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으로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 나지막하게 보이지만 멀리는 아파트가 우뚝우뚝하고, 한쪽으로는 잡목이 우거진 산이 가깝게도 멀게도 중첩되는 풍경 속에 앉아서 ‘내겐 너무 완벽한 빈‘ 을 읽는다.
너무 달라서 닮아있는 풍경이라 그런지 아주 머나먼 곳을 떠도는 기분이다.


서문

오래된 도시에남아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찾아서


《유럽도시기행》 1권을 내고 제법 긴 시간이 지났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해외여행이 불가능해진 상황이라서 2권 출간을두 해 넘게 늦추었다. 이번에는 빈 부다페스트 프라하 · 드레스덴이야기를 담았다. 다음에는 서쪽 이베리아반도의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리스본 포르투를 탐사하려고 한다.
2권의 중심은 빈이다. 문화 예술에 한정할 경우빈은 파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수준이 높고 가진 것이 많다. 오랜 세월 합스부르크제국의 수도였고, 19세기 후반 짧은 기간에 낡은 중세 도시에서 벗어나 유럽의 첫손 꼽는 문화 예술 도시로 도약했으며, ‘비엔나커
‘피‘에서 모차르트의 음악까지 다양한 매력으로 사람을 끌어들인다.
특히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는 여행자는 빈을 빠뜨리지 않는다.
부다페스트와 프라하는 합스부르크제국의 영향권에 있었던 만큼 정치·경제·문화 · 역사 등 모든 면에서 빈과 깊이 얽혀 있다. 하지만 도시 공간의 구조와 문화적 분위기는 크게 다르다. 빈이 지체높은 귀족이라면 부다페스트는 모진 고생을 했지만 따뜻한 마음을간직한 평민 같았고 프라하는 걱정 없이 살아가는 ‘명랑소년‘을 보는

듯했다. 온몸이 부서지는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겨우 깨어나 재활 중인 중년 남자라고 해도 될 드레스덴은 프라하에 갈 때들르기 좋은 도시여서 2권에 넣었다.
1권 표지에는 네 도시의 대표 건물을 내세웠다. 유럽의 역사를바꾸었던 그 도시들에는 문명사의 한 시대를 증언하는 집이 있었다.
하지만 2권의 도시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보다는 도시의 역사에자신의 이름과 행적을 각인한 사람의 모습이 더 크고 뚜렷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들을 표지에 넣었다. 빈은 시씨 황후, 부다페스트는 언드라시 백작, 프라하는 종교개혁가 얀 후스다. 드레스덴은 딱히 내세울 대표 인물을 정하기 어려워서 랜드마크 1번에 해당하는 성모교회를 선택했다. 그 사람들의 삶과 성취, 성모교회의 죽음과 부활은 내마음에 파르테논 콜로세움 · 아야소피아 에펠탑 못지않은 여운을남겼다.

1권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를 꼼꼼히 살폈다. 나는 도시의 건축물 · 박물관·미술관 ·길·광장·공원을 ‘텍스트(text)‘로 간주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콘텍스트(context)‘를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도시는 콘텍스트를 아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주며, 그 말을 알아듣는 여행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깊고 풍부한 감정을 느낄 수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소화하기 어렵다거나 거기 사는사람들의 일상이 보이지 않아 아쉽다고 하는 독자가 적지 않았다.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지적이다. 그렇지만 무엇을 크게 바꿀수는 없었다. 평범한 한국인 단기여행자와 같은 방식으로 다니고, 그런 여행자에게 유익한 정보를 추려 제공할 목적으로 《유럽도시기행》

