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41 | 42 | 4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꿀잠 삶의 시선 17
송경동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꿀잠

               송경동


전남 여천군 쌍봉면 주삼리 끝자락
남해화학 보수공장현장 가면 지금도
식판 가득 고봉으로 머슴밥 먹고
유류탱크 밑 그늘에 누워 선잠 든 사람 있으리
 

이삼십 분 눈 붙임이지만 그 맛
간밤 갈대밭 우그러뜨리던 그 짓보다 찰져
신문쪼가리 석면쪼가리
깔기도 전에 몰려들던 몽환
 

필사적으로 필사적으로
꿈자락 붙들고 늘어지다가도
소혀처럼 따가운 햇볕이 날름 이마를 훑으면
비실비실 눈감은 채로
남은 그늘 찾아 옮기던 순한 행렬


                                         송경동 시집 <꿀잠 (삶이 보이는 창)> 중에서


 

아침에 눈을 뜨니 창밖으로 보는 하늘이 저랬다.
잠이 묻어있는 눈이 확 떠지게 맑고 푸른하늘.
(실지로 오늘 아침, 침대에 누워서 바라보는 창 쪽 젊은 감나무랑 하늘이다. )
세상의 모든 독성도 치유할 것 같은 순결한 깨끗함이 이럴까?
정갈한 기운이 순하게 순하게 가득찬다.
세상의 햇살 받은 감나무 이파리가 얼마나 눈부신지 오래 볼 수가 없다.
그러다 순간, '우리 오늘 죽었구나!'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에 스스로도 소스라치게 놀랍다.
이런~! 이 정도면 중증의 직업병에 가깝다 싶어서 씁쓸하다.
날씨 좋은 날의 휴일,
가게에 얼마나 손님이 많을지는 서당개 삼년의 짐작으로도 어렵지 않은 일.......
 
평소 우리들은 오후 3시가 지나면
늦은 점심을 먹고 "꿀잠"의 "꿀잠"을 자는 시간을 조금씩 갖는다.
오늘은 '꿀잠'은 커녕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할 것이다.
밥 한 숟가락 들라치면 손님이 오고 가고,
그렇게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하루가 지날 것이다.
다른 사람들 밥을 열심히 나르다 보면
우리들 등은 휘고 배가 고파서 씩씩대다가 끝이 날 오늘,
"이삼십 분 눈 붙임이지만 그 맛"
그립겠다.


그래도 아흐,
하늘은 시린 물이 뚝뚝 흘러내릴 것 같다.
언니네 집, 담 벼락의 늙은 감나무도 눈부시다.
거기 놓인 평상에 누워
잠깐 "꿀잠"에 빠져도 좋으리.
하여 
이 하늘 아래,
저 늙은 감나무 아래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지금,
'필사적으로 필사적으로'
부단한 순간순간을 보내는 것을.
그리고
"꿀잠"의 그 맛을 아는 동시대 시인을 가졌으니 어이 아니 행복하랴.
"꿀잠"의 그 맛을 아는 그대,
아니 그러한가~!
^_^" 
  

2006. 5. 8. 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 - 박영근 유고시집 창비시선 276
박영근 지음 / 창비 / 200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사


             박영근
 

1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집엔 저녁이면 형광등 불빛이 켜지고
사내는 묵은 시집을 읽거나 저녁거리를 치운 책상에서
더듬더듬 원고를 쓸 것이다 몇잔의 커피와,
담배와, 새벽녘의 그 몹쓸 파지들 위로 떨어지는 마른 기침소리
누가 왔다갔는지 때로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그 환한 자리에 더운 숨결이 일고,
계절이 골목집 건너 백목련의 꽃망울과 은행나무 가지위에서 바뀔 무렵이면
그 집엔 밀린 빨래들이 그 작은 마당과
녹슨 창틀과 흐린 처마와 담벽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햇살에 취해 바람에 흔들거릴 것이다
눈을 들면 사내의 가난한 이마에 하늘의 푸른빛들이 뚝 뚝 떨어지고
아무도 모르지, 그런날 저녁에 부엌에서 들려오는
정갈한 도마질 소리와 고등어 굽는 냄새
바람이 먼데서 불러온 아잇적 서툰 노래
내가 떠난 뒤에도 그 낡은 집엔 마당귀를 돌아가며
어린 고추가 자라고 방울토마토가 열리고
원추리는 그 주홍빛 꽃을 터트릴 것이다
그리고 낮도 밤도 없이 빗줄기에 하늘이 온통 잠기는 장마가
또 오고, 사내는 그때에도
혼자 방문턱에 앉아 술잔을 뒤집으며
빗물에 떠내려가는 원추리꽃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부러져나간
고춧대와 허리가 꺾여버린 토마토 줄기들과 전기가 끊긴
한밤중의 빗소리....... 그렇게
가을이 수척해진 얼굴로 대문간을 기웃거릴 때
별일도 다 있지, 그는 마당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누군가 부쳐온 시집을 읽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물결을 끌어당기고 내밀면서
내뱉고 부르면서
강물은 숨쉬는가

