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어제 쓰려고 했던 글이었는데 글을 쓰다가 일에 붙잡혀 타이밍을 놓쳤다. 


주말에는 읽고 있던 책을 마무리하고 이후에는 쌓아두었던 학술지를 읽었다.


역사문제연구 52호는 이전과 출판사가 달라진 탓인지 알라딘에 검색해봐도 나오지 않는다. 이전 호들은 그래도 나왔는데 이제는 아쉽지만 글로만 언급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호 특집에서는 냉전사 중 미국에 의해 이루어진 대반란전에 대해서 다루었다.


대반란전은 냉전 시기 미국에서 저개발국가의 정부가 전복되지 않도록 한 다양한 조치와 작전을 일컫는다. 


냉전시기 미국은 소련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미국은 제3세계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면서 공산군의 게릴라전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 경험할 수 있었다. 1954년 미국의 사회학자인 밀리칸과 로스토우는 CIA 국장 덜레스(Allen Dulles)에게 ‘공산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이 단기적으로 필요하지만, 장기간에 걸친 개발과 협력이 궁극적인 대응책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근대화론이다. 대반란전은 앞선 군사작전과 개발에 의한 ‘재건’ 프레임을 결합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1960년대 케네디 정부는 제3세계에 적극적인 개발정책을 대외정책으로 삼고, 베트남에서는 대게릴라 작전을 전투에 적용하였다.


1961년 4월의 쿠바 침공은 아이젠하워의 후임자인 존 F. 케네디 대통령 아래에서 수행되었다. CIA는 1400명의 망명 쿠바인을 무장시키고 훈련시켰지만, 그들은 과테말라에서와는 달리 성공하지 못했다. 카스트로는 이미 쿠바군을 전면적으로 재건했고, 10만 명의 반정부 인사를 미리 구금했다. 게다가 기대했던 민중 봉기도 일어나지 않았다. 침략자들은 사흘 만에 비참하게 항복했다. 미국은 카스트로를 무너뜨리기는 커녕 오히려 그의 입지를 강화했다. 여러 남미 국가에서는 쿠바 혁명을 본받아 혁명 투사들이 게릴라 투쟁으로 넘어갔다. 미국의 대게릴라 작전 전문가에게 배우고 미국의 군사 지원금에서 재정 지원을 받기도 한 경찰과 군부대들이 게릴라들을 패퇴시켰다. 미국은 유럽 제국주의가 몰락한 후 그것을 대신해 제국주의 세계열강이 되었다는 비난을 들었다. [ 하버드 C.H.베크 세계사 1945 이후 - P81 ]


대반란전은 대한민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박정희는 1.21사태(김신조 청와대 습격 사건) 후 북한에 강력한 보복조치를 취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군사력 증강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이 요청은 들어주지 않고 대신 간첩 작전을 진행할 조직을 지원했다. 그 결과 특전사와 전투경찰대 등의 대간첩작전 부대들이 전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북의 남한 공격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가 선포되고 나서 이 부대는 시위 진압 부대로 변모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공격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부대를 지원함으로써 오히려 정부가 시민들을 무차별하게 잡아들이는 근거를 만들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다.


앞서 읽었던 역사비평 145호에서는 새로운 냉전사의 유형의 글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중 미국의 기독교들인이 냉전을 이용해 국가를 강력하게 결집시키면서 지금의 기독교 보수주의적 흐름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들은 정부를 압박하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채우기도 했다. 


얼마 전 정부의 필수의료 정책과 의과대학 정원 증원 발표 이후 의료계가 반발하며 들고 일어섰다. 사실 필수의료 정책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보는데 의대 정원 규모의 문제가 더 부각되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22513060001797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4022715511158723


과거 1971년에도 인턴과 레지던트의 파업 사태가 있었다. 당시 파업은 의료인력을 ‘해외여행 제한’으로 강력히 묶어두려는 국가의 통제에 대한 인력들의 전면적인 반발로 전국적인 연대 파업을 야기했다. 정부는 국가 인력 유출을 걱정했던 것이다. 해방 후 의학교육의 급진적인 변화와 졸업 후 교육 제도의 정착은 단기간에 이루어졌지만 양성된 전문 인력이 활동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는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와는 파업의 이유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지만 고령화되는 한국 사회를 생각하면 이 문제는 잘 정리되어야할텐데… 걱정이 크다. 


