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19세기 동안에, 즉 프랑스 혁명의 시대에서 제1차 세계대전 전야에이르는 동안에 일어난 산업화 과정을 살펴보려면 유럽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산업화가 그곳에서 시작되었으며, 나아가 유럽은 산업화를 통해 사회적·정치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깊은 변화를 겪은 세계의 두 지역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산업화의 경제적 과정이 시작된 곳이 유럽일뿐 아니라 19세기 말까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해 다양한 형태의 식민지나 보호령으로 만들었던 것도 유럽의 정치권력과 군사력이었기 때문이다. - P337
두 세기 동안 산업화를 겪은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는 미래에도 경제가 성장할 수 있을지에 관해 불안함을갖고 있다. 그동안 일부 사회가 탈산업화되었지만, 우리는 산업사회를 특징지었던 화석 에너지에 대한 만성적 의존 상태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세기 초기에는 석탄으로, 그리고 점차 석유와 천연가스로 추진되는 기계가 등장했으며, 20세기 말의 경제 발전 수준도 매일의 소비 욕구와 인간의욕망을 채워 주는 데 사용될 에너지의 양에 달려 있었다. - P337
필자는 중상주의적 상업자본주의가 특히 유럽적 현상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산업자본주의를 초래하지는 않았다고 이미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업자본주의가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먼저 일어날 가능성을 매우 높이지 않은 것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경제적 산출을 보여 주는 양적 지표들은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다만 천천히 성장했다. 그러나 19세기 전체를 한 단위로 파악할 때, 우리의 목표는 장기적인 결과를 추적하는 것이지, 즉각적이고 단기적인 영향을 살펴보려는 것이 아니다. - P340
우리가 경제적으로 유용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게 한 조건 가운데 공급 측면으로부터 수요 측면으로 넘어가 영국뿐 아니라 네덜란드도 시야에 넣는다면, 석탄 사용에서 돌파구를 발견하게 한 기술적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세계 다른 지역에서보다 유럽의 이 지역들에서 더 컸다는 사실을 깨닫게된다. 이 지역의 고임금은 노동에 드는 비용이 자본과의 관계에서 다른 지역보다 비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현상은 특히 영국이나 네덜란드 같은 상업자본주의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두 나라가 다른 나라들보다 자본의 이동을 쉽게 만드는 발전된 금융기관을 보유했기 때문이었다. 기술 발전은 보통거대한 자본 투자가 필요한 새로운 기계 설비를 포함하므로 대개 고임금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유럽의 경험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 준다. - P346
보호관세의 토대가 된 민족주의는 산업 엘리트와 농업 엘리트들에게서정치적으로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경제적 통합도 촉진했다. 당시에독일은 다양한 이해관계가, 특히 동부의 농업적 이해와 서부의 산업적 이해가 정치적으로 연결되고 경제적으로 통합되었다. 이를 모방하고자 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정치권력과 경제 번영을 함께 달성하려는 논리는 국가의 부유층과 정부의 권력을 서로 연결해 주었던 중상주의 사상의 기본 개념을 연상시킨다." 경제와 정치의 엘리트들이 중요한 정책결정을 내릴 때 동원했던 각별한 확신은, 그리고 부와 권력의 실질적인 네트워크는 여전히 유럽의 정치와 경제의 질서에서 기본적인 토대를 이루었다. 자기들의 자유와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경제와 정치의 엘리트들이 보유하던 제도는 200~300년 전과 똑같지는 않았지만, 유럽 국가들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경쟁하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힘을 합쳤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럽내 경쟁은 이미 19세기 초에 유럽을 넘어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식민지로 만드는 경쟁이 되었다. - P356
미국의 국민경제는 남북전쟁 이후 국내적으로 견고하게 통합되었으며, 국제 네트워크도 확대되었다. 게다가 미국 경제는 미국 내 상품의 흐름 증가나해외무역이 증가하면서 얻은 이익과 마찬가지로, 미국에 유입된 자본과 노동력으로부터도 혜택을 입었다. - P372
순수한 경제 논리에 따르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농산물 수출로 벌어들인 돈을 유럽산 산업 제품이나 미국산 산업 제품을 구 - P379