 
2

그 낡은 집을 나와 나는 밤거리를 걷는다
저기봐라, 흘러넘치는 광고 불빛과
여자들과
장쾌한 노래
막 옷을 갈아입은 성장(盛裝)한 마네킹들
이 도시는 시간도 기억도 없다
생(生)이 잡문이 될 때까지 나는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때로 그 길을 걸어 그가 올지도 모른다 밤새 얼어붙은 수도꼭지를
팔팔 끓는 물로 녹이고 혼자서 웃음을 터트리는,
그런 모습으로 찾아와 짠지에 라면을 끓이고
소주잔을 흔들면서 몇편의 시를 읽을지도 모른다
도시의 가난한 겨울밤은 눈벌판도 없는데
그 사내는 홀로 눈을 맞으며
천천히 벌판을 질러갈 것이다

 
                   출처- 박영근 유고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 (창비) -중에서

박영근 시인은 
1958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고 1981년 [반시(反詩)] 6집에 시[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취업 공고판 앞에서](1984) [김미순傳](1993) [지금도 그 별로 뜨는가](1997) [저 꽃이 불편하다](2002),
산문집으로 [공장옥상에 올라](1983) [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2004) 등을 펴냈으며, 제12회 신동엽창작상(1994), 제5회 백석문학상(2003)을 수상했다.
2006년 5월 11일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으로 타계했다. 

 

지난 봄 
김치 담근 양동이를 냉장고까지 나르는 일이며  
간장 달이고 다릴 양동이를 번갈아 들어 나른 휴우증이 
[주부과로형 테니스엘보]라는 진단을 오른쪽 팔꿈치에 안겨주었다 
휴일이면 간간히 물리치료며  
침으로 다스려 오던 것이  
장마속에 부쩍 심해졌다 
어깨까지 올라오는 통증이  
숙면을 방해한 탓인지  
잠을 제대로 자는 것도 아니면서  
책 한 장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덧글 한 줄 쓰지도 못했다 
워낙 시원찮은 왼쪽 팔때문에 
고생 많은 오른쪽팔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것이다 
살짝 위기를 느끼고 
집중적으로 침을 맞은 사흘 
계속 잠이 쏟아진다 
침을 꽂아 놓고도 자고 
물리치료중에도 자고  
치과 의자에 길게 누워서도 깜박 잠이들어  
여기가 어딘가 잠깐 헤매기도한다  
오늘  
침을 맞으려고 일찍 퇴근 하는 길  
바람이 너무 좋다 
역시나 비몽사몽속에 침 맞고 
찾아 간 방화수류정 
바람이 좋다 
내려다 보이는 자귀나무꽃이 장하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읽는 시 한 편 
박영근 시인의 
유고 시 
[이사] 
방화수류정에 딱이다 
가슴이 먹먹해져도 
여기서 제일이다 
가난했던 한 시절이 바람에 흘러간다 
어떠랴~~!! 
팔도 훠얼씬 부드럽다 
이 맛에 산다 
바람이 흘러간다 
여름이 흘러간다 
 
2007. 7. 14. 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차를 놓치다 애지시선 6
손세실리아 지음 / 애지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머니께 드리는 고봉밥 한 그릇 

