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금빛 은빛 무늬든
하늘의 수놓은 융단이
밤과 낮과 어스름의
푸르고 침침하고 
검은 유단이 내게 있다면
그대의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나 가난하여 오직 꿈만을 가졌기에
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았으니
사뿐히 걸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W. B. 예이츠, 하늘의 융단 p41



판사 문유석이 아닌, 책 덕후의 성공한 독서 이야기다. 딱 내 스타일로 유쾌하고 쉽게 풀어 놓으면서 사법 현실의 여러 문제들도 건드린다. ‘내로남불‘이 아닌 성찰이 돋보이는. 책의 많은 부분, 공감이었다.


미래는 결국 우리가 공유하는 이야기다. 자기실현적인 예언이다. 다수가 공유하는 이야기는 힘이 세다. 그것이 곧 법이되고, 도덕이 되고, 가치가 된다. 빅데이터를 이용한 인공지능발전도 인간들의 무수한 행동과 사고방식을 패턴화해 모방하는 데서 출발한다. 미래를 바꾸는 방법은 현재의 사회부터 바꾸는 것이다. 미래의 사회가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쓸모가 없어진 인간을 어떻게 대우할지 궁금하면 지금 이 사회가 탑골공원에 앉아 있는 노인과 편의점 알바 청년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면 된다. 미래의 눈부신 과학 발전이 낳을 부가 어떤 방식으로 분배될지 궁금하면 지금 사회의 분배 구조를 보면 된다. 더 먼 미래에 인공지능 또는 그와 결합한 신인류가평범한 인간들을 어떻게 취급할지 궁금하면 지금 사회가 소수자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보면 된다. 미래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다. 지금, 여기서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는지에 따라.
- P229

상당 구간에서 앉아 갈 수 있게 되자 매일 책을 들고 다니며 읽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전철은 도서관이 되었고, 통근길은 견뎌야 하는 고통이 아니라 끝나가는 것이 아쉬운 즐거움이 되었다.
사람 심리라는 것이 참 묘하다. 한가한 휴일에 집에서 뒹굴거릴 때는 등허리는 소파와, 손은 리모컨과 합체하는 폐인이되는 주제에, 통근길 전철에서는 세상 다시없는 독서광으로변신한다. 주변이 시끄러울수록 더더욱 책에 몰입하게 된다.
통근길 전철은 책이 유일한 도피 수단이던 소년기로 잠시 데려다주는 타임머신이었다.
하루 세 시간에 가까운 독서 시간이 강제로 확보되자 참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언급한 책들중 대부분이 전철에 앉아 흔들거리며 읽은 것들이다. 그 외에도 엘리자베스 워런 미 상원의원의 자서전 『싸울 기회, 경제학계 두 거목의 일대기 『케인스 하이에크, 심지어 900이넘는 벽돌책 『빈 서판까지 전철에 앉아 읽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 P249

통근길 전철에서 책 읽기는 독서 시간 확보 외에도 장점이있었다. 각인 효과‘다. 오리 새끼가 갓 태어나서 사람을 보면엄마인 줄 알고 따라다니는 각인 효과처럼, 출근할 때 지하철에서 단 십 분이라도 책 읽기를 하면 뇌의 모드 설정이 그쪽으로 이루어지는지 자연스럽게 계속하게 되더라. 출근 때 책을 보면 퇴근 때도 보게 되고, 이어서 밤에도 뒤가 궁금해서라도 보게 되고, 반면 출근 때 페북질을 시작하면 ..
이때의 좋은 기억 때문에 읽든 못 읽든 책을 들고 출근길에나서려고 한다. 하루의 시작을 책과 함께한다는 것은 충실한하루를 여는 좋은 방법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객차 안을 둘러보아도 책을 들고 있는 이는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모든 이들이 똑같이 고개를 숙이고 뭔가 엄청난 보물이라도 들어 있는 양 일제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풍경은 사실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좀 무서운 모습이다. 사이비종교 의식 같기도하고, 외계인이 전파로 사람들을 세뇌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 P250

