폰을 확인하며 피식 웃었고, 이내 뭔가를 증명하려는 것처럼 화면을 내쪽으로 들어 보였다. 카페에서책을 읽고 있는 주호의 사진 위로 하트 이모티콘이 선명했다.
빨리 오네요. 서울 들어오면 전화한다고 했거든요. - P115

그날 주호는 한때 경험했던 배우의 삶에 대해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몸담았던 극단의 역사와 구조, 운영 방식은 물론이고 함께활동했던 선후배들의 성격이나 심리상태, 평균 소득까지 얘기했다. 나는 어쩌다보니 극단의 설립자이자 몇 년 전 성범죄 사실이밝혀져 극단을 공중분해시킨 연출가가 메소드 연기 주창자인 스타니슬랍스키의 신봉자라는 것도 알게 되었는데, 그건 주호가 너무 암울한 얘기만 하고 싶지는 않다며 자신이 습득한 호흡과 발 - P116

성, 걸음걸이, 장면 연기 같은 훈련법에 대해 꽤 자세히 설명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주호가 애써 해주는 말들에 집중하지 못했다. 흘려들은 건 아니었으나 주호가 무슨 말을 더 할 때마다 이렇게 대꾸하고 싶은 마음에 제대로 귀담아들을 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럼 뭐해, 너는 이제 안 한다며. - P117

성 소수자의 사회적 가시화나 시민권 획득, 동성혼 법제화에대한 책을 주로 읽는 모임 안에서 주호는 낯선 존재였다. 젠더 다양성이나 해체를 운운하는 주호를 다들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가슴으로는 아니었고, 그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게 힘겹게 받아들인 정체성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경험이지 다시 혼란해지거나 불안해지는 경험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려온 사람들을 직접 만나야만 느낄 수 있는 위안과 위로, 소속감이 절실했고, 모임은 모든 성별과 정체성을 환영한다는 기조를 내걸기는 했으나 어쨌든 게이 정체성을 핵심 동력으로 삼고있었으니까. - P118

하지만 나는 그런 주호가 마음에 들었다. 모임 안에서 체호프를 좋아하는 유일한 사람이어서 마음이 가는 것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하는 말에 과연 그런가 싶은 뚱한 표정으로 한 번씩 물음표를 던지는 모습은 특별해 보였으니까. 주호는 배열이 조금 다른 회로를 장착하고 있는 듯 자신에게 다가오는 건 그게 사람이든 생각이든 감정이든 일단 멈추게 한 다음 판단을 보류했고, 나는 무릇 예술가란 이래야 하는 게 아닐까, 뭐든 그런가보다 하며당연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이렇게 의심하고 분별해봐야 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그즈음 주호가 학교 사람들과 선보인 몇몇 무대는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내게는 그런 어설프고 난삽한 무대를 감행하는 주호의 객기마저 남달라 보여 우리는 차차따로 만나 연극을 보거나 서점에 가거나 밥을 먹으며 가까워졌다. 무엇보다도 읽은 소설이나 희곡 얘기를 할 때면 역시 대화란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잘 통했고, 함께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 P119

주호는 자신과 인주씨 모두 타인에게 성적 끌림은 느끼지 않으나 로맨틱한 끌림은 느끼는 유로맨틱이라 했고, 자신은 양성 모두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는 논모노로맨틱, 인주씨는 이성에게만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는 모노로맨틱이라고도 했다. 지금 뭐라는 거냐고 되묻고 싶은 내 마음이 표정에 역력했는지 주호가먼저 웃었다.
알아, 복잡하지. 나도 헷갈려.
나는 정체성이라는 게 필요하면 장착했다 싫증나면 벗어버리는 게임 아이템 같은 건가 싶어 헛웃음이 나왔고, 도대체 어떻게성적인 끌림을 느낄 수 없다는 건지, 아니 그럴 수 있대도 그건 정체성이라기보다는 일정 기간의 상태가 아닌지 묻고 싶었다. 만약그런 상태가 지속되는 거라면 병원에 가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고. 하지만 정작 입을 열었을 때 내게서 튀어나온 질문은이거였다. 내가 정말 궁금한 것도, 내게 가장 중요한 것도 사실은이거라고 자인하듯이.
- P122

나는 찬물 세례라도 받은 것처럼 동작을 멈췄다. 나를 스치는인주씨의 눈빛이 자신은 소설가란 족속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는 비난 혹은 자신을 함부로 소재 삼지 말라는 경고로 다가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인주씨가 그렇게 묻기 전까지는 오늘에 대해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므로 그 순간의 내 대답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때 인주씨가 난해한 모양새로 눈썹을 치켜올리더니왜냐고 물었다. 혹시 우리의 만남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거냐고묻기도 하고 자신이 한 얘기가 재미없었던 거냐고 묻기도 하면서장난스레 서운한 척을 했다. 내가 그런 게 아니라며 머뭇거리는사이, 인주씨가 말을 이었다. - P129

