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은 페미니스트 법 이론을 다룬다고 하지만 사실상 시기에 따른 다양한 페미니스트 이론들을 다루고 있다.



동등대우 이론은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관점이다. 여성은 특별히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구시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여성과 남성은 동일하므로 동일한 고용, 경제적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화 페미니즘은 기회의 평등이 결과의 평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며 이미 설계된 기준이 남성 중심적 평가 기준이기 때문에 남녀 차이의 경험 및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대우는 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성별에 따라 반드시 나뉜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남성, 여성 내부에서도 차이는 존재하니까.


지배 이론은 여성과 남성 간에는 힘(권력)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본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가부장제에 의해 사회제도에 녹아 들어 불평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성적 지배로 발생하는 강간, 포르노 문제를 잘 설명해주는 이론이지만 여성 내 다양성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반본질주의는 비판적 인종 페미니즘과 레즈비언 페미니즘이 있다. 비판적 인종 페미니즘은 한 사람이 맺는 다양한 지위와 상황에 따라 정체성이 결정된다고 보는 관점으로 생물학적인 종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인종과 능력 사이에는 별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레즈비언 페미니즘은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렌스젠더의 성적 지향성에 관심을 가지고 기존의 이성애주의와 성차별주의에 관련성을 지적한다. 전통적인 남성상은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경계를 넘나들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처럼 남성성은 여성성보다, 이성애는 다른 섹슈얼리티보다 우선한다고 본다는 것이다. 


에코 페미니즘은 사회와 자연의 관계를 강조하며 성차별주의와 자연주의는 연관이 있다고 설명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여성과 자연이 억압의 경험을 같이 한다고 보고 그 억압의 기제는 생태계라고 본다.


실용주의 페미니즘은 추상화를 지양하고 맥락과 관점을 중요시여긴다. 보편성은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맥락에 맞는 구체적인 해결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개개인의 경험은 이론을 구축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하나의 진실이란 없고 진실은 여러 개이며, 지속되지도 않으며, 개인들의 체험과 관점, 지위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한다. 자크 데리다가 말한 "해체"의 포스트모던 기법을 가져와 기존의 법 해석 개념과 불변성에 도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서론에서도 그렇고 1장에서도 긴즈버그 대법관이 언급된다. 그는 낙태 권리, 동성애자, 종교적 자유 등 소수자 권리를 위해 힘쓴 미국 연방 대법관으로 27년간 재임하였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092318310004391


올해 2월에 긴즈버그가 한 인터뷰를 실은 책도 발간되었다는 것을 알기는 했는데 이렇게 또 체크해둔다. 노터리어스 RBG는 친구분 덕분에 같이 추가해놓음.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다양한 종류의 페미니스트 법 이론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법 이론은 공통적으로 다음 두 가지 특성을 공유한다.
바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observation)과 나아가야 할 목표(aspiration)다. 먼저 페미니스트는 현재 남성이 누리는 권력과 특권은 남자들만이 이 세상을 만드는데 참여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모든 페미니스트 법학자는 남성은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문명의 법을 만드는 데 빠짐없이 참여했다는 명백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미국 역사에서 남자가 만든 법이 남자에게 유리하게 적용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다음으로 모든 페미니스트는 여성과 남성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평등의 의미가 무엇이고 어떻게 평등을 달성하는지에 관해 의견을 달리한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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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6-12 09: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출근길에 시작했어요. 긴즈버그 언급되는데 제가 <긴즈버그의 말>을 사두었었거든요. 마침 집에 있는 그 책 생각나, 얼른 읽어야겠다 했습니다.
자, 화이팅!!

독서괭 2023-06-12 10:06   좋아요 1 | URL
전 <노터리어스 RBG> 가지고 있는데 빨리 읽어야겠어요^^;

거리의화가 2023-06-12 13:24   좋아요 1 | URL
역시 책에 있어선 준비가 다 되어 있는 다락방님ㅎㅎㅎ

<법정에 선 페미니스트> 이론이라서 딱딱할 줄 알았는데 읽기 어렵지 않네요^^ 2월달에 읽었던 데이비스 책이 도움이 많이 되는것 같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6-12 13:39   좋아요 1 | URL
괭님 <노터리어스 RBG>도, <긴즈버그의 말>도 도서관에 있더라구요! 덕분에 2권 빌리게 되었네요ㅋㅋ 정보 감사합니다.

은하수 2023-06-12 11: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어제 빌려왔어요.
차례 보면서 이 책은 각각 페이퍼 안쓰면 다 잊어버리겠군 했는데 먼저 시작하고 계시네요.
미리 예습하는 기분으로 잘 읽었습니다. 아리송했던 말들이 정리가 딱 되는군요!
끝까지 잘 읽으시길 응원합니다. 페이퍼도 또 올려주세요~~
더불어 저도 얼른 도전해 보겠습니다.^
파이팅~~~

거리의화가 2023-06-12 13:26   좋아요 1 | URL
맞아요. 이런 책은 정리 안하면 그냥 휘발되버리기 쉽죠.
은하수님의 도전도 응원합니다!

얄라알라 2023-06-12 1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역시 철저하게 공부하시는 분이시라 개념부터 확실하게 짚어주시네요

저는 오늘 ˝문화 페미니즘Cultural feminism˝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봤어요. 무슨 뜻인지 짐작조차 안 가는 표현인데, 올려주신 정의를 봐도 갸우뚱 갸우뚱하니, 어서 책을 직접 읽어봐야 하나봐요....^^:;

다들 열심히 읽으시는데 이렇게 곁눈질로 리뷰만 엿보고 가네요. 책도 아직 안 구해서^^;;

거리의화가 2023-06-12 15:05   좋아요 1 | URL
정리차 본문에는 간략하게 개념만 올려두었습니다. 책에는 사례라던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설명이 덧붙어서 이해가 더 쉬우실 듯합니다. ㅎㅎ 이 책 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단가가 비싸서 사기에는 부담되는 가격이긴 하더라구요ㅠ

얄라알라 2023-06-12 14:39   좋아요 1 | URL
네네^^ 감사합니다.

