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장

해방 뒤 첫해 한국의 북반부에서는 대부분의 한국인과 여러 서구 관찰자가일제 지배가 끝난 뒤 필연적으로 나타날 결과라고 생각한 것을 달성했다. 해방 뒤 9개월 만에 지주제도가 사라지고 토지는 다시 분배됐으며 주요 산업이 국유화되고 완전히 왜곡되었던 식민지식 공장시스템을 뿌리 뽑았으며 남녀평등을 확립하는 급진적 개혁이 이뤄졌다. 해방 뒤 1년 만에 수십만 명의한국인을 아우른 강력한 대중정당과 초보적인 군대가 조직돼 오랫동안 한국 정치에 없었던 통일성을 부여했다. 1946년 말 북한에서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분단국가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해 1948년 9월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북한 공산주의와 연결된 대부분의 특징도 이 시기에 나타났다. 민족주의의 강조, 지도자의 절대적 역할 중시, 포괄적 통일전선 그리고 민족적 색채가 짙은 한국 공산주의의 특유한 수단이 된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의 이념적혼합이었다. 모두 가차 없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최소한의 유혈만으로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이뤄졌다. 달리 말하면 북한은 일제의 식민 지배가 남겨놓은 영향에서 예상할 수 있는 "일반적" 경로를 따랐다. - P489

많은 한국인이 보기에 소련은 점령 초기 미국이 추구한 것과 완전히 상반된 정책을 따랐다(또는 한국인에게 그러도록 허용했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하다. 의도된 것이든 그저 인민위원회가 편리했건 간에 소련은 한국인에게재량권을 주고 뒤로 물러났다. 조지 매큔은 "불길하지만 확고한 권위를 가진" 지위라고 적절히 표현했다. 앞으로 보듯 소련이 평양의 최고사령부에관심을 두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 그들은 실질적 통치권을 한국인에게 주었다. 미국 정보기관은 1945년 12월 그런 정책이 "제한적 점령"을 나타낸다고 지적하면서 "중앙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6SE PR이처럼 해방 뒤 몇 달 동안 북한에서는, 미국 공식 자료가 마지못해 인정한 대로, "대부분 노동자와 농민 출신으로 구성된 완전히 새로운 지배층이 식민지 시대의 심연에서 등장했다. 식민지 시대의 계급 구조는 완전히역전됐다. 미국의 일상적인 속어로 표현하면 "개자식들이 쫓겨난the bastardswere thrown out" 것이다. 물론 남한의 미국이 보기에는 새로운 개자식이 들어왔다. - P504

북한 지도부는 중국과 소련 혁명을 모두 경험했으며 해방된 한국에서 자발적 농민 봉기가 시작돼 자신들의 눈앞에서 터져나올 것 같은 상황과 마주쳤다. 그 결과 이런 지도부와 그 정책은 중앙과 주변의 요구를 결합하고 스탈린의 상명하달 방식과 마오쩌둥의 대중노선을 혼합한 이념을 구현해야 했다.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스탈린주의의 핵심 구호는 "대중에서 대중으로"라는 마오쩌둥주의의 핵심 구호와 나란히 놓였다. - P505

남한에서 볼 수 있었던 자발적 인민위원회와 노동·농민조합은 북한에서도 필연적으로 나타났으며 헌신적 공산주의 조직자들에게도 상당한문제를 던져준 것으로 생각된다. 김일성이 거느린 공산주의자들은 우선 헌신적 지지자로 구성된 핵심을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한 뒤 그 핵심이 해방된한국의 정치가 만들어놓은 산만한 상황을 지배할 때까지 끝없이 확장하는동심원 형태로 성장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2월 두 가지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두 문제는 서울 인민공화국의 조직이 붕괴돼 북한에서 인민위원회 지도부를구성해야 할 필요가 나타난 것과 남한에서 단독 행정조직이 출현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북한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등장을 인공 지도자들의 실패,
나아가 배신행위와 연결하면서 인공은 "대중적 기반이 없는 한 줌의 사람들이 발표한 선언에 따라 수립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들은 "지방 인민 - P515

위원회를 통일된 형태로 이끌 수 있는 중앙의 국가기구"가 필요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모스크바협정에서 제시된 "미래의 한국 임시정부의 원형이 될 것을 의미했다. 김일성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구성에 대한 보고에서 그것은 "통일된 한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기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강력해진 각 지역의 행정조직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말했다. 그 무렵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다가오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할 남한 대표로 조직되고 있었으며, 그 뒤 실제로 미소공위와 협의할 수있는 유일한 단체로 제안된 남조선대표민주의원에 대항하는 기구로 구상되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동일한 필요에 따른 조직이었다. - P516

