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에토스, 세계관, 그리고 성스러운 상징의 분석

종교적 신앙과 의례는 대립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강화한다. 에토스는 세계관이기술하는 실제의 상황이 의미하는 생활양식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계관은 그러한 생활양식이 진정한 표현이 되는 실제의 상황에 관한 이미지로 제시됨으로써 감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관과 그 안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존재의 일반적 질서 사이의 의미 있는 관계를 제시하는것은 그러한 가치나 질서가 어떻게 생각되든 간에 모든 종교에서 본질적인요소이다.

성스러운 상징은 존재론과 우주론을 미학과 도덕에 연결시킨다. 그것들의 독특한 힘은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사실을 가치에 결합시킨다고 생각되는 능력, 즉 단지 실제의 것에 불과한 포괄적인 규범적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에서 유래하고 있다. - P155

한 민족이 찬양하는 것과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그의 세계관에 묘사되고 그 종교에 상징화되며 나아가 그 생활 전반의 질로 표현된다. 그들의 에토스는 단지 그들이 찬양하는 고상함에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비난하는 비천함에서도 현저히드러난다. 즉 악덕은 미덕과 더불어 양식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가치를 지지하는 종교의 힘은 그러한 가치가 그것의 실현에 대립하는 힘들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구성요소가 되어 있는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한 종교적 상징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것은, 막스 베버를인용하면, "사건들이 그저 존재하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의미를지니며 그 의미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현실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상상력을 나타내고 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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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드 포 - 성매매를 지나온 나의 여정
레이첼 모랜 지음, 안서진 옮김 / 안홍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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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매매된 여성이 갖게 되는 온갖 경험들 중 학대와 폭력 등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 무엇보다 ‘인간성의 상실‘이 가장 큰 아픔이라 여겨진다.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믿음과 경험을 잃고 인격과 연결고리를 놓쳐버리는 것이 상실이다. 이 글은 개인의 내밀한 고백을 넘어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길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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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0-23 14: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쉽지 않은 책 읽느라 고생 많으셨고 완독 축하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10-23 20:4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도 재독하느라 고생많으셨어요. 좋은 책 함께 읽을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책읽는나무 2023-10-24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길잡이!
끄덕끄덕 공감이 됩니다.
완독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 2023-10-24 09:37   좋아요 1 | URL
직접 경험한 이가 써서 절절했지만 저자가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을 책이었을 것 같습니다.

모나리자 2023-10-24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세요 ~일부러 의도하지 않으면 잡기 어려운 책인데, 완독 축하드려요. 거리의화가님. ^^

거리의화가 2023-10-24 17:30   좋아요 1 | URL
이번 달 <여성주의책 함께읽기> 책이었기 때문에 읽을 수 있었어요. 아마도 저 혼자 읽을 생각이었으면 쉽게 손이 가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힘들지만 완독할만한 가치가 넘치는 책이었어요^^

건수하 2023-10-25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완독 축하드려요!!

거리의화가 2023-10-26 11:43   좋아요 1 | URL
수하님도 완독 축하드립니다^^
 

성매매에 유입되면 자기 자신과 감정을 보존하기 불가능해진다‘라는 성매매 국제 연구 결과에 동의한다. 여성들은 성매매에 유입되어 있는 동안 관계를 형성하지만(내가그랬고 다른 여성들 또한 목격했다) 오염된 역동의 작용으로 관계들이 불가피하게 영향을 받는다. 이 역동들은 여성이 성매매를 떠나는 바로 그날 작동하기 멈추지 않으며 그후에도 어느 때고 그 영향은 완전히 멈추지 않는다.
친밀하지 않은 관계의 여성과 남성 간 상호 작용과 관계들 속에서도 이 지속적인 오염이 나타난다. ****************** - P382

성매매가 인생에 야기할 지도 모르는 불화에 대한 예상. 연못에 던지는 자갈들같이 마음과 삶에 퐁당퐁당찾아오는 이런 자각들이 여진이다. 그 여진들이 생기는 이유를 알아도 물 표면에 잔물결이 형성되는 걸 예방하지는않는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때로 관찰하는 것뿐이다. - P392

