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차원은 보조적인 역할만 수행하는 경우가 흔하다. 경제나 기술, 제국주의가 움직이는 근저의 과정에 붙은 단 - P490
순한 부가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주로 이 과정의 물질적 차원에만 집중하는 시각은 여러 곳에서 문화적 변화가 정치적 변화나 경제적 변화보다 훨씬 더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가린다. 인간의 시간관념과 공간 관념에 나타난 혁명적 변화, 수백 년간 존속한 세계관과 우주관에 대한 의심(몇몇 경우에는 통째로 내버리기), 종교적 확신에 대한 비판적 이의 제기, 보편타당성을 주장하는 이론의 정립, 개인의 역할에 대한 인간의 견해에 나타난변화, 세계적 의식의 출현, 이 모든 것은 1900년의 세계가 더는 1750년의 세계와 비슷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대양 항해 증기선을 타 보지 않고 전보를 보내보지 않고 쥘 베른Jules Vern의 소설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 P491
세계사의 서술은 지금까지 저마다 문화적 변화를 더 큰 맥락 속에 두는세 가지 표준적인 담론을 탄생시켰다. - P493
고립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은 유럽 중심적 견해를 취하는 것이다. 특정 지역에 유럽인이 존재하는지를 한 나라의 ‘개방‘을판단하는 척도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이나 중국, 일본에서 유럽인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입국이 허용되었지만, 그런데도 동아시아와의 관계는 비록 엄격히 규제되기는 했어도 유지되었다. - P519
무수히 많은 일상적 교류와 이동, 상업활동의 형태가 19세기 말의 세계화한 제국 세계 안으로 들어왔다. 여러 경우에 관련된 자들은 이러한 오래된 전통을 의식적으로 언급하곤 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연속성이 있는데도 이 글에서 논의하는 지역적 유형들의 출현이 근대 초기의 지역 세계가 과거의 역사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그 세계가 남긴 단순한 유물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중요하다. 19세기에 세계는 점점 더 심하게 뒤얽히면서 주요 지역들은 개조되고 재구성되었으며, 나아가 몇몇은 처음으로 출현했다. - P552
무슬림 통치자와 일본 개혁가들 사이의 동맹처럼 종교적 경계를 초월한 이러한 동맹은 유라시아의 충성과 정체성이 지정학적으로 재구성되었기에 가능했다. 이 조정의 중요한 특징은, 동시에 지역주의의 정치적 도구화의 중요한 특징은 ‘범-’ 운동의 출현이었다. 이러한 운동들도 문화적 자기주장을 추구하면서 지역의 우주론을 자원 삼아 의지했다. 이러한 운동의 선구자들은 국제적인 인정을 받으려는 열망에서 자주 헤르더와 그의 유기적 ‘문화’ 개념이나 먼로 독트린(1823)을 정치적 모델로 삼았다. 그러나 1880년대에 점차 악독해진 종족 담론과 임박한 ‘종족 전쟁‘의 풍설도 단연 새로운 중요한 요소였다. ‘법‘ 운동들은 비록 장기적인 역사적 연속성의 산물로 자처했지만, 이러한 지정학적 상황에서 출현했다. 따라서 이 운동들과 관련된 지역들은 단순히 문 - P559
화적 자의식의 각성이 필요했던 기존 지역이 아니라 세계화한 세계가 세계적 상호 연결의 영향을 받아 재구성된 결과물이었다. - P560
관례적으로 ‘계몽운동‘이라는 포괄적 용어로 총괄된 모든 것의 여러 시각과 양상이 보여 주는 전경은 매우 다양한 요소들이 포함된 그림이다. 현재 고정불변의 계몽운동 기획이라는 관념을 고수하는 역사가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180 지배적인 견해는 접근법과 태도의 큰 다양성과 큰 범위를 간파하는 것이다. ‘계몽운동‘이라는 용어 자체가 처음에는 프랑스 계몽철학자들에게 반대한 압도적으로 가톨릭 왕당파였던 자들의 투쟁 구호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181 그렇게 그 현상의 통일성은 그 반대자들이 만들어 주었다. 계몽운동이 라틴아메리카나 아시아에서 수용되고 채택되면서, 완전하고 통일성 있는 문화적 경향이라는 관념은 더욱 강화되었다. 따라서 ‘계몽운동‘은 언제나 역사의 주역들이 쓴 개념이었다. 그들은 맞서 싸우거나 모방할 운동을 지칭하는 데 그 용어를 썼다. - P568
18세기의 계몽운동에 관한 논쟁은 세계적 상황에 대응하려는 시도의 산물이었다. 논쟁은 서유럽의 경계 너머까지 넓게 확장된 공간에서 일어났으며, - P568
논쟁의 형세는 새로운 여행 가능성과 도서와 지식의 유포, 세계적 인식의 전체적인 성장이 결정했다. 이러한 논쟁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었지만, 결코 동일하지는 않았다. 그 지리적 범위는 전혀 임의적이지 않지만 영 제국이나 교역망 안으로의 통합 같은 포괄적인 구조에 의해 촉진된 동시에 제한되었다. ‘계몽운동‘을 불러내는 것은, 비록 그 언급이 수사법에 그치고 전략적으로 배치되었다고 해도, 유럽과의 모종의 관계를 전제한다. 계몽운동에 관한 논의들사이의 연결은 특히 대서양 권역에서 각별히 긴밀했지만, 그 영역을 벗어나기도 했다. - P569
