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부산에 다녀온 동생으로부터 아버지가 불면증으로 밤에 잠을 잘 못 이루시고
그 여파로 한쪽 눈에 염증이 생겨 안과 치료를 받고 계신데 별로 차도가 보이지 않아
불편하고 의기소침한 가운데 생활을 하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정도가 아니라 아주 내려앉았다.
무슨 생각이 그리 많아 잠을 못 이루시며 눈의 염증으로까지 나타났단 말인가!

친구분들 만나러 잘 나가지도 않으신다니 엄마 안 계실 때 식사는 어찌 하시나 하여
모 홈쇼핑을 샅샅이 뒤져 간단하게 해동하여 비벼 먹을 수 있는 비빔밥 세트와
봉지째 끓여 먹으면 되는 삼계탕을 몇 봉 주문해 보내드렸다.
워낙 효녀랑은 거리가 먼 인간이고, 해드릴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딸아이 키우고, 아주 가끔 아르바이트도 하고, 책도 많이 읽고, 그런데 뭔지 허방을 짚고 있는 듯
불안하고 외롭다.
새벽 다섯 시에 반짝 눈을 떠서 한참 동안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는 버릇까지 생겼다.
내가 이럴진대 우리 아버지의 불면증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엄마는 풀무원의 노인 공략 프로그램에 빠져서 그곳에서 사시는 눈치다.
밥도 거기서 해먹고 유흥도 하고 휴지뭉치나 프라이팬을 얻어 나르다보니
구석방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몇 푼 안되는 통장도 거의 바닥이 난 듯.

두 분이 서로 다정하게 위로하면서 재미나게 지내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젊었을 때 별로 정없이 지내던 부부가 어느 날 서로 늙어버린 것을 발견하고
연민에 가득 차서 상냥하고 그지없이 다정하게 대하며 지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부부라는 메커니즘에는 아주 견고한 그런 구석이 베이스로 깔려 있다.

"이 세상 언제 하직해도 난 상관없어, 그런데 지금 죽는다면 내가 좀 아깝군!"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런 생각을 한 자락 깔고  살다보니 도대체 인생에서
움켜쥐고 용을 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손바닥 안에 나도 뭘 움켜쥐게 된 건가?

아무튼 아버지의 불면증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아버지가 밤에 잠을 못 이루신다니,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는 일인데.....
무엇인가를 각오하고 산다는 것과 구체적인 현실 체험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허튼 생각과 말을 더욱 줄이고, 필요없는 일(적어도 그게 뭔지는 알겠다!)에는
마음과 시간을 쓰지 말며, 현재에 감사하며, 구체적인 일에 집중하자.

그런데 오죽잖은 그런 결심이 나는 왜 다소 서럽게 느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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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6-07-05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이리 글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인지...

건우와 연우 2006-07-05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날이 많지 않으신 부부는 다정해도 슬프건만 더구나 소원하다면야...
저희 친정부모님 얘기같네요...

2006-07-05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만두 2006-07-05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님도 하고 싶으셨던 취미같은 거 하심 좋을텐데요...

가랑비 2006-07-05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들수록 내가 약하다는 거 알게 되어 겁나지만, 한편으론 나만 그런 게 아냐 싶어 느긋해지기도 해요. 노령사회란 강한 이들의 힘이 아니라 "약한 이들 사이의 연대"가 중요해지는 사회라고,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희망이 있다고 어느 책에서 읽었거든요... 문제는 제가 "배려"와 "연대"를 잘할 줄 모르는 인간이란 거예요.

