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언니는 졸업하면 백의의 천사가 되겠대요?"
"뭐?"
홍이 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여학교 나와서 간호부로 들어가면 대우가 참 좋다는 거예요. 보통 소학교만 나와가지고 간호부가 되니까 말예요." 그
"그따위 소리 하지 마."
딱딱한 홍이 음성에 의아해하며 상의는 말했다.
"아버지 왜 그래요? 저는 좋아 뵈던데, 병원에 가면 그 언니들 깨끗하고 거룩해 뵈고, 그 중에는 굉장히 예쁜 사람도 있었어요."
"너도 간호부가 되겠다 그 말이냐?" 모으는 EXER
"그런 거는 아니지만… 그래도 좋긴 좋던데요?" PRS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해."
"선생님도 그러셨어요. 백의의 천사가 되어 전선에 나가서부상병을 돌보는 것도 애국하는 길이라구요."
홍이는 단발머리에 고집 세게 생긴 딸을 가만히 바라본다.
‘천방지축을 모른다. 애국이라니, 나라가 어디 있다구.‘ - P119

"김두수라고, 니는 모릴 기다마는, 공장에는 가끔 올 기다.
우리가 어릴 적에 한 동네서 살았제. 그래서 잘 아는데 그놈이,"
하다 말고,
"아니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는지 니는 모릴 기다."
"왜 보지도 못한 사람 얘길 꺼내는 거예요?"
"잠자코 들어보아라. 그 사람 본업이 가씨나장산 기라. 조선서 데리오는 가시나들을 받아가지고 팔아묵는데 그러이 그쪽사정은 환하게 안다."
"아이들 데리고 별소리를 다 하요."
의도적으로 임이에게 말을 하지 않던 보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머가 우때서? 야아가 백의의 천사라고 해쌓으니께 하는 말이제."
보연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외면을 한다.
"상의 니가 몰라서 그러는 기라. 왜년들이사 그렇지도 않을기다마는 조선 아이들은 명색이 간호부지 군대 따라댕기믄서병정을 받는다 안 카나." - P113

전시하에 개인은 금을 소유할 수 없다, 일본 정부의 그 같은포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정부가 금을 회수하겠다는 것이며 공출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라에 충성하기 위하여 국민은 고시한가격으로 금을 정부에 팔아야만 했다. 금이 탄환(彈丸)이 되는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쇠붙이는 전선으로 전선으로 가게 돼 있는 판국인데, 물론 많은 사람들은 소유한 금을 내놨고 고시가격으로 팔았지만 그것에 불응하여 금을 은닉한 소위 반역자가없지도 않았다. 은닉한 일부의 금이 비밀리에 유통되고 있었던것도 사실이었고, 만주 혹은 중국 본토, 그 방면으로 유출되는것이 이른바 밀수였는데 전문적으로 하는 밀수꾼의 조직도 상 - P128

당수 있었겠지만 만주서 조선으로 다니러 온 사람, 만주에 볼일이 있어 가거나 혹은 이주해가는 사람, 이들 중에도 조선서금을 매입하여 실로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숨겨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일본제국의 경찰이라고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사람들은 이윤을 위해 위험도 무릅쓰게 돼 있었다. 그러나 보연의 경우는 장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훨씬 단순했고 물정모르는 만용이라 할 수도 있겠다. - P129

"그간 세월이 많이 흐르지 않았습니까. 인실 씨 심경에도 변화가 있는 것이 자연스런일 아닐까요? 민족의식이 에고이즘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 말 할 자격이 제게는 없는지 모르지만, 일본은멀잖아 패망하겠지요. 일본인도 사람입니다. 사람으로서 피해자이기도 하구요. 이런 정세하에서 오가타나 저나 앞날은 안개속입니다. 일본인인 오가타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는지 그것도 의문입니다. 일본인을 사랑했다는 죄의식에서 벗어나십시오. 인실 씨는 사람을 사랑한 것뿐입니다. 인실 씨는 오늘까지있어온 용기보다 더 큰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십일 년 전과 내용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찬하는 깨닫는다. 그때 인실은 그 말로 설득되지않았다.
"제가 무지하게 보이지요?" 인실은 역시 혼잣말같이 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 P154