습관이 행복해야 행복하다는 말이 좋았던 이유는 폭넓게생각을 확장해갈 수 있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시민들이 행복한 습관을 누릴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해야한다. 한강시민공원에서 걷고, 자전거를 타고, 연을 날리고,
낚시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라. 공원과 도서관은 행복 공장이자 행복 고속도로다. 교육도 중요하다. 책을읽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고, 요리를 하고, 다양한 운동을 즐기고, 어린 시절부터 각자의 행복한 습관을 찾을 수 있도록 경험을 제공하는 교육이 영재교육 이상으로 중요하다.
개인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다. 남들의 기준이 아니라 솔직한 자신의 기준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들을 찾아야 한다.
- P253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야기하는 교수님을 보며 든 두 가지 생각. ‘아, 아름답다‘ 그리고, 아, 그런데 쓸데없다. 깨달음의순간이었다. 인문학의 아름다움은 이 무용함에 있는 것이아닐까. 꼭 어디 써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궁금하니까 그걸 밝히기 위해 평생을 바칠 수도 있는 거다. 물론 구법승 생환율을 토대로 당시의 풍토, 지리, 정세에 관한 연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꼭 그런 용도로 연구를 시작하신 것같진 않았기에 든 생각이다. 실용성의 강박 없이 순수한 지적호기심만으로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학문의 기본 아닐까. 그 결과물이 활용되는 것은 우연한 부산물일 뿐이고, 수학자들은 그 자체로는 어디에 쓸 일 없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기 위해 350여 년간 몰두했다. 그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많은 수학 이론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 P258

대학 갈 때 써먹을 욕심에 논술학원 보내서 초등학생에게어려운 책을 읽히고 있는 학부모들께 죄송하지만, 눈을 감고생각해보면 입시 때문에 마지못해 본 책은 한 줄도 기억나지않는다. 수업시간에 몰래 보던 소설책, 자율학습 땡땡이치고,
보러 간 에로 영화는 방금 본 듯 생생하다. 글쓰기를 좋아하여 책까지 내게 된 건 그 때문일 거다. 쓸데없이 노는 시간의축적이 뒤늦게 화학 작용을 일으키곤 하는 것이다.
현재 쓸모 있어 보이는 몇 가지에만 올인하는 강박증이야말로 진정 쓸데없는 짓이다. 세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것들이필요하고 미래에 무엇이 어떻게 쓸모 있을지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무엇이든 그게 진짜로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을 당할 도리가 없다.
- P259

나에게 책이란

운동신경 제로의 꼬마에게 방구석에서
허풍선이 남작과 가르강튀아를 따라
대모험을 떠나게 해주던 날개.
부잣집 도련님 친구의 천장까지 가득찬 서가 앞에서
남의 인생을 빼앗고 싶은 리플리의 심정을 느끼게 하던 동경
세로글씨의 누렇게 바랜 책장을 넘기며,
제갈량, 양산박 호걸, 오다 노부나가, 사이토 도산을만나러 가게 해주던 타임머신
맹수의 포효에 몸을 떨며 비니키우스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작은 새 같은 리기아를 보며 조숙하게 찾아온 사춘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중 나는 어느 쪽 인간일까
고민하게 하던 중2병앓이.
대학 문에 들어선 후 접한, 암호 같은 줄임말로 불리던
- P260

모피어스의 빨간악들,
하지만 어느 이즘보다 먹고사니즘이 중하기에
억지로 머리에 쑤셔 넣어야 하던 지식의 파편들.
밥벌이는 하면서도 변하는 세상의 가속도를 감히 따라잡아보려
번지르르한 실용적 지식만 찾아 헤맨 어리석음의 증거들.
뒤늦게 아무 써먹을 데 없어도 가슴을 설레게 하던
옛 기억을 떠올려 재회하는 고전이라는 이름의 첫사랑들
하지만 속절없이 아는 형님> <왕좌의 게임) 다시보기와
카톡방, 페북에 넘쳐나는 석 줄짜리 언어들에뒷전으로 밀리곤 하는 퇴기.

언제나 사랑했고,
언제나 쉽게 버렸던 친구.

