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이상문학상 수상 소감

당신의 궤적
김애란


겨울이다.
눈밭에 난 선배들의 발자국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발밑으로 전해지는 한기가
복되고 서늘하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짐작으로 알던 것을 몸으로 익히며
누군가의 보폭을 쉽게 판정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그 자리에 다른 짐작을 앉힌다.

길 위에 ‘방향‘을 만든 것은
당신의 무게.
혹은 이 걸음과 다음 걸음 사이에 놓인
고민의 시차

가끔 그 고민이 궁금해
당신이 쓴 말과 쓰지 않은 말,
쓸 수 없던 말들을 가늠해본다.
무릎 꿇어 그 자국에 손을 본다.
몇 명이 지나갔는지 모를

겹겹의 발자국에 눈이 시리다.
한 발짝 또 한 발짝겨우 깊어져가는 겨울.

길에서 과분한 소식을 들은 데다
발도 시려서, 방정맞게 좀 움직여볼까 하다
능청은 잠시 고요에게 맡겨두기로 하고
허공에 입김을 내뱉으며 맑게 웃는다.

그런 뒤 조금 더 딴청을 피우려다가
문득 나와 같은 시대에 같은 자리서,
글을 쓰고 있는 이들을 떠올려본다.

주머니서 ‘동료‘ 라는 말을 꺼내 한참 들여다본다.
그러곤 목례하듯,
그 이름에 입 맞추려
고개 숙인다.

나에게는 오래된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은 길다. 그 이름을 다부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평생이 필요하다. 어떤 이는 그것도너무 짧은 기간이라 말한다. 몇백 혹은 수천 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불러야 겨우 호명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도 누가 정말그걸 다 불렀다면 그때 그가 발견하는 건 내 이름의 길이가 배로늘어났다는 사실일 거라 말한다. 내 이름을 듣고 나도 내 이름을잊었다. 내 이름이 궁금할 적마다 나는 내 이름이었거나 내 이름의 일부였을지 모를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면 어렴풋이 몇몇 단서가 떠오른다.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몇 살일까.

---- 침묵의 미래 - P123

태어나 내가 처음으로 터뜨린 울음, 어쩌면 그게 내 이름이었을지 모른다. 죽기 전, 허공을 향해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어떤 이의 절망, 그것이 내 얼굴이었을지 모른다. 복잡한 문법 안에 담긴단순한 사랑, 그것이 내 표정이었는지 모른다. 범람 직전의 댐처럼 말로 가득차 출렁이는 슬픔, 그것이 내성정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내 이름을 못 된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순 있다.
당신이 누구든 내 말은 당신네 말로 들릴 것이다. - P124

나는 오늘 태어났다. 그리고 곧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공평하게 하루씩 산다. 노인으로 태어나 하루 더 늙은 뒤 노인으로죽는다. 그 하루는 어느 종의 역사만큼 길며, 그 종의 하품만큼짧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우리의 이력을 단숨에 학습한다. 전생으로 태어나 전생으로 죽는다. 우리가 우리의 고유한 단어를 발음하면, 저멀리 심연으로부터 여러 개의 시간이 물수제비뜬듯 퐁, 퐁, 퐁 하고 단번에 뜀박질해 다가온다. 시공이 밀려온다. 아마 당신네 말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오래된 말이기만 하다면,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몇명일까. - P124

"나는 이 세계에서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 순간, 그 말에서 빠져나온 숨결과 기운들로 이뤄진 영이다. 나는 커다란 눈(目)이자 입(ㅁ)하루치 목숨으로 태어나 잠시 동안 전생을 굽어보는 말(言)이다. 나는 단수이자 복수, 안개처럼 하나의 덩어리인 동시에 각각의 입자로 존재한다. 나는 내가 나이도록 도운 모든 것의 합, 그러나 그 합들이 스스로를 지워가며 만든 침묵의 무게다. 나는 부재의 부피, 나는 상실의 밀도, 나는 어떤 불빛이 가물대며 버티다 훅 꺼지는 순간 발하는 힘이다. 동물의 사체나 음식이 부패할 때 생기는 자발적 열이다. - P125

나는 구름처럼 가볍고 바람처럼 분방해 시시각각 어디로든 이동한다. 그러다 나와 비슷한 것과 쉽게 결합한다. 다른 영과 만나몸을 섞는다. 몸을 불려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그늘로 단어에 수의를 입힌다. 나는 시원이자 결말, 미지이자 지, 거의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노래다. 나는 이렇게밖에 나를설명하지 못한다. 다른 부족의 몇몇 문법을 빌려 말한대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겐 뚜렷한 얼굴이나 몸통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우리가 누구인지 안다. - P125

