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지 - 2장

1990년대 초부터 여러 이름난 프로초이스 활동가들이 WLM의 정치와 명확히 선을 그었다. 이들은 여성이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 특히 잠재적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 임신중지를 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임신중지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기보다는 무아적으로 내리는 선택이며, 자기결정, 신체의 온전성, 강제된 모성 같은 개념은 임신한 여성과 태아의 관계를 왜곡한다고 지적했다. 나는 이런 프로초이스의 수사를 ‘모성적maternal’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임신중지 여성은 잠재적 아이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는 어머니로 그려진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대중문화에서 급속히 ‘이기적’이라는 전형성을 얻었다.

‘이기적인 임신중지 여성’이라는 전형은 오늘날 임신중지의 성격을 반복적으로 특징짓는 과정에서 구성되었다. 미국 사법부의 말을 인용하면, 임신중지는 "편의에 따른 자의적인 결정"이다. ‘편안한 임신중지’라는 관념에는 여성이 하찮은 이유 때문에 임신중지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모성적’ ‘프로초이스’라는 수사는 태아의 생명에 주어져야 하는 모든 형태의 ‘가치’를 인정하거나 심지어는 칭송한다. 이는 ALRA의 운동과는 다른데, 왜냐하면 WLM의 젠더정치에 직접적으로 답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모성적 프로초이스는 여성이 몸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겪은 임신 경험을 통해, 임신을 둘러싼 선택에서 태아중심의 프레임을 뒷받침한다.

모성적 프로초이스 활동가와 학자 들은 임신중지의 도덕률을 인정할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이를 철저히 태아중심적 용어로 규정한다. 캐슬린 맥도널의 다음 같은 평이 전형적인 예다. "우리 [페미니스트들은] 임신중지에 관한 도덕적 논의가 일어날 때 직무를 유기해 왔다. 그리고 생명권 이데올로기가 그 빈 공간을 채웠다." 결과적으로 임신중지의 도덕률을 태아의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프레이밍하는 일은 반임신중지 운동에 담론상 우세한 위치를 넘겨주었다.

모성적 프로초이스 정치는 페미니즘의 급진적 젠더비평과 거리를 두는 포스트페미니즘 운동이다. 이는 선택의 원칙을 내세우면서도 오직 모성만이 임신한 여성의 진정한 선택임을 재확인함으로써 예전의 흐름을 되풀이한다. 로절린드 길과 크리스티나 샤프 Christina Scharff 는 포스트페미니즘을 "페미니즘이 ‘고려되는’ 동시에 거부당하는 (···) 동시대 문화의 커다란 부분"을 특징짓는 감수성이라고 설명한다. 포스트페미니즘은 급진적 젠더정치에 대한 적대감을 수반하며 페미니즘에 대한 단순한 백래시 이상의 것이 된다.

젊은 여성의 여성성은 백인중심주의와 이성애규범으로 아로새겨지며 성적 매력을 갖추거나 남편감을 찾는 데 집중된다. 여성들이 이렇게 짜인 규범을 따르는 것은 사회적 관습이나 금지 탓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처럼 비친다.

탈산업 경제에서 여성 노동이 갖는 중요성과 일하고자 하는 여성의 욕망은 가정주부와 생계부양자라는 고도로 젠더화된 역할이 WLM 이전과 같을 수 없음을 뜻했다. 그러나 모성은 여전히 여성성의 중심에 있다. 모성적 희생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여성의 행동을 통제하며, 부모됨의 문화적 의미는 젠더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대중매체에서는 ‘고학력자이지만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는’ 어머니를 높이 산다. 그러나 이는 파트너가 이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할 능력이 되는 백인 중산층 엘리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다른 맥락에서 보자면, 여성은 양육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직업적 삶을 조정해야 한다.

부모됨의 이데올로기와 실천은 몹시 젠더화되었는데, 이 젠더화는 ‘선택’이라는 수사 뒤에 주로 숨겨져 있다. 선택은 왜 여성이 아이를 갖고 또 아이를 돌보기 위해 일하는 패턴을 바꾸는지를 묘사하는 데 가장 자주 쓰이는 설명적 도식이다.

개인의 선택이라는 수사는 일과 가족이라는 영역에서 여성과 남성을 다르게 위치 짓는 구조적 장벽과 문화적 규범을 은폐한다. 그런 장벽ㆍ규범에는 돌봄의 젠더화, 높은 양육비와 양육시설 부족, 성별 임금격차, 가정과 재생산 영역의 책임에 얽매이지 않은 ‘이상적인 노동자’ 모델 등이 포함된다.

1990년대 중반부터 페미니즘은 오로지 개인의 커리어 발전에 관한 운동으로 치부되었다. 그렇게 된 까닭은 여성이 형식적 평등과 선택의 자유를 누렸기 때문이다. 또한 페미니즘은

여성 대부분이 갖는 모성중심의 욕망과 접속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서로 얽힌 주장을 통해 ‘엄마 전쟁 mummy wars’이라는 문화적 표현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초국적인 서사로서 미디어에 통용되었다.

여성에게 선택은 모성 아니면 커리어, 두 개의 양립 불가능한 선택지가 따라오는 일로 재현되곤 한다. 각각의 선택은 여성이 무아적 감수성에 잘 들어섰는지, 아니면 여성답지 않게 자기 본위를 앞세웠는지를 나타낸다.

임신중지의 선택 가능성은 이 전반에 걸쳐, 포스트페미니즘이 모성적 정체성을 재각인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행복은 사람이나 대상에 깃든 속성이 아니다. 행복은 확실히 행복을 줄 것으로 인식되는 대상에게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이다. 행복의 대상은 개인이 그것을 행복으로 경험하기도 전에 ‘행복’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행복은 일종의 약속처럼 기능한다. ‘당신은 이걸 하거나 이걸 가지면 행복이 따라올 것이다’라는 믿음을 주며 개인을 이끈다.

행복이라는 약속은 사회규범을 사회적 선으로, 사회ㆍ문화적 규범성을 개인의 욕망으로 바꿔 놓는다. 또한 권력의 사회적ㆍ구조적ㆍ문화적 메커니즘을 개인화하고 탈정치화한다.

포스트페미니즘 담론에서 돌고 도는 ‘여성의 행복’이라는 규범은 아이를 여성, 특히 임신한 여성에게 가장 큰 행복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렇듯 임신한 여성에게 (담론적으로 각인된) 태아란 ‘일단의 약속’으로 채워진 환상의 인물이다.n63n 태아는 여성의 행복, 개별적 성공, 개인적 성취와 관련된다. 행복, 그리고 아이(와 태아)를 행복의 대상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여성을 ‘자연발달 서사’로 정렬하는 계기를 준다.

모성적 프로초이스라는 수사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행복의 대상인 자기 아이를 원하게 마련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어머니가 되려는 욕망을 ‘아이가 될 수 있는 존재’의 이익을 위해 단념해야 한다.

여성이 임신중지라는 언뜻 역설적인 선택을 통해 모성 욕망을 표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잠재적 아이를 위해 자기 행복을 유예해야 한다는 판단이 들어 있다. 이런 판단은 모성적 행복을 인종ㆍ연령ㆍ계급 등 몇 가지 축에 따라 계층화하는 데 바탕을 둔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행복을 줄 때만 진정 행복하고 선하고(무아적이고) ‘좋은’ 사람이 된다. 선한 어머니는 사회계급이나 연령 같은 표식을 통해 다른 어머니들, 즉 어머니 될 자격이 없고, 미성숙하고, 나쁘거나 이기적인 이들과 구별된다. 여성 행복의 경제에서, 태아는 여성을 모성으로 이끄는 행복의 대상이자, ‘좋은 어머니’의 산물인 행복의 주체로 나타난다.