널 읽고 싶어,
마지막 장까지.
- P2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은 언제나 수다 떨고 싶어지는 주제다. 책과 여행, 이 두가지에 관해서라면 나는 언제 어디서든 숨도 안 쉬고 몇 시간 떠들고 싶어진다. 하지만 슬프게도 내게 들어오는 책 기획안의 대부분은 내 직업과 관련된 엄숙한 책 아니면 이렇게 살라, 저렇게 살라고 충고하는 책들이었다. 나 자신이 즐겨 읽지않는 종류의 책을 써서 남들에게 권하고 싶진 않았다(참고로수많은 기획안 중에서 ‘쾌락독서‘ 이외에 유일하게 마음이 흔들렸던 것은 ‘걸그룹‘에 대해 써달라는 제안이었다). 물론 그동안 썼던 책들은 분명 사회에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의무감, 또는 세금 내는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 채 마음 한구석에 무거움을 안고 썼던 것도 사실이다. 이 책만큼은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내 즐거움을 위해 쓴다. 언제나 내게 책이란 즐거운 놀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심심해서 재미로읽었고, 재미없으면 망설이지 않고 덮어버렸다.  - P10

먼저 얘기해둘 것이 있다. 내 독서 취향은 그리 특별하지않다. 난 항상 그 시기에 누구나 좋아했던 뻔한 책들을 좋아했다. 남들이 아다치 미츠루 만화를 열심히 볼 때 나도 그랬고, 남들이 하루키에 열광할 때 나도 그랬고, 남들이 김용 무협소설에 대해 침 튀기며 얘기할 때 나도 그랬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사람들을 실망시킬 때도 있었다.
첫 책을 내고 북토크를 했을 때의 일이다. 대학 때 즐겨 읽었던 책이 뭐냐고 눈이 초롱초롱한 여학생이 묻길래 『토지』나 『태백산맥』 같은 대하소설들을 즐겨 읽었다고 대답했다.
순간 감추지 못한 실망의 탄식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한번은 ‘작가의 책‘이라는 릴레이 인터뷰에서 어릴 적 가장좋아했던 책을 묻길래 『삼국지와 만화 『유리가면을 얘기했는데 0.5초 정도 정적이 흐르더라. 이런 반응을 접할 때면 괜히 살짝 미안해지기도 한다.  - P11

책에 관한 최초의 강렬한 기억은 책이 가득 꽂힌 친구의 책꽂이다. 초등학교(정확히 말하자면 ‘국민학교‘ 였지만 역시 ‘국민학교‘라는 말은 별로다) 1학년 때였다.
서울역 뒷동네에서 보기 드물게 부유했던 그 친구의 방에는천장에 닿을 듯 방 한쪽 면 전체에 차곡차곡 책이 꽂혀 있었다. 거의 모두가 ‘세계명작전집 위인전기 ‘과학백과사전‘ 같은 전집류였다. 책들은 모두 깨끗했다. 인간 세상이 언제나 그렇듯 행운은 그걸 그리 절실하게 원치 않는 이에게 편중되게주어지곤 한다. 친구는 그다지 책을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친구의 어머니는 ‘책을 좋아하는 어린 아들을 소망했다.
- P19

그런데 항상 예외는 있다. 엉터리 번역에 어린이용으로 읽어도 『녹색의 장원의 신비로운 소녀 리마는 가슴을 설레게만들었고(상대를 신비화하는 연애물은 의외로 아주 어릴 때부터 먹힌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대단했고(사람이 죽어나가는 파란만장한 연애물은 대단해 보이기 마련이다), 뒤마의『몬테크리스토 백작은 흥미진진했다(치정복수극은 언제나 먹힌다). 『소공녀』 『소공자』가 그리 재미있었던 걸 보면 화려한부자들 세상에 대한 동경 및 빈부·계급 격차로 인한 울컥함이라는 양가감정은 어리나 늙으나 비슷하다.
이런 걸 보면 왜 주말 드라마가 다루는 이야기들이 늘 비슷비슷한지 알 수 있고, 동시에 왜 서사가 강한 대중문학, 장르문학이 인기가 높은지도 알 수 있다. 어린이도 좋아하는 이야기 구조라는 건 결국 누구나 좋아하는 이야기 구조라는 말이기도 할 테니까.
- P23

인간 세상이 언제나 그렇듯 내가 절실하게 선망했던 것이라 하여 누구에게나 같은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다. 이중 무엇무엇이 특히 재미있다고 골라서 따로 뽑아놓기까지 해보았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아이들의 손길을 받아본 책은 제인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전부였다 (역시 로맨스물, 그것도 빈부 격차를 배경으로 한 것의 위력이란).
내 독서에 대해서는 철저한 자유주의자인 주제에 애들 독서에 대해서는 그래도 뭔가 ‘제대로 된 책‘을 좀 읽어주었으면 하는 걱정을 하던 나는 아이들이 열심히 읽어대던 『헝거게임 등을 가져다 읽어보면서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 그 유명한 ‘고전 명작들에서 읽었던 것들이 거기에도 어딘가에 다 있었다. 우정, 유머, 용기, 사랑, 희생, 무엇보다 ‘이야기의 힘‘,
- P25

