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김장김치를 형님 댁에 가서 얻어와 먹고 있다.
재작년부터는 나도 가서 일손을 보태긴 한다.
이번엔 60포기를 했는데,  형님네, 시집간 딸네, 그리고 우리 것과, 가까이 사는
우리 동생네 것까지 한 통.
(앗! 이 글을 쓰다보니 동생네 김치까지 얻어와 먹는 주제에 내가 형님에게
너무 인색했다는 데 생각이 미치네. 이런 것이 바로 글의 효용.)

그런데 절인 배추가 60포기쯤 되다보면 온갖 젓갈을 넣어 만든 양념이 모자르게 마련이다.
절반쯤 버무렸을 때 맨 처음 형님이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양념이 떨어져 간다는 걸 알았다.
형님은 다시 남은 젓갈과 고춧가루, 파 등을 섞어 새 양념을 만드시고.....
난 아무 생각 없이 배추를 버무리다가 문득 처음양념으로 버무린 김치가
아무래도 더 맛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재료가 더 많이 들어갔으니까!

그래서 준비해간 김치냉장고용 김치통을 조금 남은, 처음양념으로 무치고 있는 형님께
비굴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내밀었다.

"형님, 헤헤, 처음양념으로 한 게 더 맛있을 것 같아서 우리도 한 통......"

막내동서라고 나를 무지 이뻐하시는 형님이 눈을 흘기며(입가엔 미소를...)
나의 요구대로 막 버무린 김치를  가득 담아 주셨다.

그리고 부랴부랴 있는 재료만 넣어 마련한 두 번째 양념으로 담은 김치를 세 통,
모두 해서 네 통을 얻어왔다.
그런데 문제는 첫번째 양념으로 만든 김치가 들어 있는 제일 큰 통을 동생네에게 줘버린 것.
김치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말하며 도로 달라고, 바꾸자고 할 수도 없고.
'에라, 내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하고 넘어갈 수밖에.......

겉절이를 바께스로 담아온 걸 임시로 먹다가,  잘 익은 김장김치를 한 통씩
야금야금 꺼내 먹다보니  김치냉장고 속에는 김치가 딱 한 통이 남았다.
그리고 봄이 왔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내가 야심만만하게 꼬불쳤던, 온갖 젓갈이 들어간 동생네 김치는 맛이 좀 혼탁하고 쓰겁고,
남은 재료로 대강 버무린 우리집 김치는 그렇게 시원하고 맛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동생네에서 저녁을 먹으며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내심 얼마나 놀랐던지......

어쩌면 인생은 전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인간관계도 포함된다.
순한 얼굴로, 마음 가는 대로 살다보면, 예상치 못한 맛난 김치를 또 선물받을지도.......
아니면 말고!

(결론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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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3-22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 결론이 웃기잖아요.

mong 2006-03-22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면 말고!
으하하하

로드무비 2006-03-22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생각해도 웃겨요. 블루님, 몽님......^^
(말은 저렇게 하지만 맛난 김치에 집착합니다.)

라주미힌 2006-03-22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김치가 땡겨요... 볶음밥과 함께 먹으면.. 쩝쩝

Mephistopheles 2006-03-2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발적이더라도~~ 뽑기의 달인이신 겁니다..

로드무비 2006-03-22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제가 착해서 상을 받은 게 아니고?=3=3=3

라주미힌님, 점심으로 드세요. 그렇게......^^

paviana 2006-03-22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우리 입이 봄이 되었다고 알려주는것 같아요. 겨울내내 젓갈 많이 들어간 김장김치 먹다가 봄에 겉저리 먹으면 맛있잖아요.ㅎㅎ
저희는 김장 담글때 젓갈 많이 들어간거 (이건 나중에 먹을거) 조금 들어간거 나눠서 담그는데 먹을때는 그냥 순서고 모고 아무생각없이 먹어요.

로드무비 2006-03-22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아나님, 그런 부분도 있겠군요.
그런데 맛의 차이를 확인한 건 설에 형님댁에서
김치를 먹어보고, 또 한참 전 동생네 식탁에서였어요.
ㅎㅎ 나름대로 생각해서 눨 한다고 하는데 나중에 보면
다 까먹어요.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까지......
그래서 재밌는 거지요.^^

반딧불,, 2006-03-22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하여간에 님의 글솜씨에는^^
맞아요. 이상하게도 신경을 쓰면 음식이 더 맛없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너무 잘하려고 하면 더 안되구요. 이건 모든 세상살이에 해당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맞더라구요.

이상하게 똑같은 김치도 제각각 맛이 나는 것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친정에서 김장을 네 집으로 보내걸랑요;;; 헌데 다 틀려요.맛이^^
제일 맛있는 것은 친정 뒤란에서 익은 진짜 김장김치!!!!

2006-03-22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6-03-22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전력을 기울인다고 해서 꼭 결과가 좋은 건 아니겠죠..^^
근데 전 뜬금없이 전력을 기울여 김치를 담고 싶어지네요.
재료를 고르고 애써서 김치통에 채워놓은 후 잘 익기를 기다리던 그 설레임이 그리워집니다.

sooninara 2006-03-22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어머님은 젓갈 팍팍...
친정어머님은 젓갈 하나 넣고 시원하게..
전 친정쪽것이 더 좋아요^^
로또보다 더 잘 뽑으셨네요. 축하

로드무비 2006-03-22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저도 패스하는 것 무지 많습네다.^^

사야님, 지난주엔 내 손으로 세 번째 김치를 담았어요.
정확하게는 겉절이.
모양도 맛도 훌륭하여 스스로에게 감탄했답니다.
뻔뻔한 남동생 왈, 이제 우리(!)도 김치 담가 먹자.ㅎㅎ
앞으로는 김치도 가끔 만들어 먹을 생각이에요.
(전 두 번 계속 실패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포기하는 습성이 있어요.
부끄러운 말이지만.)

