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면서 빠른 시간 내에 정권을 이양하라고 떼를쓰고 있는 골치 아픈 보수 우익의 지도자들이나 소위 ‘추수폭동‘을 주도한좌익이 아닌 중도적이고 민주적인 지도자들로 리더십을 세우고 싶었고, 이를 위한 중재자로서 버치 중위를 선택했다. - P16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여운형은 미국의 대한 정책에 적합한 인물이아니었다. - P24

총독부 관계자들을 인터뷰 최종 보고서에 의하면 "조사는 처음에여운형의 반역과 일본에 대한 협력을 찾는 데 집중" 되었지만, 심문을 하면서증언자들이 여운형의 배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판단했다. 처음에는 "증언자들이 다시 일본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여운형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라고 믿었지만, "이러한 모든 혐의는 상상의 것이었으며 (여운형에 대한) 명예훼손이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 P49

버치는 이승만을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었다. 하지 사령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은 그러한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 P62

이승만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이승만은 미군정과 갈등을 빚고 있었고, 표면적으로는 가까웠지만 실제로는 우익 내에서 김구와 경쟁 관계였으며, 조선공산당과 여운형 등 좌파와 각을 세우고 있었다. 친일파들은 미군정이 이승만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 조금씩 주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또한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이승만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승만은 이런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미국을 방문한 것이었지만 이승만의 귀국을 막으려던 미군정의 시도는 실패했다. - P67

이승만은 워싱턴 방문을 통해서 미국의 대규모대한 원조를 얻어냈으며, 모스크바 삼상 협정의 틀은 그대로 유지하되, 남한에서만 임시조선정부가 먼저 수립되는 것으로 미국의 대한정책이 바뀌었다고 선전했다. 또한 남한만의 임시조선정부가 들어서면 그 수장은 이승만이될 것이라는 소문도 파다하게 퍼졌다. 모두 ‘가짜 뉴스‘였다. - P70

프란체스카가 미국에 있던 이승만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그녀는 비서이면서 정치적 조언자였다. 그러나 단순한 조언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정확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 전신 중에 ‘러치 계획’에 대한 언급이 몇 번 나오고 있다. 러치 장군은 미군정 내에서 버치와는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 계획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승만의 정치적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프란체스카는 모든 계획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P90

지금도 생소한 이름인 강용흘은 자신의 삶을 그린 『초당』이라는 작품으로 1933년 구겐하임상을 받은 문인이었다. 그는 도미 후 보스턴대학(의학)과 하버드 대학(영문학)에서 수학했다.
1946년 강용홀은 미군정청의 출판부장에 임명되었다. 1947~1948년에는 주한미군 제24군단 정치 분석관 겸 자문관을 역임했다. 한국에 대한 전문가가 없는 상태에서 수립된 미군정에게는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들이 필요했고, 강용흘은 그중 한 사람이었다. - P92

미군정이 38선 이남을 영원히 통치하지 않는 이상 일본 제국주의에 적극협조했던 경찰이나 공무원들의 경우 자신들의 보호막이 필요했다. 어쩌면미군정의 여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이 그 보호막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민주당 내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보였던 송진우는 1945년 12월 암살되었다. 그나마 한국민주당 내에 원세훈이나 김약수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 군국주의의 불의한 전쟁에 협력했던 사람들, 즉 전범들에게안전한 우산이 되기는 어려웠다.
강용흘이 이승만과 김구를 똑같은 사람이라고 비판했지만, 김구는 친일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우산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우파의 강력한 지도자였지만, 친일과 전범 경력이 있었던 사람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 P99

1949년 한국민주당은 과거 김구와 같이 일했던 신익희와 손을 잡았고, 정당명도 민주국민당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이승만은 1947년 말의 시점에서 자신을 지지할 수 없다는 한국민주당에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자신의 주장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결코 신뢰하지 않았던 그로서는 한국민주당과 협력할 이유가 없었다. 1948년 3월 17일 문서 (FUN Report」, 버치 문서 Box 5)에 의하면 김성수 역시 선거 이후에 이승만을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 P104