오늘 아침에는 '한국형 귀신고래'에 대한 기사를 보고 불과 이틀 전 읽은 내용이었음을 확인했다. 오래 전이었다면 놓치고 넘어갔겠지만 아니어서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귀신고래는 우리 학명이 붙은 전 세계 유일한 고래다. 1977년 한반도 바다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어졌는데 여전히 이 고래를 수소문해서 찾고 계시는 분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22611130004818


100여 년 전에 고래를 한반도에서 발견하고 전신뼈를 미국에 가져간 이가 있다. 뉴욕의 미국자연사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AMNH) 소속 보조 큐레이터(assistant curator)였던 로이 채프먼 앤드류스(Roy Chapman Andrews, 1884~1960)다. 그는 1912년 1월 한국의 울산 장생포에 있는 동양포경주식회사의 포경기지를 방문했다. 그는 이곳에서 약 7주 간 머물며 캘리포니아 연안에서는 자취를 감추어버린 회색고래가 있는지 조사했다. 앤드류스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1914년에 “캘리포니아 회색고래(THECALIFORNIA GRAY WHALE)”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한국 해역의 회색고래가 캘리포니아 회색고래와 같은 종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문상에는 '한국계 귀신고래'와 직접 연결될만한 표현이나 내용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2011년 5월에 울산 남구청은 장생포에 앤드류스 흉상을 설치한다. 비문에는 그가 회색고래를 ‘한국계 귀신고래(Korean Stock of gray whales)’라 명명하고 그 존재를 전 세계로 알렸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다가 연결되는 지점을 찾을 때 반갑다. 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상황이 과거에 있었다는 것, 여기에서 어떤 단서들을 발견할 때 위안이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것이 후속 공부로 이어진다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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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2-28 0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귀신고래라는 말을 보니 예전에 나온 우표가 생각났습니다 두 가지나 나왔군요 두번째는 기억나는데 첫번째는 예전에 썼는지 안 썼는지 생각나지 않네요 위에 건 전지고 밑에 건 낱장으로 된 거예요


희선



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sg/up20161028160612315.jpg
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sg/up20120112094507252.gif

https://img.khan.co.kr/newsmaker/961/20110906_961_46a.jpg

거리의화가 2024-02-28 08:58   좋아요 1 | URL
희선님 예전에 우표 모으신다고 했던 것 기억합니다. 올려주신 이미지를 확인해보니 굉장하네요! 우표 3가지 디자인이 저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덕분에 더 잘 기억할 수 있겠어요. 감사합니다.
 




[CH37] The New Universe

코페르니쿠스(Copernicus)는 지금의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태어나 천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Ptolemy)가 주장한 천동설을 반박하고 지동설을 주장했다. 사실 그가 주장한 개념은 과거 그리스의 천문학자였던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us)가 설파한 것이었으나 이론화하여 책으로 출판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천동설과 지동설은 상반된 개념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그의 학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가톨릭 교인이었는데 가톨릭계에서 지동설을 부정하고 나섰다고. 

갈릴레이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고, 기울어져 있는 피사의 탑을 보면서 의문을 품고 '중력'이란 개념을 생각해 낸다. 그는 세계를 구성하는 개념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최초의 근대 과학자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어서 사물을 확대하는 기능을 가진 망원경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는 Two Sciences를 출판하고 얼마 안 되 사망했다. 거기에는 오늘날 물리학 연구의 기반이 되는 근본 개념이 들어 있었다. 때문에 그는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로 명명되었다.


[CH38] England’s Greatest Queen

에드워드 왕자가 헨리 8세에 이어 불과 9살 때 영국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16살이 되자 몸져눕게 되었다. 의사는 온갖 치료법을 강구했으나(과학적으로 검증이 전혀 안 된 방법들) 효과를 보지 못했다. 에드워드에게는 여자 형제들이 있었는데 메리와 엘리자베스였다. 둘은 왕위를 놓고 경쟁한 끝에 메리가 승리했다. 메리는 엘리자베스를 런던탑에 가두었고 가톨릭으로 국교를 회귀하면서 프로테스탄트를 강력하게 탄압해서 원성을 쌓았다(300명이 넘는 사람을 화형에 처했다고). 엘리자베스는 몇 달간 런던탑에 갇혀 있다가 메리가 사망하면서 영국 여왕으로 등극한다. 그는 원래대로 프로테스탄트로 국교를 복귀시켰으나 종교를 가지고 탄압하지는 않았다. 의회는 그녀에게 결혼을 종용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메리가 스페인 왕자와 결혼해서 영국군이 스페인을 위한 전쟁에 투입되어야 해서 문제가 된 점을 생각했고 결혼을 하게 되면 그에게 권력이 주어질 것을 생각하여 하지 않기로 한다. 엘리자베스의 치세는 태평 성세였다. 때문에 그녀의 별명은 Good Queen Bess였다고.


[CH39] England’s Greatest Playwright

엘리자베스 여왕은 예술도 사랑했던 모양이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무척 좋아했다고. 셰익스피어는 엘리자베스가 왕이 된 뒤 6년 뒤에 태어났다. 그는 40개가 넘는 극을 썼고 450년 넘게 공연되었다. 대부분의 언어로 번역이 되고 영화화되었으며 책, 학교 교재로 나오기도 했다. 

멕베스는 3명의 여성으로부터 왕의 아버지가 된다는 예언을 듣는다. 왕은 던컨이었으니 예언대로라면 자신이 던컨을 죽이고 반역자가 된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애써 부인했다. 그러나 레이디 멕베스는 당신이 왕위를 받을 운명이라며 종용한다. 멕베스는 던컨을 죽이고 죽이지 않은 척 연기한다. 그러나 멕베스 부부는 이후 죄책감에 들어 악몽에 쫓긴다. 둘은 다시 예언자들을 찾아가지만 레이디 멕베스는 죽고 던컨의 사람들이 그를 공격하기 위해 오면서 자신의 종말이 왔음을 깨닫는다. 멕베스는 반역의 종말은 좋지 않음을 보여주는 연극이다.


