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어제 쓰려고 했던 글이었는데 글을 쓰다가 일에 붙잡혀 타이밍을 놓쳤다. 


주말에는 읽고 있던 책을 마무리하고 이후에는 쌓아두었던 학술지를 읽었다.


역사문제연구 52호는 이전과 출판사가 달라진 탓인지 알라딘에 검색해봐도 나오지 않는다. 이전 호들은 그래도 나왔는데 이제는 아쉽지만 글로만 언급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호 특집에서는 냉전사 중 미국에 의해 이루어진 대반란전에 대해서 다루었다.


대반란전은 냉전 시기 미국에서 저개발국가의 정부가 전복되지 않도록 한 다양한 조치와 작전을 일컫는다. 


냉전시기 미국은 소련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미국은 제3세계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면서 공산군의 게릴라전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 경험할 수 있었다. 1954년 미국의 사회학자인 밀리칸과 로스토우는 CIA 국장 덜레스(Allen Dulles)에게 ‘공산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이 단기적으로 필요하지만, 장기간에 걸친 개발과 협력이 궁극적인 대응책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근대화론이다. 대반란전은 앞선 군사작전과 개발에 의한 ‘재건’ 프레임을 결합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1960년대 케네디 정부는 제3세계에 적극적인 개발정책을 대외정책으로 삼고, 베트남에서는 대게릴라 작전을 전투에 적용하였다.


1961년 4월의 쿠바 침공은 아이젠하워의 후임자인 존 F. 케네디 대통령 아래에서 수행되었다. CIA는 1400명의 망명 쿠바인을 무장시키고 훈련시켰지만, 그들은 과테말라에서와는 달리 성공하지 못했다. 카스트로는 이미 쿠바군을 전면적으로 재건했고, 10만 명의 반정부 인사를 미리 구금했다. 게다가 기대했던 민중 봉기도 일어나지 않았다. 침략자들은 사흘 만에 비참하게 항복했다. 미국은 카스트로를 무너뜨리기는 커녕 오히려 그의 입지를 강화했다. 여러 남미 국가에서는 쿠바 혁명을 본받아 혁명 투사들이 게릴라 투쟁으로 넘어갔다. 미국의 대게릴라 작전 전문가에게 배우고 미국의 군사 지원금에서 재정 지원을 받기도 한 경찰과 군부대들이 게릴라들을 패퇴시켰다. 미국은 유럽 제국주의가 몰락한 후 그것을 대신해 제국주의 세계열강이 되었다는 비난을 들었다. [ 하버드 C.H.베크 세계사 1945 이후 - P81 ]


대반란전은 대한민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박정희는 1.21사태(김신조 청와대 습격 사건) 후 북한에 강력한 보복조치를 취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군사력 증강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이 요청은 들어주지 않고 대신 간첩 작전을 진행할 조직을 지원했다. 그 결과 특전사와 전투경찰대 등의 대간첩작전 부대들이 전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북의 남한 공격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가 선포되고 나서 이 부대는 시위 진압 부대로 변모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공격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부대를 지원함으로써 오히려 정부가 시민들을 무차별하게 잡아들이는 근거를 만들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다.


앞서 읽었던 역사비평 145호에서는 새로운 냉전사의 유형의 글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중 미국의 기독교들인이 냉전을 이용해 국가를 강력하게 결집시키면서 지금의 기독교 보수주의적 흐름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들은 정부를 압박하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채우기도 했다. 


얼마 전 정부의 필수의료 정책과 의과대학 정원 증원 발표 이후 의료계가 반발하며 들고 일어섰다. 사실 필수의료 정책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보는데 의대 정원 규모의 문제가 더 부각되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22513060001797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4022715511158723


과거 1971년에도 인턴과 레지던트의 파업 사태가 있었다. 당시 파업은 의료인력을 ‘해외여행 제한’으로 강력히 묶어두려는 국가의 통제에 대한 인력들의 전면적인 반발로 전국적인 연대 파업을 야기했다. 정부는 국가 인력 유출을 걱정했던 것이다. 해방 후 의학교육의 급진적인 변화와 졸업 후 교육 제도의 정착은 단기간에 이루어졌지만 양성된 전문 인력이 활동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는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와는 파업의 이유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지만 고령화되는 한국 사회를 생각하면 이 문제는 잘 정리되어야할텐데… 걱정이 크다. 


오늘 아침에는 '한국형 귀신고래'에 대한 기사를 보고 불과 이틀 전 읽은 내용이었음을 확인했다. 오래 전이었다면 놓치고 넘어갔겠지만 아니어서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귀신고래는 우리 학명이 붙은 전 세계 유일한 고래다. 1977년 한반도 바다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어졌는데 여전히 이 고래를 수소문해서 찾고 계시는 분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22611130004818


100여 년 전에 고래를 한반도에서 발견하고 전신뼈를 미국에 가져간 이가 있다. 뉴욕의 미국자연사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AMNH) 소속 보조 큐레이터(assistant curator)였던 로이 채프먼 앤드류스(Roy Chapman Andrews, 1884~1960)다. 그는 1912년 1월 한국의 울산 장생포에 있는 동양포경주식회사의 포경기지를 방문했다. 그는 이곳에서 약 7주 간 머물며 캘리포니아 연안에서는 자취를 감추어버린 회색고래가 있는지 조사했다. 앤드류스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1914년에 “캘리포니아 회색고래(THECALIFORNIA GRAY WHALE)”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한국 해역의 회색고래가 캘리포니아 회색고래와 같은 종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문상에는 '한국계 귀신고래'와 직접 연결될만한 표현이나 내용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2011년 5월에 울산 남구청은 장생포에 앤드류스 흉상을 설치한다. 비문에는 그가 회색고래를 ‘한국계 귀신고래(Korean Stock of gray whales)’라 명명하고 그 존재를 전 세계로 알렸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다가 연결되는 지점을 찾을 때 반갑다. 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상황이 과거에 있었다는 것, 여기에서 어떤 단서들을 발견할 때 위안이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것이 후속 공부로 이어진다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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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2-28 0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귀신고래라는 말을 보니 예전에 나온 우표가 생각났습니다 두 가지나 나왔군요 두번째는 기억나는데 첫번째는 예전에 썼는지 안 썼는지 생각나지 않네요 위에 건 전지고 밑에 건 낱장으로 된 거예요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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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4-02-28 08:58   좋아요 1 | URL
희선님 예전에 우표 모으신다고 했던 것 기억합니다. 올려주신 이미지를 확인해보니 굉장하네요! 우표 3가지 디자인이 저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덕분에 더 잘 기억할 수 있겠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