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위에서 높새바람이 불어오던 늦봄에 누나는 왔습니다. 엄마는말했습니다. 동생이 잘못되면 니 책임이야. 그래서 누나는 동생의 손을 꼭 잡고, 다른 곳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버스에 얌전히 앉아 곧장왔습니다.
마을로 들어오다 누나는 군인을 보았습니다. 학교도 보았습니다.
탑도 보았고, 산과 강도 보았습니다. 얼굴에 파리가 앉은 노인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누나를 째려보았습니다. 누나는 무서워서 동생의 손을꼭 잡고, 마구 뛰어서 왔습니다.
저녁에 할머니가 고깃국을 끓여줍니다. 국물 위에 뜬 비계에 털이송송 박혔습니다. 비계를 집어먹은 동생은 밤새 토합니다. 동생이 게워내는 걸쭉한 덩어리를 누나는 한 손으로 받아냅니다. 다른 손으로는 동생의 머리를 누릅니다. 더 토해봐, 빙섀야. 사람 잠도 못 자게다음날부터 누나는 학교에 다닙니다. 

----[비밀동화] - P9

높새바람이 마을을 통과합니다. 갈참나무 사이로 고온건조한 바람이 불어갑니다. 백엽상의 온도계 눈금이 올라가고 지붕들 위로 뜨겁고 가벼운 불씨들이 떠다닙니다. 머리에 풀잎을 꽂은 군인들이 피터팬처럼 불씨 사이를 날아다닙니다. 누나아앙아아. 동생이 누나를 부릅니다. 누나아아앙아아아아. 누나를 부르는 소리는 탑과 운동장과느티나무를 돌아 마을 곳곳으로 퍼져갑니다.
누나는 알지 못하지만 학교는 몇 년 뒤에 폐교가 됩니다. 누나가 덧셈뺄셈을 하던 칠판에는 군인들이 WXY를 그려넣고 동생이 맴을 돌던 이순신 장군 옆에서는 키 큰 풀들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보다 훨씬오랜 후에 누나는 폐교를 찾아와 울게 됩니다. 돌을 껴안고 울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 P10

어쩌면 누나는 잠깐 잠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공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빠가 엎드린 채로 상체를 일으켰다 몸을 돌려 자리에 눕는 게 보입니다. 누나는 천장을 보고 누워 있기 때문에 그것은곁눈 시야로, 검은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곧이어 엄마가 팬티를 올립니다. 누나는 자리에 누워 골목의 발소리까지 다 듣고 있었지만 엄마 아빠한테선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걸 압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누나는 종종 그날을 회상하게 됩니다. 단칸방에서 어린 남매를 키우던 젊은 부부의 너무 고요한 교합을, 상체를일으키고 속옷을 올리던 단 두 동작, 그 숨죽인 움직임이 주던 기이한슬픔을 생각하게 됩니다. 누나는 어린아이였고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날 밤 천장을 보고 누운 누나의 얼굴에선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습니다. - P16

단칸방에 찾아온 무수한 밤들 중 한 날에 회수는 생겨났습니다. 일을 시작하려던 때에 회수를 가진 엄마는 살기 싫은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엄마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누워만 있습니다. 조금 기운이 나면 엎드려서 웁니다. 조금 더 기운이 나면 누나한테 시비를 겁니다. 누나가대답을 늦게 하거나 방문을 열어놓거나 비누에 머리카락을 묻히면 냄비들을 모두 꺼내 납작하게 밟아버립니다. 누나를 사등분으로 접은뒤 싱크대 속에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러다 정상으로 돌아오면 엄마는누나 볼에 미친 듯이 입술을 비빕니다. 미안해, 미안해. 누나가 흙을묻혀오고 머리카락을 떨어뜨려도 마구 따라다니며 칭찬을 합니다. 누나는 같은 행동을 하면서도 엄마 눈치를 보는 아이가 됩니다. 자신을칭찬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선 금세 기가 죽는 아이로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남의 칭찬을 끌어내기 위해 기를 쓰며 살게 됩니다.
- P17

희수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엄마가 열무단을 들어 누나 등을 때리기 시작합니다. 열무는 단단합니다. 열무의 흙들이 누나의 머리카락을 파고듭니다. 열무가 다 흩어지자 엄마는 자리에 주저앉아 웁니다. 누나와 희수는 가만히 앉아 엄마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립니다. 엄마는 꺼이꺼이 웁니다. 누나는 희수가 휘젓다만 허공에 말풍선을 띄우고 ‘꺼이꺼이‘라고 씁니다. 엄마가 우는 건자기 때문이라고 누나는 생각합니다.
한 번씩 꺼이꺼이 울고 나면 엄마는 며칠 동안 웅크리고 누워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빠는 밥상을 펴놓고 앉아 일을 하다가 희수를 업어달래고, 희수가 잠들면 누나에게 줄 밥을 볶습니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노려보다 베개를 던지며 소리를 지릅니다. - P18

토요일입니다. 백엽상에서 맴을 돌다 정글짐으로 건너갔던 희수가긴 돌 위에 엎드려 있습니다. 누나는 친구들과 곤충채집 숙제를 해야합니다. 누나는 죠리퐁 한 봉지를 뜯어 희수에게 쥐여줍니다. 천천히먹어.
그래도 희수는 자꾸 누나를 따라오려고 합니다. 누나야, 나도 갈래.
나도 고기 잡을래. 우리 고기 잡으러 가는 거 아니야, 빙섀야. 누나는긴 돌 위에 희수를 밀쳐 앉힙니다. 야, 빨리 가야 돼, 친구가 누나를재촉합니다. 누나앙, 나도 갈래. 희수가 징징거리며 다시 일어섭니다.
아! 누나의 책가방을 잡던 희수가 나동그라집니다. 흙바닥 위로 죠리퐁이 쏟아집니다. 누나아앙아 누나는 친구들과 서둘러 다리를 건닙니다. 누나아앙아아 돌아보니 희수가 등을 구부리고 울고 있습니다. 울면서 죠리퐁을 한 알 한 알 봉지에 주워담습니다. 주워담다가다시 누나 쪽을 보며 웁니다. 울다가 다시 쪼그리고 앉아 죠리퐁을 주워담습니다. 그러다 다시 엉덩이를 들고 누나를 부르며 웁니다.
여름 해는 깁니다. 긴 돌 위에는 희수가 없습니다.  - P23

절터 위로 낙엽이 지고 눈이 오고 또 봄이 옵니다. 금줄을 두른 사람들이 드디어 무릎을 펴고 절터에서 캐낸 것들을 정리합니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금줄을 두른 사람들이 카메라에 대고얘기합니다. 출토된 기와편이나 석탑의 양식으로 미루어 절이 10세기경에 세워졌다고 얘기합니다. 발굴된 유물이 모두 13세기 중반의 것이고 그 이후의 유물은 단 한 점도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절은그즈음에 폐사된 뒤 한 번도 복원된 적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금당지와 강당지의 흙이 모두 불에 탔고 퇴적물에 목탄의 흔적이 있으며 마을이 몽고군과의 접전지역이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들은 절이 몽고 침입시 몽고군에 의해 전소되었다고 정리합니다. - P33

높새바람이 전언을 실어옵니다. 누나는 돌축대에 혼자 앉아 귀를기울입니다. 바람이 산을 넘어 불어와 절이 불에 타던 날, 큰스님들은담담하게 열반에 들어 사리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개‘자에도 못 간 젊은 승려들은 새까맣게 탄 몸 그대로 절에 남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절에 살면서 예불을 드리고 향을 피우고 마을을 돌며 탁발을 합니다. 돌축대에 나란히 서서 마을을 바라보고 느티나무 아래에서 물을 마십니다.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소리없이 걸어가며 저물 무렵이면 줄을 지어 지붕 없는 절터로 돌아옵니다. 한데에서 오래 살아 머리 위에선 풀이 자랍니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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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정전
최은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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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미와함께 한주간을 보냈다. ‘눈으로 만든 사람‘,‘목련정전‘을 또 읽었고, 장편‘아홉번째 파도‘를 읽었고 첫 소설집‘너무 아름다운 꿈‘을 읽고있는 중이다. 거꾸로 만나는 작가의 그간의 글들이 서늘하고 뭉클하면서 단단하다. 모든 편들의 글에서 화자가 되었다가 독자가 되기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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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의 길이는 4.8킬로미터였다. 산 끝에 절벽이 있었고 도로는 그위로 나 있었다. 절벽길 아래는 바다였다. 십여 년 전에 생긴 이 해안도로엔 수만 명의 이름이 새겨진 탑이 있었다. 새로운 천 년이 시작되던 날, 사람들은 탑을 세우고 그 앞에 타임캡슐을 묻었다. 기한을 백 년으로 할지 천 년으로 할지 이견이 있었지만 캡슐 개봉 시기는2100년으로 정해졌다.
60킬로미터에 가까운 해안선을 갖고 있는 이 도시에서 해안도로는일부 구간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떠오르는 해를 보고싶을 때 다른 곳이 아닌 해안도로로 달려갔다. 기념공원 앞에 차를 세우고 해송 사이로 이어진 산책로를 걸었다. 탑 앞에서 소망을 되뇌는것도 잊지 않았다. 가로등과 키가 비슷한 설치대에는 바다와 해를 표현한 깃발이 걸려 있었다.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는 시의 심벌이었다.
해는 해안도로의 전 구간에서 나부꼈다. 전망이 좋은 바위 위에는 해 - P6

안 초소가 있었고 기암 괴석들 사이에는 아주 작은 해변이 있었다.
바다에 사는 새들이 해풍과 함께 도로 위를, 이상한 바위들과 초소와탑 사이를 날아다녔다.
수온이 다른 해류들이 만나 일정한 방향으로 쉼없이 움직이는 곳이었다. 바다의 성질을 간직한 석회암이 산속에 동굴을 만드는 곳이었 그곳에서 해는 매일 떴다. 매일 지기도 했다. 도로는 산과 바다사이의 절벽 위를 달렸고, 북위 37도 동경 129도 안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 해안도로의 북쪽 끝에서 출발하면 차로 십 분이 걸리는곳. 걸으면 한 시간 뛰면 삼십 분 그렇게 도착할 수 있는 해안도로의남쪽 끝에 어항이 있었다. - P7

