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의 길이는 4.8킬로미터였다. 산 끝에 절벽이 있었고 도로는 그위로 나 있었다. 절벽길 아래는 바다였다. 십여 년 전에 생긴 이 해안도로엔 수만 명의 이름이 새겨진 탑이 있었다. 새로운 천 년이 시작되던 날, 사람들은 탑을 세우고 그 앞에 타임캡슐을 묻었다. 기한을 백 년으로 할지 천 년으로 할지 이견이 있었지만 캡슐 개봉 시기는2100년으로 정해졌다. 60킬로미터에 가까운 해안선을 갖고 있는 이 도시에서 해안도로는일부 구간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떠오르는 해를 보고싶을 때 다른 곳이 아닌 해안도로로 달려갔다. 기념공원 앞에 차를 세우고 해송 사이로 이어진 산책로를 걸었다. 탑 앞에서 소망을 되뇌는것도 잊지 않았다. 가로등과 키가 비슷한 설치대에는 바다와 해를 표현한 깃발이 걸려 있었다.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는 시의 심벌이었다. 해는 해안도로의 전 구간에서 나부꼈다. 전망이 좋은 바위 위에는 해 - P6
안 초소가 있었고 기암 괴석들 사이에는 아주 작은 해변이 있었다. 바다에 사는 새들이 해풍과 함께 도로 위를, 이상한 바위들과 초소와탑 사이를 날아다녔다. 수온이 다른 해류들이 만나 일정한 방향으로 쉼없이 움직이는 곳이었다. 바다의 성질을 간직한 석회암이 산속에 동굴을 만드는 곳이었 그곳에서 해는 매일 떴다. 매일 지기도 했다. 도로는 산과 바다사이의 절벽 위를 달렸고, 북위 37도 동경 129도 안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 해안도로의 북쪽 끝에서 출발하면 차로 십 분이 걸리는곳. 걸으면 한 시간 뛰면 삼십 분 그렇게 도착할 수 있는 해안도로의남쪽 끝에 어항이 있었다. - P7
송인화는 아직까지 유리골 꼭대기에 올라가본 적이 없었다. 코끼리산에서 건너다보거나 어라항 회센터 앞에서 올려다본 게 전부였다. 산비탈에 겹겹이 올라앉은 집들은 산언덕의 칠부 능선까지만 이어져있었다. 그 위는 텃밭과 공터였다. 공터로 남아 있는 유리골 정상은오래전에 사형장 터였다. 몇백 년 전, 동해안 수군의 죄수들은 포진이있던 코끼리산 뒤편으로 끌려와 재판을 받았고 대부분 유리골 정상에서 사형을 당했다. 그래서인지 척주 사람들은 마을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사형당한 죄수들의 원혼 탓으로 돌리는 버릇이 있었다. 송인화는 유리골 정상을 볼 때마다 그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마지막 숨을 쉬었을 죄수들을 습관처럼 떠올렸다. 오래전의 사형장 흔적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유리골 정상은 지금 지진해일 대피소로지정되어 있었다. 어라진 일대의 골목골목에는 지진해일 대피로를 가리키는 화살표들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고 그 화살표들은 모두 유리골 정상을 향했다. 척주시 재난안전대책본부가 관리하는 긴급대피장소, 오래전 숱한 사람들의 목이 꺾였던 곳. 그 유리골과 코끼리산을잇는 산중턱에 바다를 보고 서 있는 상이 하나 있었다. - P30
척주를 떠나기 전날 밤이었을 것이다. 송인화는 은남 마을로 가 하경희 옆에서 하룻밤을 잤다. 밤새 울었던 것도 같고 아버지 장례식 때못 잔 탓에 밤새 잠만 잤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더이상 진료소에 못놀러온다는 게 아버지의 죽음만큼이나 슬퍼서 밤새 마음이 쓰렸던 기억은 났다. 은남 해안가에 놀러갔다가 화장실을 찾아 보건진료소로들어갔던 중학생 때 이후로 하경희는 송인화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던 타인이었다. 송인화는 보건진료소의 집기부터 종이 한 조각까지그 안에 있는 것들이 그냥 다 좋았다. 장래희망이 보건진료소 직원으로 바뀔 정도였다. 동진아파트에서 탈출해 은남 바다에서 사는 게 인생 목표라고 하경희한테 정기적으로 고백을 하기도 했다. 바다와 진료소에 무턱대고 마음을 빼앗긴 외로운 여자애를 하경희는 안쓰러워하기도 하고 기특해하기도 했다. - P52