속삭이신 님, 전 제 방이 너무 흥청망청해 보이는 게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좀 미안했어요.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나 자신에게만 미안하면 되더군요.
그런 생각 자체가 오만한 것이고, 사람들은 각자의 기분과 사정 속에서
알아서 살아가는 거잖아요.
그리고 마지막 말씀엔 노코멘트입니다. 저도 히히~

반딧불님, 정말 신기한 노릇이지요?
생각해 보면 친정 뒤란만한 김치냉장고도 없어요.
우와, 써놓고 보니 너무 멋진 표현이다.=3=3=3






로드무비 2006-03-22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나라님, 이것저것 젓국 많이 든 김치는 맛이 진하고 구수해서 좋고,
새우젓만 넣은 김치는 또 깔끔하고 시원해서 좋아요.
맛이 너무 탁하지만 않으면 다 좋아요.
그리고 아무래도 자라면서 먹은 엄마표 김치가 입에 더 맞는 건
당연한 사실이겠지요?

merryticket 2006-03-22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오한 결론이십니다..

조선인 2006-03-2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묵은지가 먹고 싶어요. 엉엉엉.

blowup 2006-03-22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처럼 대충 사는 사람한테는 오히려 다행인 세상 이치입니다. 승부가 아니라 뽑기가 필요할 때도 있어요. 고마운 로드무비 님.

날개 2006-03-22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이 보관을 잘 하신걸지도.....^^

rainy 2006-03-22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론 아주 멋진걸요.. 인생이 공평하다는 안심도 되고 ^^

로드무비 2006-03-22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그럴지도.
(사실 내가 한 거라곤 김치냉장고에 넣어둔 것밖에 없는데.ㅎㅎ)

namu님, 고맙다고까지 하시니, 님의 대충이 어느 정도인지
살짝 짐작이 갑니다.
같은 종끼리의 감지력이죠.^^

조선인님, 가래떡 먹고 싶으시다더니 오늘은 묵은지.ㅎㅎ
오늘 저녁에 드세요.
우리 동네에도 '떡삼겹과 묵은지'라고 식당이 하나 생겼더라고요.^^

올리브님, 제가 좀 심오합니다. 헤헤=3=3=3

로드무비 2006-03-22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니님, 바뀐 서재 이미지 멋집니다.
자기 마음 편한 대로 사는 거죠, 뭐.
더러 진실을 날조(?)하더라도...^^

박예진 2006-03-22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오늘 학교에서는 굴이 너무 먹고 싶어가지고 여자애 1명 남자애 1명과 굴타령을 했어요. 굴이 들어간 김치,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굴....으으윽 ㅠ.ㅠ
근데 지금은 아주 맛있는 김치를 먹고 싶네요! 김장김치요 ~~
흠 ! 그리고 로드무비님 ! 저 이벤트해요~시간 나시면 꼬옥!놀러오세요~~:)

조선인 2006-03-22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떡삼겹과 묵은지!!! 아, 제가 바란 메뉴인가봐요. 침만 꿀꺽.

2006-03-22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dan 2006-03-22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세상 잘 못 한거 없이 살아도 악수를 뽑아들고 낭패인 경우도 종종 있잖아요. ^^

플레져 2006-03-23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말씀에 올인이에요.
얼마전, 야구도 그랬잖아요...훗~
보관을 잘 하셨다는 거에도 한 표 ^^

로드무비 2006-03-25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뭐 전 항상 그런 자세로 살고 있으니까요. 헤헤~

수단님, 악수를 뽑아들고 낭패라, 물론 그런 경우도 있지요.
그래서 어쩌라고요.=3=3=3

4학년 1학기님, 무 물론 졸업하셔야죠.
송구스러워 할 필요 조금도 없습니다.
님의 인사 너무 반가웠어요.^^

조선인님, 묵은지와 삼겹살, 가래떡 드셨나요?
혹 못 드셨으면 오늘 내일 주말이니까 꼭!^^

박예진양, 어머 굴을 좋아한다니 너무 예뻐요.
캡쳐 이벤트에 도전해 볼까요? 불끈.=3
(<책만 읽는 바보>는 저도 탐나서...)
혹시 깜빡하고 참석 못하더라도 너무 서운해 마시고요.^^

치유 2006-03-28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솜씨가 정말 대단하시네요..푹 빠져버리겠는걸요??
그나 저나 김장 김치 너무나 먹고 싶네요..시원한 걸로.........저희는 그 시기에 이사하고 어쩌다 보니 김장을 못하고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얻어다 먹었는데요..올 가을에는 맛있게 담아보려구요..김치냉장고에 김치가 가득이면 주부는 든든한데..텅 빈 김냉....흑!~슬퍼..

소단 2006-03-31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우깡을 맛나게 먹고 있었는데 님 글을 읽다보니 속이 넘 느끼해져서 막 김치 한조각 먹고 왔습니다..근데 이 김치가 묵은 지라 엄청 시네요..사먹는 김치가 나쁘다고 매스컴에서 떠들어댈때만 빼고 김치를 사먹고 있습니다.. 김치 담그기가 하도 번거로와서 말이죠.. 님글을 읽으니 굴이랑 조개젖 듬뿍 넣은 김치가 넘 먹고싶네요..