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유가의 흥기

1. 중국 역사상 공자의 위치
2. 전통적 제도와 신앙에 대한 공자의 태도

공자는 육예를 일반인에게 가르친 최초의 인물이었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공자의 강학은 그후의 다른 제자백가와는 달랐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학설만을 중시했는데, 이를테면『장자(莊子)』 「천하편(天下篇)」에서 보여지듯이 묵가의 제자들은 『묵경(墨經)』을 암송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교육가였다. 그의 강학목적은 "인재(人)" 양성에 있었다. 특히 국가를 위해서 일할 인재를 양성했지, 어떤 한 학파(一家)의 학자를 양성하지 않았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각종 서적을 읽게 했고, 각종 과목을 가르쳤다. - P83

공자는 이미 있던 책을 가지고 교육했는데, 가르칠 때 다소 취사선택을 가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렇듯 수시로 취사선택하여 강해한 사실을 두고 "육경을 산정(刪正)했다"고 한다면, 공자가 "산정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산정"이란 사실 아무런 비상한 의미가 없다. 그후 유가는 관습대로 여전히 계속해서 육예를 교재로 사용한 반면, 다른 학파에서는 오직 자기들의 새로운 학설만을 강할 뿐 옛 서적은 강하지 않았던 까닭에, 육예는 마침내 유가의 전유물처럼 되어 공자가 제작한 것처럼 여겨졌고, 산정(산정을 했다면) 역시 중대한 의의가 있는 것인 양 여겨졌던 것이다. - P84

공자는 한 교육가였다. "계술만 하고 창작하지 않았으며, 신념을 가지고 옛것에 심취했으며"," "학문에 싫증을 낸 적이 없었고, 인재교육에 게으른 적이 없었다"는 말은 바로 공자가 자신에게 내린 평어(考語:評語)였다.
이로써 보건대 공자는 단지 한 "선생님(老敎書匠)이었지만, 중국역사상 여전히 지극히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 P85

전국시대에 학문이 있으면서도 벼슬하지 않고 직접 노동을 해서먹고 살았던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허행(許行)은 "그의 추종자가 수십 인이었는데, 모두가 갈옷을 입었으며 짚신을 삼고 자리를짜서 생계를 유지했고, 진중자(陳仲子)는 "몸소 짚신을 삼고 처는 길쌈해서 "살아갔다. 그러나 맹자는 그렇지 않았다. 맹자 자신은 "뒤따르는 수레가 수십 대에 시종 수백 명을 거느리고 제후에게서 자고 먹었는데", 이를 두고 그의 제자인 팽경(彭更)이 "너무 지나치다(泰)"고 여겼을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의 비평이야 더 말할나위도 없다. - P89

선비는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봉양만 기대했다. 이런 선비계급은 공자 이전에는 없었던 것 같다. 이전의 소위 사(士)란 주로 대부·사(大夫士)의 사였거나 혹은 남자 병사의 칭호였지 후세의 소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는 아니었다. 이들 선비계급은 오직 벼슬살이와 강학이라는 두 종류의 일만 할수 있었다. - P90

공자는 소크라테스와 흡사했다. 소크라테스도 원래 "소피스트였지만, 그들과 다른 점은 학생들에게 학비를 받지 않았고 지식을 팔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는(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귀납법으로써 정의(定義)를 구했고, 정의로써 우리 행위의 기준으로 삼았다. 공자 역시 정명(正名)을 주장했고, 명(名)에 대한 정의로써 우리 행위의 기준으로 삼았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도덕성을 강조했다. 공자도 인간의 "인(仁)"이
"정치담당(從政)"능력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다. - P92

소크라테스 사후에 그의 학파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양, 발전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서양철학의 정통이 되었다. 공자의 학파도 맹자와 순자의 선양, 발전 과정을 거쳐 마침내 중국철학의 정통이 되었다. - P93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는 주례(周禮)를 입증할 문헌이 충분했기 때문에, 공자는 주례에 대해서 깊이 알았고 간절히 사모했다. 그래서말했다.
주는 이전의 두 왕조를 조망하여 거울삼았으니, 그 문화가 찬란하다! 나는주(周 : 즉, 주의 문화, 周禮)를 추종한다! - P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