인간의 비인간화는 노예의 필요조건이었고노예제는 노예가 된 사람을 비인간화하는 원인과 결과가된다. 나는 이 이중적인 역동을 성매매에서 경험했다. - P403

불타는 건물을비유로 들 수 있는데, 불타는 건물을 빠져나올 만큼 운이좋았다면 그 집에 불이 났다고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 옳다.
그래야 그 안에 여전히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희망이 생긴다. - P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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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 30 ] The Aryans of India


Life on the Ganges River

인더스 계곡에 신비한 도시 모헨조다로 유적의 요새가 오래 전 사라지고 난 뒤 새로운 이들이 인도땅에 들어왔다. Aryans(인도유럽어족의 아리아인)다. 그들은 유목민이었으나 인더스강과 갠지스강 사이의 땅에 정착하여 농경과 목축을 한다. 그들은 Shiva라고 하는 신을 믿었다. 

Shiva와 Ganga를 믿는 이들을 Hindus(힌두교도)라 하고 이들의 종교를 Hinduism(힌두교)라 부른다. 힌두교도들은 유일신이 아닌 다신을 숭배했으나 힌두교도들은 갠지스강을 숭배했다. 오늘날 힌두교 순례자들은 갠지스강변에 해질 무렵 불켜진 초를 띄우고 Ganga(river-godess)에게 기도를 한다. 


The Castes of Ancient India

힌두 경전인 Rig Veda에는 힌두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다음과 같이 나온다.

Purusha라고 하는 거인이 살았다. 그는 수천개의 머리와 수천개의 눈과 수천개의 발을 지녔다. 신들은 Purusha의 머리를 하늘로, 그의 눈을 태양으로, 그의 다리를 지구로, 그의 숨을 바람이 되게 하고 몸 바깥에는 네 종류의 사람들을 만든다. Purusha의 입에서 성직자인 브라만(the brahmin), 그의 팔에서 귀족 전사(the noble warriors)를, 그의 무릎에서 traders and farmers, 마지막으로 그의 발에서 the servant를 만든다. 이 네 계급은 castes(카스트)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남은 여생도 자신의 계급에서 살아가야 한다. 카스트에 속하지 않는 이들은 “Untouchables”로 불리며 어떤 기회도 얻을 수 없었다.


Siddartha

싯다르타는 인도에서 왕자로 태어났다. 그는 궁에서 자라 주변에 온통 화려하고 진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세상이 그런 것일 거라고 믿으며 자라왔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바깥 세상이 궁금해진 그는 아버지인 King Suddhodana에게 간청하여 허락을 받아내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 그곳에서 구걸을 하는 노인을 만나 충격을 받는다. 마차를 모는 사람에게 저 사람은 뭐가 문제인가요? 묻고 “그는 아프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 없을 겁니다. 그는 ‘Untouchable’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대답을 들은 후 이어 “죽음이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하니 “죽음은 삶의 끝이죠.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당신조차도요. 싯다르타!”라는 대답을 듣는다. 그는 궁전으로 돌아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모두 가짜이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뒤 좋은 옷을 벗고 허름한 옷을 입고 세상을 향해 나간다. 수년이 지나 거지로 남은 일평생을 살다 죽는다. 싯다르타는 오늘날 부처(Buddha)로 알려져 있고 그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르쳤다. 오늘날 부처를 믿는 이들을 불교도(Buddist)라 하는데 인도 뿐 아니라 전 세계에 퍼져 있다.



[ Ch 31 ] The Mauryan Empire of India


The Empire United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정착하여 많은 도시들을 건설하고 각자 살고 있었는데 이들 중 한 종족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인도를 통일하며 마우리안 왕조가 탄생한다. 마우리안 제국에 Asoka(아소카)라는 황제가 있었는데 그는 정복한 곳들의 사람들의 고난을 보며 “나는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 나는 정직과 자비로 제국의 사람들을 이끌겠어.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고 폭력을 멈출거야.” Asoka는 자신의 생각을 석비에 새겨 제국 전체에 세움으로써 오늘날에도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지침처럼 자비를 실천했다고 한다.