계몽운동은 처음부터 대서양 권역 내부에서 발생했지만, 그 안에서도 유럽이 유일한 발상지는 아니었다. 유럽은 개념들과 사상이 유포된 여러 방향의 하나였을 뿐이다. - P575
계몽운동이 절박하게 요구된 것은 주로 지정학적 세력 구조와 관련이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계몽운동은 국가의 쇠락이나 식민화를 모면하기 위해 필요했다. 계몽운동의 수사법은 보편적 발전이라는 개념을 세계적 구조와 지역 현장의 개별적 조건에 대한 진단에 연결했다. 지역과 세계 사이의 연결은 19세기 세계를 바꾸어 놓은 세 가지 근본적인 과정, 즉 세계경제의 통합, 국제적 국민국가 체제의 출현, 제국주의의 공고화가 매개했다. - P593
이러한 상실의 경험은 종종 문화적 구축의 징후로 해석되었다. 그러므로새로운 시간성은 전통적인 우주론을 밀어내고 사실상 소멸시키는 외래 사고방식의 침투로 보였다. 그러나 사회적인 시간 경험을 대충 보기만 해도 단순한 서구화론은 지지할 수 없음이 드러난다. 새로운 시간 체제의 새로운 성격은 파리에서도 그 이후에 바타비아나 이스파한에서 느낀 것에 못지않게 강력하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서구 밖에서는 부득이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유럽의 시간 체제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그것은 서구에서도 기묘하고 이상했다. 괴테가 1809년에 발표한 소설 『친화력Die Wahlverwandtschaften』의 주인공 에두아르트Eduard는 이렇게 외쳤다. "요즘에는 온 힘을 다해도 무엇이든 쉽게 배울 수 없다. 우리의 조상은 젊을 때 배운 것을 지킬 수 있었지만, 우리는 유행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5년마다 다시 배워야 한다."이 이행기에 작성된 많은 기록은 고통스러운 대체과정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증언한다. - P614
시간 혁명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관행과 세계질서에 나타난 광범위한 변화의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 많은 과정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는데,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국민국가가 수행한 표준화 기획, 시간의 정밀한 계측을 촉진하는 동시에 시간의 우주론적 의미를 훼손한 자연과학의 발전, 증기기관 시대의 기술적 성취, 생산과 사회적 관계의 점진적인 자본주의적 변화, 마지막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변화하는 지정학적 질서. 이러한 과정들은 영국이나 세네갈, 오스만 제국이나 인도네시아의 역사적 행위자들이 시계와 시간 엄수, 진보의 체제를 점차 자명하고 유익하며 나아가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에 영향을 끼쳤다. - P627
제국주의는 새로운 시간 체제의 세계적 확산에 기여한 매우 중요한 사회적 과정의 하나였다. - P630
새로운 시간의 채택과 더불어 많은 사회에서 옛 시간의 재건, 즉 황금기의 탐색도 목격되었다. 그 전제는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로 삼분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새로운 시간 체제의 산물이었다. 고대는 종종 문화가 꽃을 피운국면으로 표현되었다. 반면에 중세는 1830년대에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 - P648
기를 끌었는데도 쇠퇴의 시기이자 정치적·문화적 사망의 시기로 여겨졌다. 이러한 해석에서 근대는 고대 세계의 전통과 다시 연결되었고, 그로써 역사의순환이 완성되었다." 이 거대 담론은 르네상스 이래로 유럽 전통의 일부였으며, 그 뿌리는 유대-기독교적 시간의 이해였다. 그러나 유럽 밖의 다른 문화에적용되면 쇠퇴와 부활이라는 개념과 쉽게 연결되었다. - P649
18세기 말에 많은 종교에서, 주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교에서, 또한 유교에서도 내부의 개혁주의 운동이 출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중 여럿이 개인의 직접적인 관여를 크게 강조했다. 다른 공통의특징은 종교의 고전적 텍스트에 거의 문헌학적으로 의지한 것과 ‘원형‘으로의복귀를 호소한 것이었다. - P666
이 새로운 종교적 네트워크는 19세기의 초국적 상호 연결의 전반적 확산과 맞물려 출현했다. - P679
18세기와 19세기의 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사회적 힘은 기독교가 아니라 사하라 사막 남쪽에서 꾸준히 세력을 키웠던 이슬람이었다. 이슬람은 7세기 이래로 이미 마그레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고, 11세기이후로는 가나를 비롯해 서아프리카의 다른 곳에서도 지배층에 서서히 퍼졌으며, 인도양 무역의 결과로 동아프리카 해안 지방을 따라 점점 더 많은 무슬림 집단이 발전했다. 그러나 수피교도 단체들과 상인들, 인쇄물의 확산으로 - P683
