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전에, 고통은 사람을 자유롭게한다고, 고통을 견뎌낸 사람이야말로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일 거라고생각했다. 고통의 기억이 자신을 보호한다고. 그런데 이제 언제나 그런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앎, 평범한 보통의 삶에는 있기 힘든 이런 특별한 삶은 손댈 수 없도록 따로 보관해놓은 비축물이나겹겹이 층을 이룬 광석 틈의 희미한 금가루처럼 별도의 공간에 존재한다. 한참을 속이 빈 암석을 공들여 벗겨내고, 함께 사소한 기억의 퇴적물을 헤집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반짝반짝 모습을 드러낸다! 선물처럼 찾아온다! - P170

누구도 우리 위에 있지 않았고 누구도 우리 아래 있지 않았어. 우리 중에 양탄자나 고급 식기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아무도.…하지만 우리는 행복했어. 정말 행복했지.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남았으니까. 이야기하고 웃을 수 있었으니까. 마음껏 거리를 돌아다니고.. - P222

자신의 기억 외에는 주위의 모든 것이 평범하다. 나 역시 목격자가 되어간다. 사람들이 무엇을 기억하는지, 어떻게 기억하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또 무엇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거나 기억의 저 깊은 구석으로 밀쳐버리고 싶어하는지, 그리고 장막을 쳐버리고 싶어하는지를 보고 듣는 목격자. 적절한 말을찾지 못해 절망하면서도, 시간을 두고 생각하면 온전한 표현을 찾아내리라는 희망의 끈을 붙잡고 과거를 되살리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본다. 그때는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얼마나 보고 싶어하고 이해하고 싶어하는지를. - P255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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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유가의 흥기

1. 중국 역사상 공자의 위치
2. 전통적 제도와 신앙에 대한 공자의 태도

공자는 육예를 일반인에게 가르친 최초의 인물이었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공자의 강학은 그후의 다른 제자백가와는 달랐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학설만을 중시했는데, 이를테면『장자(莊子)』 「천하편(天下篇)」에서 보여지듯이 묵가의 제자들은 『묵경(墨經)』을 암송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교육가였다. 그의 강학목적은 "인재(人)" 양성에 있었다. 특히 국가를 위해서 일할 인재를 양성했지, 어떤 한 학파(一家)의 학자를 양성하지 않았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각종 서적을 읽게 했고, 각종 과목을 가르쳤다. - P83

공자는 이미 있던 책을 가지고 교육했는데, 가르칠 때 다소 취사선택을 가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렇듯 수시로 취사선택하여 강해한 사실을 두고 "육경을 산정(刪正)했다"고 한다면, 공자가 "산정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산정"이란 사실 아무런 비상한 의미가 없다. 그후 유가는 관습대로 여전히 계속해서 육예를 교재로 사용한 반면, 다른 학파에서는 오직 자기들의 새로운 학설만을 강할 뿐 옛 서적은 강하지 않았던 까닭에, 육예는 마침내 유가의 전유물처럼 되어 공자가 제작한 것처럼 여겨졌고, 산정(산정을 했다면) 역시 중대한 의의가 있는 것인 양 여겨졌던 것이다. - P84

공자는 한 교육가였다. "계술만 하고 창작하지 않았으며, 신념을 가지고 옛것에 심취했으며"," "학문에 싫증을 낸 적이 없었고, 인재교육에 게으른 적이 없었다"는 말은 바로 공자가 자신에게 내린 평어(考語:評語)였다.
이로써 보건대 공자는 단지 한 "선생님(老敎書匠)이었지만, 중국역사상 여전히 지극히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 P85

전국시대에 학문이 있으면서도 벼슬하지 않고 직접 노동을 해서먹고 살았던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허행(許行)은 "그의 추종자가 수십 인이었는데, 모두가 갈옷을 입었으며 짚신을 삼고 자리를짜서 생계를 유지했고, 진중자(陳仲子)는 "몸소 짚신을 삼고 처는 길쌈해서 "살아갔다. 그러나 맹자는 그렇지 않았다. 맹자 자신은 "뒤따르는 수레가 수십 대에 시종 수백 명을 거느리고 제후에게서 자고 먹었는데", 이를 두고 그의 제자인 팽경(彭更)이 "너무 지나치다(泰)"고 여겼을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의 비평이야 더 말할나위도 없다. - P89