취침시간 준수는 기본이다. 이들은 전시실에 있을 때나 자신인 척할 뿐 해가 지면 중앙식으로 지어진 기숙사에서 중앙식으로잔다. 밥도 규격화된 식판에 받아 중앙식으로 먹고 용변도 정해진장소에서 중앙식으로 본다. 그렇다고 이들이 ‘중앙‘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이들은 단체 사진 속에서 점점 흐릿해져가는 유령처럼모호하게 존재한다. 단지에선 이들에게 중앙 언어를 체계적으로가르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의사소통 체계가 통일되면 문제가생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관리자들은 각 언어의 고유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타 부족끼리 말 섞는 걸 금지했다.
- P134

혈기 좋게 항의하던 이들도 이제 나이를 먹어 무거운 침묵 속에 잠긴 노인이 됐다. 마지막 화자가 됐다. 박물관은 해당 언어의 마지막 사용자가 세상을 떠도 전시실을그대로 유지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전시관에선 보름에 한 번꼴로방 하나가 비었다. 생전 화자가 앉아 있던 자리는 마네킹이 대신했다. 칠벗겨진 입술로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어쩐지 늘 한 치수커 보이는 옷을 입고서였다. 더불어 전시실 앞에는 압류 딱지마냥붉은색으로 ‘‘이라는 의미의 중앙어가 박혔다. - P135

이곳에는 그 언어만큼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살아간다. 그중 한 노파는 글을 알지 못하는데 수만 년 된 서사시를 한 줄도 틀리지 않고 끝까지 읊는다. 마치 자기 가슴에 돋을새김한 점자하나하나를 공들여 더듬어가는 모양새다. 그녀는 단지 ‘아름답다‘
는 이유로 수집의 표적이 된 아라비아오릭스의 뿔처럼 사라질 운명을 타고났다. 이곳에서 가장 나이든 축에 속하는 어떤 영감은어린 시절 언어학자들을 따라다니며 등짐을 져 나르던 소년이었다. 소년은 학자들이 바다 건너에서 가져온 커다란 ‘녹음기‘를 어깨에 진채 강을 건너고 구불구불한 골짜기를 지나 높은 산에 올랐다. 소년은 자기가 등에 지고 다니는 그것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따금 그 안에서 소년이 아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학자들은 몇몇 부족의 서사시를 녹음하기 위해 무려 쌀 한 가마니 무게에 달하는 알루미늄 디스크를사용했다. 소년은 그걸 허허벌판 첩첩산중 어디든 들고 다녔다. - P138

나는 나무에 그려지고 돌에 새겨지며 태어났다. 내 첫 이름은
‘오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 필요에 의해 나를 점점 ‘이
‘해‘로 만들었다. 나는 내 이름이었거나 내 이름의 일부였을지 모를 그 낱말을 좋아했다. 나는 복잡한 문법 안에 담긴 단순한 사랑, 단수이자 복수, 시원이자 결말, 거의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노래다. 하루치 목숨으로 태어나 잠시 동안 전생을 굽어보는 말이다. 내 몸은 점점 붇고 이름 또한 길어져, 긴 시간이 흐른 뒤 누구도 한 번에 부를 수 없는 무엇이 됐다. 그렇지만 이제나는 이 세계를 돌아가게 하는 동력, 쓸모 있는 죽음, 단지 그뿐인채로 사라진다. 저기 거대한 금속관 속으로 향하며 소수언어박물관의 자랑, 중앙분수대를 떠올린다. 유리구 안에 갖은 형태의 활자가 분방하게 떠다니는 지구본 모양의 특별한 조형물을. - P145

활자는 밝은 조명을 받으며 오전 내내 춤추듯 투명하게 떠다녔다. 그러다정오가 되면 잠시 정지했다. 꽃잎 모양으로 갈라지는 지구본 아래로 경쾌하게 쏟아졌다. 나는 그 광경이 늘 아름답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악몽 같은 아름다움이었을까. 앞으로도 지구가 꾸는 이예쁜 꿈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죽은 뒤 한번 더 죽으면서도나는, 그 눈부신 장면으로부터 쉽게 눈을 떼지 못한다. - P146

