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여성혐오는 여러 불평등 중 하나일 뿐입니다. 이 책에서 나는 젊을 때 흑인 이웃들과 게이 친구들과 살았던 이야기, 좀더 나중에 자신들의 토지권과 문화 보전을 위해서 싸우는 아메리카원주민들과 함께했던 이야기도 적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나는그들이 겪는 억압뿐 아니라 그들의 뛰어남을 배웠습니다. 그들은내게 말하는 법, 생각하는 법, 물려받은 이야기들을 의심하고 더나은 이야기들을 찾는 법을 아주 많이 가르쳐주었습니다. - P7
지난 10년 동안, 세계는 이 만연한 폭력을 예전보다 훨씬 더많이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대화와 언어에서, 언론 보도와 문화적 재현에서, 사법 체계와 우리가 사는 공간의 규제에서, 그 밖의 여러 측면에서 그랬습니다. 내가 젊을 때 바랐던 대화가마침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나 또한 가끔 열렬히 반가운 마음으로 대화에 참여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 폭력은 예외적인 것. 규범을 벗어난 것, 일상의 여느 원칙과 관습과는 동떨어진 것으로여겨질 때가 너무 많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출간되어 많은 여성 독자에게 읽힌 페미니스트 회고록 중 일부는 끔찍하고 예외적인 폭력을 직접 겪은 여성이 쓴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책들이자칫 폭력은 우리 중 일부에게만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사실로만들까봐 걱정되었습니다. 폭력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영향을 받은 여자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남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 P8
젊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소멸을 수많은 방식으로맞닥뜨리는 것, 혹은 소멸로부터 달아나는 것, 혹은 소멸을 깨닫기조차 회피하는 것이다. 혹은 이 모두를 동시에 겪는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의 죽음은 의심할 나위 없이 세상에서 가장 시적인 주제다"라고 말했던 에드거 앨런 포 Edgar Allan Poe는 죽기보다 살기를 바라는 여성의 관점에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그 시절에 나는 다른 이의 시적 소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서 애썼다. 나의 시를 스스로 만들어보려고 애썼지만, 지도도 안내서도 달리 의지할 길잡이도 없는 터였다. 세상 어딘가에는 그런 것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었다. - P15
내가 무엇에 왜 저항하는지 모를 때가 많았기 때문에, 나의반항은 또렷하지도 일관되지도 꾸준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굴복만은 하지 않았던 시절, 혹은 늪에 빠져들면서도 몇번이고 다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의 수준으로만 굴복했던 시절의 기억이새삼스레 되살아난 것은 내가 현재 주변에서 같은 싸움을 치르는젊은 여성들을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물리적으로 살아남기위한 싸움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겹지만, 그것은 더 나아가 권리를 가진 인간으로서, 참여할 권리와 존엄과 목소리를 지닐 권리를 가진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었다. 살아남는 것을 넘어서 살아가기 위한 싸움이었다. - P16
하루가 태어나고 죽는 무렵에, 오팔색 하늘은 가끔 뭐라고 묘사할 언어가 없는 색깔이 된다. 황금색이 녹색을 거치지 않은 채어느새 파란색으로 변한다. 타오르듯이 따스한 색깔은 정확히 살구색도 진홍색도 금색도 아니다. 빛이 시시각각 달라지면서 하늘에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파란색들이 나타나서, 해가 있는 지점부터 저 멀리 다른 색들이 나타나는 지점까지 서서히옅어지면서 이어진다. 우리가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가는 어떤색을 놓치게 되지만, 묘사할 언어가 없는 그 색 역시 다른 색으로, 또다른 색으로 변한다. 색깔들의 이름은 가끔 거기 속하지 않는 것들까지 담고 있는 철장과도 같다. 이것은 언어 전반에도, 이를테면여자, 남자, 아이, 어른, 안전함, 강함, 자유로움, 진실됨, 검은색, 흰색, 부유함, 가난함 같은 말들에도 종종 적용되는 이야기다. 우리에게는언어가 필요하다. 하지만 언어란 늘 넘치고 깨지기 마련인 그릇들이라는 점을 알고 써야 한다. 너머에는 항상 무언가가 더 있다. - P19
