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는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정치적 특질이 야심이라고 보았다.

야심은 지각과 판단을 왜곡하는 효과로 외관과 실제를 혼동하는 것이다.(실체화)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이해하거나 통제하는 데 실패한 것을 포르투나로 부르며 이는 어떤 외부의 힘이 아닌 정신의 문제거나 정신이 꾸며낸 것이라고 당대 퍼져 있던 신비주의나 미신을 타파하려고 한다.

비르투는 인간이 가진 열정, 빈약성, 환경과의 양립 불가 등에서 비롯된 취약성을 바로잡을 수 있는 희망으로 아레테처럼 적극적인 탁월함인 것에서는 같지만 투쟁을 통한 극복이라는 것에서 차이를 가진다.

마키아벨리는 권력에 대한 인간의 갈망이 무한하고, 지배에 대한 관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통제 욕구는 기정사실이라는 가정에서 정치적 이론화를 시작한다.

인간에게는 특유의 동물적 본성이 있는데, 거기에서 비롯한 충동과 존재 이유가 야심이다. 야심 때문에 인간은 정글의 생명체가 아닌, 정글 속 생명체가 된다. 즉 다른 어떤 동물보다 더 많기도 하고 더 적기도 한 생존 도구를 지닌 생명체, 자신의 존재 수단을 영원히 복잡하게 만들고는 자기 스스로 만든 문제 앞에 경외와 혼란을 느끼며 서 있는 생명체다.

마키아벨리의 저작에 나타나는 비르투의 다양한 적용 사례와 의미에 공통으로 함축된 특성은 극복이고, 이런 점에서 비르투와 아레테가 구별된다. 아레테는 압박과 분투를 수반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이 압박과 분투의 노고가 인간의 본성을 완벽하게 하거나 완성하는 운동이라고 보았다. 이와 달리 비르투는 인간의 타고난 방종, 목적 없는 열정, 나태 또는 수동성 따위에 맞서는 투쟁을 수반한다. 압박과 분투는 비르투와 아레테의 공통 요소다. 다만 비르투는 인간의 목표와 관련한 한계점을 바로잡으려는 세속적 추구고, 아레테는 완벽을 지향하는 투쟁이다.

이탈리아어 비르투가 라틴어 비르투스에서 왔고, 거장virtuoso이 성과를 낸 위대한 남성을 뜻하고 정력virility이 힘세고 강한 남성을 뜻하듯 비르투는 남성적 행위를 함축한다.

자신의 거처와 잘 어울리지 못하고 그 안에 있기를 불편해하는 마키아벨리의 인간은 환경을 징발해 자신의 보호 아래 다시 형태를 잡고는 그 세계에 기획과 목적을 새겨 넣어 자신의 연약함을 해결하려고 한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 때문에 합리성과 통찰력이 제한되어 있을 때, 비르투는 인간의 마음을 욕망 성취를 위한 수단과 기회에 더욱 외곬으로 집중시키고 대담하게 기회를 잡도록 격려한다. 세계에서 자신의 나약함에 압도되지 않으려면 인간은 지적 물리적으로 맹렬해야 하고 결기를 내보이는 한편 어떤 의미에서는 일차원적이어야 한다. 비르투적 의미의 자유는 평화를 적대자나 적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그 대가로 집단의 사회성과 안정성을 희생한다.

비르투는 남성됨의 실용적 상징이다. 이것이 최대로 발휘될 때 남성에게 모든 부드러운 면이, 자신을 무너뜨려 노예로 삼으려는 여신들에 뒤덮이고 압도되고 유혹당할 모든 위험이 제거된다. 비르투를 추구하고 표현하는 데 목표를 제외한 모든 것은 도구나 걸림돌이 된다. 거장의 공간과 시야에 들어온 모든 것은 억눌러야 할 대항력이거나 형상을 부여할 질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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