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지를 둘러싸고 이리도 많은 history가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다. 


이 책이 낯선 이유는 임신을 해본 적이 없고 임신중지를 깊이 고려해본 적이 없는 나의 위치가 큰 자리를 차지한다.


아직 1장이지만 호주, 미국, 영국 등 임신중지를 둘러싼 1970~80년대의 배경이 나오다보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단체 이름들도 처음 안 경우도 있었다.


낯선 용어들과 이야기 때문인지 문체 자체도 잘 읽히지는 않는 느낌이다.


아주 집중하여 읽으니 그나마 읽혔는데 정리는 안 되는 것 같다.


이 문장만 기억하고 간다.

'선택'이 감정이라는 기제로 작동하여 임신중지를 단속한다는 것.

감정은 임신중지를 단속한다. ‘임신중지 금지’를 대놓고 말하지 않되, 임신중지의 경험과 그 결과라는 각본에 따라 공유된 의미에 반反임신중지 정서를 심는다. 이를테면 ‘여성이 임신중지 뒤에 깊은 슬픔과 수치심을 느꼈다’는 말을 계속 듣다 보면, 임신중지는 본래 애통함과 수치를 야기하는 절차로서 자리매김한다. 이는 여성이 간절히 원한다면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는 생각과 분명 양립하지만, 한편으로 임신중지를 하면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경고가 되기도 한다.

임신한 여성이 모성에 관해 결정할 때 행사하는 자유에는 ‘선택’이라는 수사가 붙는다. 이 표면적 자유는 임신중지에 대한 확고부동한 감정 각본을 은폐한다. 임신한 여성이 겪는 감정세계에 엄격하게 선이 그어지는 것이다.

진정한 선택이 가능하려면 임신중지를 합당한 선택으로 인정하고, 임신한 여성이 더 이상 임신상태를 지속하고 싶지 않을 때 일상에서 문제없이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임신중지가 통계상 평범한 일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규범적인 일과는 거리가 멀다.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된 나라에서조차 이는 여성이 예외적인 상황에서 몹시 고통받고 성찰한 끝에 하는 선택으로 설명된다.

임신중지는 필요한 것으로 여겨질 때조차 피해야 할 것, 여성에게 불가피한 고통을 안기는 것으로 지목되기 일쑤다. 임신중지가 끔찍한 일로 낙인찍힐 때, 모성은 임신에서 문제없이 도출되는 유일한 산물로 그려지며, 다시금 임신중지는 비정상적이고 여성에게 해로운 선택이 되고 만다. 이와 관련한 감정의 목록이 있다.

‘서양’이나 ‘서방 영어권’은 지리적 구분에 따른 개념이 아니라 꾸준히 반복ㆍ재생산된 이데올로기적 개념이다.‘선택’이라는 말은, 특히 여성과 관계해 쓰일 때는 ‘서양’을 ‘나머지’와 구별된 더 우월한 개념으로 구성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여성들이 임신중지를 똑같이 경험하리라는 가정은 ‘여성’을 자연적이고 몰역사적인 주체로 구성하는 한 방편이다.

페미니즘의 접근대로라면 여성이란 생물학적으로나 신경화학적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여성을 묘사하는 행위 안에서 구성된다.

오늘날 임신중지와 임신을 묘사할 때 일반적으로 배아를 태아 혹은 생존 가능한 태아, 출생 전후의 태아, 심지어 아기와 한데 묶는다. 배아는 임신 8주차에 들어서야 태아가 되는데도 말이다.

젠더화된 여성다움부터 임신과 출산에 이르는 자연발달의 서사는, 우리의 몸ㆍ정체성과 관련된 몇 안 되는 어휘 중 하나를 만들어 냈다. 이 서사는 아이가 여성이라는 성별을 갖춘 순간부터 그 아이를 이성애적 각본에 넣고, 재생산하는 존재로 발돋움하게 하며, 여성으로서 달성해야 할 규범인 도구적 공감과 봉사라는 추상적 가치를 수행하는 쪽으로 옮겨 놓으면서 여성성을 몸의 자연적인 서사 과정이라는 틀에 짜 맞춘다.