지난가을에는 일본이 무모한 불인(佛) 진주를 감행했고 그보다 앞선 삼월에 왕조명(汪兆銘)은 위정부(僞政府)를 남경에다 세웠으며구라파도 전쟁의 도가니로 화해 있었다. 독일군은 마지노선을뚫었으며 영국은 됭케르크에서 총 철퇴, 드디어 파리는 함락된상태, 각각 세계의 정세는 예측불허였다. 뿐인가, 소만 국경은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언제 어느 곳에서 터질지, 언제 하얼빈이 전화 속으로 들어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연회가 성대하고 여인들 의상이 현란하며 남자들이 폭음하는 것은 내일을모르기 때문일까. 일본인이라고 예외는 아닌 것이다. 절망은오히려 그들 편이었다. - P162

"일본여자를 데리고 살며 나라를 망하게 한 고관대작의 자손으로, 나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지만 오가타상, 내가 조선인이라는 것은 잊지 마시오. 인실 씨가 그리된 데는 내게도 다소 책임이 있었고 또 그와의 언약은 지켜주는 것이, 그는 평범한 길을 가고 있는 여성이 아니오. 생각해보아요. 오가타상이 현실을 비판하고 군국주의를 증오하지만 자기 자신 일본인인 것을부정할 수 있어요?"
"그건 문제가 달라요."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과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야 했던 사람, 어느 쪽의 고통이 컸을까?"
그 말 대답은 못한다.
"몰라 그렇지, 그 여름에 인실 씨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신파같은 건 아니었소. 나는 그 당시 회피할 수 있다면 회피하고 싶었소. 회피할 수도 있었지요. 인실 씨는 매달리며 호소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 P186

나는 너를 잊겠다! 하며 절규했으나 인실은 그에게 진실의 여운을 남기고 갔으며 인실이 낳아준 자신의 아들이 있었다는 것은 어떤 환희를 그에게 안겨주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알지 못할 폭풍이 불고 있었다. 안정을 잃었고 격노한 것도 그것은 사태 변화에 대한, 어쩌면 그것은 역설적인 것이었는지 모른다. - P187

"일본이 망하는 것을 원치 않는 오가타상이나 망하기를 고대하는 조선인, 따지고 보면 같은 차원이오. 일본을 비판하고압박 민족에 깊이 동정하는 오가타상도 조국이 망하는 꼴은못 본다, 그와 같이 어쩌다 친일파로 몰린 사람들 심중에 회한이 없겠소? 종속을 그 누가 원하겠소. 민족에 대한 존엄은 변할 수 없는 보편적 윤리 아니오? 게다가 그것은 짙은 감정이니까."
"우문이었소."
"악질 친일분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분자는 제 나라가 융성하면 애국자가 되고 충성을 하고, 항상 강자 지향의 노예들이지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같은 노예근성, 나같이우유부단의 방관자는 있게 마련, 사실은 조선인들의 경우 그대부분이 친일하게 하는 잔혹성 밑에서 신음하고 있으며 친일하는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실상 아닐까?"
"우리는 평행선, 적입니까? 영원히."
"그렇지는 않지. 그 해답은 당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요?"
"내가요?"
"세계가 하나 될 때, 그게 당신의 주의였고 이상 아니었소?
그리고 또 이웃으로서 우리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을 때 적이될 이유가 없지 않아요? 당신의 반전사상은 그거 아니었소?"
"그건 그래요."
"하면은 우리가 어찌 적이겠소. 친구지." - P198