‘선택’이라는 수사를 통해 재생산노동과 가사노동이 개별화된다. 여기서 복지 혜택의 대상이 되는 개인은 실패자로 간주된다. 복지 혜택을 받는 어머니들에게 ‘일로 복귀하라’며 강요하는 고압적 국가정책에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맥로비는 "중산층이라는 괜찮은 위치에서는 일찍 엄마가 되지 않기를 요구한다"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젊은 여성이란 무릇 "어린 나이에는 모성을 뒤로 미뤄 둠으로써, 취업으로 얻는 경제 효과와 직업 정체성을 통해 복지 위기를 해결하는 데 기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성적 행복’의 경제는 어떻게 여성이 모성 욕망 때문에 임신중지에 이르는지를 보여 준다. 여성은 아이를 원한다. 그러나 이미 낳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혹은 장차 아이의 행복을 보장하는 데 필요해 보이는 자원을 축적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임신중지를 한다.

법적 담론과 공적 담론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의회 토론이 현시대의 두 가지 최고 권력을 뒷받침하는 모종의 근거에 대해 통찰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권력은 바로 사법권과 생산력이다. 사법권은 개인에게 부과되는 외부 제약으로서, 처벌의 위협을 통해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강제한다. 생산력은 규범적인 행동양식으로서, 개인이 사회적 기대와 이런 기대를 좇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게 한다.

임신중지 결정에 가해지는 제약은 여성 개인이 아니라 의료ㆍ법 등 남성이 전통적으로 지배해 온 사회제도의 통제를 (실제로는 아니더라도 형식적으로) 받는다. 법은 잘못된 행동을 처벌하는 제도일 뿐 아니라, 사회의 규범적 도덕성을 규정하고 공식화한다. 따라서 의원들은 여성의 임신중지를 법적으로 금지해야 하는지 여부를 토론하는 대신, 임신중지가 규범적이고 이상화된 세계관에 맞아떨어지는지 아닌지, 맞아떨어진다면 또 어떻게 맞아떨어지는지에 관심을 두곤 한다.

임신중지 관련 의회 토론을 고찰할 때는, 사실상 국가가 법으로 여성의 임신중지를 통제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게 중요하다. 법은 임신중지의 빈도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오직 임신중지가 안전한지, 경제적으로 부담할 수 있는지, 이를 위해 어떤 방법을 채택할지에만 관여한다.

법안 지지자들은 이른바 ‘사회적’ 이유로 행하는 임신중지에 대해서도, 여성이 행복의 대상인 태아나 미래의 아이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다고 보기를 고수했다. 그러면서 절박한 상황이 여성을 임신중지라는 결정으로 내몬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은 ‘절박한’ ‘심적 외상을 입히는’ ‘끔찍한’ ‘비극적인’ ’불행하고 후회스러운’ ‘소름 끼치는’ ‘전혀 고려해 본 적 없고 자초하지 않은’것으로 묘사된다. 이들은 주로 여성을 임신중지로 모는 조건을 ‘결여’로 프레이밍했다.

국가가 임신한 여성에게 임신중지를 강제하는 ‘문제와 우려’ 지점을 줄이겠다는 제안은, 임신한 여성 가운데서도 배아나 태아의 어머니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 여성이 있을 여지를 두지 않는다. 이 맥락에서는 임신중지를 자유롭게 원하고 선택하기가 불가능하다. 이 점은 어느 하원의원이 임신중지를 지지하며 "임신을 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 임신중지를 선택할 사람은 없다"라고 단언한 데서도 드러난다. 임신중지는 임신을 지속하려는 선택과 동등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모든 여성에게 최후의 보루’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임신중지를 ‘끔찍한 일로 만들기’는 여전히 공고하다.

법안 지지자들은 여성 대다수에게 임신중지가 ‘지독히 어려운’ 결정이라고 주장하며, ‘고통’의 측면에서 접근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강제되었다’고 말할 근거로, 모성을 수행하기에 가장 알맞은 ‘유형’의 여성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십 대 여성이라든지, 아이를 기르는 데 국가의 보조가 필요한 여성의 임신중지는 극도로 가시화된다. 그에 반해 이성애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성인 중산층 여성의 임신중지는 비가시화된다.

임신중지의 법적 제약을 줄이는 데 지지를 표한 의원들은 여성을 자율적인 선택의 주체가 아니라, 취약하고 무력한 상황의 피해자로 재현했다. 그런 이야기는 ALRA의 활동에 내재되었던 가부장주의와 흡사해 보인다. 이들은 여성이 임신중지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고 주장하며, 임신중지 선택을 정당화한다. 이 주장은 다소 역설적인데, 그때 임신중지란 선택이라기보다 필요이기 때문이다.

‘프로초이스’ 의원들은 임신중지의 원인을 외부 상황에 돌림으로써, 임신중지 여성을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일에 일시적으로 ‘제지된’ 상태로 재현했다. 임신중지 여성은 이상적인 상태에서 빗겨나 갈피를 잃은 존재다. "여성은 자기 잘못이 아닌 일로 이탈할 때가 많다"거나 "이탈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정서는, 이미 ‘줄 세워진’ 질서(임신한 여성이 행복의 대상인 태아를 원하게 마련이라는 규범)에 임신중지 여성을 다시 들여놓는 재설정 기술이다.

반임신중지의 정치적 관점은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모성을 위해 설계되었다는 신념에 보통 들어맞는다. 여성이 이기적인 이유로 임신중지를 한다는 법안 반대자들의 주장은 이 경향에 반하며, 오히려 모든 여성이 무아적으로 모성을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여성이 임신중지를 ‘자유롭게 선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그런 함의를 뒤집었다. 여성은 임신중지 지지자, 가족 구성원, 배우자에게 임신중지를 강요당한다. 여성은 임신중지라는 ‘문화적으로 조건화된’ 선택을 한다.

임신한 여성이 곧바로 임신하지 않은 몸이 되는 것, 아이가 없는 것, 혹은 더는 아이가 없는 것이 임신중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일 수 있다는 생각은, 입 밖에 낼 수 없게 된다.

반대자들은 여성의 선택에 형식적 제약을 둠으로써 그 규범을 강화하려 하고, 지지자들은 여성이 이미 그리고 언제나 모성적 행복의 도식에 들어가 있으므로 제약이 불필요하다고 여긴다. 지지와 반대 어느 쪽이든 모성 규범을 어기고 임신중지를 하는 여성에 대한 처벌을 말한다. 지지자들에게 임신중지 여성은 항상 스스로를 벌주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반대자들에게 임신중지의 범죄화나 수술을 통한 임신중지는 임신중지가 쉽거나 편리하지 않음을 확실히 해 두는 조치다.

‘페미니스트’ 혹은 ‘이기적인 여성’과 ‘임신중지 여성’ 사이에 가로놓인 환유의 비탈은, 임신중지를 여성이 개인적 권력을 주장하고자 일으키는 행동으로 나타냈다. 법안 반대자 중 다수는 임신중지란 여성이 "그저 임신중지를 자기 권리로 생각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여성 임파워링’이라며 비웃었다.

심지어 법안 지지자들조차 여성이 모든 상황에서 임신중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 ‘극단적’인 접근이라면서, 임신중지에 대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입장은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자율성을 균형적으로 고려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온건한 접근법은 이미 빅토리아 주 의회에서 논의된 법안에 명시되어 있었다. 해당 법안은 태아의 체외 생존 가능성을 기준으로 여성의 임신중지 선택권을 제한하는 내용인데, 기준선은 임신 24주였다.

유아적인 것과 성숙한 것, 비이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이라는 이분법은 페미니즘과 가톨릭주의를 구별짓는 명칭이었다. 그에 따라 각각은 여성을 행복의 대상인 아이에게로 이끄는 감정 각본에 따라 정렬되었다. 가톨릭주의에는 이 감정 각본이 공고히 뿌리내린 반면, 페미니즘은 거기서 일탈했다. 논쟁에서 ‘페미니스트’, ‘임신중지 여성’, ‘이기적인 여성’이라는 상은 전부 정서적 소외자로서, 비이성적인 존재다. 사라 아메드의 말을 빌리자면, 비이성적인 존재라 함은 이성적인 다수에게는 감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비이성적이라고 하는 이들의 감정적 감수성이 "정서적 공동체의 경계 바깥에" 위치한다는 뜻이다.

