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먼저 그의 이름은 유수프였다. 그는 열두 살 때 갑자기 집을떠났다. 그는 그때를 하루하루가 전날과 똑같은 가뭄철이었다고 기억했다. 예상치 않은 꽃들이 피었다가 죽었다. 이상한 벌레들이 돌 밑에서 종종걸음으로 나와 뜨거운 햇빛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죽었다. 태양은 멀리 있는 나무들이 대기 속에서 떨게 만들었고 집들이 부르르하며숨을 헐떡이게 만들었다. 저벅저벅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먼지구름이피어올랐고 낮시간에는 날카로운 정적이 감돌았다. 계절의 막바지에는 그런 순간들이 어김없이 돌아왔다. - P9

칸주 한 벌, 셔츠 하나, 쿠란 한 권, 어머니의 낡은 묵주가 전부였다. 그녀는 묵주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낡은 숄에 싸고 끝을 잡아당겨 묶어두툼한 매듭을 지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유수프가 짐꾼들처럼꾸러미를 어깨에 메고 갈 수 있도록 매듭 속으로 지팡이를 밀어넣었다.
그러고는 적갈색 사암으로 만들어진 묵주를 마지막에 은밀히 건넸다.
오랫동안 부모와 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거나, 어쩌면 다시는 그들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단 한순간도 들지 않았다. 언제 돌아올지 물어본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왜 자신이 아지즈 아저씨를 따라가야 하는지, 일이 왜 갑자기 그렇게 되었는지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기차역에서 유수프는 성난 표정의 검은 새가 그려진 노란 깃발외에, 은빛 테두리의 검은 십자가가 그려진 또다른 깃발을 보았다. 그들은 고위층 독일군 장교들이 기차로 이동할 때에만 그 깃발을 달았다. 아버지가 그를 향해 몸을 숙여 악수를 했다. 그러고는 다소 길게무슨 말인가를 했고 마지막에는 눈물을 글썽였다. 나중에 유수프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던 건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신에 대한 말이었던것 같다. - P30

유수프는 손님에게서 돈을 받는 법과 손가락 사이에 꼭 끼게 지폐를 쥐는 법도 배웠다. 칼릴은 그에게 코코넛기름을 국자로 재는 법을 가르치면서 손이 떨리지 않게 잡아주었고 긴 철사로 기다란 비누를 자르는 법도 보여주었다. 유수프가 잘 따라서 하면 그는 인정의 의미로 활짝 웃어 보였고, 그러지 못하면 몹시 아프게 때렸다. 때때로 손님들 앞에서도 그랬다.
손님들은 칼릴이 하는 모든 것을 보고 웃어댔지만, 그는 신경쓰지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의 억양을 두고 끊임없이 그를 놀렸고, 그를흉내내면서 왁자하게 웃었다. 동생이 말을 더 잘하도록 자신을 가르치는 중이라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는 충분히 말을 잘할 수 있게되면 통통한 음스와힐리* 아내를 얻어 경건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테라스에 있는 노인들은 통통한 젊은 아내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칼릴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말해주는 것을 좋아했다. 손님들은 그가 발음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는 단어와 구문을 반복하게했다. 칼릴은 그것들을 아무렇게나 발음하면서 같이 웃었다. 그의 두눈이 즐거움으로 환하게 빛났다. - P46

그들은 아지즈 아저씨가 저녁 늦게 그날 번 돈을 가지러 올 때,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그를 보았다. 그는 칼릴이 건네준 돈자루를 흘깃 들여다보고, 칼릴이 하루의 매상을 기록한 공책을 훑어보고는 더 자세히살피기 위해 둘 다 가져갔다. 이따금 그를 더 자주 볼 때도 있었지만,
지나치는 길에만 그랬다. 그는 늘 바빴다. 아침에는 시내로 가는 길에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가게를 지나쳐갔고,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돌아왔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는 심각한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테라스에 있는 노인들은 아지즈 아저씨가 생각에 골몰해 있을 때면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유수프는 이제 그 노인들의 이름을 알았다. 바 템보, 음지 타임, 알리 마푸타. 그러나 그는 그들을 하나의 현상이라고 여겼다. 그들이 얘기하는 동안 자신이 눈을 감으면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될 거라고 상상했다. - P49

 유수프는 이제까지 그렇게 바다 가까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그것의 거대함에 말을 잃었다. 물가의 공기는 상쾌하고 알싸한 느낌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똥과 담배와 원목 냄새로 가득했다. 자극적이면서 썩는 듯한 냄새도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해초 냄새였다. 해변에는 끌어올린 아우트리거 보트들이 줄지어 있었다. 한참 위쪽에는 선주인 어부들이 차양 밑과 요리중인 불 주변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조류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조류가 일몰두 시간 전쯤 바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이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주자 칼릴은 그들 사이에 태연히 앉더니 유수프를 자기 옆에 끌어다앉혔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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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으로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 나지막하게 보이지만 멀리는 아파트가 우뚝우뚝하고, 한쪽으로는 잡목이 우거진 산이 가깝게도 멀게도 중첩되는 풍경 속에 앉아서 ‘내겐 너무 완벽한 빈‘ 을 읽는다.
너무 달라서 닮아있는 풍경이라 그런지 아주 머나먼 곳을 떠도는 기분이다.


서문

오래된 도시에남아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찾아서


《유럽도시기행》 1권을 내고 제법 긴 시간이 지났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해외여행이 불가능해진 상황이라서 2권 출간을두 해 넘게 늦추었다. 이번에는 빈 부다페스트 프라하 · 드레스덴이야기를 담았다. 다음에는 서쪽 이베리아반도의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리스본 포르투를 탐사하려고 한다.
2권의 중심은 빈이다. 문화 예술에 한정할 경우빈은 파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수준이 높고 가진 것이 많다. 오랜 세월 합스부르크제국의 수도였고, 19세기 후반 짧은 기간에 낡은 중세 도시에서 벗어나 유럽의 첫손 꼽는 문화 예술 도시로 도약했으며, ‘비엔나커
‘피‘에서 모차르트의 음악까지 다양한 매력으로 사람을 끌어들인다.
특히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는 여행자는 빈을 빠뜨리지 않는다.
부다페스트와 프라하는 합스부르크제국의 영향권에 있었던 만큼 정치·경제·문화 · 역사 등 모든 면에서 빈과 깊이 얽혀 있다. 하지만 도시 공간의 구조와 문화적 분위기는 크게 다르다. 빈이 지체높은 귀족이라면 부다페스트는 모진 고생을 했지만 따뜻한 마음을간직한 평민 같았고 프라하는 걱정 없이 살아가는 ‘명랑소년‘을 보는

듯했다. 온몸이 부서지는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겨우 깨어나 재활 중인 중년 남자라고 해도 될 드레스덴은 프라하에 갈 때들르기 좋은 도시여서 2권에 넣었다.
1권 표지에는 네 도시의 대표 건물을 내세웠다. 유럽의 역사를바꾸었던 그 도시들에는 문명사의 한 시대를 증언하는 집이 있었다.
하지만 2권의 도시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보다는 도시의 역사에자신의 이름과 행적을 각인한 사람의 모습이 더 크고 뚜렷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들을 표지에 넣었다. 빈은 시씨 황후, 부다페스트는 언드라시 백작, 프라하는 종교개혁가 얀 후스다. 드레스덴은 딱히 내세울 대표 인물을 정하기 어려워서 랜드마크 1번에 해당하는 성모교회를 선택했다. 그 사람들의 삶과 성취, 성모교회의 죽음과 부활은 내마음에 파르테논 콜로세움 · 아야소피아 에펠탑 못지않은 여운을남겼다.

1권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를 꼼꼼히 살폈다. 나는 도시의 건축물 · 박물관·미술관 ·길·광장·공원을 ‘텍스트(text)‘로 간주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콘텍스트(context)‘를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도시는 콘텍스트를 아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주며, 그 말을 알아듣는 여행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깊고 풍부한 감정을 느낄 수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소화하기 어렵다거나 거기 사는사람들의 일상이 보이지 않아 아쉽다고 하는 독자가 적지 않았다.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지적이다. 그렇지만 무엇을 크게 바꿀수는 없었다. 평범한 한국인 단기여행자와 같은 방식으로 다니고, 그런 여행자에게 유익한 정보를 추려 제공할 목적으로 《유럽도시기행》

시리즈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욕심이 지나쳤는지도 모르겠다. ‘콘텍스트‘를 이야기하려면 ‘텍스트‘를 먼저 제시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한 도시의 왕궁 · 성당.교회 · 박물관 · 거리 · 광장은 복잡하게 얽힌 입체여서 글로 보여주기 어렵다. 그 도시들을 가본 적이 있는 독자가 더적극적이고 우호적인 평을 남긴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텍스트‘를보지 않은 사람은 ‘콘텍스트‘의 가치를 알기 어렵다. 사진을 많이 실으면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무한정 실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니번거롭더라도 도시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검색해 가면서 읽기를 독자들에게 권할 수밖에 없다. 해보면 의외로 재미가 있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독자들과 공유하면 좋겠다고 판단한 정보를추려서 책을 썼다. 그 정보가 객관적으로 중요한 것이라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 도시들의 여러 공간에서 누구나 같은 감정을 느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이 그렇듯 여행도 정답은 없다. 저마다 자신이원하는 방식으로 해나가면 그만이다. 이미 밝혔듯, 이번에도 내가 독자들에게 기대하는 평가는 하나뿐이다. "흠, 이 도시에 이런 게 있단말이지. 나름 재미있군."
코로나19 사태의 끝자락에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2022년 7월유시민

빈은, 책으로 말하자면, 유명한 인문학 고전과 비슷하다. 명성 높은 인문학 고전은 모르면 교양인이 아닌 것 같아서 읽는 경우가 많다. 대단한 내용이 들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다 읽어도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내게는 플라톤 · 공자 · 단테· 괴테 등의 책이 다 그랬다. 빈에 발을 들여놓았을때 내 심정은 그런 책들을 펴들었던 때와 다르지 않았다.
빈은 명성만큼 대단해 보였다. 도심의 모든 공간이 영화 속 같았다. 건물은 하나같이 크고 멋졌으며 거리는 넓고 깨끗했다. 상가의 쇼윈도와 사람들의 옷차림에 부티가 흘렀다. 카페와 레스토랑은 실내장식이 화려했고 음식값도 그만큼 비쌌다. 바로크 스타일 건물에 들어선 공공 전시관과 세련미 넘치는 민간 갤러리에는 미술 교과서에서 보았던 거장들의 그림과 조각이 넘쳐났고, 오페라하우스와 음악협회 공연장 등에서는 유럽 최고 수준의 악단이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비롯한 대가의 작품을 공연했다.  - P15

 그런데 빈에서는 어쩐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나만 그런가 해서 그게 더 불편했다. 그런데 빈을 버리고 떠난 황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황후도 버거워했던 곳이라잖아!‘
인문학의 ‘위대한 고전‘을 읽을 때는 서문부터 끝까지 차근차근읽어야 한다. 멋대로 건너뛰거나 앞뒤를 바꿔 읽으면 더 힘들다. 빈여행도 그랬다. 무엇부터 봐야 할지, 어디에서 출발해 어떤 곳을 거쳐 어느 지점에서 하루 일정을 끝내야 좋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내키는 대로 다니라든가, 길을 잃어야 여행의 진짜 재미를 알 수 있다든가 하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단기여행자가 선택할 수 있는 탐사경로는 하나뿐이었다. 링을 따라 걸으면서 안팎을 살핀 다음 버스나트램을 타고 외곽의 명소를 방문하는 것이다. 숙소가 어디든, 링의 어느 지점에서 출발하든, 그건 상관이 없다. - P16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산꼭대기에 오른다. 몸 고생 없이 눈 호강을 즐길 수는 없을까? 케이블카와 승강기는 대답한다. 와이낫? 성당의 남탑 슈테플에도 그게 있다. 340개 넘는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된다. 슈테플 전망대는 파리 에펠탑 전망대처럼 도시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시내뿐 아니라 공항 관제탑처럼 보이는 외곽의 쓰레기소각장, 멀리북동쪽 강 건너편의 도나우 전망대, 남동쪽 변두리의 벨베데레 궁전도 훤히 보였다. 비너발트(Wienerwald, 빈 숲)가 넓게 펼쳐진 서쪽 외곽의 구릉지대 말고는 사방이 다 평지여서 그리 감탄할만한 경치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뜻밖의 배움을 얻었다. 대성벽을 왜 쌓았고 왜 헐었는지 알 수 있었다. - P22

링은 워낙 넓은 길이라 슈테플 전망대에서 보아야 그 모양과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링을 따라 가상의 성벽을 세우고 바깥쪽의 건물들을 지우자 중세 도시 빈이 보였다. 그 큰 제국의 수도가 그토록작았다니 믿기지 않았다. 서울 남산 전망대에서 본 한양도성이 떠올랐다. 숭례문-서대문-인왕산-북악산을 돌아 낙산-동대문을 거쳐 남산으로 다시 이어지는 한양도성의 길이는 18.6 킬로미터다. 그것이 조선의 수도 한양의 크기였다. 링은 북쪽 도나우 운하 구간까지 다 합쳐도 5.4 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넓힌 제국 - P26

의 수도라면 그렇게 작을 수 없었을 것이다. 높고 두꺼웠던 빈의 대성벽은 합스부르크의 권력자들을 지배했던 두려움을 드러낸 건축물이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그런 감정을 이겨냈기에 그 성벽을 길로 바꾸는 결단을 할 수 있었다. - P27

대성벽이 없었다면 빈은 일찍이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었을지 모른다. 1453년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오스만제국 군대는 여세를 몰아 헝가리와 체코 일대를 장악한 다음 1529년 빈을 포위했다. 빈 다음 차례는 독일과 프랑스였다. 유럽 기독교 세계는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러나 빈은 오스만제국 군대의 포위 공격을 견뎌냈다. 성벽을 더 튼튼하게 쌓아 1683년 오스만제국의 두 번째포위 공격도 물리쳤다. 알프스의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해 철수한 적군의 요새에서 청동 대포를 3백 개 넘게 노획한 빈 사람들은 그것을녹여 18톤짜리 종을 만들었다. 그게 빈의 대표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품메린(Pummerin)이다. 슈테플 하단에 매달아 두었던 품메린이 제2차세계대전 막바지 러시아군의 폭격에 맞아 크게 부서지자 오스트리아정부는 전쟁이 끝난 후 무게가 4톤이나 늘어난 두 번째 품메린을 만들어 슈테판성당의 북탑인 ‘독수리탑‘에 걸었다. - P27