이 기간의 한 피난민은 "지식인과 부자는 남한으로 갔지만 가난한사람들은 "상황에 만족했다"고 말했다. 노동자와 농민은 대부분 소련을 싫어했지만 "압도적 다수"가 김일성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지도부를 지지했다. 아울러 토지 개혁이 이뤄진 뒤 공장의 혹사를 금지한 노동법이 곧 제정됐다. 그것은 1946년 6월에 공포돼 하루 8시간 노동제와 사회보험제도를실시하고 노동 조건을 개선(또는 어렵거나 위험한 작업에는 추가 수당을 지급하며 성별에 상관없이 같은 노동에는 같은 임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했다. 다음달 남녀평등 관련 법률이 제정됐다. 한국의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획기적인사건이었다. 그것은 축첩 · 매춘 여아 살해 그리고 여성을 착취하는 수많은폐단(남한에서는 계속 남아 있었다)을 금지했다. 이런 개혁의 내용이 즉각 실천되지는 않았지만, 1000년 넘게 노동자와 여성을 괴롭히던 학대는 거의 보고되지 않았다.
대부분 앞서 일본인이 소유했던 주요 공장과 기업은 국유화된 반면 중소기업은 도·군 인민위원회가 관할해 투자와 생산활동을 장려케 했다.이런 방식과 남아 있던 일본인 기술자 및 소련 전문가의 도움으로 경제와 특 - P528

히 주요 산업은 질서를 회복하고 1946년 말 생산 증가를 기록했다. - P529

김일성은 결성 대회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모르더라도 민주주의를 위해 적극 싸우는 사람"은 당원이 될 수 있으며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진보적 자질을 보여줄 수 있다고연설했다. 그 뒤 "대중정당"이라는 생각은 세계혁명에 한국이 기여한 또다른 공헌이라고 선언됐다. 북로당은 세계의 어떤 공산주의 정당보다 인구에서 당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다. 스칼라피노와 이정식이 올바르게강조한 대로 조직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조직한다는 북한의 대중 동원 정책이 낳은 결과였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북로당이 해방 뒤 북한에서 나타난 "조직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북로당의 결성은 강력한 의지를 가진 세 지도자-김일성·김두봉·무정-를 뭉치게 했고 박헌영이 이끈 남조선노동당이 그 직후 남한에서 등장함으로써 남한과 북한의 좌익 세력을 결속시켰다. - P533

북한은 남한으로의 이주를 조장했는데 그럼으로써 남쪽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세 측면이 있다. 첫째, 돌아온 피난민은 남한의 식량 공급과 구호시설에 부담을 줄 것이며 불만을 품고 토지를 몰수당한 하층계급이 될 것이었다. 앞서 본 대로 뿌리가 뽑힌 이런 사람들은 지방에서 여러 소요를 일으켰다. 둘째, 지주들이 남한으로 피난하도록 내버려둠으로써 북한은 불만을 품고 토지를 몰수당한 상층계급을 남한으로 보낼 수있음과 동시에 토지 개혁 이후 적대적이고 터전을 잃은 지주계급을 다뤄야하는 곤란한 문제를 피할 수 있었다. 식민지 시대의 전직 경찰과 관리를 포함해 이런 세력이 북한으로부터 유입된 것은 남한을 양극화시켰다. 그 결과문제를 온건하게 해결할 가능성은 사라졌으며 미국에게는 공산주의와 반동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다. 분명히 북한은 이런 효과를 환영했을 것이다. 적어도 오갈 수 있었던 38도선 덕분에 그들은 급진적 개혁이가져올 계급 사이의 충돌을 늦출 수 있었다. 끝으로 북한은 남한으로 이동하는 대규모 난민 가운데 자신의 공작원을 침투시킬 수 있었고, 이는 미군정 당국과 남한 경찰에 끊임없는 골칫거리가 됐다. - P537

한 세대 안에서 한국 농민은 놀라운 "진보의 물결"이 자신들을 옛 관습에서 밀어내다가 갑자기 그 물결이잦아들면서 이전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을 경험했다. 한국의지주계급은 농민이 변화한 만큼 변화하지 않았으며 옛 관심에서 벗어나 발생하는 탄력성과 적응성을 얻지 못했다. 상업이나 공업으로 전환하지 않은상태에서 농민 혁명과 마주치면서 그들은 해방과 그 뒤 이어진 사건들에 차갑고 비타협적으로 반응함으로써 계급적 화해와 온건한 해결의 희망은 모두 사라졌다. - P551

한국에서 미국과 소련의 핵심 목표는 매우 비슷했다. 자신들에게 계속 우호적인 일련의 지도자와 사회질서를 강화하고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 범위안에서 한국 지도층과 조직의 성향, 그들의 세력에 따라 독립과 자치의 가능성이 결정됐다. 두 강대국은 그 정책에서 뚜렷한 한계를 설정했다. 소련은반동 세력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미국은 혁명을 용인하지 않는다는것이었다. 두 강대국 모두 자신들이 결과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줄거나상대방의 독점적 지배를 막기 위해 한국의 독립과 통일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 P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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