[CH40] New Ventures to the Americas

스페인 제국은 미국 땅으로 판도를 넓혀가려 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보다 스페인이 더 영향력이 있는 국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영국 해적이 스페인 배들을 공격하는 것을 묵인했다. 영국인 월터 롤리는 미국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107명의 사람들과 함께 탐험을 나선다. 도착한 땅에 그는 버지니아라는 이름을 붙인다. 다만 버지니아는 무척 추운 곳이라 비옥한 땅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곳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 시도도 실패했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하녀 중 하나인 Bess Throckmorton과 사랑에 빠진다. Bess가 아이를 가지면서 분노한 여왕은 그들을 런던탑에 가둔다. 엘리자베스의 뒤를 이은 영국왕이 그들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남아메리카에서 금을 찾아오라 했지만 빈손으로 오자 롤리는 참수형에 처해졌다.

버지니아를 발견한 영국인들은 Roanoke Island(로어노크 섬)에 정착하려했는데 현지인들의 위협으로 영국으로 돌아가고 15명의 사람이 남았다. 롤리의 두 번째 버지니아행은 the Chesapeake Bay(체사피크만)으로 결정되었으나 갑작스런 돌풍으로 배에 있던 15명의 사람은 사라진다. 선장인 John White는 로어노크 섬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열악한 환경을 타개하기 위해 현지인들과 친해지며 고기를 잡고 곡식을 기르는 법을 전수받고 그곳에 정착하여 마침내 그들은 살아남는다. 그러나 John White는 자손들이 그곳에서 정착하기를 원치 않아 1587년 출발하여 3달 만에 런던에 도착한다. 하지만 영국과 스페인에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롤리는 남아메리카로 출발하여 어느 무인도에 도착한다. 나무에 새겨진 표식인 “Croatoan”이라는 단서를 보고 섬을 찾아 나서려했으나 허리케인으로 배에 있던 모든 이가 사망한다. 롤리는 영국으로 돌아왔고 그 이후에도 수많은 영국인들이 그곳을 향했으나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CH41] Explorations in the North

상인 John Cabot이 영국에서 출발하여 Newfoundland(뉴펀들랜드)에 도착한다. “I claim this land for England!” 그는 아시아로 가는 가장 짧은 항로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영국 어부들은 Cabot이 뉴펀들랜드에 대해 한 이야기를 기반으로 그곳에 오두막을 짓고 여름 내내 머물렀다. 소식을 들은 미국인 세인트 존스는 봄과 여름에만 뉴펀들랜드에 머무르며 고기를 잡고 생활했는데 겨울이 되면 물이 얼기 때문이다. 

프랑스 왕은 자크 카르티에에게 새로운 섬을 찾아내라는 명을 내린다. 그는 중국으로 바로 향하는 항로를 알고 싶어 했다. 현재 the Gulf of St.Lawrence(세인트 로렌스 만)이라고 불리는 곳에 갔고 현지인 Micmacs를 비롯한 친구들을 만난다. 이곳을 뭐라 부르냐는 말에 “cthe village”라는 대답을 들었고 이것은 캐나다라는 소리였다. 그래서 오늘날 이곳이 캐나다가 되었다. 카르티에는 원하던 중국에는 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캐나다를 발견했고 70년 뒤가 되면 프랑스는 캐나다를 년 안에 왕복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캐나다에서 프랑스어를 말하는 이가 많은 이유도 정착 인구들이 이 때문이다.


[CH42] Empires Colide

스페인 왕 필립은 영국 함선들이 스페인을 향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려 했다. 평화를 원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협상으로 무마했으나 필립은 이것이 눈속임인 것을 알아차린다. 필립은 마침내 130척의 함선에 Spanish Armada 군을 대동하고 전투에 나선다. 엘리자베스는 사촌인 Lord Howard을 해군 사령관으로, Sir Francis Drake를 부사령관으로 하여 영국군을 플리모스에 정박시킨 채 스페인 배를 기다린다. 스페인 배는 대규모 함선이라 컸지만 영국 배는 작지만 빨랐고 이동하며 총으로 공격하자 스페인 배는 구멍이 나기 시작한다. 영국군의 2배 규모였던 스페인군은 패배했고 이 전투 이후 영국은 스페인에 패권을 서서히 내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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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31] Exploring New Worlds

