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고통으로 가득차 있다고들 하지요. 고통스러운 일을 하나 겪고 나면 또다른 고통이 닥치는 방랑자의 전기를 읽은 적이 있어요. '희망'이 그의 앞을 휙 지나가고는 너무나 오랫동안 가까이 날아오는 법도 없고 서성이는 법도 없어서 그는 한번도 희망을 잡을 기회조차 없었다고 해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렸지만 기쁨으로 거두지 못하고 엉뚱하게 곡식이 병충해로 죽어버리거나 갑작스러운 돌풍으로 멀리 날아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었어요." 


어떤 일은 쉽사리 지워질 수 없는 기억이 된다.

혼돈과 절망.

무슨 말을 꺼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간 일에 왜 국가가 책임져야 하냐며 무책임한 말을 건네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해서 모두 다 죽지 않는다.

조롱과 혐오를 내뱉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아는 사람이고 모르는 사람이고를 떠나서 애도를 표해야 마땅하거늘 이런 광경들을 보고 있자니 더욱 참담한 심정이 밀려온다.

2022년 10월 29일은 상실과 아픔으로 기억되겠지.

부디 떠난 이도, 남은 이도 안식을 찾기를 소망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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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0-31 10: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런 댓글들을 어떻게 다는지 ㅠㅠ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거리의화가 2022-10-31 10:16   좋아요 3 | URL
미니님.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ㅜㅜ 조롱하는 댓글, 자극적인 영상을 버젓이 올리는 사람들 너무 화가 나요.

페넬로페 2022-10-31 10: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 젊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넘 마음이 아픈데 댓글과 혐오를 보면서 더 마음이 찢어졌어요. 이 사회가 왜 이렇게 막 나가는지 화가 나고 슬프기도 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10-31 11:22   좋아요 4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찬란한 청춘들이 이리도 허망하게 가버렸네요. 고인에 대한 존중도 모르는 후안무치한 이들을 생각하니 화가 납니다.

새파랑 2022-10-31 12: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그래서 인터넷 댓글은 안보게 되더라구요. 여기저기 혐오와 냉소가 가득해서 안타깝습니다 ㅜㅜ

거리의화가 2022-10-31 13:00   좋아요 4 | URL
몇 개 보다가 더는 못보겠어서 현재는 안 보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서로 보듬어야할 때인것 같아요.

하나의책장 2022-10-31 22: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뉴스통해 봤는데 비난하는 댓글은 물론 사망하신 분들의 사진이랑 적나라한 사고영상들이 SNS에 지금도 올려져 있다고 하더라고요;
모자이크처리된 뉴스 영상만 봐도 가슴떨리고 무섭던데... 정말 믿겨지지 않는 끔찍한 사건이에요...
특히 CPR하고 있는 와중에 다른 한 편에서는 노래부르고 춤췄다는 뉴스가 제일 충격이었어요... 휴우... ㅠ

거리의화가 2022-11-01 09:26   좋아요 1 | URL
앞으로는 그런 사진이나 영상들 올리는 것을 필터링한다고 하네요. 2차 가해가 심각한데 진작 그랬어야할것을. 국가적 재난에 이슈 몰이라니 참담합니다.

그레이스 2022-11-02 2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세월호 유가족이 조언하는것을 들었습니다. 눈물나서 혼났습니다. 함께 모여 서로 위로하고 생각을 나눌수 있게 해주라는 말에서! 😭

거리의화가 2022-11-03 09:19   좋아요 1 | URL
세월호 가족분들은 이 참사를 보실 때 더 힘드실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위로하고 공감하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8년이 지나 또 이런 참사가 일어나니 너무 마음이 힘듭니다. 흑흑
 

3부 세계적 변화의 문화사

새로운 시간 체계가 도입되고 유럽식 삼분법(고대, 중세, 근대)가 이때부터 자리했다. 르네상스라는 용어도 이때 정리된 것이었다.

종교와 제국주의의 관계와 변화도 체크하고 넘어간다.

