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플라카지구, 로마의 포로로마노, 이스탄불 골든혼, 파리라탱지구, 빈의 제체시온, 부다페스트 언드라시 거리, 이르쿠츠크 데카브리스트의 집, 이런 곳에 가고 싶었다. 다른 대륙에도 관심이 없지는않았지만, 스무 살 무렵부터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든 곳은 주로 유럽의 도시들이었다. 그곳 사람들이 훌륭한 사회를 만들어 좋은 삶을 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 더 자유롭고 너그럽고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 수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다가소설보다 더 극적인 역사의 사건들을 만났고, 그 주인공들이 살고 죽은 도시의 공간을 알게 되었다. 삶의 환희와 슬픔, 인간의 숭고함과비천함, 열정의 아름다움과 욕망의 맹목성을 깨닫게 해주었던 사람과 사건의 이야기를 그곳에 가서 들어보고 싶었다. - P5
아테네
비행기 표를 예약했을 때는 이런 정보와 이미지가 머릿속을 떠다녔는데, 정작 아테네에 발을 딛자 그 무엇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아테네 여행자들이 무턱대고 아크로폴리스부터 찾는것은 이런 불안감을 얼른 해소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아테네는 괜찮은 동네에 있는 역사 전문 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크지 않아서 비교적 짧은 시간에 둘러볼 수 있고, 주변의 특색 있는카페와 ‘가성비‘ 좋은 식당들에서 자잘한 즐거움을 맛볼 수도 있다. 사람들이 이 도시에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고대 유적을 보기 위해서인데, 고대 유적은 대부분 신타그마 광장에서 아크로폴리스 가는 쪽에 몰려 있다. 여기를 ‘과거의 공간‘이라고 하자. 그 반대쪽 오모니아 광장 방면의 도심과 외곽은 시민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현재의 공간‘이다. 중간지대라고 할 수 있을 신타그마 광장 부근과 플라카지구는 과거와 현재가 뒤엉긴 ‘혼합 공간‘이다. - P20
이틀 정도면 아테네의 역사 공간을 거의 다 볼 수 있다. 그래서더 길게 머무르는 여행자들은 미노타우루스의 미로를 품고 있는 크레타섬, 포세이돈 신전의 기둥만 남은 수니온곶, 신탁(神託)의 전설이떠도는 델피 신전 같은 곳으로 당일치기 소풍을 간다. 아테네 관광청은 온오프라인으로 다채로운 당일치기 여행 정보를 제공하고, 한국여행사들은 아테네를 베이스캠프로 삼아 기차를 타고 북쪽 내륙 메테오라의 수도원들을 방문하거나, 흰색 담벼락과 푸른색 지붕으로유명한 산토리니섬으로 날아가 와인 투어와 생선 요리를 즐기는 일정을 권한다. 메테오라와 산토리니는 가볼 만한 곳이긴 했지만, 아테네 여행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따로 말하지는 않겠다. - P21
첫날 아침 신타그마 광장에서 ‘해피트레인‘을 타고 아크로폴리스를 본 다음 아고라를 거쳐 플라카지구로 내려와 점심을 먹었다. 광장모퉁이에서 출발하는 ‘해피트레인‘은 조그만 전기자동차에 폭이 좁고 지붕이 없는 나무 객차를 여러 개 단 꼬마열차인데, 주요 관광지마다 정류장이 있었고 플라카의 좁은 골목길을 누비는 재미가 쏠쏠했다. 오후에는 큰길을 다니는 ‘홉온홉오프 시티투어 버스를 이용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과 국립 고고학 박물관, 국립 아테네공과대학교를 보았다. 정류장이 해피트레인보다 많고 더 먼 곳까지 갈 뿐만아니라 2층은 지붕이 없어서 거리가 잘 보였다. - P21
한국인 여행자야 말할 것도 없다. 경제 발전을 이루고 해외여행의 자유를 얻은 1990년대 이후 한국인은 세계의 모든 이름난 도시를무리 지어 또는 홀로 탐사하는 중이다.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사피엔스는 7만년 전쯤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벗어났다는데, 우리의 조상들은 몇만 년 동안 대를 이어가며 유라시아대륙을 걸어서횡단했거나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들의 후손인 한국인에게는 ‘역마살 유전자‘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야 이토록 미친 듯이 지구 표면의 모든 이름난 도시를 쏘다니겠는가. - P22
고대 그리스 건축물의 핵심은 돌기둥이 아닐까 싶다. 길이, 모양,재질이 무척 다양한데 특히 주두(기둥의 윗부분)의 스타일에 저절로 눈길이 갔다. 주두를 매끈하게 다듬기만 하거나, 부드럽게 부풀려문양을 음각하거나, 꽃잎 모양의 장식이 밖으로 나오게 깎은 돌기둥들을 감상하는 것은 독일 아우토반을 달리는 승용차의 차종을 알아맞히는 놀이만큼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돌기둥의 다양성을 감상하기에 최적인 공간은 그리스가아니라 터키에 있다. 돌기둥 수백 개가 천장을 받치고 있는 ‘지하궁전‘인데, 자세한 이야기는 이스탄불 편에서 하겠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내 마음의 돌기둥‘을 만났다. 에레크테이온신전의 ‘카리아티드(고대 그리스 신전 건축에서 여신상으로 만든 돌기둥)‘였다. - P28
옷자락을 부드럽게 늘어뜨리고 다리 하나를 살짝 구부린 채 현관 지붕을 이고 선 6개의 여인상은 얼굴이 훼손되어 표정을 알 수 없고 팔꿈치 아래가 떨어져 나갔지만 서로 다른 옷과 머리 모양과 뒤태가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카리아티드가 ‘카리아의 여인‘이라는 해석이 있다. 아테네군은페르시아와 손잡았던 카리아로 쳐들어가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를노예로 만들었는데, 그걸로도 부족해서 카리아의 여인들에게 에레크테이온의 지붕을 이고 서 있도록 벌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믿기 어려웠다. 남자들 대신 징벌을 받는 여인들을뭐 하러 그렇게 멋진 형상으로 빚는단 말인가. 카리아티드의 모델이누구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돌기둥을 여인의 형상으로 조각한 창의적 발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유럽 도시에서는 철근 콘크리트 공법을 썼기 때문에 돌기둥이 전혀필요하지 않은 현대식 건물에도 카리아티드를 연상시키는 여인상을부조해 놓은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 P30