배아와 태아의 정의에는 언제나 임신한 여성이 고려돼 있다. 여성은 스스로 존재하는 몸(자율적인 주체)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태아적 모성이라는

도식에서처럼 (자율성이 제한되거나 아예 없이)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몸이 되기도 한다. 임신중지 정치에서 젠더, 특히 모성은 중심적인 위치를 단단히 차지한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재생산과 결합하고, 모성은 여성의 기준점이 되며, 임신은 어머니가 독립적 개체로서의 아이와 맺는 관계라는 것이다. 뒤에서 더 이야기하겠지만, 중요한 건 태아적 모성이 인종ㆍ계급 등을 축으로 해 여성을 ‘착하고 책임감 있는 어머니’와 ‘나쁘고 무책임한 어머니’로 구별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임신중지 여성은 자신이 배태한 배아나 태아의 어머니가 되지 않기를 선택하며, 임신에 대해 주체로서 자기 위치를 주장한다. 따라서 임신중지라는 선택은 태아적 모성이라는 규범과 그에 따른 숱한 문화적 산물에 균열을 내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중지가 그토록 논쟁적인 사회문제가 된 것이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의 모습에는 주체인 여성, 그리고 여성의 몸과 분리되지 않은, 몸의 일부인 태아가 상호 의존적으로 맺는 관계가 틀 짜여 있다. 이는 임신한 몸을 ‘하나도 둘도 아닌’ 것으로 보는 페미니즘적 묘사에 부합한다. 임신한 몸은 경계가 분명하고 자율적인 자아를 전제하는 서방의 존재론에 정면으로 맞선다. 따라서 임신한 여성의 몸을 하나로 보든 둘로 보든 모두 잘못 표현한 셈이다. 이 몸은 하나도 둘도 아니다.

여성이 경제ㆍ사회적 조건상 양육을 할 수 있을 때라야 임신중지 역시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임신중지의 권리와 더불어 유급 양육 휴가나 국가 양육 보조금 등의 조치를 얻기 위한 싸움이 함께 가야 한다.

태아적 모성을 둘러싼 제도는, 여성이 임신에 대해 내리는 선택을 노골적으로 금지하는 방식으로써가 아니라 그 선택에 주어진 의미를 통해 여성들에게 정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선택이라는 담론은 현시대에 임신중지를 규제하는 핵심이 되었다. 선택이 가져오는 자유라는 환영이 없다면 감정의 규범적 효과 역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주체란 자기 삶을 이미 한 선택과 앞으로 할 선택의 연속으로 바라보고, 그 선택에 따른 사회ㆍ경제적 결과를 개인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책임이라는 틀 안에서 "이른바 ‘잘못 관리된 삶’은 사회ㆍ경제적 힘을 탈정치화하는 새로운 양태가 되었다."

여성은 어떤 선택의 금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선택을 통해 규제되며, 이 때문에 권력과 불평등이 작동하는 바는 잘 보이지 않고 분석되기 어렵다.

선택은 구조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선택은 현대사회에서 주체가 스스로를 마치 자유로운 양 여기도록 길러 내는 규제술이기도 하다. ‘선택’의 규제 효과는 지난 40여 년에 걸쳐 우세해진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합리성과 연관지어 보아야 한다.

임신중지에 대해 가장 자주 회자되는 말은 이 주제가 본질적으로 감정적인 경험이며 정치적 의제라는 것이다. 임신중지가 ‘감정’의 문제임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감정’의 범주는 사실 너무 넓기 때문에 구체적인 의미를 띨 수 없고, 몹시 다양하며 본질적으로 다른 느낌들을 포함한다. 따라서 감정과 그 효과를 연구할 때는 임신중지 담론에서 언급된 바 있고 끌어낼 수 있는 구체적인 감정을 밝혀야 한다. 임신중지가 본질적으로 감정적인 경험이라고 하면서 감정을 단지 개인적인 느낌으로만 해석하면, 임신중지 정치가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비판의 목소리로 잘 들리지 않는다. 결국 임신중지는 여성성 규범에 대한 투쟁 같은 정치적 영역에서 감정이라는 사적 영역으로 이동하고 마는 것이다.