사례, 궁금해지네요

2023-06-12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12 1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수하 2023-06-12 1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긴즈버그 얘기 나오겠지? 했는데 역시군요 ㅎㅎ
벌써 12일이네요. 얼른 읽어야겠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3-06-12 15:08   좋아요 1 | URL
네 수하님. 이제 긴즈버그를 읽을 때가 되었나봐요. 이론이라고 해서 긴장했는데 1장은 페미니즘 이론에 가깝더라구요. 그동안 그래도 개념이 좀 정리가 되었던건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뒷장들은 어떻게 전개될지도 궁금하네요!ㅎㅎㅎ
 

"은자언니는 졸업하면 백의의 천사가 되겠대요?"
"뭐?"
홍이 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여학교 나와서 간호부로 들어가면 대우가 참 좋다는 거예요. 보통 소학교만 나와가지고 간호부가 되니까 말예요." 그
"그따위 소리 하지 마."
딱딱한 홍이 음성에 의아해하며 상의는 말했다.
"아버지 왜 그래요? 저는 좋아 뵈던데, 병원에 가면 그 언니들 깨끗하고 거룩해 뵈고, 그 중에는 굉장히 예쁜 사람도 있었어요."
"너도 간호부가 되겠다 그 말이냐?" 모으는 EXER
"그런 거는 아니지만… 그래도 좋긴 좋던데요?" PRS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해."
"선생님도 그러셨어요. 백의의 천사가 되어 전선에 나가서부상병을 돌보는 것도 애국하는 길이라구요."
홍이는 단발머리에 고집 세게 생긴 딸을 가만히 바라본다.
‘천방지축을 모른다. 애국이라니, 나라가 어디 있다구.‘ - P119

"김두수라고, 니는 모릴 기다마는, 공장에는 가끔 올 기다.
우리가 어릴 적에 한 동네서 살았제. 그래서 잘 아는데 그놈이,"
하다 말고,
"아니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는지 니는 모릴 기다."
"왜 보지도 못한 사람 얘길 꺼내는 거예요?"
"잠자코 들어보아라. 그 사람 본업이 가씨나장산 기라. 조선서 데리오는 가시나들을 받아가지고 팔아묵는데 그러이 그쪽사정은 환하게 안다."
"아이들 데리고 별소리를 다 하요."
의도적으로 임이에게 말을 하지 않던 보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머가 우때서? 야아가 백의의 천사라고 해쌓으니께 하는 말이제."
보연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외면을 한다.
"상의 니가 몰라서 그러는 기라. 왜년들이사 그렇지도 않을기다마는 조선 아이들은 명색이 간호부지 군대 따라댕기믄서병정을 받는다 안 카나." - P113

전시하에 개인은 금을 소유할 수 없다, 일본 정부의 그 같은포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정부가 금을 회수하겠다는 것이며 공출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라에 충성하기 위하여 국민은 고시한가격으로 금을 정부에 팔아야만 했다. 금이 탄환(彈丸)이 되는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쇠붙이는 전선으로 전선으로 가게 돼 있는 판국인데, 물론 많은 사람들은 소유한 금을 내놨고 고시가격으로 팔았지만 그것에 불응하여 금을 은닉한 소위 반역자가없지도 않았다. 은닉한 일부의 금이 비밀리에 유통되고 있었던것도 사실이었고, 만주 혹은 중국 본토, 그 방면으로 유출되는것이 이른바 밀수였는데 전문적으로 하는 밀수꾼의 조직도 상 - P128

당수 있었겠지만 만주서 조선으로 다니러 온 사람, 만주에 볼일이 있어 가거나 혹은 이주해가는 사람, 이들 중에도 조선서금을 매입하여 실로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숨겨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일본제국의 경찰이라고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사람들은 이윤을 위해 위험도 무릅쓰게 돼 있었다. 그러나 보연의 경우는 장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훨씬 단순했고 물정모르는 만용이라 할 수도 있겠다. - P129

"그간 세월이 많이 흐르지 않았습니까. 인실 씨 심경에도 변화가 있는 것이 자연스런일 아닐까요? 민족의식이 에고이즘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 말 할 자격이 제게는 없는지 모르지만, 일본은멀잖아 패망하겠지요. 일본인도 사람입니다. 사람으로서 피해자이기도 하구요. 이런 정세하에서 오가타나 저나 앞날은 안개속입니다. 일본인인 오가타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는지 그것도 의문입니다. 일본인을 사랑했다는 죄의식에서 벗어나십시오. 인실 씨는 사람을 사랑한 것뿐입니다. 인실 씨는 오늘까지있어온 용기보다 더 큰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십일 년 전과 내용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찬하는 깨닫는다. 그때 인실은 그 말로 설득되지않았다.
"제가 무지하게 보이지요?" 인실은 역시 혼잣말같이 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 P154

지난가을에는 일본이 무모한 불인(佛) 진주를 감행했고 그보다 앞선 삼월에 왕조명(汪兆銘)은 위정부(僞政府)를 남경에다 세웠으며구라파도 전쟁의 도가니로 화해 있었다. 독일군은 마지노선을뚫었으며 영국은 됭케르크에서 총 철퇴, 드디어 파리는 함락된상태, 각각 세계의 정세는 예측불허였다. 뿐인가, 소만 국경은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언제 어느 곳에서 터질지, 언제 하얼빈이 전화 속으로 들어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연회가 성대하고 여인들 의상이 현란하며 남자들이 폭음하는 것은 내일을모르기 때문일까. 일본인이라고 예외는 아닌 것이다. 절망은오히려 그들 편이었다. - P162

"일본여자를 데리고 살며 나라를 망하게 한 고관대작의 자손으로, 나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지만 오가타상, 내가 조선인이라는 것은 잊지 마시오. 인실 씨가 그리된 데는 내게도 다소 책임이 있었고 또 그와의 언약은 지켜주는 것이, 그는 평범한 길을 가고 있는 여성이 아니오. 생각해보아요. 오가타상이 현실을 비판하고 군국주의를 증오하지만 자기 자신 일본인인 것을부정할 수 있어요?"
"그건 문제가 달라요."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과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야 했던 사람, 어느 쪽의 고통이 컸을까?"
그 말 대답은 못한다.
"몰라 그렇지, 그 여름에 인실 씨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신파같은 건 아니었소. 나는 그 당시 회피할 수 있다면 회피하고 싶었소. 회피할 수도 있었지요. 인실 씨는 매달리며 호소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 P186