문화적 차원은 보조적인 역할만 수행하는 경우가 흔하다. 경제나 기술, 제국주의가 움직이는 근저의 과정에 붙은 단 - P490

순한 부가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주로 이 과정의 물질적 차원에만 집중하는 시각은 여러 곳에서 문화적 변화가 정치적 변화나 경제적 변화보다 훨씬 더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가린다. 인간의 시간관념과 공간 관념에 나타난 혁명적 변화, 수백 년간 존속한 세계관과 우주관에 대한 의심(몇몇 경우에는 통째로 내버리기), 종교적 확신에 대한 비판적 이의 제기, 보편타당성을 주장하는 이론의 정립, 개인의 역할에 대한 인간의 견해에 나타난변화, 세계적 의식의 출현, 이 모든 것은 1900년의 세계가 더는 1750년의 세계와 비슷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대양 항해 증기선을 타 보지 않고 전보를 보내보지 않고 쥘 베른Jules Vern의 소설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 P491

세계사의 서술은 지금까지 저마다 문화적 변화를 더 큰 맥락 속에 두는세 가지 표준적인 담론을 탄생시켰다. - P493

고립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은 유럽 중심적 견해를 취하는 것이다. 특정 지역에 유럽인이 존재하는지를 한 나라의 ‘개방‘을판단하는 척도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이나 중국, 일본에서 유럽인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입국이 허용되었지만, 그런데도 동아시아와의 관계는 비록 엄격히 규제되기는 했어도 유지되었다. - P519

무수히 많은 일상적 교류와 이동, 상업활동의 형태가 19세기 말의 세계화한 제국 세계 안으로 들어왔다. 여러 경우에 관련된 자들은 이러한 오래된 전통을 의식적으로 언급하곤 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연속성이 있는데도 이 글에서 논의하는 지역적 유형들의 출현이 근대 초기의 지역 세계가 과거의 역사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그 세계가 남긴 단순한 유물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중요하다. 19세기에 세계는 점점 더 심하게 뒤얽히면서 주요 지역들은 개조되고 재구성되었으며, 나아가 몇몇은 처음으로 출현했다. - P552

무슬림 통치자와 일본 개혁가들 사이의 동맹처럼 종교적 경계를 초월한 이러한 동맹은 유라시아의 충성과 정체성이 지정학적으로 재구성되었기에 가능했다. 이 조정의 중요한 특징은, 동시에 지역주의의 정치적 도구화의 중요한 특징은 ‘범-’ 운동의 출현이었다. 이러한 운동들도 문화적 자기주장을 추구하면서 지역의 우주론을 자원 삼아 의지했다. 이러한 운동의 선구자들은 국제적인 인정을 받으려는 열망에서 자주 헤르더와 그의 유기적 ‘문화’ 개념이나 먼로 독트린(1823)을 정치적 모델로 삼았다. 그러나 1880년대에 점차 악독해진 종족 담론과 임박한 ‘종족 전쟁‘의 풍설도 단연 새로운 중요한 요소였다.
‘법‘ 운동들은 비록 장기적인 역사적 연속성의 산물로 자처했지만, 이러한 지정학적 상황에서 출현했다. 따라서 이 운동들과 관련된 지역들은 단순히 문 - P559

화적 자의식의 각성이 필요했던 기존 지역이 아니라 세계화한 세계가 세계적 상호 연결의 영향을 받아 재구성된 결과물이었다. - P560

관례적으로 ‘계몽운동‘이라는 포괄적 용어로 총괄된 모든 것의 여러 시각과 양상이 보여 주는 전경은 매우 다양한 요소들이 포함된 그림이다.
현재 고정불변의 계몽운동 기획이라는 관념을 고수하는 역사가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180 지배적인 견해는 접근법과 태도의 큰 다양성과 큰 범위를 간파하는 것이다. ‘계몽운동‘이라는 용어 자체가 처음에는 프랑스 계몽철학자들에게 반대한 압도적으로 가톨릭 왕당파였던 자들의 투쟁 구호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181 그렇게 그 현상의 통일성은 그 반대자들이 만들어 주었다. 계몽운동이 라틴아메리카나 아시아에서 수용되고 채택되면서, 완전하고 통일성 있는 문화적 경향이라는 관념은 더욱 강화되었다. 따라서 ‘계몽운동‘은 언제나 역사의 주역들이 쓴 개념이었다. 그들은 맞서 싸우거나 모방할 운동을 지칭하는 데 그 용어를 썼다. - P568

18세기의 계몽운동에 관한 논쟁은 세계적 상황에 대응하려는 시도의 산물이었다. 논쟁은 서유럽의 경계 너머까지 넓게 확장된 공간에서 일어났으며, - P568