온몸을 적셔 준 ‘비엔나커피‘의 달콤함이 물 밑으로 가라앉는 듯한 우울함을 덜어주었다. ‘이성은 고상할지 몰라도 사람의 내면을 항구적으로 지배하지는 못해 매 순간 더 강하게 인간을 끌어당기는 것은 감각인지도 몰라. 어때? 그런 것 같지 않아? ‘비엔나커피‘는 내게그렇게 말했다. 잠깐, 오해를 피하려면 ‘비엔나커피‘라고 따옴표를 한이유를 말해야겠다. 빈에는 ‘비엔나커피‘가 없었다. 딱 한군데, 부다페스트행 기차를 기다렸던 중앙역 로비의 비스트로에 ‘비엔나커피‘
라고 써 붙여 놓은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건 ‘비엔나커피‘가 아니었다. 우리나라 ‘길다방 커피‘에 생크림을 올린,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은 정체불명 음료였다. - P32

성벽과 길처럼 대조적인 쌍이 달리 또 있을까성벽은 안과 밖을 차단하지만, 도로는 모든 것을 뒤섞는다. 대성벽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길을 내자 빈과 외부세계의 관계가 극적으로 바뀌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강력하고 새로운 무기 때문에 군사적 가치를 상실한 성벽이 도시의 확장과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판단했다. 외성벽 바깥쪽에 민간 가옥이 제멋대로 들어섰고 대성벽과 외성벽의 사이 공간역시 마찬가지 상태였다. 합스부르크제국이 전통적으로 유대인을 너그럽게 품어준 탓에 북쪽의 도나우 운하 좌안에는 거대한 유대인지구가 형성되어 있었다. 성벽 안팎의 인구가 50만 명에 육박했지만, 성벽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링을 한 바퀴 돌면서 유럽 역사의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건축양식을 거의 다 만났다. 건축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빈을 지나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슈테판 성당과 호프부르크의 구왕궁, 쇤브룬과 벨베데레 궁전은 중세의 유산이다. 그 밖의 이름난 건축물들, 예컨대 빈대학교 본관, 오페라하우스, 호프부르크 신왕궁, 예술사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국회의사당, 시청사, 응용예술 박물관, 증권거래소, 제체시온 등은 대부분 대성벽 해체 후 짧은 기간에 지어졌다. 모두링 주변에 있고 건축양식은 제각각이다. 그래서 빈의 건축양식을 ‘비엔나 스타일‘ 또는 ‘링 양식‘이라고 한다. 뭐라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잡다한건축양식의 집합이라 다른 이름을 붙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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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시 기행 2권을 읽으려는데 1권의 내용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무려 3년이나 되었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한 번 읽은 책을 기억한다는 말은 전설 속의 백만 년 전의 얘기다. 1권의 내용을 몰라도 전혀 상관없는 여행기인데도 굳이 1권을 읽었다. 처음 읽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쓰면서 어쩐지 쓸쓸하다.






아테네 플라카지구, 로마의 포로로마노, 이스탄불 골든혼, 파리라탱지구, 빈의 제체시온, 부다페스트 언드라시 거리, 이르쿠츠크 데카브리스트의 집, 이런 곳에 가고 싶었다. 다른 대륙에도 관심이 없지는않았지만, 스무 살 무렵부터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든 곳은 주로 유럽의 도시들이었다. 그곳 사람들이 훌륭한 사회를 만들어 좋은 삶을 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 더 자유롭고 너그럽고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 수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다가소설보다 더 극적인 역사의 사건들을 만났고, 그 주인공들이 살고 죽은 도시의 공간을 알게 되었다. 삶의 환희와 슬픔, 인간의 숭고함과비천함, 열정의 아름다움과 욕망의 맹목성을 깨닫게 해주었던 사람과 사건의 이야기를 그곳에 가서 들어보고 싶었다. - P5

아테네

비행기 표를 예약했을 때는 이런 정보와 이미지가 머릿속을 떠다녔는데, 정작 아테네에 발을 딛자 그 무엇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아테네 여행자들이 무턱대고 아크로폴리스부터 찾는것은 이런 불안감을 얼른 해소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아테네는 괜찮은 동네에 있는 역사 전문 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크지 않아서 비교적 짧은 시간에 둘러볼 수 있고, 주변의 특색 있는카페와 ‘가성비‘ 좋은 식당들에서 자잘한 즐거움을 맛볼 수도 있다.
사람들이 이 도시에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고대 유적을 보기 위해서인데, 고대 유적은 대부분 신타그마 광장에서 아크로폴리스 가는 쪽에 몰려 있다. 여기를 ‘과거의 공간‘이라고 하자. 그 반대쪽 오모니아 광장 방면의 도심과 외곽은 시민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현재의 공간‘이다. 중간지대라고 할 수 있을 신타그마 광장 부근과 플라카지구는 과거와 현재가 뒤엉긴 ‘혼합 공간‘이다.  - P20

이틀 정도면 아테네의 역사 공간을 거의 다 볼 수 있다. 그래서더 길게 머무르는 여행자들은 미노타우루스의 미로를 품고 있는 크레타섬, 포세이돈 신전의 기둥만 남은 수니온곶, 신탁(神託)의 전설이떠도는 델피 신전 같은 곳으로 당일치기 소풍을 간다. 아테네 관광청은 온오프라인으로 다채로운 당일치기 여행 정보를 제공하고, 한국여행사들은 아테네를 베이스캠프로 삼아 기차를 타고 북쪽 내륙 메테오라의 수도원들을 방문하거나, 흰색 담벼락과 푸른색 지붕으로유명한 산토리니섬으로 날아가 와인 투어와 생선 요리를 즐기는 일정을 권한다. 메테오라와 산토리니는 가볼 만한 곳이긴 했지만, 아테네 여행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따로 말하지는 않겠다. - P21

첫날 아침 신타그마 광장에서 ‘해피트레인‘을 타고 아크로폴리스를 본 다음 아고라를 거쳐 플라카지구로 내려와 점심을 먹었다. 광장모퉁이에서 출발하는 ‘해피트레인‘은 조그만 전기자동차에 폭이 좁고 지붕이 없는 나무 객차를 여러 개 단 꼬마열차인데, 주요 관광지마다 정류장이 있었고 플라카의 좁은 골목길을 누비는 재미가 쏠쏠했다. 오후에는 큰길을 다니는 ‘홉온홉오프 시티투어 버스를 이용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과 국립 고고학 박물관, 국립 아테네공과대학교를 보았다. 정류장이 해피트레인보다 많고 더 먼 곳까지 갈 뿐만아니라 2층은 지붕이 없어서 거리가 잘 보였다. - P21

한국인 여행자야 말할 것도 없다. 경제 발전을 이루고 해외여행의 자유를 얻은 1990년대 이후 한국인은 세계의 모든 이름난 도시를무리 지어 또는 홀로 탐사하는 중이다.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사피엔스는 7만년 전쯤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벗어났다는데, 우리의 조상들은 몇만 년 동안 대를 이어가며 유라시아대륙을 걸어서횡단했거나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들의 후손인 한국인에게는 ‘역마살 유전자‘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야 이토록 미친 듯이 지구 표면의 모든 이름난 도시를 쏘다니겠는가. - P22

고대 그리스 건축물의 핵심은 돌기둥이 아닐까 싶다. 길이, 모양,재질이 무척 다양한데 특히 주두(기둥의 윗부분)의 스타일에 저절로 눈길이 갔다. 주두를 매끈하게 다듬기만 하거나, 부드럽게 부풀려문양을 음각하거나, 꽃잎 모양의 장식이 밖으로 나오게 깎은 돌기둥들을 감상하는 것은 독일 아우토반을 달리는 승용차의 차종을 알아맞히는 놀이만큼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돌기둥의 다양성을 감상하기에 최적인 공간은 그리스가아니라 터키에 있다. 돌기둥 수백 개가 천장을 받치고 있는 ‘지하궁전‘인데, 자세한 이야기는 이스탄불 편에서 하겠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내 마음의 돌기둥‘을 만났다. 에레크테이온신전의 ‘카리아티드(고대 그리스 신전 건축에서 여신상으로 만든 돌기둥)‘였다. - P28

옷자락을 부드럽게 늘어뜨리고 다리 하나를 살짝 구부린 채 현관 지붕을 이고 선 6개의 여인상은 얼굴이 훼손되어 표정을 알 수 없고 팔꿈치 아래가 떨어져 나갔지만 서로 다른 옷과 머리 모양과 뒤태가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카리아티드가 ‘카리아의 여인‘이라는 해석이 있다. 아테네군은페르시아와 손잡았던 카리아로 쳐들어가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를노예로 만들었는데, 그걸로도 부족해서 카리아의 여인들에게 에레크테이온의 지붕을 이고 서 있도록 벌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믿기 어려웠다. 남자들 대신 징벌을 받는 여인들을뭐 하러 그렇게 멋진 형상으로 빚는단 말인가. 카리아티드의 모델이누구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돌기둥을 여인의 형상으로 조각한 창의적 발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유럽 도시에서는 철근 콘크리트 공법을 썼기 때문에 돌기둥이 전혀필요하지 않은 현대식 건물에도 카리아티드를 연상시키는 여인상을부조해 놓은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 P30

그리스는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나라와 비슷해서 유럽에서는 가난한 편에 속한다. 게다가 정부가 국내총생산의 두 배에 육박한 대규모 국가 채무의 존재를 회계 분식으로 장기간 숨겨온 사실이 밝혀진2009년에 국가 부도 위기를 맞은 뒤로 실업률이 20%를 넘나드는 등심각한 후유증을 앓았다. 해운업자를 비롯해 부자가 많지만 세금을제대로 걷지 못해 정부는 만성적 재정적자에 허덕인다.
그런데도 아테네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아둥바둥 애쓰는 기색이없었다. 모두가 ‘조르바‘처럼 극단적으로 느긋하게 살지는 않겠지만악착같이 무언가를 해보려는 분위기를 감지할 수 없었다. 한국 같으면 누군가 틀림없이 플라카 초입에 튜닉과 가죽 샌들 대여점을 냈을것이다. 서울 서촌이나 전주 한옥마을, 경주 대릉원의 한복 대여점처럼, 그리고 시 정부는 아마도 외국어를 능숙하게 하는 ‘소크라테스복장‘의 문화해설사를 투입해 지나가는 관광객을 붙들고 "좋은 구두를구하려면 어떻게 하슈?" 따위의 질문을 던지게 했을 것이다. 분명 대박이 날 것 같은데, 플라카에는 그런 낌새조차 없었다. - P40

소크라테스는 당대의 통념을 흔드는 질문을 던졌다.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유란 ‘폴리스의 자유‘ 또는 ‘집단의 자유‘였다. 자신들이 페르시아나 다른 도시국가에 지배당하거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 인권, 평등 같은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같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도노예제와 성차별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폴리스의 영광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 천착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이성에서 도덕법을 끌어내려했다. 출신 배경이 어떠하든 만인이 똑같이 자유를 누릴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남자 시민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를 인격적 이념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대의 인기 극작가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이라는 연극에서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교활한 개자식‘이라고 비난했다. - P71

플라카의 골목을 걸으며 생각해보았다. 아테네 시민들은 왜 소크라테스를 죽였나? 고정관념, 광신, 시기심, 무지, 무관심, 변덕이 그를죽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어떤 지식인은 국회의원을 차라리 추첨으로 뽑자고 주장한다. 국회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는충분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나는 이 주장에 공감하지 못한다. 플라톤은 민주주의가 반드시 중우정치로 흐른다면서 덕과 진리를 아는
‘철학자의 통치‘를 옹호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들이 각자 훌륭해지지 않고, 훌륭한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훌륭해지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 시민들보다 얼마나 더 훌륭하며 국가와 정치에 대해서 얼마나 더 큰 관심을 가지고얼마나 더 능동적으로 참여하는가? 나는 직접민주주의가 다수의 폭정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비관론에 한표를 던지고 싶다. - P73

아테네는 한 국가의 수도이고 3천 년 역사를 품고 있지만 화려하지도고풍스럽지도 않았다. 냉정하게 말하면, 초라해 보였다. 오래된 역사도시는 역사 유적이 시민의 생활 공간과 분리된 경우가 많은데, 그둘이 아테네처럼 분명하게 나뉜 도시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로마와 이스탄불도 어느 정도는 그런 모습이었지만 아테네만큼은 아니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없는 인간 본연의 한계 때문이다.
세상에는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는 일이 많다. 학자들은 ‘경로 의존성‘이라는 개념으로 이런 현상을 설명한다. 우연히어떤 길에 들어서고 나면 더 좋은 길을 알아도 가던 길을 벗어나지못한다는 것이다. - P74

여러 차례의 영토 빼앗기 전쟁과 주민들의 대규모 상호 이주 사태를 겪었던 만큼, 그리스와 터키는 한국과 일본만큼이나 사이가 좋지 않다. 하지만 오스만제국 시대에 400 년 동안 섞여 살았던 만큼 음식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다. 어떤 것이 어느 쪽에서 먼저생겨서 다른 쪽으로 전파되었는지 밝혀내기도 어렵다.
술도 그랬다. 그리스 국민 술로 통하는 ‘우‘는 이스탄불에서 포도주 찌꺼기로 만든 재탕 와인을 증류해서 만들었지만 그리스에서는곡물 주정으로 제조한다. 40도짜리여서 얼음을 타서 먹는 경우가 많은데 물이 섞이면 뿌옇게 변한다. 숙성할 때 향신료로 쓰는 미나리과풀 ‘아니스‘의 어떤 성분 때문이라고 한다. 식욕을 돋운다고 식전에마시는데, 뭐라고 꼭 집어낼 수는 없지만 거북한 냄새가 나서 다시 - P84