나는 너를 잊겠다! 하며 절규했으나 인실은 그에게 진실의 여운을 남기고 갔으며 인실이 낳아준 자신의 아들이 있었다는 것은 어떤 환희를 그에게 안겨주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알지 못할 폭풍이 불고 있었다. 안정을 잃었고 격노한 것도 그것은 사태 변화에 대한, 어쩌면 그것은 역설적인 것이었는지 모른다. - P187

"일본이 망하는 것을 원치 않는 오가타상이나 망하기를 고대하는 조선인, 따지고 보면 같은 차원이오. 일본을 비판하고압박 민족에 깊이 동정하는 오가타상도 조국이 망하는 꼴은못 본다, 그와 같이 어쩌다 친일파로 몰린 사람들 심중에 회한이 없겠소? 종속을 그 누가 원하겠소. 민족에 대한 존엄은 변할 수 없는 보편적 윤리 아니오? 게다가 그것은 짙은 감정이니까."
"우문이었소."
"악질 친일분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분자는 제 나라가 융성하면 애국자가 되고 충성을 하고, 항상 강자 지향의 노예들이지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같은 노예근성, 나같이우유부단의 방관자는 있게 마련, 사실은 조선인들의 경우 그대부분이 친일하게 하는 잔혹성 밑에서 신음하고 있으며 친일하는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실상 아닐까?"
"우리는 평행선, 적입니까? 영원히."
"그렇지는 않지. 그 해답은 당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요?"
"내가요?"
"세계가 하나 될 때, 그게 당신의 주의였고 이상 아니었소?
그리고 또 이웃으로서 우리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을 때 적이될 이유가 없지 않아요? 당신의 반전사상은 그거 아니었소?"
"그건 그래요."
"하면은 우리가 어찌 적이겠소. 친구지." - P198

제문식이 말하며 술을 마셨다.
"작년 초 창씨제도가 시행되면서부터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아시다시피 폐간되었고 이어서 구월에는 반전운동단체라하여 기독교도들을 비질하듯 검거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국민총력연맹(國民總力聯盟)의 조직, 그것은 아까 문식형님이 말씀하신 대로 농촌은 군량의 저장고로, 노동자들은 깡그리 군수품의 부품으로, 그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써 그걸 보다 강화하기 위하여 황국신민(皇國臣民)운동인가 뭔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데 한마디로 만화지요. 처처에서 만화 같은 작태가 벌어지고있어요. 윌리엄 텔의, 압제자 모자 앞에서 절하는 것쯤, 그거약니다. 가장 저질의 신(信)을 우리는 지금 강요당하고 있는 겁니다. 가장 야만적으로 가장 무지몽매한 종족으로 우리는추락하지 않으면 안 되게 돼 있어요. 일본인들은 그런 일에는거의 불감증인 듯하지만 현인(人神)을 믿지 않는 조선인들처지에서 보면 뱃가죽이 터질 지경이지요. 그러나 조선인이 그희극의 관객 아닌 연기자다 하는 점이 참혹한 거지요. 여하튼,
금년에 들어와서 종전에 있었던 사상범 보호관찰령(保護觀察令)이 개정되어 예방구금령(豫防禁令)으로 공포된 것은 한층 목을죄자는 것인데 예상하지 않았던 일은 아니었지만 심리적으로사람들이 급박해진 것은 당연하지요. 어디든 국경을 넘고 싶다는 유혹은 거의 모든 사람이 느끼고 있을 겁니다." - P208

"그들이 살아남는 비밀이 뭔지 아십니까? 힘의 무게를 다는아주 정확한 저울을 가지고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P211

"언제까지 미쳐 날뛸까요? 얼마나 사람이 죽어야 전쟁은 끝나지요? 전쟁 미치광이 땜에 과학이 발달되고 부를 축적하기위하여 과학이 발달되고 없어도 될, 아니 없어야만 할 것 때문에 자원과 인력이 동원되고 생산에 미쳐 날뛰는, 이 끝없는 낭비는 결국 인류가 전멸한 뒤에 끝이 날까요? 그래요. 군국주의는 망해야 해요! 식민지 정책은 끝이 나야 해요. 낭비와 축적의이 병적 상황을 극복하지 않는 이상 사람답게 살 수 없고 생명이 부지될 수도 없을 겁니다. 제사장 말대로 농촌은 거대한 군량의 저장소이며 노동자는 모조리 군수품의 부품,뿐이겠어요?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볼 때, 지주들이 농민으로 전락하는 것처럼 노동자 아닌 사람도 노동자로 공급이 될 것 아니겠어요? 이제는 저항 없어요. 망해야 합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역사의변혁을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망해야 합니다."
오가타의 목소리는 비통했다. - P225

오가타는 아이의 손을꼭 쥐었다. 축복받지 못한 생명을 안고 찬하에게 도움을 청했을 그때 그 모습을 오가타는 히비야공원 어느 모퉁이에서 찾기라도 할 듯,
‘아니다. 이 애는 축복받은 생명이다. 이렇게 무구하고 신비스럽게 자라주지 않았는가. 이 아이는 우리들 사랑의 등불이야. 세상을 밝혀줄 것이다. 인실의 뜨거운 눈물과 나의 비원을받아 태어난 아이, 이 영롱한 생명은 세상을 밝혀줄 것이다.‘ - P237

언제나 그랬지만 가슴이 설렜다. 어디든 떠난다는 것은 새로움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 다른 하나의 자신이 마치 번데기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폐쇄된 자기 자신으로부터 문을 열고나서는, 그것은 신선한 해방감이다. 그러나 새로움이란 낯섦이며 여행은 빈 들판에 홀로 남은 겨울새같이 외로운 것, 어쩌면새로움은 또 하나의 자기 폐쇄를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마주치는 사물과 자신은 전혀 무관한 타인으로서 철저한 또 하나의 소외는 아닐는지. - P242

"사람의 본성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있어요. 이상한 것은."
99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가차 없이 배척하는 그 속성말예요. 그것도 사람의 본성일까요? 이해가 걸려 있을 경우도물론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소외시켜버리는 그 잔인성 말예요." - P262