당시 인도로 향하는 것은 트렌드였다(음식이 빨리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후추 등의 향신료가 중요했기 때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남들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생각을 바꾸어 서쪽으로 향하는 것으로 하고 지도까지 제작한다.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왕, 프랑스와 영국 왕을 만나 투자 유치를 요청하지만 설득에 실패하고 마지막 스페인에서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에게서 허락을 받아 배를 살 돈을 마련한다. 그러나 오랜 선상 생활로 음식이 부족해지자 선원들은 괴혈병으로 상당수가 사망한다. 집에 돌아가자는 선원들의 아우성에 3일 동안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기로 하는데 다행히 2틀째 육지에 당도했다. 그곳은 금도, 후추도 없이 목화와 감자 같은 식물만 보이는 땅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땅은 인도가 아닌 플로리다였다. 5년 뒤 포르투갈 항해사인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를 지나 인도에 도착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콜럼버스를 질투해 스스로 항해를 떠났다(돈이 많은 귀족). 그는 콜럼버스처럼 아메리카 대륙에 닿았는데 이곳이 신대륙임을 확신했다. 유명 지리학자가 새로 발견한 땅의 이름을 그의 이름을 따 'America'가 되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콜럼버스의 항로를 그대로 따랐으나 폭풍우를 만나 한달 이상을 표류하다 갑자기 고요해진 너른 바다를 마주하며 편안해짐을 느낀다. 그곳이 태평양이었다. 마젤란과 선원들은 3달 이상의 항해 후 마리아나 제도에 닿았다가 물과 식량을 얻기 위해 필리핀까지 이른다. 그러나 마젤란은 현지 부족민에게 붙잡혀 사망하고 만다. 이후 남은 선원들이 배를 타고 인도에 닿으면서 마젤란은 인도까지 간 최초의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CH32] The American Kingdoms

중앙 아메리카에 최초의 거대 제국은 마야였다. 오늘날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 해당하는 곳이다. 마야의 왕은 권력이 무척 컸다고 한다. 부족 간 전쟁이 잦았는데 전투가 있기 전에 왕은 온몸을 뚫어 피를 내는 것으로 신에 대한 신념을 표시했다. 마야의 도시는 몇 백년간 잘 유지되었으나 거주민들이 늘어나며 음식이 부족해졌고 잦은 지진과 허리케인의 발생, 왕의 가혹한 정치 등 때문에 시민들의 이탈률이 급증하면서 도시가 정글화된다. 

아즈텍은 넓은 호숫가에 자리를 잡아서 땅을 건조하게 오랫동안 만드는 일에 공을 들였다. 그렇게 테노치틀란이란 도시가 건설되었다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이곳에 유입되며 도시의 규모가 커졌다. 운하가 건설되며 오가기가 편해졌고 호숫가라 도마뱀, 도롱뇽, 개구리, 생선알들을 요리해 먹기도 했다. 그들은 카카오를 초콜릿으로 만들어 최초로 브랜드화시킨 장본인들이다. 

남아메리카에는 잉카 제국이 있었다. 오늘날 페루 지역이 이에 해당한다. 쿠스코는 제국의 수도였다. 잉카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남기지 않았는데 역설적으로 콜럼버스가 방문했던 해에 왕이였던 Huayna Capac은 기록에 남아 있다. 당시 잉카 제국은 상품 무역으로 활발한 교류를 했다. 하지만 Huayna Capac이 죽자 쪼개진 왕권은 합쳐지지 못한채 제국의 힘은 약화되었다. 


[CH33] Spain, Portugal, and the New World

신대륙을 둘러싸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대서양에 앞다투어 배를 보내게 된다. 그들은 그곳에 새 도시를 건설하고자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es)를 보내 원주민들과 전투를 벌이게 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협상을 벌여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분할하는데 합의했다(자기들 맘대로 좌표 찍듯이 찍으면 자기 땅이 되는 참!). 이들은 효율적인 도시 건설을 위해 노예를 데려오는 것을 생각하여 처음에는 서아프리카에 있던 이슬람 상인으로부터 노예를 사서 보내다가 나중에는 직접 노예를 끌고 갔다(일부 모집도 있었겠지만 문제는 일방적으로 끌고 간 경우도 허다했다). 열악한 선상에서 그들은 햇빛도 보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신대륙에 도착하기도 전에 많은 노예들이 목숨을 잃었고 도착한 노예들 앞에는 가혹한 노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즈텍 제국에 코르테스를 비롯한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아즈텍 사람들은 그들을 방문자라고 여기고 환영했다(아즈텍인들은 말을 처음 보고 놀랐다고). 스페인 사람들은 8개월동안 호화로운 대접을 받다가 그마저도 지루해진 이들은 아즈텍인들과 싸움을 벌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아즈텍 인들은 분노에 차서 왕인 Montezuma에게 항의했고 그 과정에서 왕은 살해당한다. 아즈텍인은 스페인 사람들을 감금하고 얼마 후 시간이 지난 뒤 스페인인들이 주변이 조용해진 것을 확인하고 도망을 감행한다. 갑작스런 아즈텍인의 공격에 배에 마구 실은 금덩어리 때문에 무거워진 배는 가라앉고 코르테스와 몇 명의 스페인만 살아 남아 돌아간다. 하지만 코르테스는 포기하지 않고 새 사람들과 새 말을 준비한 후 테노치틀란으로 진군한다. 12개의 군함을 이용하여 드디어는 수도를 포위한다. 3개월 간의 전투 끝에 1519년 코르테스는 테노치틀란을 접수하고 중앙 아메리카에서 스페인 식민지의 역사가 시작된다.