매우 다양한 기풍의 이슬람과 샤리아 율법학파들이 사하라사막 이남으로 전파되어 처음으로 그곳 주민의 큰 부분에 침투한 것은 18세기 말의 일이다. - P684
1882년부터 진행된 아프리카 쟁탈전은 아프리카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선교 활동은 새로운 기독교 사회의 성장을 낳았고, 동시에 유럽 사회에도 반향을 일으켰다. 게다가 기독교 모델과 식민 국가의 관행은 비기독교 종교들이 자기들의 성격을 더욱 강하게 규정해 서로 더욱 명확히 구분되는 과정에 이바지했다. 특히 중요했던것은 종교 개념이 식민 통치의 도구였다는 사실이다. - P685
기독교 선교회는 승인된 기관이었으므로 식민지 국가의 필수 요소였지만, 종종 정부에 맞서(특히 유럽인 정착민들에 맞서 ‘토착민 ‘ 옹호자의 태도를 취했고, 식민주의의 추악함을 들춰냈으며 술과 아편, 노예제의 확산에 반대하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곤 했다. 453그렇더라도 기독교 선교회들은 유럽의 정치적 팽창으로부터 혜택을 입었다. 그러한 팽창이 없었다면 그들의 활동은 여러 지역에서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선교회가 식민주의의 필수 구성 요소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고, 그들의 비판이 식민지 사업 자체에 도전하는 진정으로 근본적인 비판인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프랑스 제국은 예외이지만) 거의 보편적으로 학교는 기독교 선교회가 확고히 장악했다. - P692
한국의 기독교화도 문화적 제국주의의 범주에 말끔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한국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의 세계사에서 특별한 경우였다. 일찍이 1600년대에 조선의 외교관(주청사奏請使) 이광정李光庭이 북경에 갔다 오면서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책자를 들여왔다. 이것이 한국이 스스로 시작한, 처음에는 서양 선교사의 아무런 개입 없이 중국어로 시작된 개종 프로그램의 출발점을 이루었다. 그 결과로 국가의 박해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도 그나라에 가톨릭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1880년대에 영국과 미국의 선교회들이 그때까지 서양의 접촉을 완전히 봉쇄했던 조선에 들어간 것, 즉 조선의 ‘개항‘이 기독교화의 두 번째 물결의 시작이었다. 유럽의 문명화 사명이라는가정이 강하게 스며든 이 운동은 프로테스탄트의 급속한 확산을 낳았다. - P694
종교에 공통된 종교적 진리라는 관념에서 출발했다. 이와 같은 보편적 종교의탐색은, 그 확실한 표현을 넘어 또 그 배후에서, 19세기에 근대의 진보 담론과결합했다. 진보 담론은 인간의 종교성이 자연 세계에 대한 단순한 물활론적형태의 신앙으로부터 주술과 범신론을 거쳐 기독교의 일신론으로, 높은 단계로 부단히 진화했다는 가정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 P713
점차 강화되는 세계의 상호 연결은 지구를 더욱 동질적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경계선과 차이를 낳기도 했다. 세기 전환기의 세계화 과정은 내부적으로 국민국가와 제국, 거대 지역으로 분화한 국제 체제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 거대한 과정은 종교의 영역에서도 작동했다. 국가와 지역의 정체성 강화와 유사하게, 공간적으로 구분되고 문화에 특정한 종교적 전통을 새롭게 강조한 것은 19세기의 마지막에 진행된 세계화 과정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할 수 있다. - P720
종교 영역의 변화는 다른 무엇보다도 세계적 통합이라는 도전에 대한대응이었다. - P732
종교는 19세기의 마지막 몇십 년간진행된 세계의 지역화에서 필수적인 구성 부분이었다. 계몽운동과 종교학의확산 여파로, 여러 종교는 일부 학자가 말한 이른바 종교 시장 안에서 세계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동안 기존의 모든 구체적인 종교는 하나의공통된 원형 종교의 상이한 표현으로 여겨졌다. 20세기에 들어선 후에도 이보편주의적 접근은 한참 동안 유효했다. 그러나 19세기 막바지부터 그것은 한번 더 특정 지역과 문화를 연결한 종교 개념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다양한 종교적 ‘범‘ 운동에서 표현된, 이와 같은 종교와 지리·문화 사이의 연결의 귀환은 단순히 전근대 ‘문명‘의 전통을 상기시킨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민족주의의 흥성과 거대 지역의 재출현을 포함한, 세기말에 일어난 세계적 변화의 결과이자 산물이었다. - P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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