1970년대 때깔 혹은 낙관적 파랑을 등에 인 채. 코닥산 명도, 후지식채도에 안겨 있다. 어느 때는 너무 흐릿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누군가를 향해, 그 누군가가 원한 미래를 향해 해상도 낮은 미소를짓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사진 속에 붙박인 무지, 영원한 무지는내 가슴 어디께를 찌르르 건드리고는 한다. 우리가 뭘 모른다 할때 대체로 그건 뭘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뜻과 같으니까. 무언가 주자마자 앗아가는 건 사진이 늘 해온 일 중 하나이니까. 그러니 오래전, 어머니가 손에 묵직한 사진기를 든 채 나를 부른 소리, 삶에 대한 기대와 긍지를 담아 외친 "정우야"라는 말은, 그 이상하고 찌르르한 느낌, 언젠가 만나게 될 당장은 뭐라 일러야 할지 모르는 상실의 이름을 미리 불러 세우는 소리였는지 몰랐다.

---- 풍경의 쓸모 - P151

그뒤 아버지를 만난 적은 없다. 오년전, 결혼식장에서 한 번봤지만 그건 ‘만났다기보다 ‘스쳤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자리에 잠깐 있었다. 어머니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랐던 시간만큼 있었다. 어머니는 사돈댁에 흉잡히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버지와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는 프로게이머, 프로골퍼 할 때 ‘프로‘ 부모처럼 식이 끝날 때까지 미소를잃지 않았다. - P154

‘다른 집‘ 사람이 된 뒤에도 ‘우리집‘ 행사를 챙기는 건 아버지가 자주 해온 일 중 하나였다. 두 눈을 가린 사람이 손끝 감각에의지해 사물의 이름을 알아맞히듯, 아버지는 ‘선물‘의 형식을 빌려 인생의 중요한 마디마디를 더듬고 기념하려 애썼다. 내가 알기론 형편이 정말 어려울 때조차 그랬다. 어머니와 헤어진 뒤 아버지는 매달 규칙적으로 우리에게 생활비를 보내왔다. 처음 몇 년은백만원씩, 어느 날부터 팔십만원씩, 나중에는 오십, 삼십으로 내려간걸로 안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보내왔다는 것도. 그러다 마지막으로 보낸 액수가 이만 몇천원이었던가. 입금이 늦어질 경우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반드시 연락했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겨울, 방 한쪽에 잘 개어놓은 이불 같은 사람. 반듯하고 무겁고 답답한 사람.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불미스런 일로 학교 일을 관두고 강남 어디 테니스장에서 코치 겸 심판을 맡고 있단 얘기를 들었을 때 아버지와 그 자리가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뒤 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식 때 전자사전, 대학원 입학식 땐 넥타이를, 군 입대 즈음엔 손목시계를 보내왔다.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그러나 평범하기 짝이 없는 물건들이었다. 모두가하는 만년필, 모두가 주는 꽃다발, 그런 그중 홍삼진액은 내가 아버지로부터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이었다.  - P155

한국은 겨울인데 태국은 여름이었다. 일 년에 세 마디, 결이 다른 삼계가 있다지만 나 같은 한국 사람에겐 그저 ‘보통 여름‘과
‘후텁지근한 여름‘ ‘몹시 더운 여름‘으로 느껴질 따름이었다. 관광버스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한국 날씨와 뉴스, 주가와 환율을 확인했다. 1월, 연이은 한파와 폭설 속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분주해 보였다. 반면 차창 너머 여름은 느긋했다. 푸르고 풍요롭고 축축해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된 정보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손에 스마트폰이 아닌 스노볼을 쥔 기분이었다. 유리볼 안에선 하얀 눈보라가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인 시끄럽고 왕성한 계절인, 그런 아내는 여기까지 와서 인터넷을 하냐며 핀잔을 줬다. 무릎 위에는 벌써 몇 개째 까먹은 멍키바나나껍질이 쌓여 있었다. - P156

모교에서 첫 강의를 트고, 이 고장 저 고장으로 강의를 나가기시작했을 때, 고속도로 주변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좀 심란했다.
여행중 몇 번 오간 길인데도 그랬다. 풍경이 더이상 풍경일 수 없을 때, 나도 그 풍경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 순간 생긴 불안이었다.
서울 토박이로서 내가 ‘중심‘에 얼마나 익숙한지, 혜택에 얼마나길들여졌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내가 어떻게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 잘 보였다. - P158