버치는 여러 곳에서 장덕수 암살의 배후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 중 하나는 이전의 암살 사건과 마찬가지로 그 배후에 이승만과 김구가 있다는 것이었다. - P109

이들은 지시하는 사람이 시키면 필요에 따라 김구의 추종자가 되기도 했고, 이승만의 추종자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미군정이 해체되고 38선 이남에서 정부가 수립되면, 자신들의 배후에 있는 사람과 친분이 있는 지도자가 대통령이 될 것이고, 곧 풀려날뿐만 아니라 경제적 보상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P114

김구의 암살은 장덕수 암살 사건 직후에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안두희의 범행은 우연이 아니었고, 개인적 차원의 범죄도 아니었다. 이미 1년 전부터 철저하게준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 P121

버치의 문서군에는 1946년 이후 지방의 상황 변화에 관한 다양한 문건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경찰과 청년단, 그리고 정치조직의 상황에 대한 분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1947년 3월의 조사 문건이 가장 눈에띈다. 여기에서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는 아직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상황에 대한 보고한국의 정당 평가를 위해서는 왜 한국의 정당이 미국과 다른가를 이해해야 한다. (1) 한국인들은 3개 또는 그 이상의 정당들이 인민에 의해 자유롭게구성된 상황을 경험하거나 관찰했던 적이 없으며, 표현의 자유 역시 없었다.
(2) 현재 한국의 정치에는 정치적 책임이 없다. 사람들과 당원들은 지도자들이 그들에게 책임져야 한다고 여기지 않으며, 관리와 지도자들은 그들의 주장이나 행동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 P133

1946년 가을의 추수봉기‘는 지방에서 좌우익 사이의 세력 관계가 역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문서뿐만 아니라 지방의 상황을 조사한 대부분의 문서들은 1947년 이후 우익 세력이 상황을 장악하고 있다는 내용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지금까지 미군정 시기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1946년 가을의 봉기는 미군정의 정책 실패에 항의하는 전 사회적 차원에서의 의사표시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각 지역에서의 좌파 조직이 대부분 노출되었고,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되었다. 물론 서울에서는 이미 그 이전에 위조지폐 사건으로 인해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수배되었으며, 일부 좌파 신문들은 발간이 금지되었다. 박헌영을 포함해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38선 이북으로 도피했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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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1-22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다음 읽을 책으로 줄 서 있는 책입니다. ^^

거리의화가 2022-01-22 1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 재밌습니다^^ 시간가는 줄 몰랐네요
 

어제부터 시작된 백신휴가는 어느덧 끝나가고 있다.


역시 휴일이라 밀린 책들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대변혁 2권을 완독했고

남성됨과 정치도 마키아벨리 챕터까지 끝냈다^^

뭔가 막히고 체한 것이 내려가는 느낌이다.

그렇다 해도 1월의 남은 날동안 읽을 책이 여전하지만 오늘만큼은 자축을!



어제 백신 접종 후 저녁 무렵부터 뼈마디가 쑤시며 아프고 팔 주변이 묵직해지는 증상이 있었다. 

타이레놀을 먹고 잠들었고 오늘은 주사 맞은 팔은 만지면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어제만큼은 아니다. 

비교적 가볍게 지나가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리고 이번주 인문 책들 중 마음에 들었던 책을 꼽아보았다.


1. 바다 인류


대항해 시대로 유명한 저자인 주경철 교수가 바다를 통해 바라본 역사를 그려냈다.

바다는 역사의 중요 무대였기에 인류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바다는 문명과 문명이 맞부딪치는 공간이었고 세계의 변화가 뒤섞이는 공간이었다.