[CH34] Martin Luther’s New Ideas

마틴 루터는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따라 교회가 원하는 것을 충실히 지키는 수도승이었다. 그는 수도승 생활을 한 지 5년이 지나 비템부르크 신학 대학에서 교수 역할을 하러 가게 되었는데 <the book of Romans>를 기반으로 학생들과 함께 연구를 하다가 기존에 자신이 가졌던 신에 대한 생각이 변화되는 경험을 한다. 그는 가톨릭 교회에서 신에게 죄를 용서하면 면죄부를 주는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비판한다. 그는 복음만이 답이다라고 이야기하며 1517년 10월 31일 95개의 면죄부 비판 목록을 내놓는다. 이는 가톨릭 교회가 옳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퍼지게 한다. 

1485년 헨리 튜더가 삼촌인 리차드를 죽이고 헨리 7세로 왕이 된 이후 그는 평화로운 왕위 계승을 위해 2살인 아더와 3살인 스페인 왕의 딸(캐서린)과 가상 결혼을 시켰다(진짜 결혼식은 각자가 16살, 17살이 되었을 때). 그러나 아서가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고열이 나 사망하여 남동생인 해리가 17살에 헨리 8세로 왕위를 잇는다. 헨리 8세는 왕위를 위해 캐서린과 결혼을 감행한다. 하지만 캐서린은 딸만 있었고 헨리 8세는 그녀와 이혼하기를 원했다. 이 때 헨리 8세에게 들어온 것이 마틴 루터의 교회 개혁이었다. 마침 귀족들도 헨리 편을 들면서 그는 캐서린을 보내 버리고 앤 불린과 결혼하고 영국 신교회를 만든다. 그런데 앤 불린도 딸(엘리자베스)만 낳아서 그녀를 참수시키고 Jane Seymour과 결혼하여 아들(에드워드)를 낳는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독일 공주인 Anne of Cleves 사진을 보고 그녀를 데려오게 한다. 그러나 사진과 실제 모습이 다르다는 이유로 고함을 친다. 여기에 어린 여성인 Catherine Howard와 결혼했지만 그녀 역시 참수시켰고 마지막으로 간호사인 Catherine Parr와 결혼한다. 나이든 헨리 8세를 돌보기에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왕이라지만 이렇게 마구 갈아치워도 되는 것인가, 죽은 이들은 무슨 죄인가. 


[CH35] The Renaissance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재탄생시키는 시기, 르네상스가 도래한다.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이론과 학설을 곳곳에서 받아들이게 되었고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물음에도 회의론이 일면서 인간 중심의 사고, 과학적 검증 방법이 흐름을 타게 되었다.

르네상스는 인쇄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작업이었다. 구텐 베르크는 금판을 만들어 글자들을 맞추어 넣고 잉크에 찍어내는 기술을 만들어낸다. 그는 더 나아가 포도의 압착 기술에서 착안하여 tin, lead, antimony를 조합하여 글자들을 만들고 유성 잉크를 제작하여 1년에 450개의 성경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는 영어로 된 역사와 시를 인쇄했고 체스 게임 메뉴얼을 최초로 인쇄하였다.


[CH36] Reformation and Counter Reformation

마틴 루터의 가톨릭 비판 이후 사람들은 성경에서 직접 성경에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톨릭 측은 이에 공포를 느꼈는데 진리는 보편성을 띄어야 하며(기준은 하나)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잘못 전달되는 가르침들이 있다 생각하여 경계한 것이다. 가톨릭은 루터파를 이단으로 선언하였다. 하지만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Augsburg Confession)이라는 문서가 나오자 일부 개혁파들은 기독교인의 신앙에 대한 교리로 생각하며 이를 받아들인다. 이들을 프로테스탄트라고 한다. 프로테스탄트는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스스로 이해해야 한다고 여겼다. 몇 백년이 지나는 동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신을 이해하고 숭배하는 방식을 놓고 계속 논쟁했다.

교황은 주교들을 이탈리아의 트렌트에 소집하여 1545년부터 18년 간 가톨릭 교회에 대한 대책 회의를 갖는다. 그들은 결과물인 트렌트 공의회 선언문을 발표하고 가톨릭 공식 독트린으로 삼았다. 이제부터는 주교가 되려면 신학교에 들어가 가톨릭 독트린에 따라 학습하고 훈련해야 했다. 여기에 맞서 루터파도 선언을 내놓으니 the Counter Reformation(반개혁)이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이후에도 싸움이 그치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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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당일이나 내일이 아닌 출고일'과 '품절'과 '절판'의 유혹에 흔들려 허겁지겁 책을 사들였다. 