마지막 밤, 불 밝힌 파르테논과 리카비토스 언덕 꼭대기가 보이는 식당에서 아테네를 생각했다. 철학과 과학과 민주주의가 탄생한고대 도시, 1천500년 망각의 세월을 건너 국민국가 그리스의 수도로부활한 아테네는 비록 기운이 떨어지고 색은 바랬지만 내면의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남부러울 것 없었던 어제의 미소년이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겪은 끝에 주름진 얼굴을 가진 철학자가 되었다고 할까.
그 철학자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큰소리로 말하지 않고 오래된 양복에 가려진 기품을 알아볼 책임을 온전히 여행자에게 맡겨두고 있었다.
비행기가 아테네 공항 활주로를 이륙할 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다시는 못 볼지 몰라. 하지만 ‘야수(Teld Gou, 잘 있어!‘는 내키지않아. 왠지 모르게 또 보게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거든. 그러니 높고도 쓸쓸한 도시여, ‘따레메 (Ta A&E, 또 봐)!‘ - P87

로마,
뜻밖의 발견을허락하는 도시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나폴리를 비롯해 이탈리아에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도시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로마를 온전히 대신할 만한도시는 없다.
로마는 무엇이 특별한가? 우선 예술적 기술적 수준이 높고 규모가 큰 고대 유적이 유럽의 어떤 도시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많다. 둘째, 세상에 하나뿐인 바티칸 교황청 덕분에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걸출한 건축물과 예술품을 품고 있다. 셋째, 19세기 후반 출현한 이탈리아 국가 수립의 역사를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한다.
서구 문명은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빅뱅‘을 일으켰고 로마제국에서 ‘가속 팽창‘을 했다. 로마는 서구 문명의 가속 팽창 흔적을 지닌 도시답게, 고대부터 현대까지 문명의 발전 양상을 압축해 보여준다. 단한 번 여행으로 로마의 모든 것을 보겠다는 욕심은 처음부터 갖지 않았다. 며칠 동안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지만, 도시의 윤곽을 어렴풋이나마 가늠해보면서 반드시 가보고 싶었던 공간 및 군데를 밟아본 게 - P93

고작이었다. 그렇지만 로마도 하나의 도시일 뿐이다. 로마에 가서 이탈리아를 보았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큰 착각이다. 이탈리아는 엄청난 다양성을 지닌 나라여서 어떤 도시도 혼자서는 이탈리아를 대표하지 못한다. 알프스에서 지중해 한가운데로 장화처럼 뻗어 나온 이탈리아반도는 면적의 75%가 비탈진 산과 언덕이다. 한반도의 백두대간처럼 이탈리아반도에는 아펜니노산맥이라는 등뼈가 있으며, 한반도의 1.5배인 30만 제곱킬로미터의 국토에 6천만 명이 산다.
프랑스, 스위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부 지방과 로마를 포함한 중부 지방, 3면을 지중해가 둘러싸고 있는 남부 지방, 사르데냐와시칠리아를 비롯한 섬들은 기후와 지형, 역사, 산업, 언어,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서로 다르다.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도이며 이탈리아 말을 한다는 것 말고는 무슨 공통점이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 P94

어떤 순서로 무엇을 보아야 할지, 로마 여행에 정답은 없다. 그러나 오직 로마에만 있는 것은 되도록 빠뜨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가령콜로세오를 비롯한 고대 유적과 가톨릭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이다.
도시 전체에 널린 르네상스 시대 이후의 건물과 광장, 미술관, 박물관, 기념관들은 마음이 끌리는 곳을 골라서 다녔다. 어차피 다 볼 수없고, 비슷한 것은 다른 도시에도 많으니까.
고대 유적 구경은 콜로세오에서 시작했다. 아테네의 슈퍼스타가파르테논이라면 로마의 슈퍼스타는 콜로세오다. 지중해의 가을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 푸르렀지만, 지하철 B선 콜로세오역 근처를 바삐오가는 직장인과 학생들은 아무도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내게는 여행지였지만 그들에게는 숨 가쁜 하루를 여는 생활의 터전이었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되도록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 P100

공화정 시대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원로원 건물은 그리 화려하지않은 외관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었지만, 카이사르가 최후를 맞았던 앞마당은 완전한 폐허였다.
로마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일 것이다. 그러나 로마에는 그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 거의 없다.
그나마 그가 잠시라도 머물렀을 원로원 건물이 보이기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카이사르는 B.C.1세기 중반 아주 잠깐 최고 권력자로등극했을 뿐 황제가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로마의 정치체제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제국의 황제 또는 강대한 국가의 절대 권력자를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캐사르, 카이저, 시저, 차르 등은 표기법과 발음이 다르지만 모두 카이사르에서 나온 말이다. - P116

공화파는 암살에 성공했지만 카이사르를 지지했던 로마 시민들의 분노를 감당하지는 못했다. 내전으로 치달았던 로마의 정세는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내전을 평정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됨으로써 안정을 찾았다. 공화정을 공식 폐지한 아우구스투스황제는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할 목적으로 카이사르를 신격화했고,
후임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했다. 로마 황제들은 ‘카이사르‘
라는 칭호를 대물림하면서 청년 카이사르의 조각상을 도시 곳곳에세웠는데, 이 전통은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할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 P122

폐허가 된 원로원 마당에서 절충하기 어려운 것들이 공존했던 인간 카이사르의 생애를 돌아보았다. 그는 귀족이었지만 평민파에 가담했다. 어떤 술수도 마다하지 않고 권력 투쟁을 벌였지만 이긴 후에는 정적을 너그럽게 포용했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해 공화정을 사실상 폐지했지만 민중의 소망과 요구를 존중했다. 원로원의 부패 기득권 세력을 무너뜨리고 시민의 권리를 확장했으며 빈민과 해방 노예,
속주의 민중을 돕는 개혁 조처를 밀어붙였다. 보기 드문 정치적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 P122

‘절반 뚜벅이‘로 로마 구경을 했다. 숙소에서 출발점으로 가고 종료지점에서 숙소로 돌아올 때, 그리고 다음 행선지가 멀리 있을 때만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나머지는 걸어서 다녔다는 뜻이다.
카피톨리노 언덕 앞 베네치아 광장 근처 골목의 식당에서 가벼운점심을 먹은 다음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에서 캄피돌리오 광장, 판테온, 트레비 분수, 스페인 광장을 거쳐 포폴로 광장까지 도심의 북쪽지역을 탐사하려면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고달프긴 했지만 저녁밥이 잘 넘어갔고 밤에 잠도 쉬이 들었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은 로마에 있지만 이탈리아 전체를 대표하는 시설이다. 전면에 있는 기마상의 주인공은 이탈리아 통일을 이끈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이고, 기마상 양편에 부조한 사람들은건국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무명용사들이다. 에마누엘레 2세뿐만 아니라 가리발디, 카보우르, 마치니 등 이탈리아 통일 주역들의 유품도전시하는 이 기념관은 현대사와 관련한 기획전을 꾸준하게 연다. 이탈리아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여행자라면 시간을 넉넉하게 들일 만했다. - P128

가리발디의 영웅담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1862년에는 4만 군사를 끌고 오스트리아제국 군대를 제압해 베네치아를 탈환했으며1867년에는 교황청을 가장 악독한 비밀결사체라고 비난하면서 로마로 진군했다. 로마를 이탈리아왕국의 수도로 선언하고서도 실제로는사르데냐왕국의 토리노에 머물렀던 에마누엘레 2세는 프랑스 군대가프로이센과 싸우기 위해 떠나자 지체 없이 로마를 점령해 통일운동의 마침표를 찍었다.
가리발디는 단순한 군사 영웅이 아니라 확신에 찬 휴머니스트이자 투철한 공화주의자였다. 노예제 폐지에 대한 신념이 불확실하다며 링컨 미국 대통령의 스카우트 제안을 거절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을 정도로 강력한 신념의 소유자였던 그는 모든 국민에게 선거권을부여하는 정치 개혁을 추진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철폐하는 입법을 시도했다.
한 국가와 국민을 위해 가리발디만큼 많은 일을 한 사례는 흔치않다. 역사 공부를 하려고 로마에 가는 건 아니겠지만, 이탈리아 건국역사를 대충이라도 알면 로마 여행의 맛이 더 깊고 풍성해질 수 있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은 그런 기회를 제공한다. - P132

바티칸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곳이다. 로마에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교황이 다스리는 별도의 도시국가인데, 이 특이한 국가의 영토는겨우 0.44 제곱킬로미터이고, 1천 명이 겨우 넘는 시민권자의 직업은성직자, 직원, 근위병이 전부다. 바티칸이라는 지명은 가톨릭 교황청보다 먼저 생겼다. 현재 바티칸의 영토는 바티칸 언덕에서 베드로 광장까지다. 이 구역은 9세기 중반 교황 레오 4세가 사라센족의 공격을막으려고 강둑을 따라 성벽을 쌓아 올리면서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이탈리아왕국은 1871년 교황청의 주권을 전면 부정하고 바티칸을 로마에 통합했지만, 1929년 무솔리니가 라테라노에서 조약을 체결해현재의 바티칸 지역을 교황청의 영토로 인정했다. - P142

나 같은 중년의 관광객은 박물관과 대성당 구경을 마치기도 전에당이 떨어져 허덕이게 된다. ‘화해의 길‘ 이면도로의 식당에 들어가점심을 대충 해결하고 테베레강을 내려다보는 산탄젤로성에 올랐다.
산탄젤로성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가족묘로 쓰기 위해 지었지만 외부 침략이나 내전이 터졌을 때는 비상 대피소로 썼다. 이 성은 강이한눈에 들어오는 군사적 요충이고 성벽도 높아서 방어하기에 좋았을듯했다. 내부의 예배당은 제법 화려했지만, 시스티나 예배당을 보고온 터라 별 느낌이 없었다.
산탄젤로성의 매력 포인트는 꼭대기에 있는 비스트로였다. 여기서 커피를 마시면서, 허겁지겁 점심을 때우고 온 것을 크게 후회했다.
음식 맛이 좋지 않아도 괜찮을 비스트로였다. 무엇이든 기분 좋게 즐길 수 있는 고성(古城) 레스토랑 분위기가 났기 때문이다. 다른 손님이받은 음식의 비주얼을 보니 맛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속으로 다짐했다. ‘로마에 다시 온다면 한 번쯤은 여기서 점심을 먹어야지.‘ - P150

로마 여행 셋째 날은 대형서점에서 책을 구경하는 기분으로 아침부터 해 저물 때까지 정처없이 성당과 광장, 궁전을 찾아다녔다. 로마는 확실히 여러 얼굴을 가진 도시였다. 아무렇게나 다녀도 거리의 향기를 맡고 공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테르미니역 광장 바로 앞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이었다. 고대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에 붙여 지은 이 성당에는 2천 년 전 로마의 돈 많은 자유민이 만든 것을 되살린 내부 정원이 있었다. 연결된 건물을 로마 국립 박물관으로 쓰고 있었는데, 통유리 벽을 통해 고대의 목욕탕 내부를 볼 수 있었다. 훔쳐보는 게 아닌데도 묘한 긴장감이 들었다. - P156

로마는 전성기를 다 보내고 은퇴한 사업가를 닮았다. 대단히 현명하거나 학식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뛰어난 수완으로 돈과 명성을 얻었고, 나름 인생의 맛과 멋도 알았던 그는 빛바랜 명품 정장을입고 다닌다. 누구 앞에서는 비굴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돈지갑이 얄해도 기죽지 않는다. 인생은 덧없이 짧으며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때 거두었던 세속적 성공에 대한 긍지를 버리지는 않는다. 로마는 그런 도시인 것 같았다.
"어때? 종종 만나서 놀면 괜찮지 않겠어?" 로마가 물었다. 테르미니역 승강장에서 공항 가는 기차에 오르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
가끔 만나는 건 뭐, 나쁠 것 없겠지. 다음에 보자. 바쁜 일 좀 끝나면.
차오(Ciao, 안녕!" - P165

이스탄불, 단색에 가려진 무지개


지하궁전의 돌기둥은 실로 다양했다. 사각기둥, 원기둥, 통으로깎은 기둥 등, 모양도 두께도 다 제각각이었다. 어떤 것은 주두가 아예없었고 어떤 것은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주두 장식이 있었다. 저수조 맨 안쪽의 메두사도 재활용한 석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메두사를 그런 식으로 놓았을까? 저수조 기둥은 길이가 모두같아야 한다. 너무 긴 기둥은 잘라 맞추었겠고 너무 짧은 것은 적당한 돌덩이를 괴었을 것이다. 마침 괴물 형상을 그려놓은 돌덩이 2개가 있었는데, 기둥을 받치기에 적당하게 놓다 보니 하나는 거꾸로, 다른 하나는 옆으로 놓게 되었다. 기둥을 안정시킬 수만 있다면 메두사가 바로 서든 뒤집어지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 일을 한 현장감독은 그것이 구름 관중을 불러 모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것이다. 이것이 메두사가 거꾸로 앉게 된 경위에 대한 나의 별 근거없는 추정이다. 그렇지만 제법 그럴듯하지 않은가. - P190

 다양성은 좋은 것이지만 서로 다른 민족, 종교, 문화가 뒤섞이면 갈등이 무력 충돌로 비화할 위험이 커진다. 1990년대에 유고연방이 해체된 직후 세르비아계 군인들이 보스니아의 무슬림 1만여 명을 학살한 ‘인종 청소‘ 사건을 기억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오스만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후 두 차례나 빈을 포위 공격했다가실패하고 물러났는데, 만약 그들이 빈을 함락시키고 서쪽으로 더 진격했다면 서유럽 전체가 발칸반도처럼 되었을지 모른다.
서 있는 곳이 다르면 세상사를 보는 관점도 달라지는 법. 1453년5월 29일 아침 벌어졌던 사건을 가리켜 유럽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티노플 함락‘이라 했고, 세계의 무슬림들은 ‘콘스탄티노플 정복‘이라했다. 둘 다 일리가 있다. 메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했고, 콘스탄티노플은 그에게 함락되었으니까.
메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바꾸었지만, 도시가사라지거나 몰락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스만제국은 투르크족만의국가가 아니라 다양한 인종과 민족, 상이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하는제국이 되었고 이스탄불은 그런 제국의 수도다운 도시로 발전했다.
이스탄불에는 투르크인,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터키인,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쿠르드인이 섞여 살았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등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했다. - P200