송인화는 아직까지 유리골 꼭대기에 올라가본 적이 없었다. 코끼리산에서 건너다보거나 어라항 회센터 앞에서 올려다본 게 전부였다.
산비탈에 겹겹이 올라앉은 집들은 산언덕의 칠부 능선까지만 이어져있었다. 그 위는 텃밭과 공터였다. 공터로 남아 있는 유리골 정상은오래전에 사형장 터였다. 몇백 년 전, 동해안 수군의 죄수들은 포진이있던 코끼리산 뒤편으로 끌려와 재판을 받았고 대부분 유리골 정상에서 사형을 당했다. 그래서인지 척주 사람들은 마을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사형당한 죄수들의 원혼 탓으로 돌리는 버릇이 있었다.
송인화는 유리골 정상을 볼 때마다 그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마지막 숨을 쉬었을 죄수들을 습관처럼 떠올렸다. 오래전의 사형장 흔적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유리골 정상은 지금 지진해일 대피소로지정되어 있었다. 어라진 일대의 골목골목에는 지진해일 대피로를 가리키는 화살표들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고 그 화살표들은 모두 유리골 정상을 향했다. 척주시 재난안전대책본부가 관리하는 긴급대피장소, 오래전 숱한 사람들의 목이 꺾였던 곳. 그 유리골과 코끼리산을잇는 산중턱에 바다를 보고 서 있는 상이 하나 있었다. - P30

척주를 떠나기 전날 밤이었을 것이다. 송인화는 은남 마을로 가 하경희 옆에서 하룻밤을 잤다. 밤새 울었던 것도 같고 아버지 장례식 때못 잔 탓에 밤새 잠만 잤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더이상 진료소에 못놀러온다는 게 아버지의 죽음만큼이나 슬퍼서 밤새 마음이 쓰렸던 기억은 났다. 은남 해안가에 놀러갔다가 화장실을 찾아 보건진료소로들어갔던 중학생 때 이후로 하경희는 송인화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던 타인이었다. 송인화는 보건진료소의 집기부터 종이 한 조각까지그 안에 있는 것들이 그냥 다 좋았다. 장래희망이 보건진료소 직원으로 바뀔 정도였다. 동진아파트에서 탈출해 은남 바다에서 사는 게 인생 목표라고 하경희한테 정기적으로 고백을 하기도 했다. 바다와 진료소에 무턱대고 마음을 빼앗긴 외로운 여자애를 하경희는 안쓰러워하기도 하고 기특해하기도 했다. - P52

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꽃냄새가 송인화를 감싸왔다. 송인화는 지하에서 내내 숨을 참고 있었던 사람처럼 허리를 굽히고 숨을 몰아쉬었다.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하다가 송인화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라일락 덩어리들이 햇빛을 끌어모았다가 튕겨내며 눈앞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겨울에 보면 저게 라일락 나무인 걸 또 까먹겠지, 송인화는 생각했다. 그러면서 조금 울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 이해할 수없었다. 의료원 앞 사거리 일대를 막처럼 덮고 있는 이 슬픔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채로 송인화는 미세한 통증만을 느꼈다.
해가 지는지 빛이 한 겹씩 사라져갔다. - P57

"부모 잡아먹고 서방 잡아먹고 자식까지 잡아먹을 년"
송인화는 동작을 멈추고 천천히 노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복장에서 내장을 다 훑어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년. 잡어만도 못한 년. 냄새나는 년. 부모 자식 서방 다아아아아아 죽일 년."
노인은 정확히 송인화의 눈을 쳐다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 말들은 어떤 필터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송인화의 몸속에 흡수되었다. 송인화는 꼼짝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몸의 반응은 몇 초 후에 왔다. 미처 어찌할 새도 없이 후드득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송인화는 유통기한이 지난 약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서 폐의약품 수거함에 던져넣었다. 번들거리는얼굴을 닦지도 않고 보란듯이 약들을 분리했다. 허선생이 흥분하는노인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 P72

해가 지기 시작하자 공동 복장 위의 구름이 색을 바꾸었다. 붉은구름들은 해일처럼 빠른 속도로 코끼리산을 타넘었다. 등대에 불이들어온 걸 신호로 방송수신탑에도 불이 켜졌다. 뒤이어 유리골의 집들도 하나둘 불을 밝혔다. 태양광이 사라지자 여래상도 어둠 속으로모습을 감추었다. 송인화는 자신과 서상화의 모습이 점처럼 작아지는것을 느끼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는 맞은편 어둠을 바라보았다. - P74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제일 안쪽 평상에 앉자 모든 소음을 집어삼킬 듯 물소리가 거세게 들려왔다. 저만치 계곡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소나무 줄기가 평상 바로 옆을 지나며 위로 뻗어 있었다. 젖어 있어서인지 나무줄기에서는 송진 냄새가 짙었다. 소나무잎에 매달린 물방울들이 닿을 듯 가까이에서 흔들렸다.
"좋다...."
숲을 보던 송인화가 말했다. 감자전과 도토리묵이 나올 때까지 둘은 물소리를 들으며 말없이 계곡을 내려다봤다. 음식이 상에 놓이자송인화가 이쪽으로 몸을 돌리며 턱을 쓱 닦았다. 그제야 윤태진은 송인화가 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좋은데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는 듯 송인화가 멋쩍게 웃으며 젓가락을 집었다. 그러더니 "미쳤나봐" 하면서 또 턱을 닦았다.
평상 난간 아래쪽에는 다육이가 심어진 기다란 장화 화분이 있었다. 닭백숙에 넣는 황기 냄새가 희미하게 깔려 있었고 테이블을 덮은흰 종이 위로 작은 벌레들이 날아왔다가 다시 날아갔다. 모자를 벗으며 단체 등산객들이 들어왔고 옥수수 찜통에서 올라온 김들이 쉬지않고 창유리에 서렸다. 손을 뻗으면 닿는 테이블 맞은편에는 송인화가 있었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둘 다 알지 못하던 때였다. 양손에 젓가락 하나씩을 들고 감자전을 가르는 송인화를 보면서 윤태진은 생각했다. 이 여자가 옆에서 이렇게 이유 없이 눈물을 글썽여준다면, 그러면 흔들리지 않고 갈 수도 있겠구나,
- P116

윤태진은 침대맡에 놓인 갈색 약통에서 알약 네 개를 꺼냈다. 송인화와 헤어지고부터 수치가 다시 나빠져 먹기 시작한 호르몬제였다.
윤태진은 M자가 쓰여 있는 흰색 정제를 내려다보면서 그동안 자신의몸에 들어왔던 약들을 떠올렸다. 눈두덩이 붓고 염증이 심해서 먹었던 스테로이드 경구약 돌출된 안구에 결막 출혈이 올 때마다 맞았던스테로이드 주사제 대가처럼 따라온 부작용으로 밤마다 근육이 비틀리던 일, 피를 뽑아 호르몬 검사를 하고 수치 확인을 하는 지난한 시간들을 지나오면서 윤태진은 일반인들보다 두세 배는 강하게 정신줄을 잡고 있어야 일반인들과 엇비슷한 생활이 가능했다. - P121

널찍한 탕 냄비 두 개가 각각 테이블에 올려졌다. 이창규와 김순영이 왼쪽 테이블에, 김승희와 송인화와 서상화가 오른쪽 테이블에 앉았다. 육수가 끊자 주인이 살아 있는 낙지 두 마리를 들고 왔다. 뜨거운 냄비 속에 들어가자 낙지는 온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무와 야채를휘저으며 요동치던 낙지는 밖으로 다리를 뻗어 냄비 손잡이를 휘감았다. 그냥 두면 냄비 밖으로 기어나올 것 같았다. 송인화는 입술을 물며 낙지의 움직임을 눈으로 좋았다. 저렇게 살아 있으니, 얼마나 맛있을까. 저렇게 살아 있는데, 왜 꼭 익혀 먹어야 할까. - P143

오징어 철이었다. 울릉도 근해로 나가있던 오징어잡이 배들이 들어오면 송인화는 일주일에 한 번은 아침잠을 포기하고 어항으로 나갔다. 채낚기 오징어 입찰이 한창인 어판장을 지나 2호집으로 가면주인이 오징어 내장을 받아뒀다 탕을 끓여줬다. 방금 죽은 오징어의내장은 짠내도 없어 입으로 들어가자마자 부드럽게 녹았다. 오징어내장탕에 맛을 들인 이후로 송인화는 씹는 게 거추장스럽게 느껴져오징어를 잘 먹지 않았다.
새벽 어판장의 외침 소리를 들으면서 칼칼한 내장탕을 먹다보면 이동네 어딘가에서 서상화가 아직 아침잠을 자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들었다. 예전엔 버리는 고기라고 안 먹었는데 이제는 비싸서 못 먹는다며 곰칫국 얘기를 하던것도 떠올랐다. - P171

산속 고갯길로 들어서자 차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포장만 되어 있을 뿐 댓재는 구불구불한 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경사 높은 산길이었다. 운전이라면 도가튼 송인화였지만 핸들을 이리 꺾고 저리 꺾으며다리에 힘을 주다보니 금세 목이 뻣뻣해져왔다. 와이퍼 때문에 시야도 어지러운 상태였다. 맞은편에서 가끔씩 대형 트럭이 내려올 때마다 송인화는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속도를 늦췄다. 저곳만 돌면 정상이 보이겠지 하면 다시 굽은 길이었고 저곳만 돌면, 하고 올라가면또 길이었다. 올라가도 올라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비가 그치고 몸이 다 굳은 다음에야 송인화는 정상으로 보이는 곳에 차를 세울 수 있었다. 산꼭대기에는 작은 휴게소 건물 하나와 댓재‘라 새겨진 대형 비석이 있었다.
송인화는 차에서 내려 비석 앞으로 걸어갔다. 한여름인데도 댓재정상엔 차게 느껴지는 바람이 불어왔다. 비석 아래쪽에는 작은 글씨로 ‘덕왕산 댓재-두타산‘이라 쓰여 있었다. 고개를 드니 비석 너머로 산줄기가 겹겹이 펼쳐져 있고 구름이 닿을 듯 낮게 내려와 있었다.  - P178

"무더위 속 소나기, 동해안 비‘
휴대폰 화면에 날씨 알림이 떠 있었다. ‘동해안 비‘라는 말을 보고송인화는 비로소 울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들어도 가슴 아픈 지명, 동해안.
송인화는 우산도 가방도 놔둔 채 울면서 운동장 너머 밭으로 걸어갔다. 감자밭을 지나고 콩밭을 지나 대마밭으로 걸어갔다. 송인화는키 큰 대마 줄기를 휘저으며 밭 한가운데로 갔다. 빽빽하게 치솟은 대마잎에 몸을 묻자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비에 젖은 이파리들이 모든걸 잊게 해줄 듯 아찔한 향을 내려보냈다. 송인화는 층층이 펼쳐진 잎들에 얼굴을 묻고 몇 년 동안 어디서도 풀어내지 못한 울음을 울었다.
목이 쉬도록 울었다. - P184