이 세 장면에 왜 소년 시절의 내가 그리도 매료되었는지 알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지만, 지금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면그저 삶을 바라보는 어떤 한 태도에 본능적으로 매력을 느겼었던 것 같다.
집착하지 않고, 가장 격렬한 순간에도 자신을 객관화할 수있고, 놓아야 할 때에는 홀연히 놓아버릴 수 있는, 삶에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는 그런 태도랄까. 그렇다고 아무런 열망도 감정도 없이 죽어 있는 심장도 아닌데 그 뜨거움을 스스로갈무리할 줄 아는 사람, 상처받기 싫어서 애써 강한 척하는것이 아니라, 원래 삶이란 내 손에 잡히지 않은 채 잠시 스쳐가는 것들로 이루어졌지만 그래도 순간순간 눈부시게 반짝인다는 것을 알기에 너그러워질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주 드물다는 건 어린 시절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동경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어릴 때부터 어떤 결핍도 없이 세상이 모두 나를 위한 커다란 선물 상자 같기만 했던  - P37

내 경우 책 고르기에도 ‘짜샤이 이론‘이 통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 권의 책이 갖고 있는 많은 요소 중에서 나는 유독문체에 좌우되는 편이다. 문장이 내 취향인 글은 내용이 아무리 시시해도 술술 읽게 된다. 반대의 경우 아무리 내용이 훌금해도 결국 견디지 못하고 덮는다. 방금도 책 두 권을 폈다.
가 5분 만에 둘 다 덮었다. 하나는 너무 거창한 관념어가 빽빽하게 들어찬 포르테 범벅의 글, 또하나는 너무나 뻔하고 익숙한 언어의 반복이라 특별함이라곤 한구석도 없는 글.
- P53

전체적인 작품의 주제나 시대적 배경, 역사 등보다 마음에 드는 캐릭터에만 집중해서 소설을 읽는 내 습성은 박경리의 ‘토지를 읽을 때도 계속되었다. 당연히 고양잇과 캐릭터의 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주인공 최서희에 매료되어 읽기 시작했고, 후반부에는 그의 아들들인 환국, 윤국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읽었다. 심지어 후반부에 와서는관심 없는 부분은 휙휙 넘겨버리면시 보고 싶은 부분만 찾아읽기도 했다.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이 대하소설에서 나는일종의 멜로드라마적인 재미가 있는 부분만 집중적으로 읽은것이다. 그래도 분명히 읽을 때는 그 무수하게 많은 인물들의기구한 삶과 비극적인 시대에 저항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감동도 하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나는 건 최씨 일가를 중심으로 한 몇 가지 두루뭉술한 에피소드뿐이다.
이쯤 되니 독서를 주제로 책을 쓰기 시작한 나 자신이 무모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도대체 『책은 도끼다. 같은 책은 어떻게 쓰는 걸까? 어떻게 그렇게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해폭포수 쏟아지듯 감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  - P83

결국 이야기란 각자의 욕망과 감정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접했던 그 수많은 이야기의 주어는 대부분남성에 편중되어 있었다. 여성 작가가 쓴 『제인 에어 빨간머리 앤』 『작은 아씨들이 유독 새롭게 느껴졌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겨우 여성이 주어인 세계를 잠시 엿볼 수 있었다. 아무리 똑똑해도 교사가 되는 것 정도가꿈의 최대치인 세계 말이다.
순정만화의 세계는 반대였다. 무대가 연극이든 발레는 혁명이든 여성이라 하여 주변에만 머무르는 일은 없었다. 여성캐릭터들도 경쟁하고, 좌절하고, 우정을 맺었다. 남자가 주인공이라 하더라도 여성의 감각이 녹아 있었다. 그동안 본 적이없는 다양한 감성의 남성들이 등장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게도 동성애도 자주 등장했다.
- P106

