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곤의 중국한시기행 : 장강·황하 편 김성곤의 중국한시기행 1
김성곤 지음 / 김영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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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를 종종 읽는다. 직접 여행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간접 경험도 제법 유익하기 때문이다. 다만 몇 년마다 개정되어 나오는 여행 가이드는 한 번 보기에는 좋지만 그 이후 다시 보면 재미도 없고 옛 정보를 보게 되는 거라 더 이상 손이 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여행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엮은 여행 에세이는 좋은 선택이 된다.

이 책은 발간 당시 사서 앞 부분만 조금 읽고 끝을 맺지 못했었다. 여행기이기는 하지만 중국의 역사에 관련된 인물과 사건이 많이 나오는데 당시만 해도 사전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잘 읽히지가 않았다. 이제는 읽을 만하겠다 싶었는데 마침 2권도 얼마 전 나왔기 때문에 적절한 독서 타이밍이었다.


중국에는 역사적으로 많은 시인이 있고 또 그만큼 한시가 많다. 1권은 장강과 황하 길을 따른 풍광을 마주하며 역사를 이야기하고 장소에 걸맞는 한시를 소개해준다. 한시는 묵독보다는 소리내어 읽으면서 읊으면 더 그 느낌이 살아난다. 직접 그 풍경을 마주하지 않아도 그 장소를 상상하며 한시를 읊으면 더 그 흥취에 빠질 수 있는 것 같다. 책을 읽고 유*브에 관련 영상을 확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장강 여행에 앞서 중국의 시인 '이백', '두보', '소동파'의 연고지를 찾아간 것은 독자로서도 반가웠다. 이백의 고향 강유江油, 소동파의 고향 미산眉山, 두보가 약 5년 가까이 머물러 살았다는 성도成都 초당草堂, 이들 모두 사천성 경내에 있다. 이백은 25세가 될 때까지 강유시 청련진靑蓮鎭에 있는 집에서 살았으나 벼슬길을 찾아 나선 뒤 6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향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못했다고 한다(고향을 내내 그리워했다고). 성도에는 두보초당杜甫草堂이 있는데 안녹산의 난을 피해 들어와 집을 짓고 가족과 함께 살았던 곳이다(이 때만큼은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는지 여유로운 정취를 담은 시들이 나왔다). 미산은 소동파를 비롯하여 그의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삼소三蘇)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당나라와 송나라에서 가장 글을 잘 쓴 8사람인 '당송팔대가'에 삼부자가 모두 들어가 있으니 중국 문학의 대표 家이라 할 만하다.

약 6,300킬로미터의 길이로 중국에서 가장 긴 강인 장강은 청장고원의 탕구라산에서 발원하여 티베트, 운남, 사천, 중경, 호북, 호남, 강서, 안휘, 강소, 상해를 거쳐 동중국해로 흘러간다. 사천성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온 민강의 탁한 물과 청해성과 운남성을 굽이굽이 돌아 흘러온 금사강의 맑은 물이 서로 만나 비로소 장강이라는 이름을 얻고, 동쪽으로 수천 리 길을 흘러가는 것이다.

장강 여행 중 인상적이었던 두 곳만 꼽아본다면 도원과 황강의 동파적벽이다.

도원은 도연명(위진남북조 시인)이 쓴 <도화원기桃花源記>라는 글에 나오는 무릉의 복사꽃 물결이 흘러내려온 근원지라는 이상향의 세계이다. 글을 읽은 사람들이 무릉군에 속한 여러 지역을 찾다가 이 글에서 묘사하는 지형과 비슷한 곳을 찾아냈는데 그곳이 호남성 상덕시常德市에 있는 도원桃源이라는 곳이었다.

어부가 심히 기이하게 여겨 다시 앞으로 나아가 복숭아나무숲 끝까지 가고자 했다. 숲은 물이 흘러나오는 수원지에서 끝나고 그 위로 산 하나가 솟아 있었다. 그 산에 작은 동굴이 있는데 희미하게 빛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어부는 배를 버려두고 입구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극히 좁아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어부가 다시 수십 보를 더 가니 환하게 트이고 밝아졌다. 토지는 평평하고 넓으며 집들은 가지런하고 기름진 밭과 아름다운 연못과 뽕나무 대나무 등속이 있었다. 밭길이 사방으로 통해 있고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가운데 왕래하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복장이 다른 세상 사람과 같았다.
사람들이 어부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그 들어온 경유를 묻고는 그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술을 차려 내고 닭을 잡고 밥을 지었다.

동파적벽은 황강시黃岡市에 있는데 소동파가 남긴 최고의 작품 <적벽부>가 탄생한 곳이다. 황주는 소동파가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다가 옥에 갇혀 고초를 겪고 하루아침에 태수의 신분에서 미관말직으로 좌천되어 간 유배지다. 이 곳에서 소동파는 뛰어난 자연 풍광에서 쇠약해진 심신을 명상을 하며 보냈다.