그리스는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나라와 비슷해서 유럽에서는 가난한 편에 속한다. 게다가 정부가 국내총생산의 두 배에 육박한 대규모 국가 채무의 존재를 회계 분식으로 장기간 숨겨온 사실이 밝혀진2009년에 국가 부도 위기를 맞은 뒤로 실업률이 20%를 넘나드는 등심각한 후유증을 앓았다. 해운업자를 비롯해 부자가 많지만 세금을제대로 걷지 못해 정부는 만성적 재정적자에 허덕인다. 그런데도 아테네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아둥바둥 애쓰는 기색이없었다. 모두가 ‘조르바‘처럼 극단적으로 느긋하게 살지는 않겠지만악착같이 무언가를 해보려는 분위기를 감지할 수 없었다. 한국 같으면 누군가 틀림없이 플라카 초입에 튜닉과 가죽 샌들 대여점을 냈을것이다. 서울 서촌이나 전주 한옥마을, 경주 대릉원의 한복 대여점처럼, 그리고 시 정부는 아마도 외국어를 능숙하게 하는 ‘소크라테스복장‘의 문화해설사를 투입해 지나가는 관광객을 붙들고 "좋은 구두를구하려면 어떻게 하슈?" 따위의 질문을 던지게 했을 것이다. 분명 대박이 날 것 같은데, 플라카에는 그런 낌새조차 없었다. - P40
소크라테스는 당대의 통념을 흔드는 질문을 던졌다.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유란 ‘폴리스의 자유‘ 또는 ‘집단의 자유‘였다. 자신들이 페르시아나 다른 도시국가에 지배당하거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 인권, 평등 같은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같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도노예제와 성차별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폴리스의 영광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 천착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이성에서 도덕법을 끌어내려했다. 출신 배경이 어떠하든 만인이 똑같이 자유를 누릴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남자 시민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를 인격적 이념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대의 인기 극작가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이라는 연극에서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교활한 개자식‘이라고 비난했다. - P71
플라카의 골목을 걸으며 생각해보았다. 아테네 시민들은 왜 소크라테스를 죽였나? 고정관념, 광신, 시기심, 무지, 무관심, 변덕이 그를죽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어떤 지식인은 국회의원을 차라리 추첨으로 뽑자고 주장한다. 국회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는충분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나는 이 주장에 공감하지 못한다. 플라톤은 민주주의가 반드시 중우정치로 흐른다면서 덕과 진리를 아는 ‘철학자의 통치‘를 옹호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들이 각자 훌륭해지지 않고, 훌륭한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훌륭해지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 시민들보다 얼마나 더 훌륭하며 국가와 정치에 대해서 얼마나 더 큰 관심을 가지고얼마나 더 능동적으로 참여하는가? 나는 직접민주주의가 다수의 폭정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비관론에 한표를 던지고 싶다. - P73
아테네는 한 국가의 수도이고 3천 년 역사를 품고 있지만 화려하지도고풍스럽지도 않았다. 냉정하게 말하면, 초라해 보였다. 오래된 역사도시는 역사 유적이 시민의 생활 공간과 분리된 경우가 많은데, 그둘이 아테네처럼 분명하게 나뉜 도시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로마와 이스탄불도 어느 정도는 그런 모습이었지만 아테네만큼은 아니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없는 인간 본연의 한계 때문이다. 세상에는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는 일이 많다. 학자들은 ‘경로 의존성‘이라는 개념으로 이런 현상을 설명한다. 우연히어떤 길에 들어서고 나면 더 좋은 길을 알아도 가던 길을 벗어나지못한다는 것이다. - P74
여러 차례의 영토 빼앗기 전쟁과 주민들의 대규모 상호 이주 사태를 겪었던 만큼, 그리스와 터키는 한국과 일본만큼이나 사이가 좋지 않다. 하지만 오스만제국 시대에 400 년 동안 섞여 살았던 만큼 음식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다. 어떤 것이 어느 쪽에서 먼저생겨서 다른 쪽으로 전파되었는지 밝혀내기도 어렵다. 술도 그랬다. 그리스 국민 술로 통하는 ‘우‘는 이스탄불에서 포도주 찌꺼기로 만든 재탕 와인을 증류해서 만들었지만 그리스에서는곡물 주정으로 제조한다. 40도짜리여서 얼음을 타서 먹는 경우가 많은데 물이 섞이면 뿌옇게 변한다. 숙성할 때 향신료로 쓰는 미나리과풀 ‘아니스‘의 어떤 성분 때문이라고 한다. 식욕을 돋운다고 식전에마시는데, 뭐라고 꼭 집어낼 수는 없지만 거북한 냄새가 나서 다시 - P84
마지막 밤, 불 밝힌 파르테논과 리카비토스 언덕 꼭대기가 보이는 식당에서 아테네를 생각했다. 철학과 과학과 민주주의가 탄생한고대 도시, 1천500년 망각의 세월을 건너 국민국가 그리스의 수도로부활한 아테네는 비록 기운이 떨어지고 색은 바랬지만 내면의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남부러울 것 없었던 어제의 미소년이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겪은 끝에 주름진 얼굴을 가진 철학자가 되었다고 할까. 그 철학자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큰소리로 말하지 않고 오래된 양복에 가려진 기품을 알아볼 책임을 온전히 여행자에게 맡겨두고 있었다. 비행기가 아테네 공항 활주로를 이륙할 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다시는 못 볼지 몰라. 하지만 ‘야수(Teld Gou, 잘 있어!‘는 내키지않아. 왠지 모르게 또 보게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거든. 그러니 높고도 쓸쓸한 도시여, ‘따레메 (Ta A&E, 또 봐)!‘ - P87