폴란드 여인 록셀라나였다. 열여덟 살에 전쟁포로로 이스탄불에잡혀 왔던 록셀라나는 노예로 팔렸다가 하렘에 들어가 술레이만 1세의 아내가 되었는데, 여섯 아이를 낳았고 외교 분야에서 중요한 조언자 역할을 했다고 한다.
여성을 제도적으로 차별해 온 이슬람 세계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술탄이 한 여인만 사랑했다고 하니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한 여인을진심으로 위하지 못하는 자, 어찌 만백성의 보호자가 될 수 있으랴.
술레이만 1세는 전쟁을 많이 한 술탄이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을것이라고, 쉴레마니예 자미가 보일 때마다 생각하곤 했다. - P203

이스탄불이 안전하지 않다고 해서 터키 사람 가이드 M을 고용했다. 그런데 M은 탁심 광장 근처 뒷골목 어디에 있다는 ‘파묵 하우스‘
를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어떤 날은 휴관일이라 했고, 다른 날은 동선이 맞지 않는다고 했다. 시종일관 진지하고 성실하게 우리를 안내했던 M이 그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니 그곳에 고객을 데려가지 말라는 당국의 지시가 있었던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이스탄불은 모든 것이 낡고, 한적하고 텅 빈, 흑백의 단조로운도시로 바뀌었으며 거리에서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히브리어가 사라졌다." 파묵은 자서전에 이렇게 쓴대가를 치르는 것 같았다. 이스탄불이 단색의 도시로 변한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오스만제국이 해체되어 제국의 수도 지위를 잃은 것, 둘째는 터키인이 아닌 주민들이 도시를 떠난 것이다. - P204

무스타파 케말은 단순한 군사 영웅이 아니었다. 우리의 역사 인물과 비교하자면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그리고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 등을 모두 뒤섞어 놓은 듯한 사람이었다. 전쟁 영웅, 민족주의 혁명가, 대통령, 계몽 군주, 공화주의자인 동시에 독재자였다.
그는 이슬람 문화와 터키 민족주의에 자신의 철학과 정치사상을 접목함으로써 터키공화국을 ‘창조‘했다.
이스탄불 여행자들은 다른 이슬람 국가에는 없는 것을 본다. 시민 대부분이 무슬림이지만 수많은 자미들 사이에 유대교 회당과 가톨릭 성당, 정교회 성당과 개신교회가 끼여 있다. 여성들은 적어도 법적으로는 차별받지 않으며, 머릿수건을 쓰지 않고도 사회생활을 한다. 거리에서 매를 때리는 형벌이 없으며, 하루 다섯 번 해야 하는 예배를 빠뜨려도 처벌하지 않는다. 이정표와 상점 간판의 글자는 알파벳이다. 이 모두를 무스타파 케말이 만들었다 - P210

성을 쓰도록 강제하는 법률을 만들 때 자신은 ‘아타튀르크(Atatürk,투르크인의 아버지)‘라는 성을 만들어 썼다. 무스타파케말은 이때부터아타튀르크가 되었다. 이런 성을 감히 선택한 동기가 애국심인지 자신감인지는 알 수 없다.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일을 한 사람이 했다는 게 믿어지는가? 아타튀르크는 인류 문명사에서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모순적인 인물이다.
탁월한 군사 지도자인 동시에 만만치 않은 내공을 가진 지식인이었으며, 공화주의자였지만 강력한 독재를 했다. 쿠르드족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주모자들을 냉혹하게 처형했으며, 질서유지를명분으로 야당을 해산하기도 했다.
직책은 공화국의 대통령이었지만 행동은 군주에 가까웠으며,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도 터키공화국을 서구에 접근시켰다. 평생 엄청나게 술을 마셨고 극도로 불규칙하게 생활했던 그가 1938년 11월 10일 아침 심장병으로 사망하자 터키 정부는 시신을 앙카라 민족학 박 - P211

물관에 안치하고 ‘터키공화국의 영원한 지도자‘로 선포했다.
아타튀르크의 신념과 인격은 헌법과 제도, 국민들의 마음에 각인되었고 오랫동안 터키공화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카리스마를 휘둘렀던 지도자가 사라진 세상이 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터키공화국은 1950년 선거에서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현했다. 아타튀르크에게 세속국가의 원리를 수호하는 것을 사명으로 받았던 군부가 여러 차례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이슬람 근본주의 정치세력의 성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자신을 ‘21세기의 아타튀르크‘라고 생각한 듯했지만, 2019년 3월 뉴질랜드에서 이슬람 사원이 테러를 당해 무슬림들이 목숨을 잃은 비극적사건이 터졌을 때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다시 자미로 바꾸겠다고 한그의 행태를 아타튀르크가 보았다면 아마도 크게 화를 냈을 것이다.
아타튀르크의 정치철학은 ‘세속국가론‘과 ‘공화주의‘, 그리고 ‘터키민족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아타튀르크는 터키를 ‘터키‘ 했다.
다문화, 다종교, 다민족을 포용했던 이스탄불이 단색의 도시로 바뀐것은 ‘터키화‘의 불가피한 결과였다. 19세기 유럽의 어떤 지식인이
100년 후 ‘세계의 수도‘가 되리라고 예언했던 이스탄불은 변방의 가난하고 슬픈 도시로 변해갔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그 누군가는 아타튀르크일 수밖에 없다. - P212

 그러나 1955년 불어닥친 민족주의 광풍은 그들마저 다 몰아내 버렸다. 아르메니아계를 비롯한 다른 소수민족 주민들도 더는 버티지 못했다. 그 사태 이후 이스탄불 거리에 들리는 언어는 터키말하나만 남았다. 오르한 파묵은 자전에세이 《이스탄불: 도시와 기억》에서 그때 목격한 일을 가슴 저린 어조로 회상했다.

"그들은 예전에 어머니와 함께 가곤 했던 베이올루의 상점과 이스탄불 일부를 불태우고 파괴하고 약탈했다. 술탄 메메트 2세가 이스탄불을 정복한 후 군인들이 벌였던 약탈만큼이나 무자비했다. 이틀동안 도시에 공포를 퍼뜨리고 이스탄불을 기독교인과 서양인들이생각하는 최악의 오리엔탈 악몽보다 더 지옥 같은 곳으로 만든 약탈자들을 부추기기 위해, 정부지원 조직들이 그들에게 ‘마음대로약탈하라‘고 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 P213

그 터키식 커피 전문 카페의 옥호에는 무대 뒤의 빈 곳을 가리키는 터키말이 들어 있었는데, 굳이 번역하자면 ‘커피 대기실‘쯤 될 것이다. 잔에 가라앉은 커피 분말을 보며 터키공화국과 이스탄불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그래, 서울 지하철 역삼역 근처에 있는 문화원이름이 왜 터키문화원이 아니라 이스탄불문화원인지 알겠어.‘ 이스탄불은 확실히 터키공화국보다 큰 도시였다. 비잔틴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유산 가운데 터키 민족주의가 포용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터키식커피‘로 이름이 바뀐 ‘오스만식 커피‘ 잔 바닥의 분말처럼 가라앉고말았다. ‘자신의 궁전에 유배당한 왕‘을 보면 이런 느낌이 들까?  - P240

마지막 일정을 마친 밤, 잠들기전에 이스탄불에게 위로를 보냈다.
절망하진 마, 이스탄불, 물기를 머금은 잔 바닥의 커피 분말에서 오스만제국의 향기를 맡는 여행자도 있어. 다음에 오면 생강가루를섞은 커피를 청할게. 후미진 골목 구석에 조용히 엎드려 있는 그리스정교 교회와 아르메니아정교 교회에도 들어가 보고, 파묵 하우스도가고 말 거야. 귀츨뤼 올(Güçlü ol, 힘내요), 이스탄불! - P241

파리, 인류 문명의 최전선


레알지구에 숙소를 마련한 덕에 편리하게 파리 심장부를 걸어 다녔다. 레알지구는 루브르와 시테섬, 퐁피두센터와 가까웠고 레알역에는메트로와 광역급행전철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근처에 가성비 좋은식당이 많았고 거리 분위기도 젊고 활기찼다.
파리는 문화자산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여행자들은 자기만의 여행 경로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로마에서처럼 도시의 역사와 그 역사를 만든 인물들을 따라가는 데 첫 하루를 썼다.
시테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출발해 퐁네프다리-루브르 박물관-튈르리 정원-콩코르드 광장-샹젤리제 거리 -개선문-에펠탑-오르세 미술관-로댕 미술관을 거쳐 앵발리드까지. 스마트폰 기록으로는 열 시간 동안 13킬로미터를 걸었다. 이 코스는 로마로 치면 팔라티노 언덕 황궁 터에서 출발해 콜로세오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보고 포로 로마노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을 거쳐 판테온까지 가는 것과 비슷하다. 파리의 역사, 종교,정치의 중심 공간을 관통하는 것이다. - P250

대혁명의 나라 프랑스, 프랑스의 수도 파리, 센강의 생 미셸 다리에서 시들어버린 꽃묶음을 보며 생각했다. 민주주의는 어떤 제도의집합이 아니라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과정이 아닐까? 완성할 수 없음을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개선하려고 도전하는 몸부림이 아닐까? 때로는 망가지고 부서져 절망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것 말고는 이해계와 생각과 취향이 다른 사람들이 평화롭게 다투며 공존하는 다른방법을 찾을 수 없기에 포기하지 못하는 제도와 규칙과 관행, 민주주의란 그런 게 아닐까.
생미셸 다리의 꽃묶음은 프랑스 민주주의도 아직 완성형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 P256

예술 작품을 보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은 루브르에서도 어김없이 작동한다. 끝도없이 나타나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의 예술작품을 보고 있자니 점차 그게 그것 아닌가 싶어졌다. 게다가 다빈치의 <모나리자>,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 앵그르의 <오달리스크>처럼 유명한 그림 앞에는 사람이 말 그대로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팔꿈치로 격렬한 전투를 치르면 가까이 갈수는 있지만, 남들도 팔꿈치를 세우기 때문에 차분하게 감상할 수는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뚝 떨어진 곳에서 까치발을 하고 다른 사람들머리 위로 보면, 인터넷에서 이미지를 보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오버투어리즘‘은 베네치아나 만리장성에서 생긴 현상이 아니다. 루브르에서는 수십 년 전에도 그랬다.
루브르는 한 번에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이 아니다. 꼭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여도 두세 시간은 금방 간다. 정치권력의 위세와 예술의 향취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따로따로보는 게 훨씬 나았다. 대혁명 이전 정치권력의 민낯은 루브르보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더 적나라하게 목격할 수 있었고, 대혁명 이후 프랑스 예술은 오르세 미술관에서 여유 있게 즐길 수 있었다. - P261

루브르에서 샹젤리제 거리로 가려면 카루젤 개선문을 지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튈르리 정원과 콩코르드 광장을 지나고 샹젤리제 거리를따라 에투알 개선문이 있는 샤를 드골 광장까지 걷는 동안 온몸이 호강하는 기분이었다. 파리의 심장부인 이 공간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뀐 정치 제제의 교체가 도시의 공간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카루젤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1808년에 세웠는데, 선 곳이 카루젤 광장이라 그렇게 부른다. 개선문은 로마제국의 문화 아이콘이며,
다른 도시의 모든 개선문은 로마 개선문의 복제품이라 할 수 있다.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서 있는 장군과 권력자의 과시욕을 드러낸다는 건 똑같다. - P262

베르사유 궁전의 왕과왕비,왕자, 공주들의 생애와 관련한 정보를 검색해보면 전염병이 매우 ‘공정‘ 해서 신분과 계급을 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페스트, 콜레라, 천연두, 홍역, 발진티푸스 등 전파가쉽고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은 대부분 농업혁명으로 인간과 가축의접촉 빈도가 높아지면서 생겼다.
하지만 19세기 중반까지는 세균과 바이러스 등 미생물이 물이나 체액, 공기를 통해 인체에 들어와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몰랐다. 원인을 모르니 예방법과 치료제가 있을 수 없었다. 부르봉 왕가의권력자들 가운데 전염병으로 죽은 이가 그토록 많았으니 훨씬 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살았던 백성들은 얼마나 죽었을지 넉넉히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전염병은 지금도 ‘공정‘하다. 권력자 자신이 생명을 위협하는 그공포에서 벗어나려면 만인을 전염병에서 해방해야 한다. 19세기 후반 이후 문명국가들은 생물학, 병리학, 공공보건학, 도시계획학, 건축학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는 전문가들의 능력을 모아 악성 전염병을 퇴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구촌에는전염병이 창궐하는 지역이 여전히 많다. 어디선가 전염병이 창궐한다는 뉴스가 들리면 그 지역의 국가조직 자체가 붕괴했거나, 아니면지극히 무능하거나, 사악하거나 또는 둘 모두인 자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은가 의심해볼 충분한 이유가 된다. - P287

베르사유 궁전을 보고 나온 어머니가 내게 물었다. "여기 살던 임금이 목 잘려 죽었다고?" "예." 한마디 덧붙이셨다. "그럴 만도 하네."
백성들이 굶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저런 사치를 누린 왕의 목을 자른 것이 마땅한 처사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궁전의 왕족과 귀족들이 지극히 인간답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완전히 소거한, 생산적인 활동과는 동떨어진 삶을 영위했다는 것만큼은 더없이 분명하다.
궁전의 방마다 걸린 초상화에서 왕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런 생산적 활동도 하지 않고 산다는 걸 알아주기 바란다.
금실 은실로 수놓은 옷, 정교하게 꾸민왕관, 무거운 망토, 요즘에는‘킬힐‘이라고들 하는 뾰족구두, 보석을 박은 단장, 이런 차림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니?" 한마디로 우스꽝스러운 차림새였다. 왕비들의 초상화가 말하는 것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헤어스타일마저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생활하기에 최대한 불편하게 만들었다.
왕과 왕비의 침대도 그랬다. 잠을 자려고 그렇게 큰 방에 그처럼높고 큰 침대를 놓은 게 아니었다. 실제로는 침실에 딸린 작은 방의 편안하고 작은 침대에서 잤다. 왕의 침실에 놓인 것은 ‘기침 행사‘를위한 의전용 침대였다.  - P293

