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면서 빠른 시간 내에 정권을 이양하라고 떼를쓰고 있는 골치 아픈 보수 우익의 지도자들이나 소위 ‘추수폭동‘을 주도한좌익이 아닌 중도적이고 민주적인 지도자들로 리더십을 세우고 싶었고, 이를 위한 중재자로서 버치 중위를 선택했다. - P16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여운형은 미국의 대한 정책에 적합한 인물이아니었다. - P24

총독부 관계자들을 인터뷰 최종 보고서에 의하면 "조사는 처음에여운형의 반역과 일본에 대한 협력을 찾는 데 집중" 되었지만, 심문을 하면서증언자들이 여운형의 배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판단했다. 처음에는 "증언자들이 다시 일본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여운형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라고 믿었지만, "이러한 모든 혐의는 상상의 것이었으며 (여운형에 대한) 명예훼손이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 P49

버치는 이승만을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었다. 하지 사령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은 그러한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 P62

이승만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이승만은 미군정과 갈등을 빚고 있었고, 표면적으로는 가까웠지만 실제로는 우익 내에서 김구와 경쟁 관계였으며, 조선공산당과 여운형 등 좌파와 각을 세우고 있었다. 친일파들은 미군정이 이승만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 조금씩 주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또한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이승만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승만은 이런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미국을 방문한 것이었지만 이승만의 귀국을 막으려던 미군정의 시도는 실패했다. - P67

이승만은 워싱턴 방문을 통해서 미국의 대규모대한 원조를 얻어냈으며, 모스크바 삼상 협정의 틀은 그대로 유지하되, 남한에서만 임시조선정부가 먼저 수립되는 것으로 미국의 대한정책이 바뀌었다고 선전했다. 또한 남한만의 임시조선정부가 들어서면 그 수장은 이승만이될 것이라는 소문도 파다하게 퍼졌다. 모두 ‘가짜 뉴스‘였다. - P70

프란체스카가 미국에 있던 이승만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그녀는 비서이면서 정치적 조언자였다. 그러나 단순한 조언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정확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 전신 중에 ‘러치 계획’에 대한 언급이 몇 번 나오고 있다. 러치 장군은 미군정 내에서 버치와는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 계획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승만의 정치적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프란체스카는 모든 계획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P90

지금도 생소한 이름인 강용흘은 자신의 삶을 그린 『초당』이라는 작품으로 1933년 구겐하임상을 받은 문인이었다. 그는 도미 후 보스턴대학(의학)과 하버드 대학(영문학)에서 수학했다.
1946년 강용홀은 미군정청의 출판부장에 임명되었다. 1947~1948년에는 주한미군 제24군단 정치 분석관 겸 자문관을 역임했다. 한국에 대한 전문가가 없는 상태에서 수립된 미군정에게는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들이 필요했고, 강용흘은 그중 한 사람이었다. - P92

미군정이 38선 이남을 영원히 통치하지 않는 이상 일본 제국주의에 적극협조했던 경찰이나 공무원들의 경우 자신들의 보호막이 필요했다. 어쩌면미군정의 여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이 그 보호막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민주당 내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보였던 송진우는 1945년 12월 암살되었다. 그나마 한국민주당 내에 원세훈이나 김약수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 군국주의의 불의한 전쟁에 협력했던 사람들, 즉 전범들에게안전한 우산이 되기는 어려웠다.
강용흘이 이승만과 김구를 똑같은 사람이라고 비판했지만, 김구는 친일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우산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우파의 강력한 지도자였지만, 친일과 전범 경력이 있었던 사람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 P99

1949년 한국민주당은 과거 김구와 같이 일했던 신익희와 손을 잡았고, 정당명도 민주국민당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이승만은 1947년 말의 시점에서 자신을 지지할 수 없다는 한국민주당에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자신의 주장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결코 신뢰하지 않았던 그로서는 한국민주당과 협력할 이유가 없었다. 1948년 3월 17일 문서 (FUN Report」, 버치 문서 Box 5)에 의하면 김성수 역시 선거 이후에 이승만을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 P104

버치는 여러 곳에서 장덕수 암살의 배후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 중 하나는 이전의 암살 사건과 마찬가지로 그 배후에 이승만과 김구가 있다는 것이었다. - P109

이들은 지시하는 사람이 시키면 필요에 따라 김구의 추종자가 되기도 했고, 이승만의 추종자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미군정이 해체되고 38선 이남에서 정부가 수립되면, 자신들의 배후에 있는 사람과 친분이 있는 지도자가 대통령이 될 것이고, 곧 풀려날뿐만 아니라 경제적 보상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P114

김구의 암살은 장덕수 암살 사건 직후에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안두희의 범행은 우연이 아니었고, 개인적 차원의 범죄도 아니었다. 이미 1년 전부터 철저하게준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 P121

버치의 문서군에는 1946년 이후 지방의 상황 변화에 관한 다양한 문건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경찰과 청년단, 그리고 정치조직의 상황에 대한 분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1947년 3월의 조사 문건이 가장 눈에띈다. 여기에서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는 아직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상황에 대한 보고한국의 정당 평가를 위해서는 왜 한국의 정당이 미국과 다른가를 이해해야 한다. (1) 한국인들은 3개 또는 그 이상의 정당들이 인민에 의해 자유롭게구성된 상황을 경험하거나 관찰했던 적이 없으며, 표현의 자유 역시 없었다.
(2) 현재 한국의 정치에는 정치적 책임이 없다. 사람들과 당원들은 지도자들이 그들에게 책임져야 한다고 여기지 않으며, 관리와 지도자들은 그들의 주장이나 행동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 P133

1946년 가을의 추수봉기‘는 지방에서 좌우익 사이의 세력 관계가 역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문서뿐만 아니라 지방의 상황을 조사한 대부분의 문서들은 1947년 이후 우익 세력이 상황을 장악하고 있다는 내용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지금까지 미군정 시기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1946년 가을의 봉기는 미군정의 정책 실패에 항의하는 전 사회적 차원에서의 의사표시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각 지역에서의 좌파 조직이 대부분 노출되었고,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되었다. 물론 서울에서는 이미 그 이전에 위조지폐 사건으로 인해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수배되었으며, 일부 좌파 신문들은 발간이 금지되었다. 박헌영을 포함해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38선 이북으로 도피했다. - P13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2-01-22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다음 읽을 책으로 줄 서 있는 책입니다. ^^

거리의화가 2022-01-22 1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 재밌습니다^^ 시간가는 줄 몰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