선비는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봉양만 기대했다. 이런 선비계급은 공자 이전에는 없었던 것 같다. 이전의 소위 사(士)란 주로 대부·사(大夫士)의 사였거나 혹은 남자 병사의 칭호였지 후세의 소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는 아니었다. 이들 선비계급은 오직 벼슬살이와 강학이라는 두 종류의 일만 할수 있었다. - P90

공자는 소크라테스와 흡사했다. 소크라테스도 원래 "소피스트였지만, 그들과 다른 점은 학생들에게 학비를 받지 않았고 지식을 팔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는(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귀납법으로써 정의(定義)를 구했고, 정의로써 우리 행위의 기준으로 삼았다. 공자 역시 정명(正名)을 주장했고, 명(名)에 대한 정의로써 우리 행위의 기준으로 삼았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도덕성을 강조했다. 공자도 인간의 "인(仁)"이
"정치담당(從政)"능력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다. - P92

소크라테스 사후에 그의 학파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양, 발전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서양철학의 정통이 되었다. 공자의 학파도 맹자와 순자의 선양, 발전 과정을 거쳐 마침내 중국철학의 정통이 되었다. - P93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는 주례(周禮)를 입증할 문헌이 충분했기 때문에, 공자는 주례에 대해서 깊이 알았고 간절히 사모했다. 그래서말했다.
주는 이전의 두 왕조를 조망하여 거울삼았으니, 그 문화가 찬란하다! 나는주(周 : 즉, 주의 문화, 周禮)를 추종한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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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고 있는 중이다.
우리에게는 먼 지역이라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별다른 감흥이 없을 수도 있으나 2차 대전 중 독일과 소련 간에는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독소전쟁이라고 불린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연의 주인공들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사람들이다.
전쟁이 발생했다고 내가 사는 나라를 위해 기꺼이 나섰던 사람들이 나온다.
비단 젊은층 아니라 중장년층, 노년층도 참전을 하였고 심지어 어린 소년/소녀도 참전했다. 많은 여성들이 급박해진 전선에 부랴부랴 참전에 나선 것을 보고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짐작했다.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나선 것이지만 전쟁은 사람을 군인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전쟁은 조국을 위해 헌신하게 만드는 것일까.
조국을 위해 봉사하라는 명령에 의해 우크라이나 등의 국가는 많은 곡물을 수탈당하는 등의 피해를 겪었다.
그럼에도 막상 전쟁이 벌어지니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것이라니. 현재의 나로서는 오롯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팔다리가 잘리고 피냄새와 소독약냄새가 진동하는 잔혹한 전쟁터 속에서도 깊숙한 숨속에 들어서면 고요하여 딴 세상 같다는 것을 읽을 때 나도 그 풍경이 떠올라서 복잡미묘한 감정이 일었다.


#2


오디오북은 목소리에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콘텐츠가 좋구나 느끼게 한다.
윌라 서비스를 구독한 가장 큰 이유가 토지 오디오북을 듣기 위해서였는데 드디어 시작했다.
처음이라 사투리가 잘 들어오지 않아서 아직은 몰입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출연 배우들의 연기가 좋다는 것은 느낄 수가 있다.