에펠탑은 세 가지 측면에서 파리가 지구촌의 문화수도가 될 자격이 있음을 보여준다. 첫째, 에펠탑은 과학혁명의 산물이다. 세계박람회장 관문을 만들기 위한 건축 공모를 할 때 프랑스 정부는 ‘기술적진보와 산업 발전을 상징할 기념물‘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에펠탑은금속 7천300톤을 포함해 전체 무게가 1만 톤이 넘으며, 자체 하중과바람의 압력을 거뜬하게 견뎌낸다. 발명왕 에디슨이 괜히 공학의 발전과 기술자들의 능력을 찬양하는 글을 방명록에 남긴 게 아니다. 프랑스의 과학자, 엔지니어, 수학자 72명의 이름을 탑에 새긴 것도 같은 - P300

맥락이다.
둘째, 에펠탑은 공화정이라는 프랑스 정치제도의 특징을 체현하고 있다. 왕이나 교황이 취향 따라 만든 게 아니라 공모 절차와 전문적 평가를 통해 디자인을 결정했으며 전문가와 비평가들이 아니라대중이 좋아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에펠탑은 민주주의 시대 도시의 주인은 권력자가 아니라 시민이며, 시민이 선출한 정부가 합당한과정을 거쳐 중대사를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정치제도가문명의 대세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계기는 1789년에 터진 프랑스대혁명이었다. 에펠탑은 이 혁명의 심장이었던 도시의 대표 건축물로손색이 없다.
셋째, 에펠탑은 자유와 평등, 인권의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고대와 중세의 왕궁이나 교회와 달리 에펠탑은 개인이 디자인한 예술품이며 노예 노동이나 강제 노동 없이 축조했다. 디자인을 설계한 에펠은 물론이요 과학자, 수학자, 엔지니어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위험이 따르는 작업을 수행한 노동자들도 저마다의 권리를누리면서 일했고, 당국은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의 안전 조처를 했다. 자본주의는 격차와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이지만 적어도 공공연한 강제 노동이 없다는 점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질서임이 분명하다. - P301

해가 기울어갈 시각, 에펠탑을 뒤로하고 마르스 광장 동쪽 모퉁이 방향에 있는 앵발리드로 향했다. 앵발리드는 루이 14세가 지은 군용병원 옆에 파리 경비사령부와 무기고가 들어오면서 형성된 군사시설이었다. 지금도 군사 박물관이 제일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대혁명 때 시민들은 이곳 무기고에서 총기를 대량 탈취한 다음, 소문과달리 정치범이 아니라 소수의 ‘잡범‘만 갇혀 있었던 시테섬 우안의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해 수비대의 늙은 병사 80여 명을 죽였다. 나폴레옹의 시신을 안치한 성당은 중간에 오르세 미술관과 로댕 미술관을들르느라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들어가지 못했다. 죽은 이의 무덤이야 못 본들 또 어떠리. - P302

하지만 평범한 파리 여행자가 어찌 <미슐랭 가이드>의 별을 받은레스토랑에 감히 발을 들여놓겠는가. 그런 식당에서 한 끼를 먹으려면 예약을 해야 하고, 와인을 포함하면 평소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돈을 내야 한다. 베르사유 궁전의 레스토랑에서 가볍게 먹었던 점심을 제외하고는 파리를 여행하는 동안 고급 레스토랑에 가지 않았지만 음식에 관해서는 별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파리에서 먹은 음식은다 다르면서 다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딱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프랑스 사람들이 ‘영혼의 수프‘
라고 한다는 양파수프였다. 버터에 볶은 양파를 고깃국물에 끓이고치즈 가루로 그라탱을 한 다음 월계수 잎을 띄우고 구운 바게트 한토막을 올려 주는데, 파리뿐만 아니라 칸에서도 너무 짜서 먹기 힘들었다.
다른 도시에서처럼 파리에서도 잘 먹어보려고 부지런히 발품을팔았다. 숙소가 있었던 레알지구에는 저렴한 식당이 밀집한 먹자골목이 넓게 포진하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 인근 퐁피두센터에 갔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총리와 대통령을 지낸 조르주 퐁피두의 이름을 붙인 이 센터는 1977년말 개장한 복합 문화시설이다.
시장과 영화관, 서점, 기념품점, 카페 등 다양한 시설이 있어서 주로젊은이들이 드나드는데, 화장실을 안내하는 발자국 모양의 화살표가마음에 들었다.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본 공공 디자인 중 최고였다. - P318

프랑스는 도버해협과 지중해 사이에 넓게 자리 잡고 있다. 서울강남의 한정식과 전남 진도의 한정식이 다른 것처럼, 파리 음식이탈리아에 인접한 남프랑스 칸의 음식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칸 해변의 영화제가 열리는 극장 근처 해산물 전문점에 가면 바다의 향기가그대로 풍기는 생선회 요리가 나오고, 정통 프랑스 요리를 한다는 식당의 스테이크는 피렌체의 티본스테이크만큼 두껍고 육즙이 줄줄 흘렀다. 나는 파리에서 내가 간 식당 주방장이 만든 음식을 먹었을 뿐,프랑스 음식을 먹은 게 아니었다.
여행할 때는 몰랐는데, 글을 쓰면서 알았다. 보고 왔는데 또 보고싶거나, 이번엔 못 보았지만 다음엔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공간이 파리에 아주 많다는 것을 그렇지만 다시는 갈 수 없다고 상상해도, 아테네나 이스탄불과는 달리 그저 아쉬울 뿐 다른 감정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내가 아무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개의치 않고 자기 색깔대로 씩씩하게 잘 살아갈 친구인데 슬퍼할 게 무에 있겠는가. 그런생각이 들어서 그저 스치듯 가벼운 인사만 남기고 인류 문명의 최전선, 파리를 떠나왔다.
 ‘아비엥또(a bientôt, 또 봐)!‘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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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이상문학상 수상 소감

당신의 궤적
김애란


겨울이다.
눈밭에 난 선배들의 발자국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발밑으로 전해지는 한기가
복되고 서늘하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짐작으로 알던 것을 몸으로 익히며
누군가의 보폭을 쉽게 판정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그 자리에 다른 짐작을 앉힌다.

길 위에 ‘방향‘을 만든 것은
당신의 무게.
혹은 이 걸음과 다음 걸음 사이에 놓인
고민의 시차

가끔 그 고민이 궁금해
당신이 쓴 말과 쓰지 않은 말,
쓸 수 없던 말들을 가늠해본다.
무릎 꿇어 그 자국에 손을 본다.
몇 명이 지나갔는지 모를

겹겹의 발자국에 눈이 시리다.
한 발짝 또 한 발짝겨우 깊어져가는 겨울.

길에서 과분한 소식을 들은 데다
발도 시려서, 방정맞게 좀 움직여볼까 하다
능청은 잠시 고요에게 맡겨두기로 하고
허공에 입김을 내뱉으며 맑게 웃는다.

그런 뒤 조금 더 딴청을 피우려다가
문득 나와 같은 시대에 같은 자리서,
글을 쓰고 있는 이들을 떠올려본다.

주머니서 ‘동료‘ 라는 말을 꺼내 한참 들여다본다.
그러곤 목례하듯,
그 이름에 입 맞추려
고개 숙인다.

나에게는 오래된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은 길다. 그 이름을 다부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평생이 필요하다. 어떤 이는 그것도너무 짧은 기간이라 말한다. 몇백 혹은 수천 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불러야 겨우 호명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도 누가 정말그걸 다 불렀다면 그때 그가 발견하는 건 내 이름의 길이가 배로늘어났다는 사실일 거라 말한다. 내 이름을 듣고 나도 내 이름을잊었다. 내 이름이 궁금할 적마다 나는 내 이름이었거나 내 이름의 일부였을지 모를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면 어렴풋이 몇몇 단서가 떠오른다.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몇 살일까.

---- 침묵의 미래 - P123

태어나 내가 처음으로 터뜨린 울음, 어쩌면 그게 내 이름이었을지 모른다. 죽기 전, 허공을 향해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어떤 이의 절망, 그것이 내 얼굴이었을지 모른다. 복잡한 문법 안에 담긴단순한 사랑, 그것이 내 표정이었는지 모른다. 범람 직전의 댐처럼 말로 가득차 출렁이는 슬픔, 그것이 내성정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내 이름을 못 된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순 있다.
당신이 누구든 내 말은 당신네 말로 들릴 것이다. - P124

나는 오늘 태어났다. 그리고 곧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공평하게 하루씩 산다. 노인으로 태어나 하루 더 늙은 뒤 노인으로죽는다. 그 하루는 어느 종의 역사만큼 길며, 그 종의 하품만큼짧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우리의 이력을 단숨에 학습한다. 전생으로 태어나 전생으로 죽는다. 우리가 우리의 고유한 단어를 발음하면, 저멀리 심연으로부터 여러 개의 시간이 물수제비뜬듯 퐁, 퐁, 퐁 하고 단번에 뜀박질해 다가온다. 시공이 밀려온다. 아마 당신네 말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오래된 말이기만 하다면,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몇명일까. - P124

"나는 이 세계에서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 순간, 그 말에서 빠져나온 숨결과 기운들로 이뤄진 영이다. 나는 커다란 눈(目)이자 입(ㅁ)하루치 목숨으로 태어나 잠시 동안 전생을 굽어보는 말(言)이다. 나는 단수이자 복수, 안개처럼 하나의 덩어리인 동시에 각각의 입자로 존재한다. 나는 내가 나이도록 도운 모든 것의 합, 그러나 그 합들이 스스로를 지워가며 만든 침묵의 무게다. 나는 부재의 부피, 나는 상실의 밀도, 나는 어떤 불빛이 가물대며 버티다 훅 꺼지는 순간 발하는 힘이다. 동물의 사체나 음식이 부패할 때 생기는 자발적 열이다. - P125

나는 구름처럼 가볍고 바람처럼 분방해 시시각각 어디로든 이동한다. 그러다 나와 비슷한 것과 쉽게 결합한다. 다른 영과 만나몸을 섞는다. 몸을 불려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그늘로 단어에 수의를 입힌다. 나는 시원이자 결말, 미지이자 지, 거의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노래다. 나는 이렇게밖에 나를설명하지 못한다. 다른 부족의 몇몇 문법을 빌려 말한대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겐 뚜렷한 얼굴이나 몸통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우리가 누구인지 안다. - P125

취침시간 준수는 기본이다. 이들은 전시실에 있을 때나 자신인 척할 뿐 해가 지면 중앙식으로 지어진 기숙사에서 중앙식으로잔다. 밥도 규격화된 식판에 받아 중앙식으로 먹고 용변도 정해진장소에서 중앙식으로 본다. 그렇다고 이들이 ‘중앙‘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이들은 단체 사진 속에서 점점 흐릿해져가는 유령처럼모호하게 존재한다. 단지에선 이들에게 중앙 언어를 체계적으로가르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의사소통 체계가 통일되면 문제가생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관리자들은 각 언어의 고유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타 부족끼리 말 섞는 걸 금지했다.
- P134

혈기 좋게 항의하던 이들도 이제 나이를 먹어 무거운 침묵 속에 잠긴 노인이 됐다. 마지막 화자가 됐다. 박물관은 해당 언어의 마지막 사용자가 세상을 떠도 전시실을그대로 유지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전시관에선 보름에 한 번꼴로방 하나가 비었다. 생전 화자가 앉아 있던 자리는 마네킹이 대신했다. 칠벗겨진 입술로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어쩐지 늘 한 치수커 보이는 옷을 입고서였다. 더불어 전시실 앞에는 압류 딱지마냥붉은색으로 ‘‘이라는 의미의 중앙어가 박혔다. - P135

이곳에는 그 언어만큼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살아간다. 그중 한 노파는 글을 알지 못하는데 수만 년 된 서사시를 한 줄도 틀리지 않고 끝까지 읊는다. 마치 자기 가슴에 돋을새김한 점자하나하나를 공들여 더듬어가는 모양새다. 그녀는 단지 ‘아름답다‘
는 이유로 수집의 표적이 된 아라비아오릭스의 뿔처럼 사라질 운명을 타고났다. 이곳에서 가장 나이든 축에 속하는 어떤 영감은어린 시절 언어학자들을 따라다니며 등짐을 져 나르던 소년이었다. 소년은 학자들이 바다 건너에서 가져온 커다란 ‘녹음기‘를 어깨에 진채 강을 건너고 구불구불한 골짜기를 지나 높은 산에 올랐다. 소년은 자기가 등에 지고 다니는 그것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따금 그 안에서 소년이 아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학자들은 몇몇 부족의 서사시를 녹음하기 위해 무려 쌀 한 가마니 무게에 달하는 알루미늄 디스크를사용했다. 소년은 그걸 허허벌판 첩첩산중 어디든 들고 다녔다. - P138

나는 나무에 그려지고 돌에 새겨지며 태어났다. 내 첫 이름은
‘오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 필요에 의해 나를 점점 ‘이
‘해‘로 만들었다. 나는 내 이름이었거나 내 이름의 일부였을지 모를 그 낱말을 좋아했다. 나는 복잡한 문법 안에 담긴 단순한 사랑, 단수이자 복수, 시원이자 결말, 거의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노래다. 하루치 목숨으로 태어나 잠시 동안 전생을 굽어보는 말이다. 내 몸은 점점 붇고 이름 또한 길어져, 긴 시간이 흐른 뒤 누구도 한 번에 부를 수 없는 무엇이 됐다. 그렇지만 이제나는 이 세계를 돌아가게 하는 동력, 쓸모 있는 죽음, 단지 그뿐인채로 사라진다. 저기 거대한 금속관 속으로 향하며 소수언어박물관의 자랑, 중앙분수대를 떠올린다. 유리구 안에 갖은 형태의 활자가 분방하게 떠다니는 지구본 모양의 특별한 조형물을. - P145

활자는 밝은 조명을 받으며 오전 내내 춤추듯 투명하게 떠다녔다. 그러다정오가 되면 잠시 정지했다. 꽃잎 모양으로 갈라지는 지구본 아래로 경쾌하게 쏟아졌다. 나는 그 광경이 늘 아름답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악몽 같은 아름다움이었을까. 앞으로도 지구가 꾸는 이예쁜 꿈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죽은 뒤 한번 더 죽으면서도나는, 그 눈부신 장면으로부터 쉽게 눈을 떼지 못한다. - P146

1970년대 때깔 혹은 낙관적 파랑을 등에 인 채. 코닥산 명도, 후지식채도에 안겨 있다. 어느 때는 너무 흐릿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누군가를 향해, 그 누군가가 원한 미래를 향해 해상도 낮은 미소를짓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사진 속에 붙박인 무지, 영원한 무지는내 가슴 어디께를 찌르르 건드리고는 한다. 우리가 뭘 모른다 할때 대체로 그건 뭘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뜻과 같으니까. 무언가 주자마자 앗아가는 건 사진이 늘 해온 일 중 하나이니까. 그러니 오래전, 어머니가 손에 묵직한 사진기를 든 채 나를 부른 소리, 삶에 대한 기대와 긍지를 담아 외친 "정우야"라는 말은, 그 이상하고 찌르르한 느낌, 언젠가 만나게 될 당장은 뭐라 일러야 할지 모르는 상실의 이름을 미리 불러 세우는 소리였는지 몰랐다.