해가 지면 벌판 위로 순식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지방 소도시는 서울보다 저녁이 빨리 찾아왔다. 강의를 마치고 버스에 오르면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더불어 이상한 흥분과 각성도 약기운마냥맴돌았는데, 어느 땐 누가 아무리 어려운 질문을 해도 대답해줄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길에서 맞는 어둠은 매번 낯설었다. 밖은 깜깜해 지금 내가 지나는 데가 어딘지,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럴 땐 내가 어딘가 무척 먼 곳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버스는 ‘도시가 아니면서 도시가 아닌것도 아닌‘ 공간을 한참 가로질렀다. 미분양 아파트와 아웃렛, 비닐하우스와 공장, 공원묘지와 화원, 진흙오리구이며 장어구이 따위를 파는 보양식당과 프로방스풍 모텔을 비껴갔다.  - P158

팔년 전 강의를 처음 맡게 되었을 때 나는 신입 사원처럼 좀 들떠 있었다. 갑갑한 도서관을 벗어나 나도 이제 사회적인 활동‘이란 걸 좀 해보나 싶고, 어머니와 여자친구에게 면이 서는 것 같아서였다. 동시대 대중가요나 애니메이션 자료를 이용해 신선한 커리큘럼을 짜는 것도 재미있었고, 미혼의 ‘젊은 강사‘에게 호의적인 눈빛을 보내는 학생들의 태도와 지적 긴장도 싫지 않았다. 강의 자체가 지닌 연극성이랄까, 많은 사람 앞에서 ‘떠들어야 하는직업이 주는 흥분과 수치조차 마음에 들던 때였다. 대학은 대학인지라 봄에는 연두가 가을에는 주황이 어여뻤다. 애들은 애들인지라 순수한 동시에 예민했고 가끔은 탄식이 나올 정도로 교만하나 무지했다. 캠퍼스 안에는 성적 괴팍함과 도덕적 우월감이 섞인채 부유했다. 더불어 알 수 없는 패배감과 무력감도 무거운 공기처럼 맴돌았는데, 휴학과 편입이 잦은 곳일수록 심했다. 그렇다고이름 있는 대학의 학생들이라 해서 크게 다르진 않았다. - P159

곽교수는 ‘단계‘ 없이 대화하는 사람이었다. 좋게 말하면 직관적이고 나쁘게 보면 제멋대로인.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않아도소해 보지 않는 환경에서 살아왔거나 반대로 그렇게 잃은 것들을향해 복수하듯 떠들어대는 성격인 듯했다. 그런데 그게 마냥 수다스럽지만은 않아 힘을 빼고 높은 패를 던질 땐 ‘선수‘ 같았다. 곽교수는 자신이 이공계열 교수들과 친하다며 그 판 사람들은 꼬인게 덜해 좋다고 했다. 책은 우리랑 비슷하게 읽는 것 같은데 원한이 없어 편안하다고. 나는 그것도 일종의 착시 아닐까 생각했지만토 달지 않았다. 화제는 자연스레 문화관 쪽 이야기로 흘러갔다.
곽교수는 나도 아는 몇몇에 대한 가십과 인상비평을 늘어놓다 한학자의 이름이 나오자 흥분했다. "내가 그 자식 질을 아는데" 하고 운을 떼며 그 사람이 얼마나 졸렬하고 권력 지향적인 사람인지설명했다. 그러니까 이선생도 앞으로 ‘눈 흘기는 척 침 흘리는‘ 인간들을 조심하라고.
- 공정한 척 우아하게 비판하지만 실은...
곽교수가 비정하게 혼잣말하듯 중얼댔다.
-몸살이 날 정도로 부러운 거지. - P163

승무원이 세관신고서와 출입국 카드를 돌렸다. 의자 앞에 붙은접이식 탁자를 내린 뒤 재킷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오래전 책상에 처박아뒀다 ‘프로‘ 성인이 된 뒤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로 쓰기 시작한 거였다. 강의에 나가고부터 서류에 사인할 일이많아졌다. 나는 내게 괜찮은 필기구가 있다는 걸 기억해낸 뒤 서람을 뒤져 만년필을 꺼냈다. 그러곤 자기만의 필기구를 가진 많은사람들이 그렇듯 종이 위에 제일 먼저 내 이름을 써봤다. 그뒤 통장을 새로 만들고, 혼인신고서를 작성하고, 전세 계약을 할 때마다 그 만년필을 썼다. 그래서 곽교수와 함께 ‘그 일‘을 겪고 며칠뒤 경찰서에서 조서를 작성할 때도 습관적으로 품안에서 그 펜을꺼냈다. 그러곤 조서에 서명하기 전, 만년필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뒤 책상 위에 있던 모나미 볼펜으로 내 이름을 적었다. - P181