얼마 전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라는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는데 1919년의 일제강점기 시기 한 가문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인터넷에서 드라마 소개를 보니 이 시기가 끝이 아니라 1990년대 초까지 다룬다고 하니 굉장히 긴 시기를 삼고 있는 셈이다.
3.1운동의 결과로 많은 이들이 잡혀 들어가고 일부는 증오를 키우고 일본을 향한 칼을 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같은 조선인들을 헌병대에 찔러 잡혀들어가게 만드는 앞잡이들이 있다.
그리고 양반집의 여인네들의 삶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딸만 둔 며느리는 시어머니 앞에서 항상 주눅이 들어 있고 아들을 낳기 위해 그녀 뿐 아니라 친정 어머니도 불공 기도를 한다. 남편은 다행히 부인을 구박하지는 않는 듯하지만(!) 뒷일은 알 수 없지.
이제 1부만 보아서 후가 궁금한데 생각보다 전체 회수가 대하 드라마 치고 길지 않다(24부작).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토지와 겹쳐지는 시기가 존재하고 토지에서도 최참판댁이라는 가문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토지는 조선 말의 시기부터 그리고 있기에 이 작품보다 더 앞의 시기까지 다루기는 한다.
어쨌든 토지 오디오북은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겠다. 흐름이 끊기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들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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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07-13 17: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화가님 끝까지 함께 가보시죠!! 사투리 곧 적응되실 거예요 ㅎㅎ
아니 바람꽃? 엄청나게 긴 시대를 다루네요. 24부작이면 성큼성큼 진행되겠군요.
전쟁은 여자의.. 읽어야하는데;;

거리의화가 2022-07-13 22:02   좋아요 3 | URL
1991년 드라마이고 지금은 중견배우들의 아역 시절도 나오더군요. 이야기는 아마도 속터지는 내용일 것 같습니다 여성들의 수난과 역경이 예상되어요ㅠㅠ 토지 응원받아 열청해보겠습니다!^^ 전쟁은… 대화문이 주이지만 무게가 가볍지 않습니다 화이팅!

레삭매냐 2022-07-13 19: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독소전의 와중에 가장 큰 피해
를 입은 곳이 바로 오늘날의
우크라이나로 알고 있습니다.

81년 만에 다시 전쟁의 포화
에 휩싸인 우크라이나의 상황
이 참 그렇네요. 그리고 적은
당시에는 같은 편이었던 러시
아라는 점도 그렇구요.

저도 책은 수배해 두었는데
미처 못 읽고 있네요.

거리의화가 2022-07-13 22:05   좋아요 3 | URL
네^^ 우크라이나가 당시에도 소련에 의해 받은 피해가 굉장히 큽니다 그때도 곡창지대였는데 대농장 시행으로 물자 다 뺏어가고 이후에는 전쟁터로 내몰리게 되지요. 지금 무슨 데자뷔도 아니고 마음이 씁쓸합니다ㅡㅜ

책읽는나무 2022-07-13 21: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동쪽 사투리라면 제가 번역해 드릴 수 있는데요ㅋㅋㅋ
제가 아직 토지를 읽질 않아서....
한국 사람이 토지를 읽질 못했네요.ㅜㅜ

1번 책은 어제 <전쟁 일기>를 읽고 나니 이게 약간 분리가 되질 않아, 읽기를 조금 미뤘습니다. 분리해서 그냥 전쟁에 참여한 여성이란 객체로 읽어야 하는데, 나라로 읽히니...참...ㅜㅜ
이러나 저러나 러시아 나라는 나빴네요.

거리의화가 2022-07-13 22:07   좋아요 4 | URL
ㅋㅋ 사투리 아무래도 들은지 얼마 안되어서 어색함이 있지만 곧 적응되겠지요^^; 토지는 긴 호흡이 필요하긴 해서 저도 이번 참에 꼭 읽어보려합니다ㅎㅎㅎ 전쟁일기 읽고 이 책 읽기엔 참 마음이 더 무거워질 것 같습니다ㅠㅠ 평화는 왜 이리도 어려운지요.