논쟁의 형세는 새로운 여행 가능성과 도서와 지식의 유포, 세계적 인식의 전체적인 성장이 결정했다. 이러한 논쟁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었지만, 결코 동일하지는 않았다. 그 지리적 범위는 전혀 임의적이지 않지만 영 제국이나 교역망 안으로의 통합 같은 포괄적인 구조에 의해 촉진된 동시에 제한되었다. ‘계몽운동‘을 불러내는 것은, 비록 그 언급이 수사법에 그치고 전략적으로 배치되었다고 해도, 유럽과의 모종의 관계를 전제한다. 계몽운동에 관한 논의들사이의 연결은 특히 대서양 권역에서 각별히 긴밀했지만, 그 영역을 벗어나기도 했다. - P569

계몽운동은 처음부터 대서양 권역 내부에서 발생했지만, 그 안에서도 유럽이 유일한 발상지는 아니었다. 유럽은 개념들과 사상이 유포된 여러 방향의 하나였을 뿐이다. - P575

계몽운동이 절박하게 요구된 것은 주로 지정학적 세력 구조와 관련이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계몽운동은 국가의 쇠락이나 식민화를 모면하기 위해 필요했다. 계몽운동의 수사법은 보편적 발전이라는 개념을 세계적 구조와 지역 현장의 개별적 조건에 대한 진단에 연결했다. 지역과 세계 사이의 연결은 19세기 세계를 바꾸어 놓은 세 가지 근본적인 과정, 즉 세계경제의 통합, 국제적 국민국가 체제의 출현, 제국주의의 공고화가 매개했다. - P593

이러한 상실의 경험은 종종 문화적 구축의 징후로 해석되었다. 그러므로새로운 시간성은 전통적인 우주론을 밀어내고 사실상 소멸시키는 외래 사고방식의 침투로 보였다. 그러나 사회적인 시간 경험을 대충 보기만 해도 단순한 서구화론은 지지할 수 없음이 드러난다. 새로운 시간 체제의 새로운 성격은 파리에서도 그 이후에 바타비아나 이스파한에서 느낀 것에 못지않게 강력하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서구 밖에서는 부득이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유럽의 시간 체제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그것은 서구에서도 기묘하고 이상했다. 괴테가 1809년에 발표한 소설 『친화력Die Wahlverwandtschaften』의 주인공 에두아르트Eduard는 이렇게 외쳤다. "요즘에는 온 힘을 다해도 무엇이든 쉽게 배울 수 없다. 우리의 조상은 젊을 때 배운 것을 지킬 수 있었지만, 우리는 유행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5년마다 다시 배워야 한다."이 이행기에 작성된 많은 기록은 고통스러운 대체과정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증언한다. - P614

시간 혁명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관행과 세계질서에 나타난 광범위한 변화의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 많은 과정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는데,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국민국가가 수행한 표준화 기획, 시간의 정밀한 계측을 촉진하는 동시에 시간의 우주론적 의미를 훼손한 자연과학의 발전, 증기기관 시대의 기술적 성취, 생산과 사회적 관계의 점진적인 자본주의적 변화, 마지막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변화하는 지정학적 질서. 이러한 과정들은 영국이나 세네갈, 오스만 제국이나 인도네시아의 역사적 행위자들이 시계와 시간 엄수, 진보의 체제를 점차 자명하고 유익하며 나아가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에 영향을 끼쳤다. - P627

제국주의는 새로운 시간 체제의 세계적 확산에 기여한 매우 중요한 사회적 과정의 하나였다. - P630

새로운 시간의 채택과 더불어 많은 사회에서 옛 시간의 재건, 즉 황금기의 탐색도 목격되었다. 그 전제는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로 삼분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새로운 시간 체제의 산물이었다. 고대는 종종 문화가 꽃을 피운국면으로 표현되었다. 반면에 중세는 1830년대에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 - P648

기를 끌었는데도 쇠퇴의 시기이자 정치적·문화적 사망의 시기로 여겨졌다. 이러한 해석에서 근대는 고대 세계의 전통과 다시 연결되었고, 그로써 역사의순환이 완성되었다." 이 거대 담론은 르네상스 이래로 유럽 전통의 일부였으며, 그 뿌리는 유대-기독교적 시간의 이해였다. 그러나 유럽 밖의 다른 문화에적용되면 쇠퇴와 부활이라는 개념과 쉽게 연결되었다. - P649

18세기 말에 많은 종교에서, 주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교에서, 또한 유교에서도 내부의 개혁주의 운동이 출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중 여럿이 개인의 직접적인 관여를 크게 강조했다. 다른 공통의특징은 종교의 고전적 텍스트에 거의 문헌학적으로 의지한 것과 ‘원형‘으로의복귀를 호소한 것이었다. - P666

