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은 석가의 혼이요, <<사서삼경>>은 공자의 혼이다. 그래서 [" 석가와 공자의 혼이 우리나라의 왕 노릇을 하고 있다."]
단재의 소설선으로 묶인 『꿈하늘』에는 몇 편의 소설이 엮여 있습니다. 어떤 것은 단편적이며, 어떤 것은 인물을 부활시키고, 어떤 것은 끝이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 중에 몇 편에 대한 짧은 감상입니다.
『일목대왕 철퇴』 일목대왕은 힘으로써 다른 여러 나라를 정복하여, 홀로 위대하다(獨不將軍)고 생각을 합니다. 그의 무력에 대한 숭상은 각별합니다. 하지만 나라를 둘러보고 나서 시름에 잠깁니다.
해군 대장 왕건이 "백제국과 싸워서 백제국의 군함 수백 척을 격파하고 천여 명의 군사를 사로잡고 뚝딱뚝딱 승전고 울리며 서울로 돌아(49쪽)"와도 한량없이 기쁘게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대왕은 왕건과의 만남에서 "너는 오늘에 승전하고 돌아왔다마는 나는 간밤에 패전하고 돌아와 병이 났다"고 합니다. 즉 대왕이 궐문 밖에 나와 돌아다녀 보니, '아미타불'은 소리와 '공자曰'하며 칭송하는 집 뿐입니다. 아무도 일목대왕 궁예왕의 공덕을 논(論)하는 사람이 없음에 안타까이 여기는 것입니다. 궁예왕은 석가여래와 공자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사람을 사로잡고 있어 마음이 안쓰러워, " 글 28자모를 만들어 그 글로 경문 20권을 지어 이름을 <<궁예 대왕경>>(弓裔大王經)(53쪽)하고 반포합니다. 하지만 '궁예 대왕경'을 반포하고 나서, 다시 궁궐 밖으로 나가보지만 그의 귀에 들리는 것은 '궁예 대왕경'이 아니라 '아미타불'과 '공자曰'뿐입니다. 그리하여 궁예왕은 자기의 위엄과 권위를 과시한다는 명분하여, 토론을 할 것이라 하며 만백성을 궁궐 안으로 불러들입니다. 스스로를 합리화할 수 있으면 대왕은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만인의 앞에서 철퇴를 휘두릅니다. 그리고는 '내 말이 진리이니, 내 말을 듣으면 천궁에 갈 것이요, 그러하지 못하면 철퇴를 맞아 지옥에 갈 것이다'라고 강권합니다. 이렇게 피 난리를 치고 침실에 들어오니 황후가 깜짝 놀라 대왕을 맞이합니다.
왕후 "나라가 망하려 대왕폐하가 이십여 년 물 속이나 불 속으로 드나들며 죽을 판, 닦아 놓은 공업이 허사로 돌아갈까 하여 웁니다."하며 메인 목소리를 간신히 대답한다." 대왕 "왜?" 왕후 "사람을 칼로 정복합니까? 덕으로 정복합니까? 대왕……." 대왕 "칼과 덕을 아울러 써야지요." 왕후 "아니올시다. 적국을 정복하려면 칼로 하려니와 백성의 마음을 정복하려면 덕으로 하는 것이올시다." 대왕 "……." (61쪽)
대왕은 한동안 왕후와 실랑이를 한다. 그는 한나라에 한 임금, 즉 세상에는 한나라가 있어야 하며, 한 나라 안에는 하나 임금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여러 나라를 창이나 칼로 쓰서 무찌를 수 있지만 나라 안의 임금은 덕(德)과 도(道)로서만 된다고 왕후는 말합니다. 왕후는 오직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자 대왕은 '사랑을 받지 하면 어떻게 하냐'고 반문을 하자. 왕후는 "사랑이 깊으면 아니 받지 못합니다.(63쪽)"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대왕은 "성인이나 '미리'가 계집의 말로 될 수 있을까요?"로 묻자, 왕후는 "동명성왕이나, 신라 시조나, 중국의 요순이나, 주문왕.무왕이 다 내조로 되었고, 석가도 그 도를 닦으려 산으로 들어갈 때에는 아비는 몰랐으되 그 아내 '아유타'"는 알았다 하며, "내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왕은 무력으로 백성을 정복하려 하였지만 간곡한 왕후의 설득에 오직 "사랑"뿐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책은 편집자가 미완이라는 말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끝이 어떠한지 모르지만, 여기에 글로 된 것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합니다.
