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는 일은 괴물이 되려는 시간을 주저앉혀 가만가만 달래는 일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렇기에 ‘괴물‘이라는 단어의 문을 열면 연둣빛 새싹 하나가 빼꼼 고개를 내미는 것일 테다.

 

 

 

유월 육일

   현충일인 오늘, 비가 내린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버린 영혼들을 위해 버석버석한 가슴들을 위해 단비가 내린다. 애초의 계획이었다면 오늘 오후에 시작했을 열무 뽑기는 비 예보로 어제 아침에 뽑았고 열무들이 비를 맞을까 봐 쳐 놓은 비닐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열무를 다듬는다. 산 밑이라 서늘한 탓인지 열무는 싱싱했고 살이 통통 올라서 김칫거리로 최상급이다. 빗소리는 아침 버스에서 읽는 안희연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시를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한다.

  전망

  검은 개가 혀를 빼물고 죽어 있는 골목에서 한 사람이 길을 잃는다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에서 악마를 볼 때 나무의 척추가 부러진다

  빗소리는 세 사람을 옥상으로 데려가 죽음이 보낸 초대장을 읽어준다

  그리고

  나는 저 문장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씨앗 하나를 심었을 뿐인데

  벌어진 일들

  사람들은 내가 괴물을 길렀다고 했다

  이 모든 게 나의 손끝에서 시작된 일이었다고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없다면

  제발 자신을 죽여달라며 각목을 내미는 노인도 있었다

  아이들은 몰래 담장을 넘어와 화단의 모든 싹을 짓밟고 달아났다

  어떤 눈빛이었을까

  네 사람이 절름발이 개를 사정없이 걷어찰 때 다섯 사람의 집이 태풍에 날아가고

  여섯 사람이 불속에 갇힐 때 창고 문을 걸어 잠그며 들려오는 웃음소리

  그 씨앗은 나의 마음속에 있다

  얼굴을 보여준 적 없는 거울 앞에서

  심장에 악의가 스미는 속도를 측정하는 일

  씨앗에서 괴물까지의 거리를 오가며

  나를 망가뜨리려는 여름과 싸우고 있다

   내 안에도 '악의'가 자라고 있다고 가끔 생각한다. '확' 그냥~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하는 걸로 위로 삼기에는 민망한 욱한 어떤 충동들을 가지고 있다고. 어떤 '씨앗'은 '악의'로 자라고 어떤 '씨앗'은 '열무'로 자란다. 이왕이면 싱싱하고 풋풋한 열무로 자라자고 '전망'해본다.


 

시간의 손바닥 위에서


"다녀갔어."

그렇게 시작되는 책을 읽고 있었다 누가 언제것도 없이 덩그러니

다녀갔다는 말은 흰 종이 위에 물방울처럼 놓여있었고 건드리면 톡 터질 것처럼 흔들렸다

손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문밖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일기예보를 통해 날씨를 예견하듯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미래가 궁금하지 않다며 문을 닫았다 탁자위엔 읽다 만 책이 놓여 있고 내가 믿을 것은 차라리 이쪽이라고 여겼다 - P12

책을 믿는다니, 나는 피식 웃으며 독서를 이어갔다 "수잔은 십 년도 더 된 아침 햇살을 떠올리며 잠시 울었다." 나는 십 년도 더 된 햇살의 촉감을 상상하느라 손끝이 창백해지는 줄도 모르고

잠시란 얼마나 긴 시간일까 생각하느라 방 안에서 시계가 사라진 줄도 몰랐다

서둘러 다음 장을 펼쳐보았다 "침묵은 부리 잘린새처럼 사방에서 회오리쳤다." 부리 잘린 새를 상상하는 건 손목이 시큰거리는 일이었고 벽에는 전에 없던 붉은 얼룩이 생겨 있다

어쩌면 나는 문장과 문장 사이를 잇는 사람은 아 - P13

닐까 생각했고 참 이상한 하루라고 생각했지만 "큰비가 내렸다"라는 문장을 만났을 땐 이미 발이 물속에 잠긴 뒤였다

"건너왔어."