자기 본위의 결정을 내리는 자율적이고 자기충족적인 선택의 주체란 허상이다. 그런 존재는 아이돌봄자나 청소부 등 여성화된 노동자에게 외주를 주지 않고 일가족 단위 내에서 일어나는 무급 노동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이때 무급 노동자도 대개 여성이며, 무아적이고 타인지향적이며 규범적인 여성성을 영구히 갖춘 인물로 그려진다. 자유를 개인의 선택과 같게 놓을 수 있으려면, 규범적 여성성에 기본적으로 맞지 않는 자율적 주체가 필요하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모성적 행복’의 경제란, 모성이 ‘선택’을 통해 재자연화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라는 표현으로 재현되는 기술이다. 임신중지에 대한 토론에서는 ‘선택’이 임신한 여성에게 특히 강렬한 방식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배열하고 또 해석한다. 이런 토론은 오늘날 규범적 여성성이라는 도식을 규명하고 질문하는 주요한 장이기도 하다.

모성적 프로초이스 정치는 태아를 임신중지 논쟁의 주체로 여기면서, 임신한 여성이 행복의 대상인 태아에게로 향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임신을 중지할 때가 있다면, 그건 미래의 아이를 위시한 주변의 안녕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가족적 행복’의 경제는 어떤 여성이 임신중지를 통해 역설적으로 모성 욕망을 표현한다고 볼 근거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 경제 내에서는 모성적 행복을 아이의 행복과 부합시킬 자원을 쥔 여성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 모성적 행복이 사회적 선(무아성)으로 연결되는 것은, 오로지 어머니가 아이를 행복의 주체로 만들 능력이 있다고 여겨질 때만이다. 이렇게 ‘행복한 아이’를 재현함으로써 인종ㆍ계급ㆍ연령ㆍ섹슈얼리티라는 축을 따라 ‘좋은 어머니’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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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사

3장 양한 무렵의 참위와 상수학

중국의 상수학: 그리스 피타고라스 학파의 학설과 비슷

4장 고문경학과 양웅 왕충

전한시대 경학자들은 음양가의 말을 빌려 유가의 경전을 해석했다. 『역(易)』은 본시 시초점)에 쓰인 술수(數)의 일종이었던 만큼 그런 해석을 수용하기가 더욱 쉬웠다. 소위『역위(易緯)』가 바로 그 방향으로 『역』을 해석한 것으로서, 전한시대 중엽 이후 ‘위서(書)‘가 출현했다. 이른바 "위(緯 : 씨줄)"란 "경(經:날줄)"에 대한 말이다. 위서 외에 또 ‘참서(書)‘가 있다.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는 말한다. - P75

참이란 거짓으로 비밀스런 말을 꾸며 길흉을 예언한 것들을 말한다. 위란 경의 지류(支流)로서다른 의미로까지 부연한 것이다. - P76

이 학파의 한 철학자는 10원리를 논하여 두 항목으로 대립시켜 나열했다:
유한홀수하나오른쪽남성고요(靜)직선빛선정방(正方)
무한짝수다수왼쪽여성운동(動)곡선어둠악
장방(長方)"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 P78

그리스인이든 야만인이든 수가 10에 이르면 다시하나로 돌아감은 자연에 따른 것이라는 결론은 피타고라스가 얻은 것이라고 인정해도 될 것 같다. 이 "삼각수"는 분명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데 그림으로 표시하면정수의 조화로 계속된다. 이 조화가 바로 "삼각수"이다. 같은 이치에 의해서 홀수의 조화를 계속한 것이 "정방수"이고 짝수의 조화를 계속한 것이 "장방수"이다. - P79

기와 형체와 바탕이 갖추어져 있으되 분리되지 않은 것이 바로 혼돈이다.
혼돈이란 만물이 서로 뒤섞여 있고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보아도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만져도 잡히지 않기 때문에 역(易)이라고했다. 역은 형체를 동반하지 않는다. - P81

사물은 개시, 장성, 종결의 3단계가 있다. 따라서 3획으로써 건(乾)을 구성했다. 건곤은 서로 어울려 생성한다. 사물에 음과 양이 있기 때문에 중복시켜6획으로써 괘를 만들었다.…………양은 전진하고 음은 퇴각한다. 따라서 양은 7, 음은 이 단)이다. 역이 한번 음이 되고 한번 양이 될 때 합하여 15가 되는 것이 도(道)이다. 양이 7에서 9로 변하고, 음이 8에서 6으로 변하는 것 역시 합하여 15가 된다. 이처럼 단()과 변(變)의 수는 모두 동일하다. 이로부터5음(五音) 6률(六律) 7수(宿)이 생긴다. 따라서 위대한 연역의 수 50이면 변화를 완성하고 귀신도 부린다. 일(日) 십간(十干)은 5음에, 신(辰) 12는 6률에, 성(星) 28은 7숙에 상응한다. 이 50으로부터 만물은 생긴다. 공자는 "양은 3, 음은 4가 올바른 자리이다"고 말했다. - P82

공자는 말했다 : 역은 태극에서 시작한다. 태극은 둘로 나누어지므로 천지가 생겼다. 천지에 춘하추동의 구분이 있으므로 사계절이 생겼다. 사계절은각각 음양(陰陽)과 강유(剛柔)로 나누어지므로 8괘가 생겼다. 8괘가 배열되어 천지의 도가 수립되고 천둥, 바람, 물, 불, 산, 못의 상(象)이 정해져, 각자분포되어 작용을 일으킨다(用事). - P85

8괘의 기가 종결되면 사정(四正)과 사유(四維)의 분리가 명확해져 탄생, 생장, 수렴, 저장(生長收藏)의 도는 완비되어 음양의 본체가 정해지고 신명의덕이 통하여 만물은 저마다 그 유에 따라 성취된다. 이 모두가 역에 포괄된내용이니 지극하다! 역의 덕(德 : 역량)이여! - P85

공자는 말했다 : 건곤은 음양의 주인이다. 양은 해(亥)에서 개시하여 축(표)에서 모습을 갖추며, 건(乾)이 북서쪽에 자리하니 양은 미미한 기운에도시작의 기반을 둔다(祖微據始). 음은 사(巳)에서 개시하여 미(未)에서 모습을 갖추며, 바른 자리에다 기반을 두기 때문에 곤(坤)의 자리가 남서쪽에 있을 때 음은 바른 자리가 된다. (음기는 사에서 시작하여 오에서 생기고 미에서 모습을 갖추는데, 음의 도는 비하와 순종이므로 시작점에 근거함으로써감히 양과 필적하지 않기 때문에 바른 모습을 갖춘 자리에 기반을 둔다./정현) 임금의 도는 시작을 주창하는 것이고 신하의 도는 끝맺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의 자리는 해이지만 곤의 자리는 미이다. 이렇게 음양의직분을 밝히고 군신의 지위를 정했다. - P85

도는 인에서 흥하고 예에서 확립되며 의에서 다스려지고 신에서안정되며 지에서 완성된다. 이 다섯 가지는 도덕이 나뉜 것으로서 자연과 인간의 관련성(天人之際)을 보여준다. 그것으로써 성인은 하늘의 뜻에 교통하고 인륜을 관장하고 지도(道)를 밝힌다. - P87

맹희, 초연수, 경방은 모두 이른바 음양의 재변으로써『역』을 논했다. 상세한 내용은 서로 다르기도 했겠지만 현재 책이 없으니 고증할 수 없다. 다만 그 요지는 음양가의 주장을 빌려 『역』을 해석한 것이었다. 괘기에 관한 각종 이론은 과연 『역위가 맹희와 경방의 설을 취한 것이었는지, 혹은 맹희와 경방이 『역위』의 설을 취한 것이었는지, 혹은 『역위』가 바로맹희와 경방 일파 역학자들의 저작인지는 쉽게 단정할 수 없다. (아무튼 그것은 전한 말기에 유행했던 일종의 상수학이었다./『신편』)일행의 설명을 보면 맹희도 감, 진, 이, 태가 사방과 사계를 각각주관하고 그 24효가 24절기를 각각 주관한다고 여겼다. - P93