고대 제국, 아시아, 대항해 시기의 유럽과 아메리카, 연결된 지구 세계에서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그 속의 역사를 세밀하고 촘촘하게 그렸다.


2. 연구자의 탄생


인문학과 사회과학 연구자들이 각자의 개인적이고 연구적 경험을 통해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에 대해서 진단한 이야기를 그려냈다. 

이를 통해서 인문사회 연구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문화연구, 사회학, 국문학, 여성학, 인류학, 영문학 등의 전공자, 작가, 평론가 등의 글이 엮인 만큼 다양한 목소리가 담긴 글을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3. 깃발의 세계사


제목 보고 호기심이 들었다.

짐작하듯 깃발에 모여든 이들의 역사를 그려낸 책이다.

성조기부터 십자군의 깃발, 아라비아의 깃발, 분쟁을 낳은 중동의 깃발,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국기,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까지.

지역별로 분류한 것도 같지만 여기에 국가와는 관련 없는 깃발들도 포함되어 있어 호기심을 낳는다.

왜 깃발에 모여들었는지 그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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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1-21 20: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주위에서 보면 1, 2차 때 아무렇지도 않다
3차 때 약간 힘들어 하는 것 같더라구요. 저의 엄니도 그렇고.
저도 2차 때까지 거의 이상 없었는데 3차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맞으라고 문자 오는데 될 수 있으면 늦게 맏ㅈ아보려고요.ㅋ

얄라알라 2022-01-21 20:43   좋아요 3 | URL
저도 주변에서 3차 응급실 보아서요..

이제 막 백신완료자 ˝지위˝를 갖게된지라 3차는 먼 일이지만 벌써 걱정됩니다

거리의화가 2022-01-21 22:14   좋아요 4 | URL
그러게요 저도 진짜 3차 맞긴 싫었는데ㅠㅠ 내일까진 경과봐야겠죠 어차피 길게 갈 것 같으니 늦게 맞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mini74 2022-01-21 20: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바다 인류 랑 깃발의 세계사 장바구니 담아놨어요. 전 3차 맞고 며칠 앓았어요 ㅠㅠ

얄라알라 2022-01-21 20:43   좋아요 2 | URL
mini74님이시라면 누구와도 겹치는 책을 장바구니, 혹은 서가에 두고 계실듯^^
3차 반응이 의외로 호된 분들이 있으시네요. 제 주위에도...지금은 괜찮으신거죠?

거리의화가 2022-01-21 22:16   좋아요 2 | URL
오 미니님하고 통했군요^^ 안 그래도 며칠 안보이시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그러신거였군요ㅠㅠ 이젠 괜찮으신가요? 몸조리 잘하셔요

mini74 2022-01-21 22:17   좋아요 2 | URL
이제 괜찮아요. 북사랑님 화가님 고맙습니다 ~~

책읽는나무 2022-01-21 20: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3차도 통증이 있군요?
주변에서 다들 괜찮다고 해서 그런가?싶었는데 아녔군요?ㅜㅜ
그래도 많이 괜찮아 지셨다니 다행입니다.^^

거리의화가 2022-01-21 22:18   좋아요 4 | URL
네 전 2차보단 더 후유증이 세네요 2차는 하루 정도 지나고 괜찮았는데 이번은 아닌 것 같네요 약간 몸살 증상도 겹치는 것 같습니다. 심한 건 아니구요 타이레놀이 효과가 좋습니다!

