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은 도시의 산물이다. 도시라는 공간이 생긴 뒤에 산책자들이 나타난다. 도시의 산책자란 근대라는 박물관의 관람자이자 탐색자라는 뜻을 갖는다. 산책자들은 어떤 도취감에 이끌려 도시 이곳저곳을 떠돈다. “오랫동안 정처없이 거리를 쏘다니는 사람은 어떤 도취감에 휩싸인다.” 그 도취감에 휩싸여 거리의 스펙터클을 감각적으로 흡수해버리는 것이다. 이때 대도시 거리는 그 자체로 방대한 문헌이고, 산책자는 그 문헌을 탐욕스럽게 연구하는 자다. - ⟪이상과 모던뽀이들⟫ P241


얼마 전 한국 근대 문학가와 미술가의 삶을 담아낸 책을 읽으면서 오래 전 읽었던 책과 강연이 떠올랐다. 구체적으로 어떤 강연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그 책을 확인해보니 자그마한 쪽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민음 아카데미’였다. 무려 10년도 더 된 강연이었는데 ‘근대의 탄생과 경성의 작가들’을 다루었다. 

예전에 내가 임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 처음 알게 된 것이었다. 이 때 이상과 김유정, 임화, 그리고 박태원의 삶과 문학을 통해 한국 근대의 풍경이 어떠했을지 상상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이 이전까지는 거시적인 역사에만 관심을 두다가 이런 일상사와 미시사의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1930년대 당시 문단은 카프의 세력이 맹렬했다. 카프 운동의 중심에 있던 임화는 이상과 보성중학 동문으로 시인이자 문학이론가다. 당시 보성중학에는 동기생인 이상 뿐 아니라 선배인 김기림, 김환태 등도 있었는데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로 가세가 기울자 임화는 학교를 중퇴하면서 이들과는 멀어졌다. 그 후 임화는 모더니스트에서 무산자 계급문학의 수장으로, 자유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그 너른 간격을 가벼이 건너뛰며 사상적 선회를 한다. 하지만 자발로 간 북한에서 그는 ‘미제 간첩’이라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사형으로 생을 마쳤다. 


카프의 반대편에 선 모더니즘 단체로 구인회가 있었다. 문학가인 이종명과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인 김유영은 정치색을 띠지 않는 문단 풍토를 만들기 원하여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구락부 형식의 단체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구인회가 태동하게 되었다. 이 때 염상섭은 문단 싸움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모임 추대에 반대하면서 최종적으로 이종명, 김유영, 조용만, 정지용,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이효석, 유치진으로 구성이 되었다. 모임의 시작은 이종명과 김유영이었으나 구인회를 이끄는 것은 이태준이었다. 이태준은 월간 문예지 ‘문장’을 펴내며 조선 문단의 중심 권력으로 확고한 위치에 있었으며 뛰어난 소설가이기도 했다. 


꽤나 알려진 사실인데 이상의 ⌜오감도⌟는 조선중앙일보에 발표되었는데 이 때 이태준이 신문의 학예부장으로 있었다. 빗발치는 독자들의 항의에 꽤나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그의 회고가 남아 있다. 

이상의 ⌜오감도⌟는 처음부터 말썽이었다. 당초에 원고가 공장으로 내려가자, 무선부에서부터 ⌜오감도烏瞰圖⌟라는 것은 ⌜조감도鳥瞰圖⌟의 오자가 아니냐고 물으러 오지를 안나, 자전에 조감도란 말은 있어도 오감도란 말은 없으며, 보지도 듣지도 못한 제목이라고 법석이었다. 간신히 사정을 하다시피 해서 조판을 하여 교정부로 넘어갔는데, 이것도 시라고 하는 거냐? 이것은 신문을 버리는 근본이 되니 싣지 말자고 정식으로 항의가 들어오는가 하면, 학예부에서 응하질 않으니까 결국 편집국장에까지 진정이 들어가는 법석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내부의 장애를 부릅쓰고 실었더니 이 시가 계속되자 이번에는 날마다 몇 장의 공격 투서가 들어와서 난처했던 것이다. ‘미친 놈의 잠꼬대냐’, ‘무슨 개수작이냐’, ‘그게 대체 어쩌자는 시냐’ 따위의 독자 항의문은 곧 산적되었다. - ⟪이상과 모던뽀이들⟫ P237