"같은 사람이면서 인종이 다르기 때문에 배척하는 것은 일방적인 것만은 아닐 게야. 너 자신 속에도 배타적인 감정은 있을테니까. 인종에서 단위가 작아져도 마찬가지다. 해서 끼리끼리모인다 하지. 쪼개고 쪼개서 하나가 될 때까지. 단위가 크든 작든 다르다는 것은 거리며 이질적인 것 아니겠나?"
"그럼 다르다는 것 때문에 나타나는 적대의식은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건가요?"
"어디 사람뿐이겠어? 생명 있는 모든 것, 곤충이든 식물까지종(種)이 다르면 배척하고 싸워. 아니면 항복하든가. 이기적인생존본능 아니겠어?" 어떻
"그렇담 영원한 투쟁이네요. 영원한 불평등이고."
"누르는 주체만 달라져왔을 뿐 변한 게 뭐 있어. 새삼스럽게그런 얘기는 뭐할려고 해." - P263

일본이 내 강산을 범하지 않았던들. 처음에는 의병이었고형평사운동에서 사회주의 문턱까지… 그리고 송관수는 만주벌에서 삶을 끝마감했고, 권속을 끌고 서희 일행을 따라갔던용의 풍상, 항일의 기운이 팽배해 있던 간도 땅에서 홍이는 감수성이 가장 첨예했던 소년시절을 보냈다. 한복은 아비와 그리고 애국지사를 악마같이 엮어간 형 거의 죄업을 보속하기 위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형의 지위까지 암암리에 이용하면서 조선과 만주를 오가며 전령 노릇을 하고 자금을 운반하고 일하는사람들을 인도하기도 했다.
제국주의 일본의 동물적 탐욕은 그 얼마나 많은 조선 백성들 - P301

의 운명을 바꾸어왔는가. 두메산골, 골짝골짝마다 핏줄같이 시내 흐르는 곳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유민이 되어 떠도는이 그 얼마인가. 만주로 가고 중국으로 가고 연해주로 가고 하와이 일본으로, 피 값도 안 되는 노동력을 팔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건만 도시에는 여전히 거지들이 떼지어 다니고 지게 하나에 목숨을 건 사대육부 멀쩡한 사내들이 정거장마다 부둣가마다 허기진 눈빛으로 짐을 기다리고 있는 풍경, 바로 이들에 소속되었던 사람들이 방 안에 앉은 사내들 부모들이었다.
정면돌파를 했든 측면지원을 했든지 간에 그들의 유대는 동지로서 깊고 강한 것이었다. 그들의 열정은 투명하고 깨끗했다. - P302

담배 연기를 날리며 영광은 생각한다. 이 고장의 성지(聖地)인 이곳이 악랄한 일본으로부터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지 그것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굳게 닫혀진 사당 문을 멀리 바라보며 영광은 바로 이곳 지형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보는 것이다. 통영 시내로가자면 서문안 고개를 넘어서 간창골을 빠져나가야 시내에 나간다. 간창골 일대 서문안 고개에도 집은 옹기종기 들어서 있었다. 특히 서문안 고개는 가난한 초가들로 이루어졌고 그곳에서 충렬사로 이르게 되는 내리막의 골짜기는 대개 가난한 서민들의 주거다. 마치 분지 속에 그 가난한 백성들에게 옹위되듯충렬사는 자리하고 있었다.
‘한 위인이 살다 간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서가 아닐 - P317

까? 시일까? 타인에게 투영된 그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 갖가지 정서로 재생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자체는 보는사람에게는 풍경이며 시다. 위대하다는 그 자체가. ‘ - P318

"산다는 거는………… 참 숨이 막히제?"
한복이는 그런 말할 만했다. 그가 살아남았다는 그 자체가기적이었으니까. 돌밭의 질기고 못생긴 무 꽁댕이 같았던 그,
밟히고 또 밟히는 길가의 잡초같이 자란 한복이, 그에게도 수십성상의 세월이 실려 이제는 제법, 몸집은 작으나마 의젓하고 사려 깊은 현자 같은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숨이 가쁘지요."
한참 만에 홍이 대꾸했다. - P359

세 늙은이는 신명을 내가며,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만든다.
모처럼 그들에게 생활이 살아나 꽃이 되는 것 같았다. 한 곁에밀려나서 마치 방 안에 놓인 장롱과도 같이, 언제부터 그리 되었는지, 눈치볼 며느리 딸도 없고 마치 자유천지에서 벗과 노니는 것처럼, 우물가에서 지저귀던 옛날이 돌아온 것같이 이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부엌 안에서 맴돈다. - P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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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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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해석을 비롯하여 한국현대사와 관련한 저작들을 내놓은 학자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내부적 문제로 인한 갈등 폭발, 미소 등 외부적 세력에 의한 영향, 내부적/외부적 결과의 혼합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1차적으로는 해방 후 5년 간 일어난 사건들에서, 2차적으로는 남한에 일제강점기 식민 지배구조가 뿌리내린 것이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민위원회의 역할과 그 한계에 중요성을 부여한다.

식민지에서 뿌리 내린 체제에서 비롯된 계급 갈등의 문제(지주와 농민 간, 기업가와 노동자 간)는 내부의 갈등이 뿌리 깊었음을 인지하게 하며 통일 후 지향할 사회의 문제(이념)는 신탁 통치를 기점으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간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일본은 조선을 권위적이고 강제적으로 통치하면서 군림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의 비주류 지배층과 갑자기 부유해진 양반과 지주, 관료들을 포섭하여 민중의 저항을 철저히 통제하였으며 자원을 동원하고 수탈하는 정책을 펼쳤다. 식민지 시기 철도망이 발달하면서 농업이 상업화되고 일본은 제국을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기존의 조선 지주들은 토지 자본을 상업과 산업에 투자하며 배를 불렸고 일부 평민, 천민들은 사업을 통해 기업가로 변신한다. 산업의 중심은 농업에서 공업으로 이동하였고(제조업, 산업, 광업, 상업 중심의 공장이 많았던 북부 지방의 고용이 증가하여 남부의 농민들이 대거 북부로 이동), 노동 계급이 형성되었다. 식민지의 노동 정책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갈등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동하였고 1930년대 이후 일제의 강제 동원이 시작되면서 만주나 일본 등 해외로 노동하러 가는 인구가 늘었다. 해방 이후 북에서 남으로, 만주나 일본에서 귀환한 노동자(농민)들은 자신의 기반인 토지를 잃었다.