일목대왕의 철퇴는 한번 휘들러졌습니다. 그는 오직 힘으로 상대방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고서, 힘을 썼지만 왕후 강씨의 베개송사로 인하여 마음을 돌렸습니다. 즉 힘이 힘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이 힘으로 나올 때뿐이며, 마음을 정복하려면 '사랑'뿐이라는 것을 깨달아, 후세에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즉 『일목대왕의 철퇴』는 일목대왕의 힘에 의해 죽어간 600여 명의 희생자에 대한 깨달음과 사죄의 글이 아닐까 합니다.
『백세 노승의 미인담』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 두만강 물에 말을 씻고 백두산 돌에 칼을 갈아 적국을 토평하리라. / ......"
남이(南怡)장군이 이웃의 친구들과 호국사라는 절에 놀러가, 아내 자랑을 할 때에 늙은 중이 끼어들어 "서방님들은 어여쁜 아내를 믿지 마시오."라고 합니다. 그러고서는 예쁜 아내 때문에 중이 된 사연-"송도(松都) 말년의 조선, 몽고, 중국 세 민족의 이목을 놀래우던 대사건"을 풀어냅니다.
노승은 재상 황모의 딸과 결혼을 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던 중에 "북방의 몽고족이 강성하여 국경의 방어가 날로 급하여 노승이 귀주(貴州)의 수정장이 되어 오천 명 군사를 거느리고 부임(85쪽)"합니다. 그는 아내 황씨와 여종 예쁜이를 데리고 부임한 지 삼삭 만에 몽고병 수만 명이 쳐들어 옵니다.
앞뒤 겨를 것도 없이 황망하던 중에, 예쁜이 曰, '"오천 명의 군사 중에 노예군과 잡류군(雜類軍)이 5분의 4나 되며, 또 이것을 이 가장 용감하나 매양 노예라, 잡류라 하는 이름을 싫어하며 힘을 다하지 아니하오니, 이 위급한 때를 당하여 명분만 지키려다가는 나라의 강토를 잃고 포로의 치욕을 면하지 못할지니, 먼저 노예와 잡류의 문서를 불사르고 싸움을 이긴 뒤에 도등의 대우를 한다는 명령을 내리시소서. 이것이 오늘의 국경을 보존하는 다시 더 없는 방법이올시다.(86쪽)"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온 노승은, 예쁜이의 전략보다는 밤낮으로 빌기만 한 아내 황씨의 은덕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복도 잠시, 몽고의 다시 침입으로 아내와 예쁜이가 북경으로 끌려갑니다. 아내를 밤낮으로 잊지 못하는 노승은, 북경으로 찾아가 아내를 구해 오려합니다. 1년 동안 북경에 있으면서 보고듣은 것은 "황제의 충신으로 유명한 몽고의 장수 차손다다의 부인이 되어 고국 생각을 잊을 만치 된 안락"에 젖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노승은 긴긴밤을 아내 생각만 하다 월장을 감행합니다. 아내는 그를 기쁘게 맞이하는 대신에, 장수 차손다다에게 옛남편이 쳐들어왔다하며 강박 지우길 바랍니다. 예쁜이의 말류에도 대문을 들어선걸 후회해도 늦은 것. 감옥에 갇혀 오직 분개만 할 때에 예쁜이가 먹을 것을 주며 빗장 문도 열어줍니다. 노승은 단박에 두 내외를 죽이고는 담을 넘습니다. 하지만 예쁜이는 혼자 도망가기에도 힘들다하며, 자결을 합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잘렸습니다. 다만 뒷장에는 예쁜이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어릴 때의 일화가 조금 실려 있습니다. 굳이 드는 의문 하나가, 왜 남이 장군이 호국사라는 절에 놀러 가서 노승의 환담을 듣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남이 장군의 깨달음, 지은이의 나에 대한 울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단재의 글-몇 편의 글 속에는 '궁예'에 대한 칭송이 자자합니다. 『일목대왕 철퇴』, 『일이승』등. 궁예, 과연 단재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요?