임술년 가을 7월 16일 밤
소식이 객과 더불어 배를 띄워 적벽 아래에서 노닐었더라.
맑은 바람이 천천히 불어 물결이 일지 않는지라
술을 들어 객에 권하며 명월의 시를 노래하였더라.
이윽고 달이 동산 위로 떠올라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를 배회하니
흰 이슬이 강에 자욱하게 내려 물빛이 하늘에 이어졌더라.
일엽편주를 배가 가는 대로 내버려두었더니
아득히 넓은 망경창파를 건너가는구나.
넓고 넓구나, 허공을 날아올라 바람을 타고 가는 듯
어느 곳에 멈출지 알 수가 없구나.
가볍게 나부끼는구나, 속세를 버리고 홀로 우뚝 서서
날개를 달고 선계에 오른 듯하구나.

<적벽부>는 <전적벽부>와 <후적벽부> 두 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대목은 <전적벽부>의 첫 단락이다. <전적벽부> 후반에는 청풍과 명월에 대한 생각이 그려져 있다.

천지 사이의 모든 사물은 각기 주인이 있는 법
내 것이 아니라면 털끝만 한 것이라도 사양하겠노라.
오직 강 위에 불어가는 맑은 바람과
산 사이에 뜨는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아름다운 음악이 되고
눈으로 보면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네.
취하여도 금하는 이가 없고
쓰고 써도 다함이 없는 것이니
바로 조물주가 주신 끝없는 보배가 아닌가.


황하는 청장고원에서 발원해서 아홉 개의 성 청해, 사천, 감숙, 영하, 내몽고, 섬서, 산서, 하남, 산동까지 5,464킬로미터를 흘러 발해만으로 흘러드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다. 중국인에게 황하는 어머니의 강으로 불린다. 황하 중하류 지역의 비옥한 땅에서 중국 문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황하는 산지 위주의 상류, 황토고원 위주의 중류, 평원과 구릉 위주의 하류로 구분되는데, 중류의 황토고원 지대를 지나면서 대량의 황토를 함유하여 누런색의 탁한 강물이 된다. 

황하 여행에서 인상적이었던 곳을 꼽아 본다면 호구폭포壺口瀑布, 화산 동봉 하기정下棋亭이다.

호구폭포는 황하의 제일경으로 불리는 곳으로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폭포이며 황색 폭포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폭포는 마치 강물이 거대한 병의 좁은 주둥이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해서 병 주둥이란 뜻으로 '호구'라 붙인 것이다. 좁고 깊은 협곡으로 앞을 다투어 쏟아져 들어가는 물줄기들이 저마다 내지르는 함성으로 귀가 먹먹할 지경이라고. 황하를 묘사한 시구로 유명한 것은 이백의 <장진주> 첫 구절이다.

그대 보지 못했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내달리듯 흘러 바다에 이르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화산의 '화華'는 꽃이란 뜻으로 '꽃 화花'와 통하여 꽃같이 아름다운 산이란 말이다. 화산은 오악 중에서 서악으로 유명한데 오악은 수도를 중심으로 오방을 따져서 명명한 것이다. 중국인들은 화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화산은 황하와 함께 중화민족을 잉태한 성지로 여기기 때문이다. 화산은 동봉, 서봉, 남봉, 북봉, 중앙의 중봉 이렇게 다섯 주요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북봉과 서봉에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하기정은 동봉 최고의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다. 정상에는 돌로 된 작은 정자가 있고 돌판으로 만든 장기판이 조성되어 있다. 도사들이 이곳에서 장기, 바둑 등 여러 놀이를 하며 즐겼다고 한다. 그런 경치에서 바둑이나 장기를 두다니 신선 놀음이 따로 없었을 것 같다. 문제는 그곳으로 가는 길이 절벽을 타고 내려가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늘만이 위에 있을 뿐
어떤 산도 나란한 곳이 없구나
고개 드니 붉은 해 가깝고
고개 돌리니 흰 구름이 낮구나

위 시는 송나라 명재상이었던 구준이 이곳에 올라 지은 <영화산咏華山>이다. 화산을 설명하기에 이만한 시가 있을까 싶다.

사실 화산 이외에도 숭산, 태산 등이 있지만 그럼에도 역시 화산은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기에 주저 없이 엄지손을 들게 된다. 다만 직접 체험을 불가할 것 같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곳을 어찌 올라가겠는가. 사진으로 보는 것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중국의 지리를 따라 역사를 만나고 문학을 만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2부도 바로 이어서 읽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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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7-28 0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사진에 있는 돌로 만든 정자에 사람이 갈 수 있을까요 정자는 사람이 만들었을 텐데... 저거 만들 때 사고는 나지 않았을지... 장강과 황하를 즐겁게 만나신 듯하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28 09:42   좋아요 1 | URL
저 정자 관리를 하려면 어쨌든 사람이 올라가지 않을까요. 근데 사진으로만 보는데도 너무 후달려요ㅠㅠ 화산 구조물들 만들면서 사고 났을 듯 합니다. 예전에 대만 타이루거 협곡에 갔을 때도 인부들이 목숨을 많이 잃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장강, 황하 중국을 대표하는 두 강줄기니 이야깃거리가 역시 넘쳐나더라구요. 즐거웠습니다^^
 