로마, 뜻밖의 발견을허락하는 도시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나폴리를 비롯해 이탈리아에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도시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로마를 온전히 대신할 만한도시는 없다. 로마는 무엇이 특별한가? 우선 예술적 기술적 수준이 높고 규모가 큰 고대 유적이 유럽의 어떤 도시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많다. 둘째, 세상에 하나뿐인 바티칸 교황청 덕분에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걸출한 건축물과 예술품을 품고 있다. 셋째, 19세기 후반 출현한 이탈리아 국가 수립의 역사를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한다. 서구 문명은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빅뱅‘을 일으켰고 로마제국에서 ‘가속 팽창‘을 했다. 로마는 서구 문명의 가속 팽창 흔적을 지닌 도시답게, 고대부터 현대까지 문명의 발전 양상을 압축해 보여준다. 단한 번 여행으로 로마의 모든 것을 보겠다는 욕심은 처음부터 갖지 않았다. 며칠 동안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지만, 도시의 윤곽을 어렴풋이나마 가늠해보면서 반드시 가보고 싶었던 공간 및 군데를 밟아본 게 - P93
고작이었다. 그렇지만 로마도 하나의 도시일 뿐이다. 로마에 가서 이탈리아를 보았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큰 착각이다. 이탈리아는 엄청난 다양성을 지닌 나라여서 어떤 도시도 혼자서는 이탈리아를 대표하지 못한다. 알프스에서 지중해 한가운데로 장화처럼 뻗어 나온 이탈리아반도는 면적의 75%가 비탈진 산과 언덕이다. 한반도의 백두대간처럼 이탈리아반도에는 아펜니노산맥이라는 등뼈가 있으며, 한반도의 1.5배인 30만 제곱킬로미터의 국토에 6천만 명이 산다. 프랑스, 스위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부 지방과 로마를 포함한 중부 지방, 3면을 지중해가 둘러싸고 있는 남부 지방, 사르데냐와시칠리아를 비롯한 섬들은 기후와 지형, 역사, 산업, 언어,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서로 다르다.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도이며 이탈리아 말을 한다는 것 말고는 무슨 공통점이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 P94
어떤 순서로 무엇을 보아야 할지, 로마 여행에 정답은 없다. 그러나 오직 로마에만 있는 것은 되도록 빠뜨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가령콜로세오를 비롯한 고대 유적과 가톨릭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이다. 도시 전체에 널린 르네상스 시대 이후의 건물과 광장, 미술관, 박물관, 기념관들은 마음이 끌리는 곳을 골라서 다녔다. 어차피 다 볼 수없고, 비슷한 것은 다른 도시에도 많으니까. 고대 유적 구경은 콜로세오에서 시작했다. 아테네의 슈퍼스타가파르테논이라면 로마의 슈퍼스타는 콜로세오다. 지중해의 가을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 푸르렀지만, 지하철 B선 콜로세오역 근처를 바삐오가는 직장인과 학생들은 아무도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내게는 여행지였지만 그들에게는 숨 가쁜 하루를 여는 생활의 터전이었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되도록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 P100
공화정 시대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원로원 건물은 그리 화려하지않은 외관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었지만, 카이사르가 최후를 맞았던 앞마당은 완전한 폐허였다. 로마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일 것이다. 그러나 로마에는 그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 거의 없다. 그나마 그가 잠시라도 머물렀을 원로원 건물이 보이기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카이사르는 B.C.1세기 중반 아주 잠깐 최고 권력자로등극했을 뿐 황제가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로마의 정치체제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제국의 황제 또는 강대한 국가의 절대 권력자를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캐사르, 카이저, 시저, 차르 등은 표기법과 발음이 다르지만 모두 카이사르에서 나온 말이다. - P116
공화파는 암살에 성공했지만 카이사르를 지지했던 로마 시민들의 분노를 감당하지는 못했다. 내전으로 치달았던 로마의 정세는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내전을 평정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됨으로써 안정을 찾았다. 공화정을 공식 폐지한 아우구스투스황제는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할 목적으로 카이사르를 신격화했고, 후임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했다. 로마 황제들은 ‘카이사르‘ 라는 칭호를 대물림하면서 청년 카이사르의 조각상을 도시 곳곳에세웠는데, 이 전통은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할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 P122