매한 대금을 지급하는 데 사용해야 했다. 이들은 유럽인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게 농산품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 내륙 국가들이 영국산 수입품을 대체하기 위해 자국 산업을 발전시킬 때사용한 방법과 마찬가지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도 보호관세를 통해 아직 초기 단계인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고 했다. 예전에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외국차관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긴급한 국가 수입을 조달하는 데 관세 제도를 사용했다. 산업 육성을 위한 보호관세는 여러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산업화를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수많은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국가에의한 경제 촉진 정책, 유럽의 자금 투자, 유럽인 노동자의 이주, 이 세 가지 요인이 결합된 결과 19세기 말의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농업 분야뿐 아니라 산업분야에서도 생산이 증가했다. - P380
서양은 19세기에 대서양 양편에 사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제도에 토대를 둔 대서양 경제가 형성되면서 세계의 다른 지역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뛰어난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19세기 말에 대서양 경제는 본질적으로 산업자본주의경제였는데, 산업 생산품뿐 아니라 농산물도 시장가격에 따라, 즉 수요와 공급이 형성하는 조건에 따라 대서양을 건너 오갔다. 세계적 관점에서 볼 때 대서양을 건너 오고 가는 더 강력하고 더 다양한결합으로서 대서양경제가 등장할 수 있게 된 것은 대서양 양편의 지역이 서로 같은 이데올로기와 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화와 경제, 정치도 여기에 속했다. 다소 변형된 부분이나 차이점이 있었지만, 서로 어떤 연속성이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정도였으며, 비유럽 세계에서 발견되는 이데올로기나 제도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대서양 양쪽의 지역들은 이렇게 공통된요소들을 기반으로 상대 지역에도 적용될 수 있는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와 제도들을 시행한 결과 비슷한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 P399
유럽과 미국에서 전개된 성공적인 산업화 과정과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 오스만 제국에서 진행된 제한적인 발전을 나란히 펼쳐 놓고 살펴보면, 우리는 19세기에 훨씬 긍정적인 경제 발전을경험한 지역들에서는 공통적으로 발견되지만, 생활수준이나 삶의 질에서 이와 비슷한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지역들에는 결여되어 있던 두 가지 전제 조건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무역을 촉진하고 경제활동이 더 생산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도록 만들어 주는 효과적인 사회제도가필요했다. 둘째, 의도적이든 아니든 경제 발전을 뒷받침해 주는 국가의 정책과 그 정책의 관철이 필요했다. 이는 항상 기존의 사회제도나 실현 방식을 보완하거나 변화시켜 주었다. 그런데 이들 제도나 그 제도의 실행이 구체적으로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할 수 있다. 또한 아마 이것이 더중요할 텐데, 경제 발전을 촉진하는 정부 정책은 유럽 내에서조차 다양했다. - P422
19세기 말에 유럽이 보인 경제적·정치적 역동성은 세계가 전 지구적인 산업자본주의의 첫 단계에 진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서양 사회가 겪은 물질적 변화를 통해 기타 세계의 대부분이 이득을 얻는 것을 방해하지도, 촉진하지도 않았다. 경제적 측면에서 19세기의 산업화에는 새로운 기술, 기계 도입을 위한 자 - P423
본, 그 기계를 다룰 수 있는 노동력이 필요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유럽이19세기 말의 산업화를 위해 필요한 자본과 기계, 노동력을 제공한 원천이었다. 인도에서는 원주민들의 노동력과 국내외 자본이 서양 기술을 도입하고 산업 영역을 발전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이들 지역에서 산업화가 발전하고 확산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은 서양인들 때문이 아니다. 많은 부분이 지역적 조건과 관계가 있다. 라틴아메리카에도 남아시아에도 수많은 지역을 광범위한 교역 네트워크로 통합하고 주민들을 거기에 많이 참여시킬 수 있는기존의 무역 체계가 없었다. 해외무역과 지역 교역을 연결하는 구조도 유럽이나 미국보다 덜 발달해 있었다. - P424
19세기 일본의 경제 발전을바라보는 이러한 시각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 19세기 일본 경제의 변화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점이 무엇인지를 오해한다. 둘째, 부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일본이 서양을 모방하면서 드러낸 덜 유 - P438
쾌하고 덜 평화적인 모습을, 결국 제2차 세계대전에서 침략국으로 등장하게한 모습을 간과한다. - P439