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꽃냄새가 송인화를 감싸왔다. 송인화는 지하에서 내내 숨을 참고 있었던 사람처럼 허리를 굽히고 숨을 몰아쉬었다.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하다가 송인화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라일락 덩어리들이 햇빛을 끌어모았다가 튕겨내며 눈앞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겨울에 보면 저게 라일락 나무인 걸 또 까먹겠지, 송인화는 생각했다. 그러면서 조금 울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 이해할 수없었다. 의료원 앞 사거리 일대를 막처럼 덮고 있는 이 슬픔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채로 송인화는 미세한 통증만을 느꼈다. 해가 지는지 빛이 한 겹씩 사라져갔다. - P57
"부모 잡아먹고 서방 잡아먹고 자식까지 잡아먹을 년" 송인화는 동작을 멈추고 천천히 노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복장에서 내장을 다 훑어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년. 잡어만도 못한 년. 냄새나는 년. 부모 자식 서방 다아아아아아 죽일 년." 노인은 정확히 송인화의 눈을 쳐다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 말들은 어떤 필터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송인화의 몸속에 흡수되었다. 송인화는 꼼짝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몸의 반응은 몇 초 후에 왔다. 미처 어찌할 새도 없이 후드득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송인화는 유통기한이 지난 약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서 폐의약품 수거함에 던져넣었다. 번들거리는얼굴을 닦지도 않고 보란듯이 약들을 분리했다. 허선생이 흥분하는노인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 P72
해가 지기 시작하자 공동 복장 위의 구름이 색을 바꾸었다. 붉은구름들은 해일처럼 빠른 속도로 코끼리산을 타넘었다. 등대에 불이들어온 걸 신호로 방송수신탑에도 불이 켜졌다. 뒤이어 유리골의 집들도 하나둘 불을 밝혔다. 태양광이 사라지자 여래상도 어둠 속으로모습을 감추었다. 송인화는 자신과 서상화의 모습이 점처럼 작아지는것을 느끼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는 맞은편 어둠을 바라보았다. - P74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제일 안쪽 평상에 앉자 모든 소음을 집어삼킬 듯 물소리가 거세게 들려왔다. 저만치 계곡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소나무 줄기가 평상 바로 옆을 지나며 위로 뻗어 있었다. 젖어 있어서인지 나무줄기에서는 송진 냄새가 짙었다. 소나무잎에 매달린 물방울들이 닿을 듯 가까이에서 흔들렸다. "좋다...." 숲을 보던 송인화가 말했다. 감자전과 도토리묵이 나올 때까지 둘은 물소리를 들으며 말없이 계곡을 내려다봤다. 음식이 상에 놓이자송인화가 이쪽으로 몸을 돌리며 턱을 쓱 닦았다. 그제야 윤태진은 송인화가 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좋은데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는 듯 송인화가 멋쩍게 웃으며 젓가락을 집었다. 그러더니 "미쳤나봐" 하면서 또 턱을 닦았다. 평상 난간 아래쪽에는 다육이가 심어진 기다란 장화 화분이 있었다. 닭백숙에 넣는 황기 냄새가 희미하게 깔려 있었고 테이블을 덮은흰 종이 위로 작은 벌레들이 날아왔다가 다시 날아갔다. 모자를 벗으며 단체 등산객들이 들어왔고 옥수수 찜통에서 올라온 김들이 쉬지않고 창유리에 서렸다. 손을 뻗으면 닿는 테이블 맞은편에는 송인화가 있었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둘 다 알지 못하던 때였다. 양손에 젓가락 하나씩을 들고 감자전을 가르는 송인화를 보면서 윤태진은 생각했다. 이 여자가 옆에서 이렇게 이유 없이 눈물을 글썽여준다면, 그러면 흔들리지 않고 갈 수도 있겠구나, - P116