이 새로운 종교적 네트워크는 19세기의 초국적 상호 연결의 전반적 확산과 맞물려 출현했다. - P679

18세기와 19세기의 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사회적 힘은 기독교가 아니라 사하라 사막 남쪽에서 꾸준히 세력을 키웠던 이슬람이었다. 이슬람은 7세기 이래로 이미 마그레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고, 11세기이후로는 가나를 비롯해 서아프리카의 다른 곳에서도 지배층에 서서히 퍼졌으며, 인도양 무역의 결과로 동아프리카 해안 지방을 따라 점점 더 많은 무슬림 집단이 발전했다. 그러나 수피교도 단체들과 상인들, 인쇄물의 확산으로 - P683

매우 다양한 기풍의 이슬람과 샤리아 율법학파들이 사하라사막 이남으로 전파되어 처음으로 그곳 주민의 큰 부분에 침투한 것은 18세기 말의 일이다. - P684

1882년부터 진행된 아프리카 쟁탈전은 아프리카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선교 활동은 새로운 기독교 사회의 성장을 낳았고, 동시에 유럽 사회에도 반향을 일으켰다. 게다가 기독교 모델과 식민 국가의 관행은 비기독교 종교들이 자기들의 성격을 더욱 강하게 규정해 서로 더욱 명확히 구분되는 과정에 이바지했다. 특히 중요했던것은 종교 개념이 식민 통치의 도구였다는 사실이다. - P685

기독교 선교회는 승인된 기관이었으므로 식민지 국가의 필수 요소였지만, 종종 정부에 맞서(특히 유럽인 정착민들에 맞서 ‘토착민 ‘ 옹호자의 태도를 취했고, 식민주의의 추악함을 들춰냈으며 술과 아편, 노예제의 확산에 반대하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곤 했다. 453그렇더라도 기독교 선교회들은 유럽의 정치적 팽창으로부터 혜택을 입었다. 그러한 팽창이 없었다면 그들의 활동은 여러 지역에서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선교회가 식민주의의 필수 구성 요소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고, 그들의 비판이 식민지 사업 자체에 도전하는 진정으로 근본적인 비판인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프랑스 제국은 예외이지만) 거의 보편적으로 학교는 기독교 선교회가 확고히 장악했다. - P692

한국의 기독교화도 문화적 제국주의의 범주에 말끔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한국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의 세계사에서 특별한 경우였다. 일찍이 1600년대에 조선의 외교관(주청사奏請使) 이광정李光庭이 북경에 갔다 오면서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책자를 들여왔다. 이것이 한국이 스스로 시작한, 처음에는 서양 선교사의 아무런 개입 없이 중국어로 시작된 개종 프로그램의 출발점을 이루었다. 그 결과로 국가의 박해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도 그나라에 가톨릭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1880년대에 영국과 미국의 선교회들이 그때까지 서양의 접촉을 완전히 봉쇄했던 조선에 들어간 것, 즉 조선의 ‘개항‘이 기독교화의 두 번째 물결의 시작이었다. 유럽의 문명화 사명이라는가정이 강하게 스며든 이 운동은 프로테스탄트의 급속한 확산을 낳았다. - P694

종교에 공통된 종교적 진리라는 관념에서 출발했다. 이와 같은 보편적 종교의탐색은, 그 확실한 표현을 넘어 또 그 배후에서, 19세기에 근대의 진보 담론과결합했다. 진보 담론은 인간의 종교성이 자연 세계에 대한 단순한 물활론적형태의 신앙으로부터 주술과 범신론을 거쳐 기독교의 일신론으로, 높은 단계로 부단히 진화했다는 가정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 P713

점차 강화되는 세계의 상호 연결은 지구를 더욱 동질적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경계선과 차이를 낳기도 했다. 세기 전환기의 세계화 과정은 내부적으로 국민국가와 제국, 거대 지역으로 분화한 국제 체제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 거대한 과정은 종교의 영역에서도 작동했다. 국가와 지역의 정체성 강화와 유사하게, 공간적으로 구분되고 문화에 특정한 종교적 전통을 새롭게 강조한 것은 19세기의 마지막에 진행된 세계화 과정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할 수 있다. - P720