19세기 말에 동아시아의 국민경제는 근대 초의 근면 혁명이 남긴 유산을바탕으로 발전했다. 동아시아인들은 이미 있었던 무역 제도를 활용했으며, 서구에서 진행된 경제 변화와 점차 강해지는 그들의 정치권력이 자기들에게 문제와 동시에 기회를 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정부도 있었다. 중국이나 일본의 기업가들은 초기에 서구의 산업 기술을 도입해 소규모의 노동 집약적인 환경에 적용했던 반면에, 이와 동시에 그들의 정부는 근대적인 군대를 무장하는 데 필요한 중공업을 육성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일본 정부는기업가 집단과 효과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성공해서, 산업화와 국제무역은정부가 지원하고 통제하는 잘 조율된 프로젝트가 되었다. 학자들이 훗날 정부가 경제 발전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일본식 발전 국가라고 명명한 제도의 토대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일부 학자의 평가에 따르면 20세기 중반 이후에 한국의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기반도 일본식 발전 국가 모델에서나온 것이다. - P445
기계를 인간의 척도로 바라본 사람들은 물질문화의 기술적 측면을 기준으로 해서, 긴 역사를 갖고 세계 여러 지역에 살고 있는 인류 문명에 관한 일반적인 견해를 이끌어 냈다. 그리고 19세기에 일어난 경제적인 변화는 서구의문화적 관습과 신념을 받아들이면서 접하게 될 새로운 기술들이 각 지역의옛 사회들을 새로운 삶에 대해 각성하게 해서 변화를 꾀하게 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게 했다. 물론 19세기 후반에 유럽이나 특히 비유럽 세계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기대감에 단호하게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서구에서 근대사회를 형성한 문화적 토대는 기타 사회에서도 수용되어야 할 일련의 관습을 포함한다는 신념이 일종의 규범적인 기대가 되어 20세기까지 여전히 이어지는것이 사실이다. 이런 기대감은 1992년에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한 프랜시스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테제에서 절정을 맞이했다. 만약 후쿠야마도 스스 - P449
로 그렇게 했듯이) 역사의 종말 같은 시나리오를 거부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19세기에 산업화와 국제무역이 실제로 그런 방식대로 일어난 특별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런 변화에 대한 이해가 20세기에 뒤이어진 경제적 문제와 가능성들을 적절히 평가할 수 있는 일반적인 원칙을 어떻게 제시할 수있는지에 관한 문제 앞에 서 있다. - P450
19세기 말에 세계경제는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도 밀접하게 통합되어있었다. 산업 제품의 생산자와 농산물 또는 천연자원의 공급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경제적인 노동 분업이 이러한 통합의 토대였다. 또한 생산과 천연자원획득,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자본이 전 세계로 이동했다. 이러한 자본의 흐름이 세계적으로 확대되려면 각국 정부가 각각 무역 파트너들이 사용하는 화폐의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정책을 시행해야 했다. 각 화폐가 가진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으로 금본위제를 채택함으로써 이 조건은 충족되었다. 그리고 이 제도 덕분에 국제무역에서 관련 국가의 화폐가치가 동요한다고 해도 그것이 국제무역을 방해하는 심각한 불안 요소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서구 산업국가의 정부들은 19세기 말에 경기가 침체되었을 때, 일부 국민에게서 정부가 화폐 공급을 늘려 수요를 진작하고 시장을 활성화해야 한다는강한 압박을 받았다. 그러나 안정된 국제무역에 그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던 다른 국민들은 화폐 공급을 늘릴 경우 금융시장을 혼란에 빠뜨릴 것이라는 이유에서 이에 반대했다. - P459
군사력을 통한 위협이나 군사력의 실질적인 동원을 통해, 그리고 행정적 통치와 이념적 호소를 통해 결국 성공에 도달한 일본의 정치적 팽창은 부와 권력을 향한 일본의 본래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이러한 팽창은 이웃 국가의 경제활동을 상호 역할 분담의 구조로 통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여기서 역할은 일본의 정치 지도자와 경제 지도자들이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분담되었다. 예를 들어 대만산 설탕이나 대만산 쌀 같은 농산물뿐 아니라 일본의 산업에 필요한 한국산 지하자원 등이 그 역할 분담 과정에 속했다. 일본의 정치권력이 거대해진 것은 경제성장 없이는 거의 상상하기 어렵다. - P481
19세기가 20세기에 물려준 산업자본주의와 금융자본주의는 대부분 물질적으로 좋아 보이지만, 많은 사람은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판단할 야누스와같은 얼굴을 갖고 있었다. 20세기 사회는 사람과 정부들이 이렇게 두 가지 자본주의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가능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 왔다. 이 가능성들은 여전히 21세기 세계의 근본적인 경제적 특징으로 남아 있다. - P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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