윤태진은 침대맡에 놓인 갈색 약통에서 알약 네 개를 꺼냈다. 송인화와 헤어지고부터 수치가 다시 나빠져 먹기 시작한 호르몬제였다. 윤태진은 M자가 쓰여 있는 흰색 정제를 내려다보면서 그동안 자신의몸에 들어왔던 약들을 떠올렸다. 눈두덩이 붓고 염증이 심해서 먹었던 스테로이드 경구약 돌출된 안구에 결막 출혈이 올 때마다 맞았던스테로이드 주사제 대가처럼 따라온 부작용으로 밤마다 근육이 비틀리던 일, 피를 뽑아 호르몬 검사를 하고 수치 확인을 하는 지난한 시간들을 지나오면서 윤태진은 일반인들보다 두세 배는 강하게 정신줄을 잡고 있어야 일반인들과 엇비슷한 생활이 가능했다. - P121
널찍한 탕 냄비 두 개가 각각 테이블에 올려졌다. 이창규와 김순영이 왼쪽 테이블에, 김승희와 송인화와 서상화가 오른쪽 테이블에 앉았다. 육수가 끊자 주인이 살아 있는 낙지 두 마리를 들고 왔다. 뜨거운 냄비 속에 들어가자 낙지는 온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무와 야채를휘저으며 요동치던 낙지는 밖으로 다리를 뻗어 냄비 손잡이를 휘감았다. 그냥 두면 냄비 밖으로 기어나올 것 같았다. 송인화는 입술을 물며 낙지의 움직임을 눈으로 좋았다. 저렇게 살아 있으니, 얼마나 맛있을까. 저렇게 살아 있는데, 왜 꼭 익혀 먹어야 할까. - P143
오징어 철이었다. 울릉도 근해로 나가있던 오징어잡이 배들이 들어오면 송인화는 일주일에 한 번은 아침잠을 포기하고 어항으로 나갔다. 채낚기 오징어 입찰이 한창인 어판장을 지나 2호집으로 가면주인이 오징어 내장을 받아뒀다 탕을 끓여줬다. 방금 죽은 오징어의내장은 짠내도 없어 입으로 들어가자마자 부드럽게 녹았다. 오징어내장탕에 맛을 들인 이후로 송인화는 씹는 게 거추장스럽게 느껴져오징어를 잘 먹지 않았다. 새벽 어판장의 외침 소리를 들으면서 칼칼한 내장탕을 먹다보면 이동네 어딘가에서 서상화가 아직 아침잠을 자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들었다. 예전엔 버리는 고기라고 안 먹었는데 이제는 비싸서 못 먹는다며 곰칫국 얘기를 하던것도 떠올랐다. - P171
산속 고갯길로 들어서자 차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포장만 되어 있을 뿐 댓재는 구불구불한 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경사 높은 산길이었다. 운전이라면 도가튼 송인화였지만 핸들을 이리 꺾고 저리 꺾으며다리에 힘을 주다보니 금세 목이 뻣뻣해져왔다. 와이퍼 때문에 시야도 어지러운 상태였다. 맞은편에서 가끔씩 대형 트럭이 내려올 때마다 송인화는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속도를 늦췄다. 저곳만 돌면 정상이 보이겠지 하면 다시 굽은 길이었고 저곳만 돌면, 하고 올라가면또 길이었다. 올라가도 올라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비가 그치고 몸이 다 굳은 다음에야 송인화는 정상으로 보이는 곳에 차를 세울 수 있었다. 산꼭대기에는 작은 휴게소 건물 하나와 댓재‘라 새겨진 대형 비석이 있었다. 송인화는 차에서 내려 비석 앞으로 걸어갔다. 한여름인데도 댓재정상엔 차게 느껴지는 바람이 불어왔다. 비석 아래쪽에는 작은 글씨로 ‘덕왕산 댓재-두타산‘이라 쓰여 있었다. 고개를 드니 비석 너머로 산줄기가 겹겹이 펼쳐져 있고 구름이 닿을 듯 낮게 내려와 있었다. - P178
"무더위 속 소나기, 동해안 비‘ 휴대폰 화면에 날씨 알림이 떠 있었다. ‘동해안 비‘라는 말을 보고송인화는 비로소 울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들어도 가슴 아픈 지명, 동해안. 송인화는 우산도 가방도 놔둔 채 울면서 운동장 너머 밭으로 걸어갔다. 감자밭을 지나고 콩밭을 지나 대마밭으로 걸어갔다. 송인화는키 큰 대마 줄기를 휘저으며 밭 한가운데로 갔다. 빽빽하게 치솟은 대마잎에 몸을 묻자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비에 젖은 이파리들이 모든걸 잊게 해줄 듯 아찔한 향을 내려보냈다. 송인화는 층층이 펼쳐진 잎들에 얼굴을 묻고 몇 년 동안 어디서도 풀어내지 못한 울음을 울었다. 목이 쉬도록 울었다. - P184