폐허가 된 원로원 마당에서 절충하기 어려운 것들이 공존했던 인간 카이사르의 생애를 돌아보았다. 그는 귀족이었지만 평민파에 가담했다. 어떤 술수도 마다하지 않고 권력 투쟁을 벌였지만 이긴 후에는 정적을 너그럽게 포용했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해 공화정을 사실상 폐지했지만 민중의 소망과 요구를 존중했다. 원로원의 부패 기득권 세력을 무너뜨리고 시민의 권리를 확장했으며 빈민과 해방 노예, 속주의 민중을 돕는 개혁 조처를 밀어붙였다. 보기 드문 정치적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 P122
‘절반 뚜벅이‘로 로마 구경을 했다. 숙소에서 출발점으로 가고 종료지점에서 숙소로 돌아올 때, 그리고 다음 행선지가 멀리 있을 때만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나머지는 걸어서 다녔다는 뜻이다. 카피톨리노 언덕 앞 베네치아 광장 근처 골목의 식당에서 가벼운점심을 먹은 다음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에서 캄피돌리오 광장, 판테온, 트레비 분수, 스페인 광장을 거쳐 포폴로 광장까지 도심의 북쪽지역을 탐사하려면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고달프긴 했지만 저녁밥이 잘 넘어갔고 밤에 잠도 쉬이 들었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은 로마에 있지만 이탈리아 전체를 대표하는 시설이다. 전면에 있는 기마상의 주인공은 이탈리아 통일을 이끈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이고, 기마상 양편에 부조한 사람들은건국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무명용사들이다. 에마누엘레 2세뿐만 아니라 가리발디, 카보우르, 마치니 등 이탈리아 통일 주역들의 유품도전시하는 이 기념관은 현대사와 관련한 기획전을 꾸준하게 연다. 이탈리아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여행자라면 시간을 넉넉하게 들일 만했다. - P128
가리발디의 영웅담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1862년에는 4만 군사를 끌고 오스트리아제국 군대를 제압해 베네치아를 탈환했으며1867년에는 교황청을 가장 악독한 비밀결사체라고 비난하면서 로마로 진군했다. 로마를 이탈리아왕국의 수도로 선언하고서도 실제로는사르데냐왕국의 토리노에 머물렀던 에마누엘레 2세는 프랑스 군대가프로이센과 싸우기 위해 떠나자 지체 없이 로마를 점령해 통일운동의 마침표를 찍었다. 가리발디는 단순한 군사 영웅이 아니라 확신에 찬 휴머니스트이자 투철한 공화주의자였다. 노예제 폐지에 대한 신념이 불확실하다며 링컨 미국 대통령의 스카우트 제안을 거절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을 정도로 강력한 신념의 소유자였던 그는 모든 국민에게 선거권을부여하는 정치 개혁을 추진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철폐하는 입법을 시도했다. 한 국가와 국민을 위해 가리발디만큼 많은 일을 한 사례는 흔치않다. 역사 공부를 하려고 로마에 가는 건 아니겠지만, 이탈리아 건국역사를 대충이라도 알면 로마 여행의 맛이 더 깊고 풍성해질 수 있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은 그런 기회를 제공한다. - P132
바티칸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곳이다. 로마에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교황이 다스리는 별도의 도시국가인데, 이 특이한 국가의 영토는겨우 0.44 제곱킬로미터이고, 1천 명이 겨우 넘는 시민권자의 직업은성직자, 직원, 근위병이 전부다. 바티칸이라는 지명은 가톨릭 교황청보다 먼저 생겼다. 현재 바티칸의 영토는 바티칸 언덕에서 베드로 광장까지다. 이 구역은 9세기 중반 교황 레오 4세가 사라센족의 공격을막으려고 강둑을 따라 성벽을 쌓아 올리면서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이탈리아왕국은 1871년 교황청의 주권을 전면 부정하고 바티칸을 로마에 통합했지만, 1929년 무솔리니가 라테라노에서 조약을 체결해현재의 바티칸 지역을 교황청의 영토로 인정했다. - P142
나 같은 중년의 관광객은 박물관과 대성당 구경을 마치기도 전에당이 떨어져 허덕이게 된다. ‘화해의 길‘ 이면도로의 식당에 들어가점심을 대충 해결하고 테베레강을 내려다보는 산탄젤로성에 올랐다. 산탄젤로성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가족묘로 쓰기 위해 지었지만 외부 침략이나 내전이 터졌을 때는 비상 대피소로 썼다. 이 성은 강이한눈에 들어오는 군사적 요충이고 성벽도 높아서 방어하기에 좋았을듯했다. 내부의 예배당은 제법 화려했지만, 시스티나 예배당을 보고온 터라 별 느낌이 없었다. 산탄젤로성의 매력 포인트는 꼭대기에 있는 비스트로였다. 여기서 커피를 마시면서, 허겁지겁 점심을 때우고 온 것을 크게 후회했다. 음식 맛이 좋지 않아도 괜찮을 비스트로였다. 무엇이든 기분 좋게 즐길 수 있는 고성(古城) 레스토랑 분위기가 났기 때문이다. 다른 손님이받은 음식의 비주얼을 보니 맛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속으로 다짐했다. ‘로마에 다시 온다면 한 번쯤은 여기서 점심을 먹어야지.‘ - P150
로마 여행 셋째 날은 대형서점에서 책을 구경하는 기분으로 아침부터 해 저물 때까지 정처없이 성당과 광장, 궁전을 찾아다녔다. 로마는 확실히 여러 얼굴을 가진 도시였다. 아무렇게나 다녀도 거리의 향기를 맡고 공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테르미니역 광장 바로 앞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이었다. 고대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에 붙여 지은 이 성당에는 2천 년 전 로마의 돈 많은 자유민이 만든 것을 되살린 내부 정원이 있었다. 연결된 건물을 로마 국립 박물관으로 쓰고 있었는데, 통유리 벽을 통해 고대의 목욕탕 내부를 볼 수 있었다. 훔쳐보는 게 아닌데도 묘한 긴장감이 들었다. - P156
로마는 전성기를 다 보내고 은퇴한 사업가를 닮았다. 대단히 현명하거나 학식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뛰어난 수완으로 돈과 명성을 얻었고, 나름 인생의 맛과 멋도 알았던 그는 빛바랜 명품 정장을입고 다닌다. 누구 앞에서는 비굴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돈지갑이 얄해도 기죽지 않는다. 인생은 덧없이 짧으며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때 거두었던 세속적 성공에 대한 긍지를 버리지는 않는다. 로마는 그런 도시인 것 같았다. "어때? 종종 만나서 놀면 괜찮지 않겠어?" 로마가 물었다. 테르미니역 승강장에서 공항 가는 기차에 오르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 가끔 만나는 건 뭐, 나쁠 것 없겠지. 다음에 보자. 바쁜 일 좀 끝나면. 차오(Ciao, 안녕!" - P165