아빠가 모는 덤프는 브레이크도 정상이 아니었지만 고장이 나도 바로 수리되는 게 아니었다. 어떤 아저씨들이 정비를 올리면 바로 수리가 되었지만 어떤 아저씨들이 정비를 올리면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이 돌아왔다. 하루에 맞춰야 되는 물량이 빡빡해 시간은 잘나지 않았고 그러면 아빠는 정비가 접수될 때까지 불안한 마음으로차를 몬다고 했다. 덤프 운전을 오래 한 아빠는 브레이크가 말을 안들을 때마다 임시로 처방하는 아빠만의 노하우가 있었다. 그래도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는 조마조마하다고 했다. 비가 와서 노면이 흙탕뻘이 되는 날은 저 아래 크러셔 건물까지 살아서 내려갈 수 있을까,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고도 했다.
서상화를 광산에 데려간 뒤로 아빠는 광산 얘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그때 봤던 얼굴 까만 아저씨 있지, 거기 슬러그 쌓여 있던 자리에말이야, 하면서, 서상화가 기억하는 35 광구의 풍경은 열한 살 여름방학 때의 며칠과 그후에 아빠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혼합돼 있었다. 하지만 광산을 떠돌던 분위기만은 단 며칠이었다고 해도 서상화가 직접느낄 수 있었다. - P223

흰색 안전모와 노란 안전모는 같은 공간에서 작업 배차를 받고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고 똑같이 동진시멘트라는 곳으로부터 작업 지시를 받았지만 소음과 분진이 심한 곳에 배치되는 것은 거의 노란 안전모들이었다. 흰색 안전모들은 안전과에서 얼마든지 방진마스크를 갖다 쓸 수 있었지만 노란 안전모들은 분진이 많은 곳에 배치되는데도한 달에 열다섯 개 이상의 마스크를 쓸 수 없었다. 작업복과 귀마개와 안전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노란 안전모들이 마음껏 가져갈 수 있는 건 목캔디뿐이었다. 그런 걸 감수하고 일을 해도 아빠가 받는 임금은 흰색 안전모의 반도 안 되었다. 잔업을 하지 않으면 기본적인 생활비조차 댈 수 없는 금액이었다.  - P224

아빠와 동료들이 주춤하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자신들이 먼저 먹는게 당연하다는 듯 흰색 안전모들이 식판을 들고 앞으로 가서 섰다. 밥을 먼저 먹지 말라는 건 서상화의 초등학교 4학년 교실에서도 좀처럼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날 서상화가 아빠의 얼굴에서 본 것은 멸시받는 게 만성이 된 사람의 표정이었다. 누군가가 일터에서 매일매일 오랜 세월에 걸쳐 인격적 모독을 당한다는 것. 그게 내 가족이라는 것. 그 사실이 사람의마음을 얼마나 휘저어놓는지를 서상화는 뭐가 뭔지 모르는 채로 먼저느껴버렸다. 중학생이 되고부터 서상화는 광산 쪽으로 발길을 돌리지않았다. 아빠는 나이 어린 정규직한테 쌍욕을 듣고 오는 날도 있었고덤프에서 돌을 떨어뜨렸다고 주먹질을 당해 입술이 터져서 오기도 했다. 출근하는 아빠의 뒷모습이 보기 싫어 서상화는 학교도 일찍 갔다.
술만 먹으면 아빠가 중얼거리던 ‘하청 주제‘라는 말을 크러셔에 넣어버리고 싶었다. - P225

고용노동부의 판정은 아빠가 방진마스크와 귀마개와 안전화를 펼요한 만큼 얼마든지 갖다 쓸 수 있다는 말이었고 터무니없었던 임금대신 정당한 보수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전한 덤프를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브레이크가 고장나지 않은 덤프, 내리막길에서 시동이 꺼지지 않는 덤프.
하지만 판정의 여운은 하루도 가지 못했다. 노동부 판정이 나온 다음날, 동진시멘트는 하청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했고 하청업체는 아빠와 동료들을 전원 해고했다. - P228

여의도불꽃축제 때였다. 밤하늘에서 연이어 터지는 불꽃은 서상화가 봤던 어떤 광경보다도 멋졌다. 머리 위에서 불꽃이 터질때마다 심장도 같이 터지는 것 같았다. 계속 보고 있으니까 눈물이 날것도 같았다. 서상화는 입구에서 집어온 행사 포스터를 펼쳤다. 거기에는 불꽃놀이를 주최하는 화약 제조회사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서상화는 불꽃이 뿜어져나오는 듯한 모양의 대문자 H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열한 살 서상화가 35 광구 대기실에서 수없이 따라 그렸던 로고였다.
울지 않으려고 눈을 올려 떠도 꼭 한줄기는 흐르는 눈물이 있었다.
안경 코받침에 한참 숨어 있다가 콧방울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눈물 불꽃이 터지는 한강에 앉아 있자 35 광구는 실재하지 않는 세상인 것만 같았다. - P245

문서 더미가 발 위로 쏟아져내렸다. 그렇게 몇 겹을 더 뚫고난 뒤였다. 안쪽 구석으로 보따리 두 개가 보였다. 황금색 보자기에싸인 뭉치를 보자 저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태진은 다가가 보따리를 풀었다. 한 보따리에 여섯 권씩 총 열두 권이었다. 그 안에 척주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윤태진은 그중 한 권을 집어서 펼쳤다. 누가 봐도 한 사람의 필체였다. 윤태진은 다른 한 권을펼쳤다. 주소도 생년월일도 없어 누군지 확인할 수 없는 이름들이 아래로 길게 적혀 있었다. 윤태진은 또다른 서명부를 펼쳤다. 서명란에서명이 없었다. 한 사람이 속도를 내서 친 것으로 보이는 동그라미만이 서명란을 채우고 있었다.
척주 사람 96.9퍼센트의 이름이 적혔다는 서명부 뭉치 앞에 윤태진은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허무할 정도로 엉터리로 작성된 서명부 - P254

였다. 정부가 척주를 원전 건설 후보지로 선정하면서 주민 수용성의근거로 삼은 그 서명부에서는 조작을 위한 어떤 고심도 치밀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 P255

파도가 잔잔했다. 바다와 하늘 색깔이 구분이 안 되는 걸 보니 가을한복판으로 들어선 듯했다. 약사여래상 앞의 대형 기도단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삼은사에서 약사재일 법회가 있는 날이었다.
최한수는 주지스님 방에 들어가 있었고 오병규는 아직 도착 전이었다. 최한수의 부친은 오랫동안 삼은사 신도회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척주에서 최한수가 오병규보다 유일하게 더 대접받는 곳이 삼은사였다.
윤태진은 약사여래상 앞에서 염주를 돌리거나 절을 하는 사람들을보다가 약사전 쪽으로 걸어갔다. 삼은사는 불교 주류 종단으로부터통속적이고 기복적이라는 말을 듣는 작은 종단의 사찰이었다. 하지만본찰인데다 기도처로 유명해 신도 규모는 여느 대형 사찰 못지않았다. 약사전에서 기도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면 어진에 너울성 파도가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 P268

윤태진은 마이크 소리가 웅웅대는 경내를 벗어나 유리골 축대를 따라 걸어갔다. 담배를 꺼내다 요즘 너무 자주 피운다는 생각이 들어 유태진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무리를 하면 안 됐다. 피곤해도 안 되고 스트레스를 받아도 안 되고 약 먹는 걸 걸러도 안 됐다. 골탕에 빠진 이후로 윤태진은 단 한순간도 몸에서 자유로워져본 적이 없었다.
지병이 없는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몸이 아픈 사람들이 하는 생각은하나였다. ‘안 아팠으면 좋겠다.‘
해가 지면서 어항 방파제 쪽에서 피노을이 몰려왔다. 저무는 빛속에 서서 윤태진은 자신의 등에 붙어 있는 두 덩어리의 암흑에 대해생각했다. 다시는 그 검은 굴 속에 갇히지도, 그 검은 웅덩이 속에 빠지지도 않으려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윤태진은 붉은빛을 받고 있는약사여래상을 돌아봤다. 인간을 가장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것도약이었고 순간적으로 구원할 수 있는 것도 약이었다. 척주 땅에서 시멘트보다 강하고 시멘트보다 독한 것. 완치 가능성 없는 인간들의 비명을 길들일 가장 강력한 진통제 - P274

몇 미터 허공 위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듯했다. 광산에서 공장으로공장에서 다시 함으로 이어지는 컨베이어 벨트 아래에 서서 윤태진은시간을 확인했다. 저쪽의 어항 방파제 불빛이 다른 세상의 것처럼희미하게 흩어졌다. 동진 부두에는 불빛이 없었다. 덤프에 폐타이어를 싣고 있는 로더에서만 간혹 빛이 번쩍이다 사라질 뿐이었다. 해무가 끼는 날은 그마저도 보이지 않을 듯했다.
부두 한쪽에 산처럼 쌓여 있던 폐타이어 조각들이 로더의 작업으로조금씩 허물어져갔다. 일본 선박이 쏟아놓고 간 폐타이어와 석탄재는덤프에 실려 35광구 야적장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석회석과 섞여 시멘트로 변신하고 나면 다시 항으로 내려올 것이다.
어라항 뒤편에 배경처럼 펼쳐진 동진 부두에 서서 윤태진은 몇 시간째 검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로더가 물건을 옮기며 규칙적으로 움직일 때마다 촉감이 연상되는 냄새가 건너왔다. 끈끈하다고밖에는 할수 없는 고무 녹는 듯한 냄새.  - P280

송인화는 외투를 여미고 속도를 내며 걷기 시작했다. 띄엄띄엄 선가로등은 어두컴컴했고 시커멓게 솟은 코끼리산에서는 바람 소리만들려왔다. 송인화는 뒤꼭지가 이상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의류수거함 뒤쪽으로 무언가가 후다닥 지나갔다. 고양이일 거야. 송인화는걸음을 좀더 빨리했다. 고양이가 아닐지도 몰랐다. 일행들과 헤어지길 기다리고 있다가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짧은 순간 송인화의 머릿속으로 수만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 P297