성의 변증법 - 페미니스트 혁명을 위하여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지음, 김민예숙.유숙열 옮김 / 꾸리에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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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은 한계가 뚜렷했다. 계급과 위계(권력)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기원은 설명하였는지 모르지만 가부장제에 따른 성의 불평등까지 주목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가족 구조 안에서 아이는 돌봄의 대상이 되고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밥과 빨래를 해야 하는(가사 도우미를 쓴다면 그 여성이 존재하는 가정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등의 문제) 그래서 사회주의 혁명은 애초부터 실패할 운명을 지닌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파이어스톤이 나아간 곳은 성적 해방의 길이다. 기존의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했던 권리 동등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성적 계급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세계를 뜯어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생식조절에 대한 점유, 인공생식에 대한 주장은 현재로서도 놀라워 보이는데 당시로서는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 같다. 

자연스럽게 성의 불평등은 인종 불평등의 주장으로 이어진다. 파이어스톤은 인종차별주의가 권력의 분배에 따른 불평등에서 기인했다고 이야기한다. 성별에 따른 계급이 존재하듯 인종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종차별주의는 성차별주의가 확장된 것이다.


앞선 성적 해방을 제외하고 특히 인상적이었던 챕터는 '아동기를 없애자'의 4장과 6장의 '사랑', 7장의 '로맨스 문화'였다. 


'아동기를 없애자'는 주장은 제목만 봤을 때는 와 닿지 않았었다. 페미니즘과 아동기를 없애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동기라는 명칭이 근대의 산물이라고 한다. 중세까지만 해도 그런 구분 자체가 없었다고. 이렇게 근대에 들어서 생긴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 등의 구분은 억압을 만들어내는 기제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적 나도 모르게 의기소침했던 적이 많았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이 시기엔 뭘 해야 하고 이 시기엔 뭘 해야 한다는 식으로 강요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나. 심지어 이것이 계급과 맞물리니 피곤해진다. 사교육은 부모의 경제력과 연결되고 아이들은 또 그것에 맞춰 힘겹게 살아가야 한다(거기에 끼고 싶어도 낄 수 없는 아이들은 불평등한 세상과 목도한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 제도는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유지하는 핵심 산물이다. 


여성은 남성이 원하는 모델로 정형화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공감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이어트에 집착하고 화장으로 얼굴을 덧칠하며 그도 안되면 성형까지 가는 것이 아닐까.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해야 하는가. 나는 이것이 자기 만족이라고 주장하는 여성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 그런가요?" 남성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니까 신경을 쓰는 게 아닌가. 나이가 들고 운동을 안 하니 옆구리에 살이 삐져 나오고 뱃살이 울룩불룩해지는 것을 나도 모르게 신경을 쓰게 된다. "살 좀 빼라!"는 소리가 주변에서 들리는 것 같고 맨 얼굴로 나가는 게 자신이 없어진다. 하지만 결국 누구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는데도 이런 구속을 하고 있는 나를 보면 한심해진다. 이전에 나오미 울프의 책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부분이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과 구속에서 우리는 더욱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마르크스/엥겔스 관련 책과 스노우의 <두 문화>를 읽어보자 생각했지만 역시나 그러지는 못하고 밑줄만 많이 긋고 내 생각을 책에 간단히 적는 것으로 이번에도 대신하는 것 같다. 

페미니즘 책은 읽어도 여전히 나의 언어로 정리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진다. 아무튼 파이어스톤의 핵심 저서를 초독이지만 읽어냈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변증법적이고 유물론적인 분석 방법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그들의 사회주의 선두주자들을 능가했다. - P15

엥겔스는 때때로 역사적 변증법의 성적 하부구조 sexual substratum 어렴풋이 인식했으나 섹슈얼리티를 오직 경제적 여과기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경제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면서 어떤 것이든 그 자체로 평가할 수 없었다. 엥겔스는 본래의 노동분업은 자녀양육의 목적을 위하여 남녀 간에 존재했으며, 가족 안에서 남편은 소유자이며 아내는 생산수단이고 자녀는 노동이라는 것, 인간 종족의 생식 reproduction은 생산수단과 구별되는 중요한 경제체계라고 보았다. - P17

학교(전문화된 기술만을 위한)는 나이와 상관없이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배움을 전했다. 도제제도는 어른에게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열려 있었다. 14세기 이후, 부르주아지와 경험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이 상황은 서서히 진전하기 시작했다. 아동기라는 개념이 현대 가족의 부속물로 발달된 것이다. 아이들과 아동기를 묘사하는 용어들이 만들어졌고(예를 들어 불어로 ‘아기 lebebé‘), 그리고 특별히 아이들을 지칭하는 다른 용어들이 만들어졌다. [children에 ‘성질‘, ‘상태‘, ‘성격‘을 나타내는 접미사 -ness을 붙인] childreness’는 17세기 내내 유행어가 되었다.(그 후로 그런 용어는 예술과 생활방식으로 확장되었다. - P117