공자는 춘추전국시대의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그저 한 시대의 위대한 스승(大師)일 뿐이었으나, 『공양춘추』에서공자의 지위는 스승에서 왕으로 나아갔고, 참위서에서 공자는 다시왕에서 신으로 나아갔다. 각 시대사상의 변천을 여기서도 엿볼 수있다. - P105

음양가의 학설에 그러한 유폐가 있기는 했으나 중국과학의 맹아는 대체로 그 안에 있었다. 음양가의 주요 동기는 하나의 완전한 체계를 수립함으로써 우주 만상을 포괄하고 또 그것을 설명하는 데에있었다. 비록 그 방법이 틀렸고 그 지식은 엉성했으나 우주간 여러사물을 체계화하여 우주간 여러 사물의 존재 이유(所以然)를 알려고 했으니 진실로 과학정신이 있었다. - P106

"고학"은 이른바 고문학파의 경학이다. 그것은 경을 해설할 때 위서나 참서 또는 기타 음양가의 말을 채용하지 않고 당시 "이상하고괴이한 주장"을 쓸어내고 공자를 "스승(師)"의 지위로 되돌렸다."
이런 경학자들은 실제 당시의 사상 혁명가였다. - P108

한대에 당시 정통 경학파 즉 이른바 금문경학파의 경전과그 해석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각기 그들이 보기에 공자의 정통이라고 생각되는 경전과 그 해석을 수립하게 되어, 이윽고 이른바 "고학"이 자연히 일어났다. 즉 한 시대의 사상계를 혁명할 대(大)운동은 결코 한 사람의 업적일 수 없었다.
"고학"이 유흠이 홀로 창안한 것은 아니나 유흠은 사실상 "고학"
을 제창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학"은 모두 민간에서 흥기했고 학관(學官)에 세워지지 못했다. - P109

『노자』와 『역』에서 말한 "사물의 발전이 극에 달하면 반전한다(物極則反 : 달이 차면 기운다)"는 이치를 서술한 것이다. 사실상 새로운 견해는 없지만, 당시 참서와 위가가 성행하던 무렵에 양웅이『노자』와『역』의 자연주의적 우주관과 인생관을 견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실로 가히 혁명적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노자』와 『역』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양웅은 『태현』을 지었다. - P112

『노자』에 대해서 양웅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노자』의 도덕(道德)에 대한 논의는 받아들이지만,* 인의(仁義)를 배격하고 예절과 학문(禮學)을 멸절하는 관점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가 외의 다른 학파를 논한 경우에 양웅은 이렇게 말했다.
장자와 양주는 제멋대로여서 법도가 없었고, 묵자와 안영은 검약을 중시했지만 예를 폐기했고, 신불해와 한비는 험악하여 교화를 무시했고, 추연은 허풍스럽고 진실이 없었다. - P120

사람의 성이란 선악이 뒤섞여 있다. 선한 부분을 연마하면 선한 사람이 되고, 악한 부분을 연마하면 악한 사람이 된다. 즉 인성에 대한 맹자와 순자의 견해를 절충한 것이다. - P123

마침내 진일보한 반작용이 일어났다. 고대 사상 가운데 가장 술수(術數)와 무관한 것이 도가(道家)여서, 후한과 삼국 교체기에 도가학설 중의 자연주의가 점차 세력을 떨쳤는데, 왕충의『논형(論衡)』은 바로 도가의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당시 일반 사람들의 미신을비판한 것이었다. 『논형』은 당시의 미신적 분위기를 완전히 타파하고 일소한 업적을 세웠다. 다만 그 내용은 공격과 파괴가 많고 (대안의) 건설이 적은 만큼 그 책의 가치는 요즘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만큼 크지는 않다. - P125

자연의 운행은 만물을 낳으려고 하지 않아도 만물이 저절로 생기니 그것이 자연(自然)이다. 기를 베풀면서 만물을 만들려고 하지 않아도 만물이 저절로 만들어지니 그것이 무위(無爲)이다. 하늘이 자연무위(自然無爲)하다고함은 무엇인가? 기(氣)를 두고 하는 말이고, 염담(恬澹)하여 욕심이 없고 무위하여 아무 일도 꾸미지 않는다는 뜻이다. - P126

사람에게 총명함과 지혜가 있는 것은 오상의 기운(五常之氣)을 함유했기때문이고, 오상의 기운이 사람에게 존재하는 까닭은 오장(五藏)이 육체 안에존재하기 때문이다. 오장이 상하지 않으면 사람의 지혜는 총명하고, 오장에병이 들면 사람은 혼미해지고 혼미해지면 흐리멍덩해진다. 사람이 죽어 오장이 썩어 오상이 의탁할 데가 없어지는 것은 지혜를 보관해줄 기관이 이미썩어 지혜를 생기게 하는 것이 이미 몸을 떠났기 때문이다. 육체는 기에 의지하여 완성되고 기는 육체에 의지하여 의식을 지니거니와, 천하에 연료 없이)홀로 타는 불꽃이 없거늘 세상에 어찌 육체 없이 홀로 존재하는 정신(精 : 정령)이 있겠는가? - P132

유자들이 말한 성왕과 성왕의 정치는 사실상 일종의 이상일 뿐이고 고대의 실제 사실은 아니다. 반드시 그들이 말한 성왕이어야 비로소 성왕이라고 할 수 있다면 "성왕은 초월적이어서 본받을 수 없고", 그들이 말한 성왕의 정치라야 비로소 성왕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면
"태평성세는 절대적이어서 계승할 수 없다." - P134

실제와 서로 부합하지 않는 감각은 "허상"일 뿐이다. 따라서 감각내용은 다시 "마음의 사고"로써 분석 고찰하여 "마음의 사고"가실제와 부합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비로소 참된 사실이다. - P136

천도(天道)에는 천성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이 있다. 천성적인 것은 본디저절로 하늘과 상응하지만, 인위적인 것은 사람이 지혜와 노력을 들일 경우천성적인 것과 차이가 없게 된다. 54)용토이 역시 인성에 대한 맹자와 순자의 견해를 절충한 것이다. - P138

사람이 화를 입고 복을 받는 것은 순전히행운을 만나느냐 불행을 만나느냐에 달려 있다. 왕충이 오로지 이점에 입각하여 입론(立論)했다면 자연주의적 우주관 및 인생관과서로 부합하고 또 사실과도 부합한다. 그러나 왕충의 입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람이 만나는 행불행은 모두 "명" 속에 이미 정해진 것이라고 여겼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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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최혜진 지음, 해란 사진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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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그림책 시장이 커졌다는 것은 나 같은 문외한의 사람도 알고 있다. 최근 들어 볼로냐상 등 해외 유명 수상작에 한국 작가들의 이름이 올라오고 있으니 말이다. 


아이였을 때는 집안에 돈이 없어서 그림책은 커녕 책 자체도 읽을 만한 환경이 되지 못했다. 성인이 되고 돈에 여유가 생긴 이후에도 그림책을 사 본 적이 없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그림책을 저평가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뜨끔했다. 성인이 되면 몸이 상하거나 마음이 다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회는 발전한다고 하는데 갈수록 몸과 마음이 고립되는 성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림책은 현실에서는 권력을 가지지 못하고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과 경쟁 사회에서 내동댕이쳐진 이들에게 작지만 힘 있는 목소리를 전달해주는 매개체다. 그렇기에 그림책에 갈수록 많은 이들이 눈길을 주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은 10인의 한국 그림책 작가들의 인터뷰가 담겨 있다. 작가가 작업한 그림책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 책을 작업할 때 가진 생각들을 담아놓았다. 인터뷰를 요청한 이가 작가들의 작품을 충분히 읽고 던지는 질문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인터뷰를 통해 내가 겪은 인생의 경험들을 떠올렸고 작가의 몇몇 말에서는 공감을 하기도 했으며 현재를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다. 