The Jakarta Tales

인도에 전해지는 책 중 Mahayana Tripitaka라는 책에 온갖 종류의 글이 담겨 있는데 이 중 the Jakata Tales라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거기에는 부처가 고대 인도 사람들에게 삶을 살아가는 법(goodness, patience, mercy, honesty, friendship will bring happiness)이 담겨 있다. 특히 산토끼(hare)가 자신의 온몸을 던지려하다가 Sakka 신의 눈에 띄어 여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Ch 32 ] China: Writing and the Qin


Calligraphy in China

한자를 글로 쓸 때 몇 가지 획 쓰기 방법(Horizontal Line, Dot, Vertical Line, Downward Strokes, Sweeping Downward Stroke, Hook)을 이용하면 글자가 만들어진다.

또 글씨를 쓰는 붓은 동물의 털 여러 개를 하나로 모아 만든다. 이 때 글자의 크기 종류에 따라 작은 것은 쥐털로, 중간 것은 토끼털로, 큰 것은 양털이나 늑대털을 이용한다. 

중국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글을 써왔으며 최초의 고인쇄본은 the Diamond Sutra(금강반야바라밀경)이다.  


Warring States

중국은 전국에 여러 명의 군 지도자가 난립하는 형태였다. 최소 6개의 강력한 군 지도자가 있었는데 이 시기를 The Period of the Warring States라고 부른다. 동쪽의 Qin(Chin)이라고 하는 곳에 Qin Zheng이 최초의 중국 황제가 되는데 China는 Qin이라는 단어에서 온 것이다. 그는 강력한 전제왕권에 반하는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았다. 분서갱유는 가장 최악의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The First Emperor and the Great Wall

Qin Zheng은 진시황(Shi Huandi)가 된 뒤로 폭압 정치를 행했다. 북쪽에 있던 이민족들이 변경을 자주 침략하자 성벽을 세울 것을 단행한다. “A wall thousands of miles long! A Great Wall!” 그는 건축가와 설계자들을 소환하여 자신의 계획을 설명한다. “폐하. 그런 길고 거대한 성벽을 만들 만한 돌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방법을 생각해낸다. The builders made a wooden frame, as high as a man’s waist and as wide as a wall. They sat this frame upon the ground and filled it with loose dirt. Then workers stamped and packed the earth until it was only four inches high and as hard as concrete. They lifted the fame up, set it on top of the packed dirt, and filled it again. They could build a dirt wall as hard as stone, four inches at a time!

진시황은 중국의 장정들을 1년에 1달은 성벽 건설에 동원시켰다. 그가 사망했을 때에도 성벽은 완성되지 않았고 수백년이 지날 때까지 뒤이은 왕조의 황제들이 그 작업을 완수해나간다. 마침내 30마일의 길이의 장성이 완성된다. 


The First Emperor’s Grave

30년 전 서안 근처에 살던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땅이 딱딱하다는 것을 느끼고 발견한 곳이 병마용갱이다. 이곳은 근처에 있는 시황제의 무덤을 보호하는 용병들인데 실제 사람 크기인데 모두 다른 얼굴들을 하고 있다. 시황제는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느끼자 거대 지하 도시를 만들어 무덤을 조성할 것을 주문했다. 병마용갱 부근의 토양은 많은 수은을 포함하고 있는데 양초가 타면서 무덤 안의 용병들의 상태가 오랜동안 유지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Ch 33 ] Confucius


China’s Wise Teacher

공자는 중국의 귀족 가문에 태어났다. 그는 학교에 가서 음악과 궁술을 배웠으나 집안은 가난했다. 공자가 살던 시대는 전쟁으로 소란스러운 시대였기 때문에 지도자들에게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권하길 원했으나 지도자들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선생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 공자의 어록은(The Analects of Confucius) 제자들이 기록하여 오늘날에도 전해진다. 