해초와 문어, 눈이 커다란 물고기, 무지개색 고래 한마리. 서상화가 그림이 그려진 담벼락 앞에 서서 몸을 숙였다. 유릿조각을 모아서붙여놓은 고래 눈은 색이 바랜 담벼락 그림에서 유일하게 쨍하고 빛나는 것이었다. 고래한테로 몸을 숙인 서상화가 상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빛깔이 바뀌는 유리 눈을 들여다봤다. 이 집에 처음 온 사람들은 다 한 번씩 고래와 눈이 맞는다고 하던 하경희의 말이 생각나 송인화는 웃었다.
은남보건진료소에서 길을 따라 죽 들어간 바닷가 끝 집이었다. 높지 않은 담에도 파묻힐 만큼 작은 슬레이트 지붕집이었지만 여름이면피서객들이 한 번씩 들여다보고 간다고 했다. 벽과 창호문 곳곳에 그려놓은 해바라기와 붓꽃과 새 들 때문이었다. 하경희가 남편과 몇 달에 걸쳐 만들었다는 마당의 나무 데크 위에 앉으면 바다와 돌섬과 마을 저쪽 끝의 등대가 한눈에 내다보였다. - P306

해가 넘어가면서 바다색이 조금씩 짙어졌다. 송인화는 맥주를 마시며 하경희가 해준 얘기를 들려주었다. 하경희의 아이가 저 자잘한 갯바위들마다 이름을 다 붙여놓았다는 이야기. 어느 겨울 돌섬 위의 갈매기들이 갑자기 사라졌던 이야기. 갈매기 소리가 소거된 바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적막하고 이상했었다는 이야기. 돌섬 뒤로 가끔씩고래가 지나간다는 이야기.
서상화는 별거 아닌 송인화의 말에도 테이블을 치며 웃고, 빨아들일 듯 눈을 맞추다가, 가만히 바다를 바라봤다. 서상화가 고개를 돌려바다를 볼 때마다 귓바퀴 안의 점이 도드라졌다. 복약상담을 하던 봄내내 보아온 점이었다. 어스름이 내리고 담 옆의 가로등이 켜지자 점은 귓바퀴 그늘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대신 서상화의 얼굴엔 또 안경그림자가 만들어졌다. - P309

송인화는 다시 의자에 앉아 양말을 벗기 시작했다. 서상화가 그제야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의자에서 내려와 송인화의 맨발을 감싸쥐었다. 서상화의 손이 맨살에 닿자마자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무언가가 관통해갔다. 발을 감싸쥔 자세 그대로 둘은 웃음을 멈추고 잠시숨을 몰아쉬었다. 서상화가 고개를 들어 송인화를 봤다. 상체가 올라왔고, 안경이 뺨에 와닿는 동시에 서상화의 혀가 입을 열며 들어왔다.
파도가 잠시 그대로 멈춘 듯했다.
얼굴을 떼고 닿을 듯한 거리에서 다시 본 서상화의 눈에는 송인화와 송인화 뒤로 펼쳐진 바다가 있었다. 송인화는 손을 올려 천천히 서상화의 안경을 벗겼다. 안경이 얼굴에서 떨어져나올수록 서상화의 눈에 물기가 번져갔다. 서상화의 눈 속 바다가 넘쳐흐르는 것을 보며 송인화는 울지 마, 중얼거렸다. 안경을 벗어도 울지 마. 목을 감싼 서상화의 손이 머리카락을 헤치며 더 깊숙이 들어왔다. - P312

서상화의 안경을 본 뒤로 송인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받지 못한 서상화의 마지막 전화가, 전화가 왔던 10월 15일 저녁 일곱시 사십삼분이라는 시간이 그 시간에 서상화가 어디에 있었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그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이 시시각각 송인화를 흔들었다. 서상화는 광산 흙과 바닷물이 엉켜서 질척대는 부둣가에 서있었다. 서상화는 붉은 흙으로 뒤덮인 광산의 어느 능선으로 걸어올라갔다. 서상화는 어둠이 내린 해변가에 서 있었고, 서상화는 햇빛이다 사라져버린 방파제 저쪽으로 자꾸만 걸어갔다. 그날 저녁 일곱시사십삼분 속에서 서상화는 매일 모습을 바꾸면서 찾아왔다. 그러다눈이 충혈된 채 조퇴를 하겠다는 오후로 되돌아갔고, 불안한 호흡으로 송인화 옆에서 걷기를 반복했다.
그날도 맑고 추운 날이었다. - P341

송인화는 바다와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한꺼번에 맞으며 고개를들었다. 광구 너머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새천년도로의 곡선이 보였다. 코끼리산과 유리골, 어항이 손에 잡힐 듯했다.
새벽이 오는 척주 바다를 보면서 송인화는 언젠가 서상화가 했던말을 떠올렸다. 아주 맑은 날엔 35 광구 꼭대기에서 울릉도가 보인다고 했다. 야간작업을 하다보면요. 오징어배 불빛이요, 수평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촘촘하게 정말 장관이래요. 광산 사람들은 그불빛을 보면 그래요. 울릉도 가는 고속도로라고.
송인화는 수평선을 따라 펼쳐진 불빛들을 보면서 소리내어 말했다.
"상화야, 저기, 울릉도 가는 고속도로."
불빛들을 지우며 수평선 끝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라왔다.
송인화는 밝아오는 바다를 보면서 비로소 목을 놓고 울기 시작했다.
서상화가 없는 세상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 P357

는 흥미 있는 말을 들을 때나 장난기가 발동할 땐 눈밑애교살에서부터 반응이 왔다. 초롱초롱하게 뜬 눈 아래로 웃음기가 삭 번져가면 송인화는 또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겠구나 생각했다. 상화는 이모티콘도 꼭 자기 같은 캐릭터들만 골라서 썼다. 상화와 그동안 주고받은 메시지 창을 펼치면 척주를 몇 바퀴나 돌고도 남을 길이였다. 메시지 창안에서는 서상화가 보낸 이모티콘들이 여전히 꺅 소리를 내면서 뛰어오르기도 하고 보고 싶다면서 엉엉 울기도 했다. 그것들은 언제까지나 꺅과 엉엉을 반복하며 그 안에서 움직일 것이었다. - P360

송인화는 척주 시내를 멍하니 걷고 또 걸었다. 기계적으로 간판들을 읽으면서 걷기도 했고 땅만 보면서 걷기도 했다. 걷다보면 소망의 탑 사진이 붙어 있는 네모난 지중변압기가 나와 송인화는 그 앞에 한참씩 서 있었다. 식당에 들어가 물회를 시키고는 커버가 씌워진 벽걸이 선풍기만 올려다보다 그대로 나오기도 했다. 어느날은장학문구사와 다이소와 현대서점과 봉황관광을 보면서 걸었고 어느날은 미스터피자와 홈플러스와 홍채안경원과 남양유통 앞을 지났다. 별미식당, 월드스튜디오, 녹십초알로에, 예당피아노, 제일조은약국, 김내과, 보광당, 김밥천국, 배스킨라빈스, 백두대간호프, 영동농원, 장뇌건강원……… 송인화는 그런 간판들이 붙은 건물들 사이를계속 걸었다. - P360

뉴스와 신문에는 이십 년 가까이 멕소닐을 밀수해온 사이비 종교집단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일 킬로그램으로 칠십만 명 이상을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게 할 수 있는 멕소닐이라는 약이 연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죽을 것 같은 통증이 올 때 어떤 극적인 효과를 주는지도회자됐다. 멕소닐의 최대 제조국에 대한 얘기, 의료용이 아닌 마약용으로 쓰일 때의 유통 경로, 제약회사의 판촉 경쟁으로 인한 의사들의과다 처방 얘기들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공비 침투 때 이후로 척주가 이렇게 TV에 많이 나온 건 처음이라며 신기해했다.
폐타이어 배로 밀수한 약이 동굴에 보관돼 있었다는 게 밝혀지자사람들은 그게 이십일세기에 가능한 일이냐고 물었다. 약과 함께시신 몇 구가 나왔는지, 동굴에서 단체로 무얼 했는지, 그런 자극적인 얘기들 속에서 척주의 다른 이야기들은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송인화는 뉴스에 나오는 그 얘기들이 모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 P361

나뭇잎들은 이제 거리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송인화는 아직도 은행잎이 남아 있는 곳 하나를 알고 있었다. 보건소 은행나무 옆에 서 있는 소나무였다. 은행나무보다 키가 작은 그 소나무위에는 가을에 떨어져내린 은행잎들이 여전히 노란 색종이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눈이 내리고 다시 눈이 녹는 동안에도 소나무 위의 은행잎들은 거짓말처럼 그대로 있었다. 송인화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상화의 이름을 불렀다. 푸른하늘은하수를 잘하는 상화. 샤파 연필깎이를 십년 동안 고쳐 쓴 상화, 임연수김밥을 좋아하는 상화. 보건소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라가던 상화, 괘종시계보다 키가 큰 상화, 여덟 평짜리 약국에서 소아용 시럽을 따르며 살 수도 있었을 상화의 이름을. - P363

눈이 그치고 하늘이 갠 날 송인화는 오십천을 따라서 걸었다. 대기가 찼지만 햇빛이 많은 날이었다. 시멘트공장에서 동진 부두로 이어지는 컨베이어 벨트가 멀리 강 끝에서 부서졌다. 십팔 년 전에도 일년 전에도 몇 달 전에도 걷던 길이었다. 송인화는 강을 따라 걷다가문득 뺨이 따뜻해서 옆을 돌아보았다. 강물 위에 빛들이 내려앉아 자글거리고 있었다. 걸어갈수록 빛 무리가 왠지 자신을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송인화는 걸음을 조금 빨리해봤다. 빛무리도 같은 속도로따라왔다. 송인화는 다시 천천히 걸었다. 빛무리도 속도를 늦추며 따라왔다. 송인화가 걸음을 멈추자 빛 무리도 멈춰 섰다.
송인화는 그 자리에 서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송인화는 어른거리며 따라오는 그 따뜻한 것이 상화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송인화는 뺨으로 흐르는 것들을 그대로 둔 채 강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 P363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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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책에 실릴 소설들을 다시 살펴보는 동안 봄과 여름이 지났다. 추울 때 쓴 소설, 더울 때 쓴 소설,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쓴소설, 미안해하며 쓴 소설. 소설을 쓸 때의 마음 상태가 곳곳에숨어 있어 부끄럽기도 했고 혼자 웃기도 했다. 몇몇 인물의 이름을 입속에서 굴려보기도 했다. 목련과 라라, 나리. 그리고 미처 이름을 지어주지 못한 소년과 소녀, 여자와 남자들.
「목련정전」에 나오는 배 모양의 관을 생각하게 된 건 ‘주형석관(舟形石棺)‘에 대해 쓴 강우방 선생님의 글을 읽고 나서부터다. 관을 배 모양으로 만든다는 것, 배 모양을 한 관이 정말형상으로 남아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당장 앉아서 긴 글을 쓸 수 있을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글을 만나는 건 언제나 행복한 일이다. 같은 소설 속, 활과 숯과 칼자루가 된 나무들 이야기는 양신의 『단연총록』에 나오는「생구자설(龍生九子說)」에서 떠올렸음을 덧붙여둔다.