그렇게 끝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트를 탄 사람들이 지나간다 손전등을 들고 천천히 사방을 살피며 이곳엔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 P14

12월

겨울은 빈혈의 시간

피주머니를 가득 매단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것만 생각나

입김 한 번에 허물어지는 사람들이
이곳엔 너무너무 많다

너무라고 말하지 않고
너무너무라고 말하는 것
그래도 겨울은 눈 하나 끔뻑하지 않겠지

그래서 당신은 무엇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강도를 높여가는 겨울의 질문 앞에서
나는 나날이 창백해진다 - P16

이렇게 텅 빈 마음으로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기도가 기도를 밟고 오르는 세상에서
헐렁헐렁 산책하는 일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축축한 영혼을 나라고 부르는 일

다행히 겨울은 불을 피우기 좋은 계절이다
나에겐 태울 것이 아주 많고

재가 될 때까지 들여다볼 것이 있어서 좋다

"잘하고 못하는 게 어디 있어, 그냥사는 거지."
불 앞에서 다 식은 진심을 꿀꺽 삼킬 때 - P17

피는 반짝이는 것이다
혼자 왔다 혼자 떠나는 슬픔이 있어 오늘은 거룩한 밤이 된다
피주머니를 가득 매단 크리스마스트리가 그것을 말해준다 - P18

발만 남은 사람이 찾아왔다

해 질 무렵이었다

오늘도 이렇게 끝이구나
여긴 너무나 깊어 아무도 찾아올 수 없겠구나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발만 남은 사람이 찾아왔다
우리는 수심을 알아보기 위해
누군가 떨어뜨린 돌이라 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기울어지는 하늘을 보았다

마지막 나무가 뿌리 뽑혀
달의 뒤편으로 끌려가는 것을 - P24

없는 얼굴로 본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지만
밤을 배운 적 없어도 우리는 이미 밤을 알고 있었다

그의 발은 차츰차츰 썩어갔다
우리는 돌의 심장부 잠 속에서도 깨어 있어야 해요
쓰다듬으면 부서져 내렸다
이건 시간이라는 거예요 손을 넣어 흙장난을 해보세요

질문을
쌓았다 허물며

발을 두고 멀어져 가는 그를 보았다 - P25

주저앉으면서 가고 있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가라앉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믿음이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장면을 수시로 목격하였고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은 해결할 수 없는 것으두어야 해요
이따금 그의 말들은 바람에 실려 돌아왔다 - P26

모놀로그

길목마다 사나운 검은 개가 매여 있다. 이곳엔
나를 받아들여주지 않는 길들이 너무 많아서. 나는자꾸 서성이는 사람이 된다.

한 걸음이 한 글자가 되도록 하루가 한 문장이되도록, 내가 걸어온 시간이 어딘가로 전송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바닷가 마을에 사는 파란 눈의 아이가 떠오른다.
그 아이가 읽고 있는 책이 나의 삶이었으면 좋겠다.

방금 전까지 불가사리였고 고래였던 구름은 말한다. 그건 불가능한 믿음이라고. 나는 어떤 결말을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구름은 벌써 저만치 흘러가있고 - P80

검은 개를 피해서 걸어보기로 한다. 안녕,낯선사람을 지나 극빈관을 지나 식탁의목적을 지나 놀랄만두하군을 지나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목동이라는 이름의 고깃집이라는 사실. 사랑하는 것을 죽여야만 지탱되는 마음이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어쩐지 이 길은 나를속이는 쪽 같고

길목에는 사나운 검은 개가 매여 있다. 딛고 갈수밖에 없는 것이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신에게 편지를 쓰는 기분이 된다. 부디 저를 들여보내주세요. 개가 신이 아닐 이유는 없으나.
81 - P81

