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초겨울이 되니 어김없이 술병이 도졌다.
며칠 전 남편이 늦게 돌아오는 날은 초저녁부터 막걸리를 한 병 마시고 취해버렸다.
부산의 도서관 친구와 횡설수설 전화하다 밥을 한솥 태워먹었다.
온 집안에 밥 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당분간은 사용이 불가능해 보이는 압력밥솥의
시커먼 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 듯했다.
다음날은 또 퇴근하는 남동생에게 술을 사오라고 해 저녁 먹으며 한잔했다.
우리 동네 사께집 여자 이야기가 나왔다.
모두들 장사가 안 된다고 아우성인데 이 집은 여름이고 겨울이고 손님들로 바글바글하다.
손님들 각자가 자신은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하는
신기한 재주를 가진 여인.
최근에는 일본에서 유학중인 딸아이가 돌아와서 한달쯤 가게를 쉬어야겠다고 하더니
'내부수리중' 쪽지를 떠억하니 붙여놓고 두어 달 가까이 쉬었다.
이제 문을 열었겠지 하고 갔다가 두 번째 허탕을 쳤을 때는 짜증이 좀 났다.
며칠 전 딸아이가 하도 졸라 야밤에 어묵을 먹으러 갔더니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세계경기에서 금메달을 따고 돌아온 국가대표 선수를 환영하듯
그녀의 단골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조그만 가게 안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던 것.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녀는 2리터는 족히 되는 테이크아웃 박스에
주방에서 설설 끓고 있는 어묵 국물을 아낌없이 퍼담아 주었다.
물론 공짜로......
예의 그 어묵 국물을 한 숟가락 가득 떠먹으며 물었다.
"그 여자 아무리 봐도 대단하지 않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여름 어느 날의 일이다.
동생네 가족과 저녁을 먹고 나서 2치로 사께집에 갔더니 여자는 없고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이 기타를 들고 가게 밖 테이블에 모여 있었다.
주문을 받으러 온 청년에게 물었더니 자기는 아들인데 엄마가 생일을 맞아
생일선물로 가게를 하루 봐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친구들과 놀러가고 없고, 아들은 '이때다 !'하고
노래패 동아리 친구들을 부른 것이다.
청년들이 돌아가며 기타 치고 노래를 부르니 노는 거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
내 남동생이 가만 있을 리 있나.
우리 가족은 가게 바깥의 차들이 엉금엉금 달리는 길 옆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는데
동네의 먹자골목이 즉석무대가 되었다.
한여름밤, 동생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와 기타 연주가 온 골목에 울려퍼졌다.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누구의 머리 위에 이글거리나
피 맺힌 투쟁의 흐름 속에, 고귀한 순결함을 얻은 우리 위에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누구의 앞길에서 훤히 비치나
찬란한 선조의 문화 속에, 고요히 기다려온 우리 민족 앞에
숨소리 점점 커져 맥박이 힘차게 뛴다 이 땅에 순결하게 얽힌 겨레여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
사께집 주인 아들과 그 친구들이 손바닥이 터져나가도록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나도 주하도 동주도 상기된 얼굴로 박수를 쳤다.
동생은 앵콜을 받아 노래를 두 곡인가 세 곡 연달아 불렀다.
너무 길어서 두 번에 나누어 쓸랍니다.
저녁준비 관계로 나머지는 심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