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31] Exploring New Worlds

당시 인도로 향하는 것은 트렌드였다(음식이 빨리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후추 등의 향신료가 중요했기 때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남들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생각을 바꾸어 서쪽으로 향하는 것으로 하고 지도까지 제작한다.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왕, 프랑스와 영국 왕을 만나 투자 유치를 요청하지만 설득에 실패하고 마지막 스페인에서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에게서 허락을 받아 배를 살 돈을 마련한다. 그러나 오랜 선상 생활로 음식이 부족해지자 선원들은 괴혈병으로 상당수가 사망한다. 집에 돌아가자는 선원들의 아우성에 3일 동안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기로 하는데 다행히 2틀째 육지에 당도했다. 그곳은 금도, 후추도 없이 목화와 감자 같은 식물만 보이는 땅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땅은 인도가 아닌 플로리다였다. 5년 뒤 포르투갈 항해사인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를 지나 인도에 도착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콜럼버스를 질투해 스스로 항해를 떠났다(돈이 많은 귀족). 그는 콜럼버스처럼 아메리카 대륙에 닿았는데 이곳이 신대륙임을 확신했다. 유명 지리학자가 새로 발견한 땅의 이름을 그의 이름을 따 'America'가 되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콜럼버스의 항로를 그대로 따랐으나 폭풍우를 만나 한달 이상을 표류하다 갑자기 고요해진 너른 바다를 마주하며 편안해짐을 느낀다. 그곳이 태평양이었다. 마젤란과 선원들은 3달 이상의 항해 후 마리아나 제도에 닿았다가 물과 식량을 얻기 위해 필리핀까지 이른다. 그러나 마젤란은 현지 부족민에게 붙잡혀 사망하고 만다. 이후 남은 선원들이 배를 타고 인도에 닿으면서 마젤란은 인도까지 간 최초의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CH32] The American Kingdoms

중앙 아메리카에 최초의 거대 제국은 마야였다. 오늘날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 해당하는 곳이다. 마야의 왕은 권력이 무척 컸다고 한다. 부족 간 전쟁이 잦았는데 전투가 있기 전에 왕은 온몸을 뚫어 피를 내는 것으로 신에 대한 신념을 표시했다. 마야의 도시는 몇 백년간 잘 유지되었으나 거주민들이 늘어나며 음식이 부족해졌고 잦은 지진과 허리케인의 발생, 왕의 가혹한 정치 등 때문에 시민들의 이탈률이 급증하면서 도시가 정글화된다. 

아즈텍은 넓은 호숫가에 자리를 잡아서 땅을 건조하게 오랫동안 만드는 일에 공을 들였다. 그렇게 테노치틀란이란 도시가 건설되었다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이곳에 유입되며 도시의 규모가 커졌다. 운하가 건설되며 오가기가 편해졌고 호숫가라 도마뱀, 도롱뇽, 개구리, 생선알들을 요리해 먹기도 했다. 그들은 카카오를 초콜릿으로 만들어 최초로 브랜드화시킨 장본인들이다. 

남아메리카에는 잉카 제국이 있었다. 오늘날 페루 지역이 이에 해당한다. 쿠스코는 제국의 수도였다. 잉카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남기지 않았는데 역설적으로 콜럼버스가 방문했던 해에 왕이였던 Huayna Capac은 기록에 남아 있다. 당시 잉카 제국은 상품 무역으로 활발한 교류를 했다. 하지만 Huayna Capac이 죽자 쪼개진 왕권은 합쳐지지 못한채 제국의 힘은 약화되었다. 


[CH33] Spain, Portugal, and the New World

신대륙을 둘러싸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대서양에 앞다투어 배를 보내게 된다. 그들은 그곳에 새 도시를 건설하고자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es)를 보내 원주민들과 전투를 벌이게 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협상을 벌여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분할하는데 합의했다(자기들 맘대로 좌표 찍듯이 찍으면 자기 땅이 되는 참!). 이들은 효율적인 도시 건설을 위해 노예를 데려오는 것을 생각하여 처음에는 서아프리카에 있던 이슬람 상인으로부터 노예를 사서 보내다가 나중에는 직접 노예를 끌고 갔다(일부 모집도 있었겠지만 문제는 일방적으로 끌고 간 경우도 허다했다). 열악한 선상에서 그들은 햇빛도 보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신대륙에 도착하기도 전에 많은 노예들이 목숨을 잃었고 도착한 노예들 앞에는 가혹한 노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즈텍 제국에 코르테스를 비롯한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아즈텍 사람들은 그들을 방문자라고 여기고 환영했다(아즈텍인들은 말을 처음 보고 놀랐다고). 스페인 사람들은 8개월동안 호화로운 대접을 받다가 그마저도 지루해진 이들은 아즈텍인들과 싸움을 벌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아즈텍 인들은 분노에 차서 왕인 Montezuma에게 항의했고 그 과정에서 왕은 살해당한다. 아즈텍인은 스페인 사람들을 감금하고 얼마 후 시간이 지난 뒤 스페인인들이 주변이 조용해진 것을 확인하고 도망을 감행한다. 갑작스런 아즈텍인의 공격에 배에 마구 실은 금덩어리 때문에 무거워진 배는 가라앉고 코르테스와 몇 명의 스페인만 살아 남아 돌아간다. 하지만 코르테스는 포기하지 않고 새 사람들과 새 말을 준비한 후 테노치틀란으로 진군한다. 12개의 군함을 이용하여 드디어는 수도를 포위한다. 3개월 간의 전투 끝에 1519년 코르테스는 테노치틀란을 접수하고 중앙 아메리카에서 스페인 식민지의 역사가 시작된다.