해방 후 조선에 남아 있던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보복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영향력 있는 한국인 인사와 접촉을 하였는데 첫 주자인 송진우는 거절하였고 여운형이 수락하면서 과도적 행정기구 책임자로 국내 치안 임무를 맡게 된다.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연합군에 외국의 개입 없이 한국은 즉각 독립할 것과, 친일 세력은 배제해야 함을 전달하였다. 8월 16일 감옥에 있던 정치, 경제범이 석방되자 건국준비위원회는 공산주의자들로 채워지게 된다. 그리고 대중들도 일본과의 협력는 거부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의 요구는 설 길을 잃는다. 건국준위위원회(건준)은 전국적으로 지부가 만들어지며 산하 단체까지 조직되고 8월 20일 무렵이 되면 일본은 건준 반대 입장으로 돌아선다. 미국이 9월 초까지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는 동안 일본은 남은 물품을 폐기하고 화폐를 마구 찍어냈으며 친일 성향의 한국인에게 은사금을 마구 뿌려대는 등 남한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8월 28일 건국준비위원회는 치안 유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것임을 선언하고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 수립된다. 그 배경에는 조선의 자주성과 미국의 입김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인공 지도부는 좌우익을 연합한 명단으로 구성되었다.
9월 16일 인공에 반대하며 한국민주당(한민당)이 결성된다. 이들은 주로 대지주, 식민지 시기 각종 혜택을 받은 계층과 지도자급 인물들, 서구에서 유학한 엘리트 계층이 많았다. 한민당의 최대 목표는 식민지 시기 지주/농민 구조와 토지 지배 관계를 존속시키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로 분화된 세력을 포용하고 포괄하고자 노력했다. 1943~1946년에는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며 다국적 신탁통치를 시도했다. 루스벨트는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신탁 통치는 식민지를 겪은 나라가 이전의 식민 지배를 대체하고 미국의 이익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서 식민지는 점진적으로 독립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련이 만주와 한국으로 빠르게 남하하면서 미군의 상륙 날짜는 거듭 앞당겨졌고 소련에게 한국이 넘어갈 것을 우려한 미국에서 국제협력주의가 설 자리는 없게 되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과 한국까지 점령하라는 작전 지시 아래 미국 제10군 24군단에 하지를 임명하여 조선으로 보낸다. 한국은 카이로 선언에서 일본 침략의 희생자로 인정되었음에도 하지는 한국이 미국의 적이며 패전국의 규정이 적용될 대상이라 생각하고 행동했다. 한반도에 들어온 하지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통치 기구를 존속시키라 지시한다. 미군의 목표는 소련의 영향을 받은 외부적 혁명 세력과 국내의 자생적 혁명 새력을 차단할 방어책을 세우는 것이었다. 점령군은 한국의 일부를 물리적으로 점령해 다른 세력이 독점적으로 장악할 수 없도록 만들기를 원했다.

1945년 미군정은 임정 관련 인물들이 미국의 정책에 도움이 되는 대중적 지지와 정통성을 지녔다 생각했다(미 국무부는 임정을 비롯한 한국인 단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했다). 미군정은 정치 단체 협의회를 군정 내 한국 정부를 구성하고 정무 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기획하였다. 정무 위원회는 과도 정부로 기능하고 미군 사령관은 거부권, 미국인 감독 및 고문의 지명권을 갖는다는 생각이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고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하여 좌우익 결집을 시도한다. 그는 소련과 소련의 북한 정책을 비난하였고 인공 참여 요청을 거부하였다. 이에 여운형과 박헌영 같은 좌익 계열은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탈퇴한다. 여운형은 11월 11일 인민당을 결성하고 이전의 인공보다 좀 더 온건한 세력을 흡수하여 조직을 구성하였다. 중국에서 임정 세력이 귀국하자 자체 정부를 세울 것이라는 소문에 인공 대표자들은 위협을 느꼈고 이에 인공대표자들은 군정 지지를 표명하였다. 하지만 하지는 인공을 비판하고 심지어 그들의 활동을 불법적으로 규정한다. 이 때부터 하지는 인공, 전평 등 좌익 세력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미군정은 기존 토지 관계가 유지되길 바라는 한국인과 결탁하여 미곡 경제 법령을 발표하고 미곡을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는 시장을 설치하는 정책을 펼치지만 이것은 미곡 유통 구조를 미군정이 장악하려는 시도로 대중의 반발만 불러오며 처참한 실패로 끝이 난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모스크바 삼상 회의가 열렸다. 4대 강국이 한국에 5년 이내의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핵심은 신탁 통치 이전에 과도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내에는 우익의 반대, 이후 좌익이 찬성하며 극심한 대결 끝에 혼란을 불러온다. 송진우는 저격으로 암살되었고 김구는 파업과 시위를 이끌며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이후 국내에서 핵심 입지를 잃음)하면서 반탁운동의 중심은 이승만과 한민당으로 넘어간다. 또한 임정과 인공의 연합 노력은 좌익이 모스크바 협상 지지 입장으로 변화하자 중단되었다.

미군정은 1946년 1월 남북한 모두 인민위원회를 해체하고 대표민주위원을 한국 과도정부의 모체로 내세운다. 과도 정부 수립을 위해 다양한 한국 정치 단체들에게 주요 민주 개혁을 포함해 신정부가 추진할 정책을 합의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미군정은 우익을 우선적으로 확보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실제로 28명의 정무위원 중 4명만 좌익이고 나머지는 모두 우익이 차지했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과 임정의 좌익 계열을 아우른 민주주의민족전선이결성된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인공의 직접적 계승자임을 자처했다.