감정은 주체의 속 깊은 데서 나오는 무언가로 보이고,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로부터 영향받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중지 전후로 한 가지 특정한 감정을 경험하는 여성의 묘사가, 임신중지의 ‘진실’과 임신중지를 겪은 여성의 성격ㆍ욕망을 특히 더 효과적이고 강력하게 전달해 준다고 믿는다. 임신중지를 겪은 여성의 감정생활에 대해, "모든 여성이 후회하는 면이 있다, 어떤 여성에게나 임신중지는 비극이다" 같은 단언으로 일반화하는 경향은 지극히 만연하다. 이럴 때 등장하는 감정이란 임신중지 여성을 전前 문화의 일원으로 묶어 놓는다. 여성이라면 다 똑같이 임신중지를 경험하리라고 보는 것은 ‘여성’ 주체와 임신중지를 자연화ㆍ탈정치화하는 설명을 뒷받침하고 강화한다.

역사상ㆍ맥락상 구체화된 ‘감정 규칙‘이 임신중지의 경험을 좌우한다. 어떤 감정은 옹호되거나 심지어 강요되고, 어떤 감정은 단념되거나 부정당한다. 감정은 개인과 사회규범 사이에 존재하는 회로, 즉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이 살아가는 공동체와 소통하게 해 주는 회로라 할 수 있다.

개인은 감정을 통해 다른 개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거나 그들과 멀어진다. 타자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과정에서 규범적 신체와 공동체가 형성된다. 감정을 구체화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감정들에 이름 붙이는 과정에는, 그 감정들로 구성되는 대상을 향한 여러 방향성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감정은 임신중지에 관한 공적인 발화 안에서 순환하며, 임신중지 여성이라는 표상을 아주 구체적인 방식으로 만들어 낸다. 여성이 임신중지에 접근하는 맥락은 다양할지언정, 임신에 관한 선택과 특정 선택을 하는 여성에게 더해지는 의미는 심하게 한정되어 있다.

감정경제는 개인의 주체성과 사회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순환의 효과다. 감정은 ‘행위’하며, 감정의 행위는 항상 사회규범과 관련이 있고, 개인 또한 여기서 소외되거나 여기 도달하거나 제지당하면서 관계를 맺는다.

임신중지는 이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재현된다. 이 말인즉슨 여성이 어떻게 이 절차를 경험할지, 또 경험해야 하는지를 예측하는 내용으로 임신중지가 재현된다는 것이다. 임신중지는 끊임없이 수치와 연결되지만, 수치(실패한 여성성의 기호)에 불을 댕긴 규범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이를 역사화하고 탈자연화할 수 있다. ‘임신중지 수치’는 여성이란 정숙하게 지내다가 결혼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하던 시절의 규범적 궤도에서 나왔다. 오늘날 이 수치라는 감정은, 여성이 부지런히 효과적으로 피임을 해서 자신의 생식력을 미리 조절할 것이며, 그러니 일단 임신한 태아는 모두 낳을 것이라는 기대로부터 촉발된다. 따라서 여성이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원치 않은 임신을 겪은 여성은 이미 무책임한 ‘실패자’라거나 의도치 않은 임신을 한 ‘패배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여성의 선택이라는 수사와 그것이 함의한 자유에 대한 주장 뒤에는, 모든 여성 특히 임신한 여성에게 모성을 정규화하며 태아를 자율적인 주체(임신한 여성의 아기이자 국가의 미래 시민)로 상상케 하는 프레임이 작동한다. 그리고 이 프레임 안에서, 임신과 태아의 가치는 인종이나 계급처럼 정체성을 만드는 축에 따라 달리 매겨진다.

어떤 여성은 임신하고 싶지 않았으나 임신을 한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을 주체로서 인지하려면, 오늘날 임신중지를 이해하는 통로가 돼 온 감정들을 끊어 내야 한다.