개수대 앞 창문을 열어 바깥을 본다. 해수면이 어제보다 조금솟아 있다. 오전내 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 십자가도 물에 젖는다.
낮에 시장에서 사온 우럭 두 마리를 도마로 옮긴다. 칼 쥔 손에 힘을 주자 생선뼈와 근육, 살 으스러지는 감촉이 몸 전체로 번진다.
손아귀 속 떨림이 흐린 원을 그리며 내 몸 가장 먼 데까지 퍼진다.
반쯤 살아 있는 식재료를 만지면 늘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든다. 금기이되 아주 오랫동안 어겨온 금기를 깨는 죽은 것을 죽이는 심드렁한 희열과 혐오가 인다.

----- 가리는 손 - P187

재이는 잘 자랐다. 통통해졌다 홀쭉해지길 반복하면서. 가끔은키워주는 사람 좋으라고 선심 쓰듯 웃어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어쩌다 감기라도 한 번 앓으면 아이답지 않은 턱선이 생겨 사뭇청초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이제 화농성 여드름에 귓바퀴에도 기름 끼는 나이가 됐다. 재이가 학교에 간 사이, 방 청소를 할 때마다 베개에 떨어진 머리카락이나 속눈썹을 보며 재이가 여전히 ‘자라고 있음‘을 실감했다. 어느 유명한 탈옥 영화 속 주인공이 감벽을 조금씩 파낸 뒤 그 흙을 주머니에 담아 몰래 버렸듯, 재이도자기 일부를 끊임없이 버리며 크고 있구나 하고, 재이에게 고마웠다. 나야 삶을 스스로 택했고 별로 후회한적 없지만 재이가 된 공기는 달랐을 테니까.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는 줄곧 어른이고 재이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문득 재이가 어린이집 앞에서 장화를 벗다 한숨 쉰 일이 기억난다. "쪼그만게 웬 한숨이냐" 나무랐더니
"어린이는 원래 힘든 거예요"라 대꾸한 게 ‘어린이‘가 무슨 직업인 양, 막일인 양 말해 어이없었지. 이제와 생각하니 재이 말이맞는 것 같다. 각 시기마다 무지 또는 앎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가큰 걸 보면. - P194

병원 식당은 환자별 식단을 달리해야 해 신경쓸 게 많다. 밥이독이 될 경우 환자가 쇼크로 사망할 수 있다. 요양병원에는 몸이불편한 어르신이 많다. 전쟁을 겪은, 전쟁을 아는 여전히 전쟁중인 분들이 여느 무리가 그렇듯 그중에는 좋은 분도, 그렇지 않은분도 있다. 고집스러운 얼굴로 이상한 식탐을 부리고, 비위를 맞추면 반말하고, 사무적으로 대하면 훈계하고, 식사 후 아무 할 일도 없으면서 새치기하고, ‘찬밥도 위아래가 있다‘는 장유유서 정신을 강조하는 분들이 정말로 많다.
- 너무 스트레스받지마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 P199

오래전 당신과 팔짱을 끼고 걸을 때,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자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 병원 어르신들을 보면 가끔 그 말이 떠올랐다.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 P200

직업 안정성은 학교보다 요양병원이 나았다. 학교는 계속 사라지는 추세이지만 병원은 자리가 없어 못 들어가니까. 다만 요양병원은 내게 끊임없이 ‘노화‘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노후를 생각하면 늘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 연봉으로 몇 살까지 버틸 수있을까. 아이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데…… 우아하고 호사스런 말년을 기대하진 않았다. 다만 청결과 위생에 대한 불안은 자주 일었다. 한겨울, 욕실에서 뜨거운 물로 몸을 덥힐 때마다 ‘십년 뒤에도 이렇게 매일 샤워할 수 있을까?‘ 걱정됐다. 변기와 이불과 창틀을 지금 수준으로 깔끔하게 유지할 수 있을까. 깨끗하게살려면 돈이 있어야겠구나. 수납하기 위해선 수납함 먼저 사야 하듯. 청결도 청결의 관성이 있어 자주 치우는 곳만 살피게 되던데.
얼룩도 계속 놔두다보면 괜찮아질까? 늙어 요양원에라도 들어갈 - P200