그레이스 2022-01-22 00: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플래그 눈에 띔!
저는 그렇게 깨끗하게 재활용을 못해요
항상 뭉쳐서 돌아다니다 쓰레기통으로 ^^

거리의화가 2022-01-22 07:30   좋아요 3 | URL
플래그 원래 잘 이용안했는데 책 좀 더 께끗이 쓰고 싶어서 사용하기 시작했네요^^

scott 2022-01-22 10: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3차 휴우증 가볍게 지나가서 다행 입니다
화가님이 셀렉트 하신 책들 골라 담아가여~
주말 행복 만땅 ^ㅅ^

거리의화가 2022-01-22 13:05   좋아요 2 | URL
네^^ 스콧님 감사해요 행복한 주말 되세요*^^*

바람돌이 2022-01-22 18: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3차 접종 무사히 지나심을 축하드립니다. 주경철씨 새책이랑 깃발의 세계사 흥미롭네요. 일단 담아갑니다. ^^

거리의화가 2022-01-22 18:26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께서 좋아하실 만한 책들 같습니다. 저와 관심사가 비슷하신 것 같아서...ㅎㅎ 여행 잘 다녀오신 것 같아 저까지 기분이 좋아지네요. 남은 주말 행복하게 보내시길!
 

19세기는 통상적 혁명사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19세기 저항은 보편적으로 발생했으나 국가에서 임계점을 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성공한 혁명만 혁명인가? 

현존하는 제도를 소멸시키려는 목표를 지닌 운동이 국가 정치무대에서 위상을 확보하고 현존하는 제도에 맞서는 대항세력이 되거나 최소한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대항력을 유지할 때 혁명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럼 혁명은 반드시 ‘아래에서’ 시작되는가? 

위로부터의 혁명도 있다.

메이지유신은 위장된 이념을 동원해 진행된 과거와의 급진적 단절이 일어나고 그 결과 주변부의 엘리트가 권력의 중심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성공과 실패의 문제는 흔히 지나치게 학술적으로만 다루어진다. 19세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 문제를 동태적으로 파악했다. 그들은 자신이 느낌대로 혁명을 이해했다. 그들은 지원하거나, 환영하거나, 두려워하면서 혁명의 동향을 주시했다. 역사가는 이런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는 연구과정을 통해 이를 현실에서 발생한 운동의 기준으로 적용할 수 있다. 현존하는 제도를 소멸시키려는 목표를 지닌 운동이 국가 정치무대에서 위상을 확보하고 현존하는 제도에 맞서는 대항세력이 되거나 최소한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대항력을 유지할 때 우리는 이것을 혁명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 P1395

혁명의 시대를, 유럽을 뛰어 넘는 혁명적 사건으로 이해하려는 관점은 라이프치히의 연구자들이 제시했다. 프랑스대혁명의 좌파를 연구한 사회학자 발터 마르코프와 그의 제자 만프레드 코속이 라이프치히에 비교혁명사 연구소를 세우고 마르크스와 독창적 견해를 가진 라이프치히에 비교혁명사 연구소를 세우고 마르크스와 독창적 견해를 가진 라이프치히의 역사학자 칼 람프레히트의 사상을 종합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코속이 만들어낸 ‘혁명주기‘란 개념이 활용되면서 상이한 국가와 지역에서 발생한 혁명 사이의 상호작용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비교적 쉽게 세계사의 시대구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P1407

오직 아이티에서만 처음에는 인종차별 금지가, 이어서 노예해방의 강령이 혁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 P1423

아메리카 대륙의 독립혁명은 최소한 두 가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하나는 백성이 시민으로 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낡은 계층사회의 구조가 흔들린 것이었다. - P1431

대서양 연안의 혁명은 전례가 없는 기본적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광범위한 민중의 지속적인 정치화였다. 이런 현상의 후과로서 어떤 혁명이든 발생 후에는 혁명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지역에서 정치는 더 이상 엘리트 정치가 아니었다. 혁명의 유산은 상당 부분이 혁명의 열기가 식은 뒤에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나갔다. - P1434

대서양혁명은 이쪽과 저쪽을 잇는 긴밀한 관계망 속에서 태어났다. 통합은 몇 가지 단계에서 중첩적으로 발생했다. - P1435

혁명은 오직 서적과 추상적 토론을 통해서만 서로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미래의 혁명가들은 현장에서 배웠다. - P1442