아이들은 깨어있는매 순간 억압당한다. 아동기는 지옥이다. 그 결과는 불안한 사람, 따라서 공격적-방어적이고, 흔히 우리가 아이라고 부르는 몹시 불쾌한 작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경제적, 성적 그리고 일반적인 심리적 억압에 의해 그들은 부끄러워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악의적인 정체를 스스로 드러낸다. 이러한 불쾌한 특성들은 결국 아이들을 나머지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을 강화한다. 그래서 그들의 양육, 특히 인격 형성의 가장 어려운 단계에서의 양육은 기꺼이 여성에게 양도되는데, 여성들은같은 이유에서 그러한 인격적 특성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 그러므로 (과거에 아동이었고 여전히 억압받는 아동 여성인)혁명은 페미니스트 혁명가에게 달려 있다. 우리는 페미니스트 혁명을 위한 어떤 기획에도 아동 억압을 포함시켜야만 한다. - P151

초기 시민권 운동은 너무 오랫동안 진실을 은폐해 왔다. 기존사회에 적응되고 속박되어 ‘검둥이 문제 Negro Problem‘에 관해 아주 조심스럽게 낮은 목소리로 말해왔다. 즉, 흑인들은 ‘유색인종이고 그들은 백(비유색)인들이 원하는 것과 똑같은 것만을 원한다는 것이었다.("우리도 사람이야.") 그 결과 백인들은 명백한 육체적·문화적·심리학적 차이점들을 가리기 위하여 친절하게도 그들의 시각을 걸러냈다. ‘검둥이nigger‘와 같은 단어들이 사라졌다. - P154

‘해방된‘ 여성들은 남성들이 따르고 모방할만한 ‘훌륭한 사내들‘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남성의 성적 패턴을 모방함으로써(여기저기에 추파를 던지고, 이상을 추구하고, 육체적 매력을 강조하는 등), 해방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포기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쁜 것에 빠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비롯된 것도 아닌 질병을 스스로 주입했다.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멋‘이 천박하고 무의미하다는 것, 그 뒤에서 그들의 감정이 메말라 가고 있다는 것, 그들이 나이 들고 퇴폐적이 되어 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P209

여성은 이미지일 뿐만 아니라 성적 매력의 이미지이다. 여성에 대한 정형화는 확장된다. 그리고 에로티시즘은 이상성욕erotomania이 된다. 극한까지 자극되어 역사상 견줄 데 없는 광적인 것에 이르렀다. - P223

이 고도로 효과적인 선동 체계의 내적 모순 중 하나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여성이 겪는 정형화 과정을 노출시킨다는것이다. 그 생각은 여성들에게 그들의 여성적 역할에 더 익숙하게 하려는 것이었지만, TV를 켠 남성 역시 최신형의 복부 보정, 가짜 속눈썹, 그리고 바닥 광택제("그녀는 합니까. 하지 않습니까?")를 접하게 된다. 이러한 교차하는 성적 유희와 폭로는 어떤 남성이라도 여성을 혐오하도록 만드는 데 충분하다. 그가 이미 혐오하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 P224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주의 혁명은 똑같은 이유로 실패해왔거나 앞으로도 실패할것이다. 현재의 사회주의하에서는 어떤 최초의 해방이라도 항상 억압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그 이유는 가족 구조가 심리적·경제적·정치적 억압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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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7-24 18: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동기를 없애자‘ 부분은 저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그런 환경이라서 모짜르트가 나올 수 있었겠구나 싶고
요즘 유,초등 아이들은 나이 별로 구별해서 놀게 한다는 친구의 말도 떠올랐고요.
저도 혼자서는 완독할 수 없었을거예요.ㅎㅎ 화가님 완독 수고하셨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7-25 09:01   좋아요 2 | URL
학교라는 제도 자체가 저 어렸을 때도 문제가 많다는 의식이 있었는데 요즘 돌아가는 세태를 보면 더 심해진 듯 합니다. 제도라는 것이 받는 사람에게 효과적이어도 끌고 갈까 말까 할텐데 그닥 그런 것 같지도 않아서 의미도 없어 보여요. 부모와 아이들만 죽어나는 시스템인 것 같습니다.
미미님은 재독이시라서 더 의미있는 시간이셨을듯요^^ 감사합니다.

희선 2023-07-25 0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외모에 마음을 많이 쓰는 것 같아요 거기에서도 여성이 더하겠지요 자기 만족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사람 눈을 하나도 마음 쓰지 않는 건 아닐 것 같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25 09:03   좋아요 1 | URL
누구를 위한 외모 지키기인지 모르겠어요^^;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운동과 적절한 식이 요법이 더 중요하겠죠.