시리즈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욕심이 지나쳤는지도 모르겠다. ‘콘텍스트‘를 이야기하려면 ‘텍스트‘를 먼저 제시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한 도시의 왕궁 · 성당.교회 · 박물관 · 거리 · 광장은 복잡하게 얽힌 입체여서 글로 보여주기 어렵다. 그 도시들을 가본 적이 있는 독자가 더적극적이고 우호적인 평을 남긴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텍스트‘를보지 않은 사람은 ‘콘텍스트‘의 가치를 알기 어렵다. 사진을 많이 실으면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무한정 실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니번거롭더라도 도시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검색해 가면서 읽기를 독자들에게 권할 수밖에 없다. 해보면 의외로 재미가 있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독자들과 공유하면 좋겠다고 판단한 정보를추려서 책을 썼다. 그 정보가 객관적으로 중요한 것이라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 도시들의 여러 공간에서 누구나 같은 감정을 느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이 그렇듯 여행도 정답은 없다. 저마다 자신이원하는 방식으로 해나가면 그만이다. 이미 밝혔듯, 이번에도 내가 독자들에게 기대하는 평가는 하나뿐이다. "흠, 이 도시에 이런 게 있단말이지. 나름 재미있군."
코로나19 사태의 끝자락에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2022년 7월유시민

빈은, 책으로 말하자면, 유명한 인문학 고전과 비슷하다. 명성 높은 인문학 고전은 모르면 교양인이 아닌 것 같아서 읽는 경우가 많다. 대단한 내용이 들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다 읽어도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내게는 플라톤 · 공자 · 단테· 괴테 등의 책이 다 그랬다. 빈에 발을 들여놓았을때 내 심정은 그런 책들을 펴들었던 때와 다르지 않았다.
빈은 명성만큼 대단해 보였다. 도심의 모든 공간이 영화 속 같았다. 건물은 하나같이 크고 멋졌으며 거리는 넓고 깨끗했다. 상가의 쇼윈도와 사람들의 옷차림에 부티가 흘렀다. 카페와 레스토랑은 실내장식이 화려했고 음식값도 그만큼 비쌌다. 바로크 스타일 건물에 들어선 공공 전시관과 세련미 넘치는 민간 갤러리에는 미술 교과서에서 보았던 거장들의 그림과 조각이 넘쳐났고, 오페라하우스와 음악협회 공연장 등에서는 유럽 최고 수준의 악단이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비롯한 대가의 작품을 공연했다.  - P15

 그런데 빈에서는 어쩐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나만 그런가 해서 그게 더 불편했다. 그런데 빈을 버리고 떠난 황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황후도 버거워했던 곳이라잖아!‘
인문학의 ‘위대한 고전‘을 읽을 때는 서문부터 끝까지 차근차근읽어야 한다. 멋대로 건너뛰거나 앞뒤를 바꿔 읽으면 더 힘들다. 빈여행도 그랬다. 무엇부터 봐야 할지, 어디에서 출발해 어떤 곳을 거쳐 어느 지점에서 하루 일정을 끝내야 좋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내키는 대로 다니라든가, 길을 잃어야 여행의 진짜 재미를 알 수 있다든가 하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단기여행자가 선택할 수 있는 탐사경로는 하나뿐이었다. 링을 따라 걸으면서 안팎을 살핀 다음 버스나트램을 타고 외곽의 명소를 방문하는 것이다. 숙소가 어디든, 링의 어느 지점에서 출발하든, 그건 상관이 없다. - P16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산꼭대기에 오른다. 몸 고생 없이 눈 호강을 즐길 수는 없을까? 케이블카와 승강기는 대답한다. 와이낫? 성당의 남탑 슈테플에도 그게 있다. 340개 넘는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된다. 슈테플 전망대는 파리 에펠탑 전망대처럼 도시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시내뿐 아니라 공항 관제탑처럼 보이는 외곽의 쓰레기소각장, 멀리북동쪽 강 건너편의 도나우 전망대, 남동쪽 변두리의 벨베데레 궁전도 훤히 보였다. 비너발트(Wienerwald, 빈 숲)가 넓게 펼쳐진 서쪽 외곽의 구릉지대 말고는 사방이 다 평지여서 그리 감탄할만한 경치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뜻밖의 배움을 얻었다. 대성벽을 왜 쌓았고 왜 헐었는지 알 수 있었다. - P22

링은 워낙 넓은 길이라 슈테플 전망대에서 보아야 그 모양과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링을 따라 가상의 성벽을 세우고 바깥쪽의 건물들을 지우자 중세 도시 빈이 보였다. 그 큰 제국의 수도가 그토록작았다니 믿기지 않았다. 서울 남산 전망대에서 본 한양도성이 떠올랐다. 숭례문-서대문-인왕산-북악산을 돌아 낙산-동대문을 거쳐 남산으로 다시 이어지는 한양도성의 길이는 18.6 킬로미터다. 그것이 조선의 수도 한양의 크기였다. 링은 북쪽 도나우 운하 구간까지 다 합쳐도 5.4 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넓힌 제국 - P26