---- 풍경의 쓸모 - P151

그뒤 아버지를 만난 적은 없다. 오년전, 결혼식장에서 한 번봤지만 그건 ‘만났다기보다 ‘스쳤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자리에 잠깐 있었다. 어머니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랐던 시간만큼 있었다. 어머니는 사돈댁에 흉잡히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버지와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는 프로게이머, 프로골퍼 할 때 ‘프로‘ 부모처럼 식이 끝날 때까지 미소를잃지 않았다. - P154

‘다른 집‘ 사람이 된 뒤에도 ‘우리집‘ 행사를 챙기는 건 아버지가 자주 해온 일 중 하나였다. 두 눈을 가린 사람이 손끝 감각에의지해 사물의 이름을 알아맞히듯, 아버지는 ‘선물‘의 형식을 빌려 인생의 중요한 마디마디를 더듬고 기념하려 애썼다. 내가 알기론 형편이 정말 어려울 때조차 그랬다. 어머니와 헤어진 뒤 아버지는 매달 규칙적으로 우리에게 생활비를 보내왔다. 처음 몇 년은백만원씩, 어느 날부터 팔십만원씩, 나중에는 오십, 삼십으로 내려간걸로 안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보내왔다는 것도. 그러다 마지막으로 보낸 액수가 이만 몇천원이었던가. 입금이 늦어질 경우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반드시 연락했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겨울, 방 한쪽에 잘 개어놓은 이불 같은 사람. 반듯하고 무겁고 답답한 사람.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불미스런 일로 학교 일을 관두고 강남 어디 테니스장에서 코치 겸 심판을 맡고 있단 얘기를 들었을 때 아버지와 그 자리가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뒤 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식 때 전자사전, 대학원 입학식 땐 넥타이를, 군 입대 즈음엔 손목시계를 보내왔다.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그러나 평범하기 짝이 없는 물건들이었다. 모두가하는 만년필, 모두가 주는 꽃다발, 그런 그중 홍삼진액은 내가 아버지로부터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이었다.  - P155

한국은 겨울인데 태국은 여름이었다. 일 년에 세 마디, 결이 다른 삼계가 있다지만 나 같은 한국 사람에겐 그저 ‘보통 여름‘과
‘후텁지근한 여름‘ ‘몹시 더운 여름‘으로 느껴질 따름이었다. 관광버스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한국 날씨와 뉴스, 주가와 환율을 확인했다. 1월, 연이은 한파와 폭설 속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분주해 보였다. 반면 차창 너머 여름은 느긋했다. 푸르고 풍요롭고 축축해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된 정보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손에 스마트폰이 아닌 스노볼을 쥔 기분이었다. 유리볼 안에선 하얀 눈보라가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인 시끄럽고 왕성한 계절인, 그런 아내는 여기까지 와서 인터넷을 하냐며 핀잔을 줬다. 무릎 위에는 벌써 몇 개째 까먹은 멍키바나나껍질이 쌓여 있었다. - P156

모교에서 첫 강의를 트고, 이 고장 저 고장으로 강의를 나가기시작했을 때, 고속도로 주변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좀 심란했다.
여행중 몇 번 오간 길인데도 그랬다. 풍경이 더이상 풍경일 수 없을 때, 나도 그 풍경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 순간 생긴 불안이었다.
서울 토박이로서 내가 ‘중심‘에 얼마나 익숙한지, 혜택에 얼마나길들여졌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내가 어떻게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 잘 보였다. - P158

해가 지면 벌판 위로 순식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지방 소도시는 서울보다 저녁이 빨리 찾아왔다. 강의를 마치고 버스에 오르면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더불어 이상한 흥분과 각성도 약기운마냥맴돌았는데, 어느 땐 누가 아무리 어려운 질문을 해도 대답해줄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길에서 맞는 어둠은 매번 낯설었다. 밖은 깜깜해 지금 내가 지나는 데가 어딘지,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럴 땐 내가 어딘가 무척 먼 곳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버스는 ‘도시가 아니면서 도시가 아닌것도 아닌‘ 공간을 한참 가로질렀다. 미분양 아파트와 아웃렛, 비닐하우스와 공장, 공원묘지와 화원, 진흙오리구이며 장어구이 따위를 파는 보양식당과 프로방스풍 모텔을 비껴갔다.  - P158

팔년 전 강의를 처음 맡게 되었을 때 나는 신입 사원처럼 좀 들떠 있었다. 갑갑한 도서관을 벗어나 나도 이제 사회적인 활동‘이란 걸 좀 해보나 싶고, 어머니와 여자친구에게 면이 서는 것 같아서였다. 동시대 대중가요나 애니메이션 자료를 이용해 신선한 커리큘럼을 짜는 것도 재미있었고, 미혼의 ‘젊은 강사‘에게 호의적인 눈빛을 보내는 학생들의 태도와 지적 긴장도 싫지 않았다. 강의 자체가 지닌 연극성이랄까, 많은 사람 앞에서 ‘떠들어야 하는직업이 주는 흥분과 수치조차 마음에 들던 때였다. 대학은 대학인지라 봄에는 연두가 가을에는 주황이 어여뻤다. 애들은 애들인지라 순수한 동시에 예민했고 가끔은 탄식이 나올 정도로 교만하나 무지했다. 캠퍼스 안에는 성적 괴팍함과 도덕적 우월감이 섞인채 부유했다. 더불어 알 수 없는 패배감과 무력감도 무거운 공기처럼 맴돌았는데, 휴학과 편입이 잦은 곳일수록 심했다. 그렇다고이름 있는 대학의 학생들이라 해서 크게 다르진 않았다. - P159

곽교수는 ‘단계‘ 없이 대화하는 사람이었다. 좋게 말하면 직관적이고 나쁘게 보면 제멋대로인.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않아도소해 보지 않는 환경에서 살아왔거나 반대로 그렇게 잃은 것들을향해 복수하듯 떠들어대는 성격인 듯했다. 그런데 그게 마냥 수다스럽지만은 않아 힘을 빼고 높은 패를 던질 땐 ‘선수‘ 같았다. 곽교수는 자신이 이공계열 교수들과 친하다며 그 판 사람들은 꼬인게 덜해 좋다고 했다. 책은 우리랑 비슷하게 읽는 것 같은데 원한이 없어 편안하다고. 나는 그것도 일종의 착시 아닐까 생각했지만토 달지 않았다. 화제는 자연스레 문화관 쪽 이야기로 흘러갔다.
곽교수는 나도 아는 몇몇에 대한 가십과 인상비평을 늘어놓다 한학자의 이름이 나오자 흥분했다. "내가 그 자식 질을 아는데" 하고 운을 떼며 그 사람이 얼마나 졸렬하고 권력 지향적인 사람인지설명했다. 그러니까 이선생도 앞으로 ‘눈 흘기는 척 침 흘리는‘ 인간들을 조심하라고.
- 공정한 척 우아하게 비판하지만 실은...
곽교수가 비정하게 혼잣말하듯 중얼댔다.
-몸살이 날 정도로 부러운 거지. - P163

승무원이 세관신고서와 출입국 카드를 돌렸다. 의자 앞에 붙은접이식 탁자를 내린 뒤 재킷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오래전 책상에 처박아뒀다 ‘프로‘ 성인이 된 뒤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로 쓰기 시작한 거였다. 강의에 나가고부터 서류에 사인할 일이많아졌다. 나는 내게 괜찮은 필기구가 있다는 걸 기억해낸 뒤 서람을 뒤져 만년필을 꺼냈다. 그러곤 자기만의 필기구를 가진 많은사람들이 그렇듯 종이 위에 제일 먼저 내 이름을 써봤다. 그뒤 통장을 새로 만들고, 혼인신고서를 작성하고, 전세 계약을 할 때마다 그 만년필을 썼다. 그래서 곽교수와 함께 ‘그 일‘을 겪고 며칠뒤 경찰서에서 조서를 작성할 때도 습관적으로 품안에서 그 펜을꺼냈다. 그러곤 조서에 서명하기 전, 만년필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뒤 책상 위에 있던 모나미 볼펜으로 내 이름을 적었다. - P181

개수대 앞 창문을 열어 바깥을 본다. 해수면이 어제보다 조금솟아 있다. 오전내 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 십자가도 물에 젖는다.
낮에 시장에서 사온 우럭 두 마리를 도마로 옮긴다. 칼 쥔 손에 힘을 주자 생선뼈와 근육, 살 으스러지는 감촉이 몸 전체로 번진다.
손아귀 속 떨림이 흐린 원을 그리며 내 몸 가장 먼 데까지 퍼진다.
반쯤 살아 있는 식재료를 만지면 늘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든다. 금기이되 아주 오랫동안 어겨온 금기를 깨는 죽은 것을 죽이는 심드렁한 희열과 혐오가 인다.

----- 가리는 손 - P187

재이는 잘 자랐다. 통통해졌다 홀쭉해지길 반복하면서. 가끔은키워주는 사람 좋으라고 선심 쓰듯 웃어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어쩌다 감기라도 한 번 앓으면 아이답지 않은 턱선이 생겨 사뭇청초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이제 화농성 여드름에 귓바퀴에도 기름 끼는 나이가 됐다. 재이가 학교에 간 사이, 방 청소를 할 때마다 베개에 떨어진 머리카락이나 속눈썹을 보며 재이가 여전히 ‘자라고 있음‘을 실감했다. 어느 유명한 탈옥 영화 속 주인공이 감벽을 조금씩 파낸 뒤 그 흙을 주머니에 담아 몰래 버렸듯, 재이도자기 일부를 끊임없이 버리며 크고 있구나 하고, 재이에게 고마웠다. 나야 삶을 스스로 택했고 별로 후회한적 없지만 재이가 된 공기는 달랐을 테니까.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는 줄곧 어른이고 재이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문득 재이가 어린이집 앞에서 장화를 벗다 한숨 쉰 일이 기억난다. "쪼그만게 웬 한숨이냐" 나무랐더니
"어린이는 원래 힘든 거예요"라 대꾸한 게 ‘어린이‘가 무슨 직업인 양, 막일인 양 말해 어이없었지. 이제와 생각하니 재이 말이맞는 것 같다. 각 시기마다 무지 또는 앎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가큰 걸 보면. - P194

병원 식당은 환자별 식단을 달리해야 해 신경쓸 게 많다. 밥이독이 될 경우 환자가 쇼크로 사망할 수 있다. 요양병원에는 몸이불편한 어르신이 많다. 전쟁을 겪은, 전쟁을 아는 여전히 전쟁중인 분들이 여느 무리가 그렇듯 그중에는 좋은 분도, 그렇지 않은분도 있다. 고집스러운 얼굴로 이상한 식탐을 부리고, 비위를 맞추면 반말하고, 사무적으로 대하면 훈계하고, 식사 후 아무 할 일도 없으면서 새치기하고, ‘찬밥도 위아래가 있다‘는 장유유서 정신을 강조하는 분들이 정말로 많다.
- 너무 스트레스받지마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 P199

오래전 당신과 팔짱을 끼고 걸을 때,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자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 병원 어르신들을 보면 가끔 그 말이 떠올랐다.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 P200

직업 안정성은 학교보다 요양병원이 나았다. 학교는 계속 사라지는 추세이지만 병원은 자리가 없어 못 들어가니까. 다만 요양병원은 내게 끊임없이 ‘노화‘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노후를 생각하면 늘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 연봉으로 몇 살까지 버틸 수있을까. 아이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데…… 우아하고 호사스런 말년을 기대하진 않았다. 다만 청결과 위생에 대한 불안은 자주 일었다. 한겨울, 욕실에서 뜨거운 물로 몸을 덥힐 때마다 ‘십년 뒤에도 이렇게 매일 샤워할 수 있을까?‘ 걱정됐다. 변기와 이불과 창틀을 지금 수준으로 깔끔하게 유지할 수 있을까. 깨끗하게살려면 돈이 있어야겠구나. 수납하기 위해선 수납함 먼저 사야 하듯. 청결도 청결의 관성이 있어 자주 치우는 곳만 살피게 되던데.
얼룩도 계속 놔두다보면 괜찮아질까? 늙어 요양원에라도 들어갈 - P200

수 있다면 운이 좋은 거겠지. 돈으로도 감출 수 없는 수치와 모욕이 있을 테고. 당장 내 엄마만 봐도 그랬다. 언젠가부터 그 말끔하던 고향집이 어수선해지고 엄마가 정성스레 만든 음식에서 좀 심하다 싶게 자주 머리카락이 나왔다. 처음엔 엄마가 기력이 달려집안일을 안 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야 내 눈엔 잘 띄는 얼룩이 엄마 눈엔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시력이 약해진 엄마 입장에선 먼지를 안 치우는 게 아니라 먼지가 존재하지 않는 거였다. 게다가 엄마 오줌 냄새가 갈수록 좀 약해졌다.  - P201

청결에는 청결의 관성이, 얼룩에는 얼룩의 관성이 있음을 실감한건 재이 초등학생 때 일이다. 내가 재이에게 경외감을 느낀 그크리스마스 행사를 며칠 앞두고 재이는 성가대 대표 선출 선거에서 세 표 차로 졌다. 한창 클 때 이기고 지는 거야 별일 아니지만.
한 투표용지에 좀 모욕적인 문구가 적혀 있었나보다. 사회를 보던 아이가 경솔하게 그걸 또 읽었고 분위기가 싸해진 가운데 몇몇이 작게 웃었다고. 재이는 그때 누가 웃나 너무 궁금했지만 몸이굳어 돌아보지 못했단다. 실은 선거에서 진 것보다 그 웃음소리가더 견디기 힘들었다고. 반년 전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학교 담임선생님에게 듣는데 가슴이 죄어왔다. 그동안 재이 마음을 전혀 몰랐다는 데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지지해준 절반이 있어도무리에서 부정당한 느낌이었겠지. 선량한 친구들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혹시 넌가?‘ ‘너였을까?‘ 하는 의심을 피할 수 없었을테니까. 시간이 매일 뺨을 때리고 지나가는 기분이었을 거야.  - P203