이스탄불, 단색에 가려진 무지개
지하궁전의 돌기둥은 실로 다양했다. 사각기둥, 원기둥, 통으로깎은 기둥 등, 모양도 두께도 다 제각각이었다. 어떤 것은 주두가 아예없었고 어떤 것은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주두 장식이 있었다. 저수조 맨 안쪽의 메두사도 재활용한 석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메두사를 그런 식으로 놓았을까? 저수조 기둥은 길이가 모두같아야 한다. 너무 긴 기둥은 잘라 맞추었겠고 너무 짧은 것은 적당한 돌덩이를 괴었을 것이다. 마침 괴물 형상을 그려놓은 돌덩이 2개가 있었는데, 기둥을 받치기에 적당하게 놓다 보니 하나는 거꾸로, 다른 하나는 옆으로 놓게 되었다. 기둥을 안정시킬 수만 있다면 메두사가 바로 서든 뒤집어지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 일을 한 현장감독은 그것이 구름 관중을 불러 모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것이다. 이것이 메두사가 거꾸로 앉게 된 경위에 대한 나의 별 근거없는 추정이다. 그렇지만 제법 그럴듯하지 않은가. - P190
다양성은 좋은 것이지만 서로 다른 민족, 종교, 문화가 뒤섞이면 갈등이 무력 충돌로 비화할 위험이 커진다. 1990년대에 유고연방이 해체된 직후 세르비아계 군인들이 보스니아의 무슬림 1만여 명을 학살한 ‘인종 청소‘ 사건을 기억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오스만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후 두 차례나 빈을 포위 공격했다가실패하고 물러났는데, 만약 그들이 빈을 함락시키고 서쪽으로 더 진격했다면 서유럽 전체가 발칸반도처럼 되었을지 모른다. 서 있는 곳이 다르면 세상사를 보는 관점도 달라지는 법. 1453년5월 29일 아침 벌어졌던 사건을 가리켜 유럽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티노플 함락‘이라 했고, 세계의 무슬림들은 ‘콘스탄티노플 정복‘이라했다. 둘 다 일리가 있다. 메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했고, 콘스탄티노플은 그에게 함락되었으니까. 메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바꾸었지만, 도시가사라지거나 몰락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스만제국은 투르크족만의국가가 아니라 다양한 인종과 민족, 상이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하는제국이 되었고 이스탄불은 그런 제국의 수도다운 도시로 발전했다. 이스탄불에는 투르크인,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터키인,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쿠르드인이 섞여 살았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등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했다. - P200
폴란드 여인 록셀라나였다. 열여덟 살에 전쟁포로로 이스탄불에잡혀 왔던 록셀라나는 노예로 팔렸다가 하렘에 들어가 술레이만 1세의 아내가 되었는데, 여섯 아이를 낳았고 외교 분야에서 중요한 조언자 역할을 했다고 한다. 여성을 제도적으로 차별해 온 이슬람 세계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술탄이 한 여인만 사랑했다고 하니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한 여인을진심으로 위하지 못하는 자, 어찌 만백성의 보호자가 될 수 있으랴. 술레이만 1세는 전쟁을 많이 한 술탄이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을것이라고, 쉴레마니예 자미가 보일 때마다 생각하곤 했다. - P203
이스탄불이 안전하지 않다고 해서 터키 사람 가이드 M을 고용했다. 그런데 M은 탁심 광장 근처 뒷골목 어디에 있다는 ‘파묵 하우스‘ 를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어떤 날은 휴관일이라 했고, 다른 날은 동선이 맞지 않는다고 했다. 시종일관 진지하고 성실하게 우리를 안내했던 M이 그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니 그곳에 고객을 데려가지 말라는 당국의 지시가 있었던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이스탄불은 모든 것이 낡고, 한적하고 텅 빈, 흑백의 단조로운도시로 바뀌었으며 거리에서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히브리어가 사라졌다." 파묵은 자서전에 이렇게 쓴대가를 치르는 것 같았다. 이스탄불이 단색의 도시로 변한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오스만제국이 해체되어 제국의 수도 지위를 잃은 것, 둘째는 터키인이 아닌 주민들이 도시를 떠난 것이다. - P204
무스타파 케말은 단순한 군사 영웅이 아니었다. 우리의 역사 인물과 비교하자면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그리고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 등을 모두 뒤섞어 놓은 듯한 사람이었다. 전쟁 영웅, 민족주의 혁명가, 대통령, 계몽 군주, 공화주의자인 동시에 독재자였다. 그는 이슬람 문화와 터키 민족주의에 자신의 철학과 정치사상을 접목함으로써 터키공화국을 ‘창조‘했다. 이스탄불 여행자들은 다른 이슬람 국가에는 없는 것을 본다. 시민 대부분이 무슬림이지만 수많은 자미들 사이에 유대교 회당과 가톨릭 성당, 정교회 성당과 개신교회가 끼여 있다. 여성들은 적어도 법적으로는 차별받지 않으며, 머릿수건을 쓰지 않고도 사회생활을 한다. 거리에서 매를 때리는 형벌이 없으며, 하루 다섯 번 해야 하는 예배를 빠뜨려도 처벌하지 않는다. 이정표와 상점 간판의 글자는 알파벳이다. 이 모두를 무스타파 케말이 만들었다 - P210