희선 2022-07-14 02: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나라를 생각하고 전쟁에 나갔겠지만, 실제 전쟁터에서는 쉽지 않았겠습니다 어린이는 자라서 집에 돌아왔다는 말이 생각나기도 하네요 그 뒤에 잘 살았다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한 사람이 많았겠습니다 그때 여성이 전쟁에 나갔다는 건 이 책을 보고 안 듯도 합니다 오디오북으로 듣는 토지, 어쩐지 드라마 같을 것 같습니다 자꾸 듣다보면 사투리 익숙해지겠지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2-07-14 08:02   좋아요 4 | URL
네 6년이 지나 돌아간 사람도 있으니 16살에 나갔다면 22살이 되었을테죠. 일상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전쟁 당시의 기억은 외면하고 싶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허나 끔찍한 기억은 오래가니ㅠㅠ 오디오북 특히 소설은 듣는 드라마의 느낌입니다ㅎㅎㅎ

다락방 2022-07-14 09:1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저 윌라 해야겠네요. 토지 재독을 계속 목표하고 있었는데 21권이나 돼서 섣불리 도전을 못하고 있었거든요. 오디오북으로 점심 식사 시간 때 들어야겠어요.

거리의화가 2022-07-14 10:46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처음엔 엄두가 안나더군요. 태백산맥은 그나마 10권이라 괜찮았는데 그것도 길긴 했지만... 이번참에 책까지 구비해서 같이 오디오북하고 겸해서 독서해보려고 합니다^^
 

공자 이전과 당시의 종교 철학사상

화와 동의 차이가 인상적이다.

황제, 전욱, 제곡 - 요, 순, 우, 탕, 직 - 문왕, 무왕

당시 사람들은 미신은 있었으나 지식은 없었고, 종교는 있었으나 철학은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믿은 내용은 바로 그리스 인이 믿었던 종교와 같고, 그들이 믿은 신들은 바로 그리스 인의 신들과 같았다. 하(夏), 상(商) 이후에는 "천(天: 하늘)"과 "제( : 하느님)"의 관념이 생겼고 일신론이 점차 세력을 얻는 듯했지만, 다신론이 결코 소멸하지는
않았다. - P49

신령과 인민을 병칭했은즉, 집정자의 최대 책무는 "백신을 편안하게 하고, 만민을 화평하게 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지 못하면 "신령이 노하고 인민이 배반하여" 장구할 수 없었다. 주나라 양왕이 또 하느님(上帝)과 백신을 병칭했은즉, 하느님은 백신의하나가 아니었다. 내사 과는 신 지방에 강림했다는 어떤 신령을 단주의 신령으로 여겼은즉, 적어도 신령의 일부는 바로 인귀(人鬼)였다. - P52

고대인은 대체로 우주간 사물들을 인간사와 상호 영향관계에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고대인은 이른바 술수(術數:OccultArts)의 법, 즉 각종 술법으로써 우주간에 사람의 주의를 끌 만한 현상들을 관찰하여, 인간의 화복을 예측했다. - P53

사조, 비조, 자신, 신수, 장홍, 사묵 등은 모두 자연현상 또는 그밖의 "하늘의 이치(天之道)"를 바탕으로 인간사(人事)를 예측했다. 그들이 사용한 술수는 명백히 "천문"인 것도 있고, "역보"와 "오행"이 뒤섞인 듯한 것도 있다. 요컨대 이른바 "천문", "역보", "오행" 등은 모두 "천인지제(天人之際 : 하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 것으로서, "천도(天道)"와 인간사는 서로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후의 소위 음양오행가는 이런 사상읗 부여한 것으로서, 중국철학사상 심대한 세력을 떨쳤다. - P60

대체로 하느님은 지고무상(至高無上)의 권위자로서, 여러 관직을 설치해두고 있다. 여러 신령들은 그 지위나 권위가 하느님에 미치지 못하므로 복종했다. 이것은 곧 중국의 일반 평민의 종교적신앙인데, 옛날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 P61

춘추시대에 이르러 점차 각종 제도에 인본주의적(Humanistic) 해석을 부여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나타나, 각종 제도는 모두 인간이 설치한 것이며 또 인간을 위해서 설치되었다고 생각했다. - P65

무릇 화합(和)은 실제로 사물을 산생하지만, 같은 것(同)끼리라면 아무것도산생할 수 없습니다. 다른 것에다 다른 것을 조합하는 것이 화합입니다. 그렇기때문에 풍성한 성장이 가능하며 만물이 산생합니다. 만일 같은 것에다 같은것을 보태는 경우라면 둘 다 못 쓰게 되고 맙니다. - P66