아빠가 모는 덤프는 브레이크도 정상이 아니었지만 고장이 나도 바로 수리되는 게 아니었다. 어떤 아저씨들이 정비를 올리면 바로 수리가 되었지만 어떤 아저씨들이 정비를 올리면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이 돌아왔다. 하루에 맞춰야 되는 물량이 빡빡해 시간은 잘나지 않았고 그러면 아빠는 정비가 접수될 때까지 불안한 마음으로차를 몬다고 했다. 덤프 운전을 오래 한 아빠는 브레이크가 말을 안들을 때마다 임시로 처방하는 아빠만의 노하우가 있었다. 그래도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는 조마조마하다고 했다. 비가 와서 노면이 흙탕뻘이 되는 날은 저 아래 크러셔 건물까지 살아서 내려갈 수 있을까,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고도 했다. 서상화를 광산에 데려간 뒤로 아빠는 광산 얘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그때 봤던 얼굴 까만 아저씨 있지, 거기 슬러그 쌓여 있던 자리에말이야, 하면서, 서상화가 기억하는 35 광구의 풍경은 열한 살 여름방학 때의 며칠과 그후에 아빠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혼합돼 있었다. 하지만 광산을 떠돌던 분위기만은 단 며칠이었다고 해도 서상화가 직접느낄 수 있었다. - P223
흰색 안전모와 노란 안전모는 같은 공간에서 작업 배차를 받고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고 똑같이 동진시멘트라는 곳으로부터 작업 지시를 받았지만 소음과 분진이 심한 곳에 배치되는 것은 거의 노란 안전모들이었다. 흰색 안전모들은 안전과에서 얼마든지 방진마스크를 갖다 쓸 수 있었지만 노란 안전모들은 분진이 많은 곳에 배치되는데도한 달에 열다섯 개 이상의 마스크를 쓸 수 없었다. 작업복과 귀마개와 안전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노란 안전모들이 마음껏 가져갈 수 있는 건 목캔디뿐이었다. 그런 걸 감수하고 일을 해도 아빠가 받는 임금은 흰색 안전모의 반도 안 되었다. 잔업을 하지 않으면 기본적인 생활비조차 댈 수 없는 금액이었다. - P224
아빠와 동료들이 주춤하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자신들이 먼저 먹는게 당연하다는 듯 흰색 안전모들이 식판을 들고 앞으로 가서 섰다. 밥을 먼저 먹지 말라는 건 서상화의 초등학교 4학년 교실에서도 좀처럼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날 서상화가 아빠의 얼굴에서 본 것은 멸시받는 게 만성이 된 사람의 표정이었다. 누군가가 일터에서 매일매일 오랜 세월에 걸쳐 인격적 모독을 당한다는 것. 그게 내 가족이라는 것. 그 사실이 사람의마음을 얼마나 휘저어놓는지를 서상화는 뭐가 뭔지 모르는 채로 먼저느껴버렸다. 중학생이 되고부터 서상화는 광산 쪽으로 발길을 돌리지않았다. 아빠는 나이 어린 정규직한테 쌍욕을 듣고 오는 날도 있었고덤프에서 돌을 떨어뜨렸다고 주먹질을 당해 입술이 터져서 오기도 했다. 출근하는 아빠의 뒷모습이 보기 싫어 서상화는 학교도 일찍 갔다. 술만 먹으면 아빠가 중얼거리던 ‘하청 주제‘라는 말을 크러셔에 넣어버리고 싶었다. - P225
고용노동부의 판정은 아빠가 방진마스크와 귀마개와 안전화를 펼요한 만큼 얼마든지 갖다 쓸 수 있다는 말이었고 터무니없었던 임금대신 정당한 보수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전한 덤프를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브레이크가 고장나지 않은 덤프, 내리막길에서 시동이 꺼지지 않는 덤프. 하지만 판정의 여운은 하루도 가지 못했다. 노동부 판정이 나온 다음날, 동진시멘트는 하청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했고 하청업체는 아빠와 동료들을 전원 해고했다. - P228