                                  손세실리아 시집‘기차를 놓치다(애지 간)’를 읽고

  손세실리아 시인의 첫 시집 ‘기차를 놓치다(애지 간)’가 지난 이월 십오일, 인터넷 교보로 주문한지 5일 만에 내 품에 안겼다. 그 이후, ‘기차를 놓치다’는 쭈욱 나와 함께 다닌다.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동안 순백의 겉표지가 조금 낡았고 자주색 속표지에는 가볍고 무거운 얼룩들이 훈장처럼 남겨진 ‘기차를 놓치다’ 언제 내려놓을지 모른다. 손에 잡혀서 열리는 어느 페이지를 펴도 따숩고 찰진 고봉밥 한 그릇을 마주한 것처럼 배부르고 넉넉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마흔의 어머니는 소다와 부채표 까스활명수를 입에 달고 사셨다 무명실로 손가락 끝을 칭칭 감고 콧김 쐰 바늘로 자흑빛 걸쭉한 피 몇 방울 짜내는 일도 예사였고 탱자나무 성난 가시 울울한 체내는 집으로 직행하는 일도 허다했다 똥색 페인트칠이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져 괴괴한 집 등짝과 가슴을 두드리고 문지르다 염탐꾼 같은 손가락을 목구멍으로 쑥 들이밀어 깔짝거리면 신기하게도 석 달 전 먹은 닭 가슴살 달포 전 제사 음복으로 집어먹은 생률 보름날 들깨 풀어 볶아먹은 거뭇한 고사리가 쭉 딸려나왔다 달거리하듯 그 짓을 해치우고 나서야 비로소 양 볼에 화색이 돌던 어머니 무르지도 삭혀지지도 않는 게 어디 음식뿐이었으랴 가슴 한복판 해묵은 연민도 때론 묵은 체증으로 얹히거늘 어깨 곁고 살아 온 인연들도 가끔은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거늘

  그 집 앞을 지난다. 읍 소재지 체쟁이중에 최고라던 틀니할멈은 죽고 구전시술은 파했다 탱자꽃 말간 이마에 홀린 일벌 한 마리 꽃밥 속으로 파고들다 가시에 찔리고 만다 너덜거리는 날개 반쪽 눈에 얹힌다, 마흔이다

                                                            체滯내는 여자 - 전문

  ‘기차를 놓치다’라는 네이버 블로그를 혼자 찾아내고 그 속에 있는 편 편의 글들에 홀려 저 시 속의 일벌처럼 파고들었다. 그러다 덜컥‘체滯 내는 여자’에 찔리고 말았다. 내가 달고 사는 부채표 까스활명수, 콧김 쐰 바늘로 자흑빛 걸쭉한 피 몇 방울 짜내는 일이 예사인 내가 어릴 적 엄마를 따라갔던 체 내는 집의 음산한 정경과 그 여자의 손가락이 목 속으로 들어올 때의 소름끼치게 섬뜩한 느낌, 그리고 마흔의 어머니가 탱자나무 가시를 무작위로 찔렀다. 가슴이 너덜거렸다. 나는 마흔의 어머니를 모른다. 아니, 누구보다 잘 아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머니의 마흔에 세상으로 나왔다. 만삭의 몸으로 땔나무를 하러 간 시오리 밖, 햇살 바른 산에서 성질 급한 나를 낳으셨고 같이 간 동네 아주머니들 도움으로 낫으로 태를 자르고 묻고 돌아왔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엉겁결에 몸을 풀고 되 집어 돌아오는 시오리는 얼마나 멀고 먼 거리였을까? 당신의 검정 다후다 치마에 싸서 안고 오는 어린 핏덩이는 얼마나 많은 체증으로 얹혔을까? 내 나이 마흔에서야 가슴 서늘하게 생각했던 마흔의 어머니를 시인은 완벽하게 복원해 놓았던 것이다. 그렇게 마흔을 앓았다. 어머니의 마흔을 앓았고 내 마흔을 앓았다고 생각했는데 시집 속에서‘마흔’을 만났을 때, 쫄쫄 굶으면서 밖으로 나돌다가 겨우 집에 찾아든 나에게 입으로는 혼을 내면서 잰 손놀림으로 어머니가 차려주던 밥상을 앞에 둔 것처럼  울컥 목이 메어왔다. 