의 수도라면 그렇게 작을 수 없었을 것이다. 높고 두꺼웠던 빈의 대성벽은 합스부르크의 권력자들을 지배했던 두려움을 드러낸 건축물이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그런 감정을 이겨냈기에 그 성벽을 길로 바꾸는 결단을 할 수 있었다. - P27

대성벽이 없었다면 빈은 일찍이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었을지 모른다. 1453년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오스만제국 군대는 여세를 몰아 헝가리와 체코 일대를 장악한 다음 1529년 빈을 포위했다. 빈 다음 차례는 독일과 프랑스였다. 유럽 기독교 세계는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러나 빈은 오스만제국 군대의 포위 공격을 견뎌냈다. 성벽을 더 튼튼하게 쌓아 1683년 오스만제국의 두 번째포위 공격도 물리쳤다. 알프스의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해 철수한 적군의 요새에서 청동 대포를 3백 개 넘게 노획한 빈 사람들은 그것을녹여 18톤짜리 종을 만들었다. 그게 빈의 대표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품메린(Pummerin)이다. 슈테플 하단에 매달아 두었던 품메린이 제2차세계대전 막바지 러시아군의 폭격에 맞아 크게 부서지자 오스트리아정부는 전쟁이 끝난 후 무게가 4톤이나 늘어난 두 번째 품메린을 만들어 슈테판성당의 북탑인 ‘독수리탑‘에 걸었다. - P27

온몸을 적셔 준 ‘비엔나커피‘의 달콤함이 물 밑으로 가라앉는 듯한 우울함을 덜어주었다. ‘이성은 고상할지 몰라도 사람의 내면을 항구적으로 지배하지는 못해 매 순간 더 강하게 인간을 끌어당기는 것은 감각인지도 몰라. 어때? 그런 것 같지 않아? ‘비엔나커피‘는 내게그렇게 말했다. 잠깐, 오해를 피하려면 ‘비엔나커피‘라고 따옴표를 한이유를 말해야겠다. 빈에는 ‘비엔나커피‘가 없었다. 딱 한군데, 부다페스트행 기차를 기다렸던 중앙역 로비의 비스트로에 ‘비엔나커피‘
라고 써 붙여 놓은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건 ‘비엔나커피‘가 아니었다. 우리나라 ‘길다방 커피‘에 생크림을 올린,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은 정체불명 음료였다. - P32

성벽과 길처럼 대조적인 쌍이 달리 또 있을까성벽은 안과 밖을 차단하지만, 도로는 모든 것을 뒤섞는다. 대성벽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길을 내자 빈과 외부세계의 관계가 극적으로 바뀌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강력하고 새로운 무기 때문에 군사적 가치를 상실한 성벽이 도시의 확장과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판단했다. 외성벽 바깥쪽에 민간 가옥이 제멋대로 들어섰고 대성벽과 외성벽의 사이 공간역시 마찬가지 상태였다. 합스부르크제국이 전통적으로 유대인을 너그럽게 품어준 탓에 북쪽의 도나우 운하 좌안에는 거대한 유대인지구가 형성되어 있었다. 성벽 안팎의 인구가 50만 명에 육박했지만, 성벽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링을 한 바퀴 돌면서 유럽 역사의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건축양식을 거의 다 만났다. 건축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빈을 지나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슈테판 성당과 호프부르크의 구왕궁, 쇤브룬과 벨베데레 궁전은 중세의 유산이다. 그 밖의 이름난 건축물들, 예컨대 빈대학교 본관, 오페라하우스, 호프부르크 신왕궁, 예술사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국회의사당, 시청사, 응용예술 박물관, 증권거래소, 제체시온 등은 대부분 대성벽 해체 후 짧은 기간에 지어졌다. 모두링 주변에 있고 건축양식은 제각각이다. 그래서 빈의 건축양식을 ‘비엔나 스타일‘ 또는 ‘링 양식‘이라고 한다. 뭐라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잡다한건축양식의 집합이라 다른 이름을 붙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 P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