이정우의 세계철학사 1, 2, 4권을 샀다. 4권이 알라딘의 새로 나올 책 리스트에서 슬그머니 빠져서 어떻게 된 건가 궁금해하고 있었다. 가능하면 국내 저자의 철학서를 읽고 싶은 마음이 커서 시리즈가 완간되면 사려고 기다리던 중이었다. 알림 설정을 해둔 덕분에 4권이 재입고되었다는 메시지를 받자마자 바로 결제해버렸다. 역시 이런 책은 사두는 게 답인가라는 합리화를 해 본다. 품절이나 절판은 왜 이리 빠른지. 3권도 이참에 재입고되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지난달 마지막 날 국역 금사 시리즈를 사들였다. 장바구니에 있은지 몇 달째였는데 볼 때마다 출고일이 점차 늦어지는 게 아닌가. '이러다가 책이 품절되면 안되!'하는 압박감에 결국 사들였다. 요사는 3권이지만 본기 자체도 분량이 길지 않은데 비해 금사는 열전의 분량이 많아서인지 4권이 꽉 들어차 있다. 결제해놓고 '너무 무리한 것 아니야?' 했지만 받아놓고 보니 든든하다. 여러 모로 도움이 될 책임에는 분명하니 마르고 닳도록 참고서로 잘 활용해보는 것으로 하려 한다. 내게 금나라의 역사는 김용의 소설 속 배경이다. 김용 소설이 재미나긴 하지만 그럼에도 정사도 잘 알아야하지 않겠는가. 11세기에 이어 12세기 금나라는 한반도의 고려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국가였다. '악비'와 '진회'는 소설을 읽으면서 알게 된 인물이다. 







벤야민 전집 중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흔히 〈역사철학테제〉로 알려져 있음)가 포함되어 있는 5권을 샀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는 벤야민의 마지막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이것부터 읽어보는데 당시의 배경을 잘 알지 못하니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아 듣기가 힘들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그러다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게 되었고 각주에 친절하게 앞 편의 글을 참고하라고 적혀 있었다.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는 모르는 인물과 역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읽어나갈 수가 있었다. 물론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 대해서 상대적인 것이다. 

벤야민은 보편적인 역사적 통용의 개념을 부정한다. 당시만 해도 19세기의 실증주의적 역사론이 대세를 이룰 때였는데 그는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대표적으로 역사의 사료는 검증 가능해야 한다 주장하는 명제 등등... 그런데 그 사료를 믿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지금은 19세기의 역사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많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그의 말을 사람들이 파격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총 18가지 테제(명제)인데 비슷하거나 기본을 심화한 확장 버전의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역사는 시간의 연속성 위에 놓여 있지 않고 특정 시점의 이미지나 사진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가장 놀라웠다. 사실 역사는 과거를 다루는 학문에 비판하거나 역사는 언제나 진보한다를 비판하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그는 역사의 연대기적 서술을 비판하는 것인가. 지금도 나는 내가 어느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고 여겨서 그 주장이 명확히 다가오지 않는다. 물론 과거의 나는 특정 시점의 이미지나 사진으로 볼 수 있을 따름이긴 하다. 더 나아가 미래를 내다보는 듯한 역사관도 있었다. 역사는 취사 선택된 사람과 기록만 들어 있을 뿐이므로 소수자의 이야기는 찾아 발굴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명제다. 이것은 지금 꽤나 대세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야금야금 전자책도 사들이고 있다. 《속자치통감》 시리즈와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 《귀신들의 땅》이다.

김승섭 교수의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를 읽으며 후속작으로 읽어보겠다 생각했던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는 이미 읽고 리뷰도 남겼다. 남은 책들도 조금씩 잘 읽어나가보아야겠다. 《귀신들의 땅》은 왠지 모르게 궁금해서 사 두었다. 내용이 모호할까봐 걱정은 되는데 까짓것 읽어보지 뭐.




사는 속도만큼 읽는 속도가 따라가야 하는데 힘에 부치는 것 같지만 언젠가는 다 읽겠지 하는 마음으로 합리화를 해 본다.



설 연휴 첫째 날 쌀국수를 먹었다. 연휴라 문 연 곳이 많지 않아 돌고 돌다가 이 집에 들어갔다. 알고 보니 맛집이었는데 나는 처음 갔던 곳이다. '오! 맛집일만하네.'했다. 양도 푸짐하고 가격대도 합리적이어서(소고기 쌀국수: 만원) 마음에 들었다. 사실 이 집은 '갈비 쌀국수'가 특별 메뉴라고 하는데 가격은 5천원 차이 난다. 나는 원래도 갈비를 안 좋아해서 깔끔하게 소고기 쌀국수를 시켰고 옆지기는 갈비 쌀국수를 시켰다. 갈비 쌀국수도 괜찮다고 한다. 