 

먹어도 먹어도 허리가 줄고 시시로

목이 멥니다 마음과 몸이 삐걱대고

번번이 서로를 거역합니다

의연한 척 무연한 척하지만 기실은
매양 갈팡질팡 합니다 이따금
관계에 홀려 휘청대기도 합니다
시퍼렇게 날선 작둣날을 타는
어린 무녀의 연분홍 맨발바닥처럼
아찔하기도 하고, 차도를 건너는
민달팽이의 굼뜬 보행처럼
위태롭기도 한, 낙타도 수통도 없이
사막을 건너는, 독사의 축축한 혓바닥
도처에서 널름거리는, 이승의 무간지옥에
다름 아닌, 내딛는 곳마다 허방인 진창인,
생의 花根이며 化根이기도 한,
不不惑인, 
                                         마흔- 전문

  나는 어머니의 마흔, 당신 생의 花根이고 싶어 세상에 올수 있었는데 禍根인 채로 살았던 것이다. 서른여덟이던 2000년, 새 천년의 희망 가득한 미래보다는 내딛는 곳마다 허방인 진창인 마흔이 될 것이라는 대책 없는 절망에 휘청거렸다. 의연한 척 무연한 척 했지만 매양 갈팡질팡, 그 시기를 질러온 이제야 시를 앞에 두고 눈시울을 적신다. 세상 누구보다 강하고 의연했던 엄마의 마흔도 그랬으리라고

 

움츠린 허벅지 사이  

말끔히 지워져 버린 수태의 흔적
저 아득함 이라니
지상의 어떤 양식으로도
결코 메워지지 않는 썰물이다, 공터다    
한 존재를 내려놓고 통과해낸
지난 세월이 저러했던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아
그리도 깊고 오랜 절망으로 휘청거렸던가

                                            말복- 중에서

  싶어서 가슴이 막막하다. 열을 낳아서 셋을 잃고 일곱을 건사 하느라 잠시도 허리 펼 새 없던 당신의 평생, 잃은 셋이 준 결코 메워지지 않는 썰물을 짐작해본다. 단지 짐작만 해보는 것이다. 결코 알 수는 없다.

새새틈틈 갈라진 손으로
등 푸른 어육의 배를 째고
물컹한 내장 그악스레 훑는다는
수협 공판장 일용직 잡부 곰소댁
빈속에 해장이라도 한 잔 걸칠 양이면 
야속함도 탓함도 싹 잊어버리고
침 발라 헤아린 일당 단단히 챙겨
집으로 직행한다는 맹하고 선한 곰소댁  

휘어진 등, 곱은 손! 
                                          곰소댁- 중에서

  오 일장을 따라 생선을 팔러 다녔던 어머니의 발길을 재촉하고 그악스럽게 만들었을 젖먹이 딸래미의 주린 배가 곰소댁 아닌 정안네의 禍根, 바로 나였구나 싶다. 빈속에 막걸리 한 잔 걸치고 돌아오는 장날이면 당신이 몰고 오던 광폭한 설움조차도, 꺽꺽 통곡하던 긴 시간, 결코 끝날 것 같지 않게 느껴지는 그 사무치던 시간조차도 이제는 돌아갈 수 없어 그립기만 하다. 이제는 알아도 돌아갈 수가 없다. 

그랬구나
평생 장승처럼 눕지도 않고 피붙이 지켜온 어머니
저렇듯 온전했던 한 생을
나 식빵 속처럼 파먹고 살아온 거였구나
그 불면의 충혈 된 동공까지도 나 쪼아먹고 살았구나
뼛속까지 갉아먹고도 모자라
한 방울 수액까지 짜내 목축이며 살아왔구나
희멀건 국물,
엄마의 뿌연 국물이었구나

                                            곰국 끓이던 날- 중에서

  시인은 이미 알고 있었던가, 어머니는 기꺼이 그러했던 것을.

누군가에게 길을 터주는 일이란
저토록 말끔히 자신을 비워내는 일임을
잘린 뼈마디 끈적한 진물도 감추고
살아온 날의 흔적마저 가셔내는 일임을
그리하여 마침내
완벽한 육탈보시肉脫布施에 이르는 길임을 본다

                                            봉안터널 - 중에서

  글을 쓰는 일이, 소설가나 시인이 무엇인지 돌아가실 때까지 몰랐던 어머니는 저 높은 데, 많이 배운 선생님들이 그런 일을 하는 거라고 알고 계셨다. 노상 책을 끼고 사는 내가 그런 일을 했으면 싶어 했고 그 뒷바라지를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을 돌아가실 때까지 책망하셨다. 그렇게 간절하게 길을 터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미 말끔히 자신을 비워내고 길을 터주셨다는 것을 이제라도 아실까? 그랬으면 좋겠다.