19세기 중반 무렵 세계의 몇몇 지역에서는 대규모 집단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 P1445

유럽의 혁명시대는 "전통적인 집단폭력의 형식으로부터 조직적인 이익주장으로" 바뀌어 간 전환점이었다. - P1450

인도와 중국의 봉기는 둘 다 애국주의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두 봉기는 다 같이 유럽의 1848-49년 헝가리 봉기와 가장 유사하다고 할 수있다. 또는 두 봉기를 원시 민족주의 봉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1848-49 혁명과 비교했을 때 인도와 중국의 저항운동은 더 심각한 실패를 경험했다. - P1465

교전 쌍방은 모두가 ‘자유‘를 입에 달고 다녔다. 충돌의 심층적인 원인이 무엇이든 미국내전은 전형적인 유럽혁명과는 달리 입헌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내전은 입헌체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에서 비롯된 혁명 이후 시대의 후속조치이자 충돌이었다. - P1469

멕시코혁명은 매우 짧은 시간 안에 내전으로 발전했다. 혁명이 몇 개의 단계를 거치는 동안 멕시코 인구의 1/8이 목숨을 잃었다. 멕시코혁명은 어떤 면에서는 프랑스식의 ‘대‘혁명이었다. 멕시코 혁명은 광범위한 사회적 기초를 갖고 있었다. 멕시코혁명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광범위한 농민동원의 규모와 적대적인 외부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제시된 혁명 이론이나 이론이 없다는 점이다. - P1476

이란, 오스만제국, 중국의 혁명은 서방 모델의 불완전한 모방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상호 모방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가들에게 상호 학습의 의지가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혁명의 ‘전파‘ 현상은 결정적인 작용을 하지 않았을 뿐 끊임없이 발생했다. - P1480

러시아, 이란, 오스만, 중국 혁명의 발생은 모두 국제 환경과 관련이 있었다. 네 나라의 당시 정권은 한결같이 심각한 군사적 패배 또는 외교적 실패를 겪고 있었다. 혁명가들은 개혁을 통해서, 더 나아가 현존 정치체제의 폐지를 통해서 경제적 빈곤을 탈피하고,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민중의 정치참여를 확대하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또한 혁명가들은 민족적 자신감을 회복하고, 열강과 일부 자본주의 국가의 무리한 요구를 물리치기 위해 강대한 국가를 만들려 했다. 그런데 이것은 러시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구상이었다. 러시아는 그 자신이 호전적인 제국이었다. 러시아에서는 오히려 비용은 많이 들고 효과는 미미한 외교정책이 저항을 촉발했다. - P1494

혁명은 다른 무엇보다도 통치능력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나오는 반응이었다. 반대로 통치능력의 문제는 문화적 가치관의 변화와 사회적 충돌의 강도에 따라 결정됐다. 이 밖에 외부 요인으로서 일반적으로 변경지역과 사회경제적으로 낙후한 나라의 혼란도 일정 정도의 영향을 미쳤다. - P1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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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남성됨과 정치 세계

정치적 인간은 필요를 낳고 질서를 확립하고 영광된 이상을 추구하며 더 넓은 통제 구역을 찾는 방식으로 포르투나, 여성, 평화, 나태 등 이해할 수 없는 정치세계와 외양의 문제에 해당하는 기만, 유혹, 만족에 맞서 투쟁한다.
그는 장애물을 설치하거나 이들을 공격하면서 싸움을 걸고 그것들에 떨어져 소외될수록 그것들을 더 강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힘들이 인간을 유혹하고 괴롭히며 인간을 좌절시키고 위협한다.