연휴 동안 빠짐 없이 한 것이 있다면 산책일 것이다. 이 곳은 신도시라 학교들이 많이 세워지고 있는 중이다. 3년 전 내가 이 아파트에 살러 들어왔을 때만 해도 이 학교는 없었다는. 어쨌든 요즘에는 학교를 보면 마음이 묘하다. 전날 드라마를 보다가 과거에 학교 다녔을 때 기억까지 거슬러 갔는데 그 기억이 셔터를 누르게 했던 것 같다. 과거의 학교 이름은 진작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막상 간다면 추억의 공간이 다 없어졌을까봐 겁이 나서 선뜻 가지 못하는 것 같다. 또 이미 먼 곳으로 이사를 가 버려서 가기도 쉽지 않아졌고(이제 공간조차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하늘 사진이 빠지면 섭섭하지^^ 낮에 산책하는 길은 이렇게 구름이 많았다. 지난 번에도 이런 비슷한 모양의 구름이 형성되었을 때가 있었는데 오늘도 그러했고 신기해서 찍었다. 마치 하늘에 연못 하나가 만들어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일상에서 이런 순간을 발견하는 일은 늘 경이로운 것 같다.





오늘은 금요일! 역시 그래서 뭔지 모르게 신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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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2-16 16: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 님은 급박하게 산 책이 아니라 절판 압박감에 책을 사시는군요!
전 요즘에 가격이 좀 생각보다 싼 책 있으면 바로 삽니다..... 이 책 재쇄 때는 틀림없이! 정가 인상하겠구나!!!!!! 싶어져서요. ㅋㅋㅋ

거리의화가 2024-02-16 17:38   좋아요 1 | URL
보통 사려는 책이 1쇄 이상 안 찍는 경우가 많아서인지 2~3년을 못 넘기고 품절이나 절판되는 경우가 많더군요.
말씀처럼 가격이 오를 뿐이지 내려가지는 않을테니 가능한 소장할 책은 미리 사둘수록 이득인 것 같습니다^^ 결국 살 핑계긴 하네요ㅋㅋㅋ

자목련 2024-02-19 16:58   좋아요 0 | URL
잠자냥 님, 재쇄 때는 틀림없이! 정가 인상할 것 같은 책, 알려주시면 안 되나요? ㅋㅋ

독서괭 2024-02-16 1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옷 제 눈에는 하늘 연못이 뿔달린 도마뱀으로 보입니다. 귀여워요 ㅎㅎ
절판 전에 사시는 현명한 화가님!!👍

거리의화가 2024-02-17 12:45   좋아요 1 | URL
앗! 뿔달린 도마뱀ㅋㅋ 그런 것도 같네요.
절판되면 더 이상 구할 수도 없고 그것 때문에 결국 온갖 도서관을 헤매게 됩니다. 그마저도 있으면 다행인데 없는 경우도 있어서 난감하더라는.

여울목 2024-02-16 2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정우님의 세계철학사 제4권이 언제 나오나했는데 이번에 나왔군요.
금사는 인물들이 낯설어서 도표를 만들어서 읽었습니다.명군인 금세종사후 대략 40년 만에 멸망할 줄 누가 알았을까요!
금나라의 최후는 장렬하다고 느꼈고,사관의 금 애종에 대한 평은 감명깊었습니다. 조선의 고종과는 대척점에 있는 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요사와 금사는 이미 오래전에 나왔으니 이제 원사가 나왔으면 좋겠네요.

거리의화가 2024-02-17 12:48   좋아요 0 | URL
세계철학사 4권 작년에 나온다고 하더니 계속 미뤄지다 어느새 사라져서 출판사가 안 내놓는것인가 걱정을 했더랍니다. 다행히 늦게나마 나와서 좋은데 3권은 품절이라... 재입고되면 좋겠어요.
금사 이미 읽어보셨군요^^ 원사는 많은 분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나오게 된다면 분량이 상당할 것 같습니다! 설사 늦어지더라도 꼭 나오면 좋겠네요.

단발머리 2024-02-17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절판 전에 서둘러 사시는 그 마음 너무 공감됩니다. 전, 거리의화가님이 사신 책들을 서둘러 사야한다는 절박감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늘 사진이 제일 예쁘네요. 쌀국수 사진 다음으로요^^

거리의화가 2024-02-17 12:50   좋아요 1 | URL
ㅋㅋㅋ 진짜 절판되면 답이 없어요ㅠㅠ 이거다 싶으면 꼭 미리 사두셔야 합니다. 살 책인지 애매한 경우는 희망도서로 도서 신청해놓고 읽어본 뒤 바로 구매하는 것도 방법이겠죠.
하늘 사진은 여러 버전이 있습니다ㅋㅋ 자주 찍어서 핸드폰의 70% 이상이 하늘 사진 같아요ㅎㅎ

자목련 2024-02-19 17: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 님은 책을 정말 꾸준하고 성실하게 책을 읽으시는 것 같아요. 저는 요즘 꽤가 나서...
최근에 어떤 소설을 읽다가, 아니야 하고 덮어두고 다른 소설을 꺼냈다가, 아니야 다시...
결국 세 번째 펼친 소설을 읽고 있는데...