임금이 예악을 사용하는 이유는 "백관이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기율을 위반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 P70

예악과 형벌의 효용은 백성이 ‘혼란’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있고, 기원은 바로 천지를 모방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 P72

제사의 기능은 "인민을 굳건히 단속하는" 데에 있었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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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의 역사 - 변방의 민족에서 청 제국의 건설자가 되다
패멀라 카일 크로슬리 지음, 양휘웅 옮김 / 돌베개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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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은 오랜동안 조선에게 복잡한 감정을 갖게 하는 국가였다.
유학자의 나라를 자처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이민족의 집합체였던 청은 인정하기 싫은 존재였던 것이다.
조선인들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발생하고 나서도 그들을 인정하지 못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에 인질로 다녀온 후에 보인 다른 반응과 행보는 왕실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봉림대군이 효종이 되었을 때 그는 북벌을 주장하기도 하는 등 여전히 지배층은 청을 하대하고 멸시하는 느낌이 강했다. 18세기까지 되면 유럽에까지 인식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청의 영향력은 커지게 된다. 하지만 19세기 이후가 되면 청은 내란과 외세의 개입으로 안팎으로 고전하게 된다. 이는 조선의 미래이기도 했다.

만주족은 청나라를 구성했던 민족으로 곧잘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청나라는 다양한 민족 구성원이 존재했고 심지어 만주족의 비율은 청 말에 가면 소수가 될 정도로 낮았다.
물론 만주국은 1930년대 일본이 만주에 세운 정권의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책은 만주족의 근원이 어디인지 찾고 그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세밀히 기록한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몇 년전 구독하던 블로그를 통해서였다. 그 때 찜해놓았으나 잊고 있다가 작년에 생각나서 구입했다. 출간된지 몇 년전이라 혹시나 품절이 됐을까봐 걱정했는데 남아 있는 것이 천행이었다.

책의 내용은 만주족에 대한 오해를 걷는 과정부터 시작한다.
만주족과 몽골족은 다른 민족이지만 그들의 역사는 서로 얽혀 있다. 1600년대 이전까지 만주족으로 알려진 민족의 조상은 당시에 만주족으로 불리지 않았고 여진이라는 이름 등으로 불렸다. 동만주 지역의 몽골족은 타타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청조는 1600년대 중반에 만주족이 중국을 침략하여 명 제국을 멸망시키고 들어선 정복왕조였다. 만주족은 모순된 정체성을 가진 민족으로 평가되었다. 사실 전통적 만주족 문화나 정체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만주족의 문화와 정체성 모두 청 제국이 들어서면서 만들어졌다. 그들도 자신들을 자각하기 시작한 계기는 청이라는 국가가 성장하면서부터였다.
만주족은 그들만의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기(旗)'라는 조직이었다. 이는 청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일부 조직되어 있었고 1924년까지도 유지되었다. '기' 명부에는 누르하치가 초기 추종자들의 가족구성원과 조상에 관해 기록이 되어 있었다. 기 구성원들은 지휘계급에 따라 조직되고, 교육의 기회를 제공되었으며, 부대에 임금과 보급품 토지 지급 등이 이루어졌다. 청 제국 아래에서 모든 만주족, 몽골족과 한군은 '기인'이라고 불렸다. 17세기에 정치적인 신분이었던 기인은 19세기까지 민족적 정체성이 되었다(P32~33).