종교 영역의 변화는 다른 무엇보다도 세계적 통합이라는 도전에 대한대응이었다. - P732

종교는 19세기의 마지막 몇십 년간진행된 세계의 지역화에서 필수적인 구성 부분이었다. 계몽운동과 종교학의확산 여파로, 여러 종교는 일부 학자가 말한 이른바 종교 시장 안에서 세계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동안 기존의 모든 구체적인 종교는 하나의공통된 원형 종교의 상이한 표현으로 여겨졌다. 20세기에 들어선 후에도 이보편주의적 접근은 한참 동안 유효했다. 그러나 19세기 막바지부터 그것은 한번 더 특정 지역과 문화를 연결한 종교 개념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다양한 종교적 ‘범‘ 운동에서 표현된, 이와 같은 종교와 지리·문화 사이의 연결의 귀환은 단순히 전근대 ‘문명‘의 전통을 상기시킨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민족주의의 흥성과 거대 지역의 재출현을 포함한, 세기말에 일어난 세계적 변화의 결과이자 산물이었다. - P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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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풍요의 가능성과 빈곤의 지속성: 산업화와 국제무역

19세기 말 일본의 국가 주도 산업화 프로젝트는 20세기
한국의 경제 성장 모델로 복붙처럼 이어짐

장기 19세기 동안에, 즉 프랑스 혁명의 시대에서 제1차 세계대전 전야에이르는 동안에 일어난 산업화 과정을 살펴보려면 유럽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산업화가 그곳에서 시작되었으며, 나아가 유럽은 산업화를 통해 사회적·정치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깊은 변화를 겪은 세계의 두 지역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산업화의 경제적 과정이 시작된 곳이 유럽일뿐 아니라 19세기 말까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해 다양한 형태의 식민지나 보호령으로 만들었던 것도 유럽의 정치권력과 군사력이었기 때문이다. - P337

두 세기 동안 산업화를 겪은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는 미래에도 경제가 성장할 수 있을지에 관해 불안함을갖고 있다. 그동안 일부 사회가 탈산업화되었지만, 우리는 산업사회를 특징지었던 화석 에너지에 대한 만성적 의존 상태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세기 초기에는 석탄으로, 그리고 점차 석유와 천연가스로 추진되는 기계가 등장했으며, 20세기 말의 경제 발전 수준도 매일의 소비 욕구와 인간의욕망을 채워 주는 데 사용될 에너지의 양에 달려 있었다. - P337

필자는 중상주의적 상업자본주의가 특히 유럽적 현상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산업자본주의를 초래하지는 않았다고 이미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업자본주의가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먼저 일어날 가능성을 매우 높이지 않은 것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경제적 산출을 보여 주는 양적 지표들은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다만 천천히 성장했다. 그러나 19세기 전체를 한 단위로 파악할 때, 우리의 목표는 장기적인 결과를 추적하는 것이지, 즉각적이고 단기적인 영향을 살펴보려는 것이 아니다. - P340

우리가 경제적으로 유용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게 한 조건 가운데 공급 측면으로부터 수요 측면으로 넘어가 영국뿐 아니라 네덜란드도 시야에 넣는다면, 석탄 사용에서 돌파구를 발견하게 한 기술적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세계 다른 지역에서보다 유럽의 이 지역들에서 더 컸다는 사실을 깨닫게된다. 이 지역의 고임금은 노동에 드는 비용이 자본과의 관계에서 다른 지역보다 비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현상은 특히 영국이나 네덜란드 같은 상업자본주의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두 나라가 다른 나라들보다 자본의 이동을 쉽게 만드는 발전된 금융기관을 보유했기 때문이었다. 기술 발전은 보통거대한 자본 투자가 필요한 새로운 기계 설비를 포함하므로 대개 고임금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유럽의 경험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 준다. - P346

보호관세의 토대가 된 민족주의는 산업 엘리트와 농업 엘리트들에게서정치적으로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경제적 통합도 촉진했다. 당시에독일은 다양한 이해관계가, 특히 동부의 농업적 이해와 서부의 산업적 이해가 정치적으로 연결되고 경제적으로 통합되었다. 이를 모방하고자 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정치권력과 경제 번영을 함께 달성하려는 논리는 국가의 부유층과 정부의 권력을 서로 연결해 주었던 중상주의 사상의 기본 개념을 연상시킨다." 경제와 정치의 엘리트들이 중요한 정책결정을 내릴 때 동원했던 각별한 확신은, 그리고 부와 권력의 실질적인 네트워크는 여전히 유럽의 정치와 경제의 질서에서 기본적인 토대를 이루었다. 자기들의 자유와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경제와 정치의 엘리트들이 보유하던 제도는 200~300년 전과 똑같지는 않았지만, 유럽 국가들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경쟁하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힘을 합쳤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럽내 경쟁은 이미 19세기 초에 유럽을 넘어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식민지로 만드는 경쟁이 되었다. - P356