여의도불꽃축제 때였다. 밤하늘에서 연이어 터지는 불꽃은 서상화가 봤던 어떤 광경보다도 멋졌다. 머리 위에서 불꽃이 터질때마다 심장도 같이 터지는 것 같았다. 계속 보고 있으니까 눈물이 날것도 같았다. 서상화는 입구에서 집어온 행사 포스터를 펼쳤다. 거기에는 불꽃놀이를 주최하는 화약 제조회사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서상화는 불꽃이 뿜어져나오는 듯한 모양의 대문자 H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열한 살 서상화가 35 광구 대기실에서 수없이 따라 그렸던 로고였다. 울지 않으려고 눈을 올려 떠도 꼭 한줄기는 흐르는 눈물이 있었다. 안경 코받침에 한참 숨어 있다가 콧방울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눈물 불꽃이 터지는 한강에 앉아 있자 35 광구는 실재하지 않는 세상인 것만 같았다. - P245
문서 더미가 발 위로 쏟아져내렸다. 그렇게 몇 겹을 더 뚫고난 뒤였다. 안쪽 구석으로 보따리 두 개가 보였다. 황금색 보자기에싸인 뭉치를 보자 저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태진은 다가가 보따리를 풀었다. 한 보따리에 여섯 권씩 총 열두 권이었다. 그 안에 척주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윤태진은 그중 한 권을 집어서 펼쳤다. 누가 봐도 한 사람의 필체였다. 윤태진은 다른 한 권을펼쳤다. 주소도 생년월일도 없어 누군지 확인할 수 없는 이름들이 아래로 길게 적혀 있었다. 윤태진은 또다른 서명부를 펼쳤다. 서명란에서명이 없었다. 한 사람이 속도를 내서 친 것으로 보이는 동그라미만이 서명란을 채우고 있었다. 척주 사람 96.9퍼센트의 이름이 적혔다는 서명부 뭉치 앞에 윤태진은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허무할 정도로 엉터리로 작성된 서명부 - P254
였다. 정부가 척주를 원전 건설 후보지로 선정하면서 주민 수용성의근거로 삼은 그 서명부에서는 조작을 위한 어떤 고심도 치밀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 P255
파도가 잔잔했다. 바다와 하늘 색깔이 구분이 안 되는 걸 보니 가을한복판으로 들어선 듯했다. 약사여래상 앞의 대형 기도단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삼은사에서 약사재일 법회가 있는 날이었다. 최한수는 주지스님 방에 들어가 있었고 오병규는 아직 도착 전이었다. 최한수의 부친은 오랫동안 삼은사 신도회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척주에서 최한수가 오병규보다 유일하게 더 대접받는 곳이 삼은사였다. 윤태진은 약사여래상 앞에서 염주를 돌리거나 절을 하는 사람들을보다가 약사전 쪽으로 걸어갔다. 삼은사는 불교 주류 종단으로부터통속적이고 기복적이라는 말을 듣는 작은 종단의 사찰이었다. 하지만본찰인데다 기도처로 유명해 신도 규모는 여느 대형 사찰 못지않았다. 약사전에서 기도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면 어진에 너울성 파도가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 P268
윤태진은 마이크 소리가 웅웅대는 경내를 벗어나 유리골 축대를 따라 걸어갔다. 담배를 꺼내다 요즘 너무 자주 피운다는 생각이 들어 유태진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무리를 하면 안 됐다. 피곤해도 안 되고 스트레스를 받아도 안 되고 약 먹는 걸 걸러도 안 됐다. 골탕에 빠진 이후로 윤태진은 단 한순간도 몸에서 자유로워져본 적이 없었다. 지병이 없는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몸이 아픈 사람들이 하는 생각은하나였다. ‘안 아팠으면 좋겠다.‘ 해가 지면서 어항 방파제 쪽에서 피노을이 몰려왔다. 