어찌면 나는 동네 만홧가게의 초라한 순정만화 코너에 앉아 나도 모르는 채 세계의 균형을 맞추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란 두 가지 성으로 간단히 분류할 수 있는 단순한존재가 아니다. 개인마다 욕망도 감성도 무지개 색깔의 스펙트럼이 미세하게 변화하듯 다양하다. 나와 반대로 만홧가게안쪽, 공을 던지거나 차고 사람을 때리거나 걷어차는 만화들이 더 취향에 맞는 여학생들도 있었을 것이다.
여학생은 순정만화 코너에, 남학생은 소년만화 코너에 일사불란하게 나뉘어 앉아 가끔 서로를 힐끔거리던 그때의 만홧가게가 떠오른다. 우리는 그곳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
- P107

슬램덩크에는 숱한 명장면과 명대사가 있지만, 그때의 내게 가장 깊이 와닿은 장면은 조금 엉뚱하다. 체격은 좋지만팀 동료만큼 천재적 재능이 없는 센터 변덕규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스스로에게 하는 말, "난 팀의 주역이 아니어도좋다" 였다. 난 이 대사가 이상할 만큼 뭉클했다. 위로가 되는말이었다.
이 대사와 겹쳐지는 말이 또 있다. 〈무한도전) 초기 시리즈인 〈무모한 도전 당시에 유재석이 외쳐대던 "000 씨는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라는 멘트다. 지하철보다 빨리 달리기, 목욕탕 물을 배수구보다 빨리 바가지로 퍼내기 등 말도 안 되는 도전을 멤버들이 차례로 시도해서 미친놈처럼 애를 쓰다가 실패해서 넘어진다. 함께 용을 쓰다가 좌절해 있던유재석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라고외친다. "이번에 도전했던 000 씨는, 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큰 경사라도 났다는 듯 다들 일어나 박수를 치며 - P112

에이스가 아니었어. 팀의 주역이 아니면 어때? 그냥, 내가 중아하는 걸 하고 있으면 그걸로 족한 기 아니? 누가 비아남기려도 웃을 수 있게 된다. 죄송함다. 제가 원래 에이스가 아니거든요..
내가 감히 이렇게 책도 쓰고, 신문에 소설도 쓰고, 심지어드라마 대본까지 쓰고 할 수 있었던 힘은 저 두 마디에서 나온 것 같다. 나도 내가 김영하도 김연수도 황정은도 김은숙도노희경도 아닌 걸 잘 알지만, 뭐 어때?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나는 나만의 풋내기 슛‘을 즐겁게 던질 거다. 어깨에 힘 빼고,
왼손은 거들 뿐.
- P1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이 취해야 할 행동

1, 나의 가치관을 살펴본다.
2, 정보를 모은다.
3, 가치 체계에 합당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
4, 자신의 가치관에 합당하게 개인 투자를 할 수 있을까
5, 내가 속한 기관을 나의 가치 체계에 맞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 각자는 70억 중 한 명일 뿐이다. 내가 가치관을 바꾸는 것만으로 세상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III.
환경 교리문답

1969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인구는 두 배가 되었고
....아동 사망률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며
....평균 기대 수명은 12년 늘어났고
....47 개 도시가 1,000만 명 넘는 인구를 자랑하게 되었고,
....곡물 생산량이 세 배로 증가했고
....제곱미터당 곡물 수확량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으며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경작한 토지 면적이 10퍼센트늘어났고
....육류 생산량이 세 배 늘었고
....연간 도살되는 가축의 수가 돼지는 세 배, 닭은 여섯 - P253

배, 소는 50퍼센트 이상 증가했으며
....해산물 소비는 세 배가 늘었고
....바다로부터 잡아들이는 물고기의 수는 두 배가 되었고
....물고기 양식을 고안해냄으로써 오늘날 먹는 모든 해산물의 절반이 여기에서 나오고 있고
....해초 생산량은 열 배 증가했는데 그 절반은 하이드로콜로이드 식품 첨가제 형태로 먹고 있으며
....정백당 소비량은 세 배 증가했고
....인간이 매일 만들어내는 폐기물은 두 배 이상 늘어났고,
....버려지는 음식 쓰레기가 크게 늘어나 지구상 영양 부족 상태에 놓인 사람들에게 필요한 식량의 양에 맞먹는 상태이고,
....사람들이 매일 사용하는 에너지의 양은 세 배 늘었고
....사람들이 매일 사용하는 전력의 양은 네 배 증가했으며
....지구상 인구 20퍼센트가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전력의절반 이상을 사용하게 되었고
....전기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사는 전 세계 인구가 10억명에 이르며
....비행기 승객은 열 배가 늘어난 데 비해 철도 여행자의전체 이동 거리는 줄어들었고
....자동차로 여행하는 거리는 두 배 이상 늘어났고 지구상에는 10억 대가 넘는 차량이 존재하며
....전 세계 화석연료 사용량은 세 배 정도 늘었고 - P254