이름 석 자는커녕
전화 다이얼도 돌릴 줄 모르는 어머니를
세상은 까막눈이라 한다 
허나 몰라서 하는 말이다
내가 만나 본 어떤 사람도 사물의 이치에 대해
어머니만큼 해박하지는 않았다
바닷물의 들고남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던가
수백 리 밖에서 몰려오는 우기를
귀밑 스치는 바람자락만으로 예견하는 일 따위가
마음 외부의 시력을 필요이상으로 밝히는 동안
마음 안쪽의 눈은 청맹과니처럼 아득해져
낮고 소소한 것들의 아픔 따위
안중에서 지워버린지 오래인 뭇사람에게는
하찮고 미욱하게 여겨질지 모를 일이나
양쪽 눈 가운데 하나쯤은 
깊어질 대로 깊어져 한길 우물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고요한 눈을 닮아도 좋겠다고
저문 하늘빛과 같이 쓸쓸해져도 좋겠다고
그렇게 한 생을 가만가만 내려놓아도 좋겠다고
열차 떠난 역사에 우두커니 서서
불현듯 생각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까막눈- 중에서

  시인을 처음 만나던 날, 얼굴보다 먼저 음성으로 만나게 된 시다. 눈을 감고 그윽하게 외우는 시인의 목소리가 체증으로 명치에 얹혀서 시인을 바로보지 못하고 노을이 퍼지는 고온포구,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시간이 ‘까막눈’ 속에는 있다. 마음 외부의 시력을 필요이상으로 밝히느라고 어머니가 모르는 길로만 다니고, 모르는 일들만 하면서 살아온 청맹과니는 시를 듣는 동안 아득하고도 아득하게 가라앉았다. 더 이상 매화가 피지 못하는 황폐한‘매향리', 이 땅의 오랜 상처이고 우리들의 현주소인 그 곳의 풍경을 일시에 잠재우고 저문 하늘빛과 같이 쓸쓸해져도 좋겠다고 눈이 환해지던 그 때, 그날. 꾸밈없이 따뜻하게 반겨준 시인이 뒤풀이 장소에서까지 살뜰하게 챙겨주고 ‘시로 보다는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말씀으로 나를 홀딱 반하게 만들었다. 이름 석 자는커녕 전화 다이얼도 돌릴 줄 모르는 까막눈이었던 내 눈을 환하게 밝혀주신 것이다.

제 몸의 구멍이란 구멍 차례로 틀어막고
생각까지도 죄다 걸어 닫더니만 결국
자신을 송두리째 염해버린 호수를 본다
일점 흔들림 없다 요지부동이다
살아온 날들 돌아보니 온통 소요다
중간중간 위태롭기도 했다
여기 이르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세상으로부터 나를
완벽히 봉封해 본 적 있던가
한 사나흘 죽어본 적 있던가
없다, 아무래도 엄살이 심했다

                                           얼음 호수- 전문

  ‘얼음 호수’를 처음 만난 날도 기억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시간에 쫓겨도 습관적인 안부처럼 들르는‘기차를 놓치다’ 블로그에서 읽었다. 이월, 날씨 때문만은 아닌 서늘한 한기가 싸르르 전신을 지나갔다.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퇴근 후, 다시 들어갔을 때는 내려지고 없었다. 어머니가 떠난 자리처럼 가슴에 구멍이 휑하니 뚫렸다.

  생일날 아침, 마지막으로 뵌 어머니를 사흘 후 겨우 입관 전에야 도착해서 만났다. 스물 세 해가 지난 지금에도 또록또록 손바닥의 감촉으로 남아 있는 엄마, 이승의 마지막 의식인 염을 하면서야 비로소 당신의 몸을 만져보고 내 온기라도 전해주고 싶었는데 당신은 이미 녹일 수 없는 얼음 호수였다. 겨울이면 위풍 심한 방, 책상에 앉아있느라 꽁꽁 언 내 발을 손으로 감싸서 녹여주던 당신의 항상 따뜻했던 손은 섬뜩할 만큼 차가웠다. 가슴을 후벼 파던 당신의 싸늘한 몸을 고통이 사라진 말갛게 갠 이마를 마주하고 보내 드릴 수 있었다. 저승 가는 길 노잣돈까지 챙겨주고 꽁꽁 동여맨 몸을 향해 절했다. 그렇게 손 놓아 드렸다. 고통 없는 세상에서 부디 편안하시라고.    