수 있다면 운이 좋은 거겠지. 돈으로도 감출 수 없는 수치와 모욕이 있을 테고. 당장 내 엄마만 봐도 그랬다. 언젠가부터 그 말끔하던 고향집이 어수선해지고 엄마가 정성스레 만든 음식에서 좀 심하다 싶게 자주 머리카락이 나왔다. 처음엔 엄마가 기력이 달려집안일을 안 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야 내 눈엔 잘 띄는 얼룩이 엄마 눈엔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시력이 약해진 엄마 입장에선 먼지를 안 치우는 게 아니라 먼지가 존재하지 않는 거였다. 게다가 엄마 오줌 냄새가 갈수록 좀 약해졌다.  - P201

청결에는 청결의 관성이, 얼룩에는 얼룩의 관성이 있음을 실감한건 재이 초등학생 때 일이다. 내가 재이에게 경외감을 느낀 그크리스마스 행사를 며칠 앞두고 재이는 성가대 대표 선출 선거에서 세 표 차로 졌다. 한창 클 때 이기고 지는 거야 별일 아니지만.
한 투표용지에 좀 모욕적인 문구가 적혀 있었나보다. 사회를 보던 아이가 경솔하게 그걸 또 읽었고 분위기가 싸해진 가운데 몇몇이 작게 웃었다고. 재이는 그때 누가 웃나 너무 궁금했지만 몸이굳어 돌아보지 못했단다. 실은 선거에서 진 것보다 그 웃음소리가더 견디기 힘들었다고. 반년 전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학교 담임선생님에게 듣는데 가슴이 죄어왔다. 그동안 재이 마음을 전혀 몰랐다는 데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지지해준 절반이 있어도무리에서 부정당한 느낌이었겠지. 선량한 친구들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혹시 넌가?‘ ‘너였을까?‘ 하는 의심을 피할 수 없었을테니까. 시간이 매일 뺨을 때리고 지나가는 기분이었을 거야.  - P203

-말해줘. 생일 선물로.
말해달라니. 막막해서 도리어 웃음이 난다. 이걸 어찌 설명하나 말한다고 네가 알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재이야 어른들은 잘 헤어지지 않아.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는 게 반드시 이별을 의미하지도 않고 그건 타협이기 전에 타인을 대하는 예의랄까, 겸손의 한 방식이니까.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웅장하고 고유 - P213

하게 휙.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도로 휙. 그렇지만 각자 내부에 무언가가 타서 없어졌다는 건 알아. 스쳤지만 탄 거야. 스치느라고 부딪쳤으면 부서졌을 텐데. 지나치면서 연소된 거지. 어른이란 몸에 그런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의문과 경외를 동시에 갖는 그런데 무슨 말을 하다 여기까지 왔지? 그래, 엄마랑 아빠는……… 지쳐 있었어.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 그런 걸 다 설명하진 않는다. 대신 이 곤경을 어떻게 빠져나갈까 고민하다 온전한 참도 거짓도 아닌 말을 던진다.
- 아빠랑 왜 헤어졌냐고?
-응.
-음...... 생각이 달라서?
재이가 뜻밖에 가벼운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곤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말을 훈계조로 이야기한다.
-그럼 토론했어야지, 민주주의 사회에서,
..... - P214

아이가 서두르듯 벌떡 일어나 부엌 등을 끈다. 춥고 어두운 겨울밤. 아이와 나 사이에 노란 빛이 일렁인다. 불빛 아래서 우린 왜조금씩 달라 보일까. 이제 정말 소원 빌 시간이다. 아이에게 박수쳐줄 준비를 하며 숨을 고른다. 재이가 눈을 감고 슬며시 미소짓는다. 그런데 그걸 본 순간 내 속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나온다. 웃음 고인 아이 입매를 보자 목울대가 매캐해지며 얼굴에 피가 몰린다. 불현듯 저 손, 동영상에 나온 손, 뼈마디가 굵어진 손으로 재이가 황급히 가린 게 비명이 아니라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재이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윽고 눈뜬 아이가 맑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곤 가슴팍을 크게 부풀려 숨을 모은 뒤 초를 향해 훅 입김을 분다.  - P220