만주족의 기원은 어떨까. 그들은 최초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섬에서 온 이주자들로 바다를 건너 북상하여 후기 구석기 시대 즈음 만주 지역에 도착했다. 대략 2,500년 전부터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있던 많은 이들이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만주에 거주하는 민족들을 정주 경제와 유목 경제로 구분하는 일은 결코 명확하지 않았다(P48). 일부는 수렵과 채집 등 유목 생활을 하기도 하고 다른 일부는 농경 생활을 하기도 하는 등의 생활을 겸했다. 우리가 잘 아는 부여와 발해가 이 지역 문화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제국이 되기 전 여진족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여러 민족과 어울리며 사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외부에서 부르던 이름들도 '골드족', '오로촌족', '오로크족'이었는데 자신들은 '나나이족'이라고 지칭했다.(나나이는 송화강의 지류를 가리킨다.)
1234년 금이 몽골족에게 멸망당한 후 여진족 중 일부는 한족에 동화되고 다른 일부는 만주 지역에서 그들만의 관습을 지키며 몽골로부터 작은 간섭을 받으며 생활했다. 원이 멸망한 후에도 여진족은 명과 조선과 계속 교류하였다. 1500년대 후반 건주여진과 조선 사이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는데 건주여진과의 충돌로 인해 조선 조정에서는 신충일을 누르하치의 성으로 파견한다. 신충일은 누르하치의 기 조직을 확인하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누르하치은 말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자신의 지지자들에 의해 칸khan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사후에 개정된 기록에서는 그를 항상 황제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대부분의 일생 동안 버일러라고 인식되었다. 버일러는 여진족의 종족 또는 연맹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용어이다(P107). 건주연맹의 지휘권은 오도리 여진의 족장이 가진 지휘권에서 기원했다. 오도리 여진의 지도자는 몽케 테무르였는데 그는 명조와 조선왕조 모두에 인정을 받았다. 여진족 일족의 구성원들은 12세기에 한자로는 '가고'로 표현되었고 만주족 이름으로는 '기오로'였다. 누르하치는 마침내 명조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1619년 사르후에서 명의 첫 원정군을 격퇴하면서 명조 요동 행정수도인 심양을 차지한다. 누르하치는 여진족, 요동에 근거지를 둔 몽골족, 요동에 있던 일반 농부들을 모두 소중히 여겼고 그들을 자신의 정치조직 안으로 통합시키면서 팔기 체제 안으로 끊임없이 편입시켰다. 누르하치의 국가는 독점적인 경제권의 집행과 부의 통제를 기반으로 설립된 지역 정권이었다(P140).

홍타이지는 누르하치가 사망하고 난 뒤 수년간 일족을 교묘히 조종하면서 버일러들 중 칸으로 선출되었다. 1635년에서 1636년 사이 홍타이지는 칸이 다스리는 지역을 제국으로 변형시켰다. 여진족이라는 이름을 폐지하고 아이신 기오로 일족의 공식적인 역사를, 본질적으로 만주족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확고히 정립했다(P148). 만주족은 만주 동부에 정착하면서 국호를 청으로 개정했다. 이 때 한군기인은 팔기제도 내에서 만주족과 몽골족의 수를 이미 초과한 상태였다. 홍타이지는 정복한 한족 관리들을 믿지 못하여 행정을 맡을 기인 계층을 양성하려고 했다. 이로 인해 만주어와 중국어로 응시할 수 있는 과거 제도를 시행했고 합격 할당제로 5(만주족):5(한족):2(몽골족) 비율을 고수했다. 1669년부터 엘리트 사이 균열이 일어나며 만주족과 몽골족 사이에서, 만주족과 한군기인 사이에서 일어났다. 

강희제 현엽은 부친과 달리 어려서부터 정치에 능력을 보이면서, 임기 동안 눈부신 치세를 이루었다. 몽골족은 팔기군에 편입되면서 몽고팔기가 되는데 그들은 만주팔기와 비견할 만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당시에도 중국 내에는 비(非)한족이 많았다. 요족, 장족, 묘족, 동족, 이족, 태족 등은 토착적 색을 가진 민족들이었던 만큼 한족 정권에 맞서 끊임없이 이주와 동화의 압박을 받아야 했다. 강희제는 티베트와 중앙아시아 지역과 몽골족의 전략적 결합을 경계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로 인해 티베트는 정치 독립권을 박탈당한다. 몽골 지역이 재편되면서 스텝지대의 몽골족은 청 황실의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행정관 직위의 세습을 보장받았고, 혼인동맹을 통해 황족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북만주를 둘러싼 러시아와의 갈등의 결과는 네르친스크 조약(1689)과 캬흐타 조약(1727)이었다. 양국은 만주 지역에서 두 나라 사이의 국경선을 확정하고 관세제도를 확립했다.