저무는 빛속에 서서 윤태진은 자신의 등에 붙어 있는 두 덩어리의 암흑에 대해생각했다. 다시는 그 검은 굴 속에 갇히지도, 그 검은 웅덩이 속에 빠지지도 않으려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윤태진은 붉은빛을 받고 있는약사여래상을 돌아봤다. 인간을 가장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것도약이었고 순간적으로 구원할 수 있는 것도 약이었다. 척주 땅에서 시멘트보다 강하고 시멘트보다 독한 것. 완치 가능성 없는 인간들의 비명을 길들일 가장 강력한 진통제 - P274
몇 미터 허공 위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듯했다. 광산에서 공장으로공장에서 다시 함으로 이어지는 컨베이어 벨트 아래에 서서 윤태진은시간을 확인했다. 저쪽의 어항 방파제 불빛이 다른 세상의 것처럼희미하게 흩어졌다. 동진 부두에는 불빛이 없었다. 덤프에 폐타이어를 싣고 있는 로더에서만 간혹 빛이 번쩍이다 사라질 뿐이었다. 해무가 끼는 날은 그마저도 보이지 않을 듯했다. 부두 한쪽에 산처럼 쌓여 있던 폐타이어 조각들이 로더의 작업으로조금씩 허물어져갔다. 일본 선박이 쏟아놓고 간 폐타이어와 석탄재는덤프에 실려 35광구 야적장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석회석과 섞여 시멘트로 변신하고 나면 다시 항으로 내려올 것이다. 어라항 뒤편에 배경처럼 펼쳐진 동진 부두에 서서 윤태진은 몇 시간째 검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로더가 물건을 옮기며 규칙적으로 움직일 때마다 촉감이 연상되는 냄새가 건너왔다. 끈끈하다고밖에는 할수 없는 고무 녹는 듯한 냄새. - P280
송인화는 외투를 여미고 속도를 내며 걷기 시작했다. 띄엄띄엄 선가로등은 어두컴컴했고 시커멓게 솟은 코끼리산에서는 바람 소리만들려왔다. 송인화는 뒤꼭지가 이상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의류수거함 뒤쪽으로 무언가가 후다닥 지나갔다. 고양이일 거야. 송인화는걸음을 좀더 빨리했다. 고양이가 아닐지도 몰랐다. 일행들과 헤어지길 기다리고 있다가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짧은 순간 송인화의 머릿속으로 수만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 P297
해초와 문어, 눈이 커다란 물고기, 무지개색 고래 한마리. 서상화가 그림이 그려진 담벼락 앞에 서서 몸을 숙였다. 유릿조각을 모아서붙여놓은 고래 눈은 색이 바랜 담벼락 그림에서 유일하게 쨍하고 빛나는 것이었다. 고래한테로 몸을 숙인 서상화가 상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빛깔이 바뀌는 유리 눈을 들여다봤다. 이 집에 처음 온 사람들은 다 한 번씩 고래와 눈이 맞는다고 하던 하경희의 말이 생각나 송인화는 웃었다. 은남보건진료소에서 길을 따라 죽 들어간 바닷가 끝 집이었다. 높지 않은 담에도 파묻힐 만큼 작은 슬레이트 지붕집이었지만 여름이면피서객들이 한 번씩 들여다보고 간다고 했다. 벽과 창호문 곳곳에 그려놓은 해바라기와 붓꽃과 새 들 때문이었다. 하경희가 남편과 몇 달에 걸쳐 만들었다는 마당의 나무 데크 위에 앉으면 바다와 돌섬과 마을 저쪽 끝의 등대가 한눈에 내다보였다. - P306
해가 넘어가면서 바다색이 조금씩 짙어졌다. 송인화는 맥주를 마시며 하경희가 해준 얘기를 들려주었다. 하경희의 아이가 저 자잘한 갯바위들마다 이름을 다 붙여놓았다는 이야기. 어느 겨울 돌섬 위의 갈매기들이 갑자기 사라졌던 이야기. 갈매기 소리가 소거된 바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적막하고 이상했었다는 이야기. 돌섬 뒤로 가끔씩고래가 지나간다는 이야기. 서상화는 별거 아닌 송인화의 말에도 테이블을 치며 웃고, 빨아들일 듯 눈을 맞추다가, 가만히 바다를 바라봤다. 서상화가 고개를 돌려바다를 볼 때마다 귓바퀴 안의 점이 도드라졌다. 복약상담을 하던 봄내내 보아온 점이었다. 어스름이 내리고 담 옆의 가로등이 켜지자 점은 귓바퀴 그늘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대신 서상화의 얼굴엔 또 안경그림자가 만들어졌다. - P309