다락방 2023-07-25 06: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느라 고생 많으셨고 완독 축하합니다. 저도 아동기를 없애자 는 제목만보고 당황했었어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파이어스톤은 여성 해방에 진심이었구나 싶어욬 정말 해결하고자해서 급진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거리의화가 2023-07-25 09:05   좋아요 1 | URL
네. 정작 파이어스톤 본인 해방은 이루지 못한 것 같아서 안타깝더군요. 초독이라 얻어간 것이 별로 없는 듯하지만 함께 읽기가 아니었다면 역시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책읽는나무 2023-07-25 10: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초독이라...😳
리뷰를 읽으며 흐름을 대충 잡고 열심히 읽겠습니다.
늘 모범생 화가 님!🤞🏾

거리의화가 2023-07-25 11:00   좋아요 2 | URL
7월도 얼마 안 남아서 지난 주말 남은 분량 다 읽었네요. 늘 읽고 나면 제가 얻은 게 부족한 듯하여 찜찜합니다만 거르거나 포기하지 않고 읽어내는 것에 자축합니다. 앞으로도 모범생 컨셉으로 쭉 가지 않을까 싶네요!^^ 나무님도 함께 해주셔서 늘 든든합니다^^

건수하 2023-07-26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댓글을 뒤늦게 답니다. 길게 후기 써주셔서 다시 한 번 정리하는 느낌으로 읽었습니다 (제 후기 너무 짧네요). 파이어스톤이 워낙 이상적인 사회를 그렸으니 좌절도 더 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15명 내외로 구성했다는 단체가 일종의 ‘가구‘였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그 단체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도 궁금하더군요. Airless Spaces도 번역되면 좋겠는데.. 언젠가는 번역되겠지요? ^^ 더운 날 읽고 쓰느라 고생하셨어요. 남은 여름 건강하게 보내세요!

거리의화가 2023-07-26 14:13   좋아요 1 | URL
저는 페미니즘 책 리뷰 쓸 때가 가장 어렵고 힘드네요. 리뷰 쓸까 말까 몇 번을 고민한답니다ㅜㅜ
파이어스톤의 주장은 지금 봐도 큰 이상향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많은 여성들의 노력으로 조금씩은 개선이 되고 있지만 그 이상향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그래도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것이 놀라운 지점이겠죠!(더군다나 그 어린 나이에ㅠㅠ) 독서하기에는 오히려 덥고 추울 때가 더 좋은 듯 싶습니다. 남은 여름 수하님도 건강하게 보내세요^^
 
하버드 중국사 당 - 열린 세계 제국 하버드 중국사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지음, 김한신 옮김 / 너머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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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중국인은 당唐 왕조를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화 제국의 절정기로 인식하고 있다. (...) 중국인이 전통적으로 찬양하는 군사적 정복과 뛰어난 시문의 등장은 당 왕조의 전반기에 이루어졌다. 당 조정은 8세기 중반에 격변을 불러온 반란으로부터 회복하지 못하였고, 수십 년이 지나기도 전에 이미 중국의 정치가와 문인들은 지나가 버린 왕조의 전성기를 언급하면서 자신들은 그 지나간 영광의 그늘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치와 예술에서의 초기 업적에 대한 찬양은 후대 왕조들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당 왕실이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 5세기와 6세기에 중국 북부를 지배하고 있었던 모든 변방의 '오랑캐'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이었다. - P17~18

당은 중국 역사 사상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찬란한 시기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는 현종 초기, 안녹산의 난이 발생하기 전 시기로 국한지어야 한다. 그 이후에는 당 초기만큼의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당 후기 이후 북부 지역에는 돌궐을 비롯하여 티베트 등 강한 이민족의 힘이 당을 억눌렀는데 이는 당 후기까지 내부의 반란 세력과 결합하면서 당을 괴롭혔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당의 전기와 후기가 어떻게 달랐는가.

당대 초기 중국 북부 지역에서는 균전제가 행해졌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국가가 소유한 토지를 경작 가능한 가구들에게 주기적으로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토지를 지급받는 모든 가구에 대하여 동일하게 부가되는 세금 체계가 소유한 토지에 따라 연결되었다. 군사 체계로는 전방에 이민족 유목민 부대를, 변경에는 직업군인들을 배치하고 수도에는 정예군을 배치하는 구조였다. 수도와 다른 주요 도시들은 벽으로 구분하여 거주 구역을 두고 교역은 특정 시장에서만 열도록 제한을 두었다. 사회는 소수의 최상위 대가문들이 독점하였다. 문학적으로는 장식적이고 인위적인 스타일의 작문이 강조되었다.
이것이 당 후기가 되면 국가는 부병제를 포기하고 직업군인(모병제)로 전환된다. 도시 내 교역에서는 공간적 제약이 사라지고 도시 생활은 상업 시설과 주거 시설의 구분이 사라졌다. 또 정부가 황하 유역 대부분의 지역을 지킬 수 없게 되면서 양자강 유역이 경제 중심지이자 국가 재정 수입상 가장 중요한 지역이 된다. 남부의 항구를 통해 해상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기존의 한국, 일본 같은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을 넘어서서 동남아시아, 인도, 페르시아 해협의 해안 지역들과도 교류가 이루어졌다. 문학적으로는 개인의 사생활이나 인간의 희로애락을 다룬 장르의 운문들이 등장하고 남녀 사이의 관계나 내면을 탐구하는 소설도 나타난다.