성을 쓰도록 강제하는 법률을 만들 때 자신은 ‘아타튀르크(Atatürk,투르크인의 아버지)‘라는 성을 만들어 썼다. 무스타파케말은 이때부터아타튀르크가 되었다. 이런 성을 감히 선택한 동기가 애국심인지 자신감인지는 알 수 없다.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일을 한 사람이 했다는 게 믿어지는가? 아타튀르크는 인류 문명사에서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모순적인 인물이다. 탁월한 군사 지도자인 동시에 만만치 않은 내공을 가진 지식인이었으며, 공화주의자였지만 강력한 독재를 했다. 쿠르드족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주모자들을 냉혹하게 처형했으며, 질서유지를명분으로 야당을 해산하기도 했다. 직책은 공화국의 대통령이었지만 행동은 군주에 가까웠으며,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도 터키공화국을 서구에 접근시켰다. 평생 엄청나게 술을 마셨고 극도로 불규칙하게 생활했던 그가 1938년 11월 10일 아침 심장병으로 사망하자 터키 정부는 시신을 앙카라 민족학 박 - P211
물관에 안치하고 ‘터키공화국의 영원한 지도자‘로 선포했다. 아타튀르크의 신념과 인격은 헌법과 제도, 국민들의 마음에 각인되었고 오랫동안 터키공화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카리스마를 휘둘렀던 지도자가 사라진 세상이 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터키공화국은 1950년 선거에서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현했다. 아타튀르크에게 세속국가의 원리를 수호하는 것을 사명으로 받았던 군부가 여러 차례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이슬람 근본주의 정치세력의 성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자신을 ‘21세기의 아타튀르크‘라고 생각한 듯했지만, 2019년 3월 뉴질랜드에서 이슬람 사원이 테러를 당해 무슬림들이 목숨을 잃은 비극적사건이 터졌을 때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다시 자미로 바꾸겠다고 한그의 행태를 아타튀르크가 보았다면 아마도 크게 화를 냈을 것이다. 아타튀르크의 정치철학은 ‘세속국가론‘과 ‘공화주의‘, 그리고 ‘터키민족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아타튀르크는 터키를 ‘터키‘ 했다. 다문화, 다종교, 다민족을 포용했던 이스탄불이 단색의 도시로 바뀐것은 ‘터키화‘의 불가피한 결과였다. 19세기 유럽의 어떤 지식인이 100년 후 ‘세계의 수도‘가 되리라고 예언했던 이스탄불은 변방의 가난하고 슬픈 도시로 변해갔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그 누군가는 아타튀르크일 수밖에 없다. - P212
그러나 1955년 불어닥친 민족주의 광풍은 그들마저 다 몰아내 버렸다. 아르메니아계를 비롯한 다른 소수민족 주민들도 더는 버티지 못했다. 그 사태 이후 이스탄불 거리에 들리는 언어는 터키말하나만 남았다. 오르한 파묵은 자전에세이 《이스탄불: 도시와 기억》에서 그때 목격한 일을 가슴 저린 어조로 회상했다.
"그들은 예전에 어머니와 함께 가곤 했던 베이올루의 상점과 이스탄불 일부를 불태우고 파괴하고 약탈했다. 술탄 메메트 2세가 이스탄불을 정복한 후 군인들이 벌였던 약탈만큼이나 무자비했다. 이틀동안 도시에 공포를 퍼뜨리고 이스탄불을 기독교인과 서양인들이생각하는 최악의 오리엔탈 악몽보다 더 지옥 같은 곳으로 만든 약탈자들을 부추기기 위해, 정부지원 조직들이 그들에게 ‘마음대로약탈하라‘고 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 P213
그 터키식 커피 전문 카페의 옥호에는 무대 뒤의 빈 곳을 가리키는 터키말이 들어 있었는데, 굳이 번역하자면 ‘커피 대기실‘쯤 될 것이다. 잔에 가라앉은 커피 분말을 보며 터키공화국과 이스탄불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그래, 서울 지하철 역삼역 근처에 있는 문화원이름이 왜 터키문화원이 아니라 이스탄불문화원인지 알겠어.‘ 이스탄불은 확실히 터키공화국보다 큰 도시였다. 비잔틴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유산 가운데 터키 민족주의가 포용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터키식커피‘로 이름이 바뀐 ‘오스만식 커피‘ 잔 바닥의 분말처럼 가라앉고말았다. ‘자신의 궁전에 유배당한 왕‘을 보면 이런 느낌이 들까? - P240
마지막 일정을 마친 밤, 잠들기전에 이스탄불에게 위로를 보냈다. 절망하진 마, 이스탄불, 물기를 머금은 잔 바닥의 커피 분말에서 오스만제국의 향기를 맡는 여행자도 있어. 다음에 오면 생강가루를섞은 커피를 청할게. 후미진 골목 구석에 조용히 엎드려 있는 그리스정교 교회와 아르메니아정교 교회에도 들어가 보고, 파묵 하우스도가고 말 거야. 귀츨뤼 올(Güçlü ol, 힘내요), 이스탄불! - P241
파리, 인류 문명의 최전선
레알지구에 숙소를 마련한 덕에 편리하게 파리 심장부를 걸어 다녔다. 레알지구는 루브르와 시테섬, 퐁피두센터와 가까웠고 레알역에는메트로와 광역급행전철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근처에 가성비 좋은식당이 많았고 거리 분위기도 젊고 활기찼다. 파리는 문화자산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여행자들은 자기만의 여행 경로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로마에서처럼 도시의 역사와 그 역사를 만든 인물들을 따라가는 데 첫 하루를 썼다. 시테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출발해 퐁네프다리-루브르 박물관-튈르리 정원-콩코르드 광장-샹젤리제 거리 -개선문-에펠탑-오르세 미술관-로댕 미술관을 거쳐 앵발리드까지. 스마트폰 기록으로는 열 시간 동안 13킬로미터를 걸었다. 이 코스는 로마로 치면 팔라티노 언덕 황궁 터에서 출발해 콜로세오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보고 포로 로마노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을 거쳐 판테온까지 가는 것과 비슷하다. 파리의 역사, 종교,정치의 중심 공간을 관통하는 것이다. - P250