소행성과 대행성이 생성되고
해와 달과 별이 맞물려
빛을 놓친 적 없던 여자의 집,
감쪽같이 철거당했다
한 우주가 사라졌다 

                                           갠지스강, 화장터- 중에서

  '얼음 호수’와 함께 처음 읽었을 때부터 나를 전율케 한 시가‘ 갠지스강, 화장터’다. 두 편의 시 속에는 어머니가 말을 건다. 감쪽같이 철거당하고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여자의 집이 불쑥 불쑥 말 걸어오는 것이다. 지난해 6월, 현대시학에 발표된 이후 우리 가게 화장실에 붙여 두고 날마다 읽어서 자연스레 외우게 된 두 편. 가게 식구들 중에서 ‘시’를 난생 처음 접하게 된 이까지도 띄엄띄엄‘ 얼음 호수’를 외워서 옮겨 적는 작은 수고를 한 나를 크게 감동 시켰고‘시집’속에서 두 편을 발견하고 어떻게 내가 미리 알고 있었는지 궁금해 해서 나를 즐겁게한다. 날마다 그날이 그날인 특별할 것 없는 삶을, 묵묵히 자신의 몫으로 사는 가게 식구들 모두가 바로 내 어머니이고, 각각의 우주라는 것을 그들은 알까? 

   

  막 삶아 건진 수육과 탁주 한 말 마을회관에 들이던 날 필시 입막음용일 게라고 사람들은 속닥거렸다 집주인 박목수가 전기세 물세 똥세를 터무니없이 물려도 조목조목 셈하지 못했고 깔깔이 맞춤 원피스 품이 솔거나 장날 산 태양초에 희나리가 근 반쯤 섞여 있어도 첫 휴가 나왔다가 귀대 날짜를 넘겨버린 외아들을 고발할까 두려워 따지지 못했다 방범대원 호각소리 유난히 긴 밤이었던가 잔술 팔아 모은 뭉칫돈 쥐어주며 빌어먹더라도 대처로 나가라고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느냐고 순경한테 붙잡히면 끝장이니 시비 거는 놈 있거든 무조건 져주고 파출소나 검문소 근처는 행여 얼씬거리지도 말라고 하루를 살더라도 사람같이 살아보라고 등 떠밀고 돌아와 그 길로 곧장 박목수 멱살 잡아 공과금 되돌려 받고 실밥 터진 원피스 다시 재단시키고 시장통 어귀에 희나리자루 패대기쳤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려 밤새 막걸리 독 바닥내던 어머니, 이 말을 끝으로 정신을 놓고 말았다

오살헐 놈!

                                            세상에서 가장 슬픈 욕- 전문

  이 시를 읽으면, 번번히 눈물이 난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욕을, 그런 욕조차 뱉아 내지 못했던 시절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시를 읽고서야 떠올렸기 때문이다. 기억에서조차 몰아내고 싶던 무지막지한 절망, 꺼낼 수 없었던, 결코 꺼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던 시절을 시인은 토로하고 있는 것인데 그 절절한 마음이 짚어져서 눈물이 먼저 난다. 나는 아직 단단해지지 못한 것이다. 집에서 출, 퇴근‘방위’로 국방의 의무를 이행 중이던 성실하기 짝이 없는 오빠가 탈영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을 때, 몇 달 돈 벌어 엄마 준 다음에 다시 복무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계획으로 감행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몇 달 뒤 자수하고 교도소에 수감된 오빠를 엄마모시고 면회하러 가던 날의 참혹함을 나는 아직 풀어 놓지 못한다. 병역을 마치고 장삼이사로 사는 오빠도 애써 잊은 기억일 것이다. 또 엄마 떠난 이후, 서른에 세상을 떠난 오빠를 면회 가던 광주 교도소 가는 길, 세상에서 그렇게 먼 길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꺾이는 무릎을 곧추세우면서 기대오던 엄마가 혼잣말처럼 내뱉던‘이 오살헐 놈의 시상!’만이 귀에 쟁쟁하다. 오살헐 놈! 절대 입 밖으로 토해 내고 싶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욕이다.   