미국의 국민경제는 남북전쟁 이후 국내적으로 견고하게 통합되었으며, 국제 네트워크도 확대되었다. 게다가 미국 경제는 미국 내 상품의 흐름 증가나해외무역이 증가하면서 얻은 이익과 마찬가지로, 미국에 유입된 자본과 노동력으로부터도 혜택을 입었다. - P372

순수한 경제 논리에 따르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농산물 수출로 벌어들인 돈을 유럽산 산업 제품이나 미국산 산업 제품을 구 - P379

매한 대금을 지급하는 데 사용해야 했다. 이들은 유럽인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게 농산품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 내륙 국가들이 영국산 수입품을 대체하기 위해 자국 산업을 발전시킬 때사용한 방법과 마찬가지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도 보호관세를 통해 아직 초기 단계인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고 했다. 예전에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외국차관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긴급한 국가 수입을 조달하는 데 관세 제도를 사용했다. 산업 육성을 위한 보호관세는 여러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산업화를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수많은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국가에의한 경제 촉진 정책, 유럽의 자금 투자, 유럽인 노동자의 이주, 이 세 가지 요인이 결합된 결과 19세기 말의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농업 분야뿐 아니라 산업분야에서도 생산이 증가했다. - P380

서양은 19세기에 대서양 양편에 사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제도에 토대를 둔 대서양 경제가 형성되면서 세계의 다른 지역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뛰어난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19세기 말에 대서양 경제는 본질적으로 산업자본주의경제였는데, 산업 생산품뿐 아니라 농산물도 시장가격에 따라, 즉 수요와 공급이 형성하는 조건에 따라 대서양을 건너 오갔다.
세계적 관점에서 볼 때 대서양을 건너 오고 가는 더 강력하고 더 다양한결합으로서 대서양경제가 등장할 수 있게 된 것은 대서양 양편의 지역이 서로 같은 이데올로기와 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화와 경제, 정치도 여기에 속했다. 다소 변형된 부분이나 차이점이 있었지만, 서로 어떤 연속성이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정도였으며, 비유럽 세계에서 발견되는 이데올로기나 제도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대서양 양쪽의 지역들은 이렇게 공통된요소들을 기반으로 상대 지역에도 적용될 수 있는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와 제도들을 시행한 결과 비슷한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 P399

유럽과 미국에서 전개된 성공적인 산업화 과정과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 오스만 제국에서 진행된 제한적인 발전을 나란히 펼쳐 놓고 살펴보면, 우리는 19세기에 훨씬 긍정적인 경제 발전을경험한 지역들에서는 공통적으로 발견되지만, 생활수준이나 삶의 질에서 이와 비슷한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지역들에는 결여되어 있던 두 가지 전제 조건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무역을 촉진하고 경제활동이 더 생산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도록 만들어 주는 효과적인 사회제도가필요했다. 둘째, 의도적이든 아니든 경제 발전을 뒷받침해 주는 국가의 정책과 그 정책의 관철이 필요했다. 이는 항상 기존의 사회제도나 실현 방식을 보완하거나 변화시켜 주었다. 그런데 이들 제도나 그 제도의 실행이 구체적으로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할 수 있다. 또한 아마 이것이 더중요할 텐데, 경제 발전을 촉진하는 정부 정책은 유럽 내에서조차 다양했다. - P422

19세기 말에 유럽이 보인 경제적·정치적 역동성은 세계가 전 지구적인 산업자본주의의 첫 단계에 진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서양 사회가 겪은 물질적 변화를 통해 기타 세계의 대부분이 이득을 얻는 것을 방해하지도, 촉진하지도 않았다.
경제적 측면에서 19세기의 산업화에는 새로운 기술, 기계 도입을 위한 자 - P423