거리의화가 2024-02-20 09:18   좋아요 0 | URL
저 이번 달은 은근 게으름 피우면서 읽고 있는 것 같은데... 기준이 저마다 다르니까요^^;
저는 원래도 여러 책을 읽는 편인지라... 이 유형의 단점은 완독하기까지 시간이 길어진다는 점이죠^^ 욕심이 많으면 이렇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언젠간 읽는다는 생각으로!ㅎㅎ

그레이스 2024-03-11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철학사 장바구니에 담으러 가요
저도 3권 나오길 기대합니다

거리의화가 2024-03-13 08:57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지난 주인가 3권 재입고되었다고 알림이 와서 저는 주문했어요. 참고하십시오^^

그레이스 2024-03-13 09: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아아, 앞으로 저는 어떻게 될까요, 제 운명은 대체 어떻게 전개될까요? 불확실한 내일과 보장 없는 미래, 그리고 앞으로 제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짐작도 할 수 없는 현실만 생각하면 전 괴롭기만 합니다. 과거는 돌이켜 보는 것조차 무서워요. 잠깐만 회상을 해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으니까요. 저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사악한 사람들 때문에 저는 앞으로도 수많은 세월을 울고 또 울어야겠지요. - P21


⟪가난한 사람들⟫에는 ‘가난’으로 비참한 현실에 미래를 꿈꿀 수 조차 없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당장 먹을 끼니를 걱정해야 하고 집세가 없어 내몰릴까 걱정해본 사람이라면 아마 주인공들의 상황을 쉽게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습기가 가득한 가을, 도시는 온통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날씨는 좋지 않고, 거리는 질퍽거리고, 도시엔 낯선 사람들의 무리만 가득했다. 그들은 불친절했고, 뭔가 못마땅해하는 것 같았고,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찌 됐건 우리는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식구들 모두 정신없이 분주했고 그렇게 새살림을 꾸렸다. 아버지는 항상 집에 안 계셨고, 어머니는 잠시도 편할 새가 없으셨다. 나는 모두에게서 완전히 잊힌 존재였다. 새집으로 이사 온 다음 날 아침부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우울하기만 했다. 우리 집 창문은 어떤 집의 노란색 울타리 쪽으로 나 있었고, 거리는 언제나 더러웠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그나마 가끔 보이는 행인들은 아주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렇게 추웠던 것이다. - P48


과거의 기억이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가난했던 시절의 기억은 슬픔의 무게가 커서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을 수 있다. 

부모님 집에 식구들이 모이면 과거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번 명절 때도 그랬는데 사실 나는 아픈 기억이라 되도록 그때 이야기를 안 했으면 하지만 부모님은 매번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어 놓는다. 과거의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희미해지고는 있어도 종종 몇몇 장면은 선명히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내 바보 같은 머리를 탓하며 가슴을 치곤 한다(한번 떠오른 기억은 수면 아래로 내려가기까지 시간이 걸리니까 말이다).

새벽부터 등교하여 몇 바퀴 미친 듯이 돌던 중학교 운동장. 역한 냄새를 풍기던 반지하의 집. 사람들로 북적이던 새벽 도매 시장.  물 비린내 나던 식당 등…


가난한 사람은 까다로워요. 가난한 사람은 보통 사람과 다른 눈으로 세상을 쳐다보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쳐다봅니다. 주변을 항상 잔뜩 주눅이 든 눈으로 살피면서, 주위 사람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씁니다. 누가 자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남의 말에 일일이 신경을 씁니다. - P162


돈이 없을 때는 그것 자체로 서러운데 사실 그것보다는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이어가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돈을 벌기 시작한 이후에도 수중에 돈이 없었던 적이 오랜동안 이어졌는데 모임 회비조차 없어서 몇 년간은 친구들과 연락을 아예 단절했었던 기억이 난다. 

독서든 문화 생활이든 기본적인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것임을 이해한다. 먹고 살 돈도 없는데 책을 살 수도 없을 뿐더러 그런 것을 할 시간조차 없음을 말이다.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재주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는 겁니다>라고 그는 말하겠죠. 하지만 그래요, 그는 거지입니다. 하지만 그는 존경할 만한 만한 거지입니다. 노동의 가치에 비해 돈은 조금밖에 못 벌지만, 아무에게도 굽실거리지 않고 먹을 것을 구걸하지도 않으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꽤 많습니다. [중략] 가난한 것이 죄는 아니잖습니까. - P220

<너 하나만을 위해 사는 것은 이제 그만해. 너는 가난한 구두장이가 아니잖아. 그런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너는 애들도 건강하고 마누라도 밥 달라고 보채지 않잖아. 주위를 한번 둘러봐. 좀 더 고결한 무엇을 찾아보라고!>라고 질책할 수 있는 사람이 부자의 옆에는 없단 말입니다. - P225


도스토옙스키의 이런 문장들이 나는 빛난다고 생각했다. 그저 개인 간의 사적인 대화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문장으로 당시 사회에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보여 준다고 생각해서다. 계급은 여전히 존재하고 빈부 격차는 지금도 존재한다. 개인 간에 도울 수 없다면 사회 제도가 이를 뒷받침해주어야 하는데 사회 공공망은 너무나 얕고 허술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읽은 ⟪백야⟫도 좋았는데 역시 이 작품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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