송인화는 다시 의자에 앉아 양말을 벗기 시작했다. 서상화가 그제야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의자에서 내려와 송인화의 맨발을 감싸쥐었다. 서상화의 손이 맨살에 닿자마자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무언가가 관통해갔다. 발을 감싸쥔 자세 그대로 둘은 웃음을 멈추고 잠시숨을 몰아쉬었다. 서상화가 고개를 들어 송인화를 봤다. 상체가 올라왔고, 안경이 뺨에 와닿는 동시에 서상화의 혀가 입을 열며 들어왔다. 파도가 잠시 그대로 멈춘 듯했다. 얼굴을 떼고 닿을 듯한 거리에서 다시 본 서상화의 눈에는 송인화와 송인화 뒤로 펼쳐진 바다가 있었다. 송인화는 손을 올려 천천히 서상화의 안경을 벗겼다. 안경이 얼굴에서 떨어져나올수록 서상화의 눈에 물기가 번져갔다. 서상화의 눈 속 바다가 넘쳐흐르는 것을 보며 송인화는 울지 마, 중얼거렸다. 안경을 벗어도 울지 마. 목을 감싼 서상화의 손이 머리카락을 헤치며 더 깊숙이 들어왔다. - P312
서상화의 안경을 본 뒤로 송인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받지 못한 서상화의 마지막 전화가, 전화가 왔던 10월 15일 저녁 일곱시 사십삼분이라는 시간이 그 시간에 서상화가 어디에 있었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그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이 시시각각 송인화를 흔들었다. 서상화는 광산 흙과 바닷물이 엉켜서 질척대는 부둣가에 서있었다. 서상화는 붉은 흙으로 뒤덮인 광산의 어느 능선으로 걸어올라갔다. 서상화는 어둠이 내린 해변가에 서 있었고, 서상화는 햇빛이다 사라져버린 방파제 저쪽으로 자꾸만 걸어갔다. 그날 저녁 일곱시사십삼분 속에서 서상화는 매일 모습을 바꾸면서 찾아왔다. 그러다눈이 충혈된 채 조퇴를 하겠다는 오후로 되돌아갔고, 불안한 호흡으로 송인화 옆에서 걷기를 반복했다. 그날도 맑고 추운 날이었다. - P341
송인화는 바다와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한꺼번에 맞으며 고개를들었다. 광구 너머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새천년도로의 곡선이 보였다. 코끼리산과 유리골, 어항이 손에 잡힐 듯했다. 새벽이 오는 척주 바다를 보면서 송인화는 언젠가 서상화가 했던말을 떠올렸다. 아주 맑은 날엔 35 광구 꼭대기에서 울릉도가 보인다고 했다. 야간작업을 하다보면요. 오징어배 불빛이요, 수평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촘촘하게 정말 장관이래요. 광산 사람들은 그불빛을 보면 그래요. 울릉도 가는 고속도로라고. 송인화는 수평선을 따라 펼쳐진 불빛들을 보면서 소리내어 말했다. "상화야, 저기, 울릉도 가는 고속도로." 불빛들을 지우며 수평선 끝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라왔다. 송인화는 밝아오는 바다를 보면서 비로소 목을 놓고 울기 시작했다. 서상화가 없는 세상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 P357
는 흥미 있는 말을 들을 때나 장난기가 발동할 땐 눈밑애교살에서부터 반응이 왔다. 초롱초롱하게 뜬 눈 아래로 웃음기가 삭 번져가면 송인화는 또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겠구나 생각했다. 상화는 이모티콘도 꼭 자기 같은 캐릭터들만 골라서 썼다. 상화와 그동안 주고받은 메시지 창을 펼치면 척주를 몇 바퀴나 돌고도 남을 길이였다. 메시지 창안에서는 서상화가 보낸 이모티콘들이 여전히 꺅 소리를 내면서 뛰어오르기도 하고 보고 싶다면서 엉엉 울기도 했다. 그것들은 언제까지나 꺅과 엉엉을 반복하며 그 안에서 움직일 것이었다. - P360