어른이라는 말은 법적 성년에 도달한 사람들은 모두 단일한한 범주에 속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변해가는땅을 여행하면서 스스로 변해가는 여행자들이다. 그 길은 누더기같고 신축적이다. 어린 시절은 어떤 측면에서는 서서히 희미해지고, 또 어떤 측면에서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성인기는 설령 제대로 오더라도 작고 불규칙한 조각으로 나뉘어 온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일정에 따라 움직인다. 아니, 어쩌면 성장의 많은 단계가 정해진 일정 없이 일어난다고 말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전에 집이 있었어야 해당하는 말이지만, 어릴 때 살던 집을떠나서 당신만의 집을 꾸릴 때 당신은 거의 평생을 아이로 살아온사람이다. 물론 아이의 정의 자체도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 P25
젊은 그는 거듭 갈라지고 또 갈라지는 먼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앞으로 중요하고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낳는 결정을 무수히 내릴 테고, 그렇게 간 길을 되짚어 돌아가서 다시 다른 길을 밟는 경우는 아주 드물 것이다. 그는 무언가를 만드는 중이다. 삶을, 자기 자신을 만드는 중이다. 그것은 대단히 창조적일뿐더러 실패할 가능성이 없지 않은 사실은 조금 많은 아주 많은 비참하게 치명적으로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작업이다. 젊음은 위험한 사업이다. 영 씨의 건물로 이사했던 무렵, 시청 근처 광장을 걷다가 어느컬트 종교 집단의 신도들에게 붙들렸다. 1980년대 초는 1970년대내내 사회에 큰 해를 끼쳤던 컬트 종교 집단들이 싹 사라지진 않은때였다. 그들은 권위에 복종하도록 교육받은 사람들이 그 시대 특유의 무정부주의적 자유 속에 자유롭게 풀려났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결과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겉보기에는 급진적이지만 실상 맹목적인 복종과 엄한 위계로 회귀하는 보수적 방식으로서, 그 시절에 존재했던 두가지 상반되는 삶의 방식사이에 쩍 벌어져서 길 잃은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크레바스와 같았다. - P26
가끔은 그들이 부럽다. 스스로 만들어갈 인생의 긴 여정에서이제 출발점에 선 그들, 갈라지고 또 갈라질 길에서 수많은 결정을내릴 그들. 그들의 여정을 상상할 때, 나는 실제로 끝없이 갈라지는 오솔길을 머리에 떠올리곤 한다. 길은 나무가 우거져 어둑하다. 스스로 선택한다는 데에서 오는, 끝을 모르는 상태로 시작한다는데에서 오는 불안과 흥분이 그 길에 어려 있다. 내가 걸어온 길에 후회는 없다. 다만 여정의 대부분을 앞둔시기, 우리가 앞으로 다른 많은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단계에 이것이야말로 정녕 젊음의 장래성이 아닐까 향수를 좀느낄 뿐이다. 나는 이미 거듭 선택하고 선택했고, 한 길을 오래 걸으면서 다른 많은 길을 진작 지나쳤다. 우리가 아직까지는 되지 않은 다른 많은 존재가 앞으로는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것이 바로 가능성이다. 이것은 물론 무섭지만 짜릿한 일이다. 그리고젊었던 내가 맞닥뜨릴 갈림길들은 대부분 그 환한 집에서 살던 시절에 내 앞에 나타났다. 내가 영 씨 덕분에 살 수 있었던 집에서. - P29
(훗날 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현상을 알게 되었다. 그시절에 백인인 내가 그곳에 삶으로써 그 동네를 여유 있는 백인들의 구미에 맞는 공간으로 바꾸는 데 일조했으리라는 사실도 알게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젠트리피케이션이어떻게 작용하는지 몰랐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지어진 아름다운 목조건물들에는그 시대 고유의 풍성한 장식이 가득했다. 퇴창, 기둥, 선반으로 깎은 난간, 식물 문양이 많았던 장식용 몰딩, 비늘 모양 지붕널, 아치나 작은 탑이나 심지어 양파 모양 돔을 얹은 포치. 생물을 본뜬 곡선과 별난 세공이 많아서, 건물들은 꼭 유기물처럼 보였다. 지어진게 아니라 길러진 것처럼 보였다. 언젠가 뮤어우즈 국립공원의 산림 관리인이 내게 그런 건물을 보면 그것을 짓기 위해서 베어진 커다란 삼나무들이 떠오른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서해안에 자라는 그 큰 나무들도 우리 동네에 유령으로 존재했던 셈이다. - P42
내 사진가 친구 마크 클렛Mark Klet이 즐겨 하는 말마따나, 변화는 시간의 척도다. 시간이 흐르자, 작은 것들이 바뀌었다. 내가이사했을 때, 우리 건물에서 서쪽으로 한 블록 간 곳 모퉁이에는코닥 즉석사진 부스가 있었다. 필름으로 사진을 찍던 시절이었다. 길 건너편 주류 판매점 옆 모퉁이에는 유리로 된 전화 부스가 있었다. 부스는 나중에 주방용 후드처럼 생긴 덮개를 이고 판자벽에 설치된 공중전화로 바뀌었다가 더 나중에 휴대전화가 퍼지자 아예사라졌다. - P43
변화는 시간의 척도다. 나는 우리가 변화를 보려면 그 변화보다 느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한곳에서 사반세기를 산 덕분에 변화를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부터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서히 그렇게 되었다. 내가 계속 머무른 건물에 다른 사람들이 왔다가 떠났다. 잠시 머물다 떠난 그들도 자신은 안정된 동네를 거쳐간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그들자신이 동네를 변화시킨 요소였다. 공간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그곳을 흑인이 점점 더 적고 중산층이 점점 더 많은 동네로 바꿔놓은물결의 일부였다. 이후에 새로 온 사람들이 사는 공간은 그들이 돈으로 구한 장소일 뿐, 예전처럼 모두에게 소속된 장소는 아니었다. 동네는 그렇게 점점 덜 동네다워졌고, 활력은 사라졌다. - P46