본, 그 기계를 다룰 수 있는 노동력이 필요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유럽이19세기 말의 산업화를 위해 필요한 자본과 기계, 노동력을 제공한 원천이었다. 인도에서는 원주민들의 노동력과 국내외 자본이 서양 기술을 도입하고 산업 영역을 발전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이들 지역에서 산업화가 발전하고 확산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은 서양인들 때문이 아니다. 많은 부분이 지역적 조건과 관계가 있다. 라틴아메리카에도 남아시아에도 수많은 지역을 광범위한 교역 네트워크로 통합하고 주민들을 거기에 많이 참여시킬 수 있는기존의 무역 체계가 없었다. 해외무역과 지역 교역을 연결하는 구조도 유럽이나 미국보다 덜 발달해 있었다. - P424

19세기 일본의 경제 발전을바라보는 이러한 시각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 19세기 일본 경제의 변화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점이 무엇인지를 오해한다. 둘째, 부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일본이 서양을 모방하면서 드러낸 덜 유 - P438

쾌하고 덜 평화적인 모습을, 결국 제2차 세계대전에서 침략국으로 등장하게한 모습을 간과한다. - P439

19세기 말에 동아시아의 국민경제는 근대 초의 근면 혁명이 남긴 유산을바탕으로 발전했다. 동아시아인들은 이미 있었던 무역 제도를 활용했으며, 서구에서 진행된 경제 변화와 점차 강해지는 그들의 정치권력이 자기들에게 문제와 동시에 기회를 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정부도 있었다. 중국이나 일본의 기업가들은 초기에 서구의 산업 기술을 도입해 소규모의 노동 집약적인 환경에 적용했던 반면에, 이와 동시에 그들의 정부는 근대적인 군대를 무장하는 데 필요한 중공업을 육성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일본 정부는기업가 집단과 효과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성공해서, 산업화와 국제무역은정부가 지원하고 통제하는 잘 조율된 프로젝트가 되었다. 학자들이 훗날 정부가 경제 발전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일본식 발전 국가라고 명명한 제도의 토대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일부 학자의 평가에 따르면 20세기 중반 이후에 한국의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기반도 일본식 발전 국가 모델에서나온 것이다. - P445

기계를 인간의 척도로 바라본 사람들은 물질문화의 기술적 측면을 기준으로 해서, 긴 역사를 갖고 세계 여러 지역에 살고 있는 인류 문명에 관한 일반적인 견해를 이끌어 냈다. 그리고 19세기에 일어난 경제적인 변화는 서구의문화적 관습과 신념을 받아들이면서 접하게 될 새로운 기술들이 각 지역의옛 사회들을 새로운 삶에 대해 각성하게 해서 변화를 꾀하게 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게 했다. 물론 19세기 후반에 유럽이나 특히 비유럽 세계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기대감에 단호하게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서구에서 근대사회를 형성한 문화적 토대는 기타 사회에서도 수용되어야 할 일련의 관습을 포함한다는 신념이 일종의 규범적인 기대가 되어 20세기까지 여전히 이어지는것이 사실이다. 이런 기대감은 1992년에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한 프랜시스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테제에서 절정을 맞이했다. 만약 후쿠야마도 스스 - P449

로 그렇게 했듯이) 역사의 종말 같은 시나리오를 거부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19세기에 산업화와 국제무역이 실제로 그런 방식대로 일어난 특별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런 변화에 대한 이해가 20세기에 뒤이어진 경제적 문제와 가능성들을 적절히 평가할 수 있는 일반적인 원칙을 어떻게 제시할 수있는지에 관한 문제 앞에 서 있다. - P450

19세기 말에 세계경제는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도 밀접하게 통합되어있었다. 산업 제품의 생산자와 농산물 또는 천연자원의 공급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경제적인 노동 분업이 이러한 통합의 토대였다. 또한 생산과 천연자원획득,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자본이 전 세계로 이동했다. 이러한 자본의 흐름이 세계적으로 확대되려면 각국 정부가 각각 무역 파트너들이 사용하는 화폐의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정책을 시행해야 했다. 각 화폐가 가진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으로 금본위제를 채택함으로써 이 조건은 충족되었다. 그리고 이 제도 덕분에 국제무역에서 관련 국가의 화폐가치가 동요한다고 해도 그것이 국제무역을 방해하는 심각한 불안 요소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서구 산업국가의 정부들은 19세기 말에 경기가 침체되었을 때, 일부 국민에게서 정부가 화폐 공급을 늘려 수요를 진작하고 시장을 활성화해야 한다는강한 압박을 받았다. 그러나 안정된 국제무역에 그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던 다른 국민들은 화폐 공급을 늘릴 경우 금융시장을 혼란에 빠뜨릴 것이라는 이유에서 이에 반대했다. - P459