무르고 죽고 썩어 목마른 토양 위에
메꽃 한 송이 거름으로 기꺼이 엎디는
조선의 납작코 같은 저 보리 알갱이
문드러진 삭신 속 지극한 모성을
떡잎도 씨눈도 박제되어 굳어버린
노랑머리 벽안의 씨앗은 모른다
터져 해체된 살 있어야 고물거리는 것들
그 안에 몸 풀 수 있음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놈!

                                            씨앗의 본분- 중에서

  살아생전에 단 한 평의 땅도 갖지 못한 어머니는 봄이면 어김없이 묵정밭을 일구고 놀고 있는 한 뼘의 땅이라도 그냥 두는 법이 없었다. 그걸 투덜투덜 해찰하면서 겨우 깔짝깔짝 돌 줍던 나를 모른 척 엎디어서 씨를 뿌리던 모습이 보인다. 당신의 본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던 어머니와 그 자갈밭의 고추, 깨, 참외, 배추 팔아서 우리 밥 먹고 살았음에도 그걸 모른 무지몽매한 놈!  

 

갯구멍에 방 들여 사는 세발낙지처럼
갯바닥에 뿌리내려 피고 지는 칠면초처럼
내 몸의 일부였던 한순간
내 안의 꽃무더기였던 어느 한때
부디 다 내려놓고 열반하시기를
나였거나
내 삶의 무게였던 슬픔에게 당부하는

                                           퇴원하던 날- 중에서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었으나 내 것으로 욕심내던 것들 때문에 다치기도 했다. 좌절하기도 했다. 그런 내가 나이를 먹어 가면서 가장 좋은 징후는 조금 가벼워졌다는 것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을 탐내는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느낀다. 그래도 아직 많이 남아 있는 내 안의 욕심들에게 바란다. 부디 다 내려놓고 열반하시기를. 부처님께 탐, 진, 치를 빌었던 어머니도 좋아하시리라.

 

왜 유독 사람이 다녀간 길 언저리에는 상처가 남는지
꽃 지고 새소리 멎어 온통 황폐해지고 마는지 
                                          물오리 一家- 중에서

  어머니는 그토록 굶기지 않고자 애를 썼는데도 당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오래 배고픈 시절을 살았다. 그 때를 살던 성 밖 판자촌 동네가 '방화수류정'에 앉으면 물끄러미 보인다. 봄바람을 맞으며 정자에 앉아 있는데 용지를 헤엄쳐 가는 물오리 一家가 있다. 함께 한 친구에게 읽어준다. 시가 새롭게 읽힌다고 했다. 개발과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찾아갈 때마다 많이 달라지고 있는‘華城'. 어디, 화성에 국한 된 문제이련가. 쓸쓸함을 시로 달랜다. 막 꽃을 터뜨린 산수유도‘산수유 마을에서 일박’페이지라도 몰래 훔쳐보았을까, 배시시 눈웃음 짓는다. 남루했기에 화사함이 더욱 도드라지던 그 때의 봄날에도 개나리 밑에 앉아서 시를 읽었던가.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로 베어져서 이제는 흔적도 없는 촘촘한 벚나무들이 꽃비를 날리던 아름다운 시절이기도 했는데.

지상의 어떤 아름다운 단 한 사람을 위한
이승의 밥으로 지어져 주발에 고봉으로 담겨지기를

                                            인사동 밭벼- 중에서

  몇 해, 수 많은 사람들에게 밥상을 나르는 일을 하면서도 정작 어머니를 위해서는 단 한 번도 밥상을 준비하지 못했다. 이 글은 ‘기차를 놓치다’서평이 아니라 어머니, 당신께 드리는 찰지고 윤기 자르르한 고봉밥으로 차린 소박한 밥상이다. 이 고봉밥 한 그릇을 담기 위해 주발부터 열심히 닦았다. 이미 아실 것이다.