제문식이 말하며 술을 마셨다.
"작년 초 창씨제도가 시행되면서부터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아시다시피 폐간되었고 이어서 구월에는 반전운동단체라하여 기독교도들을 비질하듯 검거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국민총력연맹(國民總力聯盟)의 조직, 그것은 아까 문식형님이 말씀하신 대로 농촌은 군량의 저장고로, 노동자들은 깡그리 군수품의 부품으로, 그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써 그걸 보다 강화하기 위하여 황국신민(皇國臣民)운동인가 뭔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데 한마디로 만화지요. 처처에서 만화 같은 작태가 벌어지고있어요. 윌리엄 텔의, 압제자 모자 앞에서 절하는 것쯤, 그거약니다. 가장 저질의 신(信)을 우리는 지금 강요당하고 있는 겁니다. 가장 야만적으로 가장 무지몽매한 종족으로 우리는추락하지 않으면 안 되게 돼 있어요. 일본인들은 그런 일에는거의 불감증인 듯하지만 현인(人神)을 믿지 않는 조선인들처지에서 보면 뱃가죽이 터질 지경이지요. 그러나 조선인이 그희극의 관객 아닌 연기자다 하는 점이 참혹한 거지요. 여하튼,
금년에 들어와서 종전에 있었던 사상범 보호관찰령(保護觀察令)이 개정되어 예방구금령(豫防禁令)으로 공포된 것은 한층 목을죄자는 것인데 예상하지 않았던 일은 아니었지만 심리적으로사람들이 급박해진 것은 당연하지요. 어디든 국경을 넘고 싶다는 유혹은 거의 모든 사람이 느끼고 있을 겁니다." - P208

"그들이 살아남는 비밀이 뭔지 아십니까? 힘의 무게를 다는아주 정확한 저울을 가지고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P211

"언제까지 미쳐 날뛸까요? 얼마나 사람이 죽어야 전쟁은 끝나지요? 전쟁 미치광이 땜에 과학이 발달되고 부를 축적하기위하여 과학이 발달되고 없어도 될, 아니 없어야만 할 것 때문에 자원과 인력이 동원되고 생산에 미쳐 날뛰는, 이 끝없는 낭비는 결국 인류가 전멸한 뒤에 끝이 날까요? 그래요. 군국주의는 망해야 해요! 식민지 정책은 끝이 나야 해요. 낭비와 축적의이 병적 상황을 극복하지 않는 이상 사람답게 살 수 없고 생명이 부지될 수도 없을 겁니다. 제사장 말대로 농촌은 거대한 군량의 저장소이며 노동자는 모조리 군수품의 부품,뿐이겠어요?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볼 때, 지주들이 농민으로 전락하는 것처럼 노동자 아닌 사람도 노동자로 공급이 될 것 아니겠어요? 이제는 저항 없어요. 망해야 합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역사의변혁을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망해야 합니다."
오가타의 목소리는 비통했다. - P225

오가타는 아이의 손을꼭 쥐었다. 축복받지 못한 생명을 안고 찬하에게 도움을 청했을 그때 그 모습을 오가타는 히비야공원 어느 모퉁이에서 찾기라도 할 듯,
‘아니다. 이 애는 축복받은 생명이다. 이렇게 무구하고 신비스럽게 자라주지 않았는가. 이 아이는 우리들 사랑의 등불이야. 세상을 밝혀줄 것이다. 인실의 뜨거운 눈물과 나의 비원을받아 태어난 아이, 이 영롱한 생명은 세상을 밝혀줄 것이다.‘ - P237

언제나 그랬지만 가슴이 설렜다. 어디든 떠난다는 것은 새로움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 다른 하나의 자신이 마치 번데기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폐쇄된 자기 자신으로부터 문을 열고나서는, 그것은 신선한 해방감이다. 그러나 새로움이란 낯섦이며 여행은 빈 들판에 홀로 남은 겨울새같이 외로운 것, 어쩌면새로움은 또 하나의 자기 폐쇄를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마주치는 사물과 자신은 전혀 무관한 타인으로서 철저한 또 하나의 소외는 아닐는지. - P242

"사람의 본성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있어요. 이상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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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가차 없이 배척하는 그 속성말예요. 그것도 사람의 본성일까요? 이해가 걸려 있을 경우도물론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소외시켜버리는 그 잔인성 말예요." - P262

