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더니 거북이는 대뜸 질문이잘못됐다고 하면서, 그 대신 <어디서 오는 길인지> 물어야 한다는 거야. 거북이가 느릿느릿 걸어가는데도,
달팽이의 눈에는 들판에 자란 풀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어. 계속 길을 가던 중, 거북이는 뜬금없이 자신이 인간의 망각으로부터 오는 길이라고했어.
「망각이 뭐죠? 그리고 전 인간들이 뭔지도 몰라요.」달팽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어. - P38

거북이가 말했어. 그러자 달팽이는 우선달팽이들이 왜 그렇게 느린지 알고 싶었고, 또 자기만의 이름을 갖고 싶다고 말했단다. 하늘에서 떨어지는물은 비, 가시가 난 나무의 열매는 블랙베리, 그리고벌집에서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것은 꿀, 이렇게 다들이름이 있는데, 자기는 왜 이름이 없느냐는 거였지. 그리고 다른 달팽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영 못마땅해할 뿐 아니라 자기를 들판에서 쫓아내겠다고해서, 자기의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는 절대로 들판에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는 말까지 덧붙였어.
그사이 거북이는 달팽이에게 해줄 말을 찾고 있었단다. 오랜 생각 끝에 그는 인간들과 함께 살면서 배운 것을 알려 주기로 했어. 가령 <그렇게 빨리 하려고서두를 필요가 있을까?>라든지  - P40

거북이와 달팽이는 해가 중천에 뜬 무렵에야 가장나이 많은 달팽이가 이 세상의 끝이라고 하던 들판 가장자리에 도착했단다. 그곳은 대패로 밀어 놓은 듯 매끈했을 뿐만 아니라, 미처 떠나지 못한 어둠의 조각이바닥에 달라붙은 것처럼 검게 빛나고 있었지. 그리고주변에 있는 풀과 야생화를 모두 뒤덮으면서 넓게 펼쳐져 있었어.
검은색의 띠 모양으로 길게 이어진 곳 맞은편으로인간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단다. 그들 중 몇몇은 땀을뻘뻘 흘리면서 달팽이의 눈에 돌같이 보이는 것을 차곡차곡 쌓고 있었지. 그 광경을 보고 놀란 달팽이는 인간들이 온종일 벌집을 짓는 꿀벌만큼이나 부지런하다 - P43

그러다 따스한 아침 햇살이 얇은 껍질 속으로 스며들면서 달팽이는 잠에서 깨어났어. 그는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목을 뺀 다음 눈이 달린 더듬이로 사방을 둘러보았지. 그런데 놀랍게도 옆에서 자고 있던거북이가 온데간데없는 거야.
옆으로 누운 풀잎들을 눈으로 좇다 보니 거북이가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지. 남매나무가 있는 곳과 반대 방향이었어.
고마워요, <기억>님. 당신에 대한 추억을 마음속에영원히 간직할게요.」 달팽이는 친구들이 있는 곳을 향해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어. - P49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질 무렵, 달팽이는 길을 가던 도중에 만난 딱정벌레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 주었어. 그러자 딱정벌레들도 달팽이의 느린 움직임에고마움을 표했지. 만약에 달팽이가 도마뱀이나 메뚜기처럼 빨랐다면 그 장면을 보지도 못했을뿐더러, 자기들에게 알려 주지도 못했을 테니까 말이야.
말을 마치자마자 딱정벌레들은 서둘러 굴에서 빠져나와 공 모양의 식량을 굴리며 멀어져 갔어.
이제 어엿한 이름도 갖게 되었고, 달팽이들이 왜 그렇게 느린지도 알아냈으니, 반항아는 바라던 목적을다 이룬 셈이었지. 그런데 이제 너무 지쳐서 한 발짝도움직일 수가 없었어. 그래서 달팽이는 친구들에게 가기 전에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단다. 위험이 닥쳐오는 걸전혀 모르고 있는 달팽이들은 그 순간에도 관습대로납매나무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함께 밥을 먹고 있었지. 몸을 움츠려 껍질 속으로 들어가려던 달팽이는 들판의 밤 동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 - P55

어엿한 이름도 갖게 되었고, 달팽이들이 왜 그렇게느린지에 대해 점차 많은 걸 깨닫게 된 반항아는, 이제다시 잠을 자려고 준비를 했단다. 그런데 눈을 감기만하면 수많은 물음들이 연이어 떠오르는 바람에 쉬이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친구들이 행여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으면 어쩌지?
납매나무 아래 모여 있는 달팽이들이 내 말을 정신 나간 소리로 받아들이면 어쩐다지? 전에 내가 달팽이들이 왜 그렇게 느린지 알고 싶고, 이름을 갖고 싶다고했을 때처럼 말이야. 그 반대로 그들이 내 말을 믿고,
우리의 보금자리, 《민들레 나라》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우린 어디로 가야 되는 거지?> - P57