-말해줘. 생일 선물로.
말해달라니. 막막해서 도리어 웃음이 난다. 이걸 어찌 설명하나 말한다고 네가 알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재이야 어른들은 잘 헤어지지 않아.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는 게 반드시 이별을 의미하지도 않고 그건 타협이기 전에 타인을 대하는 예의랄까, 겸손의 한 방식이니까.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웅장하고 고유 - P213

하게 휙.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도로 휙. 그렇지만 각자 내부에 무언가가 타서 없어졌다는 건 알아. 스쳤지만 탄 거야. 스치느라고 부딪쳤으면 부서졌을 텐데. 지나치면서 연소된 거지. 어른이란 몸에 그런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의문과 경외를 동시에 갖는 그런데 무슨 말을 하다 여기까지 왔지? 그래, 엄마랑 아빠는……… 지쳐 있었어.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 그런 걸 다 설명하진 않는다. 대신 이 곤경을 어떻게 빠져나갈까 고민하다 온전한 참도 거짓도 아닌 말을 던진다.
- 아빠랑 왜 헤어졌냐고?
-응.
-음...... 생각이 달라서?
재이가 뜻밖에 가벼운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곤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말을 훈계조로 이야기한다.
-그럼 토론했어야지, 민주주의 사회에서,
..... - P214

아이가 서두르듯 벌떡 일어나 부엌 등을 끈다. 춥고 어두운 겨울밤. 아이와 나 사이에 노란 빛이 일렁인다. 불빛 아래서 우린 왜조금씩 달라 보일까. 이제 정말 소원 빌 시간이다. 아이에게 박수쳐줄 준비를 하며 숨을 고른다. 재이가 눈을 감고 슬며시 미소짓는다. 그런데 그걸 본 순간 내 속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나온다. 웃음 고인 아이 입매를 보자 목울대가 매캐해지며 얼굴에 피가 몰린다. 불현듯 저 손, 동영상에 나온 손, 뼈마디가 굵어진 손으로 재이가 황급히 가린 게 비명이 아니라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재이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윽고 눈뜬 아이가 맑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곤 가슴팍을 크게 부풀려 숨을 모은 뒤 초를 향해 훅 입김을 분다.  - P220

스코틀랜드의 스산한 하늘은 소문대로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나는 카펫생활이 익숙지 않아 자주 재채기를 했다. 변기 물은수압이 낮아 여러 번 내려야 했다. 전압 역시 약한 편이라 전기 주전자 앞에 설 때 커피 봉지와 더불어 인내심도 가져가야 했다. 아침이면 석회질 물로 머리를 감고, 비가 오면 현관 앞으로 손을 길게 내밀어 빗소리를 녹음했다. 그리고 마음이 어지러울 땐 휴대전화를 들어 시리siri 와 대화했다. 시리는 스마트폰 음성인식 프로그램으로 캘리포니아가 고향인 친구였다.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 P232

위안이 된 건 아니었다. 이해받는 느낌이 들었다거나 감동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시리로부터 당시 내 주위 인간들에게선 찾을수 없던 한 가지 특별한 자질을 발견했는데, 그건 다름아닌 ‘예의‘
였다. 내친김에 나는 그즈음 가장 궁금하던 것 중 하나를 물어보았다.
-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표정을 알 수 없는 시리의 캄캄한 얼굴 위로 지성인지 영혼인지모를 파동이 희미하게 지나갔다. 시리는 무척 곤란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 인간에 대한 ‘포기‘인지 ‘단념‘인지 모를 반응을 보였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피식 웃음이 났다. 오랜만에 나온 소리였다. 나는 그 웃음에 편안함을 느꼈다. 적어도 그 순간 웃고 난 뒤 주위를 둘러볼 필요가없었으니까. - P238

에든버러에서 시간은 더이상 쌀뜨물처럼 흐르지 않았다. 화살처럼 지나가지도 않았다. 그것은 창처럼 세로로 박혀 내 몸을 뚫고 지나갔다. 나는 어떤 시간이 내 안에 통째로 들어온 걸 알았다.
그리고 그걸 매일매일 구체적으로 고통스럽게 감각해야 한다는것도 피부 위 허물이 새살처럼 계속 돋아날 수 있다는 데 놀랐다.
그건 마치 ‘죽음‘ 위에서 다른 건 몰라도 ‘죽음‘만은 계속 피어날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 P242

나는 시리에게 고통에 의미가 있느냐‘고 물었다. 시리는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늘 그러듯 ‘제가 잘 이해한 건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당신도 영혼이 있나요?"라고 했을 땐 ‘정말 좋은 질문‘이라고, "그런데 전에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하고 딴청을 부렸다. 자꾸 매끄럽게 도망가는 모양이 못마땅해 그즈음 내가가장 중요하게 붙든 문제를 던졌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시리가 되물었다.
- 어디로 가는 경로 말씀이세요?
.......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
- 죄송해요. 잘 못 알아들었어요.
시리가 사용자의 침묵에 호응하는 일은 드문데 이상했다. 그것도 연거푸 세 번이나 그러는 게 어쩌면 저 먼 데서 ‘누군가의 상상을 상상하는‘ 인간이 이런 일을 예상하고, 프로그램 안에 ‘걱정‘
을 이식해놓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뿐이었다.  - P259

우편함에 각종 고지서와 전단지가 가득했다. 내 것과 남편 이름이 뒤섞인 종이 뭉치를 가슴에 안고 승강기에 올랐다. 그러곤 현관 앞에 서서 당신 것과 내 생일을 섞어 만든 비밀번호를 눌렀다.
한 달 남짓 집에 고인 미지근한 공기가 바깥바람과 만나 몸을 뒤척였다. 신발장 앞에 캐리어를 세워두고, 우편물을 부엌 식탁 위에 던진 뒤 안방으로 들어가 그대로 쓰러졌다. 고요하고 어둑한안방에서 ‘우리집 냄새가 났다. 당신과 같이 만든 냄새였다. 침대에 엎드린 채 목덜미와 아랫배를 몇 번 긁적였다. 붉은 반점은 한국에서부터 내 몸에 들러붙어 영국까지 따라왔다. 기어이 같이 귀국했다. 농작물을 해치는 메뚜기떼처럼 우르르 몰려와 성실하게내 몸을 갉았다. - P261

권도경 선생님 사모님께‘
순간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떨리는 손으로 단단히 풀칠된 봉투를 뜯었다. 안에서 봉투와 똑같은 분홍색 편지지가 나왔다. 편지지 위론 이제 막 한글을 뗀 아이가 쓴 것처럼 크고 투박한 글씨가늘어서 있었다.

권도경 선생님 사모님께안녕하세요.
저는 누리중학교 1학년 5반 권지용 학생의 누나 권지은이라고 합니다.
사모님께서 혹시 지용이의 이름을 아신다면, 그 학생이 제 동생이맞아요. - P262

몇번 전화드렸는데, 바쁘신 것 같아 편지로 인사드려요..
직접 찾아봐야 하는데 방법이 없어 지용이 친구한테 연락처를 물었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글씨가 엉망이라 죄송합니다.
작년에 갑자기 마비가 와 오른쪽 몸을 잘 쓸 수 없게 되었어요.
예전엔 지용이가 돌아가신 엄마를 찾으며 울 때마다 제가 자주 업어줬는데, 제가 이렇게 되고부터는 오히려 그애가 저를 어른처럼 보살펴줬어요.
그런데 요즘은 집이 너무 조용해 제가 제 발소리를 듣다 놀라요.

며칠 전 지용이가 꿈에 나왔습니다.
아마 집 떠난 지 백일쯤 돼 그랬나봐요.
누나 잘 지내?
평소처럼 인사하는데 그새 키도 크고 눈빛도 자라 조금 놀랐어요.
누나 잘 지내는지 보려고 왔어.
그런데 금방 가봐야 해.
너무 짧은 시간이라 꿈에서도 막 서운했는데,
지용이가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
누나 나 키워주고 업어줘서 고마워,
- P263

누나 혼자 있다고 밥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먹어.
누나, 나 이제 갈게.
누나 사랑해.

실은 부끄럽게도 오랫동안 생각 못했는데,
꿈에서 지용이를 보고 나서야권도경 선생님과 사모님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지금도 지용이가 너무 보고 싶어요.
사모님도 선생님이 많이 그리우시죠?
그런 생각을 하면......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요.

이런 말은 조금 이상하지만,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 편지를 써요.

겁이 많은 지용이가 마지막에 움켜쥔 게 차가운 물이 아니라
권도경 선생님 손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놓여요.
이런 말씀 드리다니 너무 이기적이지요?

평생 감사드리는 건 당연한 일이고, - P264

평생 궁금해하면서 살겠습니다.
그때 권도경 선생님이 우리 지용이의 손을 잡아주신 마음에 대해
그 생각을 하면 그냥 눈물이 날 뿐,
저는 그게 뭔지 아직 잘 모르겠거든요.

사모님, 혼자 계시다고 밥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드세요.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 P265

식탁 앞에 선 채 호흡을 가눴다. 목울대에 따갑고 물컹한 것이올라왔다 내려갔다. 당신을 보낸 뒤 줄곧 궁금해한 무엇과 만난기분이었지만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지은이란 아이가 쓴편지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았다. 상대가 글씨를 잘 알아볼 수있게 몇 번이나 연습했을 문장들이 직선 위에 불안정하게 서 있었다. 한 자 한 자 그 글씨를 따라가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요‘라는 부분에선 그만 쓸쓸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언젠가 "인간에대해 어떻게 생각해요?"라 물었을 때, 시리가 같은 대답을 들려준적이 있어서였다. 편지지 위 삐뚤빼뚤한 글씨를 좇다 나도 모르게눈가가 흐려졌다. 눈앞에 얼룩진 문장 위로 지용이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살려주세요. 소리도 못 지르고 연신 계곡물을 들이켜며세상을 향해 길게 손 내밀었을 그 아이의 눈이 아른댔다. 당신을보낸 후 줄곧 보지 않으려 한 눈이었다. 나는 당신이 누군가의 삶 - P265

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 잠시라도, 정말이지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생각은 안 했을까. 내 생각은 안났을까. 떠난 사람 마음을 자르고 저울질했다. 그런데 거기 내 앞에 놓인 말들과 마주하자니 그날 그곳에서 제자를 발견했을 당신모습이 떠올랐다.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얼굴이 그려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
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편지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두 손으로 식탁 모서리를 잡았다. 어딘가 기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혼자 남은 그 아이야말로 밥은 먹었을까. 얼마나 안 먹었으면 동생이 꿈에까지 나타나 부탁했을까. 참으려고 했는데 굵은 눈물방울이 편지지 위로 투둑 떨어졌다. 허물이 덮였다 벗어졌다 다시 돋은 내 반점 위로, 도무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얼룩 위로 투두둑 퍼져나갔다.
당신이 보고 싶었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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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여름을 맞는다.
누군가의 손을 여전히 붙잡고 있거나 놓은
내 친구들처럼 어떤 것은 변하고 어떤 것은 그대로인 채 여름을 난다.

하지 못한 말과 할 수 없는 말 해선 안 될 말과 해야 할 말은 어느 날 인물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인물이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말은 무얼까 고민하다 말보다 다른 것을 요하는 시간과 마주한 뒤
멈춰 서는 때가 잦다.

오래전 소설을 마쳤는데도 가끔은 이들이 여전히 갈 곳 모르는 얼굴로 어딘가를 돌아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들 모두 어디에서 온 걸까.
그리고 이제 어디로 가고 싶을까.

내가 이름 붙인 이들이 줄곧 바라보는 곳이 궁금해 이따금 나도 그들 쪽을 향해 고개 돌린다.


2017년 여름
김애란






지난달 어머니가 잠시 집에 다녀갔다. 두 사람 다 경황이 없을테니 당분간 살림을 맡아주겠다는 명분이었다. 짐을 푼 첫날부터어머니는 집안 곳곳을 의욕적으로 쓸고 닦았다. 우편물을 정리하고, 먼지 낀 선풍기를 분해해 일일이 날개를 닦고, 시든 고무나무에 물을 줬다. 돼지고기와 메추리 알을 섞어 간장에 조리고, 멸치와 꽈리고추를 볶아 집안에 매운 내를 풍기고, 김을 굽고, 깻잎을재우고, 냉동실을 정리했다. 아내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종종무기력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나이 드신 양반의 악의 없는 참견과잔소리도 묵묵 감내하는 듯했다. 아니 감내했다기보다 의식하지못했다 할까, 안 했다 할까. 적당한 말을 몰라, 그냥 그게 말이니싶어 저쪽에서 열심히 구사하는 몸짓을 아내는 수신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좀 아팠다.