"같은 사람이면서 인종이 다르기 때문에 배척하는 것은 일방적인 것만은 아닐 게야. 너 자신 속에도 배타적인 감정은 있을테니까. 인종에서 단위가 작아져도 마찬가지다. 해서 끼리끼리모인다 하지. 쪼개고 쪼개서 하나가 될 때까지. 단위가 크든 작든 다르다는 것은 거리며 이질적인 것 아니겠나?"
"그럼 다르다는 것 때문에 나타나는 적대의식은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건가요?"
"어디 사람뿐이겠어? 생명 있는 모든 것, 곤충이든 식물까지종(種)이 다르면 배척하고 싸워. 아니면 항복하든가. 이기적인생존본능 아니겠어?" 어떻
"그렇담 영원한 투쟁이네요. 영원한 불평등이고."
"누르는 주체만 달라져왔을 뿐 변한 게 뭐 있어. 새삼스럽게그런 얘기는 뭐할려고 해." - P263

일본이 내 강산을 범하지 않았던들. 처음에는 의병이었고형평사운동에서 사회주의 문턱까지… 그리고 송관수는 만주벌에서 삶을 끝마감했고, 권속을 끌고 서희 일행을 따라갔던용의 풍상, 항일의 기운이 팽배해 있던 간도 땅에서 홍이는 감수성이 가장 첨예했던 소년시절을 보냈다. 한복은 아비와 그리고 애국지사를 악마같이 엮어간 형 거의 죄업을 보속하기 위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형의 지위까지 암암리에 이용하면서 조선과 만주를 오가며 전령 노릇을 하고 자금을 운반하고 일하는사람들을 인도하기도 했다.
제국주의 일본의 동물적 탐욕은 그 얼마나 많은 조선 백성들 - P301

의 운명을 바꾸어왔는가. 두메산골, 골짝골짝마다 핏줄같이 시내 흐르는 곳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유민이 되어 떠도는이 그 얼마인가. 만주로 가고 중국으로 가고 연해주로 가고 하와이 일본으로, 피 값도 안 되는 노동력을 팔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건만 도시에는 여전히 거지들이 떼지어 다니고 지게 하나에 목숨을 건 사대육부 멀쩡한 사내들이 정거장마다 부둣가마다 허기진 눈빛으로 짐을 기다리고 있는 풍경, 바로 이들에 소속되었던 사람들이 방 안에 앉은 사내들 부모들이었다.
정면돌파를 했든 측면지원을 했든지 간에 그들의 유대는 동지로서 깊고 강한 것이었다. 그들의 열정은 투명하고 깨끗했다. - P302

담배 연기를 날리며 영광은 생각한다. 이 고장의 성지(聖地)인 이곳이 악랄한 일본으로부터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지 그것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굳게 닫혀진 사당 문을 멀리 바라보며 영광은 바로 이곳 지형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보는 것이다. 통영 시내로가자면 서문안 고개를 넘어서 간창골을 빠져나가야 시내에 나간다. 간창골 일대 서문안 고개에도 집은 옹기종기 들어서 있었다. 특히 서문안 고개는 가난한 초가들로 이루어졌고 그곳에서 충렬사로 이르게 되는 내리막의 골짜기는 대개 가난한 서민들의 주거다. 마치 분지 속에 그 가난한 백성들에게 옹위되듯충렬사는 자리하고 있었다.
‘한 위인이 살다 간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서가 아닐 - P317

까? 시일까? 타인에게 투영된 그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 갖가지 정서로 재생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자체는 보는사람에게는 풍경이며 시다. 위대하다는 그 자체가. ‘ - P318

"산다는 거는………… 참 숨이 막히제?"
한복이는 그런 말할 만했다. 그가 살아남았다는 그 자체가기적이었으니까. 돌밭의 질기고 못생긴 무 꽁댕이 같았던 그,
밟히고 또 밟히는 길가의 잡초같이 자란 한복이, 그에게도 수십성상의 세월이 실려 이제는 제법, 몸집은 작으나마 의젓하고 사려 깊은 현자 같은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숨이 가쁘지요."
한참 만에 홍이 대꾸했다. - P359

세 늙은이는 신명을 내가며,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만든다.
모처럼 그들에게 생활이 살아나 꽃이 되는 것 같았다. 한 곁에밀려나서 마치 방 안에 놓인 장롱과도 같이, 언제부터 그리 되었는지, 눈치볼 며느리 딸도 없고 마치 자유천지에서 벗과 노니는 것처럼, 우물가에서 지저귀던 옛날이 돌아온 것같이 이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부엌 안에서 맴돈다. - P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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