당 왕조가 멸망할 즈음에는 그 모든 것이 완전히 변하였다. (...) 전통적으로 중심지였던 북서부 지역은 장기간의 경제적 · 생태적 쇠퇴가 시작되어 오늘날과 같은 빈곤하고 반 사막인 후배지後背地로 전락하게 된다. 중원 평야는 인구학적으로나 경제학적으로 지배적인 위치뿐 아니라 중국 문화의 전형으로서의 광채를 상실하였다. 북동부(오늘날의 하북성과 산동성)는 거의 이민족화되어 경계 지역이 되었고, 그중 몇몇은 이후 몇 세기 동안 중화 지역과 다시 결합하지 못하였다. (...) 양자강 하류 지역과 그 남부 지역은 풍부한 강수량과 풍요로운 식생 그리고 편리한 수상 운송으로 인하여 중국의 인구학적 그리고 경제적 중심지로서 점차 황하 유역을 대체하고 있었다. - P29~30

인상적이었거나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위주로 이야기를 좀 더 풀어보겠다.

지역 간 거래의 성장과 더불어 제국 전체를 포괄하는 금융거래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당 말과 송대 사이의 시기는 지폐, 약속어음 그리고 다른 형태의 종이로 된 신용거래에서 혁명적 변화가 발생하였고, 이는 현금이라고 알려진 많은 양의 무거운 동전 꾸러미들을 대체하였다(P239). 교역이 늘어 기존의 동전들을 가지고 다니기 어려워지면서 화폐와 어음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화폐 시스템의 기본이 되는 지폐가 이 때 등장했다는 게 놀랍다. 군부대의 병사들이 고향에서 곡식으로 구입한 영수증으로 부대에서 음식을 살 수 있었다는데 오늘날로 말하면 구내 식당의 '식권' 같은 개념이다. 상인들이 도성에서 정부로부터 권리를 구입하면 이것을 지방 금고에 가져가서 동일한 액수의 현금을 인출할 수 있도록 하였다('날아가는 현금'). 이는 비단 오늘날의 은행과 다를 바가 없다. 다양한 종류의 종이로 된 신용 증권도 이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종이돈이 장례식에 사용되게 된 것도 이 때부터다.

중국인의 문화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차 마시는 문화가 아닐까. 차가 제국 전체에서 보편화된 음료로 발전한 것이 당대에 와서라고 한다. 차 마시는 행위는 다양한 문화적 활동과 연관되어 이루어졌다. 북부 지역에서 차 음료의 확산은 많은 이유로 불교 사찰에서의 차의 사용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는데 승려들이 오후에 고체로 된 음식을 섭취할 수 없어 액체의 음료에 의지해야 했기 때문이란다. 이후 차 음료는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대접의 수단으로 확산되었고 조정에서는 의식에 사용되는 등 다양한 부분에 전파되었다.

안녹산의 난 발발과 티베트에 의한 북서부 지역의 점령은 아랍 세력이 중앙아시아로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침공의 성공은 18세기에 만주족이 점령할 때까지 중국 왕조들이 돈황을 경계로 그 서쪽 지역에 대해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건은 불교 세계의 한 부분이자 중화 문명의 영향이 미치는 부분으로서의 중앙아시아를 영원히 상실하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P319). 당 초기 서쪽으로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던 당나라는 안녹산의 반란으로 내부의 위기, 서북쪽의 티베트의 공격으로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상실한다. 이후 중앙아시아는 아랍 세력의 지배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대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국내에 들어와 있었는데 이들은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였다. 기본적으로 사채업, 그 이외에도 주점은 소그디아 인 또는 토카라 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운영하였고, 주민들에게 제공되는 예능과 매춘에서는 비중국적 취향이 매우 보편적이었다. 중앙아시아 출신의 여성이 시중을 들거나 예능인인 외국인 소유의 주점과 선술집은 당대 시나 예술의 일반적인 주제였다. 중앙아시아 음악은 도시 전체에서 큰 유행이었고 수도에서부터 모든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8세기가 되자 중국의 대중음악은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국가들의 음악과 거의 구분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P337~338). 당이 참으로 국제적인 도시였음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이 때 중앙아시아의 음악이 중국 내 유행을 했고 거의 주류 음악처럼 되었다는 것도 신기했다. 심지어 현종과 양귀비의 애창곡도 중앙아시아 노래의 번안곡이었다고 한다.