미국은 정부 형태와 관계 없이 한국의 조속한 독립과 자치를 추진하고 소련과 협력해 미소양군 점령을 종결시키겠다 공표한다. 미소공동위원회 협상이 그렇게 시작되었으나 과도 정부 수립을 한국의 어떤 단체와 논의할 지 합의하지 못하여 무기한 중단된다. 미국은 대표민주의원을 남한의 유일한 자문기구로 사용 제안했으나 소련은 모스크바 협정에 반대하는 정당이나 단체와는 협의할 수 없다며 반대하였다. 공위의 핵심 쟁점은 소련이 지지하는 형태의 정부(인민위원회와 관련된 조직)가 남북한 모두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1946년 2월 정당등록법을 공포하여 좌익 색출 단체를 해체하려 했고, 1946년 3월에는 군정을 공격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였으며, 1946년 5월이 되면 전국의 경찰을 이용하여 좌익을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전권을 부여한다.

하지는 레너드 버치 중위에게 온건파를 포함하되 극좌, 극우 세력을 배제하는 중도파 합작 형성을 목표로 좌우합작을 추진한다. 하지만 여운형과 박헌영이 좌익 주도권을 놓고 갈등하였고 과도입법의원이 대표기구로 수립되었으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인민위원회는 자생적이었고, 다양한 계급 구성원(지방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 학생과 제대한 군인, 지방의 명망가와 지주, 일제강점기 관료)이었기 때문에 지역 마다 정치 참여 수준과 토지 상황, 지리적 위치, 인구 이동, 근대화 정도에 따라 양상이 달랐다. 거기에 일본에서 미국의 통치로 넘어가는 기간도 그 결과를 다르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 조직 구조가 알려진 지방 인민위원회는 대부분 중앙의 건준과 인공과 비슷한 부서로 이루어졌고 조직부, 선전부, 치안부, 식량부, 재정부가 있었다.

1946년 가을 인민위원회가 장악한 전국에 농민 봉기가 발생한다. 봉기는 경상도에 집중되었으며 인민위원회가 강력하거나 지배한 전라남도, 충청남도, 강원도 군에서도 발생했다. 봉기가 경상도에 집중된 것은 해방 뒤 이 곳에 인민위원회가 존재했으며 토지를 잃고 불만에 찬 농민들이 모여들면서 일어났다.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 노동자 파업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남한 전체의 철도 수송이 멈춘다. 나중에는 인쇄공, 전기 노동자, 전보국, 우체국 직원 등으로 확산되면서 전국적인 총파업이 벌어진다. 여기에 학생들도 참여하여 파급력이 커졌다. 이들은 쌀 배급량을 늘리고 임금을 올리며 실직자와 피난민들에게 집과 쌀을 배급할 것, 공장 노동자들에게 작업 환경을 개선할 것, 조직 결성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민위원회에 권력을 이양하라는 요구였다. 군정청은 북한 공산주의자가 혼란을 부추긴다며 비판하였고 현재 한국인은 자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미군정은 시위자 검거를 실시하고 파업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요구를 거부하면 즉시 해고하고 쌀 배급을 중단하겠다 엄포를 놓는다.

9월 말 대구에서 많은 공장과 기업에서 파업이 발생하고 3천 명의 노동자가 참여하면서 전국으로 파업이 확산되며 격렬해진다. 이 과정에서 진압자는 발포를 하고 시위자는 지방의 공무원과 경찰을 살해, 관공서 건물을 불태우는 등 과격해진다. 군정은 농민 봉기 진압에 경찰을 활용하였고 무자비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파업과 봉기는 미군정의 곡가 정책으로 1946년 하반기 곡물가의 폭등, 통화 팽창, 실업이 불러온 결과였다.

소련은 1945년 9월 북한 내부를 어느 정도 파악한 후 기존에 이미 설치되어 있던 지방 인민위원회를 이용해 식민지 유산을 재편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고위층인 친일 인사들이 대부분 남쪽으로 피신하는 등 지주, 식민지 시대 관료, 경찰의 활동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피를 흘리지 않은 채 혁명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북한 지도부는 중앙과 지방의 요구를 결합, 중앙집권적 통제 방식과 대중 노선을 혼합한 방식을 추구하려 했다. 김일성은 지도자, 조직, 대중 노선을 내세우며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움으로써 중앙적 조직의 기반을 마련한다.

북한은 빈농과 노동자들 중심의 농촌위원회를 조직하면서 중앙에서 마을 밑바닥까지 하나의 유기적 명령 체제를 완성하였고 무엇보다 토지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이전의 지주는 소규모 토지를 받고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게 함으로써 지주 제도를 뿌리 뽑고 하층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갖게 함으로써 정권에 호응도를 높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8시간 노동제, 사회 보험 제도 실시, 노동 조건 개선, 성별에 상관 없이 같은 노동에는 같은 임금을 지급, 남녀 평등법을 제정, 일본인 소유의 공장과 기업은 국유화, 중소기업은 도군 인민위원회 관할 아래 투자와 생산활동을 하도록 장려하면서 사회 전반적인 개혁을 이루어낸다.
1946년 8월 29일 북로당이 결성되면서 북한의 내부 당파를 통합하게 됨으로써 북한은 남한과 명확히 다른 노선의 체제가 만들어지게 된다.

해방 뒤 첫해 한국의 북반부에서는 대부분의 한국인과 여러 서구 관찰자가 일제 지배가 끝난 뒤 필연적으로 나타날 결과라고 생각한 것을 달성했다. 해방 뒤 9개월 만에 지주 제도가 사라지고 토지는 다시 분배됐으며 주요 산업이 국유화되고 완전히 왜곡되었던 식민지식 공장 시스템을 뿌리 뽑았으며 남녀평등을 확립하는 급진적 개혁이 이뤄졌다. 해방 뒤 1년 만에 수십만 명의 한국인을 아우른 강력한 대중정당과 초보적인 군대가 조직돼 오랫동안 한국 정치에 없었던 통일성을 부여했다. 1946년 말 북한에서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분단 국가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해 1948년 9월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북한 공산주의와 연결된 대부분의 특징도 이 시기에 나타났다. 민족주의의 강조, 지도자의 절대적 역할 중시, 포괄적 통일전선 그리고 민족적 색채가 짙은 한국 공산주의의 특유한 수단이 된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의 이념적 혼합이었다. 모두 가차 없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최소한의 유혈만으로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이뤄졌다. 달리 말하면 북한은 일제의 식민 지배가 남겨놓은 영향에서 예상할 수 있는 "일반적" 경로를 따랐다. - P489

