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는 통상적 혁명사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19세기 저항은 보편적으로 발생했으나 국가에서 임계점을 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성공한 혁명만 혁명인가? 

현존하는 제도를 소멸시키려는 목표를 지닌 운동이 국가 정치무대에서 위상을 확보하고 현존하는 제도에 맞서는 대항세력이 되거나 최소한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대항력을 유지할 때 혁명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럼 혁명은 반드시 ‘아래에서’ 시작되는가? 

위로부터의 혁명도 있다.

메이지유신은 위장된 이념을 동원해 진행된 과거와의 급진적 단절이 일어나고 그 결과 주변부의 엘리트가 권력의 중심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성공과 실패의 문제는 흔히 지나치게 학술적으로만 다루어진다. 19세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 문제를 동태적으로 파악했다. 그들은 자신이 느낌대로 혁명을 이해했다. 그들은 지원하거나, 환영하거나, 두려워하면서 혁명의 동향을 주시했다. 역사가는 이런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는 연구과정을 통해 이를 현실에서 발생한 운동의 기준으로 적용할 수 있다. 현존하는 제도를 소멸시키려는 목표를 지닌 운동이 국가 정치무대에서 위상을 확보하고 현존하는 제도에 맞서는 대항세력이 되거나 최소한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대항력을 유지할 때 우리는 이것을 혁명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 P1395

혁명의 시대를, 유럽을 뛰어 넘는 혁명적 사건으로 이해하려는 관점은 라이프치히의 연구자들이 제시했다. 프랑스대혁명의 좌파를 연구한 사회학자 발터 마르코프와 그의 제자 만프레드 코속이 라이프치히에 비교혁명사 연구소를 세우고 마르크스와 독창적 견해를 가진 라이프치히에 비교혁명사 연구소를 세우고 마르크스와 독창적 견해를 가진 라이프치히의 역사학자 칼 람프레히트의 사상을 종합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코속이 만들어낸 ‘혁명주기‘란 개념이 활용되면서 상이한 국가와 지역에서 발생한 혁명 사이의 상호작용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비교적 쉽게 세계사의 시대구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P1407

오직 아이티에서만 처음에는 인종차별 금지가, 이어서 노예해방의 강령이 혁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 P1423

아메리카 대륙의 독립혁명은 최소한 두 가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하나는 백성이 시민으로 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낡은 계층사회의 구조가 흔들린 것이었다. - P1431

대서양 연안의 혁명은 전례가 없는 기본적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광범위한 민중의 지속적인 정치화였다. 이런 현상의 후과로서 어떤 혁명이든 발생 후에는 혁명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지역에서 정치는 더 이상 엘리트 정치가 아니었다. 혁명의 유산은 상당 부분이 혁명의 열기가 식은 뒤에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나갔다. - P1434

대서양혁명은 이쪽과 저쪽을 잇는 긴밀한 관계망 속에서 태어났다. 통합은 몇 가지 단계에서 중첩적으로 발생했다. - P1435

혁명은 오직 서적과 추상적 토론을 통해서만 서로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미래의 혁명가들은 현장에서 배웠다. - P1442

19세기 중반 무렵 세계의 몇몇 지역에서는 대규모 집단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 P1445

유럽의 혁명시대는 "전통적인 집단폭력의 형식으로부터 조직적인 이익주장으로" 바뀌어 간 전환점이었다. - P1450

인도와 중국의 봉기는 둘 다 애국주의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두 봉기는 다 같이 유럽의 1848-49년 헝가리 봉기와 가장 유사하다고 할 수있다. 또는 두 봉기를 원시 민족주의 봉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1848-49 혁명과 비교했을 때 인도와 중국의 저항운동은 더 심각한 실패를 경험했다. - P1465

교전 쌍방은 모두가 ‘자유‘를 입에 달고 다녔다. 충돌의 심층적인 원인이 무엇이든 미국내전은 전형적인 유럽혁명과는 달리 입헌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내전은 입헌체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에서 비롯된 혁명 이후 시대의 후속조치이자 충돌이었다. - P1469

멕시코혁명은 매우 짧은 시간 안에 내전으로 발전했다. 혁명이 몇 개의 단계를 거치는 동안 멕시코 인구의 1/8이 목숨을 잃었다. 멕시코혁명은 어떤 면에서는 프랑스식의 ‘대‘혁명이었다. 멕시코 혁명은 광범위한 사회적 기초를 갖고 있었다. 멕시코혁명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광범위한 농민동원의 규모와 적대적인 외부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제시된 혁명 이론이나 이론이 없다는 점이다. - P1476

이란, 오스만제국, 중국의 혁명은 서방 모델의 불완전한 모방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상호 모방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가들에게 상호 학습의 의지가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혁명의 ‘전파‘ 현상은 결정적인 작용을 하지 않았을 뿐 끊임없이 발생했다. - P1480

러시아, 이란, 오스만, 중국 혁명의 발생은 모두 국제 환경과 관련이 있었다. 네 나라의 당시 정권은 한결같이 심각한 군사적 패배 또는 외교적 실패를 겪고 있었다. 혁명가들은 개혁을 통해서, 더 나아가 현존 정치체제의 폐지를 통해서 경제적 빈곤을 탈피하고,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민중의 정치참여를 확대하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또한 혁명가들은 민족적 자신감을 회복하고, 열강과 일부 자본주의 국가의 무리한 요구를 물리치기 위해 강대한 국가를 만들려 했다. 그런데 이것은 러시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구상이었다. 러시아는 그 자신이 호전적인 제국이었다. 러시아에서는 오히려 비용은 많이 들고 효과는 미미한 외교정책이 저항을 촉발했다. - P1494

혁명은 다른 무엇보다도 통치능력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나오는 반응이었다. 반대로 통치능력의 문제는 문화적 가치관의 변화와 사회적 충돌의 강도에 따라 결정됐다. 이 밖에 외부 요인으로서 일반적으로 변경지역과 사회경제적으로 낙후한 나라의 혼란도 일정 정도의 영향을 미쳤다. - P1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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