대혁명의 나라 프랑스, 프랑스의 수도 파리, 센강의 생 미셸 다리에서 시들어버린 꽃묶음을 보며 생각했다. 민주주의는 어떤 제도의집합이 아니라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과정이 아닐까? 완성할 수 없음을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개선하려고 도전하는 몸부림이 아닐까? 때로는 망가지고 부서져 절망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것 말고는 이해계와 생각과 취향이 다른 사람들이 평화롭게 다투며 공존하는 다른방법을 찾을 수 없기에 포기하지 못하는 제도와 규칙과 관행, 민주주의란 그런 게 아닐까. 생미셸 다리의 꽃묶음은 프랑스 민주주의도 아직 완성형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 P256
예술 작품을 보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은 루브르에서도 어김없이 작동한다. 끝도없이 나타나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의 예술작품을 보고 있자니 점차 그게 그것 아닌가 싶어졌다. 게다가 다빈치의 <모나리자>,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 앵그르의 <오달리스크>처럼 유명한 그림 앞에는 사람이 말 그대로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팔꿈치로 격렬한 전투를 치르면 가까이 갈수는 있지만, 남들도 팔꿈치를 세우기 때문에 차분하게 감상할 수는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뚝 떨어진 곳에서 까치발을 하고 다른 사람들머리 위로 보면, 인터넷에서 이미지를 보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오버투어리즘‘은 베네치아나 만리장성에서 생긴 현상이 아니다. 루브르에서는 수십 년 전에도 그랬다. 루브르는 한 번에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이 아니다. 꼭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여도 두세 시간은 금방 간다. 정치권력의 위세와 예술의 향취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따로따로보는 게 훨씬 나았다. 대혁명 이전 정치권력의 민낯은 루브르보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더 적나라하게 목격할 수 있었고, 대혁명 이후 프랑스 예술은 오르세 미술관에서 여유 있게 즐길 수 있었다. - P261
루브르에서 샹젤리제 거리로 가려면 카루젤 개선문을 지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튈르리 정원과 콩코르드 광장을 지나고 샹젤리제 거리를따라 에투알 개선문이 있는 샤를 드골 광장까지 걷는 동안 온몸이 호강하는 기분이었다. 파리의 심장부인 이 공간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뀐 정치 제제의 교체가 도시의 공간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카루젤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1808년에 세웠는데, 선 곳이 카루젤 광장이라 그렇게 부른다. 개선문은 로마제국의 문화 아이콘이며, 다른 도시의 모든 개선문은 로마 개선문의 복제품이라 할 수 있다.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서 있는 장군과 권력자의 과시욕을 드러낸다는 건 똑같다. - P262
베르사유 궁전의 왕과왕비,왕자, 공주들의 생애와 관련한 정보를 검색해보면 전염병이 매우 ‘공정‘ 해서 신분과 계급을 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페스트, 콜레라, 천연두, 홍역, 발진티푸스 등 전파가쉽고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은 대부분 농업혁명으로 인간과 가축의접촉 빈도가 높아지면서 생겼다. 하지만 19세기 중반까지는 세균과 바이러스 등 미생물이 물이나 체액, 공기를 통해 인체에 들어와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몰랐다. 원인을 모르니 예방법과 치료제가 있을 수 없었다. 부르봉 왕가의권력자들 가운데 전염병으로 죽은 이가 그토록 많았으니 훨씬 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살았던 백성들은 얼마나 죽었을지 넉넉히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전염병은 지금도 ‘공정‘하다. 권력자 자신이 생명을 위협하는 그공포에서 벗어나려면 만인을 전염병에서 해방해야 한다. 19세기 후반 이후 문명국가들은 생물학, 병리학, 공공보건학, 도시계획학, 건축학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는 전문가들의 능력을 모아 악성 전염병을 퇴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구촌에는전염병이 창궐하는 지역이 여전히 많다. 어디선가 전염병이 창궐한다는 뉴스가 들리면 그 지역의 국가조직 자체가 붕괴했거나, 아니면지극히 무능하거나, 사악하거나 또는 둘 모두인 자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은가 의심해볼 충분한 이유가 된다. - P287
베르사유 궁전을 보고 나온 어머니가 내게 물었다. "여기 살던 임금이 목 잘려 죽었다고?" "예." 한마디 덧붙이셨다. "그럴 만도 하네." 백성들이 굶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저런 사치를 누린 왕의 목을 자른 것이 마땅한 처사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궁전의 왕족과 귀족들이 지극히 인간답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완전히 소거한, 생산적인 활동과는 동떨어진 삶을 영위했다는 것만큼은 더없이 분명하다. 궁전의 방마다 걸린 초상화에서 왕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런 생산적 활동도 하지 않고 산다는 걸 알아주기 바란다. 금실 은실로 수놓은 옷, 정교하게 꾸민왕관, 무거운 망토, 요즘에는‘킬힐‘이라고들 하는 뾰족구두, 보석을 박은 단장, 이런 차림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니?" 한마디로 우스꽝스러운 차림새였다. 왕비들의 초상화가 말하는 것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헤어스타일마저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생활하기에 최대한 불편하게 만들었다. 왕과 왕비의 침대도 그랬다. 잠을 자려고 그렇게 큰 방에 그처럼높고 큰 침대를 놓은 게 아니었다. 실제로는 침실에 딸린 작은 방의 편안하고 작은 침대에서 잤다. 왕의 침실에 놓인 것은 ‘기침 행사‘를위한 의전용 침대였다. - P293