권윤덕 작가님의 책과 인터뷰를 통해서는 학창 시절 입학, 첫 수업이 떠올랐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첫 수업에 들어가던 날은 나를 늘 긴장시켰다. 겁이 많고 소심한 나는 사람이 무서웠다. 어떤 말을 건네야 하며 친구는 어떻게 사귀어야 하는건지 두렵기만 했던 때였다. 며칠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게 되면 한 두명의 친구가 생겼으나 새로운 사람과 만나게 되면 매번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발표는 왜 그리 떨리던지 그때는 한 반에 60명이 넘는 아이들이 모여 있어서 덜덜 떠는 손과 발, 온 몸에 긴장이란 긴장은 다 하던 기억이 난다. 말을 하면서 말도 빨라지던 기억. 이렇게 부딪치고 넘어지고 싸우면서 겪어낸 과정의 경험은 여전히 두렵지만 맞설 수 있는 용기를 만들어주었다. 

자기확신을 경계하신다는 말도 울림이 있었다. 나는 늘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닌가, 내가 가진 확신이 맞고 옳나를 생각한다. 경직성과 사투하며 유연성을 키워야 한다고 늘 주문을 외운다. 작업을 위해서 극우 유튜브까지 보셨다는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피해자가 될 수 있음에도 우리는 내가 가해자라는 생각을 못하지 않나. 상대가 어떤 마음에서 그러는 것인지 알려면 들여다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유설화 작가님의 책과 인터뷰에서는 속내를 들킨 사람 같이 느껴졌다. 나는 외부의 시선과 반응에 무척 신경을 쓰는 사람이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 속상하고 괴로움을 느낄 때가 많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하는 작업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닐텐데 나는 자꾸 타인과의 비교, 외부의 잣대를 들이대며 스스로를 가두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기대감은 실망감으로 채워지기 쉽상이다. 몇 년전 함께하는 동아리 사람들과 놀러간 적이 있다. 역사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아는 선생님께서 해설을 권유하셨다. 잘해내고 싶었지만 나의 얕은 지식과 그것을 말로 풀어내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것을 배웠다. 선생님과 동아리 사람들은 잘했다고 이야기해주었지만 나는 그때만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은 소중하다. 준비하는 과정도 제법 길었고 그 과정에서 공부하는 시간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내가 최선을 다했는가 묻고 설사 그것이 실패한 결과라 하더라도 나의 한계였어를 받아들이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 하는 주문이다. 


유준재 작가님을 통해서는 기다림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깨우칠 수 있었다. 두려움과 설렘이라는 단어가 같은 단어라고 하는 말에는 '그렇구나' 싶었다. 작가님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메모하면서 순간을 기록한다고 한다. 그런 수많은 작업의 결과물들 중 쓰여지는 것은 1할이어서 아깝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으시단다. 오감을 열고 주변을 탐색하며 아이디어를 얻고 결과물을 만들어내기까지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결론을 얻기까지 탐색 과정이 필수인데도 나는 그 확장의 과정을 쉽게 닫고 수렴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곱씹게 되었다. 기다리면서 혼란의 과정을 겪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적당히 마무리하고 넘어가면 혼란스러움을 덜 겪어도 되니까 스스로 문을 닫아버리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누구나 멈칫하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그 순간은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것일 수 있지만 이를 통해서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노인경 작가님을 통해서는 매일을 기적이라 생각하고 작고 사소한 것에 감탄한다는 자세를 배웠다. 결혼을 하고 인간 관계가 확 줄고 나서는 삶의 패턴이 정형화되어버렸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집-회사를 말고는 딱히 주기적으로 들르는 장소란 산책 코스, 가끔 들리는 도서관 정도가 아닐까. 작가는 매일 보는 가족의 얼굴과 일상의 풍경을 그리며 보통 일주일에 한 권의 노트를 채운다고 한다. 매일 보는 것들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기록들이 나올까 생각했다. 반복되는 하루를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생각해보니 일기도 비슷한 내용이어도 조금씩 다르다. 풍경도, 감정도 조금씩 다르다. '어차피 똑같은데 넘어가지 뭐'하면 결국 시작조차 하지 않고 시간만 보내게 되지 않을까 마음을 바꾸고 무엇이든 시작하는 것만으로 어떤 결과물이든 나올 것이다. 거창한 것을 계획하기 보다는 소소한 결과물을 생각하고 시작해보는 것도 좋겠다. 그런 것들이 모이고 쌓이면 근사한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겠지.


이 밖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이렇게 알찬 인터뷰라니~ 책을 통해서 보고 싶은 그림책들도 여럿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한 두권씩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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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08-19 10: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읽으셨군요~! 리뷰 잘 읽었어요. 화가님 개인 경험담과 함께 버무려주시니 더 와닿네요^^ 앞으로 그림책에 더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그림책 업계 관련자 아닙니다 ㅎㅎ

거리의화가 2022-08-19 12:18   좋아요 3 | URL
도서관 대출도서라 반납기일이 다가오길래 열심히 읽고 마쳤습니다.
에세이를 읽으면 특히나 작가의 생각에서 공감을 발견하거나 내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개인적인 경험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 같아요.
ㅎㅎㅎ 그림책 앞으로 일반책 읽을 때 한두권씩 같이 포함시켜서 읽어도 좋겠다 싶더군요.

청아 2022-08-19 11: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각 작가님들 글에 관한 감상이 조곤조곤하고 감성을 자극하는데가 있네요~♡ 여기저기 제 이야기도 여럿 있어서 공감됩니다.ㅎㅎ 저도 이 책 찜해두었는데 먼저나온 유럽편도 인기였나봐요. 읽고나면 그림책이 더 좋아지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8-19 12:20   좋아요 2 | URL
미미님~ 감성을 자극했다니 뭔가 뭉클합니다. 10명의 작가를 통해서 한 두작가는 본인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생각하는 지점이 있을 것 같아요. 저도 그랬구요^^ 말씀하신 것처럼 유럽편도 있더군요. 저도 기회가 된다면 그 책도 읽어보고 싶네요. 이 책 읽고 나면 10명의 작가 이름과 더불어 그림책들에 관심을 갖게 되실거에요!^^*

책읽는나무 2022-08-19 19: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괭님 리뷰 읽고 찜해 뒀었는데 화가님마저!!!!^^
우리 어린 시절에도 이렇게 멋진 그림책들이 많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도서관도 많고, 그림책 작가님들 얘기도 듣고....요즘 아이들은 그런 점에선 무척 부럽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8-20 09:49   좋아요 2 | URL
좋은 그림책들이 이리 많았구나 싶어서 놀랐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볼 것도 즐길 것도 많아져서 좋겠지만 스마트폰이나 볼 거리가 많아져서 책에 관심이 덜 가는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되기도 하네요. 그건 어른도 마찬가지지만요~ㅎㅎㅎ
어릴 적 볼 책들이 많았다고 하더라도 여유가 없었어서 접할 기회는 없었을 것 같아요. 사람이 여유가 생겨야 눈에 들어오는 게 있더군요. 나무님이 이 책 읽으시면 저보다 더 잘 읽어내실 게 분명합니다*^^*

희선 2022-08-20 0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림책은 어린이뿐 아니라 모두가 보는 거죠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그림보다 글을 더 보는군요 어릴 때는 책을 거의 안 보고 모르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림책이 많이 나오고 한국 사람이 상도 받아서 좋네요 같은 날이어도 거기에서 다른 걸 보는 거, 참 좋을 텐데 그것도 쉽지 않군요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이라도 그러면 좋을 것 같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2-08-20 09:51   좋아요 1 | URL
저는 그림책에 관심 자체가 아예 없었는데요. 이 책 보면서 그림책에서 충분히 위로와 감동을 얻을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일반책과 전혀 다르지 않았어요. 한국의 그림책 시장이 많이 성장해서 이제는 볼 책들이 참 많아진 것 같아요. 희선님도 그림책을 통해서 힐링하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mini74 2022-08-20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린시절엔 그림책 대신 커서 학교 도서관의 동화책으로 시작한 거 같아요. 전래동화 등도 다 글책으로.ㅎㅎ 그래서 아이 어릴적에 그림책 욕심을 잔뜩 부렸죠 주로 제가 읽으면서 ㅎㅎㅎ글이 없는 그림책을 보며 웃고 우는 법을 그때 배운거 같아요.