 

난바다를 헤엄쳐온 그의 근황을
막 지은 밥에 얹는다
골콤하고 섧다

                                           자리젓- 중에서

  당신 좋아하는 젓갈까지 준비했다. 당신이 고추 씀벅씀벅 썰어 넣고 무쳐주던 젓갈만큼은 아니더라도 맛있게 드셨으면. 부디 남기지 마시고 다른 사람 입까지 쩝쩝 다시게 할 만큼 맛나게 드시던 예전의 건강하던 시절처럼 드시기를 저문 산에 꽃등하나 내거는 마음으로 바래본다.  

 

산을 내려오다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늙은 나무의 흰 뼈와
바람에 쪼여 깡치만 남은 샛길이
세상으로 난 출구를 닫아걸고 있습니다
아직은 사위가 침침하지만
곧 사방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들겠지요  

그렇다고 산에 갇힐까 염려는 마세요
설마 그러기야 할라구요
또 그런들 어쩌겠어요
혹시 보이시는지
점자를 더듬는 소경처럼
빛이 아물어야만 판독 가능한 
저 내밀한 것들의 아우성 말입니다
밤하늘을 저공 비행하는
반딧불이의 뜨거운 몸통과
흐르지 못하고 서성이는 시린 산그늘,
팥배나무 잎맥에 파인 바람의 지문과
억겁을 휘돌아 식물의 육신을 빌려
짓무른 환부를 째고 해산한
꽃잎 끝 눈물 같은 사리 한 알
내 안의 오래된 상처도
푸르고 곱게 부식되어
다음 생엔 부디
이마 말간 꽃으로 환생하시기를
삼가 합장 또 합장하며
저문 산에 꽃등 하나 내걸고 내려옵니다

                                           저문 산에 꽃등 하나 내걸다- 전문

  이 간절한 염원이 어머니, 당신께 드리는 고봉밥 한 그릇에 담겨있음을 아실 것이다.

   

  그나저나 사람들은 알까? 내가 안고 다니는 것이‘기차를 놓치다’란 시집이 아니라 내 니인 것을. 아마 ‘강산숙 벗에게’라고 싸인해서 건네 준 손세실리아 시인도 모를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어머니를 모시고 다닌다.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는 동안 제 몫을 다해 준 나무들에게 내 방식으로 인사를 건넬 것이다. '갈참나무에게 절하' 는 마음으로. 또한 내 안의 '고장난 문'을 열어 어머니를 불러다 주고 고봉밥 한 그릇 놓아드릴 수 있게 해준 형형한 눈빛의 시인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이제는 '틈새'를 열어 시인의 말을 귀담아 들을 차례다. 고맙고도 고마운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옹 창비시선 279
정호승 지음 / 창비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표교


                              정호승

 
물의 깊이를 재는 넌

내 눈물의 깊이는 재어보았니

 
눈금을 새긴 돌기둥을 데리고

수표교 하나

내 눈물 속에 평생 잠겨 있어도 

 
난 아직 내 눈물의 깊이의

깊이는 재지 못했네

 
돌이 된 내 눈물의 무게도

재지 못했네

                                 시집 [포옹 (창비)] 중에서

 

정호승시인은 1950년 대구출생.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이 짧은 시간 동안] 등.
소월시 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가톨릭문학상등을 수상.

 

때 아닌 여름 감기로 빌빌거리며 꾀 부린지 이틀째...

오늘은 결국 조퇴를하고 병원에 가서 주사를 꾸욱 맞고왔다.

약을 먹고 한 숨 잔 탓인지 늦게 잠이 안 온다.

아니다,

요즘 질질 짜면서도 끝까지 보는 휴먼 다큐멘터리 '사랑'을 보다가 잠이 다 달아난 모양이다.

오늘도 역시나 줄줄 울었다.

막힌 코가 더욱 막혀서 숨통이 막힌다ㅠㅠ

어쩔끄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오늘 도착한 알라딘 택배를 비로소 열어본다.

지난번 친구의 생일에 선물로 줘버린 '포옹'이 새로 왔다.

그런데 세상에 ~~~

정호승선생님의 자필 싸인이 있는거다.

"시는 인간을 사랑하게 합니다"

공감+공감,

끄덕끄덕...

그래서 40여일 만에 포스팅....

히힛~!

내일은 꾀 못부릴테니

어여 자야한다.

억지로라도 자야한다.

끄덕끄덕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41 | 42 | 4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