에펠탑은 세 가지 측면에서 파리가 지구촌의 문화수도가 될 자격이 있음을 보여준다. 첫째, 에펠탑은 과학혁명의 산물이다. 세계박람회장 관문을 만들기 위한 건축 공모를 할 때 프랑스 정부는 ‘기술적진보와 산업 발전을 상징할 기념물‘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에펠탑은금속 7천300톤을 포함해 전체 무게가 1만 톤이 넘으며, 자체 하중과바람의 압력을 거뜬하게 견뎌낸다. 발명왕 에디슨이 괜히 공학의 발전과 기술자들의 능력을 찬양하는 글을 방명록에 남긴 게 아니다. 프랑스의 과학자, 엔지니어, 수학자 72명의 이름을 탑에 새긴 것도 같은 - P300
맥락이다. 둘째, 에펠탑은 공화정이라는 프랑스 정치제도의 특징을 체현하고 있다. 왕이나 교황이 취향 따라 만든 게 아니라 공모 절차와 전문적 평가를 통해 디자인을 결정했으며 전문가와 비평가들이 아니라대중이 좋아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에펠탑은 민주주의 시대 도시의 주인은 권력자가 아니라 시민이며, 시민이 선출한 정부가 합당한과정을 거쳐 중대사를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정치제도가문명의 대세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계기는 1789년에 터진 프랑스대혁명이었다. 에펠탑은 이 혁명의 심장이었던 도시의 대표 건축물로손색이 없다. 셋째, 에펠탑은 자유와 평등, 인권의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고대와 중세의 왕궁이나 교회와 달리 에펠탑은 개인이 디자인한 예술품이며 노예 노동이나 강제 노동 없이 축조했다. 디자인을 설계한 에펠은 물론이요 과학자, 수학자, 엔지니어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위험이 따르는 작업을 수행한 노동자들도 저마다의 권리를누리면서 일했고, 당국은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의 안전 조처를 했다. 자본주의는 격차와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이지만 적어도 공공연한 강제 노동이 없다는 점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질서임이 분명하다. - P301
해가 기울어갈 시각, 에펠탑을 뒤로하고 마르스 광장 동쪽 모퉁이 방향에 있는 앵발리드로 향했다. 앵발리드는 루이 14세가 지은 군용병원 옆에 파리 경비사령부와 무기고가 들어오면서 형성된 군사시설이었다. 지금도 군사 박물관이 제일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대혁명 때 시민들은 이곳 무기고에서 총기를 대량 탈취한 다음, 소문과달리 정치범이 아니라 소수의 ‘잡범‘만 갇혀 있었던 시테섬 우안의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해 수비대의 늙은 병사 80여 명을 죽였다. 나폴레옹의 시신을 안치한 성당은 중간에 오르세 미술관과 로댕 미술관을들르느라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들어가지 못했다. 죽은 이의 무덤이야 못 본들 또 어떠리. - P302
하지만 평범한 파리 여행자가 어찌 <미슐랭 가이드>의 별을 받은레스토랑에 감히 발을 들여놓겠는가. 그런 식당에서 한 끼를 먹으려면 예약을 해야 하고, 와인을 포함하면 평소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돈을 내야 한다. 베르사유 궁전의 레스토랑에서 가볍게 먹었던 점심을 제외하고는 파리를 여행하는 동안 고급 레스토랑에 가지 않았지만 음식에 관해서는 별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파리에서 먹은 음식은다 다르면서 다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딱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프랑스 사람들이 ‘영혼의 수프‘ 라고 한다는 양파수프였다. 버터에 볶은 양파를 고깃국물에 끓이고치즈 가루로 그라탱을 한 다음 월계수 잎을 띄우고 구운 바게트 한토막을 올려 주는데, 파리뿐만 아니라 칸에서도 너무 짜서 먹기 힘들었다. 다른 도시에서처럼 파리에서도 잘 먹어보려고 부지런히 발품을팔았다. 숙소가 있었던 레알지구에는 저렴한 식당이 밀집한 먹자골목이 넓게 포진하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 인근 퐁피두센터에 갔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총리와 대통령을 지낸 조르주 퐁피두의 이름을 붙인 이 센터는 1977년말 개장한 복합 문화시설이다. 시장과 영화관, 서점, 기념품점, 카페 등 다양한 시설이 있어서 주로젊은이들이 드나드는데, 화장실을 안내하는 발자국 모양의 화살표가마음에 들었다.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본 공공 디자인 중 최고였다. - P318
프랑스는 도버해협과 지중해 사이에 넓게 자리 잡고 있다. 서울강남의 한정식과 전남 진도의 한정식이 다른 것처럼, 파리 음식이탈리아에 인접한 남프랑스 칸의 음식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칸 해변의 영화제가 열리는 극장 근처 해산물 전문점에 가면 바다의 향기가그대로 풍기는 생선회 요리가 나오고, 정통 프랑스 요리를 한다는 식당의 스테이크는 피렌체의 티본스테이크만큼 두껍고 육즙이 줄줄 흘렀다. 나는 파리에서 내가 간 식당 주방장이 만든 음식을 먹었을 뿐,프랑스 음식을 먹은 게 아니었다. 여행할 때는 몰랐는데, 글을 쓰면서 알았다. 보고 왔는데 또 보고싶거나, 이번엔 못 보았지만 다음엔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공간이 파리에 아주 많다는 것을 그렇지만 다시는 갈 수 없다고 상상해도, 아테네나 이스탄불과는 달리 그저 아쉬울 뿐 다른 감정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내가 아무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개의치 않고 자기 색깔대로 씩씩하게 잘 살아갈 친구인데 슬퍼할 게 무에 있겠는가. 그런생각이 들어서 그저 스치듯 가벼운 인사만 남기고 인류 문명의 최전선, 파리를 떠나왔다. ‘아비엥또(a bientôt, 또 봐)!‘ - P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