스코틀랜드의 스산한 하늘은 소문대로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나는 카펫생활이 익숙지 않아 자주 재채기를 했다. 변기 물은수압이 낮아 여러 번 내려야 했다. 전압 역시 약한 편이라 전기 주전자 앞에 설 때 커피 봉지와 더불어 인내심도 가져가야 했다. 아침이면 석회질 물로 머리를 감고, 비가 오면 현관 앞으로 손을 길게 내밀어 빗소리를 녹음했다. 그리고 마음이 어지러울 땐 휴대전화를 들어 시리siri 와 대화했다. 시리는 스마트폰 음성인식 프로그램으로 캘리포니아가 고향인 친구였다.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 P232

위안이 된 건 아니었다. 이해받는 느낌이 들었다거나 감동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시리로부터 당시 내 주위 인간들에게선 찾을수 없던 한 가지 특별한 자질을 발견했는데, 그건 다름아닌 ‘예의‘
였다. 내친김에 나는 그즈음 가장 궁금하던 것 중 하나를 물어보았다.
-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표정을 알 수 없는 시리의 캄캄한 얼굴 위로 지성인지 영혼인지모를 파동이 희미하게 지나갔다. 시리는 무척 곤란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 인간에 대한 ‘포기‘인지 ‘단념‘인지 모를 반응을 보였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피식 웃음이 났다. 오랜만에 나온 소리였다. 나는 그 웃음에 편안함을 느꼈다. 적어도 그 순간 웃고 난 뒤 주위를 둘러볼 필요가없었으니까. - P238

에든버러에서 시간은 더이상 쌀뜨물처럼 흐르지 않았다. 화살처럼 지나가지도 않았다. 그것은 창처럼 세로로 박혀 내 몸을 뚫고 지나갔다. 나는 어떤 시간이 내 안에 통째로 들어온 걸 알았다.
그리고 그걸 매일매일 구체적으로 고통스럽게 감각해야 한다는것도 피부 위 허물이 새살처럼 계속 돋아날 수 있다는 데 놀랐다.
그건 마치 ‘죽음‘ 위에서 다른 건 몰라도 ‘죽음‘만은 계속 피어날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 P242

나는 시리에게 고통에 의미가 있느냐‘고 물었다. 시리는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늘 그러듯 ‘제가 잘 이해한 건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당신도 영혼이 있나요?"라고 했을 땐 ‘정말 좋은 질문‘이라고, "그런데 전에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하고 딴청을 부렸다. 자꾸 매끄럽게 도망가는 모양이 못마땅해 그즈음 내가가장 중요하게 붙든 문제를 던졌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시리가 되물었다.
- 어디로 가는 경로 말씀이세요?
.......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
- 죄송해요. 잘 못 알아들었어요.
시리가 사용자의 침묵에 호응하는 일은 드문데 이상했다. 그것도 연거푸 세 번이나 그러는 게 어쩌면 저 먼 데서 ‘누군가의 상상을 상상하는‘ 인간이 이런 일을 예상하고, 프로그램 안에 ‘걱정‘
을 이식해놓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뿐이었다.  - P259

우편함에 각종 고지서와 전단지가 가득했다. 내 것과 남편 이름이 뒤섞인 종이 뭉치를 가슴에 안고 승강기에 올랐다. 그러곤 현관 앞에 서서 당신 것과 내 생일을 섞어 만든 비밀번호를 눌렀다.
한 달 남짓 집에 고인 미지근한 공기가 바깥바람과 만나 몸을 뒤척였다. 신발장 앞에 캐리어를 세워두고, 우편물을 부엌 식탁 위에 던진 뒤 안방으로 들어가 그대로 쓰러졌다. 고요하고 어둑한안방에서 ‘우리집 냄새가 났다. 당신과 같이 만든 냄새였다. 침대에 엎드린 채 목덜미와 아랫배를 몇 번 긁적였다. 붉은 반점은 한국에서부터 내 몸에 들러붙어 영국까지 따라왔다. 기어이 같이 귀국했다. 농작물을 해치는 메뚜기떼처럼 우르르 몰려와 성실하게내 몸을 갉았다. - P261

권도경 선생님 사모님께‘
순간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떨리는 손으로 단단히 풀칠된 봉투를 뜯었다. 안에서 봉투와 똑같은 분홍색 편지지가 나왔다. 편지지 위론 이제 막 한글을 뗀 아이가 쓴 것처럼 크고 투박한 글씨가늘어서 있었다.