일제강점기 지배층과 통치 구조를 남한이 이식되지 않았다면, 하지가 버치 중위를 끌어들여 주도한 좌우합작이 성공했다면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곱씹어볼수록 해방 이전의 식민지 지배층이 통치권력으로 이양되었던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물론 미군정의 헛다리와 판단 미스도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자생적인 조직이었던 인민위원회를 인정하고 잘 활용했다면 어땠을까. 1945년 8월부터 12월의 5개월이 역시 뼈아픈 듯 싶다. 이 때 이식된 결정들이 향후 바꾸어보려고 여러 시도를 하지만 잘 이루어지지 못했고 안착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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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3-06-11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이런... 거리의화가님 이번 리뷰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심있는 이웃들을 두 갈래 길로 이끌듯 합니다. 리뷰를 읽고 지도처럼 활용하여 글의 큰 흐름을 잡는 이들과, 아니면 리뷰만 읽고 책을 ‘읽는 셈치고‘ 건너뛰는 독자로... ㅋㅋ

거리의화가 2023-06-11 17:51   좋아요 1 | URL
앗! 정리하다보니 너무 길어지긴 했네요. 어떤 분들이든 제 리뷰에서 도움을 얻으시면 감사하겠죠^^ 그래도 제 리뷰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직접 읽어보셔야!ㅎㅎㅎ 겨울호랑이님 감사합니다*^^*

희선 2023-06-15 0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전쟁의 기원이군요 외국 사람이 이걸 쓰다니... 다른 나라 사람이 그때가 어땠는지 쓴 걸 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테니... 그런 거 본다고 알지...


희선

거리의화가 2023-06-15 09:11   좋아요 1 | URL
워낙 유명한 저자입니다. 한국현대사, 그리고 한국전쟁사 관련하면 이분이 바로 생각날 정도로요!^^;

NamGiKim 2023-09-17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좋은 책입니다.

거리의화가 2023-09-18 09:07   좋아요 0 | URL
네. 많은 분들이 읽어보면 좋을 책이죠. 한국전쟁사를 다룬 책들 중 분기점이 된 책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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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식민지 시기에서 얻은 구조적 문제와 해방 후 전쟁 전까지의 사건들이 영향을 준 결과 발생했다. 1권은 식민지 시기 통치 하에서 이루어진 산업 구조의 분화와 동원, 해방 이후 1946년 말까지의 시기를 다루며 남북한의 이념과 체제가 확고하게 분화된 배경과 사건들을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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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장

해방 뒤 첫해 한국의 북반부에서는 대부분의 한국인과 여러 서구 관찰자가일제 지배가 끝난 뒤 필연적으로 나타날 결과라고 생각한 것을 달성했다. 해방 뒤 9개월 만에 지주제도가 사라지고 토지는 다시 분배됐으며 주요 산업이 국유화되고 완전히 왜곡되었던 식민지식 공장시스템을 뿌리 뽑았으며 남녀평등을 확립하는 급진적 개혁이 이뤄졌다. 해방 뒤 1년 만에 수십만 명의한국인을 아우른 강력한 대중정당과 초보적인 군대가 조직돼 오랫동안 한국 정치에 없었던 통일성을 부여했다. 1946년 말 북한에서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분단국가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해 1948년 9월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북한 공산주의와 연결된 대부분의 특징도 이 시기에 나타났다. 민족주의의 강조, 지도자의 절대적 역할 중시, 포괄적 통일전선 그리고 민족적 색채가 짙은 한국 공산주의의 특유한 수단이 된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의 이념적혼합이었다. 모두 가차 없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최소한의 유혈만으로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이뤄졌다. 달리 말하면 북한은 일제의 식민 지배가 남겨놓은 영향에서 예상할 수 있는 "일반적" 경로를 따랐다. - P489

많은 한국인이 보기에 소련은 점령 초기 미국이 추구한 것과 완전히 상반된 정책을 따랐다(또는 한국인에게 그러도록 허용했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하다. 의도된 것이든 그저 인민위원회가 편리했건 간에 소련은 한국인에게재량권을 주고 뒤로 물러났다. 조지 매큔은 "불길하지만 확고한 권위를 가진" 지위라고 적절히 표현했다. 앞으로 보듯 소련이 평양의 최고사령부에관심을 두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 그들은 실질적 통치권을 한국인에게 주었다. 미국 정보기관은 1945년 12월 그런 정책이 "제한적 점령"을 나타낸다고 지적하면서 "중앙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6SE PR이처럼 해방 뒤 몇 달 동안 북한에서는, 미국 공식 자료가 마지못해 인정한 대로, "대부분 노동자와 농민 출신으로 구성된 완전히 새로운 지배층이 식민지 시대의 심연에서 등장했다. 식민지 시대의 계급 구조는 완전히역전됐다. 미국의 일상적인 속어로 표현하면 "개자식들이 쫓겨난the bastardswere thrown out" 것이다. 물론 남한의 미국이 보기에는 새로운 개자식이 들어왔다. - P504

북한 지도부는 중국과 소련 혁명을 모두 경험했으며 해방된 한국에서 자발적 농민 봉기가 시작돼 자신들의 눈앞에서 터져나올 것 같은 상황과 마주쳤다. 그 결과 이런 지도부와 그 정책은 중앙과 주변의 요구를 결합하고 스탈린의 상명하달 방식과 마오쩌둥의 대중노선을 혼합한 이념을 구현해야 했다.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스탈린주의의 핵심 구호는 "대중에서 대중으로"라는 마오쩌둥주의의 핵심 구호와 나란히 놓였다. - P505