“It is the wiser person who gives rather than tak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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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10-24 0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부지런하신 화가 님.
읽고 기록하기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근데 화가 님이 해내시고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만리장성이든 분서갱유든 진시황의 참된 업적이 아닌 황제의 횡포 업적으로 보여져...참....
그에 비하면 인도의 아소카 왕은 참 훌륭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10-24 09:41   좋아요 1 | URL
ㅎㅎ 매일 한 챕터 읽으면 겨우 이달에 맞춰서 읽을 것 같습니다.
진시황은 욕망이 지나치게 많았던 것도 문제지만 결국 이것이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이게 비단 진시황의 문제일까 생각은 들긴 해요. 어떤 사람도 권좌에 오르면 없던 욕심도 생기는 것 아닌지^^;
 

산책은 도시의 산물이다. 도시라는 공간이 생긴 뒤에 산책자들이 나타난다. 도시의 산책자란 근대라는 박물관의 관람자이자 탐색자라는 뜻을 갖는다. 산책자들은 어떤 도취감에 이끌려 도시 이곳저곳을 떠돈다. “오랫동안 정처없이 거리를 쏘다니는 사람은 어떤 도취감에 휩싸인다.” 그 도취감에 휩싸여 거리의 스펙터클을 감각적으로 흡수해버리는 것이다. 이때 대도시 거리는 그 자체로 방대한 문헌이고, 산책자는 그 문헌을 탐욕스럽게 연구하는 자다. - ⟪이상과 모던뽀이들⟫ P241


얼마 전 한국 근대 문학가와 미술가의 삶을 담아낸 책을 읽으면서 오래 전 읽었던 책과 강연이 떠올랐다. 구체적으로 어떤 강연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그 책을 확인해보니 자그마한 쪽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민음 아카데미’였다. 무려 10년도 더 된 강연이었는데 ‘근대의 탄생과 경성의 작가들’을 다루었다. 

예전에 내가 임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 처음 알게 된 것이었다. 이 때 이상과 김유정, 임화, 그리고 박태원의 삶과 문학을 통해 한국 근대의 풍경이 어떠했을지 상상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이 이전까지는 거시적인 역사에만 관심을 두다가 이런 일상사와 미시사의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1930년대 당시 문단은 카프의 세력이 맹렬했다. 카프 운동의 중심에 있던 임화는 이상과 보성중학 동문으로 시인이자 문학이론가다. 당시 보성중학에는 동기생인 이상 뿐 아니라 선배인 김기림, 김환태 등도 있었는데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로 가세가 기울자 임화는 학교를 중퇴하면서 이들과는 멀어졌다. 그 후 임화는 모더니스트에서 무산자 계급문학의 수장으로, 자유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그 너른 간격을 가벼이 건너뛰며 사상적 선회를 한다. 하지만 자발로 간 북한에서 그는 ‘미제 간첩’이라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사형으로 생을 마쳤다. 


카프의 반대편에 선 모더니즘 단체로 구인회가 있었다. 문학가인 이종명과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인 김유영은 정치색을 띠지 않는 문단 풍토를 만들기 원하여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구락부 형식의 단체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구인회가 태동하게 되었다. 이 때 염상섭은 문단 싸움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모임 추대에 반대하면서 최종적으로 이종명, 김유영, 조용만, 정지용,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이효석, 유치진으로 구성이 되었다. 모임의 시작은 이종명과 김유영이었으나 구인회를 이끄는 것은 이태준이었다. 이태준은 월간 문예지 ‘문장’을 펴내며 조선 문단의 중심 권력으로 확고한 위치에 있었으며 뛰어난 소설가이기도 했다. 


꽤나 알려진 사실인데 이상의 ⌜오감도⌟는 조선중앙일보에 발표되었는데 이 때 이태준이 신문의 학예부장으로 있었다. 빗발치는 독자들의 항의에 꽤나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그의 회고가 남아 있다. 

이상의 ⌜오감도⌟는 처음부터 말썽이었다. 당초에 원고가 공장으로 내려가자, 무선부에서부터 ⌜오감도烏瞰圖⌟라는 것은 ⌜조감도鳥瞰圖⌟의 오자가 아니냐고 물으러 오지를 안나, 자전에 조감도란 말은 있어도 오감도란 말은 없으며, 보지도 듣지도 못한 제목이라고 법석이었다. 간신히 사정을 하다시피 해서 조판을 하여 교정부로 넘어갔는데, 이것도 시라고 하는 거냐? 이것은 신문을 버리는 근본이 되니 싣지 말자고 정식으로 항의가 들어오는가 하면, 학예부에서 응하질 않으니까 결국 편집국장에까지 진정이 들어가는 법석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내부의 장애를 부릅쓰고 실었더니 이 시가 계속되자 이번에는 날마다 몇 장의 공격 투서가 들어와서 난처했던 것이다. ‘미친 놈의 잠꼬대냐’, ‘무슨 개수작이냐’, ‘그게 대체 어쩌자는 시냐’ 따위의 독자 항의문은 곧 산적되었다. - ⟪이상과 모던뽀이들⟫ P237