가난은 가끔 과거를 보전하는 역할을 한다. 내 집은 처음 지어진 뒤로 변한 데가 거의 없는 공간이었다. 황금색 마룻널은 원래의 것이었고, 씩씩 김을 내뿜는 라디에이터도, 건물 뒤쪽 계단에난홈통으로 쓰레기를 버리면 두층 아래의 대형 쓰레기통으로 쓰레기가 곤두박질치는 활송장치도 그랬다. 부엌의 붙박이 사이드보드와 키가 천장까지 닿는 유리문 찬장 맞은편에, 그러니까 싱크대 옆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이미 오래전부터 쓰이지 않은 초창기모델의 소형 냉장고도 마찬가지였다. - P47
광대한 하늘, 바다, 먼 수평선, 창공을 맴도는 야생 새들에 견주면 내 근심과 고뇌가 하찮아진다는 점에서, 출렁이는 바다와 긴백사장은 또다른 집이자 피난처였다. 그 작은 집도 마찬가지였다. 그 집은 내 피난처였고, 인큐베이터였고, 껍데기였고, 닻이었고, 출발대였으며, 낯선 이가 준 선물이었다. - P55
하지만 내가 앉아 있는 책상은 남자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여성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나와 같은 이들이 죽거나침묵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서 자라는 것이 내게 어떤의미였는가, 내가 어떻게 목소리를 갖게 되었고 어떻게 그 목소리를홀로 책상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묵묵히 말할 때 가장 유창해지는 목소리를써서 이전에 말해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말하려고 애쓰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할 시점인 듯하다. - P63
이 문제는 내가 몸담은 사회에, 아마도 더 나아가서 세상에뿌리박은 문제였다. 이 문제로부터 살아남으려면 우선 문제를 이해해야 했고, 궁극적으로는 나 혼자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 상황을 바꿔야 했다. 그런데 고통의 일부이기도 한 침묵을 깨뜨릴 방법이라면 여러가지가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 나와 남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저항이었고, 생기를 되찾는일이었고, 힘을 얻는 일이었다. 그것은 나무들의 숲이 아니라 이야기들의 숲이었고, 글쓰기는 그 숲을 통과할 길을 그리는 일이었다. - P64
전쟁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보통 우리의 적이다. 반면 여성살해 femicide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우리의 남편, 남자친구, 친구, 친구의 친구, 길에서 만난 남자, 일터의 남자, 파티에서 만난 남자, 같은 기숙사의 남자다. 이 글을 쓰는 주에 뉴스로 보도된 살인 사건 가운데 한두 사례만 고르면, 어떤 남자는리프트"로 차를 불렀다가 임신한 운전자가 오자 칼로 찔러 죽였고, 또 어떤 남자는 자신이 부모에게 쫓겨났을 때 받아주었던 젊은 - P66
여자를 총으로 쏴 죽였다. 모리스에 따르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자신의 가장 끔찍한 기억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모리스는 또 전쟁이 사람들로 하여금 공격과 부상과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게 하는 환경인데다가 꼭 우리 자신이 아니라도 주변인들이그런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설령 우리 자신은 육체적으로온전하더라도 그런 환경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똑같이 겪을 수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그런 두려움은 원인이 되는 사건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우리를 따라다닌다고 한다. 젠더폭력의 트라우마를논할 때, 사람들은 그것이 단 한번의 끔찍하고 예외적인 사건이나관계였던 것처럼 묘사한다. 마치 별안간 물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평생 물속을 헤엄쳐왔다면 어떨까? 물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었다면 어떨까? 많디많은 여성이 영화에서, 노래에서, 소설에서, 세상에서 살해되었다. 그 죽음 하나하나가 내게는 작은 상처, 작은 짐, 피해자가 나일 수도 있었다고 말하는 작은 메시지였다. - P67