무인정찰기 RQ-105는 추락 직전 마지막 영상을 송신했다.
군 지휘소 지상 통제 장비 모니터에는 60도 각도로 기울어진낙엽밭이 담겨 있었다. 낙엽밭과 사선으로 맞닿은 하늘은 구름한 점 없이 깨끗했다. 잎을 다 떨군 맨가지만이 하늘 안으로 실금처럼 뻗어나가 있었다. 어디선가 빛이 새어 들어와 밭과 하늘에 물방울무늬를 만들었다. 기울어진 풍경 한쪽에 빈 벤치가있었다. 아직 누구도 앉았다 간 적이 없는 벤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산을 보며 놓여 있었다. 얼마인지 모를 시간이 지난뒤 그 위로 커다란 참나무 잎 하나가 날아와 앉았다. 나뭇잎은다시 바람에 실려 사각 정자 위로 내려앉았다. 둥근 해가 여러번 뜨고 졌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자 낙엽밭 위로는 눈이 내렸다.
---- [근린] - P160

그래서요?
나리는 개구리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단다. 다음 날부터 나리는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어.
어떡해요.
이제 개나리와 개구리에게 하루는 그냥 하루가 아니었다.
어떤 하루였는데요?
아기의 몸이 한 군데씩 생겨나는 하루였지. 팔다리가 생기는하루, 꼬리뼈가 자라는 하루, 콩팥이 익는 하루. 아가, 그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루하루란다.
---- [나리 이야기] - P182

모래알을 따라 한참을 내려갔어요. 물 위로 줄기를 내놓고나무들이 강에 서 있습니다. 강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 사이에누군가 다리를 놓고 있어요. 무지개처럼 예쁘고 폭신한 다리예요. 다리 이쪽에 한 여인이 있습니다. 꽃을 담은 소쿠리를 팔에걸고, 여인이 구름 위로 막 발을 내디뎌요. 저쪽 끝에서 누군가여인을 기다리는 게 틀림없어요. 신발코는 들려 있고요, 치맛자락이 설레듯 흩날리거든요. 여인의 볼에서부터 퍼져나온 무늬가 구름에 결을 만들어요. 여인이 웃고 있기 때문이에요. 여인이 웃으면서 걸어가요. 구름 위를 걸어서 저쪽으로 가요. 자꾸 저쪽으로 가요. - P188

그림 안에는 연못도 전각도 없었습니다. 극락조도 꽃비도 보이지 않았지요. 그림 안에는 달이 있었습니다. 달 주위로는 둥글고 얇게 빛의 띠가 퍼져나가고 있었어요. 나리가 마지막으로그린 건 달무리가 진 밤하늘이었습니다.
아이는 그림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쌍꺼풀이 짙은 크고 깊은 눈으로요. 그림 어디에서도 구름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림안에는 구름이 있었습니다. 아이는 알 수 있었어요. 나리의 마음을 흔든 것은 달이 아니라 달무리였습니다. 달무리로밖에는*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구름이었습니다. 아이는 방문을 열고뜰로 나왔습니다. 세상의 구름들이 한꺼번에 우는 것처럼 비가쏟아졌어요. 아이는 손을 뻗어 빗물을 만져보았지요. 어머니. - P189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임종 때가 되면 서쪽으로 누워 극락도를 바라보았습니다. 화공들은 불보살과 연못과 구름을 그렸지요. 그러나 나리의 구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리가 그렸던 그림들이 극락도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지요. 어느 외진사원의 먼지 쌓인 불단 뒤에 개구리들이 머물다 갈 뿐이었습니다. 달무리가 지는 밤에 개구리가 울면 8만 4천 명중에 한 명은 기도를 한다지요. 강물이 불지 않게 해달라고요. 개구리가오래 울면 나리가 슬퍼할 테니까요. - P190

곧 해가 뜰 시간이었다. 새벽어둠 속에서 검은 선으로 서 있던 나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해발 1,458 미터, 기상 실황판에 나타난 기온은 영하 20도였지만 체감온도는 그보다 한참 아래였다. 제욱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발밑에서 시작해시야 끝인 하늘과의 경계선까지, 파도처럼 펼쳐진 겨울 산맥들이 흰빛으로 덮여 있었다. 밤새 영하의 골짜기를 떠돌던 물 입자들이 나뭇가지에 얼어붙으면서 피운 상고대였다.
시야가 맑은 날은 동쪽 바다까지도 내다보이는 곳이었다. 운무가 자욱한 날은 봉우리들이 섬처럼 떠다녔다. 제욱은 발왕산정상에 서 있었다. 멀리 선자령의 풍력발전기와 넓게 펼쳐진목초지가 보였다. 목초지를 시작으로 조금씩 색깔을 달리하며
----[겨울 고원] - P193

며칠간 내린 비로 눈 상태가 좋지 않았다. 용평스키장 전 슬로프에서 보강 제설이 이어졌다. 겨울 시즌 행사 준비와 사고처리로 제욱은 야근이 잦았다. 사무실에서 밤을 보낼 때도 있었다. 담배를 피우러 사무실 발코니로 나가면 자동제설기가 뿜어내는 눈가루가 야간 조명 위로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제설기들은 슬로프 능선 곳곳에 서서 쉬지 않고 눈을 뿜어 올렸다.
흰 가루들은 밤새 발왕산을 안개처럼 채우다 흩어졌다. 발왕산정상에서 시작되는 가장 고지대의 슬로프, 레인보우에도 제설기가 돌고 있을 것이었다.
야간 작업을 마친 제설 팀이 퇴근하는 것을 보면서 제욱은병원으로 출발했다. 한 명은 무릎 십자인대 파열, 한 명은 어깨 - P199

와 팔 골절, 또 한 명은 하반신 마비라는 큰 부상을 입었다. 보험 처리를 위해 사고자들을 만나고 돌아오니 어느새 늦은 저녁이었다. 사고자들은 사고의 순간을 잘 설명하지 못했다. 제욱은 노인의 말이 걸려 혹시 시야 장애가 있지는 않았는지 물었지만 사고자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갑자기 중심을 잃었다고만 했다. 그냥 갑자기, 순식간에 넘어졌다고. 잡생각이 떠올라 집중도가 떨어진 건 아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쓸모 있는질문은 아닌 듯했다. 잠깐 사이에도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가는 게 사람 머릿속이었다. 그걸 알아채고 다시 설명할 수 있는사람이 많지는 않을 듯했다. - P200

금세 흩어져버리는 제설기의 눈구름을 볼때, 어두컴컴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골짜기와 라이트타워의 불빛을 번갈아 내려다볼 때, 제욱은 비눗방울 속에 들어와 있는느낌이 들었다. 모든 게 펑 터져서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산의 실체가 느껴질 때는 오직 심야 스키를 탈 때뿐이었다.
한밤에 산을 활강해 내려오다 보면 겨울 산의 컴컴한 여백들이제욱만을 감싸며 달려드는 듯했다. 어둠 때문에 시야가 좁아지는 대신 산 전체의 바람을 혼자서 누리는 짜릿한 순간이 오는것이다. 겨울에 맛보는 몇 번의 심야 활강을 위해 제욱은 봄과여름과 가을을 이 산골짜기에서 견디고 있는지도 몰랐다. 떠나고 싶어서 몸을 비틀 때쯤 겨울은 다시 왔다. 아이를 어르는 얼음 마녀의 주문처럼 겨울은 정말 매년 왔다.  - P208

산들이 푸르스름한 흰빛을 내보내면서고원 가까이 다가왔다. 밤새 피어난 상고대가 모습을 드러내려고 뒤척이는 것이 대기 가득 느껴졌다. 여명이 밝고부터 해가뜨기 전까지의 시간, 그들은 마침내 사방에 피어난 얼음꽃을보았다. 차고 시린 결정이 가지가지마다 매달려 능선을 덮고있었다. 겨울 새벽에만 볼 수 있는 꽃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둘은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잠깐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발왕산왼쪽 등성이로 해가 들고 있었다. 햇빛으로 덮인 산등성이 쪽나무들이 미세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산이 왜 저렇게 반짝이지."
필상이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꽃이 녹느라 그래."
불쏘시개로 드럼통 안의 숯 덩어리를 뒤적이며 사내가 말했다. 겨울 산속에 있다 보면 죽은 나무에도 꽃이 피는 것을 보게된다고 해가 뜨자마자 그 꽃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도 보게 된다고 햇빛이 서서히 산 아래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물이번지듯이 꽃이 지는 믿을 수 없는 풍경을 보면서 필상은 고백하듯이 사내에게 말했다.
- P216

봉산리 사내는 필상보다 하루 먼저 황탯집을 떠났다.
겨울 점퍼를 허리에 돌려 묶고 배낭을 멘 채 사내는 그들이건너왔던 송천교를 혼자 건넜다. 다리를 지나 걸어가는 사내옆으로 고원으로 올라가는 샛길이 보였다. 발왕산 쪽 길로 접어들면서 사내는 뒤를 돌아 손을 한번 흔들었다. 배낭 위로 솟아오른 탐침봉에 햇빛이 쨍 박히고는 곧 흩어졌다.
필상은 메토끼 귀를 잡고 산에서 덜렁덜렁 내려오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산막 앞으로 순간순간 스쳐가던 전짓불 빛과흙바닥에 엎드려 어린 아들의 신발께를 보았을 그의 어머니.
같이 인제에 가자 했을 때 강돌을 손에 쥐고 몸을 일으키던 모습과 꾹 다문 입으로 한참 동안 물수제비를 뜨던 그의 벗은 등을 생각했다. - P220