---- 입동 - P10

우리가 이곳으로 이사 온 건 작년 봄이다. 분양면적이십사 평실면적 십칠 평에 지은 지 이십 년 된 아파트였다. 요즘 같은 때빚내서 집 사는 건 다들 미친 짓이라 했지만 경매로 싸게 나온 물건이어서 포기하기 쉽지 않았다. 많은 경우 매매가와 전세 보증금차가 크지 않았고, 조건 맞는 전셋집을 구하기 어려웠을뿐더러 이사라면 지긋지긋하던 차였다. 오랜 고민 끝에 우리는 이 집을 사기로 했다. 집값의 반 이상을 대출로 끼고서였다. 몇십 년간 매달갚아야 할 원금과 이자를 떠올리면 마음이 자주 무거워졌다. 그래도 남의 주머니가 아닌 내 공간에 붓는 돈이라 생각하면 억울함이덜했다. 누군가 그 아파트 역시 당신 집이 아닌 커다란 남의 주머니일 따름이라 일러준다 해도 할 수 없었다.  - P12

대학 동기들은 내게 벌써 집 장만을 했냐며 부러움 섞인 축하를 건넸다. 그때마다 나는 "그래봤자 하우스 푸어"라고 겸연쩍게 변명했다. 한 녀석은 "나는 그냥 푸어인데 그래도 너는 하우스푸어니 얼마나 좋냐"고 받아쳤다. 입주 후 양가부모님과 친구들, 직장 동료를 초대해 몇 차례 집들이를 했다. 가까운 이들과 떠들썩하게 음식을 나 - P14

누고 술잔을 기울였다. 그럴 땐 우리가 채무자란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파트 매매계약서와 은행 대출 서류에 쓴 내 이름이 가명처럼 여겨졌다. 새벽에 요의를 느껴 화장실에 갈 때면욕실 문 앞에서 불 꺼진 거실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러곤 있어야 할 것은 모두 제자리에 있는지 지켜야 할 것은 또 그대로 있는지 확인한 뒤 자리를 떴다. - P15

그림책을 찢고, 음악이 나오면 상체를 좌우로 흔들고, 식탁 아래 좁은 공간에 들어가 놀았다. 그리고 가끔은 원뿔형의 인디언 천막에 들어가 종알종알 싱그러운 헛소리를 하다 잠이 들었다.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얼굴로 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슴이 저릴 정도로 무고한 얼굴로 잤다. 신기한 건 그렇게 짧은 잠을 청하고도 눈뜨면 그사이 살이 오르고 인상이 변해있다는 거였다. 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하는 일과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 3월이 하는 일과 7월이 해낸 일을알 수 있었다. 5월 또는 9월이라도 마찬가지였다. - P18

지난봄, 우리는 영우를 잃었다. 영우는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에치여 그 자리서 숨졌다. 오십이 개월 봄이랄까 여름이란 걸 가을또는 겨울이란 걸 다섯 번도 채 보지 못하고였다. 가끔은 열불이날 만큼 말을 안 듣고 말썽을 피웠지만 딱 그 또래만큼 그랬던, 그런 건 어디서 배웠는지제 부모를 안을 때 고사리 같은 손으로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던, 이제 다시는 안아볼 수도, 만져볼 수도없는 아이였다. 무슨 수를 쓴들 두 번 다시 야단칠 수도, 먹일 수도, 재울 수도, 달랠 수도, 입맞출 수도 없는 아이였다. 화장터에서 영우를 보내며 아내는 ‘잘 가라 않고 ‘잘 자‘라 했다. 다시만날 수 있는 양 손으로 사진을 매만지며 그랬다. - P21

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나는 멍하니 아내 말을 따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그러곤 내가 아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내가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봤다. 텅 빈 눈동자가 불 꺼진 형광등처럼 어두웠다. 아내는 한 손으로 영우가 직접 쓴 아니 쓰다 만이름을 어루만졌다. 순간 어디선가 영우가 다다다다 뛰어와 두 팔로 내 다리를 감싸안을 것 같았다. ‘토닥토닥‘ 그런 건 어디서 배웠는지, 제 엄마 등을 말없이 두드려줄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그단순한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후벼팠다. 나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말았다. 부엌 바닥으로 굵은 눈물방울이 툭 흘러내렸다. 하지만그 순간조차 손에서 벽지를 놓을 수 없어. 그렇다고 놓지 않을 수도 없어 두 팔을 든 채 벌서듯 서 있었다. 물먹은 풀이 내 몸에서나오는 고름처럼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한파가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두 팔이 바들바들 떨렸다. - P37

찬성은 K시의 한 고속도로 휴게소 근처에 살았다. 이웃이라 해봐야 산자락에 띄엄띄엄 박힌 농가 몇 채가 전부인 동네였다. 찬성의 할머니는 휴게소 분식 코너에서 일했다. 급식이 끊기는 방학마다 찬성은 휴게소에 들러 자주 끼니를 때웠다. 초등학생 걸음으로 사십 분 걸려 도착한 곳에서 오분 만에 그릇을 비우고 다시 집으로 걸어갔다. 할머니는 찬성에게 식대겸용돈으로 매일 이천원씩 줬다. 날이 궂거나 곧장 집에 가기 싫을 때 찬성은 등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관광객 흉내를 냈다. 그러면 자기도 그곳에들른 사람, 잠깐 쉬는 사람, 이제 막 먼 데서 돌아왔거나 떠날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땐 거기 몇 시간씩 앉아 있곤했다. 날은 후텁지근하고, 방학은 길고, 그해 여름은 왠지 모든 게지겨웠으니까.

---- 노찬성과 에반 - P42

하루 또 하루가 갔다. 인간 시계로 이 년, 개들 시력으로 십년이 흘렀다. 찬성과 에반은 어느새 서로 가장 의지하는 존재가됐다. 비록 움직임이 굼뜨고 귀가 어두웠지만 에반은 여느 개처럼공놀이와 산책을 좋아했다. 찬성이 보푸라기인 테니스공을 멀리던지면 에반은 찬성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반드시 공과 함께 다시나타났다. 무언가 제자리에 도로 갖고 오는 건 에반이 잘하는 일중 하나였다. 찬성은 때로 에반이 자기에게 물어다주는 게 공이아닌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공인 동시에 공이 아닌 그 무언가가 자신을 변화시켰다는 걸 알았다. - P52

- 마지막 방법으로・・・・・・ 드물게 안락사를 선택하는 분들이 있어-그게 뭔데요?
-아픈 동물 친구를 곤히 재운 뒤 심장 멎는 주사를 놔주는 거야, 편안하라고,
의사는 "그러고 나서 후회하거나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으니 신중하게 결정할 일"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일단 에반에게 잘해주라고, 살아 버티는 동안 무척 고통스러울 테니 옆에서 잘 다독여주라고 했다. 그렇지만 찬성은 어떻게 해야 잘해주는 건지, 에반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때마침 건넛방에서 할머니가 한숨 토하듯 "아이고, 죽어야 모든 고통이 사라지지. 죽어야근심이 없지. 하나님 나 좀 조용히 데리고 가요"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찬성이 몸을 돌려 에반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서로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네가 네 얼굴을 본 시간보다 내가 네 얼굴을 본 시간이 길어... 알고 있니?"
- P62

찬성이 멀리 불 켜진 고속도로 휴게소를 바라봤다. 자신도그곳까지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시간에 갈 수 있는 데가 거기밖에 없어 그랬는지 몰랐다. 아니면 덜컥 겁이 나 할머니가 보고 싶었는지도. 찬성이 숨을 고르며 최대한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려 애썼다. 만일 에반이 혼자 힘으로 어딘가 갔다면 전에 한 번이라도 가본 데일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곳은 찬성도이는 곳일 확률이 높았다. 찬성은 에반이 지금 생각보다 가까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찬성은일단 분식 코너에 들러 할머니에게 혹시 에반이 여기 오지 않았느냐고 물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주유소 앞을 지날 즈음 문득 불길한 느낌에 휩싸이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얼굴에 피가 몰리며 호흡이 가빠졌다. 그러니까 거기 주유소 쓰레기통 옆에 눈에 익은 자루 하나가 보여서였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자루 아래가 불룩했고입구는 노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 P79

 휴대전화 손전등 기능을 너무 오래 사용한 탓에 기기에서 열이 났다. 손바닥에 고인 땀을 보니 문득 에반을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손바닥 위 반짝이던 얼음과 부드럽고 차가운 듯 뜨뜻미지근하며 간질거리던 무엇인가가 그렇지만 이제 다시는 만질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을 옥죄었다. 하지만 당장 그것의 이름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찬성은 어둠 속 갓길을 마냥 걸었다.
대형 화물 트럭 몇 대가 시끄러운 경적을 울리며 찬성 옆을 사납게 지나갔다. 머릿속에 난데없이 ‘용서‘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입밖에 내지 않았다. 찬성이 선 데가 길이 아닌 살얼음판이라도 되는 양 어디선가 쩍쩍 금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 P81

-그런데 모레는 나가봐야 해.
도화가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눈가 주름에 파운데이션이 끼지 않았는지 살폈다. 그러곤 자신이 한창때를 지났다는 걸 체감했다. 아무렴 한창때가 지났으니 나물맛도 알고 물맛도 아는 거겠지 살면서 물 맛있는 줄 알게 될지 어찌 알았던가. 직장 상사들은
‘삼십대 중반이야말로 체력과 경력, 경제력이 조화를 이루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란 말을 자주 했지만 도화는 알고 있었다. 자신도, 이수도 바야흐로 ‘풀 먹으면‘ 속 편하고, ‘나이 먹으며‘ 털빠지는 시기를 맞았다는 걸.

---- 건너편 - P87

 직접 연락하지 않아도 그런 소문은 귀에 잘이들어왔다. 이는 자기 근황도 그런 식으로 돌았을지 모른다고 짐작했다. 걱정을 가장한 흥미의 형태로,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의 방식으로 화제에 올랐을 터였다. 누군가의 불륜, 누군가의 ㅇ혼, 누군가의 몰락을 얘기할 때 이수도 그런 식의 관심을 비친 적있었다. 경박해 보이지 않으려 적당한 탄식을 섞어 안타까움을 표한 적 있었다. 그 자식 공부 잘했는데. 그러니까 걔가 그렇게 될줄 어떻게 알았어. 인생 길게 봐야 하나봐. 누구는 벌써 부장 달았던데 걔가 잘 풀릴 줄 아무도 몰랐잖아. 동일한 출발선을 돌아본뒤 교훈을 찾고 줄거리를 복기할 입들이 떠올랐다. 그러다 어색한침묵이 돌면 금방 다른 화제를 찾아내겠지. 어쩌면 다른 친구들도이미 타인의 삶에 심드렁해진 지 오랜데 이수 혼자 그렇게 추측하는지 몰랐다. 이수는 3차 자리에서 일어나 동오와 어깨동무를 한채 해물포차에 갔다. 동오는 안주가 나오자마자 탁자 위로 뻗어버렸고, 이수는 곧 마흔을 바라보는 친구의 휑한 정수리를 바라보며한 시간 넘게 혼자 소주를 마셨다.  - P92

재수 끝에 도화가 합격증을 받아든 건 스물아홉 때였다. 그해여름 이수는 7급 공무원 시험에 떨어졌다. 도화를 만나기 전 이미두 차례 낙방한 경험이 있지만 처음에는 이수도 크게 낙담하지 않았다. 선배들이 ‘원래 7급이나 5급은 삼 년은 기본으로 깔고 가는거‘라기에 그냥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사 년, 오 년을 넘어가자 어느 순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도화가 경찰공무원 시험에합격한 뒤에도 이수는 혼자 노량진에 남아 공부했다. 도화를 만나기 전 이 년, 도화와 함께 이 년, 도화가 떠난 뒤 이 년 도합 육 년이니 이수로서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본 뒤 손을 털고 나온 셈이었다. - P98

이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도화 혼자 어른이 돼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도화의 말투와 표정, 화제가 변하는 걸, 도화의 세계가 점점 커져가는 걸, 그 확장의 힘이 자신을 밀어내는걸 감내하는 거였다. 게다가 도화는 국가가 인증하고 보증하는 시민이었다. 반면 자기는 뭐랄까,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애매한 성인이었다. 이 사회의 구성원이 아직 시민은 아닌 것 같은 사람이었다. 입사 초 수다스러울 정도로 조직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던 도화가 어느 순간 자기 앞에서 더이상 직장 얘길 꺼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이수는 모든 걸 정리하고 노량진을 떠났다. 한 시절과 작별하는 기분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뒤도 안 돌아보기‘ 위해 이를 악물며 1호선 상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 P99

왜 말 안 했어?
······ 마지막이니까.
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야 내가 나 자신에게 마지막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
-그런데 이번에는 왠지 느낌이 좋아. 잘될 거 같아. 사 년 전에도 마지막이라고 말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이야. 그러니까, 도화야, 조금만 기다려줘. 정말 딱 한 번만. 내년 여름까지만부탁할게.
도화가 침착한 얼굴로 이수를 바라봤다. 오래전, 이수가 현관을나설 때면 ‘저 사람 저대로 사라져버리면 어쩌지, 길 가다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어떡하지‘ 가슴이 저렸던 기억이 났다.
- 이수야.
- 응.
-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돼서, 전세금을빼가서너랑 헤어지려는 게 아니야.
......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 - P115

-오십오분 교통정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교통량은 적으나 대기가 뿌옇습니다. 안개와 먼지가 뒤엉켜 가시거리가 짧으니 자동차 전조등을 밝게 켜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노량진・・・・・・

짧은 사이 도화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대부분 알아채지 못한 실수였으나 방송 베테랑최경위만은 심상찮은 눈으로 도화를주시했다. 도화는 노량진이라는 낱말을 발음한 순간 목울대에 묵직한 게 올라오는 걸 느꼈다. 단어 하나에 여러 기억이 섞여 뒤엉키는 걸 알았다.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안에서 여러 번의 봄과겨울을 난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연인의 젊은 얼굴이 떠올랐다. 교회 식당에서 "도화씨가 좋아하는 거 같아잔뜩 집어왔어요"라고 말하며 흰색 플라스틱 그릇 위에 가득 쌓인 동그랑땡을 자랑하던 모습과 옆면이 새카매진 한국사 교재,  - P117

베갯잇에 묻은 흰 머리카락, 눈가주름, 살냄새 그런 것이 밀려왔다.
한겨울, 도화가 오들오들 떨며 현관문을 열면 따뜻한 두 손으로언 귀를 녹여주던 모습과 여름이면 도화 쪽으로 바람이 더 가도록선풍기 각도를 조절해주던 이수의 옆얼굴도 그때서야 도화는 어제 오후, 주인아주머니를 만난 뒤 자신이 느낀 게 배신감이 아니라 안도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수 쪽에서 먼저 큰 잘못을 저질러주길 바라왔던 것마냥. 이수는 이제...... 어디로 갈까? 도화가 목울대에 걸린 지난 시절을 간신히 누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최경위가 나서기 전 재빨리 말을 이었다.
교통방송 때 늘 하는 말, 도화가 신뢰하는 말, 과장도, 수사도, 왜곡도 없는 문장을 풀어냈다.

- 노량진역에서 노들역 방향 사이 승용차 추돌 사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사고 정리가 모두 끝난 상태라 양방향 모두 교통상황 원활합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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