송인화는 척주 시내를 멍하니 걷고 또 걸었다. 기계적으로 간판들을 읽으면서 걷기도 했고 땅만 보면서 걷기도 했다. 걷다보면 소망의 탑 사진이 붙어 있는 네모난 지중변압기가 나와 송인화는 그 앞에 한참씩 서 있었다. 식당에 들어가 물회를 시키고는 커버가 씌워진 벽걸이 선풍기만 올려다보다 그대로 나오기도 했다. 어느날은장학문구사와 다이소와 현대서점과 봉황관광을 보면서 걸었고 어느날은 미스터피자와 홈플러스와 홍채안경원과 남양유통 앞을 지났다. 별미식당, 월드스튜디오, 녹십초알로에, 예당피아노, 제일조은약국, 김내과, 보광당, 김밥천국, 배스킨라빈스, 백두대간호프, 영동농원, 장뇌건강원……… 송인화는 그런 간판들이 붙은 건물들 사이를계속 걸었다. - P360
뉴스와 신문에는 이십 년 가까이 멕소닐을 밀수해온 사이비 종교집단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일 킬로그램으로 칠십만 명 이상을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게 할 수 있는 멕소닐이라는 약이 연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죽을 것 같은 통증이 올 때 어떤 극적인 효과를 주는지도회자됐다. 멕소닐의 최대 제조국에 대한 얘기, 의료용이 아닌 마약용으로 쓰일 때의 유통 경로, 제약회사의 판촉 경쟁으로 인한 의사들의과다 처방 얘기들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공비 침투 때 이후로 척주가 이렇게 TV에 많이 나온 건 처음이라며 신기해했다. 폐타이어 배로 밀수한 약이 동굴에 보관돼 있었다는 게 밝혀지자사람들은 그게 이십일세기에 가능한 일이냐고 물었다. 약과 함께시신 몇 구가 나왔는지, 동굴에서 단체로 무얼 했는지, 그런 자극적인 얘기들 속에서 척주의 다른 이야기들은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송인화는 뉴스에 나오는 그 얘기들이 모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 P361
나뭇잎들은 이제 거리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송인화는 아직도 은행잎이 남아 있는 곳 하나를 알고 있었다. 보건소 은행나무 옆에 서 있는 소나무였다. 은행나무보다 키가 작은 그 소나무위에는 가을에 떨어져내린 은행잎들이 여전히 노란 색종이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눈이 내리고 다시 눈이 녹는 동안에도 소나무 위의 은행잎들은 거짓말처럼 그대로 있었다. 송인화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상화의 이름을 불렀다. 푸른하늘은하수를 잘하는 상화. 샤파 연필깎이를 십년 동안 고쳐 쓴 상화, 임연수김밥을 좋아하는 상화. 보건소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라가던 상화, 괘종시계보다 키가 큰 상화, 여덟 평짜리 약국에서 소아용 시럽을 따르며 살 수도 있었을 상화의 이름을. - P363
눈이 그치고 하늘이 갠 날 송인화는 오십천을 따라서 걸었다. 대기가 찼지만 햇빛이 많은 날이었다. 시멘트공장에서 동진 부두로 이어지는 컨베이어 벨트가 멀리 강 끝에서 부서졌다. 십팔 년 전에도 일년 전에도 몇 달 전에도 걷던 길이었다. 송인화는 강을 따라 걷다가문득 뺨이 따뜻해서 옆을 돌아보았다. 강물 위에 빛들이 내려앉아 자글거리고 있었다. 걸어갈수록 빛 무리가 왠지 자신을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송인화는 걸음을 조금 빨리해봤다. 빛무리도 같은 속도로따라왔다. 송인화는 다시 천천히 걸었다. 빛무리도 속도를 늦추며 따라왔다. 송인화가 걸음을 멈추자 빛 무리도 멈춰 섰다. 송인화는 그 자리에 서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송인화는 어른거리며 따라오는 그 따뜻한 것이 상화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송인화는 뺨으로 흐르는 것들을 그대로 둔 채 강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 P363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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