『일이승』에 정을진이라는 이와 노승 함허가 나누는 대담에서 살짝 엿볼 수가 있습니다. 정을진이 보기에 궁예는 "신라 헌안왕의 아들로서 헌안왕의 화상을 칼로 치고 또 신라를 멸"하려 하였으며, "처자를 사납게 죽이고", "관심법(觀心法)(74쪽)" 통해 걸물이 되지 아니하고 불효자라 합니다. 이에 함허는 "천고의 사책(史冊)은 매양 그 가운데서 대세"만 보기를 권합니다. 세세한 것은 이기 자가 진 자에 대해 짐 지우는 누명이며, 이로 인해 자기의 덕을 더 높게 보이려는 권세화일뿐입니다. 그리고는 못된 짓을 하고도 어떻게 '이십팔년' 동안 "제왕이 되어 위엄과 호령이 천하에 진동하였겠느냐" 묻습니다.
" 궁예의 공덕은 무엇입니까?" " 궁예가 패망하여 그 평생 삶의 경영이 물거품같이 사라져 버렸으므로 그 공덕이 무엇이라고 들어 말할 것이 없으나, 그러나 궁예가 신라 이후에 죽어 가는 조선의 인심을 진작시키려던 걸물됨은 의심 없는 바니라." " 궁예 이후 고려 사백칠심삼 년 동안에는 누가 칠 만한 인물입니까?" " 고려 일대에는 이지백(李知白).곽원(郭元).왕가도(王可道).최영(崔瑩) 등이 다 비상한 대인물이나, 그러나 뜻대로 사업을 성취하지 못하였는데 그 가운데 나의 가장 통분히 여기는 바는 최영의 일이로다.(75쪽)"
『일이승』은 홍경래의 난을 이야기합니다. 정을진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함에 복수심을, 홍경래는 잘못된 나라를 거꾸로 세우기 위한 역성을... 이 둘의 야합은 원래부터가 맞지 않았나 봅니다. 홍경래가 정을진을 죽이는 것은, 소탐대실을 원하지 않아서일까 합니다.
그리고 여자에 대해 흩으로 듣지 않습니다. 『일목대왕 철퇴』에서 궁예왕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왕후이며, 『백세 노승의 미인담』에서 노승을 꾸짖을 때, 구구관주(句句貫珠) 자자비점(字字批點)이라 함에서 충분히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부모도 모르는 아이를 놓고, 그 말귀가 대단함에 "여개소문"이라 하는 점은 인재를 보는 단재의 눈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동국(東國) 거걸(巨傑) 최도통전(崔都統傳)』 처음에는 동국 거걸이 누군인지? 최도통?이라 생각을 하다, 책을 펼치는 순간에 최영이라는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내가 아는 최영은 고려의 마지막 무장으로 이승계에 패(敗)해 죽임을 당한 애절한 장수쯤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재가 부활시킨 최영은 한 나라를 얼마나 사랑한 사람인지, 과연 저 위에 있는 의사당의 무리는 누구를 위해 있는지, 세월이 반천 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져 주었습니다.
최영, 우리가 우리 국사를 읽다가 단군 35세기 고려 원종(원종) 이래로부터 근세 이르기까지 무릇 7백야 년 사이의 일을 보면, 부아가 터져 머리털은 뻗쳐 일어서고 울분으로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며 한 권의 역사책을 장장이 갈기갈기 찢어 불구덩이에 처넣고자 하는 것이 한두 번(210쪽)"이 아닐 때, 홀연히 나타나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민족의 나아갈 길을 밝힌 이.
단재의 한은 이민족을 끌여 들여 동족을 죽인 것과 발해 이래로 잃어버린 국토에 대한 애한일 것입니다. 그가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에서 묘청의 서경천도에 대한 한을 드러내듯이, -원나라 정부가 각지의 소란을 평정하기 위해 우리 군사를 징벌하기 위한 조서를 내릴 때, 공민왕은 갈팡질팡하고 신하들은 고개 숙여 빨리 받들어 모셔야 한다고 합니다. 이에 홀연히 호통을 치는 있었으니 " 안됩니다. 원은 정령이 쇠약해져 망할 날이 멀지 않았으니, 우리가 돕는다 해도 이익될 것이 없고, 설령 우리 도움으로 망하려 하는 저들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 해도 우리는 돕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저들은 우리의 원수입니다. 고종(고종) 원종(원종)께서 저들에게 무릎을 꿇고 성하의 맹약을 맺었던 것이 어찌 그 마음에 기꺼워했겠습니까? 단지 힘이 달렸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는 장면에서, 난 반 천년을 훌쩍 뛰어넘어 오늘을 보는 듯합니다. 제국주의의 침략에 협력하는 이 나라를 보면서 살아있는 최영의 호통을 듣는 듯합니다. 스스로 힘이 없으니, 힘이 있는 나라에 가서 아부를 하며 도움을 요청하고 서는 일 다 했다는 듯이 우쭐되는 모습. 필요하면 언제든지 자국의 군인을 타국으로 보내 총알바지가 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는 나라. 힘이 없다 하면서 힘을 기를 생각조차 하지 않은 나라. 최도통이 꿈꾸었던 야망은 모진 풍진 세월에 흩어져 기억조차 없는가 봅니다. 최도통은 원의 징발에 대해 일곱가지 경하할 일과 다섯 가지 슬퍼할 일이 있다고 아룁니다.