당대의 여성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시기라는 이미지가 있다. 아무래도 무측천, 그녀의 딸인 태평공주와 위황후가 반 세기 이상의 기간을 지배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 멸망 이후 중국 북부 지역을 차지한 유목민들이 중국에 가져온 것으로 유목 사회는 기본적으로 남녀평등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흥미롭다(물론 당에 비해서 남녀평등하다는 것이었을 것이지만). 6세기 인물인 안지추는 당시 여성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북부 지역의 여성들을 법률적 사안을 직접 처리하고 정치적으로 힘이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남자 친족을 위해서 정부 청사에 들어가 탄원과 고소를 할 수 있었다. 7세기 중반 이후 당대 황후들의 권력은 여성들이 다양한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북방의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강력한 황후들의 존재 뿐 아니라 당대는 공주들의 정치 참여가 두드러졌다(P357~358). 

수나라 때 전래된 불교는 당나라 때 와서 중국식화된다. 그 전까지 불교는 외래 종교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당대에 와서는 생사관과 의례 체계의 기저를 이루는 불교 사상의 많은 체제들이 중국의 종교(민간신앙) 속으로 융합되었다. 서구에서 연옥이 있듯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망한 친족을 구제할 수 있었던 완전히 새로운 도구가 등장한다. 이 새로운 연옥은 시왕경에서 가장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사망한 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10곳의 연속된 법정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각의 법정은 당대의 재판장을 모델로 묘사된 것으로서 각 법정을 지배하는 왕들(십왕)은 개인의 인생의 기록들을 조사하는 재판관의 역할을 하였고, 만일 필요하다면 죄의 완전한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서 고문을 할 수도 있었다. 법정을 떠난 이후에, 그 사망한 자들은 다음 생에서 환생할 상태가 결정되는데, 선행을 베푼 자들은 보다 나은 상태로 환생하고 악행을 행한 자들은 더 나쁜 상태로 환생한다(P381).

시를 새로운 무대와 사회계급으로 옮기고 복고의 정치-윤리적 담론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당대에 시인들은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개척할 수 있었다. 시를 짓는 것은 사교적 세련미의 차원에서 극히 중요한 문제로 격상되었다. 시인은 유럽의 낭만주의에서 찬양하였던 기인과 '천재' 사이에 존재하는 독특한 인물이 되었다. 시는 지식인들의 소명이 되었고 시인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완벽함을 추구하였다. 특정 작가들은 시를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직업'으로 묘사하였고 시인에게는 자신들의 작품에 대한 '소유권'이 보장되었다(P514). 그러니까 당나라 때 오면 시인이 지식인을 넘어 직업인으로서 대우를 받는다는 이야기다. 당시(唐詩)가 하나의 장르가 된 것처럼 시는 당대는 물론이고 이후 지식인들이 갖춰야 할 덕목 같은 것이 되었다. 게다가 시가 개인적 소회를 푸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했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두보나 백거이 등은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시들을 많이 발표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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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7-25 0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나라는 시인이 일이었다니... 그러니 두보나 백거이 시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겠습니다 그 뒤에도 시인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겠습니다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기도 하고, 그런 게 죽 이어졌다면 좋았을 텐데 싶기도 하네요 고려시대나 조선 초기에는 여성과 남성을 비슷하게 생각했다고 하는데...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25 08:58   좋아요 1 | URL
그 전까지는 시인이라는 직업이 생소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위진남북조 시기 도연명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가 본격적인 장르가 되고 시인들이 여럿 탄생하면서(그만큼 시상이 떠오를 일이 많았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흘러왔던 것 같습니다.
당나라 여성의 삶이 서술된 것만으로도 힘이 제법 있었구나 싶더군요. 송나라, 명나라 오면서 문치주의로 인해 그 힘이 약화된 것이 아쉬워요.
 
콜드브루 파우치 브라질 산토스 NY2 디카페인 - 40ml*5ea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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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브루를 잘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브라질 원두를 좋아해서 확인차 샀는데 역시 고소해서 좋았다. 파우치 형태라 들고 다니면서 먹기에도 편하고 콜드브루니까 아주 더운 날 아이스로 마시면 좋다. 먹어보니 역시 우유랑 찰떡궁합인데 저지방우유 말고 생우유 적힌 양보다 적게 해서 마시면 더욱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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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7-23 13: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지방/무지방우유 넣은 라떼는 라떼가 아니다!! 그 밍밍함 용서못해....

거리의화가 2023-07-24 08:50   좋아요 2 | URL
보통 디카페인은 오후 늦게나 저녁에 먹으니까 저지방 우유를 넣어봤는데 역시 그냥 우유만 못하죠. 역시 라떼는 고소해야!^^

scott 2023-07-24 1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디카페 좋습니다
자칭 커피 중독자인 저
쌀자루보다 원두 자루를 더 소중히 여기는
제가 인정 ^^

거리의화가 2023-07-24 13:11   좋아요 1 | URL
디카페인 보통은 원두로 시켰었거든요. 제가 아이스를 잘 안 먹다보니까 콜드브루는 좋아하지 않는데(그 특유의 향 때문에) 우유랑 먹으니까 좋네요. 저도 커피 중독자라 줄어드는 원두량이 어마어마합니다!
 