목나무 가지 사이였다. 야광 눈빛 두 개가 제욱을 보고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제욱은 알 수 있었다. 눈빛이 떠 있는 높이가 네발짐승의 눈높이가 아니었다. 그건 두발짐승의 눈빛이었다. 뒤를 돌아보면 안 돼, 망상이야, 중심을 잃을 거야. 제욱은눈빛을 보는 동시에 그렇게 생각했지만 갑자기 몸이 떠올랐고,
동시에 산비탈이 달려들었다.
야광 눈빛이 다시 보였던 걸 보면 뒤를 돌아봤던 것도 같았다. 이건 제욱이 RR-10 근처에 누워서 한 생각이었다. 달빛도없어서 하늘은 암흑처럼 검었다. 멀리서 야영객들의 소리가 들렸다. 비상용으로 챙겨왔던 무전기가 작게 삐삐거리는 소리도들렸다. 그러나 그것들은 멀리 있었고 제욱은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위쪽에서 눈이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제욱은 입술을 물며 눈을 감았다.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제욱은 검은 허공에 뚫려 있는 두 개의 야광빛을 보았다. 누군가 제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을때 제욱이 느낀 것은 두려움도 반가움도 아니었다. 살았다는 안도감이었다. 살았다. 중얼거리면서 제욱은 정신을 잃었다. - P224

마을로 들어서면 여섯 개의 산봉우리가 보였다. 산들은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에서 솟아나 마을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다.
봉우리들은 해발 5백 미터가 조금 넘었다. 공기도 구름도 그 위로 잘 넘어다니지 못했다. 마을은 바람이 없고 안개가 많았다.
산 경사면에서 미끄러진 공기가 밤새 마을을 떠돌다 아침이면산허리에 하얗게 차올랐다.
제이봉은 마을 제일 안쪽에 있었다. 다른 봉들과 달리 삼부능선쯤에 구릉지가 있었는데 산은 거기서부터 방향을 틀면서동물의 꼬리처럼 휘어져 내려와 제이봉 안쪽에 또 다른 공간을만들었다. 제이봉이 감싸고 있는 그곳은 분지 속의 분지, 골짜기 마을에서도 가장 깊은 골짜기라고 할 수 있었다. 
--- [백일동안] - P227

불안이라. 현장소장이 건축주한테 할 말은 아니었다. 강상기는 취한 소장을 차에 태워와 컨테이너 한쪽에 눕혔다. 제이봉에 걸려 있던 찬 안개가 밤공기를 타고 소리 없이 내려왔다. 강상기는 어둠이 내린 제이골을 천천히 훑었다. 낮에 다녀간 배목수의 털냄새가 제이골에 그대로 배어 있었다. 축축한 단백질냄새, 다른 수컷의 누린내였다. 강상기는 소주병을 따 들고는집터 여기저기를 돌며 소주를 뿌렸다.
- P238

그때 강상기에겐 어떤 생각들이 왔다 갔을까. ‘어린애를 놔두고 외간 남자랑 붙어먹는 그렇고 그런 여자 주제에 어디서
‘감히‘ 같은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아이의 아비가 아닌 다른남자의 품에 있는 여자들을 다 색출해서 찢어버리고 싶다‘는생각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강상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저 밑바닥에서 맴도는 생각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강상기는 다만 허 주임과같이 앉아 있는 게 너무 힘들어서 무작정 일어나 제이봉 안쪽으로 들어섰다. 성큼성큼 걷지라도 않으면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강상기는 그날 자신이 걸어 올라갔던 제이봉의 길들이 선명히 보였다. 옮겨 심은 자미화에 기대앉은채 강상기는 제이봉을 바라보았다. 한 남자가 휘청거리면서 산을 올라가고 있다. 그 뒤를 한 여자가, 배 속에 아이를 품은 한여자가 따라 올라가고 있다. 허 주임은 왜 그렇게 모진 말을 했을까. 허 주임을 찾으면 그는 꼭 묻고 싶었다.
- P247

치목이 끝나고 기둥이 세워진 날 큰비가 내렸다. 기둥 사이로 비계가 설치되고 들보가 올라간 날도 비가 내렸다.
목수와 일꾼들이 내려가고 혼자 남은 밤에 강상기는 덧집에앉아 비 내리는 집터를 내다보았다. 빗물은 들보를 덮어놓은방수포를 타고 내려와 그 아래의 강철비계를 두드렸다. 제이봉의 토사와 제이골의 진흙도 빗줄기와 함께 흘러내렸다. 강상기는 땅이 움직이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았다.
며칠 동안의 비에 다시 습기를 머금은 금강송들도 그의 등뒤에서 조금씩 움직였다. 금강송은 그의 집이 되기 전에 그와는전혀 상관없는 생물의 집이 되려는 것 같았다. 비가 모든 것을위협하고 있었다. 그는 하늘을 원망했다.
이곳엔 15 년 동안 이런 비가 내렸을 것이다. 강상기는 제이골 땅 밑 어딘가에서 빗물과 함께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를 허주임을 생각했다.  - P252

강상기는 자미재 대청에 반듯하게 누웠다. 이대로 몸을 누였다가 다시 일어나지 못해도 아무도 모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스름이 내려왔다. 강상기는 누운 채로 멍하니 서까래를 보았다. 그때 긴가민가한 기척이 느껴졌다. 강상기는 집도 땀을 흘리는가,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는 코를 킁킁거리며 기둥으로 다가갔다. 기둥을 쓸었더니 손바닥에 끈끈한액체가 엉겨 붙었다. 송진이었다. 강상기는 고개를 들었다. 송진은 배 목수가 흘린 체액이라도 되는 듯이 서까래와 들보 곳곳에서 배어 나와 기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강상기는 발밑에서부터 소름이 올라왔다. 송진이 흐르는 나무위를 새파란솜털들이 뒤덮고 있었다. 솜털은 천장과 처마, 기둥과 벽을 빼곡히 채우면서 자미재 전부를 장악하려는 중이었다. - P261

불꽃과 습기의 경계를 가늠할 수없는 채로 집은 고약한 연기만을 쉬지 않고 뿜어냈다. 상기는 연기에 먹힌 금강송이 우지끈 부러지면서 대청 위로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았다. 자미재는 붉게 타오르는 대신 시커멓게스러지고 있었다.
그때 강상기의 눈에 빛깔 하나가 스쳤다. 강상기는 눈을 크게 떴다. 무너지는 자미재 옆에 창창히 서서 잎을 펼치고 있는것은 자미화였다. 완성된 자재를 둘러보면서도 강상기가 시선을 피하며 외면했던 나무, 자미화는 검은 연기에 장단을 넣듯가지를 풀어 헤치면서 일렁였다. 강상기는 그 가지마다 꽃이 피어난 것을 보았다. 꽃은 세상에서 가장 진한 거름이라도 받아마신 듯이 그가 이제까지 봤던 어떤 자미화보다도 붉었다.
"더러워. 더러워."
꽃을 본 강상기는 더는 서 있지 못하고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한여름 밤이었다.  - P263

주인아주머니가 소의 머리와 목을 껴안았고 류가 소의 엉덩이와 뒷다리를 잡았다. 마취제는 없었다. 연의 방호복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소의 성기에 소염제가 분사되는 치익치익 소리. 그런 소리들 끝에 무언가 질기고 축축한 것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류는 반사적으로 힘을 주었다. 음낭의 표피가 절개되는 소리였다. 표피를 찢은 연은 뿌리에서부터 소의 고환 덩어리를 짜내리기 시작했다. 소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헉, 헉,
숨을 내뿜다 고환이 다 빠져나올 때쯤 길게 한번 울었다. 소의뒷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류의 팔로 전해졌다. 어디선가국이 끓고 있는 것 같다고 류는 생각했다. 무언가가 뭉근하게오래오래 끓는 냄새였다. 그 냄새는 따뜻하면서도 말할 수 없이 쓸쓸했다. 껍질만 남은 음낭을 봉합한 뒤 연은 소의 엉덩이에 진통 주사를 놓았다. 
---- [어느 작은] - P277

사람들은 어색함을 모면하려고 다시 고기에 집중했다. 공은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았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잔디밭 위로는 햇빛이 쏟아졌다.
그날처럼 눈부신 햇빛이었다.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한봄, 냇가를 끼고 있던 풀밭, 소는 풀을 뜯었고 산골 소년 공은 토끼풀꽃을 엮어 왕관을 만들었다. 갓 태어난 송아지일 때부터 몇 년을 공과 함께 지내온 소였다. 덩치도 커지고 먹는 양도 늘면서그만큼 공과 함께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이름도 공이 지었고털 관리도 공이 했다. 공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를 데리고 냇가로 가 풀을 먹였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풀을 먹던소가 꼬리를 빳빳이 들어올렸다. 소변이 나왔고, 구멍이 서서히 열리면서 검은 똥이 쏟아졌다. 다시 구멍이 닫혔고 소의 꼬리가 내려갔다. 소는 꼬리로 엉덩이와 다리를 쳐가며 계속 풀을뜯었다.
수 없었다.  - P291

공은 토끼풀꽃을 내려놓고 소에게 다가갔다. 햇빛이 내려앉은 등은 따스했고 소털 특유의 냄새가 공을 간질였다. 공은 소의 등을 쓸었다. 왼손으로 꼬리를 들어 올렸고, 조금 전에 닫힌 그곳, 소의 직장으로 조심스레 오른손을 집어넣었다. 소년 공에게 비닐장갑 따위는 없었다. 소가 풀을 뜯어 먹던 움직임을 멈추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섰다. 시냇물 소리도 멈추고 바람 소리도 멈추었다. 공의 손과 팔이 끝도 없이 소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어깨까지 들어갔을 때 공은 자신의 몸 전체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속인 것처럼 귀가 먹먹해셨다. 공은 눈을 감았다. 놀라운 정적이 그 속에 있었다. 공의팔을 감싼 점액과 혈관과 굴곡들. 그리고 따뜻함.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공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면서 팔을 뺐다. 팔이 조금씩 빠져나올 때마다 바깥세상과의접촉면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손까지 모두 빠져나왔을 때 공은도망치듯 뒤를 돌아 뛰었다. 허겁지겁 어찌할 새도 없이 공은풀밭에 넘어져 사정을 하고 말았다. 참담한 심정으로 뒤를 돌아보았을 때, 공은 소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 P292