박태준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조선중앙일보에 1934년 연재되었다. 알다시피 이 신문은 손기정의 일장기를 지운 사건으로 유명하다. 이 때 사장은 여운형이었다. 이태준은 일제강점기 막바지 쓰는 것을 강요받는 현실을 견딜 수 없었고 해방이 될 때까지 일체의 행동을 거부한 채 낙향하여 칩거에 들어간다. 하지만 해방 후 1946년 월북을 하면서 그의 작품을 남한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의 빼어난 소설들을 이후에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구보는 갑자기 걸음을 걷기로 한다. 그렇게 우두커니 다리 곁에 가서 있는 것의 무의미함을 새삼스러이 깨달은 까닭이다. 그는 종료 네거리를 바라보고 걷는다. 구보는 종로 네거리에 아무런 사무도 갖지 않는다. 처음에 그가 아무렇게 내어놓았던 바른발이 공교롭게도 왼편으로 쏠렸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中


구보는 산책을 통해 식민지 근대의 중심지였던 경성을 탐닉한다. 나도 어느 곳을 가든 걷는 편이다. 오늘과 내일의 풍경이 같은 듯 보여도 매일 공기는 다르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때 행복하다. 걸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걷기도 하지만 공상을 하기도 하고 사물을 마주 대하며 생각에 빠지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즐겁다. 


이상은 1933년 종로 다방 ‘제비’를 개업한다. 당시 다방 ‘제비’는 우리가 생각하는 다방이 아니고 온갖 경성의 인사들이 들락날락하는 문화 아지트이자 공동체적 장소였다. 박태원은 ‘제비’를 오가며 이상과 급격히 친해지는데 그의 작품에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신선함을 느꼈기 때문이었으리라. 둘 다 경성 토박이였던데다가 나이까지 비슷했으니 통하는 면이 있었을 것이라 본다.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다녔다는데 방종한 생활을 하기로 유명했다. 박태원은 “이상과 나는, 당시에 있어 서로 겨 묻은 개였고, 동시에 서로 똥 묻은 개였다.” 라고 자폭한 것을 보면 그 실상을 짐작할 만하다. 박태원은 1951년 한국 전쟁 중 월북했고 북한에서 사망했다. 


김기림은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출신으로 구인회의 일원이었다. 그는 이상을 보자마자 천재성을 알아보았던지 진폭적인 신뢰를 보내며 후원을 했다. 이상이 무질서한 생활과 나태와 방종, 질병 등으로 고생을 할 때도 김기림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고. 이상은 글만 잘 쓴 것이 아니고 미적 감각도 뛰어났던 모양이다. 김기림의 시집인  ⌜기상도⌟를 디자인했는데 오늘날 보아도 촌스럽지 않고 깔끔하고 멋스럽다. 김기림은 누구보다도 우리 시에 근대성과 현대성을 접목한 뛰어난 시인이었다. 가령 백화점이라는 근대 공간을 “‘메피스토’의 늙은이”로 보고 그 늙음의 추함을 가리기 위한 “메이크업”을 읽어낸다. 근대 공간의 황홀경에 유인된 군중을 “어족”이라고 보기도 했다. 정작 김기림의 시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것이 없어 향후 읽어보고 싶다. 김기림은 한국 전쟁 중 인민군에 붙잡혀 납북되었는데 이 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정지용도 구인회의 일원이었다. 김기림은 정지용을 가리켜 “우리 시 속에 현대의 호흡과 맥박을 불어넣은 최초의 시인이며 우리말의 각개의 단어가 가지고 있는 무게와 감촉과 광光과 음陰과 형刑과 음音에 대하여 적확한 식별을 가지고 구사하는 시인”이라고 했다.  문학계의 선배 격이었던 만큼 많은 후배 문인들에게 영향을 준 시인었다. 정지용 하면 윤동주가 자동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구본웅과 이상의 우정도 각별했다. 화가 구본웅은 이상의 자화상을 그려주기도 했고 이상이 ‘제비’의 문을 닫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인쇄소에 이상의 일자리를 알선하여 밥벌이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구본웅은 초기에는 거친 질감의 표현주의적 화풍인 야수파적 색채를 벗어나 불교적 색채로 변화한다. 아쉽게도 한국 전쟁 중 자택이 폭격을 맞아 대부분의 작품들이 소실되고 말았다. 그래서 남아 있는 구본웅 작품들은 초기작들인데다 그 수도 극히 적어 아쉬울 따름이다. 