남한에서 볼 수 있었던 자발적 인민위원회와 노동·농민조합은 북한에서도 필연적으로 나타났으며 헌신적 공산주의 조직자들에게도 상당한문제를 던져준 것으로 생각된다. 김일성이 거느린 공산주의자들은 우선 헌신적 지지자로 구성된 핵심을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한 뒤 그 핵심이 해방된한국의 정치가 만들어놓은 산만한 상황을 지배할 때까지 끝없이 확장하는동심원 형태로 성장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2월 두 가지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두 문제는 서울 인민공화국의 조직이 붕괴돼 북한에서 인민위원회 지도부를구성해야 할 필요가 나타난 것과 남한에서 단독 행정조직이 출현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북한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등장을 인공 지도자들의 실패,
나아가 배신행위와 연결하면서 인공은 "대중적 기반이 없는 한 줌의 사람들이 발표한 선언에 따라 수립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들은 "지방 인민 - P515

위원회를 통일된 형태로 이끌 수 있는 중앙의 국가기구"가 필요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모스크바협정에서 제시된 "미래의 한국 임시정부의 원형이 될 것을 의미했다. 김일성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구성에 대한 보고에서 그것은 "통일된 한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기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강력해진 각 지역의 행정조직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말했다. 그 무렵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다가오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할 남한 대표로 조직되고 있었으며, 그 뒤 실제로 미소공위와 협의할 수있는 유일한 단체로 제안된 남조선대표민주의원에 대항하는 기구로 구상되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동일한 필요에 따른 조직이었다. - P516

이 기간의 한 피난민은 "지식인과 부자는 남한으로 갔지만 가난한사람들은 "상황에 만족했다"고 말했다. 노동자와 농민은 대부분 소련을 싫어했지만 "압도적 다수"가 김일성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지도부를 지지했다. 아울러 토지 개혁이 이뤄진 뒤 공장의 혹사를 금지한 노동법이 곧 제정됐다. 그것은 1946년 6월에 공포돼 하루 8시간 노동제와 사회보험제도를실시하고 노동 조건을 개선(또는 어렵거나 위험한 작업에는 추가 수당을 지급하며 성별에 상관없이 같은 노동에는 같은 임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했다. 다음달 남녀평등 관련 법률이 제정됐다. 한국의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획기적인사건이었다. 그것은 축첩 · 매춘 여아 살해 그리고 여성을 착취하는 수많은폐단(남한에서는 계속 남아 있었다)을 금지했다. 이런 개혁의 내용이 즉각 실천되지는 않았지만, 1000년 넘게 노동자와 여성을 괴롭히던 학대는 거의 보고되지 않았다.
대부분 앞서 일본인이 소유했던 주요 공장과 기업은 국유화된 반면 중소기업은 도·군 인민위원회가 관할해 투자와 생산활동을 장려케 했다.이런 방식과 남아 있던 일본인 기술자 및 소련 전문가의 도움으로 경제와 특 - P528

히 주요 산업은 질서를 회복하고 1946년 말 생산 증가를 기록했다. - P529

김일성은 결성 대회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모르더라도 민주주의를 위해 적극 싸우는 사람"은 당원이 될 수 있으며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진보적 자질을 보여줄 수 있다고연설했다. 그 뒤 "대중정당"이라는 생각은 세계혁명에 한국이 기여한 또다른 공헌이라고 선언됐다. 북로당은 세계의 어떤 공산주의 정당보다 인구에서 당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다. 스칼라피노와 이정식이 올바르게강조한 대로 조직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조직한다는 북한의 대중 동원 정책이 낳은 결과였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북로당이 해방 뒤 북한에서 나타난 "조직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북로당의 결성은 강력한 의지를 가진 세 지도자-김일성·김두봉·무정-를 뭉치게 했고 박헌영이 이끈 남조선노동당이 그 직후 남한에서 등장함으로써 남한과 북한의 좌익 세력을 결속시켰다. - P533

북한은 남한으로의 이주를 조장했는데 그럼으로써 남쪽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세 측면이 있다. 첫째, 돌아온 피난민은 남한의 식량 공급과 구호시설에 부담을 줄 것이며 불만을 품고 토지를 몰수당한 하층계급이 될 것이었다. 앞서 본 대로 뿌리가 뽑힌 이런 사람들은 지방에서 여러 소요를 일으켰다. 둘째, 지주들이 남한으로 피난하도록 내버려둠으로써 북한은 불만을 품고 토지를 몰수당한 상층계급을 남한으로 보낼 수있음과 동시에 토지 개혁 이후 적대적이고 터전을 잃은 지주계급을 다뤄야하는 곤란한 문제를 피할 수 있었다. 식민지 시대의 전직 경찰과 관리를 포함해 이런 세력이 북한으로부터 유입된 것은 남한을 양극화시켰다. 그 결과문제를 온건하게 해결할 가능성은 사라졌으며 미국에게는 공산주의와 반동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다. 분명히 북한은 이런 효과를 환영했을 것이다. 적어도 오갈 수 있었던 38도선 덕분에 그들은 급진적 개혁이가져올 계급 사이의 충돌을 늦출 수 있었다. 끝으로 북한은 남한으로 이동하는 대규모 난민 가운데 자신의 공작원을 침투시킬 수 있었고, 이는 미군정 당국과 남한 경찰에 끊임없는 골칫거리가 됐다. - P537

한 세대 안에서 한국 농민은 놀라운 "진보의 물결"이 자신들을 옛 관습에서 밀어내다가 갑자기 그 물결이잦아들면서 이전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을 경험했다. 한국의지주계급은 농민이 변화한 만큼 변화하지 않았으며 옛 관심에서 벗어나 발생하는 탄력성과 적응성을 얻지 못했다. 상업이나 공업으로 전환하지 않은상태에서 농민 혁명과 마주치면서 그들은 해방과 그 뒤 이어진 사건들에 차갑고 비타협적으로 반응함으로써 계급적 화해와 온건한 해결의 희망은 모두 사라졌다. - P551

한국에서 미국과 소련의 핵심 목표는 매우 비슷했다. 자신들에게 계속 우호적인 일련의 지도자와 사회질서를 강화하고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 범위안에서 한국 지도층과 조직의 성향, 그들의 세력에 따라 독립과 자치의 가능성이 결정됐다. 두 강대국은 그 정책에서 뚜렷한 한계를 설정했다. 소련은반동 세력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미국은 혁명을 용인하지 않는다는것이었다. 두 강대국 모두 자신들이 결과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줄거나상대방의 독점적 지배를 막기 위해 한국의 독립과 통일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 P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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