창가 쪽 테이블이었다. 물잔 옆에 누군가의 휴대폰이놓여 있었다. 휴대폰 벨소리로 흘러나오는 노래는 산골 소년의사랑 노래였다. 남편의 속옷 양말처럼 여기는 그의 아내인지, 암소가 앓고 있는 어느 농가인지, 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누군가 계속해서 공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숯불을 빼던 식당 직원이 멈춰 서서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점점이 흩어져 있는 소금 알갱이와 핏물이 자작한 고기 접시, 계란노른자만 남은 냉면 그릇. 그런 것들이 노래와 함께 지나갔다. 누군가는 눈을 감고 누워 냇물 위로 떠내려가던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주저앉아서 어느 날 밤의 하늘을떠올리고 있었다.
두 아름도 넘을 것 같던 느티나무가 있었다. 두부 찌꺼기처럼 비어져 나오던 수소의 고환이 있었고, 인공수정 교육 때마다 도축장에서 갖고 오던 암소의 자궁이 있었다. 땅속에 묻혀있을 가축들의 뼈와 어딘가로 헤엄쳐 갔을 산골 소년의 정충.
그리고 소년의 어떤 순간을 지켜보던 황색 소가 있었다.
테이블을 다 치운 주인은 노래가 끝나가는 휴대폰을 카운터로 갖다 놓았다. 직원은 방석을 정리하다가 노란색 스트로 몇개를 발견했고, 이리저리 돌려보다 쓰레기통에 버렸다. - P294

통증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조금이라도 체중을 실어 앉으면살들이 뜯어질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변기에도 간신히 걸터앉을 수만 있을 뿐 아랫배에 힘을 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끔거리고 가렵고 축축했다. 밖은 겨울이었지만 실내는 한여름
---- [한밤] - P304

보다 더한 온도와 습도로 무더웠고 땀이 수시로 흐르는데도 씻는 것은 금지돼 있었다. 방마다 개인 샤워실이 있었지만 물은세면대에서밖에 나오지 않았다. 산모의 체질별로 샤워가 허락되는 시기가 다르다는 이유였다. 태반이 떨어진 자궁벽에서는붉은 진물이 계속 흘러나왔고 갖은 분비물로 오염된 회음부로는 바람 한 줄기 통하지 않았다. 몸이 썩어가는 느낌을 떨칠 수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일까. 일주일? 열흘? 내가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밤이 조금씩 길어진다는 사실뿐이었다.
자고 일어나거나 밥을 먹고 나면 여자들은 타원형 실내를 느릿느릿 돌았다. 운동을 위해 걷는 사람도 있었고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해 걷는 사람도 있었다. 방에 혼자 누워 있는 것보다는여자들과 복도를 걷는 것이 나았기 때문에 나 또한 하루의 많은 시간을 복도에서 걸으며 보냈다. - P305

산모들의 회음부는 점차 회복이 되었고 그에 맞춰 하루 한시간씩 원장의 모유 수유 교육이 시작되었다. 원장이 다녀간그날 밤 이후로 내 회음부도 정상 상태가 되었다. 실을 뽑아버린 건지 소독약을 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원장은 어쨌든 회음부의 세균들한테 타격을 준 것 같았다. 수유 교육이 끝나고 나면 산모들은 소파 앞 유축기 앞에 나란히 앉아 본격적으로 유축 작업을 시작했다. 흡입기를 가슴에 대고 버튼을 ‘강‘으로 올려도 젖량은 30밀리미터를 밑돌았다. 반면에 분홍은 젖이 뿜어져 나왔다. 많은 젖량을 주체하지 못해 심지어 젖을 짜서 버리기까지 했다.
"여기선 재력, 미모, 학력 다 필요 없어. 젖량 많은 여자가 갑이지."
임신을 하면서 다들 유두가 거뭇해진데 반해 분홍의 젖꼭지는 복숭앗빛 분홍이었다. 분홍은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을 풀어헤쳤고 하루 종일 생글생글 웃으면서 조리원 실내를 누비고 다녔다.  - P312

내 안에 있었던 아기. 나는 아기의 뺨에 코를 대고 냄새를들이켰다. 아기는 눈을 감은 채로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 입이점점 내 가슴 쪽으로 돌아왔다. 자기를 낳은 엄마한테 온 것을본능적으로 안 것일까. 나는 서둘러 가슴을 열었다. 순간 아기가 걸신들린 악귀처럼 달라붙었다. 젖꼭지가 아파 나는 반사적으로 아기를 밀어냈다. 아기는 다시 쥐처럼 파고들더니 젖꼭지를 찾아 물었다. 그러고는 무서운 힘으로 빨기 시작했다. 얼마나 빨았을까. 실이 한 올씩 풀려나오는 것처럼 내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온몸의 찌꺼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고천년 묵은 변비가 해결되는 것 같은 말로 다 하기 힘든 시원함이 몰려왔다. 유축기로 해결하지 못한 몸의 울혈들이 아기가빨자 그대로 풀려나가고 있었다. 뜨거운 탕 속에 잠겨드는 것처럼 몸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저릿저릿했다. 아기를 품에 안고 그대로 잠이 들고 싶었다.
30분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산모들의 유관이 막히지 않도록 아기가 양쪽 젖을 비워줄 딱 그 시간만큼만 허락이 된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배를 채웠는지 아기 입이 느슨해졌다.  - P320

나는 실장을 밀치고 싸개를 풀었다.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것이 나와 신랑의 유전자를 나눠 가진 몸이라는 것을 믿을 수없었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고 어느 기록에서도 본 적이없는, 손상된 생명체가 거기에 있었다. 두 팔과 두 다리가 아니었다. 팔인지 다리인지 알 수 없는 갈라지고 뭉쳐진 덩어리들이 팔과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비껴난 채 펼쳐져 있었다. 성기만이 나를 비웃듯 몸통의 제자리에 박혀 움찔거렸다. 아기는 그 와중에도 다시 젖을 찾는지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러더니 꽃게처럼 버르적거렸다.  - P321

연기가 하늘을 뒤덮어 사방이 마비 상태였다. 크지 않은 누각이 저런 불길을 품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북문은거세게 타올랐다. 포효하는 괴물처럼 몸을 뒤트는 북문 앞에서소방차도 빌딩들도 장난감 같았다. 이 땅에 가장 오랫동안 서있어온 건물이 가장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보도 기자의 흥분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의적인 방화로 추정이 되지만 아직 방화범은 잡히지 않은 상태라는 말이 이어졌다. 수차례의 협박 전화를 무시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당국의 안이한대처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었다.
나는 산호를 보았다. 산호는 눈을 감은 채 소파에 기대앉아있었다. 산호의 뺨 위로 북문의 불꽃이 반사돼 어른거렸다. 나는 그 불꽃 앞으로 다가갔다. 이월을 말리던 산호가 이월을 돕기로 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산호의 뺨 위에 손을 얹었다.
순간 건물이 흔들리는 것 같은 진동이 왔다. 사람들은 다 같이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누각의 기왓장들이 쏟아져 내리면서 붕괴가 시작되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늘 보아왔던 건물. 타버릴 수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건물. 폴리스라인 너머를 채운 사람들이 믿어지지않는 광경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생물체처럼 북문이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셋, 둘, 하나, 정렬. - P330

새로운 2만 6천 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북문의 마지막 기둥이 무너져 내렸다. 누군가 흐느껴 울기시작했다. 나는 뒤편의 통유리를 바라보았다. 거기에 속싸개로 몸을 가린 콩이, 송이, 바람, 봄빛, 행복, 사랑, 희망 들이 누워 있었다. 누군가 몸을 긁었다. 어딘가에서 무엇인가가 다시번식을 시작한 것이 느껴졌다. 이제 또 다른 고열이 오겠지. 들깻가루와 미역이 끓는 냄새. 젖냄새와 진물 냄새. 나는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 중에 가장 긴 밤 나는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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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날을 잊을 수 없다고. 옆에서 작은아버지가 조용히 웃었다. 규는 풀들을 긁어모았고 나는 술을따랐다. 참 좋았지. 참 좋았어. 나는 출근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대고 졸았다. 졸면서 꿈을 꾸면 아버지가 나왔다. 그날을 잊을수가 없다. 아버지는 버스 창에 깃발처럼 매달려 따라왔다. 신호에 걸려 버스가 멈추면 좌석 어디쯤에서 어머니가 고무장갑을 흔들었다. 버스가 다시 속력을 내면 아버지가 검은 얼굴로펄럭이며 창을 두드렸다. 나는 창이 열리지 않게 안간힘을 쓰다가 머리를 찧고 깨어났다. 그날도 그랬다.  - P11

가려웠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가려웠다. 봄가을에는정신없이 가려웠고 여름에는 못 견디게 가려웠고 겨울에는 그냥 가려웠다. 어떻게 하면 상처 안나게 긁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티 안 나게 긁을 수 있을까, 날이 더워지면 그 생각에만 몰두했다.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땐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어떻게든 긁었지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가려움이 시작되면발가락을 짓누르다 자리를 피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의사들은 오래 앉아 있는 게 좋지 않다고 했지만 나한테는 외근보다 파티션이 하체를 가려주는 사무실 근무가 편했다. - P16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세상은 더럽고 우리에겐 락스가 있다고.
락스를 사랑하는 내 어머니는 여전히 명절날의 대장이었다.
작은어머니와 형수가 일할 분량과 범위를 정해놓고 더는 넘어오지 않게 했다. 어머니는 며칠동안 락스를 풀어 걸레를 삶고집안 구석구석을 닦으면서 명절 때 오갈 사람들의 동선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윤이 나는 바닥을 네 살이 된 규의 딸이 내달리며 놀았다.  - P29

불길 속에서 아이를 건져내듯, 납치범한테서아이를 낚아채듯, 뒤집개를 내던진 형수가 한달음에 달려와 어머니한테서 아이를 빼갔다. 어머니를 바라보는 형수의 눈빛에서 한순간 혐오가 지나갔다. 큰소리는 오가지 않았다. 형수는아이한테 휴대폰을 쥐여주고 한쪽에 앉힌 뒤 일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작은어머니는 겪을 만큼 겪었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아무 말이 없었다.
혼자 멋쩍게 앉은 어머니를 보는 게 힘들어 나는 밖으로 나왔다. 자기 시어머니였어도 저런 눈빛이 스쳤을까 하는 서운함에, 어머니의 락스 신봉이 이지경까지 이르렀다는 충격까지이래저래 마음이 쓰렸다. - P31