권도경 선생님 사모님께안녕하세요.
저는 누리중학교 1학년 5반 권지용 학생의 누나 권지은이라고 합니다.
사모님께서 혹시 지용이의 이름을 아신다면, 그 학생이 제 동생이맞아요. - P262

몇번 전화드렸는데, 바쁘신 것 같아 편지로 인사드려요..
직접 찾아봐야 하는데 방법이 없어 지용이 친구한테 연락처를 물었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글씨가 엉망이라 죄송합니다.
작년에 갑자기 마비가 와 오른쪽 몸을 잘 쓸 수 없게 되었어요.
예전엔 지용이가 돌아가신 엄마를 찾으며 울 때마다 제가 자주 업어줬는데, 제가 이렇게 되고부터는 오히려 그애가 저를 어른처럼 보살펴줬어요.
그런데 요즘은 집이 너무 조용해 제가 제 발소리를 듣다 놀라요.

며칠 전 지용이가 꿈에 나왔습니다.
아마 집 떠난 지 백일쯤 돼 그랬나봐요.
누나 잘 지내?
평소처럼 인사하는데 그새 키도 크고 눈빛도 자라 조금 놀랐어요.
누나 잘 지내는지 보려고 왔어.
그런데 금방 가봐야 해.
너무 짧은 시간이라 꿈에서도 막 서운했는데,
지용이가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
누나 나 키워주고 업어줘서 고마워,
- P263

누나 혼자 있다고 밥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먹어.
누나, 나 이제 갈게.
누나 사랑해.

실은 부끄럽게도 오랫동안 생각 못했는데,
꿈에서 지용이를 보고 나서야권도경 선생님과 사모님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지금도 지용이가 너무 보고 싶어요.
사모님도 선생님이 많이 그리우시죠?
그런 생각을 하면......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요.

이런 말은 조금 이상하지만,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 편지를 써요.

겁이 많은 지용이가 마지막에 움켜쥔 게 차가운 물이 아니라
권도경 선생님 손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놓여요.
이런 말씀 드리다니 너무 이기적이지요?

평생 감사드리는 건 당연한 일이고, - P264

평생 궁금해하면서 살겠습니다.
그때 권도경 선생님이 우리 지용이의 손을 잡아주신 마음에 대해
그 생각을 하면 그냥 눈물이 날 뿐,
저는 그게 뭔지 아직 잘 모르겠거든요.

사모님, 혼자 계시다고 밥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드세요.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 P265

식탁 앞에 선 채 호흡을 가눴다. 목울대에 따갑고 물컹한 것이올라왔다 내려갔다. 당신을 보낸 뒤 줄곧 궁금해한 무엇과 만난기분이었지만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지은이란 아이가 쓴편지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았다. 상대가 글씨를 잘 알아볼 수있게 몇 번이나 연습했을 문장들이 직선 위에 불안정하게 서 있었다. 한 자 한 자 그 글씨를 따라가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요‘라는 부분에선 그만 쓸쓸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언젠가 "인간에대해 어떻게 생각해요?"라 물었을 때, 시리가 같은 대답을 들려준적이 있어서였다. 편지지 위 삐뚤빼뚤한 글씨를 좇다 나도 모르게눈가가 흐려졌다. 눈앞에 얼룩진 문장 위로 지용이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살려주세요. 소리도 못 지르고 연신 계곡물을 들이켜며세상을 향해 길게 손 내밀었을 그 아이의 눈이 아른댔다. 당신을보낸 후 줄곧 보지 않으려 한 눈이었다. 나는 당신이 누군가의 삶 - P265

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 잠시라도, 정말이지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생각은 안 했을까. 내 생각은 안났을까. 떠난 사람 마음을 자르고 저울질했다. 그런데 거기 내 앞에 놓인 말들과 마주하자니 그날 그곳에서 제자를 발견했을 당신모습이 떠올랐다.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얼굴이 그려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
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편지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두 손으로 식탁 모서리를 잡았다. 어딘가 기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혼자 남은 그 아이야말로 밥은 먹었을까. 얼마나 안 먹었으면 동생이 꿈에까지 나타나 부탁했을까. 참으려고 했는데 굵은 눈물방울이 편지지 위로 투둑 떨어졌다. 허물이 덮였다 벗어졌다 다시 돋은 내 반점 위로, 도무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얼룩 위로 투두둑 퍼져나갔다.
당신이 보고 싶었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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