달팽이들은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풀밭을헤치면서 가고 있었어. 하지만 다들 침울한 표정이었지 마음이 너무 무거웠던 탓인지,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껍질이 천근만근 무겁게만 느껴지는 거야. 다들 서글프고 불안했지만,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않았지. 꽤나 오래 걸었는지 이젠 뒤를 돌아봐도 정든납매나무가 보이지 않았어. 그런데 그때 어떤 달팽이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자세히 살펴보니, 지금 자기들이 들판 끄트머리 쪽, 그러니까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가고 있더라는 거야.
- P67

「어르신들의 말씀이 맞아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새로운 민들레 나라를 찾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요.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여기서얼마나 더 가야 되는지도 모르니까요. 더구나 가는 도중에 우리가 어떤 위험에 부딪힐지, 그리고 여기 있는모든 분들이 다 같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찾는 새로운 민들레 나라는 앞에 있지, 뒤에 있지는 않다는 점이에요.
어떤 일이 있어도 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저와 함께 가든지, 아니면 우리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든지 알아서 결정하세요.」말을 마친 반항아는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앞으로 나아갔단다. 얼마 지난 뒤, 뒤를 돌아봤더니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지. 모든 달팽이들이 뒤를따라오고 있었던거야. 하지만 반항아는 뒤를 따라오는 많은 달팽이들을 보고서도 뿌듯하거나 행복하지않았어.  - P71

길 저쪽으로부터 뭔가가 커다란 눈에서 강렬한 빛을 뿜어내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던 거야. 그 순간눈이 부셔 앞을 볼 수가 없었지만 무시무시한 짐승이그들 곁을 쏜살같이 지나갔어. 그런데 그 직후 주변을살펴보니 달팽이들 여럿이 보이지 않는 거야.
모두들 공포에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어. 반항아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있을 수도 없었지. 그래서 그 무시무시한 괴물이 또오기 전에 어서 움직이라고 달팽이들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단다.
다들 반항아의 지시에 따르긴 했지만 겁에 질린 터라 평소처럼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어. 그냥 남아 있을걸. 공연히 따라 나서서 사서 고생을 하는구먼.」 달팽이들은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투덜거렸지. 힘겹게길을 건넌 그들은 냉기가 도는 둥그런 동굴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곳에는 가는 물줄기가 쫄쫄 흐르고 있었어.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큰 위기를 넘기고나자 그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기 시작했지 - P79

생전 처음 하늘 높이 올라간 달팽이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신기한 장면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지. 제일먼저 빙긋 웃으며 환한 얼굴을 드러내는 해님이 보였어. 그리고 용기를 내서 눈이 달린 더듬이를 껍질 밖으로 빼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지. 하지만 저 아래로 보이는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참혹했단다. 그들을 내쫓은 시꺼먼 길이 들판의 대부분을 뒤덮어 버리고 만 거야. 그들이 살던 아름다운 보금자리가 인간들 때문에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거지.
수리부엉이는 한참 동안 하늘 위를 날아다녔어. 처음 하늘을 나는 달팽이들에게는 굉장히 긴 시간처럼느껴졌지. 하여간 땅과 나무들, 그리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개울이 그들의 눈앞을 빠르게 지나가는데, 현기증이 다 날 지경이었어. 그도 그럴 것이 들판에서 가장느림보인 달팽이들로서는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광경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을 테니까 말이야.  - P81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숲속으로 들어간 달팽이들은 온갖 종류의 낙엽으로 뒤덮인 땅을 지나가고 있었어. 꿀과 같은 빛깔을 띠고 있는 낙엽들이 있는가 하면, 거무튀튀한 색깔의 낙엽들도 있었지. 그리고 원래의 모습을 온전하게 간직한 낙엽도 있었지만,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부서져 버린 낙엽도있었어. 희한하게도 풀은 보이지 않더군. 다만 잘린나무의 굵은 밑동 주변으로 관목들과 키 작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걸 봐서는 예전에 이 자리에서 과일들이 많이 열렸던 모양이야. 월귤나무였을지도 모르지.
달팽이들은 그 열매를 먹었을 때 입안에 감돌던 맛이기억 속에 떠오르자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단다.
- P83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더듬이를 비빈 다음, 번식을 위한 준비를 하지. 짝짓기를 할 때 먼저 한달팽이가 다른 달팽이의 몸속에 아주 작은 양의 정자를 넣어 주고 나면, 곧바로 그 달팽이가 첫 번째 달팽이 몸속에 정자를 넣어 준단다. 그래서 두 달팽이가모두 수정란을 갖게 되는 셈이지. 그러고 나면 흙 속에 구멍을 파서, 둥근 집을 만들고 그 안에 알을 낳는거야. 굳이 땅속 깊이 구멍을 파는 이유는 부화를 위해서 적절한 습도와 그늘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포식자들로부터 알을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반항아는 그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적으로알아차렸지. 우선 짝짓기를 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와먹을 것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어.
나무와 초록색 이끼들이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그의 눈앞으로 지나갔어. 갈수록 몸이 무거워지는데, 수리부엉이가 말한 그 빈터는 아직 까마득하게만 보이는 거야.
그들은 숲에 짙은 어둠이 깔릴 때까지 계속 걸어갔어. 그토록 짙은 어둠을 본 적이 없던 달팽이들은 눈이 달린 더듬이를 길게 빼고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별빛조차 보이지 않았단다. - P85