거리의화가 2022-08-20 10:30   좋아요 1 | URL
그림책을 도서관에서 종종 봐야겠다 싶더라구요. 경쟁률이 치열할지는 모르겠으나~ㅎㅎ 보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으니 있는 것부터 집어서 보는 것도 좋겠죠. 그림책을 보며 울고 우는 법을 배웠다는 말씀이 와닿네요. 저 책 속에 몇몇 그림들은 제 감정을 끌어당기게 만드는 것들이 많았어요.
 

중국철학사 - 동중서와 금문경학

동중서의 성: 공자, 맹자, 순자의 설의 융합
춘추는 공자가 하늘의 이름으로 지은 것이므로 그 뜻은 넓은 범위를 포괄. 춘추에서 추구한 학문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밝힌 것이지만 불가사의함을 구현한 것

중세와 근대의 철학은 대체로 각 시기의 경학 또는 불학에서 찾아야 한다. 중세와 근대는 각 시기마다 경학이 달랐던 만큼 상이한철학이 생겼는데, 각 시기의 철학이 달랐기 때문에 상이한 경학이생겼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경학과 불학 내의 각 종파는 대체로 각기 그 전성기가 있었다. 고대 자학시대의 사상은 횡적인 발전이 더두드러졌다면, 중세와 근대 경학시대의 사상은 종적인 발전이 더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 P6

서양의 학설이 처음 동쪽으로 전래되었을 때 중국인들 예컨대 강유위 무리는 여전히 그것을 경학에부회하여 낡은 병에 극히 그 새로운 술을 담으려고 했으나, 낡은 병은 용량을 늘리는 일이 이미 한계에 달한 데다가 또 새 술이 아주많고 극히 새로웠기 때문에 결국 터졌던 것이다. 경학의 낡은 병이터지자 철학사의 경학시대도 끝이 났다. - P7

전한(西漢:前漢)의 경사(經師)들은 모두 음양가의 언설을채용하여 경전을 해설했다. 금문학파의 경학이 바로 그런 특색을지녔다. 당시 일반 사람들의 사상은 음양가의 분위기로 가득 차있었다. 천도와 인간사는 상호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전한시대 사람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한유(漢儒)들은 늘 재이(災異)를논했고, 임금도 재난(災)을 만나면 늘 두려워했다. - P10

음양가는 오행(五行), 사방(四方), 사계(四時), 오음(五音), 십이월(十二月), 십이율(十二律), 천간(天干), 지지(地支)"와수 등을 서로 배합하여 하나의 우주 구조를 수립했고, 음양이 또 이것들 사이에 유행하여 그 구조를 운동, 변화시켜 만물을 낳는다고여겼다. 이러한 배합은 고대의 술수 속에 이미 존재했었다. - P11

동중서가 말한 하늘은 때로는 물질지천(物質之天) 즉 땅과 상대적인 하늘을 지칭하고, 때로는 ‘지력과 의지가 있는 자연‘을 지칭한다. ‘지력과 의지가 있는 자연‘이라는 명사 자체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중서가 말한 하늘은 실제로 지력과 의지를 지니지만 인격이 있는 하느님은 아니기 때문에 자연이라고 일컬었다. - P16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음양의 기(공기)가 항상 사람을 적시고 있는것은 물이 항상 고기를 적시고 있는 경우와 같다. 다만 기가 물과 다른 점은물은 눈에 보이지만 기는 눈에 보이지 않고 고요하다는 점이다. - P17

○ 천지의 기운은 합하여 한몸이지만, 음양으로 나뉘고 사계절로 갈리고 오행으로 배열된다. 행(行)이란 운행한다(行)는 의미이다. 저마다의 운행이 같지 않으므로 오행(五行)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오행이란 다섯 가지 기능(官)의 뜻이고, 인접한 두 행은 상생관계(相生)이고, 하나 건너 두 행은 상극관계(間相勝)이다. - P19

목-화-금-수는 사계(四時: 四季)의 기운을 각각 주재하고 흙은중앙에서 그것들을 보좌한다. 사계의 기운이 교대로 성하고 쇠하기때문에 사계의 순환과 변화가 생긴다. 사계의 기운이 교대로 성쇠하는 까닭은 음양이 그렇게 시키기 때문이다. - P20

천지의 상징과 음양의 대응물이 항상 우리 몸에 갖추어져 있다. 몸이 하늘과 같고 또 수(數)가 서로비견되기 때문에 명(命) 역시 서로 연계된다. - P28

심리 방면을 보면, 사람의 심리에는 성(性)·정(情) 두 가지가 있는데 이는 하늘의 음(陰)·양(陽)에 상당한다. - P30

동중서의 성설(性說)은 한편으로 맹자와 순자를 조화시킨 것이었지만, 한편으로 동중서 역시 사람의 바탕에는 본디 선단(善端:선의실마리)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의 설은 사실상 맹자의 성선설과 어긋나지 않는다. 다만 동중서는 성 속에 겨우 선단만 있는 까닭에 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여겼다. - P32

사람의 바탕 속의 선단을 발전시켜 완전한 선이 되게 하려면 여러덕목을 실행해야 한다. 그중에서 개인 윤리에 관한 덕목은 인(仁: 사랑)·의(義: 의로움)가 가장 중요하다. - P35

하늘은 사람을 사랑하고 이롭게 하는 일을 의도하므로 왕자는 그것을 본받아 역시 사람을 사랑하고 이롭게 하는 일을 의도한다. 이 점은 묵자의 학설과 동일한 면이 있다.
동중서의 사회철학은 빈부를 균등히 하여 "(토지)겸병의 통로를봉쇄할 것"을 강조했다. - P48

인간의행위가 합당하지 않고 이상하면 하늘도 비상한 현상을 나타낸다. 하늘이 나타낸 그 비상한 현상이 이른바 재이(災異)이다. - P50

"천인합일"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는 하나의 "신의 희극"이다. 이 설은 우리에게는 명확히 거짓(不眞)으로 보이지만, 요컨대 철학사상 하나의 체계적인 역사철학임에는 틀림없다. - P62

『춘추』는 동중서가 말한 "천리"를 서술한 것으로 이른바 "하늘의 미묘함을 구현한 것"이다. 그 대의로는 "십지(十指)", "오시(五始)", "삼세(三世)" 등이 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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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중지를 둘러싸고 이리도 많은 history가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다. 


이 책이 낯선 이유는 임신을 해본 적이 없고 임신중지를 깊이 고려해본 적이 없는 나의 위치가 큰 자리를 차지한다.


아직 1장이지만 호주, 미국, 영국 등 임신중지를 둘러싼 1970~80년대의 배경이 나오다보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단체 이름들도 처음 안 경우도 있었다.


낯선 용어들과 이야기 때문인지 문체 자체도 잘 읽히지는 않는 느낌이다.


아주 집중하여 읽으니 그나마 읽혔는데 정리는 안 되는 것 같다.


이 문장만 기억하고 간다.

'선택'이 감정이라는 기제로 작동하여 임신중지를 단속한다는 것.