....석탄과 원유 사용량은 두 배, 천연가스 사용량은 세 배가 늘었으며
....바이오 연료, 발명으로 전 세계 곡류 생산량의 20퍼센트는 이를 생산하는 데 사용되고....플라스틱 생산량은 열 배 늘어났고
....새로운 플라스틱이 만들어져 매년 화석연료의 10퍼센트를 잡아먹고 있으며
....수력발전으로 만들어지는 전기의 비중은 역대 가장 낮은 수준인 전체 전력의 15퍼센트 미만으로 떨어졌고
....원자력발전으로 만들어지는 전기의 비중은 가장 높은수준인 6퍼센트,
....풍력과 태양력 발전에 의한 전기는 매년 만들어지는전기의 5퍼센트 수준으로 상승했으며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해 매년 1조 톤의 이산화탄소가대기 중으로 방출되고
....지구 표면의 평균 온도는 화씨 1도가량 상승했으며
....평균 해수면이 10센티미터가량 상승했는데, 그 절반정도는 산맥과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내리며 발생한 것이고,
....모든 양서류 및 새와 나비 중의 절반 이상에서, 모든어류와 식물 종의 4분의 1에서 개체 수 감소가 일어나고 있다.
- P2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의 평범성 창비시선 453
이산하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이 될 나무 한 그루 생각한다. 이 시집에 쓰인 나무도 자랑스러울 이산하시인의‘악의 평범성‘. 목숨값이란 이런 거라고, ‘대충 피는 꽃은 하나도 없다‘고, 나도 그렇다고.‘ 시집은 말한다. 시인이 몸으로 관통한 세월의 깊이가 가득하다. 경의를 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발심

이문재


처음으로
둥지를 트는 까치 부부처럼

큰 바다로 나갔다가
모천으로 돌아가는 연어처럼

봄여름 함께 잘 살다가
제 가지에서 떨어지는 단풍잎처럼

팔순 생신상 받으시고
생전 처음이라는 외할아버지처럼

저 멀리 초겨울 첫눈에게 눈짓하는
춘삼월 마지막 눈발처럼

시집 [혼자의 넓이] 중에서



방진복을 입고 근무하는 오늘. 움직이기만 하면 동작보다 먼저 소리가 서걱서걱 존재감을 드러냈고, 흘러내리는 페이스 쉴드, 귀를 쪼이는 마스크, 한참 지나면 나 여기 있다고 신호를 보내 듯 내려온 신발 싸개는 자꾸만 발에 밟힙니다. 머리도 아프고 움직일 때마다 눈치 없는 팥죽 땀은 쏟아져 내립니다. 이런 날들을 한결같이 지내온 방역의 최전선에 서 있는 당신들을 생각합니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K- 방역, 우리가 선진국이라 믿고 있던 그들이 선진국이 아니었음을 알게 해준 K-방역의 주인공인 당신들 고맙습니다. 당신들 덕분입니다. 처음의 이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춘삼월이 문밖에 있습니다. ˝초발심˝ 을 망각하기에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처음으로‘ 그 시작을 놓쳐버리기에 실패를 거듭하겠지요. 시는 쉽고 쏙쏙 들어오는데 행간의 의미는 넓고도 깊네요. 별로 한 일도 없는데 고단한 하루였습니다. 이제 막 달에 걸음을 뗀 우주인처럼 입었던 방진복 때문이겠지요. 바이러스를 씻어버리려고 퇴근하자마자 씻고 책꽂이 한편에 놓인 [혼자의 넓이]에서 무수한 혼자들과 여럿을 만나며 길고 고단한 오늘 하루를 접습니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요. 고단한 세상의 모든 이들이여 잠시나마 평화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