세 캠페인이란 ALR AAbortion Law Reform Association(임신중지법개혁연합), WLM, RTL Right to Life(생명인권그룹)로 각각 그 문제를 임신중지에 대해 시민적 자유, 젠더정치, 태아의 권리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ALRA는 급진적이고 여성중심적이던 기존의 접근을 꺾고, 불법 임신중지가 공중보건에 미치는 해로운 영향, 안전한 임신중지에서 의사가 수행하는 역할의 중요성, 안전한 의료 환경에서 실시되는 임신중지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급과 그렇지 않은 계급 간의 불평등을 부각했다. 임신중지를 의료 문제로 바라보는 관점은 영국의료연합 British Medical Associationn에서 공식적으로 법 개혁을 지지하며 한층 강화되었다. 그 바탕에는 의사가 의료 절차와 결정을 판단하는 데 법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있었다. 임신중지에 대한 공중보건적 접근에 따라 의사들이 심신의 건강을 근거로 임신중지를 실시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ALRA가 구사한 정치는 당시로서 일면 무척이나 진보적이었다. 법적 규제 없는 임신중지라는 요구는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목표였다. 독신 여성이 임신중지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특정한 판단을 배제한 이런 주장은 여성의 정숙함에 관한 당시 이데올로기를 깨뜨리는 도덕률을 표방했다. 하지만 ALRA는 임신중지를 당대에 지배적이던 사회ㆍ정치적 가치들에 통합하는 방식으로 임신중지의 비범죄화를 주장했다. 당대의 가치를 따르자면 임신중지는 부정적인 조치였으며 임신에서 비롯하는 결과 가운데 문제없는 것은 모성이 유일했다. 임신중지는 일탈적인 선택, 그러니까 다른 피임법이 실패했을 때만 요구되는, 필요하긴 하나 바람직하지 않은 절차로 여겨졌다. 임신중지 여성은 자율적인 선택의 주체라기보다 상황의 피해자로 묘사되곤 했다.

남성중심적 재현 체계는 여성을 어머니로 정의하고, 임신중지를 타인에게 숨겨야 하는 수치스럽고 죄스러운 비밀로 여기도록 했다. WAAC는 임신중지를 둘러싼 도덕이 태아의 생명과 피임 실패라는 관점에 치중해 있다고 보며, 이 도덕을 "우리 여성을 패는 몽둥이"라 일컬으면서 임신중지 이슈를 ‘여성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힘에 관한 것’으로 재구성했다.

세계 각지의 여성해방론자들은 운동에서 임신중지에 관한 선택이 재생산에 관한 선택과 손쉽게 결부된다는 비판에 대응하고자, 임신중지권과 더불어 ‘강제 불임수술 반대’를 요구했다. 이 요구를 할 때 여성해방론자들은 선주민 여성과 유색인 여성이 제공한 초기의 교차적 접근 대신에, 가부장제로부터 여성의 해방을 나타내던 ‘자율적 선택’과 ‘자기결정권’이라는 언어를 사용했다. 1970년대 이래, 백인 중산층 이성애규범 바깥에 있던 여성들의 요구는 포괄적인 재생산 정의라는 프레임이 한층 성장했음을 입증해 왔다. 그 목표는 여성이 아이를 언제 낳을지, 혹은 낳을지 말지를 결정할 능력과 함께 아이를 가질 능력을 보장받는 것이다.

태아를 묘사할 때는 임신한 여성에 대한 재현이 늘 따라붙는다. 태아가 자율적 주체인 아기로서 상상될 때, 임신한 여성은 이미 어머니로 전제된다. 활동가들이 태아의 생명은 임신한 여성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여성은 타인의 생명을 실은 장치가 되고 만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에 RTL의 정치는 극도로 태아중심적이었으며, "생명을 선택하라"라든지 "모든 임신중지는 아기를 죽인다" 같은 슬로건을 이용했다. RTL은 임신중지를 살인으로 규정하면서, 정부에 인간 생명 보호의 범위를 태아까지로 확장하라는 청원을 했다.

선택이라는 개념은 지극히 특정하고도 다양한 정치적 열망을 담을 수 있고, 선택은 개인의 역량이 되어 구체적이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그 선택의 주체를 구성해 낼 수 있다.

임신중지에 대한 공적 담론에서 페미니스트의 목소리가 실질적으로 부재했다는 사실은, 1980년대 중반 미국의 상황을 바라보며 로절린드 페체스키가 말했듯 "페미니스트들이 전투에서 이겼으나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록 임신중지는 합법적으로 접근 가능했으나, 임신중지를 프레이밍하는 방식은 설레스트 콘딧의 말을 빌리면 "‘사회적으로 선한 용서’를 내리는 문제이지 여성의 바람과 욕망에 따른 결과"는 아니었고, 임신중지 활동가와 임신중지를 겪은 여성을 수세에 몰아 각각에게 그들의 결정을 설명하고 정당화하기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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