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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기생뎐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평점 :
요즘은 읽는 책마다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올리는 리뷰마다 계속해서 별 다섯 개니 내가 너무 헤퍼졌나 하여 별 하나를 깎으려 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소설 뒤에 실린 작가의 말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소설은 소재가 작가를 선택했다.
기생들이 불현듯 나를 불렀고, 나는 그들이 불러주는 말을 받아 적었다.(254쪽)
살아 있는 캐릭터들을 따라 울고 웃게 되는 이런 소설을 읽으면,
소설가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뒤란의 꽃들도 '라도레미솔~' 계면조 음계로 진다' 는(이 기막힌 표현!),
이 지상의 마지막 기생집 부용각.
어느 날 지방 출장길에 해장할 식당을 찾다가 골목길에 낭자하게 흐르는 어느 여인의 소리와
활짝 핀 능소화에 홀려 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가 그만 20년을
아침마다 기생들 방 앞에 꿀물을 갖다바치는 삶을 택한 남자.
여덟 살에 권번에 입문, 그때부터 예순이 된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기생이 아니었던 때가 없었다는 소리 기생 오 마담.
'이것이다 저것이다 생각하지 않고 내 마음가는 대로 살았다'(218쪽)는 멋진 여인의
남자를 믿지 않으므로 모든 걸 다 줄 수 있었다는 기막힌 역설이라니!
기생집을 드나드는 정재계의 인사나 문화건달들, 그 중에서도 '자칭 사색형 인간'인
미스 민의 애인이나 '자칭 향토사학자 '같은 이중적인 인간들은 오 마담의 호기를
죽었다 깨어나도 흉내조차 못 낼 것이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이 소설 최고의 장면은 '소리 기생'으로 정식 입문하는 화초머리 올리는 날,
미스 민이 추는 살풀이춤.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듯 신명나게 섬세하게 또 에로틱하게 무려 3쪽에 걸쳐 묘사하고 있다.
기생 화초머리 올리는 날보다 내게 더 인상적인 장면은, 홍어와 돼지고기를 삶느라
쾌쾌한 냄새와 훈김으로 자욱한 부용각 부엌에서 어느 날 밤 타박네에게 일어났던 일.
이 기막힌 홍어삼합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며 기어이 주방까지 얼굴을 보러온 취한 남정네는
타박네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치한일까, 아니면 그 사건은 일생의 로맨스인 걸까?
그 남자는 기생집 주방장으로 늙고 있는 타박네의 홍어삼합을, 이를테면 그녀의 진면목을
한눈에, 아니 한입에 알아봐준 왕자님인가?
타박네와 오 마담의 잘 삭힌 홍어 같은 우정도 빠트릴 수 없다.
그리고, 부용각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어쩌면 이 땅의 마지막 기생이 될지도 모르는 미스 민이
자신의 어머니와 다름없는 오 마담에게 수치와 모욕을 준 손님을 대하는 태도를 보라.
--세상엔 못 참을 일도 못 볼 꼴도 없다.
모호하면서도 정확하게, 친절하면서도 심술궂게,
교활하면서도 솔직하게, 정중하면서도 무례하게,
민감하면서도 냉정하게 가는 것이 기생의 길일진대.(177쪽)
기생의 길뿐 아니라, 그것은 더듬더듬 내가 지향하는 길이기도 하다.
(내가 만약 영화감독이라면 <신기생뎐>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 텐데......
그리고 타박네 역할은 윤여정에게 맡길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