군사력을 통한 위협이나 군사력의 실질적인 동원을 통해, 그리고 행정적 통치와 이념적 호소를 통해 결국 성공에 도달한 일본의 정치적 팽창은 부와 권력을 향한 일본의 본래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이러한 팽창은 이웃 국가의 경제활동을 상호 역할 분담의 구조로 통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여기서 역할은 일본의 정치 지도자와 경제 지도자들이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분담되었다. 예를 들어 대만산 설탕이나 대만산 쌀 같은 농산물뿐 아니라 일본의 산업에 필요한 한국산 지하자원 등이 그 역할 분담 과정에 속했다. 일본의 정치권력이 거대해진 것은 경제성장 없이는 거의 상상하기 어렵다. - P481

19세기가 20세기에 물려준 산업자본주의와 금융자본주의는 대부분 물질적으로 좋아 보이지만, 많은 사람은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판단할 야누스와같은 얼굴을 갖고 있었다. 20세기 사회는 사람과 정부들이 이렇게 두 가지 자본주의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가능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 왔다. 이 가능성들은 여전히 21세기 세계의 근본적인 경제적 특징으로 남아 있다. - P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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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고대편으로 서로마 멸망 때까지를 다루고 있다. 핵심적인 사건과 인물을 바탕으로 요약한 역사로 챕터 분량이 길지 않아 짧은 시간 내에 세계사를 파악하기에 적합하다. 어렵지 않은 단어 수준, 문장 구조로 초중급자들이 읽기에 딱이며 저자가 교사의 입장이 되고 독자가 학생이 되어 마치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는 세심함을 느낄 수 있다. 역사적 사실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 사건과 관련한 (뒷)이야기도 들어 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한다. 인도와 중국, 로마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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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10-29 11: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인도,중국,로마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쓰여져 있을지 궁금하네요. 저도 꼭 읽어봐야겠어요. 그러려면 일단 사야함🤭

거리의화가 2022-10-29 11:33   좋아요 2 | URL
사실 대부분의 이야기가 재밌긴 하지만 구석기, 신석기 이런 시기는 지루한 면도 있잖아요. 세계 문명의 태동부터 본격적인 국가들이 등장할 무렵부터 더 재밌습니다^^ 중국은 진시황 이야기(분서갱유 포함), 종교의 탄생, 그리스-로마는 대략 흐름을 잡고 있는데도 단골 이야기 주제를 재밌게 풀어내서 더 좋았어요. 간간히 나오는 비유도 탁월하구요~ㅎㅎ 수준도 어렵지 않아서 미미님 재미나게 읽으실 수 있을겁니다*^^*

scott 2022-10-31 22: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 영어로 읽으면 단어 문장 들이 눈에 쏙쏙 !ㅎㅎ

화가님 요! 책! 마구 페이지 넘어가는 모습을 그려 봅니다 ^^

거리의화가 2022-11-01 09:27   좋아요 2 | URL
스콧님 역시 아는 이야기가 더 눈에 잘 들어오더라구요^^ 그런 문장이나 단어들 발견할 때 기쁨을 느낍니다. 제가 역사를 좋아해서인지 이 책이 더 좋았던 것 같아요~ㅎㅎㅎ 매일 읽기에도 적당한 분량이라 좋았습니다.

그레이스 2022-11-02 16: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아이들하고 같이 읽을 계획인 책이예요. 번역으로!

거리의화가 2022-11-02 17:08   좋아요 2 | URL
알맞게 잘 선택하신 것 같아요^^ 번역본도 이북으로 읽어봤는데 괜찮더라구요. 필수 단어들도 실어놔서 공부하기에 좋았습니다^^
 

서로마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스틸리코.

로마의 유산들.

Stilicho, the half-barbarian, half-Roman general, did hisbest to protect Rome from the barbarian invaders. He fought the Visigoths for years. But the Romans executed him because they thought he wasn‘t doing his best for Rome.
They shouldn‘t have! Stilicho was the only general who could keep the Visigoths away from Rome. Only two years after Stilicho‘s execution, the Visigoths finally marched all the way down through Italy to the city of Rome itself. - P307

Even though the ancient Roman Empire is gone, we use the words, inventions, and ideas of the Romans all the time.
So, in a way, Rome will never completely disappear. The gifts that the Romans gave to us are still with us today.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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