올해 5월에 다녀왔던 전시회(다시보다 한국근현대미술전)에서 구본웅의 그림이 몇 점 있었다. 그 중 1940년대 그렸다는 ‘중앙청이 보이는 풍경’이라는 그림을 소개한다. 

화면 오른편에 하얀 중앙청 건물이 서 있고 그 앞에는 낮은 건물들이 자리한다. 특이하게도 굵은 선으로 윤곽을 분명하게 구획한 한옥들과는 달리 중앙청은 윤곽선이 뚜렷하지 않다. 게다가 한옥들은 다채로운 색깔들로 되어 있어 중앙청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화가의 의도라고 보여지는데 지금은 사라진 중앙청 건물을 둘러싼 풍경을 보며 당시의 풍경을 떠올려보게 된다. 



문장이란 언어의 기록이다. 언어를 문자로 표현한 것이다. 언어, 즉 말을 빼놓고는 글을 쓸 수 없다. 문자가 그림으로 바뀌지 않는 한, 발음할 수 있는 문자인 한, 문장은 언어의 기록임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 ⟪문장작법⟫ 중中


❖ 운동


1층 위의 2층 위의 3층 위의 옥상정원에

올라 남을 봐도 아무것도 없고 북을 봐도 아무것도

없으므로 옥상정원 아래의 3층 아래의 2층 아래의

1층으로 내려왔더니 동에서 뜬 태양이 서로 지고

동에서 떠서 서로 지고 동에서 떠서 서로

지고 동에서 떠서 하늘 한가운데에 와 있으므로

시계를 꺼내어 보니 멈춰는 있으나 시간은

맞음에도 시계는 나보다도 젊지 않은가라고

하기보다는 나는 시계보다도 늙어 있지

않다라고 어찌해도 여겨지는 것은 분명 그러함에 

틀림없으므로 나는 시계를 버리고 말았다.


-1931,8,11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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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0-21 15: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 이상의 일화와 작품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라는 감탄만 듭니다~!!
1930년대 시대가 우울했어도 문학인의 활동은 활발했던것 같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10-23 11:36   좋아요 2 | URL
시대는 우울했지만 그 와중에도 많은 문학인들이 인연을 맺으며 활동했다는 사실을 일화를 통해 들여다보는 일이 즐겁습니다^^
이상은 여러 모로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었던 것 같아요. 본인 스스로는 고독과 우울함을 많이 느꼈다고 하는데 주변에 그리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떨칠 수는 없었나봅니다.

호시우행 2023-10-21 16: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대사에 기록될 문인들의 스토리를 배울 수 있었어요.

거리의화가 2023-10-23 11:36   좋아요 1 | URL
이 당시 문인들과 관련된 이야기 하나 하나가 흥미롭습니다.

희선 2023-10-22 0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이상 시를 다 알기 어렵겠지요 그때 사람들이 꽤 안 좋게 여겼군요 그런 걸 알아보는 사람도 있고... 여러 사람이 북으로 가고, 바로는 그 사람들 글은 읽지도 못했네요 시간이 지나고서야 보게 됐군요 그렇게라도 돼서 다행이기는 합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10-23 11:39   좋아요 1 | URL
이상 시는 지금 읽어도 난해하다 느껴지는 구석이 많습니다. 당시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지요^^
천재 문인들이 북으로 참 많이 넘어가서 안타깝지만 이렇게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됨에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