박태준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조선중앙일보에 1934년 연재되었다. 알다시피 이 신문은 손기정의 일장기를 지운 사건으로 유명하다. 이 때 사장은 여운형이었다. 이태준은 일제강점기 막바지 쓰는 것을 강요받는 현실을 견딜 수 없었고 해방이 될 때까지 일체의 행동을 거부한 채 낙향하여 칩거에 들어간다. 하지만 해방 후 1946년 월북을 하면서 그의 작품을 남한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의 빼어난 소설들을 이후에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구보는 갑자기 걸음을 걷기로 한다. 그렇게 우두커니 다리 곁에 가서 있는 것의 무의미함을 새삼스러이 깨달은 까닭이다. 그는 종료 네거리를 바라보고 걷는다. 구보는 종로 네거리에 아무런 사무도 갖지 않는다. 처음에 그가 아무렇게 내어놓았던 바른발이 공교롭게도 왼편으로 쏠렸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中


구보는 산책을 통해 식민지 근대의 중심지였던 경성을 탐닉한다. 나도 어느 곳을 가든 걷는 편이다. 오늘과 내일의 풍경이 같은 듯 보여도 매일 공기는 다르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때 행복하다. 걸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걷기도 하지만 공상을 하기도 하고 사물을 마주 대하며 생각에 빠지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즐겁다. 


이상은 1933년 종로 다방 ‘제비’를 개업한다. 당시 다방 ‘제비’는 우리가 생각하는 다방이 아니고 온갖 경성의 인사들이 들락날락하는 문화 아지트이자 공동체적 장소였다. 박태원은 ‘제비’를 오가며 이상과 급격히 친해지는데 그의 작품에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신선함을 느꼈기 때문이었으리라. 둘 다 경성 토박이였던데다가 나이까지 비슷했으니 통하는 면이 있었을 것이라 본다.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다녔다는데 방종한 생활을 하기로 유명했다. 박태원은 “이상과 나는, 당시에 있어 서로 겨 묻은 개였고, 동시에 서로 똥 묻은 개였다.” 라고 자폭한 것을 보면 그 실상을 짐작할 만하다. 박태원은 1951년 한국 전쟁 중 월북했고 북한에서 사망했다. 


김기림은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출신으로 구인회의 일원이었다. 그는 이상을 보자마자 천재성을 알아보았던지 진폭적인 신뢰를 보내며 후원을 했다. 이상이 무질서한 생활과 나태와 방종, 질병 등으로 고생을 할 때도 김기림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고. 이상은 글만 잘 쓴 것이 아니고 미적 감각도 뛰어났던 모양이다. 김기림의 시집인  ⌜기상도⌟를 디자인했는데 오늘날 보아도 촌스럽지 않고 깔끔하고 멋스럽다. 김기림은 누구보다도 우리 시에 근대성과 현대성을 접목한 뛰어난 시인이었다. 가령 백화점이라는 근대 공간을 “‘메피스토’의 늙은이”로 보고 그 늙음의 추함을 가리기 위한 “메이크업”을 읽어낸다. 근대 공간의 황홀경에 유인된 군중을 “어족”이라고 보기도 했다. 정작 김기림의 시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것이 없어 향후 읽어보고 싶다. 김기림은 한국 전쟁 중 인민군에 붙잡혀 납북되었는데 이 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정지용도 구인회의 일원이었다. 김기림은 정지용을 가리켜 “우리 시 속에 현대의 호흡과 맥박을 불어넣은 최초의 시인이며 우리말의 각개의 단어가 가지고 있는 무게와 감촉과 광光과 음陰과 형刑과 음音에 대하여 적확한 식별을 가지고 구사하는 시인”이라고 했다.  문학계의 선배 격이었던 만큼 많은 후배 문인들에게 영향을 준 시인었다. 정지용 하면 윤동주가 자동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구본웅과 이상의 우정도 각별했다. 화가 구본웅은 이상의 자화상을 그려주기도 했고 이상이 ‘제비’의 문을 닫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인쇄소에 이상의 일자리를 알선하여 밥벌이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구본웅은 초기에는 거친 질감의 표현주의적 화풍인 야수파적 색채를 벗어나 불교적 색채로 변화한다. 아쉽게도 한국 전쟁 중 자택이 폭격을 맞아 대부분의 작품들이 소실되고 말았다. 그래서 남아 있는 구본웅 작품들은 초기작들인데다 그 수도 극히 적어 아쉬울 따름이다. 