혜덕화 2006-07-05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님께서 우울해 하시면 마음이 참 무겁습니다. 동생이 아프고부터 저도 어머니 아버지의 한숨 소리를 자주 듣게 됩니다. 비 오거나 흐린 날, 아니면 연락 없이 잠깐을 찾아가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가능한 자주 찾아 뵙는 것이 가장 큰 효도임을 요즘 절감하고 있습니다. 멀어서 자주 가시지는 못하더라도 전화라도 자주 해 주세요. 아버님이 빨리 불면증을 벗어나기 바랍니다._()_

nada 2006-07-05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필요없는 일" 중에 혹시 서재 활동이 들어가나요? 그건 너무 슬픈데. 부부라는 건 정말 묘하더군요. 한껏 생각해주는 것 같다가도 영원히 녹여낼 수 없는 견고한 앙금이 있는 모양이어요. 무비님은 그래도 주하가 있는데 외로우실 일이 무어 있어요오오. 치! =3=3=3=3

날개 2006-07-05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들어서 부부끼리 마음맞게 재미나게 지내는 분들이 생각보다 참 적은것 같아요.. 난 나이들어서 과연 어떨른지.........

BRINY 2006-07-06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찾아온 졸업생 애가 '나이 들은 후를 생각하셔서 결혼하셔야죠'하던데, 그 '나이 들은 후'를 생각하면 더 부질없어보이는 게 결혼이라서요.

sandcat 2006-07-06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주변에도 "당장 오늘 죽어도 미련 없다."라고 얘기하는 매우 유능한 후배 하나가 있습니다. 그의 자기애가 결핍된 염세가 언젠가는 자신감으로 바뀌길 바랐는데 말이지요. 다소간만 서러워 하시고, 얼른 기운 내시길.

마태우스 2006-07-06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세상에서 받은 게 많아서 일찍 죽는다해도 별로 여한이 없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꼭 이런 말을 하지요. "한 2년은 더 살아야 한다. 할일이 있다." 그놈의 할일은 계속 있더군요...

로드무비 2006-07-06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한 2년은 더 살아야 한다, 라는 말이 왜 그리 우스운지.....
제 귀에는 20년으로 들려서요.ㅎㅎ
세상에서 받은 게 많다는 말씀이 듣기 좋습니다.^^

샌드캣님, 지금까지도 자신감으로 안 바뀌는데요, 뭐.
덕분에 기운은 벌써 차렸습니다. 불끈!=3

브리니님, 꼭 그렇게 생각하실 일도 아니예요.
마음 맞는 남자랑 지지고 볶으면서 한 지붕 밑에 살아보는 건
꼭 필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다소간 의지가 되는 것도 사실이고요.^^

날개님, 두 분이 사이가 무지 안 좋다는 건 아니고
좋은 편은 아니예요.
따로따로 외로워 하시는 게 눈에 보이니 안타까워서 그만.;;

꽃양배추님, 아니 그 대목에서 왜 서재가 나옵니까?
전 싫은 건 아예 상대 안하는 사람입니다.
이곳은 지금으로서는 거의 유일한 놀이터.
안 그래도 새벽 미명에 옆에서 주하가 자고 있는 얼굴 보며
위로를 받습니다.
그게 불끈, 의욕이나 힘으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혜덕화님, 합장 아이콘이 또 구체적인 위로가 되는군요.
전화라도 자주 걸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요.
무뚝뚝한 장녀의 역할에 워낙 익숙해서요.
하지만 님의 충고에 따르겠습니다.^^

FTA반대벼리꼬리 님,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게 정말
위로가 되기도 하더라고요.
치사한 인생 같으니라고!ㅎㅎ
배려는 좀 하는 편인데 연대 쪽이 어렵습니다.
혼자 팔짱 끼고 있을 때가 많아요.
벼리꼬리님의 말씀은 겸손 쪽으로 들립니다.^^

물만두님, 케이블로 바둑 보시고 인터넷으로 고스톱 치시고.
취미 프로그램이 좀 다양했으면 좋겠어요.

일단 출석하면 님, 전 사실 알라딘 서재활동도
노인공략 프로그램과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자신의 시간을 제일 맘 편하고 즐거운 곳에 갖다바치고 있다는 의미에서.
다들 자신의 시간을 견뎌내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적극적으로 만류하기도 힘들어요.
그래서 갑갑한 거고.;;

건우와 연우님, 살 날이 많지 않은, 이라고 하시니 섬뜩합니다.
무조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아웅다웅하시면서.^^

반딧불님, 어제 플라시보님 페이퍼 읽고 갑자기 뭔가 울컥,
이런 글이 쓰고 싶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