살아남으려면 한시라도 빨리 수리부엉이가 말한 빈터로 가는수밖에 없었어.
달팽이들은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반항아의뒤를 따라갔단다. 하지만 너무 굶주리고 지친 나머지어떤 달팽이들은 마지막 의욕마저 잃고 말았지. 그렇게 계속 가느니 차라리 껍질 속으로 기어 들어가 꿈과희망을 모두 버리고 영원히 잠들고 싶었던 거야.
「저기서 민들레 나라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린 반드시 민들레 나라로 가게 될 겁니다. 반항아는마지막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어.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갈 것이라는 강렬한 의지가 그의 말 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단다. - P88

달팽이들은 마침내 꿈에 그리던 숲의 빈터에 도착했단다. 하지만 추위가 그들을 앞질러 와 있었던 탓에, 풀에는 이미 서리가 뽀얗게 앉아 있었지.
반항아는 그들이 나뭇잎 아래에서 며칠 밤을 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어.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정든 납매나무에서 함께 떠난 달팽이들 중 절반도 남지 않았다는 거야. 결국 젊은 달팽이들만 끝까지 그를 따라온셈이지. 그런데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더듬이를 길게빼고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그들의 눈에 보이는 거라곤 서리로 덮인 벌판뿐이었어. - P89

우로 인해 쓰러진 것 같았어. 달팽이들은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그곳을 향해 다가갔단다. 가는 동안,
반항아는 수시로 고개를 돌려 그들이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했지. 달팽이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끈적끈적한 액체가 허연 얼룩처럼 남아 있었어. 그건 그만큼 힘이 든다는 증거였지.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니 그 나무둥치는 달팽이들이 지내기에 안성맞춤이었어. 우선 그 아래로 들어가기도 힘들지 않은 데다, 그들이 사는 데 필요한 온기와그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주변으로 아직 서리를 맞지 않은 풀 몇 포기가 자라고 있었거든. 물론 달팽이들의 입맛에 딱 맞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영양가가 높은풀이었지. 그들은 배가 불러 더 이상 먹지 못할 때까지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풀을 씹어 먹었단다.
달팽이들은 새 보금자리에서 첫 밤을 보냈어. 납매나무 아래에서 편히 살던 때가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단다. 지칠 대로 지친 탓에 달팽이들은 그곳에서계속 살지, 아니면 더 나은 집을 찾아 떠날지 더 이상생각할 여력이 없었어. 반항아는 오래간만에 푹 자고싶은 생각밖에 없었지. 그래서 천천히 껍질 속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그는 달팽이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허 - P90

연 점액들이 서리 위에서 반짝거리면서 길처럼 쑥이어진 모습을 바라보았어. 그리고 생각했어. <이것은고통의 흔적이지만, 동시에 희망의 자취이기도 해그는 당장 달팽이들을 불러 그들이 남긴 자국을 보도록 했단다.
그사이 쉴 새 없이 눈과 서리가 내리고, 추위가 몰아닥쳤지만 달팽이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겨우내깊은 잠에 빠져 있었어. 그렇게 자는 동안에는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숨을 쉬기 위해, 그리고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심장이 뛰게 하거나,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자라기 위해 굳이 힘을 쓸 필요가없었지.
시간이 흘러 달팽이들은 마침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났단다. 그들이 껍질 밖으로 천천히 몸을 내밀었을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바로 반항아였어. 그는 눈이 달린 더듬이로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지. 높이 자라난 풀들이 그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고, 활짝 핀 야생화들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어. 그 정도면 달팽이들이 한동안 먹고도 남을 것 같았지. 그런데 그의 시선은 한참 전에 달팽이들이 지나가면서 남긴 허연 자국을 향하고 있었단다. - P92

「저기 좀 보세요.」 반항아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어.
놀랍게도 길처럼 이어진 허연 자국을 따라 숲의 제일 앞에 늘어선 나무들에 이르기까지 민들레 이파리가 무수히 돋아나 있었단다.
「결국 해내고 말았구나! 우리를 무사히 민들레 나라로 데려왔으니 말이야.」 어떤 달팽이가 감격에 겨워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어.
「아니에요.」 반항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지. 여러분을 이곳으로 데려온 건 제가 아니에요. 전에 이름을갖고 싶다고 무작정 납매나무를 떠난 적이 있잖아요.
들판을 돌아다니면서 전 정말로 많은 걸 깨우칠 수 있었답니다. 특히 느림의 중요성을 말이죠. 그리고 아주힘든 경험이긴 했지만 이번에도 아주 소중한 사실을하나 깨닫게 됐어요. 민들레 나라는 저 먼 곳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간절한 마음속에 있었다는 걸 말이에요. 말을 마친 반항아는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풀을먹기 위해 느릿느릿, 아주 느릿느릿하게 들판으로 향했단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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