검은 개라고 생각하면 검은 개일뿐이다. 내가만든 공포가 컹컹 짖는 것을 본다. 개가 신이 아닌이유를 찾을 때까지. - P82

변속장치

그날의 벤치는 남몰래 발목을 바꿔치기했다젖은 옷을 말리려다가 실물의 반을 잃었다

요즘
나는 자주 나를 놓친다

막다른 골목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리는 개들과
도미노처럼 우르르 쓰러지는 가로수

그러나 개들은 언제나 목줄에 묶여 있고
가로수들은 규격을 벗어나 존재한 적이 없다

삶 쪽으로만 향하는 발과 죽음 쪽으로만 향하는 발
내가 잃어버린 것이 어느 쪽일까
저울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다 - P88

그것이 균형이라면

반신, 아직 돌아오지 못한 나를 위해
언제까지나 시간을 지체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사실에 관한 독법이 있다면
어떤 시간이든 반드시 썩는다는 것

절반에 대한 믿음만으로 식탁에 앉는다
우리는 사라지면서 있다 - P89

빚진 마음의 문장
-성남 은행동

그곳엔 두고 온 것이 많다. 무엇을 두고 왔냐고 물으면 글쎄,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가 훼손되었다고 느낄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가게 되는장소가 있다. 때로는 말을 타고 들판을 한없이 달리는 심정으로, 때로는 잠수정을 타고 심해 깊숙이 가라앉는 심정으로 다다르게 되는 곳. - P93

시간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내가 여전히 꼬옥 쥐고 있는 손, 할머니 없이는 나의 어떤 이야기도 시작될 수 없다. ‘할머니‘라는 단어의 문을 열면, 성남은행 주공아파트 베란다 가까이 앉아 먼 데 시선을두고 있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인다. 5대5 가르마를 타서 정갈하게 쪽 찐 머리, 분신 같은 반짇고리와 녹슨 가위, 늘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자세.
거동이 불편해도 절대로 남에게 벗은 몸을 보이려하지 않는 깔끔한 성미까지. 하루의 절반 이상을 창밖 보는 일로 보내던 할머니. 집에 도둑이 들어 엄마의 패물을 다 가져가도록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할머니, 오려진 사람 같던 할머니 자식을 앞세워 보내고 눈과 귀가 완전히 멀어버린 할머니, 면벽하는 할머니. 그렇게 백수를 사시고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한 날 몸 밖으로 팔랑팔랑 걸어 나가는 할머니 - P95

나는 유년이라는 단어 하나가 거느린 세계가 이토록 거대하다는 사실에 매번 놀란다. 한 단어가 거느린 숱한 고리와 고리와 고리, 그 끝을 계속해서따라가다 보면 갈고리에 걸린 채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나 자신을 반드시 마주하게 된다. 비단 유년이라는 단어뿐일까. 한 단어의 문을 연다는 것은 지금껏 발 들여놓은 적 없는 세계로 건너가는 일,  - P97

‘여름‘이라는 단어 속에는 얼마나 많은 적의가 감춰져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풀과 나무들이 저토록맹렬하게 자라날 수는 없다.

딛다‘라는 단어 속에는 얼마나 아픈 엎드림의 자세가 있는가. 한 인간을 담장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등을 밟고 가라고 끄덕이는 눈빛이 있었을 것이다. 담장 안이 불타고 있다면 더더욱.

‘밤‘이라는 단어는 땅속에 묻어둔 구슬 같다. 손을 더럽히지 않으면 꺼낼 수 없다. 손을 더럽히더라도 꺼낼 수 없다. 그건 구슬이 아니라 밤의 눈동자.
밤이라는 짐승의 눈. - P98

조금씩 뒤로 뒤로 걸어가 지구가 잘 보이는 곳에 의자를 내려놓고 앉아 있으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한 인간 존재가 먼지보다작은 것임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태초의 시간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시간은 참으로 까다로운 성미를가졌다. 시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일으킬 수도 허물어뜨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시간은 언제 괴물이 되고, 어떻게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는가.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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