" 일곱 가지 경하할 일이란 무엇입니까? 군사를 기르고 군량을 저축하여 나아가 공략해 취할 힘이 충부하고 물러나 보전해 지킬 힘이 충분하다면, 이에 대병(大兵) 혹 경병(經兵)을 출동시켜 일차 요동을, 이차 심양을 취해 고구려와 발해의 옛 강토를 수복할 것이니, 경하할 일입니다. 그런 뒤 의무려산(醫巫閭山)의 험난한 곳에 웅거하여 우리의 훈련되고 절도 있는 군사로 한 곡식으로 저 서로 헤어져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을 거두어 모은다면 국위를 떨치 수 있고 중국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니, 경하할 일입니다. 그리고 몽고와 관계를 끊어 제양공(齊 公)처럼 구세(九世)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니 경하할 일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 나라도 또한 대국이 될 것이니 경하할 일이며, 이렇게 하면 차후로 중국도 감히 눈을 똑바로 뜨고 우리 나라를 노려보지 못할 것이니 경하할 일입니다. 옛날 우리 태조 신성대왕(神聖大王)께서 거란의 사신을 거절했던 것은 고의로 사단을 일으켜 저들을 정복하고 발해의 옛땅을 수복하려 한 것이었는데, 불행하게도 하늘이 수를 내려 주지 않아 중도에 돌아가셨으니, 이는 사백 년 이래 신하된 자의 지극한 한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선왕의 뜻을 이어 대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경하할 일입니다. 고구려가 항상 중국을 집어삼키려고 하다가 능히 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우리 조정이 이 일을 이루면 천고의 역사에 빛이 날 것이니 경하할 일입니다. 이것을 일곱 가지 경사라 하는 것입니다.(234쪽)"
단재의 위상은, 우리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 시대에 있지만 그 기상은 발해의 옛 땅에 대한 수복에 있다는 점입니다. 하루하루가 힘들면 오늘을 생각하게 되지 내일을 생각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최도통이 신하된 도리로서 임금님에게 아뢸 때, 괜시리 눈이 붉어집니다. 그리고 또다시 최도통이 인당과 북벌을 단행할 때, 원나라의 사신이 황급히 조선의 조정에 들어와 허풍을 치며 하루바삐 최도통을 불러들이지 않으며 80만 대군을 일으켜 무너뜨린다는 말에 놀라, 국왕은 나몰라하고 만 신하는 어서 불러들여서 역적의 무리를 다스리라 하는 장면에서는 울컥 울분이 나도 모르게…….
단재의 글은 아직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하기에는 조금 다른 길에 서 있습니다. 문학이 아닌 과연 우리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는, 국가는 무엇인가 혹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그를 떠올려 본다면 조금은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설픈 울분, 예나 지금이나 나라를 망치는 것은 쓸데없이 겉멋만 든 먹물 든 무리가 아닌가? 힘들지 않게 먹물로서 무장한 그네들은 모든 이론적 근거를 동원해 상대방을 무력케 한다. 하지만 홀로 싸움에 나가 싸워보지 않으니 진정 싸움을 알지 못하고, 가진 것이 많으니 하나라도 잃을까봐 절절 매는 모습이……. 싸움에서 가장 무서운 자는 맨 손으로 오는 자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가진 것이 없으니 그의 의지는 결단코 생(生) 아니면 사(死) 둘 중에 하나에 놓여있는 배수진의 형상인 것이다. 죽기로 싸움은 사람을 싸워 과연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인가?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틀을 바꾸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을 것이다.
내가 홀로 마음속으로 숭상하는 이가 둘이 있는데, 한 명은 약산이며 다른 한 명은 단재이다. 남의 나라 '체'라는 이는 옷에 무슨 형상을 그리며 쫓지만 내 나라 영웅은 골방에서 죽어가니 슬프다. 슬프다. 어찌 통탄하지 않으리오. 단재의 기상과 약산의 울림을 언제 다시 듣을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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