정치의 묘책은 자신을 위해서는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확보하고, 행동에 돌입하게 강제하고 싶은 이에게는 시간을 줄여주고, 혼란과 지연을 통해 꺾고 싶은 이에게는 시간을 늘려 주는 것이다. 성공적인 정치 행위자는 정치 조건의 외양적 특성을 강조하거나 훼손하기 위해 정치 공간의 차원과 씨름한다. 인간은 자기 손에 닿는 것 그리고 사물의 피상적인 외양에 반응하기 때문에, 현명한 군주는 자신의 구성원과 적에게 상황을 제시하며 이 지식을 활용한다. 군주는 "사물이 가까운 것이 아닌 멀리서 모습을 드러낼 때 두려움은 훨씬 커진다"라는 마키아벨리의 믿음을 염두에 두고 공간적 차원이 수반하는 왜곡을 활용한다.

마키아벨리가 분석하는 정치 세계는 인간이 만들어 낸 필요가 정치적 사건의 역학을 움직이는 세계이고, 이렇게 확립된 정치 세계에서 성공의 명령은 이 역학을 영구화한다.

마키아벨리의 새로운 정치 기술에는 내용이 전무하며, ‘너 자신이 되라’는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교훈은 ‘네가 맡은 역이 되라’는 것이다. 목적은 천의 얼굴이 있는 인간, 결국 자신이 맡은 역에 녹아들 대가급 연기자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스의 관점으로 볼 때 모든 권력이 부패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목적 조직 행동의 주요 원칙으로서, 정치를 ‘선한 삶’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저주와 같은 권력이 부패한다. 올바르게 구성된 공적 삶의 중심에는 권력이 아니라 정의가 놓여야 한다.

‘질서’는 인간이 지배하지 않으면 인간을 지배해 버릴 자연과 세계, 바로 그것들에 대항하는 요새다. 인간 또는 그의 국가가 통제하지 않는 것은, 그가 기술로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실제로 가진 것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 행위자들이 많이들 이렇게 외견상 평범한 지점을 무시한다고 보았고, 이 지점을 향해 지칠 줄 모르고 회귀한다.

권력은 언제나 무언가에 의존하고, 언제나 누구 또는 무언가를 통해 생기거나 만들어지고, 이런 관계를 피하거나 끊으려고 할 때마다 그 기반이 위협받는다.

마키아벨리의 ‘신군주’는 자신의 청사진이 작동하는 순간 무력하게 공동체에서 퇴장하는 루소의 입법자가 아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신군주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권력을 얻거나 지키거나 행사하기 위해 공국을 손에 넣는다. 이 신군주는 인민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자신의 ‘질료’에 형상을 부여하기 때문에, 인민이 이 형상을 흡수하거나 영구화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군주의 권력이고, 군주는 그에 따라 자기 세계를 형상화한다. 그리고 그가 형상화를 부여하는 질료는 그의 권력 기반을 구성한다. 따라서 이 질료 또는 기반과 그의 관계는 반드시 도구적일 수밖에 없다.

질서는 유동성과 변화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남성적 대응으로, 인간의 근시안 강직성 자족성의 필요 등 본래 위협적이다 싶을 만큼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만든 것들을 강화하는 반응이다.

포르투나는 마키아벨리 정치학 속 행위자가 자신의 상황이나 정치 환경에서 소외된 상태를 구체화한다. 그녀는 문화의 산물이자 이데올로기적으로 의인화된 자연으로 고안되었다.

여성에게 권력이 있어 보이는 것은 그녀가 움직이는 동기와 양식을 남성이 모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에게 맞서 일어날 때, 남성은 그녀가 어디에서 오고 어떤 무기로 자기를 공격하는지 모른다.

정신적 물리적 힘에 있는 권력은 정치에서 인간의 가장 위대한 무기다. 야생에서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이런 권력이 부족할 때 마키아벨리의 인간은 약해지고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정치에서 인간의 취약성은 공격성으로 변하고, 그의 맹목에는 잔인성이 보충된다. 세계에서 인간의 불안한 관계는 그의 비르투에 가려진다. 자연계의 정글에서 살아가기에 부적합하던 마키아벨리의 인간은 마키아벨리의 정치라고 할 만한, 문명 속 정글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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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정치적 특질이 야심이라고 보았다.