나는 인주씨가 하는 말의 진의를 파악해보려다 애매하게 남아있던 웃음기를 지웠다. 내가 다른건 몰라도 소설을 쓰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진지하다는 것을, 무엇을 쓸 수 있고 또 없는지에 대한 나름의 가치판단을 하며 글쓰기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당사자도 아니면서 그 삶에 대해 내가 함부로쓸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말했고, 만에 하나 그게 더 큰 의미를 보장한다고 해도 잘 알지도 못하는 걸 쓰고 싶지는 않다고도 말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나는 커밍아웃과 진배없었던 첫 책 출간 이후로, 그렇게 나 자신을 까발려도 환대받을 수 있다는 경험을 획득한 이후로 더욱더 내게이 정체성에 천착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그건 자기 삶을 내걸어 쓴 게 분명해 보이는 작품에만 마음이 가는 내 편협과도 관련이 있었다.
- P130

내가 주호와 인주씨,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자신을 에이섹슈얼로 정체화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알게 된 건 그날로부터 반년여가 흐른 뒤였다. 그즈음 내 첫 책의편집자인 규철씨가 중쇄 소식을 알리며 혹시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지를 물었다. 메일에는 규철씨가 지난 주말에 책을 다시훑어보며 잡아냈다는 오탈자가 정리되어 있었는데, 출간 전 그렇게 여러 번 들여다봤건만 또 고칠 게 나온다는 게 어쩐지 기묘한것 같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아무래도 이 문장은 재고해보는 게좋겠다는 규철씨의 제안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황급히 책을 펼쳤다. 그리고 297쪽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기어코 커밍아웃을 했으나 그 이후로 날마다 쏟아지는 원색적인 비난과 악성 댓글에 결국 공황장애를 앓게 된 배우 김학수가 어느 날 백오십만 명이 지켜보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피드에남긴 울분의 메시지였다.

차라리 무성애자였으면 좋겠어.
아무 감정도 못 느꼈으면 좋겠고 누구도 사랑할 수 없으면 좋겠어.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책속에 이런 무지와 혐오를 보란듯이 전시해놓고도 까맣게 몰랐는지, 어떻게 이런 걸 써놓고도 출간 직후 주호에게 다정한 인사말 - P133

을 적어 책을 선물했으며, 어떻게 그토록 당당하게 연대와 다양성과 자긍심 같은 말을 끌어다 책을 홍보했는지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싶지만 나는 정말이지 몰랐고, 어쩌면 계속 모를 수도 있었지. - P134

나는 오래전부터 그날에 대해 써보고자 했다. 뭔가를 써야 할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날이 다가와 나를 건드렸을 뿐만 아니라 그날에 대해 쓰지 못하면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로부터 얼마만큼 멀어졌는지 나 자신에게조차 증명할 길이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날에 대해 쓸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내 한계를 확인하고는 지운다.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투박한 나머지 우리를 흐릿하게 뭉개놨다는 판단에 지우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성급한 나머지 우리를 매끄럽게 정리해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지우며, 또어느 날은 내가 쓴 것들이 모두 궁색한 자기변명 같다는 느낌에지운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또 지우다보면 어김없이 어떤 대사를 마주한다. 끝내 지우지 못하는 아니 모조리 지워도 속절없이 다시 쓰게 되는 그 대사를 - P135

그리고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현실의 알리바이를 모두 소거한 허구를 만들어냈다는 기쁨보다는 결국 무엇을 쓰더라도 나를 경유하지 않을 수 없다는 한계를 확인하는 게 더 좋았다.
전혀 의도하지 않아도 내 일상이 어떤 식으로든 소설에 담긴다는게 좋았고, 살아가는 일과 쓰는 일이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게 좋았다.
소설과 삶이 서로에게 무용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 소설과삶이 서로를 외면할 수 없음을 확인하는 것. 요즘 내게 점점 더 중요해지는 건 바로 이런 일들인 것 같다.

소설에서 삶을 말끔하게 분리하는 노력이 아니라 소설과 삶 사이의 복잡한 긴장을 버티는 노력을 하고 싶다. 완전무결해지려는노력이 아니라 그럼에도 천천히, 조심스럽게 연루되어보려는 노력을 하고 싶다. 어차피 어려운 일이라면, 그래도 무릅쓰고 싶다면 그게 더 좋을 것 같다. - P139

‘우리‘의 가능성을 묻는 ‘나‘의 소설이 한계에 부딪히고 마는까닭도 이러한 물음에 있다. ‘나‘의 탐색은 소설의 문법과 싸우는 일이고, 궁극적으로는 소설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사회의 규범과 통념 등의 이데올로기와 싸우는 일이다. 그 싸움에서 ‘나‘는 항상 무력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우리‘는 사유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유와 실천은언제나 ‘나‘의 몫이다. ‘나‘들이 사유하고 실천하는 그때에야 ‘나‘
는 ‘우리‘일 수 있고, ‘나‘보다 거대한 것과 맞설 수 있다. 그것이
‘나‘의 한계이자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나‘의 소설은 어떻게 쓰여야 할까. 고작 대상이 이것 아니면 저것임을 지시할 뿐인 리트머스와 같은 도구로는 충분하지 않다. 보다 섬세한 질문과 응답이필요하다. 소설쓰기에 방법이나 정답이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므로 ‘나‘는 쓰고 지운다. 지금도 ‘나‘의 물음과 탐색은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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