마지막 통의 뚜껑을 열 때쯤 시야가 기울었다. 편도선에 바늘이 들어오는 것처럼 목이 아팠다. 메스꺼움과 함께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나는 가까스로 세면대를 잡고 서서 거울을 보았다. 독성이 스며든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샤워기의 온수를 틀었다. 뜨거운 물이 락스 원액에 내리꽂히며 증기를 끌어올렸다. 거울이 흐려지면서 욕실 안은 염소 기체로 들어찼다. 나는 숨을 몰아쉬다가 욕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신음을 뱉으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감각이 마비되는 듯한몽롱함 속으로 몸이 꺼져들어갔다. 눈앞에 욕실등이 어른어른했다. 젖은 눈썹에 맺힌 물방울들이 몇 겹으로 번져나갔다. 고리처럼 이어진 물방울들 끝으로 잡힐 듯 말 듯 무엇인가가 보였다. 겨울이고 한낮인 어느 거리였다. 공기가 시리고 하늘이맑았다. 그녀가 거울 앞에 서서 떨잠을 꽂아보고 있었다. 옛 여인들이 좋은 날 꽂았다는 장신구였다. 둥근 백옥판 위에서 여러 빛깔의 유리 장식이 반짝였다. 그녀가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은사로 된 떨새가 파르르 떨리며 진동했다. 지구는 소리 없이 돌고, 한겨울 햇빛이 구슬 가닥가닥을 파고들며 빛을 흩뿌렸다.
- P46

라라가 할딱이기 시작합니다. 라라는 파자마 자락을 꼬깃꼬깃 뭉쳐서 가랑이 사이에 끼웁니다. 라푼젤의 머리카락을 꽈배기처럼 꼬아서 가랑이로 가져갑니다. 유리의 손바닥도 세워서 가져갑니다. 잡히는 건 다 가져가서 끼워 넣더니 라라는 힘을 줍니다. 엄청난 힘에 놀라서 유리는 손을 뺍니다. 라라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얼굴이 새빨개집니다. 숨이 가빠지면서눈이 희미하게 풀립니다. 그렇게 몇 번 더 끙끙대던 라라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잠이 듭니다. 이제야 무언가 안심이 된다는 듯이, 울음 끝에 잦아드는 숨처럼 떨리는 숨을 한번 내뿜고, 라라는 평온한 얼굴로 쌔근쌔근 잡니다. 유리는 라라의 뺨에 손등을 대봅니다. 혼자 노는 라푼젤, 모서리를 좋아하는 여자아이.
유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들어갑니다. - P67

유리는 지금 몸도 마음도 힘이 듭니다. 그래서 라라를 가만히 둘 수가 없습니다. 유리는 라라를 처음 때렸던 때가 생각납니다. 유리는 무슨 일 때문인지 화가 치밀었고 탁상달력으로라라의 머리를 두 번 후려쳤습니다. 라라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유리는 우는 라라를 안아주었습니다. 유리는 울음이 잦아든 라라에게 밥을 먹여주었습니다. 자신한테 맞아서 울고, 자신이 달래서 울음을 그치고, 결국에는 자신이 주는 밥을 받아먹는 라라를 보자 유리는 라라가 진정 자기 것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의 전율을 유리는 다시 느껴보고 싶다는생각이 듭니다. 유리가 이러는 건 아주 오랜만입니다. 유리는아무 때나 라라를 때리지 않습니다. 힘들 때만 때립니다.
- P70

칩니다.
주방 조명등 아래, 밀고 밀리는 육박전은 끝나지 않을 듯 보입니다. 거실 저쪽에서 누군가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는 산발입니다. 산발인 머리를 쥐가 파먹었습니다. 눈을 올려 뜨고 그들을 바라보던 아이가 금발머리 라푼젤을 집어듭니다. 아이가 도어록 버튼을 누릅니다. 주방에서 뒤엉킨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한 칸, 또 한 칸. 아이는 맨발로 기다란 계단을 내려갑니다. 복도 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분홍 파자마 자락이 나부낍니다. 아이는 수백의 머릿니 군단을거느리고 여왕처럼 걸어갑니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누구아이를 본 사람 없나요? 나이는 여섯 살, 이름은 라라. 가까이가면 이가 옳을지도 모릅니다. 낯 뜨거운 행동을 하더라도 당황하지 마세요. 신고는 탑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이 엄마가 아이를 애타게 찾고 있어요. - P83

물조리개를 들고 나무를 빙빙돈다. 데리고 다니는 강아지인 것처럼 나무를 쓰다듬다가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와락 매달린다.
목련은 하루하루 빛이 난다. 영양을 골고루 섭취해 종아리는토실토실하고 햇살을 타고 뛰어노는 발걸음엔 막힘이 없다. 나무 밑에 자기 세계를 꾸미는 손은 야무지다. 나무한테 들려주는 얘기 속엔 그리움과 공상과 장난이 가득하다. 엄마라면 당장 가서 끌어안고 만져보고 싶어 못 견딜 만큼, 목련은 사랑스럽게 커간다.
바람이 잦아들자 다래덩굴이 빛에 잠긴다.
목련은 나무에 기대앉아 눈을 감는다. 눈꺼풀 위로 햇살이 - P90

고이고 빛은 수만 갈래 파편이 되어 어린 목련의 머릿속에서흩어진다. 그것은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온 백설기 파편이 되었다가 다시 목련의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이파리들이 된다.
엄마.
목련은 엄마를 불러본다. 엄마 얼굴도 목소리도 생각이 나지않는다. 선명한 것은 오직 냄새, 엄마 손에 밴 참기름 냄새다.
시금치 데친 물에서 훈김이 올라온다. 바가지에 도라지를 박박문질러 씻는 소리 들통 가득 탕국이 끓고 엄마는 메밀전병에넣을 김치를 다지기 시작한다. 목련은 엄마 옆에서 산자에 묻힐 튀긴 밥알을 주워 먹는다. 시루 위로 떡 찌는 냄새. 뜰에 자리가 깔리고 제기가 날라진다. 사람들 발소리가 왁자지껄 들려온다. 목련은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간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백중날. 7월 보름 한여름. - P91

목련은 목발을 세워둔 채 홀로 절 마루에 앉아 있다. 7월 보름 달빛에 밤이 환하다. 어슴푸레하게 언덕의 나무가 건너다보인다. 달빛에 잠긴 능선과 나무와 다래 덩굴. 다래 덩굴에서 반사된 빛이 다시 절 뜰로 고인다. 목련은 다섯 살까지 엄마와 이절에서 살았다.
목련에게 엄마는 물을 끓이는 주전자이고 김장독을 묻는 삽이고 강아지 집을 수리하는 망치다. 목련의 엉덩이를 찰싹 쳐가며 목욕을 시키는 손이고, 무엇보다 매일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다. 노란 장판이 깔린 뜨끈뜨끈한 방구들, 목련은 거기서태어나고 거기서 기어 다니고 거기서 잠을 잤다. 목련은 절구석구석을 어디든 걸어다녔다. 4월이 되면 초파일 연등에 붙일꽃잎 종이를 안고 다니고 7월이 되면 옷을 태우고 남은 재를 후후 불며 휘저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담 한편의 돌탑을 몰래 무너뜨리면서 놀았다.
- P101

목련은 서서히 턱을 내린다. 올라갈 때보다 더 많은 힘이 들어가 목련의 몸은 부들부들 떨린다. 그러나 그동안 단련된 목련의 팔 힘은 아직 더 많은 시간을 버틸 수 있다. 털실 고리와같은 눈높이까지 내려왔을 때 목련은 멈춘다. 반쯤 굽혀진 팔이 걷잡을 수 없이 후들거린다. 한여름 해가 기울어간다. 허공어디쯤에서 이파리 하나가 떨어져 내린다. 뒤이어 어느 집의빨래 하나가 떨어져 내리고, 언젠가 목련이 쏘아올린 종이비행기가 떨어져 내린다. 담 위에서 발을 헛디딘 고양이가 떨어져내리고, 세상의 모든 열매들이 자기 무게만큼의 속도로 떨어져내리는 것을 목련은 본다. - P125

목련의 팔에 갑자기 엄청난 힘이 들어간다. 그것은 목련이이 세상에서 내는 마지막 힘이자 자신을 걸고 내는 모든 힘이다. 목련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가지 마 가지를 잡은 팔을바꾼다. 심장이 격렬한 박동을 뿜는 동시에 목련의 몸은 바로거기, 다래 덩굴 쪽으로 돌아간다.
목련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해지는 자신을 본다. 손에 맞물린 나무의 감촉을 목련은 어느 때보다 실감한다. 나무를 향한 단단한 믿음이 자신을 채우는 것을 목련은 느낀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 목련은 목도리의 고리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는다.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목련은 가지 마 가지를 잡은 두 손을 놓는다. 땅이 모든 힘을 동원해 목련을 잡아끌고 목련은 자기 무게만큼의 강도로 목도리에 목이 매달린다. 그 강도 그대 - P125

로 줄이 목련의 대동맥을 누르고, 목련은 급작스러운 뜨거움과동시에 혀가 빠질 듯한 숨 막힘 속으로 들어간다. 그때 다래 덩굴이 열린다.
다래 덩굴,
그 안에 울부짖는 한 여인이 있다.
덩굴을 몸에 감고 갇혀 있던 여인. 머리채를 잡힌 채 눈앞을보는 여인. 지금 막 지옥에 빠지는 여인. 복수당하는 여인.
가지 마 가지에 목이 매달린 목련이 허공을 차기 시작한다.
"악-아-엉- 윽-"
토막음으로 우는 사람은 손과 입을 결박당한 여인, 10년 동안 언덕에 갇혀 목련을 보아온 여인이다. 두 팔을 휘저으며 헤엄치던 목련의 얼굴이 검붉게 질려간다. 세차게 버둥대던 다리움직임이 어느 순간 둔해지기 시작한다. 목련의 눈이 하얗게넘어간다. 여인의 재갈이 풀린다. - P126

"아-가-아-가아아아아아————— !!"
눈앞의 것을 식별할 정도의 빛과 울부짖을 기력을 유지할 정도의 음식. 지난 10년간 그 둘만 제공받아온 여인이 두 눈을 뜨고 울부짖는다. 눈이 넘어간 목련의 몸이 풀어진다. 목련은 나무 막대기처럼 곧게 펴져 경련하기 시작한다. 여름 생물들이일제히 소리를 멈추고, 결박당한 여인만이 짐승처럼 몸을 뒤틀며 목련을 부른다. 그러나 설골이 부러진 목련의 몸은 이미 마지막 떨림으로 치닫는 중이다. - P126

능선으로 해가 진다. 나무의 그림자가 맞은편 산을 뒤덮는다. 하루의 빛이 사라지기 직전. 모든 것들이 가장 반짝이는 순간, 목련은 드디어 괄약근이 완전히 풀어지면서 움직임이 멎는다 포개진 꽃잎이 저녁을 준비하는 오후의 막바지. 언덕 아래로 밀잠자리가 걷히고 구름이 새털처럼 풀어지며 하늘을 채운다. 귀를 후비는 괴성만이 능선을 타고 미끄러진다.
마을 어디에서나 나무와 나무에 매달려 죽은 목련이 보인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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