18세기 유럽에서는 중국 열풍이 불었다. 중화제국은 유럽의 중산층과 상류층이 높게 평가하는 물건들이 생산되는 원산지로 높게 평가받았다. 건륭제 시대 많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청에 와서 고문관, 의사, 조정의 건축설계자 겸 화가로 활동했으나 예수회 선교사들의 종교활동은 어느 순간 청 조정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1773년 영국 의회는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한 북미를 안정시키고 영국 동인도 회사의 국내 영향력을 낮추고 아시아산 차 접촉을 통제하기 위해 중국과의 무역 구조가 재편될 필요성을 느꼈다. 영국 정부는 매카트니 사절단을 청에 파견였으나 삼궤구고두 문제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채 런던으로 돌아간다. 이후 토머스 스톤턴 사절단이 파견되기도 했으나 그들의 임무는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청과 영국 사이에 아편전쟁이 발발하고 1842년 남경조약을 맺으며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전쟁은 끝이 난다. 청이 남경조약의 내용을 이행하지 않자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을 재침략하며 청에 대한 배상금을 늘렸다. 여기에 홍수전이 이끄는 태평군의 난까지 벌어지며 청조의 국고는 바닥나고 지배층의 무능과 부패까지 더해지며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 이후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이다.

중국에 살든 대만에 살든 이제 자신을 만주족으로 규정하기로 한 최근의 젊은 세대에 의해 만주족의 민족적 '정체성'이 다시 회복되었다. 20세기에 만주족이 겪은 고통은 많은 근대 소수 민족집단이 겪은 공동의 경험이다(P322).

이 책은 누르하치를 비롯한 광서제, 건륭제, 도광제, 자희태후, 푸이 등의 인물을 다면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좋았다. 어떤 입장을 세워놓고 그것에 맞추려하다보면 인물이 평면적으로 그려지기 쉽다. 하지만 이 책은 인물을 평가할 수 있는 다양한 기록을 제시함으로써 독자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늘린다.
또한 짧지 않은 만주족의 역사를 대중들이 읽기에도 어렵지 않게 풀어냈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당연히 번역자의 공이 커 보인다. 흐름이 끊기지 않고 부드럽게 읽히는 역사 번역서를 자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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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7-11 23: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타타르 오도리 팔기군애 누르하치에. 이 모든것이 이렇게 연결되는군요. 그저 만주에 살았던 사람은 만주족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넘 잘 읽었어요 화가님 *^^*

거리의화가 2022-07-12 09:03   좋아요 2 | URL
네.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막연하다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저도 좀 단편적이고 넘겨짚듯이 만주족을 생각해왔었는데 그들의 뿌리부터 시작해서 최근의 역사까지 담아놓아 만주족에 대한 거의 대부분의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었어요. 미니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2-07-12 09: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만주 하면 거리의 화가님이군요~!! 타타르가 몽골인지 첨 알았습니다 ㅡㅡ 전 역사에 대해 아는게 없는데 이렇게 또 배우고 갑니다~!!

거리의화가 2022-07-12 09:39   좋아요 2 | URL
ㅋㅋㅋ 만주하면 저라뇨~ㅎㅎ 넘 띄우셨습니다;;;(그래도 감사하게 받아들일게요.) 최근에 만주 지역 관련하여 책을 여러 권 읽기는 했네요ㅎㅎㅎ
새파랑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희선 2022-07-13 0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주족은 만주에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여진족이라는 건 들어본 듯한데... 중국에도 소수 민족이 많이 살지만, 소수 민족으로 인정해주지 않기도 하네요 중국을 더 크게 만들고 싶어서 그런 거겠습니다 중국은 중화합중국(중화연방)이라고도 한다는 게 생각났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2-07-13 09:36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희선님. 다양한 민족이 함께 사는 중국은 정작 종족을 갈라치기하고 있고 인권 문제도 심각하죠.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한데 말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