감정은 임신중지를 단속한다. ‘임신중지 금지’를 대놓고 말하지 않되, 임신중지의 경험과 그 결과라는 각본에 따라 공유된 의미에 반反임신중지 정서를 심는다. 이를테면 ‘여성이 임신중지 뒤에 깊은 슬픔과 수치심을 느꼈다’는 말을 계속 듣다 보면, 임신중지는 본래 애통함과 수치를 야기하는 절차로서 자리매김한다. 이는 여성이 간절히 원한다면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는 생각과 분명 양립하지만, 한편으로 임신중지를 하면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경고가 되기도 한다.

임신한 여성이 모성에 관해 결정할 때 행사하는 자유에는 ‘선택’이라는 수사가 붙는다. 이 표면적 자유는 임신중지에 대한 확고부동한 감정 각본을 은폐한다. 임신한 여성이 겪는 감정세계에 엄격하게 선이 그어지는 것이다.

진정한 선택이 가능하려면 임신중지를 합당한 선택으로 인정하고, 임신한 여성이 더 이상 임신상태를 지속하고 싶지 않을 때 일상에서 문제없이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임신중지가 통계상 평범한 일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규범적인 일과는 거리가 멀다.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된 나라에서조차 이는 여성이 예외적인 상황에서 몹시 고통받고 성찰한 끝에 하는 선택으로 설명된다.

임신중지는 필요한 것으로 여겨질 때조차 피해야 할 것, 여성에게 불가피한 고통을 안기는 것으로 지목되기 일쑤다. 임신중지가 끔찍한 일로 낙인찍힐 때, 모성은 임신에서 문제없이 도출되는 유일한 산물로 그려지며, 다시금 임신중지는 비정상적이고 여성에게 해로운 선택이 되고 만다. 이와 관련한 감정의 목록이 있다.

‘서양’이나 ‘서방 영어권’은 지리적 구분에 따른 개념이 아니라 꾸준히 반복ㆍ재생산된 이데올로기적 개념이다.‘선택’이라는 말은, 특히 여성과 관계해 쓰일 때는 ‘서양’을 ‘나머지’와 구별된 더 우월한 개념으로 구성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여성들이 임신중지를 똑같이 경험하리라는 가정은 ‘여성’을 자연적이고 몰역사적인 주체로 구성하는 한 방편이다.

페미니즘의 접근대로라면 여성이란 생물학적으로나 신경화학적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여성을 묘사하는 행위 안에서 구성된다.

오늘날 임신중지와 임신을 묘사할 때 일반적으로 배아를 태아 혹은 생존 가능한 태아, 출생 전후의 태아, 심지어 아기와 한데 묶는다. 배아는 임신 8주차에 들어서야 태아가 되는데도 말이다.

젠더화된 여성다움부터 임신과 출산에 이르는 자연발달의 서사는, 우리의 몸ㆍ정체성과 관련된 몇 안 되는 어휘 중 하나를 만들어 냈다. 이 서사는 아이가 여성이라는 성별을 갖춘 순간부터 그 아이를 이성애적 각본에 넣고, 재생산하는 존재로 발돋움하게 하며, 여성으로서 달성해야 할 규범인 도구적 공감과 봉사라는 추상적 가치를 수행하는 쪽으로 옮겨 놓으면서 여성성을 몸의 자연적인 서사 과정이라는 틀에 짜 맞춘다.

배아와 태아의 정의에는 언제나 임신한 여성이 고려돼 있다. 여성은 스스로 존재하는 몸(자율적인 주체)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태아적 모성이라는

도식에서처럼 (자율성이 제한되거나 아예 없이)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몸이 되기도 한다. 임신중지 정치에서 젠더, 특히 모성은 중심적인 위치를 단단히 차지한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재생산과 결합하고, 모성은 여성의 기준점이 되며, 임신은 어머니가 독립적 개체로서의 아이와 맺는 관계라는 것이다. 뒤에서 더 이야기하겠지만, 중요한 건 태아적 모성이 인종ㆍ계급 등을 축으로 해 여성을 ‘착하고 책임감 있는 어머니’와 ‘나쁘고 무책임한 어머니’로 구별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임신중지 여성은 자신이 배태한 배아나 태아의 어머니가 되지 않기를 선택하며, 임신에 대해 주체로서 자기 위치를 주장한다. 따라서 임신중지라는 선택은 태아적 모성이라는 규범과 그에 따른 숱한 문화적 산물에 균열을 내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중지가 그토록 논쟁적인 사회문제가 된 것이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의 모습에는 주체인 여성, 그리고 여성의 몸과 분리되지 않은, 몸의 일부인 태아가 상호 의존적으로 맺는 관계가 틀 짜여 있다. 이는 임신한 몸을 ‘하나도 둘도 아닌’ 것으로 보는 페미니즘적 묘사에 부합한다. 임신한 몸은 경계가 분명하고 자율적인 자아를 전제하는 서방의 존재론에 정면으로 맞선다. 따라서 임신한 여성의 몸을 하나로 보든 둘로 보든 모두 잘못 표현한 셈이다. 이 몸은 하나도 둘도 아니다.

여성이 경제ㆍ사회적 조건상 양육을 할 수 있을 때라야 임신중지 역시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임신중지의 권리와 더불어 유급 양육 휴가나 국가 양육 보조금 등의 조치를 얻기 위한 싸움이 함께 가야 한다.

태아적 모성을 둘러싼 제도는, 여성이 임신에 대해 내리는 선택을 노골적으로 금지하는 방식으로써가 아니라 그 선택에 주어진 의미를 통해 여성들에게 정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선택이라는 담론은 현시대에 임신중지를 규제하는 핵심이 되었다. 선택이 가져오는 자유라는 환영이 없다면 감정의 규범적 효과 역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주체란 자기 삶을 이미 한 선택과 앞으로 할 선택의 연속으로 바라보고, 그 선택에 따른 사회ㆍ경제적 결과를 개인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책임이라는 틀 안에서 "이른바 ‘잘못 관리된 삶’은 사회ㆍ경제적 힘을 탈정치화하는 새로운 양태가 되었다."

여성은 어떤 선택의 금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선택을 통해 규제되며, 이 때문에 권력과 불평등이 작동하는 바는 잘 보이지 않고 분석되기 어렵다.

선택은 구조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선택은 현대사회에서 주체가 스스로를 마치 자유로운 양 여기도록 길러 내는 규제술이기도 하다. ‘선택’의 규제 효과는 지난 40여 년에 걸쳐 우세해진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합리성과 연관지어 보아야 한다.

임신중지에 대해 가장 자주 회자되는 말은 이 주제가 본질적으로 감정적인 경험이며 정치적 의제라는 것이다. 임신중지가 ‘감정’의 문제임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감정’의 범주는 사실 너무 넓기 때문에 구체적인 의미를 띨 수 없고, 몹시 다양하며 본질적으로 다른 느낌들을 포함한다. 따라서 감정과 그 효과를 연구할 때는 임신중지 담론에서 언급된 바 있고 끌어낼 수 있는 구체적인 감정을 밝혀야 한다. 임신중지가 본질적으로 감정적인 경험이라고 하면서 감정을 단지 개인적인 느낌으로만 해석하면, 임신중지 정치가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비판의 목소리로 잘 들리지 않는다. 결국 임신중지는 여성성 규범에 대한 투쟁 같은 정치적 영역에서 감정이라는 사적 영역으로 이동하고 마는 것이다.

감정은 주체의 속 깊은 데서 나오는 무언가로 보이고,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로부터 영향받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중지 전후로 한 가지 특정한 감정을 경험하는 여성의 묘사가, 임신중지의 ‘진실’과 임신중지를 겪은 여성의 성격ㆍ욕망을 특히 더 효과적이고 강력하게 전달해 준다고 믿는다. 임신중지를 겪은 여성의 감정생활에 대해, "모든 여성이 후회하는 면이 있다, 어떤 여성에게나 임신중지는 비극이다" 같은 단언으로 일반화하는 경향은 지극히 만연하다. 이럴 때 등장하는 감정이란 임신중지 여성을 전前 문화의 일원으로 묶어 놓는다. 여성이라면 다 똑같이 임신중지를 경험하리라고 보는 것은 ‘여성’ 주체와 임신중지를 자연화ㆍ탈정치화하는 설명을 뒷받침하고 강화한다.