앞선 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은 강간이 힘의 문제이지 성적 쾌락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분명 세상에는 자신의 힘과 여자의 무력함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에로틱한 일로 여기는 남자들이 있다. 여자들 중에서도 소수는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무력하고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을 에로틱한 것으로 착각하고, 그에 따르는 자아 감각과 서사를 받아들여야 할지 물리쳐야 할지고민한다. 2018년에 재클린 로즈Jacqueline Rose는 이렇게 썼다. "성희롱은 대단히 남성적인 수행 행동이다. 남자는 그 행동을 통해서 대상에게 힘을 가진 쪽은 자신이라고 알리고 싶어하고 이것은 사실이다 나아가 그의 힘과 섹슈얼리티는 하나이자 같은 것이라고 알리고 싶어한다." - P71
사람들은 그런 현실을 자연스러운 것 혹은 날씨처럼 불가피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날씨가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불가피하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화였다. 특정 사람들의 행동을 용인하고, 못 본 척하고, 성애화하여 해석하고, 봐주고, 무시하고, 묵살하고, 경시하는 사회 구조였다. 내가 볼 때 적절한 대응책은 문화와 상황을 바꾸는 것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기 운명이 자기 것이 아니고,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니고, 자기 삶이 자기 것이 아닌 순간에 처한 여성은 어쩌면 나일 수도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쫓기듯이 살았다. 그탓에 정신 구조가 달라졌는데, 이 변화는 영영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폭력의 핵심은 피해자에게 그가 완벽하게 자유로운 날은 영영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하게끔 하는 것 - P74
"우리는 종종 누군가가 침묵당했다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이것은 누군가가 말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내 경우에는 침묵당한 것이 아니었다. 내 말이 저지된 일은 없었다. 내말은 아예 시작되지 않았다. 혹은 어떻게 저지되었는지 기억나지않을 만큼 일찌감치 저지되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강요하는 남자들에게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내가주장을 말할 수 있다는 생각, 상대에게 내 주장을 존중할 의무가있고 실제로 그럴 의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 말이 사태를악화시키는 게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 P78
나의 자유는 걷기였다. 걷기는 나의 즐거움, 비용을 감당할수 있는 교통수단, 장소를 이해하는 방법, 세상에 존재하는 방법, 내 삶과 글을 통해서 생각하는 방법, 내가 선 위치를 아는 방법이었다. 안전하지 않으니까 걷기를 그만두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현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지만, 나대신 다른 사람들이흔쾌히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권했다. 죄수가 되라고. 자유롭게 다닐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은둔자처럼 처박혀 있으라고. 내가 늘 어딘가로 가고 싶어서 안달했던것은 한편으로는 내 삶을 만들고 싶고 다른 존재로 변하고 싶고 무언가를 해내고 싶다는 추상적 욕구의 발현이었지만, 움직인다는구체적 행위 자체가 그 열정의 표현이자 압박의 배출구가 되어주기도 했다. 나는 걷기를 포기할 마음이 결코 없었다. 걷기는 내가생각하는 수단, 발견하는 수단, 나 자신이 되는 수단이었다. 걷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 모두를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 P79
그래도 만약 갑옷을 입을 수 있었다면, 어떤 면에서는 자유로웠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시절에 나는 실제로 갑옷을 입었고 그래서 자유와 옥죄임을 둘 다 느끼면서 살았는지도 모른다. 요즘도 가끔은 그렇지만, 그 시절에 나는 정말로 딱딱하고 빛을 반사하고 안을 보호하는 갑옷 같은 존재였다. 우리는 자칫 그 갑옷의 표면에만 몰두하기 쉽다. 즉 기지와 경계심을 발휘하여 공격에 대비하는 데에만 몰두하기 쉽다. 혹은 스트레스를 과하게 받은 나머지 근육이 딱딱해지고마음이 속박되는 지경에 이르기 쉽다. 자신에게 부드러운 깊이가있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인생의 중요한 일들은 대개 표면이 아니라 더 깊은 곳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스스로 갑옷이되기란 오늘날에도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서 줄곧 스스로 죽는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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