올해 5월에 다녀왔던 전시회(다시보다 한국근현대미술전)에서 구본웅의 그림이 몇 점 있었다. 그 중 1940년대 그렸다는 ‘중앙청이 보이는 풍경’이라는 그림을 소개한다. 

화면 오른편에 하얀 중앙청 건물이 서 있고 그 앞에는 낮은 건물들이 자리한다. 특이하게도 굵은 선으로 윤곽을 분명하게 구획한 한옥들과는 달리 중앙청은 윤곽선이 뚜렷하지 않다. 게다가 한옥들은 다채로운 색깔들로 되어 있어 중앙청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화가의 의도라고 보여지는데 지금은 사라진 중앙청 건물을 둘러싼 풍경을 보며 당시의 풍경을 떠올려보게 된다. 



문장이란 언어의 기록이다. 언어를 문자로 표현한 것이다. 언어, 즉 말을 빼놓고는 글을 쓸 수 없다. 문자가 그림으로 바뀌지 않는 한, 발음할 수 있는 문자인 한, 문장은 언어의 기록임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 ⟪문장작법⟫ 중中


❖ 운동


1층 위의 2층 위의 3층 위의 옥상정원에

올라 남을 봐도 아무것도 없고 북을 봐도 아무것도

없으므로 옥상정원 아래의 3층 아래의 2층 아래의

1층으로 내려왔더니 동에서 뜬 태양이 서로 지고

동에서 떠서 서로 지고 동에서 떠서 서로

지고 동에서 떠서 하늘 한가운데에 와 있으므로

시계를 꺼내어 보니 멈춰는 있으나 시간은

맞음에도 시계는 나보다도 젊지 않은가라고

하기보다는 나는 시계보다도 늙어 있지

않다라고 어찌해도 여겨지는 것은 분명 그러함에 

틀림없으므로 나는 시계를 버리고 말았다.


-1931,8,11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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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0-21 15: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 이상의 일화와 작품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라는 감탄만 듭니다~!!
1930년대 시대가 우울했어도 문학인의 활동은 활발했던것 같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10-23 11:36   좋아요 2 | URL
시대는 우울했지만 그 와중에도 많은 문학인들이 인연을 맺으며 활동했다는 사실을 일화를 통해 들여다보는 일이 즐겁습니다^^
이상은 여러 모로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었던 것 같아요. 본인 스스로는 고독과 우울함을 많이 느꼈다고 하는데 주변에 그리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떨칠 수는 없었나봅니다.

호시우행 2023-10-21 16: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대사에 기록될 문인들의 스토리를 배울 수 있었어요.

거리의화가 2023-10-23 11:36   좋아요 1 | URL
이 당시 문인들과 관련된 이야기 하나 하나가 흥미롭습니다.

희선 2023-10-22 0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이상 시를 다 알기 어렵겠지요 그때 사람들이 꽤 안 좋게 여겼군요 그런 걸 알아보는 사람도 있고... 여러 사람이 북으로 가고, 바로는 그 사람들 글은 읽지도 못했네요 시간이 지나고서야 보게 됐군요 그렇게라도 돼서 다행이기는 합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10-23 11:39   좋아요 1 | URL
이상 시는 지금 읽어도 난해하다 느껴지는 구석이 많습니다. 당시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지요^^
천재 문인들이 북으로 참 많이 넘어가서 안타깝지만 이렇게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됨에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