역사상ㆍ맥락상 구체화된 ‘감정 규칙‘이 임신중지의 경험을 좌우한다. 어떤 감정은 옹호되거나 심지어 강요되고, 어떤 감정은 단념되거나 부정당한다. 감정은 개인과 사회규범 사이에 존재하는 회로, 즉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이 살아가는 공동체와 소통하게 해 주는 회로라 할 수 있다.

개인은 감정을 통해 다른 개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거나 그들과 멀어진다. 타자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과정에서 규범적 신체와 공동체가 형성된다. 감정을 구체화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감정들에 이름 붙이는 과정에는, 그 감정들로 구성되는 대상을 향한 여러 방향성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감정은 임신중지에 관한 공적인 발화 안에서 순환하며, 임신중지 여성이라는 표상을 아주 구체적인 방식으로 만들어 낸다. 여성이 임신중지에 접근하는 맥락은 다양할지언정, 임신에 관한 선택과 특정 선택을 하는 여성에게 더해지는 의미는 심하게 한정되어 있다.

감정경제는 개인의 주체성과 사회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순환의 효과다. 감정은 ‘행위’하며, 감정의 행위는 항상 사회규범과 관련이 있고, 개인 또한 여기서 소외되거나 여기 도달하거나 제지당하면서 관계를 맺는다.

임신중지는 이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재현된다. 이 말인즉슨 여성이 어떻게 이 절차를 경험할지, 또 경험해야 하는지를 예측하는 내용으로 임신중지가 재현된다는 것이다. 임신중지는 끊임없이 수치와 연결되지만, 수치(실패한 여성성의 기호)에 불을 댕긴 규범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이를 역사화하고 탈자연화할 수 있다. ‘임신중지 수치’는 여성이란 정숙하게 지내다가 결혼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하던 시절의 규범적 궤도에서 나왔다. 오늘날 이 수치라는 감정은, 여성이 부지런히 효과적으로 피임을 해서 자신의 생식력을 미리 조절할 것이며, 그러니 일단 임신한 태아는 모두 낳을 것이라는 기대로부터 촉발된다. 따라서 여성이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원치 않은 임신을 겪은 여성은 이미 무책임한 ‘실패자’라거나 의도치 않은 임신을 한 ‘패배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여성의 선택이라는 수사와 그것이 함의한 자유에 대한 주장 뒤에는, 모든 여성 특히 임신한 여성에게 모성을 정규화하며 태아를 자율적인 주체(임신한 여성의 아기이자 국가의 미래 시민)로 상상케 하는 프레임이 작동한다. 그리고 이 프레임 안에서, 임신과 태아의 가치는 인종이나 계급처럼 정체성을 만드는 축에 따라 달리 매겨진다.

어떤 여성은 임신하고 싶지 않았으나 임신을 한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을 주체로서 인지하려면, 오늘날 임신중지를 이해하는 통로가 돼 온 감정들을 끊어 내야 한다.

세 캠페인이란 ALR AAbortion Law Reform Association(임신중지법개혁연합), WLM, RTL Right to Life(생명인권그룹)로 각각 그 문제를 임신중지에 대해 시민적 자유, 젠더정치, 태아의 권리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ALRA는 급진적이고 여성중심적이던 기존의 접근을 꺾고, 불법 임신중지가 공중보건에 미치는 해로운 영향, 안전한 임신중지에서 의사가 수행하는 역할의 중요성, 안전한 의료 환경에서 실시되는 임신중지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급과 그렇지 않은 계급 간의 불평등을 부각했다. 임신중지를 의료 문제로 바라보는 관점은 영국의료연합 British Medical Associationn에서 공식적으로 법 개혁을 지지하며 한층 강화되었다. 그 바탕에는 의사가 의료 절차와 결정을 판단하는 데 법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있었다. 임신중지에 대한 공중보건적 접근에 따라 의사들이 심신의 건강을 근거로 임신중지를 실시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ALRA가 구사한 정치는 당시로서 일면 무척이나 진보적이었다. 법적 규제 없는 임신중지라는 요구는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목표였다. 독신 여성이 임신중지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특정한 판단을 배제한 이런 주장은 여성의 정숙함에 관한 당시 이데올로기를 깨뜨리는 도덕률을 표방했다. 하지만 ALRA는 임신중지를 당대에 지배적이던 사회ㆍ정치적 가치들에 통합하는 방식으로 임신중지의 비범죄화를 주장했다. 당대의 가치를 따르자면 임신중지는 부정적인 조치였으며 임신에서 비롯하는 결과 가운데 문제없는 것은 모성이 유일했다. 임신중지는 일탈적인 선택, 그러니까 다른 피임법이 실패했을 때만 요구되는, 필요하긴 하나 바람직하지 않은 절차로 여겨졌다. 임신중지 여성은 자율적인 선택의 주체라기보다 상황의 피해자로 묘사되곤 했다.

남성중심적 재현 체계는 여성을 어머니로 정의하고, 임신중지를 타인에게 숨겨야 하는 수치스럽고 죄스러운 비밀로 여기도록 했다. WAAC는 임신중지를 둘러싼 도덕이 태아의 생명과 피임 실패라는 관점에 치중해 있다고 보며, 이 도덕을 "우리 여성을 패는 몽둥이"라 일컬으면서 임신중지 이슈를 ‘여성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힘에 관한 것’으로 재구성했다.

세계 각지의 여성해방론자들은 운동에서 임신중지에 관한 선택이 재생산에 관한 선택과 손쉽게 결부된다는 비판에 대응하고자, 임신중지권과 더불어 ‘강제 불임수술 반대’를 요구했다. 이 요구를 할 때 여성해방론자들은 선주민 여성과 유색인 여성이 제공한 초기의 교차적 접근 대신에, 가부장제로부터 여성의 해방을 나타내던 ‘자율적 선택’과 ‘자기결정권’이라는 언어를 사용했다. 1970년대 이래, 백인 중산층 이성애규범 바깥에 있던 여성들의 요구는 포괄적인 재생산 정의라는 프레임이 한층 성장했음을 입증해 왔다. 그 목표는 여성이 아이를 언제 낳을지, 혹은 낳을지 말지를 결정할 능력과 함께 아이를 가질 능력을 보장받는 것이다.

태아를 묘사할 때는 임신한 여성에 대한 재현이 늘 따라붙는다. 태아가 자율적 주체인 아기로서 상상될 때, 임신한 여성은 이미 어머니로 전제된다. 활동가들이 태아의 생명은 임신한 여성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여성은 타인의 생명을 실은 장치가 되고 만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에 RTL의 정치는 극도로 태아중심적이었으며, "생명을 선택하라"라든지 "모든 임신중지는 아기를 죽인다" 같은 슬로건을 이용했다. RTL은 임신중지를 살인으로 규정하면서, 정부에 인간 생명 보호의 범위를 태아까지로 확장하라는 청원을 했다.

선택이라는 개념은 지극히 특정하고도 다양한 정치적 열망을 담을 수 있고, 선택은 개인의 역량이 되어 구체적이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그 선택의 주체를 구성해 낼 수 있다.

임신중지에 대한 공적 담론에서 페미니스트의 목소리가 실질적으로 부재했다는 사실은, 1980년대 중반 미국의 상황을 바라보며 로절린드 페체스키가 말했듯 "페미니스트들이 전투에서 이겼으나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록 임신중지는 합법적으로 접근 가능했으나, 임신중지를 프레이밍하는 방식은 설레스트 콘딧의 말을 빌리면 "‘사회적으로 선한 용서’를 내리는 문제이지 여성의 바람과 욕망에 따른 결과"는 아니었고, 임신중지 활동가와 임신중지를 겪은 여성을 수세에 몰아 각각에게 그들의 결정을 설명하고 정당화하기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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