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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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은 1955년부터 시작되어 1975년까지 장장 20 년간 이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한국은 전쟁 기간 중 1964년 한국군 파병을 시작하여 1973년 철수할 때까지 총 4차례에 걸쳐 32만 5천여명을 파병했고 이 가운데 5천여명이 전사했다. 

이 책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고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되는 기간을 주요 시기로 다룬다. 이를 통해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게 된 배경과 국내외 전개 상황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된 이유는 무엇이었나? 주한미군의 규모를 유지함으로써 북한에 대응하는 안보력 약화를 막기 위한 것, 한∙미 동맹에 대한 고려, 미국의 주한미군 및 한국군 감축 정책에 대한 대응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에 도덕적 측면을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세계적 차원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공헌한다는 것이다(P28).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국내는 반대 시위로 시끄러웠다. 주한 미 대사관은 이 시위로 한국 정부의 전복 가능성을 생각할 정도였고 중국이 핵 실험에 성공하면서 한층 더 위기는 고조되었다. 북한은 미국이 한국과 일본과 삼각 동맹을 형성하고 여기에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다면 자신들을 심히 위협할 거라 예측했다. 이 상황에서 미국 정부의 수장이 바뀌며(케네디->존슨) 한국 정부에 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냉전과 안보 위기, 한미동맹에 대한 정치, 군사적 이익이 아니었다면 파병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렇게 총 9년에 걸쳐 이루어진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한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베트남 파병 시기 동안 한국 경제는 국민총생산 연 평균 8퍼센트 이상의 가파른 성장을 기록했다. 전쟁 특수와 이를 통한 경제성장과 산업화는 박정희 정부가 국민의 동의를 구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 무렵 징병제가 강화되었고, 주민등록법이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다(이는 국가주의가 통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미군 감축을 위한 한국군의 현대화(무기 생산)가 이루어지면서 중공업 육성이 가능해져 한국의 산업 구조는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 공업 중심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베트남을 통해 서구의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 유입되어 장발이 유행했으며, 미니스커트가 등장했다. 트로트의 인기를 밀어 제치고 통기타 음악이 그 자리를 차지했고, 미국과 일본의 전자제품이 유입되었다. 중산층이 생겼으며, 한강 이남의 개발로 부동산 투기가 시작되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중심의 세계 경제 질서를 무너지게 했다. 전쟁비 지출이 급증하면서 달러는 더 이상 세계 유일의 기축통화 자리를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전쟁 반대 분위기가 전 세계를 휩쓸고 수정주의가 판을 치며 자유주의적 분위기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흐름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반전과 수정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가 태동한 것이다. 미국에는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면서 강한 아메리카를 외치게 되었고 일본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들어선 후 극우적인 역사 인식을 내비치면서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이루어졌다. 


미국은 처음으로 패배한 전쟁이었던 베트남전쟁을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전술로 싸운 전쟁으로 기억한다.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전쟁을 통해 일본이 전쟁 특수를 누리면서 경제 발전을 이룬 것처럼 한국도 베트남전쟁을 통해 이룬 경제적 발전에만 주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가는 동원했던 군인들에 대해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지 않았고 한국군이 민간인 학살을 감행한 일에 대해서 정부는 제대로 된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  


저자가 이 책을 낼 수 있었던 동력은 두 가지였다고 한다. 하나는 참전 군인들의 문제였다. 참전 군인들의 존재는 한국을 제외하고는 다른 나라의 어떠한 연구 성과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베트남에서조차 위령비와 증오비를 제외하고는 한국군에 대한 언급을 찾기 어렵다(P339). 둘째로 베트남전쟁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꿈으로써 한국은 다르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 사회는 범죄 행위를 미화하고 숨기는 일본의 극우 세력들과는 다르다. 한국은 지나간 역사에 대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성찰하는 시민사회를 갖고 있다(P340). 


오늘날에도 한국은 견고한 한미동맹을 내세우며 자유주의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의 안보 강화는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베트남 전쟁의 한국군 참전의 역사를 보면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문제들이 많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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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2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23 0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3-07-23 0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쟁을 반대하고 파병을 반대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힘 있는 나라 눈치를 봐야 한다니... 그 뒤에도 그런 일은 있었네요 베트남 전쟁에 나간 사람 많았네요 한국 정부는 거기 갔다 돌아온 사람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을 것 같네요 전쟁이라는 걸 겪으면 힘들 텐데... 그런 걸 생각한 건 얼마 되지 않은 듯도 합니다 한국군이 한 민간인 학살...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23 07:18   좋아요 1 | URL
그 때는 한미동맹이라는 명분도 그렇지만 안팎으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파병을 억지로 강행했다가 맞을 겁니다. 한국군 파병 숫자가 외국군으로는 가장 큰 것으로 알고 있어요. 거기서 죽을 고생을 하고 와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고엽제 등의 후유증으로 말도 못할 고통을 겪었을텐데 한국은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물론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한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사과가 반드시 있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