[CH34] Martin Luther’s New Ideas

마틴 루터는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따라 교회가 원하는 것을 충실히 지키는 수도승이었다. 그는 수도승 생활을 한 지 5년이 지나 비템부르크 신학 대학에서 교수 역할을 하러 가게 되었는데 <the book of Romans>를 기반으로 학생들과 함께 연구를 하다가 기존에 자신이 가졌던 신에 대한 생각이 변화되는 경험을 한다. 그는 가톨릭 교회에서 신에게 죄를 용서하면 면죄부를 주는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비판한다. 그는 복음만이 답이다라고 이야기하며 1517년 10월 31일 95개의 면죄부 비판 목록을 내놓는다. 이는 가톨릭 교회가 옳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퍼지게 한다. 

1485년 헨리 튜더가 삼촌인 리차드를 죽이고 헨리 7세로 왕이 된 이후 그는 평화로운 왕위 계승을 위해 2살인 아더와 3살인 스페인 왕의 딸(캐서린)과 가상 결혼을 시켰다(진짜 결혼식은 각자가 16살, 17살이 되었을 때). 그러나 아서가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고열이 나 사망하여 남동생인 해리가 17살에 헨리 8세로 왕위를 잇는다. 헨리 8세는 왕위를 위해 캐서린과 결혼을 감행한다. 하지만 캐서린은 딸만 있었고 헨리 8세는 그녀와 이혼하기를 원했다. 이 때 헨리 8세에게 들어온 것이 마틴 루터의 교회 개혁이었다. 마침 귀족들도 헨리 편을 들면서 그는 캐서린을 보내 버리고 앤 불린과 결혼하고 영국 신교회를 만든다. 그런데 앤 불린도 딸(엘리자베스)만 낳아서 그녀를 참수시키고 Jane Seymour과 결혼하여 아들(에드워드)를 낳는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독일 공주인 Anne of Cleves 사진을 보고 그녀를 데려오게 한다. 그러나 사진과 실제 모습이 다르다는 이유로 고함을 친다. 여기에 어린 여성인 Catherine Howard와 결혼했지만 그녀 역시 참수시켰고 마지막으로 간호사인 Catherine Parr와 결혼한다. 나이든 헨리 8세를 돌보기에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왕이라지만 이렇게 마구 갈아치워도 되는 것인가, 죽은 이들은 무슨 죄인가. 


[CH35] The Renaissance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재탄생시키는 시기, 르네상스가 도래한다.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이론과 학설을 곳곳에서 받아들이게 되었고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물음에도 회의론이 일면서 인간 중심의 사고, 과학적 검증 방법이 흐름을 타게 되었다.

르네상스는 인쇄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작업이었다. 구텐 베르크는 금판을 만들어 글자들을 맞추어 넣고 잉크에 찍어내는 기술을 만들어낸다. 그는 더 나아가 포도의 압착 기술에서 착안하여 tin, lead, antimony를 조합하여 글자들을 만들고 유성 잉크를 제작하여 1년에 450개의 성경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는 영어로 된 역사와 시를 인쇄했고 체스 게임 메뉴얼을 최초로 인쇄하였다.


[CH36] Reformation and Counter Reformation

마틴 루터의 가톨릭 비판 이후 사람들은 성경에서 직접 성경에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톨릭 측은 이에 공포를 느꼈는데 진리는 보편성을 띄어야 하며(기준은 하나)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잘못 전달되는 가르침들이 있다 생각하여 경계한 것이다. 가톨릭은 루터파를 이단으로 선언하였다. 하지만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Augsburg Confession)이라는 문서가 나오자 일부 개혁파들은 기독교인의 신앙에 대한 교리로 생각하며 이를 받아들인다. 이들을 프로테스탄트라고 한다. 프로테스탄트는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스스로 이해해야 한다고 여겼다. 몇 백년이 지나는 동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신을 이해하고 숭배하는 방식을 놓고 계속 논쟁했다.

교황은 주교들을 이탈리아의 트렌트에 소집하여 1545년부터 18년 간 가톨릭 교회에 대한 대책 회의를 갖는다. 그들은 결과물인 트렌트 공의회 선언문을 발표하고 가톨릭 공식 독트린으로 삼았다. 이제부터는 주교가 되려면 신학교에 들어가 가톨릭 독트린에 따라 학습하고 훈련해야 했다. 여기에 맞서 루터파도 선언을 내놓으니 the Counter Reformation(반개혁)이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이후에도 싸움이 그치지를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