야심은 지각과 판단을 왜곡하는 효과로 외관과 실제를 혼동하는 것이다.(실체화)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이해하거나 통제하는 데 실패한 것을 포르투나로 부르며 이는 어떤 외부의 힘이 아닌 정신의 문제거나 정신이 꾸며낸 것이라고 당대 퍼져 있던 신비주의나 미신을 타파하려고 한다.

비르투는 인간이 가진 열정, 빈약성, 환경과의 양립 불가 등에서 비롯된 취약성을 바로잡을 수 있는 희망으로 아레테처럼 적극적인 탁월함인 것에서는 같지만 투쟁을 통한 극복이라는 것에서 차이를 가진다.

마키아벨리는 권력에 대한 인간의 갈망이 무한하고, 지배에 대한 관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통제 욕구는 기정사실이라는 가정에서 정치적 이론화를 시작한다.

인간에게는 특유의 동물적 본성이 있는데, 거기에서 비롯한 충동과 존재 이유가 야심이다. 야심 때문에 인간은 정글의 생명체가 아닌, 정글 속 생명체가 된다. 즉 다른 어떤 동물보다 더 많기도 하고 더 적기도 한 생존 도구를 지닌 생명체, 자신의 존재 수단을 영원히 복잡하게 만들고는 자기 스스로 만든 문제 앞에 경외와 혼란을 느끼며 서 있는 생명체다.

마키아벨리의 저작에 나타나는 비르투의 다양한 적용 사례와 의미에 공통으로 함축된 특성은 극복이고, 이런 점에서 비르투와 아레테가 구별된다. 아레테는 압박과 분투를 수반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이 압박과 분투의 노고가 인간의 본성을 완벽하게 하거나 완성하는 운동이라고 보았다. 이와 달리 비르투는 인간의 타고난 방종, 목적 없는 열정, 나태 또는 수동성 따위에 맞서는 투쟁을 수반한다. 압박과 분투는 비르투와 아레테의 공통 요소다. 다만 비르투는 인간의 목표와 관련한 한계점을 바로잡으려는 세속적 추구고, 아레테는 완벽을 지향하는 투쟁이다.

이탈리아어 비르투가 라틴어 비르투스에서 왔고, 거장virtuoso이 성과를 낸 위대한 남성을 뜻하고 정력virility이 힘세고 강한 남성을 뜻하듯 비르투는 남성적 행위를 함축한다.

자신의 거처와 잘 어울리지 못하고 그 안에 있기를 불편해하는 마키아벨리의 인간은 환경을 징발해 자신의 보호 아래 다시 형태를 잡고는 그 세계에 기획과 목적을 새겨 넣어 자신의 연약함을 해결하려고 한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 때문에 합리성과 통찰력이 제한되어 있을 때, 비르투는 인간의 마음을 욕망 성취를 위한 수단과 기회에 더욱 외곬으로 집중시키고 대담하게 기회를 잡도록 격려한다. 세계에서 자신의 나약함에 압도되지 않으려면 인간은 지적 물리적으로 맹렬해야 하고 결기를 내보이는 한편 어떤 의미에서는 일차원적이어야 한다. 비르투적 의미의 자유는 평화를 적대자나 적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그 대가로 집단의 사회성과 안정성을 희생한다.

비르투는 남성됨의 실용적 상징이다. 이것이 최대로 발휘될 때 남성에게 모든 부드러운 면이, 자신을 무너뜨려 노예로 삼으려는 여신들에 뒤덮이고 압도되고 유혹당할 모든 위험이 제거된다. 비르투를 추구하고 표현하는 데 목표를 제외한 모든 것은 도구나 걸림돌이 된다. 거장의 공간과 시야에 들어온 모든 것은 억눌러야 할 대항력이거나 형상을 부여할 질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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